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3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않아 북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불경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만약 그 시대 그런 위치에 있었다면 나의 유익을 위하여 그런 죄악 가운데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에게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담 이후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자들일지라도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얻음을 믿사오니 오늘 나에게 그 영원한 생명 주심을 감사합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아래에서 난 자들일지라도 우리 주님이 나신 그 길을 따라 위로부터 나는 거듭난 생명 앞에서 오열합니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이 하루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세상의 것, 육신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나를 장악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11:1-15
제목 : 그의 십자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3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5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6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7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9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11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12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14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3절은 정직 겸손 성실이라는 인간의 기본 덕목과 관련하여 주는 교훈이다.
둘째 4-8절은 의인과 악인 각각을 위한 구원의 소망에 대한 대조를 통하여 의로운 삶을 추구할 것을 교훈한다.
마지막 셋째 9-15절은 의인과 악인이 이웃에게 끼치는 상이한 영향 또는 자세를 대조하며 의인의 삶을 추구할 것을 교훈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력을 다하여 성공하고자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일 수 있으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따로 있다.
그것은 나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말한다.
사도 바울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은 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묻지 말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비록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제물일지라도 그 모든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에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이다.
또한 불신자의 청함을 받고 그들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을 때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한다.
(고전 10:24-27)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불신자 중에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하지만 청한 자가 그 차려놓은 음식을 가리켜 제물이라고 말할 경우에는 그들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권한다.
그렇다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으라는 말인가, 먹지 말라는 말인가?
그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느 누구도 그 음식을 가리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때는 나의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을 것이다.
그러나 청한 자든지 주변의 누구든지 이 음식이 제물이라고 말할 때는 그들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의 결정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뜻이다(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데, 온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귀결된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질문한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한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면 안 될 것이다.
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교만은 나를 높여서 이웃을 교묘하게 얕잡아 보고 깔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하기에 교만이 아니라 겸손할 것이다.
그렇게 겸손한 자에게는 수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게 된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의 뜻하심과 일하심을 따라 환난과 곤고 그리고 수치가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겸손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자들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잠잠히 수용하는 자이다.
그 안에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온다.
이런 삶은 바로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들 역시 그 분의 삶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 말씀으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이신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 분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도 창이나 칼로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셨다.
충분히 그렇게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런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낮추시고 심지어 그냥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왜냐하면 이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다 내려 놓으시고 자기를 부인하여 십자가에 걸어버리신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존귀한 이름으로 높여주셨다
그러한 복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 것이다.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나는 말씀을 전하는 목사요,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이다.
그것에 앞서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온 자인지 나 자신을 돌아본다.
지나온 나의 인생에서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돌아보면 얼마나 많이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왔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니까 마치 하나님도 속은 것으로 착각하고 얼마나 천방지축으로 경거망동했는지 모른다.
겸손해야 할 자임에도 나를 드러내기 위하여 교만을 밥 먹듯 했고 정직은 일찌감치 엿 바꿔먹은 자였다.
이렇게 사회통념상 그리고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 나를 돌아본다면 나는 어느 것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이다.
지나온 나를 돌아보면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 본문의 단어를 빌리자면 나는 악인 중에 악인이며, 죄인 중에 괴수이다.
7절에서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고 한 것처럼 나는 아무런 소망이 없이 죽어야 마땅한 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믿음과 소망이 있다.
비록 내가 악인으로,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아왔지만, 창세전 언약 안에 있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인생 속에서 비참한 모습일지라도 날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앞에 나를 내어 놓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뜻과 내 맘대로 살아왔던 나의 쓰레기와 같은 삶은 주님이 나가 죽으셨던 영문 밖에 내버린다.
추하고 부끄러울지라도 그 치욕을 짊어지고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히 13:12-13)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묵상 후 기도
주님...
부끄럽고 죄송스러우며 면목이 없어 그저 고개를 떨구고 머리를 조아릴 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신다고 하셨건만 나는 속이는 저울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홀렸는지요?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사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나의 의가 되어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려 했지만 그것은 결국 나의 수욕이 되어 돌아오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나를 주님의 공의로 심판하사 멸하여 주옵소서.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우리 주님을 바라봅니다.
내 눈을 들어 소망의 주를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그 나라를 소망 중에 바라보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내가 악인임을 인정하오나 우리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소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여 나를 부르시는 그 날 나의 소망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영광중에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
이 시간 내가 붙들고 있던 모든 정욕과 탐심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날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