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클립 님 절 매우 치세요!!!!!!!!!!!!!!!!
아닌게 아니라 몇 년 전 이안클립 님께 M90 리뷰를 올리기로 약조를 드렸었습니다. 한데 그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에서 무척 바쁘기도 했고, 막상 글에 파일롯 얘기를 풀어놓다보니 자연스레 화제가 일본 브랜드까지 뻗어나갔는데, 막상 제 자신은 몇 자루 써보지도 않고서 하는 말에 과연 어떤 무게가 있을 것인가 싶어 이리 늦어졌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같은 브랜드의 같은 모델이라도 펜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하물며 제가 가진 펜들이나 제 경험이 과연 정상적으로 잘 뽑힌 닙에 기반하는가-라는 의문에 확실히 장담할 수 없는 이상, 적어도 브랜드 당 2자루는 써봐야 서로 비교라도 해볼 수 있는게 아닌가 싶은 걱정에.
늦은만큼 답이 되는 글이었으면 합니다.
우선 M90의 가장 큰 특징인 디자인부터.
저렇게 모아놓으니 무려 M300의 닙이 커보이는 효과가 생기는군요.
비슷한 길이의 옵티마 미니, 펠리칸 M300, 플래티넘 Jax, 오마스 프린세스, 파카 51 데미, M90을 놓고 봤을 때 가장
무게감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몸체가 스뎅 통짜기 때문이겠죠.
먼옛날 이안클립 님과 오마스 사이즈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서 첨언하자면
오마스 셀룰로이드 시리즈는 프린세스(링탑에 솔이 달린), 레이디 (클립 모델 중에서 최소형=555),
밀로드=556, 파라곤 (557=구형 파라곤 사이즈) 이 순서로 커집니다.
젠틀맨은 디자인은 동일한데 그립부에 그 greek식 무늬가 없는 형태를 말하고,
55N 뒤에 S가 붙으면 원형 (오기바), F가 붙으면 12각의 파라곤이 됩니다.
현행 밀로드와 파라곤은 2000년 들어 디자인이 확 바뀐거니 논외로 치구요.
M90의 가장 큰 특색이라하면 일체형 닙에 바디까지 같은 재질, 같은 색으로 통일하고 링탑에 파랑 보석으로 악센트만 준 일체감 이 있는 디자인에 있습니다. 모던 만년필의 트랜드에 맞춰 닙과 바디란 분류되어있단 인식을 가진 사람에겐 상식파괴의 형태겠지요.
사실 요런 형태 자체는 70, 80년대에 포켓펜이라해서 파일롯 외에도 세일러, 플래티넘에서 또한 비슷한 디자인으로 나온 다양한 제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뚜껑이 굉장히 깊게 닫히고, 소형 후디드 닙, 길이를 포켓사이즈로 줄인 형태의. 딱히 뮤만의 독특한 디자인이라고 할 순 없지요. 뮤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당시 포켓펜의 디자인에 파커 T1의 인테그랄 닙을 끼얹은 것 뿐이니까요. 비슷한 디자인을 몽 빈티지 및 유럽계 브랜드에서도 본 것 같은데, 그 쪽 펜들은 뚜껑을 닫았을 때 이렇게 짧아지진 않았어요. 아마도 일본의 축소지향과 실사용적인 풍조와 맞물려서 와이셔츠 포켓에 쏙 들어가는 길이로 나온게 아닐까 싶습니다.
애초에 만년필 호황기 당시 유럽계 브랜드들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프로토 타입들이 많았습니다. 한 라인업으로서 정착이 되어 지금껏 물려오지 않았을 뿐이죠. 그리고 현대에 와선 더이상 팔리지도 않을 필기구의 시범작에 도전하는 브랜드가 없을 뿐이구요. 기존 라인업에 색만 요리조리 바꾸며 거기에 "우린 이만큼이나 비싸다"라며 자랑하기위한 가격을 붙인 뒤 사인용으로서 선물될 뿐이죠.
그 시절 펜이라곤 믿기지 않는 현대적 디자인이라며 호평받는 라미 2000도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동일해보이는 오로라 98 international 카트릿지 모델이 있고 그 전에 오로라 88, 그리고 파카 51이 이어지는 것처럼 만년필의 호황기 시절엔 단 한 모델만의 색다른 디자인이라기보다 서로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며 점차 만들어진 과정의 결과물이라 보는 편이 더 맞을듯 합니다.
만년필 매니아에겐 참으로 재밌는 시대였지 않을까요. 잠 깨보니 별 이상한 펜이 나와있고, 이 것 좀 쓰다보니 색다른 시도의 새 매커니즘을 이용한 펜이 나와있고.
예시들 들자면, 요 펜들을 한 데 모아두면 50년대 금뚜껑 시리즈로서 외양은 서로 엇비슷해보이지만
위부터 오로라 88P, 오마스 555, 쉐퍼 PFM.
공유하는 부분은 있지만 각각 특징도 닙 형태도 분명히 다른 펜들입니다.
같은 비교선상에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르죠.
그 어느 것도 근본 없이 외계인의 지시에 따라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펜은 없다 생각합니다.
다른 회사들이 있었고, 경쟁이 있었고, 성공이 있었고, 아류가 있었기에 나온 형태들이지요.
한 시기의 트랜드라 해야할까요, 오로라 하스틸-몽 노블레스-쉐퍼 타가의 슬림형들처럼
국적과 회사를 초월한 일종의 만년필 족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일본은 사생아인가 싶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카피해와서 개조한듯한 형태가 강하지만요.
단순히 후발주자라서 그렇다곤 말하기 힘든 복제의 느낌이 크죠.
다만 서구 회사들이 만년필 시장의 축소 추세에 따라 기본 라인 외 폐쇠에 들어간 반면
세일러나 파일롯은 반대로 라인업의 다양화를 꾀합니다.
세일러는 사파리를 벤치마킹한듯 세일러 캔디를 팬시 장난감으로 어필하며 저렴하고 다양하게 푼다던가
혹은 스카이트리 같은 명소, 지역 유명 문구점 등의 커스텀 한정을 낸다던가.
플래티넘은 마키에, 쇼지 등으로 동양의 신비를 어필하고,
파일롯은...제트스트림을 물리칠 펜을 연구하고 있겠죠? [...]
커스텀 74는 역사와 전통의 베스트셀러고, 저 역시 743은 제 펜 중에서도 최고로 꼽습니다만
호시절은 지나고, 더이상 보편적 필기구인 만년필로는 기업으로서 수지타산이 안 맞는거죠.
그리고 M90 독특함이라면 빠질 수 없는 요 피드라인. 매끈하게 잘 뽑혔죠.
제가 오마스를 계속 찾는것도 피드라인의 곡선에 반해서인데,
가격대가 영 자비 없으셔서 오마스는 벌써 몇 년 째 "언젠가 한 번 써보고 싶은 브랜드"인 상태입니다.
재질
만년필은 필기시 손에 힘을 덜 줘도 되는만큼, 손 안에 안정적으로 고정되기 위해선 적당한 무게감이나 두툼한 두께를 통한 손과의 마찰이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M90은 바디 재질이 미끄러질 수 밖에 없죠. 땀 많은 분은 쓰기 힘들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폰의 스뎅 그립부보다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라폰 클래식은 디자인을 위해 그립감을 과감히 희생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이 예쁘니까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몸통 재질이 스텐리스인 이상 생활기스 또한 어쩔 수 없지요. 무수한 뚜껑 여닫은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이런 경우 중고 판매 시에 약간 감점을 받게 되겠군요.
일단 한번 중고 등급이 되면 세월에 따른 감가상각은 복불복인게 만년필이라지만,
적은 사용 경험만으로도 흠집이 생긴다면 mint에서 used로 확 취급등급이 내려가버리곤 하니까요.
M90은 재질 뿐만 아니라 디자인 상의 문제로도 중간 고정 부분에 기스가 생길 수 밖에 없어요.
뭐 지금 와서야 뮤 시리즈 자체가 희소성 프리미엄이 있습니다만.
푸쉬캡
똑딱이 걸쇠 뚜껑은 라미 2000의 디자인과 비슷합니다.
이거 편하죠. 한손으로 밀어 빼는게 가능하니까요.
혹시나 모를 사태 방지를 위해 잘 안하지만요.
푸시캡이라해서 무조건 편리한 것만도 아닙니다.
플래티넘 3779 중 게더드, 브라이어우드, 저가형 마키에 모델 등에 쓰이는 똑딱이의 경우는
고정쇠가 너무 빡빡해서 열고 닫을 때 정도 이상의 힘을 줘야해요.
만년필은 어차피 닙의 안전을 위해서 어느 정도 신경쓰며 양손으로 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옵티마 같이 잉크뷰 윈도우가 달려있는 경우 특별히 더 불편한 점은 있습니다.
캡을 돌릴 때 유리가 긁혀요. 제대로 맞춰서 잠그지 않으면 헛돌 때도 있고.
M800 블랙모델의 초록창도 긁힘 자국이 남죠.
NOS라고 웃돈까지 주고 샀는데 긁혀버리면 허망함이 찾아오죠...
현행 플래티넘 개더드가 푸시캡인데 이건 또 빡빡해요. 까렌도 비슷하구요.
PFM은 고정되는 곳이 좀 얕다는 느낌이 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니 그냥 기분 탓이긴하지만.
푸쉬캡인 파카 벡터는 닫을 땐 괜찮은데 뺄때 약간 힘주어서 뽑아야해서 불편하고
현행 나미키 팔콘은 여타 펜들보다 두어바퀴 더 돌려줘야해서 귀찮습니다.
또 비슷한 푸쉬캡이라도 형태로 인해 공기저항이 느껴지는 프레라보단 몽 144 쪽이 좀 더 부드럽게 닫히구요.
그런 여닫음에 있어선 라미 2000이 가장 부드럽고 편하고 또한 자연스러운 안정성까지 갖춘 듯합니다.
그에 비하면 M90은 약간 빡빡한게 아닌가 싶군요.
종이
클레르퐁텐이 가장 비침이 덜하고 잉크의 색을 확실히 살리는 종이임에도 불구하고 만년필용 노트로서 최고라 단언할 수 없는건, 특정 펜에 있어 미끄러짐이 심합니다. 펜에 따라 일반적인 미끄러짐 이상으로 쓰는게 불가능할 정도죠. 파일롯 헤리테지 912 FA와 데시모가 특히 그랬습니다. 쉐퍼 타가 슬림도 약간 그런 기미가 있었구요.
종이 표면 처리 차이라 짐작하는데, 미끄러지는 종이질이 이리듐의 유지엔 좋을지 몰라도 글씨을 기록함에 있어선 종이와의 어느 정도 마찰력이 필요하다는 아이러니함이 "모든 것에 완벽한 노트"란 없음을 증명하는게 아닐까요.
종이 얘기로 샌 것은 M90 역시 제가 애용하는 클레르퐁텐 노트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입니다 -┌)a
이쯤 되니 파일롯-클퐁 궁합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됩니다만 커스텀 743은 또 괜찮아서요 B라서? -┌)a
M90이 FA닙만큼 미끄러지진 않지만 글을 쓰기 위해선 약간의 필압을 요구했습니다.
제가 필압이 거의 없이 종이에 가볍게 스치듯 쓰는 편이라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M90은 클퐁 사의 매끄러운 계열 종이보단 일본계의 조직이 세밀하고 잉크 흡수력이 좋은 종이 쪽과 더 잘 맞을듯 합니다.
총평
전 아범 울트라나브를 썼었고, PDA를 쓰며 접이식 키보드도 써보고, 조나다 쓰며 초소형 키보드도 써보고, 블랙베리 등을 거쳐 지금 데탑용으론 기계식 키보드를 쓰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도 보면 항상 핸드폰으로 뭔가를 메모하고 있다고하던데, 컴퓨터로 동기화가 되고 편집/정리가 훨씬 편한 스마트폰처럼 요샌 기록하기 위한 참 편리한 도구가 많아요.
그에 비하면 종이 선별도 필요하고 불과 몇초 쓰는걸 멈췄는데 그 새 잉크가 말라버리는데다 중력 작용까지 신경써야하는 만년필은 심히 불편하고 조건이 까다로운 도구지요. 현대에 와서 만년필의 편의성을 추구하는건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물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만년필을 쓰는 이유란 "필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은 다른 그 어떤 기록용 도구에서도 기대할 수 없어요.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M90에겐 큰 점수를 주기가 힘듭니다.
별다른 특색이 있지도 않고 구형 M800 pf나 듀오폴드 등과 비교하면 딱히 손에 기억이 남지 않는 필감이라 해야할까요
파일롯 스틸닙의 필감이라면 오히려 프레라를 처음 썼을 때가 더 충격적이었던듯합니다. 일회용 V-pen도 훌륭하구요.
파일롯의 장점이란 독특한 개성이나 특색보다는 저가형부터 고가형을 막론하고 참으로 안정적인 퀼리티 콘트롤에 있지 않은가 합니다.
따라서, M90에서는 외양 외의 별 다른 필감의 개성은 딱히 없으나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게 파일롯의 장점은 아닐테니까요. 743엔 그 어떤 불만도 없습니다.
그런 안정감이 불만이시면 이태리 브랜드로 가시면 되죠, 비스콘티 디바이나가 참으로 예쁘지 않습니까...
파일롯과 제휴하여 나온 Somes 케이스도 그렇죠.
확 눈에 띄는 특징이나 화려한 개성이 아니라 가격 대비 꼼꼼한 후처리, 높은 안정감에 구매를 선택하는겁니다.
굳이 이 펜을 써야할 이유라면 주머니에 넣어다닐 수 있는 편의성을 꼽겠습니다만,
하지만 실지로 만년필을 열쇠나 mp3나 동전 등과 더불어 주머니에 넣어다닐 일은 별로 없지요.
태생적으로 최대한 충격을 주지 않아야하니까요. 기스 한 방에 중고가 몇만원이 까이는 시장판입니다.
혹시라도 잉크가 샐까 싶어 펜의 닙 방향도 신경 써야하고.
또한 만년필은 펜만 들고다닌다고 쓸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종이도 엄청 가리고.
메모용이라고 해도 비닐 재질이나 코팅 재질 위엔 쓸 수 없는 등 만년필은 지나치게 용도가 한정됩니다.
책상에 굴러다니느니 펜이건만 죄다 만년필이라 때론 허둥지둥 볼펜을 찾아헤매야하는 사태가 발발하지요.
수험 공부를 위한 문제집을 살 때조차 그저 만년필을 사용하고 싶단 이유로 문제집의 종이 재질을 확인하고 골라야겠습니까?
물론 M90이 특색이 없다는건 단지 제가 만년필에 요구하는 것은 필감이 제 1기준이기에 내리는 평가일 따름이고, 특이한걸 좋아하시는 분껜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요즘 세상에 굳이 만년필을 고집하는 사람이란 어느 정도 "나는 만년필을 쓴다" 식의 자기도취성 차별화를 염두에 두는 분이 많으니까요. 그 시점으로 보자면 M90의 일체형 디자인이란 적당히 편리하면서도 독특한 장점이겠지요.
무엇보다 디자인 측면에서 한눈에 꽂히는 개성이야말로 현대 마케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아니겠습니까.
M90은 자신의 매력이 분명한 펜이라고 생각합니다.
P.S. 리뷰와 함께 드렸던 또 다른 약속도 꼭 지킬게요★
첫댓글 오오 M90이군요!! 한때 정말 갖고 싶었는데.. 잘보고 갑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읽고나니 만년필이 참 불편한 점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또 만년필로 옮겨 적고 있지요.^^;;
근래 보기 힘들었던 멋진 리뷰입니다!
필력이 프로급이십니다
자세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