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섬'
책장에서 유독 빛나는 책이 있다. 책들 사이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떠있는 섬처럼 존재감을 뽐내는 책. 장 그르니에(1898-1971)의 '섬'이 그렇다. 이 책을 여러 번 읽었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걸 볼 때마다 안도한다. 언제든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책의 물성을 지닌 ‘장소’다. 들어가 머물 수 있는 곳, 피안의 형태로 숨어있는 곳. 단단하고 고요한 문장들이 사는 곳. 침묵이 나무처럼 자라나는 곳. 펼치고 덮을 수 있는 피난처다. 장 그르니에의 제자인 카뮈는 책의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14쪽)
과연 이 책은 혼자 숨어 읽고 싶게 만드는 데가 있다. 그의 문장은 짐승처럼 나아간다. 느릿느릿 움직이다 별안간 도약하고, 침묵 속에서 놀라운 이미지를 꺼내 보여준다. 기교 없이 감정의 진폭을 크게 흔드는 음악 같다. 시와 철학, 삶과 죽음, 작은 이야기 속에 끼어있는 묵직한 화두가 책을 이루는 주재료다. 사유는 단단한 동시에 유연하며 특별한 동시에 보편적이다. '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챕터는 '고양이 물루'라는 제목의 글이다. 시작은 이렇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37쪽)
이제 곧 고양이 물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텐데.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이 뒤범벅인 가운데 시종일관 침착한 음색을 띠는 작가의 문체가 나올 텐데. 어느 대목을 지나면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될 텐데…. 나는 알면서 속는 사람처럼 이 글 앞에서 매번 당하고 만다. 처음 읽는 사람처럼 미소 짓다 처음 슬픔을 맛보는 사람처럼 울게 된다. 무거운 슬픔이 아니라 가벼이 흩어지는 슬픔이다. 나중엔 슬펐던 기억만 남아, 슬픔이 그리움으로 대체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오후에는 침대 위에 가 엎드려서 앞발을 납죽이 뻗은 채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잔다. 어제는 흥청대며 한바탕 놀았으니 아침 일찍부터 내게 찾아와서 하루 종일 이 방에 그냥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때다 싶은지 여느 때 같지 않게 한결 정답게 굴어댄다. 피곤하다는 뜻이다―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준다.” (41쪽)
'나는 그를 사랑한다’라는 문장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작가는 고양이 물루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저 꽃이에요. 저 하늘이에요. 또 저 의자예요. 나는 그 폐허였고 그 바람, 그 열기였어요. 가장한 모습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나요?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고양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물루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만 같다. 헤르만 헤세가 그랬던가. 작가가 고양이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면, 그 작가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섬'을 읽은 뒤 ‘시가 없다’는 게 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시가 없다는 말은 더할 수 없이 단조롭기만 한 것에서 매순간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만드는 그 뜻하지 않은 놀라움이 없다는 뜻이다.”(173쪽) 뜻하지 않은 놀라움? 그렇다! “뜻하지 않은 놀라움”을 책장을 넘기는 매순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책엔 시가 있다.
창가에서 손끝을 매만지며 먼 데를 떠올리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ㅡ 박연준 시인
섬에 부쳐서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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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ㅡ 알베르 카뮈
ㅡ 장 그르니에ㆍ김화영 옮김 '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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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침묵
아무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주워온 지식들로 길고 긴 논리를 편다. 천직의 고행을 거치지 않고도 많은 목소리들이, 무거운 말들이 도처에 가득하고, 숱하고 낯선 이름들이 글과 사색의 평등을 외치며 진열된다.
정성스러운 종이 위에 말없는 장인이 깎은 고결한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찍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노랗게 바랜 어떤 책의 첫 장을 넘기고 <장인 마리오 프라시노가 고안한 장정 도안에 의거하여 그리예와 페오의 아틀리에에서 제조한 독피지(犢皮紙)에 50부의 특별 장정본을 따로 인쇄하였다>라고 써놓은 것을 읽을 때면 마치 깊은 지층 속에 묻혀버린 문화를 상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썩지 않는 비닐로 표지를 씌운 가벼운 책들을 쉽사리 쓰고 쉽사리 빨리 읽고 쉽사리 버린다. 재미있는 이야기, 목소리가 높은 주장, 무겁고 난해한 증명, 재치 있는 경구, 엄숙한 교훈은 많으나 <아름다운 글>은 드물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나 무(無),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씌여진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ㅡ 김화영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ㅡ 첫 문장 중에서...
2002년 여름
태풍이 온다는 날에
김화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