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아름다움
아 8:5-14
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9 그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10 나는 성벽이요 내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가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12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열매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13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아 8:5-14 / (아가씨들) 사랑하는 임에게 바싹 기대어 광야에서 올라오는 저 아가씨는 누구인가?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여라] (신부) 여기, 사과나무 아래에서 나 그대를 흔들어 깨웠네. 그대 어머니 그대를 낳은 곳 그대 어머니 그대 낳느라 고통당한 곳. 6) 그대 가슴 끈에 인장반지를 달고 다니듯 그대 마음에 나를 꼭 품어 주세요. 그대 팔에 띠를 꼭 매고 다니듯 그대여, 내 사랑 나를 꼭 그렇게 안아 주세요. 그 누가 죽음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무도 죽음을 건너뛸 수 없지요. 죽음은 그 누구도 놓아 주지 않아. 아, 사랑도 사랑도 그러하지요. 그 누구가 이 사랑을 어찌할까요? 불같이, 맹렬한 불꽃같이 타오르는 시새움. 7) 이 맹렬한 사랑의 불을 그 어떤 물로 끌 수 있을까요? 홍수라 해서 그 사랑을 쓸어 갈 수 있을까요? 가지고 있는 온 재산 다 팔아 이 사랑 사겠다 나선다 해도 어느 누가 이 사랑 얻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부끄러움만 살 뿐 멍청이란 소리밖에 더 들을까요? 8) [걱정스러워하는 오빠들] (신부 오빠들) 나이 어린 우리 누이 아직 젖가슴도 부풀지 않았는데 젊은 청년 다가와 우리 누이 유혹할 때 우리는 어찌할까나? 9) 누이가 성벽이라면 누이 위해 우리는 은망루를 쌓아 올리리라. 누이가 대문이라면 우리는 송백 판자로 둘러싸리라. 10) (신부) 나는 든든한 성벽이어요. 내 젖가슴 그 망루 같아요. 내 임 보시기에 난 한없이 기쁨 흘러 나오는 샘물 같아요. 11) [솔로몬보다도 더 행복한] (신랑) 바알하몬 비탈에 솔로몬 임금의 포도원이 있지요. 그 포도원 빌려서 농사 짓는 농부들, 그 열매 거둬들여 은 천을 솔로몬에게 바친다네. 12) 솔로몬 임금은 기꺼이 그 은 천을 받이들이겠지. 농부들 몫으로는 은이 한 이백이나 돌아갈까 몰라. 하나 나에겐 내 소유인 포도원이 있다오. 13) [사랑의 달리기] (신랑) 동산에 있는 그대여 친구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듣게 해주어요. 그대 목소리. 내 사랑, 그대 있는 곳으로 나오라고 불러 보세요. 14) (신부) 어서 오세요. 빨리 오세요, 내 사랑 그대여. 향기로운 약초들 자라나는 이 산 저 산으로 재빨리 뛰어다니는 노루처럼 사슴처럼 어서 오세요. 어서 빨리 오세요. 그대 내 사랑아!
신랑과 신부는 술람미 여인의 고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본문은 이때를 회상하며 사랑의 강력한 힘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을 서로에게 화답하며 노래합니다.
거친 들에서(5) 고향 사람들이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술람미 여인을 보며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왕의 신부가 된 술람미 여인의 신분 변화에 감탄했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은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랑은 이때를 기억하며 흐뭇해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난 첫사랑의 때를 회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인에서 의인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6-7) 도장이 한 사람의 권세나 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증하는데 중요한 것처럼 신부는 신랑에게 자신을 도장같이 귀한 존재로 여겨 줄 것을 요청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살아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강력한 죽음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소멸되지 않는 불과 같은 뜨거운 사랑이 여호와의 불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은 강한 힘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놓으신 불같은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8-9) 본 단락은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들은 술람미 여인이 결혼하기 전까지 동생을 보호하고 정숙한 여인이 되어 청혼을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노래합니다. 이처럼 보혜사 성령은 성도가 자라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까지 성도를 보호하며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돌봐주십니다.
사랑의 노래(10-14) 오빠들의 관심 속에 성장하여 솔로몬 왕의 신부가 된 술람미 여인은 화평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술람미 여인 덕분에 가족들은 부와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됨을 기뻐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신부는 향기로운 산 위의 높은 곳으로 다니는 노루 같을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가 더 이상 침범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서 신랑과 동행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을 노래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적용: 당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노래합시다.
한 번 더 마음이 가고, 한 번 더 보고 싶고,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 가지는 속성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받고 있음에 감사하고 받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삶에 지치고 힘겨운 때에 위안으로 든든한 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성벽과 문
아가서 8:8~10 / 이상호 목사
아가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누구의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하지 못하면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본분은 오빠들의 절규입니다. 아가서 여인에게는 아버지가 없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빠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빠들의 언어가 본문의 언어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8절)
이 8절 말씀은 누구의 말이겠습니까?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이 한 말로 봅니다. 그의 오빠가 술람미 여자가 어렸을 때, 아직 성숙되지 못했을 때 한 말을 회상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우리 어린 누이동생은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동생이 청혼을 받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고, 현대어 성경을 보게 되면 “나의 어린 우리 누이 아직 젖가슴도 부풀지 않았는데 젊은 청년이 다가와 우리 누이 유혹할 때 우리는 어찌 할거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오빠들이 여동생을 염려하는 말입니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자기 동생을 보면서, 어떻게 시집을 갈 수 있겠는가? 만약에 어떤 젊은 청년이 청혼을 한다면 그 때 오라버니 입장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동생이 하나밖에 없는데 좋은 곳에 시집을 보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봐야 될 텐데, 어디 좋은 곳에서 혼처가 나면 우리가 모든 것을 장만해서 시집을 잘 보내야 될 텐데… 하는 오라버니 입장에서 동생을 지극히 생각하는 마음이 본문에 숨겨진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빠들이 걱정을 하고 시집보낼 것을 염려를 하고 있는 여동생이 시골의 농사꾼도 아니고 건달도 아닌 세기의 최대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솔로몬 왕의 신부가 되었으니 엄청난 사건 중에 사건입니다. 이런 일은 그 오빠들도 상상 못한 일입니다. 아직도 잘 성숙되지 못한 동생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어느새 커가지고 솔로몬 왕의 부인, 왕후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인간적인 염려는 하나의 기우에 그쳤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속담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신묘불측한지를 깨달을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그 범주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을 때에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되리라 생각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너는 이제 팔렸으니 평생 동안 노예노릇이나 하다 죽으라는 생각으로 형들이 팔아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애급나라의 총리가 되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신비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입니다 합력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만 바라보고, 현재만 바라보고 격정하고 낙담하는 성도들이 돼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식을 바라볼 때, 실망뿐입니다. 똑똑치 못해 대학도 못 나왔지, 돈도 없어 사업자금도 대줄 수 없지, 자식을 바라보면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숨을 짓고 근심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맡겨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자식을 바라보십시오.
미국의 거부 록펠러는 학교교육은 2년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도 마찬가지이고, 에디슨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학력이 훌륭한 사람으로 명성 있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손에는 어머니의 유산으로 받은 낡은 성경책 한권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16대 대통령 되어 남북전쟁의 승리자로 흑인을 노예에서 해방하는 인도주의적 대통령으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위대하십니다. 술람미 여자는 가슴도 없지, 시골 출신이지, 배우지도 못했지, 피부는 검지, 정말 사람들 앞에 내놓을 만한 것도 자랑할 만한 것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빠들이 걱정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토록 훌륭한 왕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여 비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은 우주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준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내가 필요한 데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겁니다. 가정이나 교회에 부름을 받은 것은 거기에 곡 필요해서 그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만 못하다고 자학을 하고 비관에 빠지고 열등감에 빠져 존재가치를 상실한다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애를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9)
그가 성벽일진대 망대를 세우고, “그가 문일진대 백향목판자로 두른다”는 말은 술람미 여자가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순결을 보존할 수 있도록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오빠들이 그를 지극히 사랑하니 버리지 않고 꼭 지켜주겠다. 가족 간의 헌신적 사랑, 가족 간의 우애를 한 눈에 보여줍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혹은 많습니다.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가 지켜주어야 됩니다. 어떻게 지키느냐? 행복한 가정,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자녀를 지키는 길입니다.
대게 탈선하는 자녀들을 보면 결손가정에서 일어납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문제 있는 아이로 성장을 합니다. 아버지가 허구한 날, 만취해서 집에 들어와 욕설을 퍼붓고, 살림을 때려 부수고, 아내와 아이들을 구타하는 생지옥과 같은 집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은 가출을 하여 잘못된 곳에 빠지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정 안에서 꽃과 같이 자라야 할 소년소녀들이 잘못된 곳에 빠져 그들의 인생을 망치는 경우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회적인 책임도 있지마는 가정적인 책임이 훨씬 더 크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을 지킬 수 있는 그것은 가정의 분위기입니다. 자기 자식을 보듬어 주며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어 자녀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는 가정이 될 때, 청소년을 밖으로 돌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자가 결혼한 후에는 남편이 지켜주어야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4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아내 취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아내가 탈선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탈선은 남편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편의 탈선 역시 아내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문제 가정이 있다 면 부부간 함께 책임을 느끼고 더욱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내 취할 줄을 알아라는 것은 아내에 대한 지식, 아내에 대한 상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내 아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내 아내가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 내 아내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 무슨 말을 좋아하는지, 아내가 무엇을 요구하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성생활에도 아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만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해 충분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술람미 여자의 오빠들이 술람미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가 되어준 것처럼 우리도 내 가정을 잘 다스려서 자라나는 우리 소년소녀들을 곁길로 가거나, 잘못된 길로 가거나,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도록 늘 관심을 가져주는 가정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영적으로는 아직 미성숙한 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어야 됩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언제나 살펴주어야 이단들의 밥이 되지 않습니다. 이단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교회로 가만히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심지가 견고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넘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역에서 전도회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신앙적으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벽과 반대가 문입니다. 문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은 벽과 반대 개념입니다. 오빠들은 자기 여동생이 성벽이라면 그 위에 망대를 세워서 시원스럽게 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동생이 문이라면 백향목 판자를 두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동생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 보려는 혈연의 노력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항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아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92:12-13)
사자는 숲속의 왕입니다. 독수리는 새의 왕입니다. 고래는 바다의 황제입니다. 장미는 꽃 중의 꽃입니다. 그런데 나무의 왕은 백향목입니다. 백향목은 어떤 나무일까요?
1) 백향목은 악조건 속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백향목은 사막 지대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라고 합니다. 사막의 낮의 뜨거움을 잘 이기고 굳건히 자라나는 나무입니다. 사막의 낮의 뜨거움도 이기고 무럭무럭 잘 자라나는 나무입니다. 사막에서 물이 모자라도 개의치 않고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술람미가 앞으로 왕비로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잘 자라라는 격려입니다. 어떤 해충도 백향목 나무만은 먹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어떤 마귀도 감히 덤벼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2) 백향목은 느리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사람은 20년 자라면 성장을 멈춘다고 합니다. 모든 생물들은 성장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보통 나무들은 자라다가 어느 기간이 지나면 고목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백향목은 줄기차게 자라는 나무라고 합니다. 백향목 나무는 36m까지 자랍니다. 그것은 약 15층 되는 건물 높이입니다. 그렇기까지는 2,000년이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백향목은 천천히 자나는 나무입니다. 오빠들은 술람미에게 서두르지 말고 일을 잘 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3) 백향목은 끊임없이 활동하는 나무입니다.
백향목 속에는 언제든지 수액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뿌리에서 빨아올린 액은 줄기로, 줄기를 통과한 액은 가지로, 가지로 올라온 수액은 잎으로 움직입니다. 계속 움직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백향목처럼 계속하여 활동하여야 합니다. 쉬지 말아야 합니다. 백향목 나무는 살아 있는 한 자라나고, 살아 있는 한 계속 수액이 살아 움직이는 나무라고 합니다. 늙어도 결실하는 나무입니다. 모세는 80세부터 진정한 결실을 하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활동하였습니다. 이것이 백향목의 삶입니다.
4) 백향목은 엄청나게 크고 장대하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조그만 씨앗이 자라서 그렇게 36m나 되는 나무가 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담군 7만 명과 백향목을 베는 이 8만 명을 산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감독자를 무려 3,600명이나 올려 보냈습니다. 성전을 짓는 데 가장 좋은 나무는 백향목입니다. 둘레는 9∼12m나 되는 것도 있습니다. 재목으로 최고입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없어서는 안 되는 좋은 재목이 바로 의인입니다. 어디서나 그 사람 때문에 그 일이 잘 되어 나가는 이가 백향목입니다.
5) 백향목은 향기가 있는 나무입니다.
백향목이라는 말만 들어도 향기가 맴도는 것 같습니다. 백향목은 향기가 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성전 중의 최고의 성전은 백향목으로 지은 성전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는 백향목으로 지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들어서면 향기가 그윽하여 예배 시간 내내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향긋한 냄새 가운데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백향목은 언제나 남을 즐겁게 하는 나무입니다. 백향목은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백향목은 향기가 있습니다.
6) 백향목은 줄기에 옹이가 없는 나무입니다.
백향목은 옹이 없이 매끈하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껄끄러움이 없는 나무입니다. 의인은 매끄러운 사람입니다. 남과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포용합니다. 누구와도 싸우지 않습니다. 다 친하고 다 교제할 수 있습니다. 다 화목할 수 있습니다. 매듭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출세한 여동생 덕분에 장관 자리를 노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동생 신부는 오빠들이 있기에 더욱 값나가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오빠들은 여동생을 괴롭히는 범인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동생을 철저히 훈련시켜서 바른 재목을 만들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반듯한 오빠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술람미의 오빠들을 오해하였습니다. 못된 오빠들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심은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술람미의 대답이 나옵니다.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10)
자기 오빠들이 그렇게도 걱정하며 자기를 염려하고 있지만, “나는 성벽이고, 나의 유방은 망대 같고”라고 했으니 자기를 누구도 점령할 수 없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는 솔로몬 왕의 아내로서 그에게 바쳐진 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확실히 신뢰하니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자가 화평을 얻은 자, 즉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성벽을 세우고 세상 죄악권세가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영적으로는 오늘날 교회와 세상 사이에 벽이 무너져서 교회가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화려해지고, 고급화 되고, 쾌락의 절정기에 있다 하더라도 진리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파고들어오는 비 진리를 막아야 합니다.
천년이 한 번 가고 두 번 간다 해도 복음 진리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벽, 영적 담을 견고하게 세워 세상의 미혹과 간교한 사탄의 세력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여 나의 믿음을 굳게 지켜나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나는 성벽 같다.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라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단들은 아주 교활하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말씀을 잘 깨달아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성벽이요 그러므로 나는 그가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10)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내 자신을 든든한 성벽처럼 세워 화평을 얻은 자 같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성벽이 되려면, 가정이 화평해야 합니다. 화평하지 못하면 부부가 흔들리게 됩니다. 생각해 해보십시오.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 생활 형편에 폭력남편에 의해 하루도 편한 날 없이 매를 맞고 산다면 하루 한 끼 먹고 사는 것은 참겠는데 폭력은 견디기 힘들다며 이혼을 할까 도망을 갈까하며 별별 생각을 다할 것입니다. 가정이 화평해야 견고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평은 교회의 가장 견고한 기둥입니다.
술람미는 화평을 주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여 준다면 인간관계가 성숙한 사람입니다. 피차 사랑과 화목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순결하고 성숙한 사람
아가 8:8-14 / 강준민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8)
1.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순결한 삶을 살게 합니다.
1) 사랑이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일서 3:3)
2) 건전한 자아상이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3:16)
3) 성경적인 가치관이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6)
4) 비전이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20-21)
5) 책임감이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순결을 지켜 주십니다.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 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2. 사랑은 우리로 성숙한 삶을 살게 합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2:15)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 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1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 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나가는 말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순결한 사랑 성숙한 삶
아가서 8:8-14 / 임현수 목사
우리는 그 동안 아가서 묵상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끼며 배웠습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 사랑의 표현 방법, 사랑의 전달 방법의 무지 때문에 사랑의 기갈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가서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사랑을 어떻게 표현 해야 하는지를 아름답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에서 우리는 술람미 여인의 오라버니들이 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직 미숙한 자매를 돕고자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표현들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도 한절 씩 묵상하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에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 유방이 없다는 말씀은 아직 혼인기에 이르지 못한미성년 未成年을 말하는 표현으로서 영적으로는 "미성숙한 신자"를 말합니다.
지금 오라버니가 어린 동생을 생각 하듯이 교회 내에서도 믿음이 어려서 넘어지기 쉬운 미숙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잘 돕는 것이 먼저 믿은 자들의 할 일입니다.
미숙한 어린 신자들을 잘 돌봐주지 않으면 교회의 성장은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밥을 먹여도 안됩니다. 젖을 먹여야 합니다. 모든 것을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비결은 부모들이 먼저 바로 서는 것 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일거일동을 보고 배우며 그대로 따라 가므로 모든 면에서 본을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서 믿음생활을 배웠느냐 어떤 교회를 다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입니다.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또 감사"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도전 받은 것은 초신자들의 모습이 너무 특이했기 때문 입니다. 이 교회는 개척된 지 이제 3년 되는 교회인데, 300명의 성도가 LA에서 두 번째로 선교 많이 하는 교회가 되었는데 그것도 95%가 새신자들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들이 수없이 많지만 특별하게 쓰시는 특이한 교회들도 많습니다. 이번에 LA를 방문하면서 4개의 모임을 잘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모임을 하는 중에 짬짬히 한국 교회를 방문해서 목사님들을 만나 뵙고 교제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교회는 개척된지 3년 밖에 안 되는 어린 교회였지만 너무나 깜작 놀라운 것은 전 교인이 단기 선교하는 교회 전 교인이 십일조 하는 교회 전 교인이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 작은 교회가 작년 1년 동안 드린 선교헌금이 7.2 밀리온(720만 불) 입니다. 이것은 LA에 있는 대형 교회들의 선교 헌금을 다 합한 것보다 많은 액수라고 합니다.
이 교회에는 최초의 선교사이셨던 최찬영 선교사님과 풀러의 박기호 교수님이 영적 지도를 해 주시고 캔초이라는 1.5세 담임 목사님이 아름답게 이끌고 나가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찾아 만들어 내는 모험을 좋아하는 교회입니다.
장도원 장로님과 옥우원 집사님을 비롯해 남편들은 1년에 몇차례씩 선교 다니고 부인들이 회사와 가게를 운영해 가고 있는 특이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 교인들은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선교부터 배웁니다. 그래서 선교 갔다 와서야 세례 받고 영접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되었지만 참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우리 큰빛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교회 신자들은 교회 나온 지 일주일도 못되어서 캄보디아 중국으로 단기 선교를 떠납니다. 그리고 선교 다녀와서 예수 믿고 세례 받습니다. 십일조는 당연히 하는 것으로 알고 전 교인이 십일조합니다. 왜냐하면 개척하신 장로님과 몇 집사님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장도원 장로님 내외 분의 모습을 보며 신앙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본입니다.
또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잠 22: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신자 때 바르게 가르쳐야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대 일 교사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자녀를 위한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자녀를 바른 길로 돌아 오게 하는 것 입니다.
유방이 없다는 것은 젖을 내어 자녀를 기를 수 없다는 뜻이며 이 말은 영적으로도 믿음의 후배들을 기를 수 있는 역량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숙하지 않고는 자녀를 기를 수 없습니다.
엄마의 젖이 안 나오면 엄마도 힘들고 아기도 힘든 것 입니다. 줄 것이 없는데 무엇을 주겠습니까? 저수지에 물이 없는데 어떻게 전답에 물을 대 줄 수 이겠습니까?
주님은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 부탁하십니다.
다음에 나오는 성벽은 방어와 수비를 목적으로 존재 하는 것으로 여자의 정조를 잘 지키는 견고한 인격을 비유합니다. 사랑에 민감한 사춘기 시기에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 줍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일서 3:3)
건전한 자아상이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 비전이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책임감이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순결을 지켜 주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 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사랑은 우리로 성숙한 삶을 살게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11)
다음에 망대가 나옵니다. 망대는 감시하는 곳으로서 어린 자녀들을 특별한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는 것을 말 합니다. 부모의 감시가 잠시만 소홀해져도 아이들의 삶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과 접촉 하는 시간이 적고 무관심하게 되면, 잠깐 동안에 술 담배를 배우고 마약에 손대고 잘못된 집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문이 나옵니다. 문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으로서 백향목 판자로 두르겠다는 것은 방종하게 드나들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책임감 있는 봉사를 말합니다.
성경은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청년이여…. 마음의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 하실 줄알라…(전 11:9)
마음을 여는 것은 좋지만 분별없이 세속적인 것을 아무것이나 다 받아 들이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 입니다. 특별히 누룩과 같은 이단 사상이나 신비주의, 신신학, 세속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이런 것들이 못 들어 오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표적과 기사를 행한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떠난 것이면 조심해야 합니다.마 24:24
10절은 오라버니들에 대한 응답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성벽이냐 문이냐 하는 오라버니들의 말에 대하여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같다 고 합니다.
나는 성벽이라는 말은 인생 성벽이 잘 자라서 안전하다는 뜻 입니다. 강한 성벽처럼 자신을 유혹하는 모든 시험을 물리쳤다는 뜻 입니다. 이것은 성숙을 말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나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라” (엡 4:15) 그리스도의 신부 되기에 적합한 자는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켜 성벽같이 동요됨이 없어야 합니다.
나의 유방은 망대같다 함은 방종하지 않고 정절을 잘 지키는 망대같이 성숙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살전 2:7) 어머니가 젖을 내어 자녀를 기름같이 술람미 여인은 성숙 하였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젖으로 성도들을 잘 먹일 때 교회는 바로 자라고 교회는 화평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다”고 한 것은 믿음의 성숙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벽이 견고 하고 망대에서 적을 잘 살펴 방어 함으로써 성안은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이 성숙 할수록 성도는 염려를 주께 다 맡겨 드리므로 주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빌립보 중심의 지리적 배경… 빌립보라는 도시의 특징은 막강한 방어벽에 있었습니다. /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빌 4:6-7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을 때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롬 5:1 /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성벽과 같이 견고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되는 것 입니다.
11절부터 보시면 신부는 왕에게 라버니들을 부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은총을 얻습니다. 왕 앞에서 존귀한 지위를 얻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기 소유의 포도원을 가졌습니다.
솔로몬은 비옥한 땅으로 알려진 수넴에서 가까운 평원 지대인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술람미 여인의 오라버니들에게 맡기어 수확기에 은1,000 세겔을 세로 바치게 하였고, 그들에게는 은 200세겔 씩을 지불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을 그리스도로, 포도원을 교회의 모형으로 볼 때, 지키는 자들은 교회의 일군들로서, 마지막 날에 솔로몬과 회계 하였듯이 하나님도 성도들과 결산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의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고전 3:8절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에 감격해서 교회를 봉사하면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함이고,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 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썩을 양식을 위하는 것 입니다.
악한 농부가 되어 주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 이라고 주님은 경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 세상 만물은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을 지키는 자의 것이 됩니다. (고전 3:21-23)
이제 마지막 두절은 아가서의 결론으로서 신랑과 신부의 노래의 화답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너 동산에 거 한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13)
성도의 영광은 동산에서 주와 함께 동거 하는 것 입니다. (히13:14)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전도보다 우선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삶이 풍성하여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은 다른 곳에서의 천 날 보다 낫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이런삶을 살게 되면 동무들이 왕궁의 소식을 들으려고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이 전도 입니다.
친구는 술람미 여인의 고향 친구들을 말 합니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납니다. 그런데 자기 친구가 왕비가 되어 고향에 돌아오니 그의 옛 친구들이 모여서 술람미의 말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신령한 은혜의 생활을 하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많아집니다.
심지어 천사들도 이것을 보고 기뻐 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 합니다. (벧전 1:12)
그러나 성도의 영광은 주께서도 그의 소리를 듣기 원하신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어떤 소리를 듣기 원하실까요?
주님은 성도의 기도 소리를 듣기를 즐겨하십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고넬료를 기억 하시고 축복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기도하는 다니엘을 기억 하시고 사자굴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잠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신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시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주께서는 성도의 회개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주께서는 성도의 찬송소리를 듣기 원하시며 주안에서 열심히 모이는 것도 기뻐하십니다.
시 69: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제 마지막 절입니다.
마지막 신부의 노래는 사랑하는 신랑을 빨리 오라고 부르는 마음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 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는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가르칩니다.
주님의 재림은 성도들에게는 최후의 승리와 영광이 되며 구원의 완성이 됩니다.
주님 재림 하실 때 먼저 죽었던 성도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고 살아있던 성도들도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 입니다.(롬 8:23)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향기로운 산들”은 하나님의 나라 신천신지의 모습을 가르키며 주님은 그곳에서 성도를 위하여 향기로운 중보의 대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빨리 달리라는 신부의 소원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며 주님 오심을 갈망하는 성도의 기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 하심으로 성도는 영원히 주와 함께 동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계 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아가서는 주님과 입맞추는 것으로 시작해서 깊이 사귀다가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응답 할 뿐 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늘 소망하는 가운데 잘 준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여러분은 이렇게 불평하실 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아직도 안 오십니까?" 예수님의 초림이 때가 찬 시각에 일어졌던 것처럼 주님의 재림의 사건도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가 다를 뿐 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각을 하나님의 비밀에 붙여 둠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실존적으로 결단하며 살게 되는 것 입니다.
필리핀이 잠시 일본군에 점령되어 있던 2차 대전 당시 유명한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을 떠나면서 남겼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다시 돌아 올 것 입니다.” I shall return!
2년 후 필리핀의 레이트 만 해안에 상륙하면서 맥아더 장군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나는 다시 왔습니다” As I promised you I came!
성실한 한 인간이 자기 개인의 명예를 걸고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의 구세주요, 역사의 주인이신 그 분이 약속을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일세기에 일어난 역사적인 놀라운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 이탈리아의 베스비우스 라는 산 중턱에 위치한 한 2,000명 정도가 사는 마을에 주후 63년 어느 날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 등장했습니다. 그 노인은 자칭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방탕과 주지 육림의 부도덕한 생활속에 빠져 있던 마을 사람들을 향하여 경고했습니다.
“저 화산은 폭발할 것이요. 살길은 두 가지 밖에 없소. 하나는 당신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거나 아니면 이사 가시오”
아무도 이 미친 노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쳐버린 광적인 노인의 망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꼭 16년이 지나간 어느 날 A.D 79년 8월 24일 베스비우스의 그 유명한 화산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2천명의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다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로마의 장군이요 역사가이며 그 지역의 통치자인 플리니Pliny 라는 사람도 이 마을에 왔다가 같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예언자의 얘기는 플리니의 아들이며 나중에 소아시아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 2세에 의해서 역사의 한 조각으로 기록됩니다. 그것이 바로 폼페이의 멸망입니다.
다가오는 그날이 오고있습니다. The day after ! tomorrow !
이 결산의 날 이 심판의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 이라는 삶의 순간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베드로 사도는 무엇보다 기도하라! 그리고 사랑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기도하에 깨어 있는 사람, 사랑하며 주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주의 재림은 가장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시간이 될 것 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응답 할뿐 입니다. 이것은 평소에 주님의 재림을 늘 소망하는 가운데 잘 준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 입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아가서 8:11-14 / 이상호 목사
어느덧 아가서 강해 마지막 날입니다. 작년 7월 9일에 시작했으니 1년 1개월 만입니다. 모쪼록 제가 은혜받는 기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처음 대하는 메시지에 새로웠으리라 믿습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11)
* 바알하못 : 어딘지 정확히 모름, 발리못(유딧 8:3)
솔로몬이 개인적인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가 농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포도원을 잘 지키도록 포도원을 잘 가꾸도록 맡겨놓고 은 일천(세겔)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의 일꾼으로, 머슴으로 불렀습니다. 부름 받은 주님의 일꾼들은 충성스럽게 포도원을 가꿀 책임이 있습니다. 열매가 탐스럽고 소담스럽게 열릴 수 있도록 거름도 주고, 김도 매고 벌레도 잡아주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에 관심을 가져주는 만큼 포도나무의 열매가 충실할 것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은 일천 개를 바치도록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도원으로 부르시고 은 일천 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겨주시고 방관하시는 주인이 아니라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반드시 결산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기 달란트를 맡겨 주십니다.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주시고 언젠가는 찾으십니다. 맡겼던 달란트를 결산하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남겨서 가지고 왔고, 두 달란트를 받았던 자도 두 달란트를 남겨서 가지고 왔는데,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땅 속에 묻어놓았다 한 달란트 본전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을 봅니다. 하나는 달란트를 잘 활용해서 남는 장사를 한 종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지만, 본전을 그대로 가져온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며 책망을 하십니다. 본전만을 가져온 종은 주인을 오해했습니다. 심지 않고 거두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 않는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거둘 수 있는 창조적인 하나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계획을 세우시고 일한대로 수고한대로 그 대가를 얻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광야 40년 유랑생활 중에는 광야에서 경작할 수 없기 때문에 만나를 주시고, 목축업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메추라기를 주시고, 한 곳에 정착해 샘을 팔 수 없기 때문에 반석에서 물이 솟아 마실 수 있도록 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만나도 그치고, 메추라기도 그쳐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에 따라 역사 하십니다. 도저히 농사할 수 없는 환경일 때는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의 빵을 주시나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는 농사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만나를 그치고 농사를 해서 먹도록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농사하지 아니하고 만나만 내리기를 바라며 하늘만 쳐다보았다면 그들은 굶어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심지 않아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혀 일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건전한 믿음의 행동이 아닙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맡겨주었습니다. 성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성장을 목표로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전도하라, 봉사하라, 섬겨라, 이런 모든 명령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잘 가꾸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놀고먹으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일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12)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한시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되 후히 되어주시고, 눌러주시고, 흔들어주시고, 넘치도록 주시고, 안겨주시는(눅 6:38) 분이십니다. 인색하게 몇 푼 던져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풍성하게, 되도록이면 넘치게, 되도록이면 많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13)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인데, 신부의 노래를 듣기를 원하는 그런 내용이 바로 13절입니다.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 동산은 교회를 의미할 수 있고, 천국을 의미할 수 있고, 아니면 신부 자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 신부 자신을 가리키느냐 하면, 4장 12절에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요”,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이렇게 부른 다음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라고 했습니다. 동산에 거한 자는 노래가 있어야 됩니다. 즉, 늘 감사와 기쁨과 그리고 밝은 표정과 은혜로운 생활이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우리 믿는 자들을 주시하고, 또 사람들이 교회를 주시해서 늘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세상이 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 기쁨으로 사는 모습,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 밝게 웃으면서 또 찬양과 감사로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예배와 찬송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나의 삶의 현장에서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에 부르는 아름다운 경건의 찬양을 가정에까지 가지고 가야 됩니다. 싸우는 시끄러운 소리, 그릇 깨지는 소리, 얼굴을 찌푸리고 쟁쟁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찬송소리가 창문을 타고 흘러넘쳐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네 소리, 네 찬송소리, 네 기쁨의 소리를 귀를 기울여 듣기를 원하시며 성도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그 자체가 전도입니다.
어려운 곤경과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고, 잘 견디면서 인내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들에게 보여 질 때, 믿는 사람들을 달리 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포기할 수밖에 없고 자살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태에서도 의연하게 믿음으로 참고, 오히려 감사로 대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불신자들이 거기서 많은 감동을 받고 충격을 받고, 믿는 사람은 다르구나 하며 달리 생각합니다.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지금 우리 가정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듣고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야겠습니다.
‘내가 듣게 하려 무나’
나는 솔로몬 왕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신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주님도 신부의 노래 소리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생활, 찬양하는 생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두고 살아가는데, 그 자식들이 실의에 빠져서 한숨이나 쉬고, 늘 못살겠다고 싸움질이나 하는 모습을 부모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 당사자보다도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들이 웃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부모 입장에서는 대견스럽고, 고맙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나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녀들인데,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실의에 빠졌을 때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듣게 하려무나, 네 노래 소리를 나도 듣게 하려무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활태도를 좀 바꿔야 되겠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실망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아, 믿는 사람은 저렇구나!'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14)
13절은 신랑이 하는 말이고, 14절은 신부가 하는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이 말은 자랑하는 님이여, 빨리 달려오세요. 노루처럼 달려오세요. 사슴처럼 달려오세요, 그런 의미입니다. 이제 마지막 아가서를 마감하면서 그 신부가 애절하게 신랑을 부르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내 가까이 빨리 달려와 달라, 사슴처럼 빨리 뛰어서, 노루처럼 빨리 뛰어서, 단숨에 달려와 달라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에덴이라고 하는 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를 만들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원소를 만들지 아니하시고, 남자의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하나는 뭐냐? 일체감을 갖게 한 겁니다. 한 몸이라고 하는 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란 고백을 하면서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 여자로 본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나온 여자로 알고 더 지극히 사랑하고, 아내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고, 아내의 슬픔이 바로 나의 슬픔이요 아내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라는 일체감과 동질감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출생하려면 여자가 산고를 느낍니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데, 아담도 여자를 만들기 위해서 그 생살을 헤집고 들어가서 갈비뼈 하나를 잘라냈다고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잠들게 했기 때문에 그 순간은 고통이 없었겠지만 잠이 깼을 때,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금방 치료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출생의 산고를 통해 어린 아이에 대한 모성애와 애착심을 크게 갖는다는데 아담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지극히 사랑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사랑은 황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죄가 들어 왔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인간에게도 고통이 찾아오게 됩니다.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죠. 그런데 언제 에덴동산이 완전히 회복이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회복이 됩니다. 그 때는 사탄은 멸해지고, 죄악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렇게 마쳐 집니다. 주님이 오셔야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이고, 주님이 오셔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고, 주님이 오셔야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시는 것이 인류 역사 중에서 가장 큰 역사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오늘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부가 신랑을 빨리 와 달라, 달려와 달라 노루 같이 사슴 같이 뛰어서 빨리 와 달라. 그 신부에게는 신랑 이상 큰 복이 없습니다. 신랑이 가장 큰 소망이고, 가장 큰 기쁨이고, 가장 큰 행복이고, 자기의 전부입니다. 신랑이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랑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 주님을 어서 오시옵소서. 이렇게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가서를 마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크게 대망해야 합니다. 재림이란 말이 성도들에게 면역이 되어 경각심이 없어졌습니다. 재림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감동도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하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 영광스러움과 영화로움과 나팔 소리와 구름타고 오신다는 주님의 그 영광,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이 감동이 되어야 되는데, 지금은 감동이 없고 성도들이 밋밋합니다.
왜 그러느냐? 재림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식상해지고 귀가 둔해져 있습니다.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해도 성도들이 별 반응이 없습니다. 도적 같이 온다고 했는데, 오늘 밤에 오실지도 모르는데 성도들이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여자처럼 신랑 솔로몬 왕을 이토록 애타게 사랑한다면 노루처럼 빨리 와 달라, 사슴처럼 빨리 뛰어와 달라, 그렇게 요구할 텐데, 우리는 그런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에 대해서 그렇게 간절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신데, 신부의 입장으로서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기대하고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불타는 사랑으로 거친들에서 올라오는 신부
아 8: 5-14 / 조용호 목사
◈ 시작기도: 사랑하는 주님, 거룩하신 주님, 그 빛으로 저의 모든 위선과 거짓을 드러내 주시옵소서. 가장 검고 보잘 것 없는 그 곳에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자기를 부인하고 나에게 맡기신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주님이 허락한 상황을 수용하고 더 나아가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늘 받기만을 구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사 주님께 사랑을 드리고, 주님을 마시게 하며, 주님께 드릴 열매가 있게 하옵소서. 받은 한 달란트를 묻어두지 않도록 충성되게 하소서.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사 새 마음과 새 영이 되게 하시고 주의 말씀이 항상 거하는 주님의 성전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해: 성령님의 조명
* 신부가 받은 첫 계시는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이미 모두 부어졌고 확증되었다.
- 그러나 신부에게 있어서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주님의 초청과 거절, 찾으나 만나지 못함, 갑자기 찾아오시는 주님, 남풍과 북풍, 겟세마네에서 자기 십자가를 짐,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 놀랍게 성숙되어 주님의 기쁨이 되는 신부~
- 그러나 이런 믿음의 여정을 걸으며 성숙한 신부가 되는 성도는 극히 드물다.
-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는 믿음조차 없어 정죄당하고 낙심하고 불평하며 시험에 든다.
- 그러나 주 성령님이 신실하게 우리를 가르치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며 연합으로 이끄신다.
1. 오늘 본문은 아가서의 마지막 본문이다.
1) 검고 게달의 장막같은 포도원지기를 사랑하고 아름답다 하시는 주님을 따라 가는 신부의 믿음의 여정은 “들과 포도원에서 열매를 드림으로 주님께 사랑을 드림”으로 나아간다.
2) 사람들이 주는 상처도, 고난의 북풍도 신부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
3) 심지어 주님이 신부를 떠난다 해도 신랑을 향한 신부의 사랑은 여전하다.
- 신부는 주님을 사랑하여 병이 났다. 너무 사랑하고 허비하여 업신여김을 당한다.
4)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완전한 연합으로 끝난다.
-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되어 거하시는 영광에 신부가 참여한다.
2. 예수님의 신부, 성숙한 신부를 한 절로 말한다면 8장 5절일 것이다.
아 8:5 그 사랑하는 자(예수님)를 의지하고 거친 들(시험)에서 올라 오는(승리한)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1)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다.
-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고 한 그 순간에도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2) 성숙한 신부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완전히 연합되어 거친 들에서 주님과 함께 승리하며 올라오는 자다.
3. 예수님은 겟세마네와 십자가라는 거친 들에서 승리하고 부활하신 신랑이시다.
1)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는 표현이다.
아 3: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아 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2) 그런데 신부에게 예수님과 동일하게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라는 표현을 쓴다. 신부의 아름다움, 신부의 순종, 신부의 승리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3) 다만, 신랑과 신부가 똑같다라는 것으로 신부의 어떠함을 설명한다.
- 신부는 신랑과 똑같다. 둘 다 거친들에서 올라온다.
4) 한낱 피조물, 그것도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 오빠들의 분노로 검고 게달의 장막같은 포도원지기가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주님과 동일한 존귀를 얻는다.
5) 신부가 신랑과 다른 점은 하나다.
- 주님은 스스로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분이고, 신부는 그의 사랑하는 자(주님)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온다. 신부는 포도나무의 가지로써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활에 이른다.
6)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한다.
4. 이런 신부에게 부어지는 신랑되신 주님의 사랑이 다음과 같다.
아 8:6 너는 나(예수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하나님의 질투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요구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죄, 압박, 고통)이 끄지 못하겠고 홍수(더 깊은 죄와 고난)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1) 십자가에 참여하여 항상 부활생명이 나타나는 신부가 경험하는 사랑의 정점이다.
2) 신부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음부를 삼키는 강력한 불과 같다.
3) 죽음을 이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유혹과 핍박, 고난의 홍수보다도 강하다.
- 물은 항상 불을 끈다. 원수는 사랑의 불을 끄고자 핍박, 유혹, 실망, 고통의 물을 보낸다. - 우리로부터 일어난 불이라면 원수의 물에 의해 끄질 것이다.
5. 그러나 하나님의 불은 많은 물로도 끌 수 없다.
1) 사람과 마귀가 주는 시험, 유혹, 거절과 상처로 상사병의 사랑을 끌 수 없다.
2) 홍수같이 어마어마한 물로도 이 사랑의 불을 끌 수 없다.
a) 그 시련이 초자연적인 차원의 크기일지라도(홍수) 이 사랑을 삼킬 수 없다.
3) 엄청난 홍수가 왔다가 민망하여 부끄러워 돌아간다.
a) 검음, 북풍, 메마름, 거절의 홍수는 오히려 불을 더 강하게 할 뿐이다.
6. 우리의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만이 “생명의 삶” “연합의 삶”을 살게 한다.
1) 우리의 불: 내 힘, 내 헌신으로 시작된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많은 물”에 꺼진다.
7.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주님과 연합되는 비결이 아가서에 잘 나타나 있다.
1)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검으나)임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품어라.
2) 위기와 메마름 즉 겟세마네에 거할 때 이 신부의 여정을 마음에 새기라.
- 신부는 찾아도 찾지 못하는 신랑을 여전히 사랑함으로 찾았다.
3) 주님은 우리를 항상 보고 계시며 아가서의 여정을 통해 성숙한 신부로 자라게 하신다.
4) 주님과 온전히 연합될 때 성령님이 이미 우리 마음에 부은 사랑(롬5:5)이 여호와의 불처럼 일어난다.
5) 하나님의 사랑의 불은 많은 물도, 홍수도, 죽음도 부끄럽게 만든다.
-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던 자아는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신다.
8. 신부가 원하는 가장 큰 상급은 신랑되신 주님 자신이며 연합(사랑)이다.
1) 누구도 사랑에 빠진 신부, 상사병에 걸린 자를 멈추게 할 수 없다.
2) 신부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이며, 신부 안에서 여호와의 불같이 일어난다.
3) 상사병에 걸린 신부를 방해하는 모든 것(선이든, 악이든)은 배설물과 같다.
아8:7...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신부는 모든 상황, 많은 홍수에도 넉넉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된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0. 8-14절은 성숙한 신부가 주님이 맡긴 교회와 양들을 돌보는 말씀이다.
아 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9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1) 주님과 연합된 신부는 교회안의 영적 어린아이(작은 누이)를 보며 섬긴다.
2)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성숙한 신부처럼 예수님의 신부로 청혼함을 받았지만 아직 유방이 없는 영적 어린아이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 영혼을 사랑하며 섬기지 않고 자신만을 돌본다.
3) 신부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자신의 부르심을 모르는 작은 누이에게 화내지 않고 돕는다. 성숙한 신자의 표지는 작은 누이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11. 10절은 어린 신자를 돕는 신부의 모습이다.
아 8:10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1) 11절은 예수님이 신부에게 포도원을 맡겼고 결산할 때가 있음을 말한다.
아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2) 신부는 1장에서는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지만 지금은 포도원을 지키고 신랑에게 그 열매를 드린다.
아 8:12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 또한 자신의 동역자들도 자신의 열매로부터 얼마를 받을 것임을 안다.
12. 13절은 신부에게 주는 예수님의 마지막 위임이다.
아 8:13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1) 교회의 친구들이 그녀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신다.
13. 마지막 14절은 주님을 향한 신부의 마라나타 신앙이다.
아 8:14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1) 예수님 빨리 달리세요: 속히 역사하소서. & 속히 정복하소서 & 속히 오소서.
2) 현재 이곳에 임하시고, 속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속히 재림하여 달라는 신부의 사랑과 믿음의 고백이다.
◈ 나의 묵상
거친 들에서 승리하고 올라오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하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자아를 넘기는 여정이 쉽지 않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는 초월은 나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는 자, 때로는 주님이 일어나서 함께가자라는 부르심을 거절하고 주님을 찾아도 찾지 못하며, 주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지만 신부는 주님을 의지했다.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불순종하면 돌이킴으로, 찾을 수 없으나 찾아 나섬으로 주님을 구하고 찾았다. 그리고 어느새 주님을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신부가 된다. 많은 물도 신부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끄지 못한다. 많은 홍수도 즉 만물 안에 속한 어떤 고난과 사단의 악행도 결코 신부의 사랑을 끄지 못한다. 신부는 만물 위, 영원한 사랑안에 있다.
신부의 여정을 이끄신 분은 신랑되신 주님이시다. 신랑을 의지한 신부에게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부의 의지가 되어준 주님께 주도권이 있다. 바울도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신부의 여정은 너무나 사모가 된다. 그러나 이 길이 쉽지 않음은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본다. 아마존에서 27년간 목숨을 내 놓는 사역을 하고, 모든 고통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에야 비로소 성숙한 신부의 연합에 참여한 김철기 선교사님의 나눔을 어제 들었다. 치열한 삶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회개거리였고, 멋있어 보이는 기도가 가증함을 알게 되면서 주님의 사랑의 불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걸어온 길이 너무나 짧고, 내가 진 십자가가 너무 작고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작은 고난을 견디고, 매일 말씀묵상을 하는 것, 작은 열매와 사역의 결과를 가지고 그분들이 얻은 연합을 누리려고 하였다. 1/100만 씨앗을 뿌렸다면 1/100만 기대해야 한다. 여기까지 온 것도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다. 이 정도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도 주님이 뿌린 것보다 과하게 주시는 은혜의 결과다.
그러나 받은 달란트만큼,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매일 말씀 앞에 나아가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를 원한다. 나를 이끄시는 분, 목자되어 인도하시는 분을 따라 간다. 주의 은혜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 날까지 오직 한 가지를 구하며 말씀앞에 나아간다. 연합은 힘으로 능으로 안 되지만 성령으로 된다. 하나님이 심어준 사랑의 불, 세상과 사단과 탐욕을 삼키는 순전한 불이 부어지기를 기도한다.
오늘도 신실하게 신부의 여정으로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른다. 거친 들에서 얼마나 자주, 쉽게 넘어지는지 모른다.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주님을 의지하고 거친 들로 나간다. 그리고 작은 누이들이 이 믿음의 여정에 함께하기를 기도한다. 주님을 기대한다.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는 주님께서 작은 누이들을 성숙한 신부로 연단시켜 가심을 기대하며 기도한다.
◈ 묵상 기도
오 주님 거친 들에서 당당히 올라오며 사랑의 불로 불타는 신부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그 길로 가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싫어하였습니다. 주님, 자기를 부인할 기회를 이제는 도망가지 않고 수용하게 하소서. 속상하고 억울하고 아프고 힘겨울 때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음으로 주의 죽으심을 본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님 저를 가르쳐 주시고 도와주십시오. 많은 물이 끄지 못하는 사랑으로 주님과 연합되게 하소서. 울타리를 쳐 주시고 원수의 방해를 물리쳐 주시고 온전히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성숙한 신부된 교회, 주님과 연합된 교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교회를 세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의 아름다움
아 8:5-14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나무를 심는 것처럼 처음에는 관리를 잘하다가 1~2년이 지나면 그냥 자라는 나무를 내버려 두기 시작합니다. 많은 신혼부부가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혼하기 위해 대화를 나눌 때는 서로의 과거와 아픔, 앞으로의 미래와 소망을 잘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결혼식 이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가 받은 상처에 집중하며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부부는 수십 년을 같이 살았지만, 좋은 결혼 생활을 위해 노력한 시간은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거짓 친밀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친밀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가서의 끝부분을 함께 묵상하며 앞으로의 삶 속에 젊은 남녀의 뜨거운 사랑이 지속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하나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가서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이 부분(아 8:5~14)은 아가서의 결론이자, 영화가 끝날 때 첫 장면을 회상하는 것처럼 사랑이 시작될 때의 모습을 그려내는 ‘부록’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본문을 노래하는 주인공에 따라 나누면 사랑하는 두 남녀 외에 다른 친구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들(5a절), 여자(5b~7절), 친구들(8~9절), 여자(10~12절), 남자(13절), 여자(14절) 순서로 나열됩니다. 이 순서는 사람들이 마주보고 하는 대화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를 향해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는 자(5절)”라고 말합니다. 여인들은 왜 신부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은 친족 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신부는 신랑이 한 집안의 오누이 사이가 되어야 사람들의 눈총을 받지 않을 수 있었음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아 8:1). 그리고 사랑하는 신랑을 “어머니 집”으로 이끌어 사랑을 나누길 소망했죠. 일반적으로 신부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남편이 사는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집”이 나오는 이유는 신랑이 사촌이 아니고, 해서는 안 될 결혼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딸들은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는 자(5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랑을 향한 신부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신부가 신랑이 태어난 사과나무 아래에서 잠든 신랑을 깨우는 장면을 보면 그 사랑이 참으로 성숙하고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부의 사랑은 마치 인장(점토와 같은 것으로 편지를 봉인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이 마음과 팔에 새겨두어 항상 품고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도장 반지는 사랑하는 남녀가 나눠 갖길 바라던 징표입니다. 다말은 유다와 성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도장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창 38:18). 어쨌든 신부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이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있다면,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합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은 그 어느 것으로 이길 수 없었고, 물질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7절).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 할지, 잔인한 질투로 사람들을 대해야 할지는 따로 묻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질투는 사랑을 흔들고 깨우는 것이 됩니다. 질투의 화신 보다 사랑의 전달자가 되야겠습니다.
8~9절은 신부의 오빠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빠들은 내 동생(신부)의 가슴이 없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아직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벽’, ‘문’이라는 표현은 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처녀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벽’은 처녀성이 잘 지켜진 것을 의미하고, ‘문’은 처녀성이 지켜지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오빠들은 동생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호하고 지켜주겠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오빠들의 염려에 대해 신부는 “나는 성벽이요 나의 젖가슴은 망대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날 좋아합니다(10절)”라고 고백합니다. 신부는 계속해서 신랑인 솔로몬이 포도원 일꾼들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음을 노래하면서 자신의 포도원도 그 앞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혼 이전과 이후에도 노동의 가치는 매우 아름답고 큰 것임을 뜻하고, 참된 아름다움은 단순한 물질에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신랑에게 필요한 것은 신부 그 자체이지, 그 외의 것들이 아닙니다. 신부도 그에 화답하며 신랑에게 속히 달려오라는 요청을 하면서 아가서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우리는 아가 1~2장에서 부족하지만, 사랑으로 부족함을 아름답게 이겨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3~4장에서는 사랑이 깊어지는 것을, 5장에서는 사랑의 갈등을, 6~7장에서는 서로를 향한 간절함으로 사랑의 완성을 이루며, 8장에서는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에 적용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도 갈등이 일어나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랑으로 갈등을 이겨가는 모습이 필요하죠.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도 갈등을 이겨내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가득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