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연수가 있어서 연수 받으러 가는 첫날이다.
잠결에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데 눈 얘기를 한다. 가만... 이게 심각한 수준 같다. 5분만 더~ 하는 마음이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싶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아침 토마토를 먹으려고 거실로 나오니 앞 뒤로 하얗다. 정말 눈이 ‘겁나게’ 오고 있다.
어제 밤에 신랑에게 경복궁역까지만 태워다 달라고 부탁을 해 놓았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모양이다. 내가 준비를 대충 마치자 신랑은 옷을 입으며 태워다 주겠단다. 그냥 있으라고 했다. 좋단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려는데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사람은 그냥 멈춰선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은세계로 변한 주변 경치가 좋아서 와우! 하고 소리를 쳤는데 쩌러렁~ 울린다.
중앙광장에서 엘리베이터로 지하 3층으로 내려오니 관리실에서 오늘 눈이 많이 와서 승용차 이용을 자제해 달라며 방송이 나온다. 그 말을 들으며 밖으로 나왔다. 마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겁없는 승용차 2대가 아파트에서 나오려고 하니 경비 아저씨가 말린다. 그 동네 차 한대는 3미터를 올라가는데 3분 걸렸다.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왜 차는 끌고 나와서... 그런데 이 아저씨... 차창 문을 내리더니 하시는 말씀이 오늘은 마을버스 운행 못한단다. 허걱!!! 산 동네에 사는 비애. 걸었다. 간호대 입구까지 나가서 시계를 보니 8시 30분. 연수는 9시 시작인데...
그나마 시내버스는 다닌다. 버스도 생각 밖으로 빨리 왔다. 내가 건널목에 서 있을 때 한 대가 가서 마냥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얼른 버스에 올라 탔다. 홍은 초등학교 앞 커브를 돌아 유원하나 아파트 앞쪽으로 가는데 어떤 여자가 아파트에서 내려오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다. 일어나다 또 엎어진다. 에구... 어쩌나. 어릴 때 같음 아마도 웃었을 상황인데 이제 나도 나이가 든 모양이다. 그 여자 꿋꿋하게 일어나 뛰어와서 그 버스에 오른다. 장하다! 역시 대한민국 아줌만의 힘!!!
눈이 많이 오니 눈을 치워 쌓아 놓은 것도 장난이 아니다. 문득 초등학교때 초등학교 동창네 마당에 그 아이의 오빠들이 만들었다는 이글루가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문이 많이 왔었는데 정말 오랫만에 보는 풍경이다.
상명대 입구에서 석파랑쪽으로 우회전. 저 고개가 고비려니 하며 내심 마음 조리는데 무사히 올라간다. 그래. 여긴 자하문 터널. 괜히 터널 안이 아늑해 보니며 그나마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버스도 그 짧은 구간을 씽~씽~ 달린다.터넉이 곡선구간이라 달리면 안 되는데... 달리고픈 본능이었을까? 터널이 끝나자 다시 정차... 설화를 피운 가로수가 오늘 따라 예쁘고 청운 초등학교 담장에 시비가 있는지 몰랐는데 눈을 소복히 맞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아기자기 정이 넘치고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어 놓은 곳에도 눈이 쌓여서 재밌는 신교동을 지나 경복궁역.
역사 안으로 눈이 들이친다.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가는데 내가 타야 할 지하철 한대 패스. 그래. 오늘 상황은 천재지변인거야. 을지로 3가에서 갈아타려고 준비하는데 전화가 온다. 연수받으러 안 오는가 싶어서 전화 한 모양이다. 가는 중이라고 했다. 을지로 3가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동대문역사박물관에 내려 땅위로 올라오니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눈을 치우느라 부산하다.
이정표를 따라 연수 장소에 도착. 안내판에도 눈이 쌓여 있어 한참을 헤맸다. 그렇게 어렵게 연수 장소에 도착하니 강의가 한참 진행 중이다. 1시간 40분 걸렸다.
빈 자리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강의의 감을 잡아 본다. 엑셀 초급 연수. 역시나 배우러 오길 잘 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나올 때가 젤 신난다. 그런데 이 강의 하느라고 우리 점심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밥 먹고 하자고 했다. 사람들도 그 말에 같이 아우성이다. 결국 점심시간을 얻어 눈발을 헤치고 나가서 떡만둣국을 사먹었다.
다시 돌아와 오후 연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어제 신랑과 영화를 보러 가자고 결론을 본 '위대한 침묵' 표를 예매하러 갔다. 선재아트홀. 안국동 길을 걸어 35년전 아니 36년 됐다. 다녔던 중학교 앞을 지나 선재아트홀에 갔다. 영화 본게 언제 인지 아득하다. 이 영화도 가톨릭 침묵 수도원에서 찍었다고 해서 가자고 했다.
시간을 보니 빨리 버스를 타면 환승이 가능한 시간. 그 눈길을 뛰다시피 내려왔다. 내가 원하는 버스를 기다리면 시간이 넘어갈 듯 해서 대충 맞는 버스를 타고 카드를 찍는다. "환승입니다." 반가운 아가씨 목소리. 필운동에서 내려 경복궁역 정류장까지 걸으면 되지. 경복궁 역에서 길을 건너려고 하는데 오른쪽에서 누군가 거창하게 넘어진다. 어라. 이건 뭐지? 왠 아저씨가 스키를 타고 오다가 넘어진거다. 그 상황에 차라도 지나갔으면 참 어이 없는 상황이 벌어질 뻔 했다. 그러면서 길을 건너 버스를 기다리는데 내 앞으로 그 아저씨 지나간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4EAB114B41C0790A)
얼른 핸드폰 꺼내 인증 샷. 집에 와서 컴을 켜니 스키타는 용자(勇者)라며 강남에서 스키타는 남자 사진이 올라와 있다. 이거 벌금이 2만원이라는데...
아무래도 버스가 안 와서 버스 언제 오는지 전화로 확인하는데 맞은편에 내가 타는 버스가 한대 지나간다. 전화 안내는 그 버스가 올 시간을 안내해준다. 앞으로 18분 후. 다른 버스를 탔다. 눈 앞에 지나간 버스가 거기서 무교동까지 갔다가 돌아서 올 때까지 기다리느니 차라리 갈아타는게 나을것 같다는 결론.
상명대 입구에서 내려 보니 석파랑에 눈 쌓이 모습이 고즈넉한게 좋다. 다시 핸드폰 꺼내 얼른 찍어 봤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7E22104B41C02A23)
핸드폰으로 찍어서 분위기는 제대로 안 살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 쉽지 않을것 같다. 그 사이에 석파랑 앞에서 어떤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그거 후륜구동이라 뒷바퀴에 체인을 감아야 되는거요 하며. 앞 바퀴가 자꾸 헛돌아 딴에 체인을 감고 나왔다고 자신있게 달리다 멈춘 다음 못가고 있는 제네시스에게 한 말이다. 운전만 할 줄 알면 되는게 아니다.
상명대 쪽으로 건너니 이번엔 벤취에 눈 쌓이 모습이 재밌다. 누군가 벌써 앉아 봤던 모양인지 그 모습이 남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75250C4B41C0FB48)
정말 눈이 많이 온거다. 100년만이라는 둥... 내 기억에 초등학교때는 근 30 센티미터씩도 오곤 했는데 25센티미터 좀 넘는다면서 왠 난리인지.
버스를 타고 간호대입구로 와서 호떡집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마을버스 다니냐고. 이제는 다닌단다. 그런데 아무래도 거기서 타면 콩나물시루 못 면하지 싶어서 아예 포방터시장까지 걸어왔다. 떡집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자니 내일 점심은 시간을 따로 안 주겠다는 말이 생각나 절편과 약식을 샀다. 작년에 아침 식사로 가래떡을 먹느라고 자주 들렸던 떡집이라고 할머니는 얼른 바람떡 한 팩을 더 넣어 주신다. 단골의 행복?
마을버스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나 반갑던지. 냉큼 올라타고 집에 왔다.
집에 오면서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오뎅국을 해 먹으리라. 오자마자 바람 안 든 제주 무 숭덩숭덩 썰어 넣고 간장에 가쓰오부시 소스 좀 넣고 다시마 한조각 넣고 멸치가루 넣고 국물부터 만들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하고 사다 놓은 어묵 먹기 좋게 썰어 놓고 곤약 썰어 놓고 국물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데 신랑은 뭐든 빨리 먹자고 아우성이다. 그래도 오뎅국물이 쉽게 만들어지나 중불에 무가 익을때까지 기다려서 어묵과 곤약을 넣고 우르르 끓기에 얼른 한 그릇 퍼서 안겼다.
좀 급하게 만든거 치고 맛있다. 종일 눈 길 걷느라 힘들었던 몸이 화~~~악 풀린다. 눈이 와서 재밌고 행복한 하루였다.
첫댓글 솔향님~ 재밋게 읽었습니다. 홍은동 우리집 동네 풍경이 눈에 선 하네요. 방송에선 103년만에 재난이니 하는데 그렇게 즐기시니 너무 좋네요.
스키타는 아저씨 모습은 특종보도입니다~~
ㅎㅎ. 어디 다른 사이트에 올리면 특종이 될 듯도 합니다....
우린 둔내에서 연휴를 보내고 월욜 새벽 귀가길에 올랐다가 빙판길위에서 5시간 사투를 벌이며 무사히 도착했지요. 조수석에 앉아서 심장 쪼그라드는 심경을 묵주 90단을 바치면서 달래었지요.
덕분에 묵주 신공의 은총을 받으셨으니 좋은 시간이라고 말하면 왠지... 안 될것 같은....
음.... 다들 오랫만에 신기한(?)경험들을 하셨죠? ㅎㅎㅎ 저는 온종일 동네 아낙들과 눈치우며 수다떨며 깔깔대며 놀았습니다. 백년만의 눈, 백년만의 카다르시스였습니다.^^
백년만의 카타르시스...멋진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