스탈린그라드 전투 80주년 趙甲濟
지난 2월2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독일군이 항복한 80주년이었다. 제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전장 스탈린그라드는 흐루시초프 시절에 볼고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역사상 최대규모의 이 전투는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과 겹친다. 침공받은 우크라이나가 1943년의 러시아이고, 침공한 러시아군이 그때의 나치독일군이다. ////////////////////////////////////////////////////////////////////////// 世界史 최대규모의 전쟁은 獨蘇(독소)전쟁 최근 TV로 1993년 독일에서 만든 영화 '스탈린그라드'를 보았다. 이 유명한 전투 60주년을 맞아 제작된 영화였다. 독일군 시각에서 만든 전쟁 드라마인데, 전투장면이 실감 났다. 2003년 러시아에서 만든 '스탈린그라드'는 3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68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러시아 영화로는 해외 수입이 가장 많은 축에 들었다. 2001년 미국에서 만든 '에너미 에트 게이트'는 조셉 피네스, 주드 로, 에드 해리스가 출연, 9700만 달러를 벌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저격수들 이야기이다. 스탈린그라드의 공장과 건물 하나 하나가 戰場이었다. 건물 2층과 3층의 대결이거나, 공장 내에서 격돌하였다. 인류역사상 최대규모의 전투였으며 그 영향력도 세계적이었다. 영화로는 도저히 그 규모와 심도를 잡아낼 수가 없다.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이 100개 사단을 동원,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시작된 獨蘇 전쟁은, 독일군이 붙인 암호명이 ‘바바로사’였다. 神聖(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인데, ‘붉은 수염’이란 뜻이다. 이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死傷者(사상자)가 많았다. 양쪽 병력이 많을 때는 천만 명을 넘었고, 양쪽 戰死者(전사자)는 300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2000만 명이 소련군과 민간인, 1000만 명은 독일과 동맹국 군인 및 민간인들이었다. 2차 대전 전체 戰死者는 민간인들을 포함, 7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人命(인명) 손실이 컸던 것은, 독일과 소련이 악마적 이념으로 무장한 체제였기 때문에 人命을 무더기로 희생시키는 작전을 편 탓이다. 민간인들도 敵(적)으로 간주, 학살하였고, 포로도 예사로 죽였다. 소련 영토에선 독일군이, 독일영토에선 소련군이 학살, 강간, 약탈을 자행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군인들 앞에서 유대인들과 여성들이 특히 많은 피해를 보았다. 미국의 보수파는, 스탈린과 히틀러가 모두 惡黨(악당)이니 양쪽이 싸워서 한 쪽이 망하고 다른 쪽이 지쳐 있을 때 그를 공격하면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소련 지원을 반대하였다. 900일간 계속된 소련의 옛 首都(수도) 레닌그라드 포위로 120만 명의 시민들이 주로 굶어죽었다. 開戰(개전) 4개월 만에 소련군 400만 명이 戰死, 부상, 포로 신세가 되었다. 아무도 소련이 살아날 것이라고 보지 않았으나 비와 눈, 그리고 T-34 전차가 그들을 살렸다. 가을비는 도로를 진흙탕으로 만들어 독일이 자랑하는 戰車軍團(전차군단)의 進軍(진군) 속도를 늦추었다. 이어서 찾아온 눈보라는 겨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독일군을 얼어붙게 하였다. 이때 추운 날씨에 잘 견디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의 크렘린 첨탑이 보이는 교외까지 진출하였다가 패퇴하였다. 구조가 간단하고 고장이 잘 나지 않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T-34 전차가 독일군을 괴롭혔다. 소련은 전쟁 전에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므로, 시베리아 주둔군을 뽑아 對獨(대독)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스탈린이 건설한 중공업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 독일의 무기생산을 압도하였다. 미국도 전폭적으로 소련을 지원하였다. 독일군이 破竹之勢(파죽지세)로 소련군을 깨는 것을 본 일본은 자신들에 대한 석유봉쇄작전을 시작한 미국과 결전을 벌이기로 작심한다. 이렇게 하여 1941년 12월7일의 진주만 공습을 신호탄으로 태평양 전쟁이 開始(개시)된다. 1942년 8월, 볼가강에 면한 공업도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한 독일군의 공세는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을 맏았다. 여섯 달에 걸친 시가전으로 스탈린그라드는 폐허가 되었고, 독일군이 이 도시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을 때 소련군에 의하여 역포위를 당하였다. 1943년 2월2일 포위된 독일 제6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투로 쌍방은 약 200만 명의 戰死傷者를 냈다. 세계전쟁사상 가장 컸던 전투이다. 독일군(이탈리아 등 親獨 연합군 포함)은 약104만의 병력에 1만 문의 대포, 732대의 전투기, 500대의 전차를, 소련군은 114만에 1만3000대의 대포, 1115대의 전투기, 894대의 전차를 투입하였다. 1942년 11월말 폐허가 된 스탈린드라드에서 역포위된 독일의 제6군은 26만5000명이었으나 이듬해 2월 초 항복할 때는 9만5000명으로 줄었다. 이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는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5000명에 불과하였다. 독일 제6군의 사령관 파울루스 원수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으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 항복하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지휘한 주고프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영국의 몽고메리와 함께 유럽의 2차 대전을 대표하는 名將으로 꼽힌다. 공산당 정치국을 대표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정치부문을 지휘한 이는 나중에 수상이 되는 흐루시초프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不敗의 신화가 깨지면서 守勢로 전환한다. 소련군은 자신감을 회복, 공세로 이전한다. 독일군은, 1943년 여름 쿠르스크에서 벌어진 사상최대 규모의 탱크전에서 이기지 못하였다. 전쟁의 주도권은 더 확실하게 소련으로 넘어갔다. 소련군은 그 후 2년간 독일을 향하여 천천히 밀고 들어간다. 1945년 초 폴란드 바르샤바로 입성한 소련군 병력은 250만 명에, 탱크가 6250대, 비행기가 7500대, 야포가 4만1600문이나 되었다. 병력과 무기 등 물량 면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늘 세 배 이상 많았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면서 질서 있게 퇴각하였다. 히틀러는 소련을 무너뜨린 다음에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흡수하고 슬라브 사람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하거나 아리안족(독일민족)에 봉사하는 노예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처럼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와 어머어마한 자원에 짓눌려 최후를 맞았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전쟁으로 美英(미영) 연합군이 서쪽에서 독일을 쳐올 때도 독일군은 全 병력의 70%를 동부전선에 배치, 소련과 싸웠다. 2차 대전의 主戰場(주전장)은 獨蘇전장이었다. 2차 대전 때 인명손실을 가장 크게 본 나라는 소련으로서 2000~3000만 명이 죽었다. 이런 희생을 치르고 얻은 東歐(동구)의 여러 나라들-동독, 체코, 헝가리, 발틱 3국,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소련은 對獨 전쟁을 승리로 끝낸 다음 1945년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8월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사키에서 原爆(원폭)을 맞은 일본은 15일 항복하였다. 한반도로 밀려 내려오는 소련군은 부산까지 갈 수 있었지만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38도선에서 멈췄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70여년 전 獨蘇 전쟁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