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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춘천교구 장평공소 |
ⓒ 2005-10-27 [ 오도엽 ] |
| | 강원도 홍천군 화천면. 그곳엔 어려움이 닥쳐도 웃으며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다. 꾸밈이라고는 찾으려고 해도 찾을 구석이 없는 사람. 김오식(50), 세례명 안셀모. 그를 만나면 마치 흙을 살리라고 하늘에서 보낸 사람 같다.
흙을 살리라는 소명
김오식씨는 천주교 춘천교구 장평공소에서 살고 있다. 공소는 신부가 있지 않은 작은 성당이다. 1957년에 문을 연 장평공소는 한때는 신도가 150명이 모이기도 했다. 도시 산업사회로 농촌사회가 무너지자 이곳도 그 물살을 견디지 못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도시로 나가자 1984년에 공소 문에도 대못이 박혔다. 천주교 봉사자의 부름을 받고, 김오식씨가 이곳에 내려 온 것은 1999년. 하느님 말씀을 두 손에 들고 왔던 그의 손에 흙냄새가 가득하다.
“처음 한 삼년은 좋았지. 공소에 마을 어르신들 모시고 함께 소주 마시며, 맨날 잔치지. 읍내에 나가면 모셔다 드리고, 비료 사다 드리고, 심부름꾼 역할을 도맡아 했지. 농약 뿌리면 도와 드리고. 세속을 따르라고 했잖아.” ‘부르심’을 받은 봉사자의 역할에 충실하던 그에게 또 다른 ‘부르심’이 들렸다.
바로 자연을 살리고, 흙을 살리라는 소명. 농촌에서 하느님 말씀을 퍼뜨리는 일은 함께 흙에 발을 묻고 사는 일이라고 깨달았다. “자급자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산도 있고, 논도 있고. 농사지을 땅이 한 칠백 평은 되겠어.” 농사에 ‘농’자도 모르는 그가 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논둑에 지뢰탐지기 같은 걸 대고 다니는 거야.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지. 바로 제초제를 뿌리는 거야. 그런데 이 분들은 무방비야. 아무 보호 장비도 없이 약을 치는 거야. 대단한 분들이야. 만성이 된 것 같아.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 관행농을 벗어나 유기농, 친환경 농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새로운 눈을 뜨다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친환경 농업 교육도 받고, 책도 찾아보며 홀로 독학을 하던 중 ‘자연농업’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신문에서 조한규 회장(한국자연농업협회)의 기사를 보았지. 맞다 싶더라구. 당장 연락을 해서 교재랑 선집 전체를 한꺼번에 샀지.” 몇 달 동안 책을 보다 한계를 느낀 김오식씨는 자연농업연찬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관행을 탈피해 유기농을 하자고 해도 쉽지를 않잖아. 농촌 사람들이 유기농 좋은 걸 몰라서 안 하는 것 아냐. 유기농 자재를 사야 하잖아. 우선 자재를 사자니 돈이 많이 들잖아. 그리고 토양을 만들려면 몇 년 걸리고. 한 오년은 굶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비용과 고통이 만만치 않은 거야.” 교육을 받고 나서 불가능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농기계가 없는 김오식씨는 땅을 갈지 않는 농사에 관심이 많다. “제일 힘든 게 기계로 하는 거야. 농촌에 도움을 주려고 왔는데, 땅을 갈아달라고 부탁 할 수 없잖아. 말만 하면 서로 와서 도와주려고 하지. 이것도 부담이지.” 그래서 교육을 받고 한 해 동안 무지 고생을 했다. 무경운을 향한 험난한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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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뒷산. 이곳의 검불을 밭으로 옮겨 덮었다 |
ⓒ 2005-10-27 [ 오도엽 ] |
| | “아침에 창문을 열고 산을 보는데 기막히더라. 저(산) 조건을 그대로 밭으로만 옮겨 놓을 수 있다면….” 가을부터 겨울지나 봄까지 장평공소 뒤에 있는 산의 검불과 부엽토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밭에다 산에서 긁어 온 검블로 3-5Cm 멀칭을 했다.
혁명이 일어나다
“갈쿠리로 긁어, 자루에 담고, 메고 담고 지고 끌고 밀고 굴리고 왔지. 온 몸이 긁히고 찍히고 말도 아니야. 마을 사람들이 콧방귀를 뀌고, 바보 같은 짓 한다고 손가락질 하지. 얼마 못가 주저 않을 거라고 하고. 그런데 하면 할수록 기운이 나.” 토양을 만들려면 한 오년간은 고생하겠다는 각오로 시작했다. 하지만 김오식씨의 밭은 놀라운 변화, 아니 혁명이 일어났다.
밭마다 덮인 검불을 살짝 들추니 거름기가 가득한 흙이 보슬보슬하다. 바로 흙이 살아갈 조건을 만들어주니, 흙이 지렁이를 모으고, 두더지를 불러 기계보다 곱게 흙을 갈아주었다. 발을 디디면 한 뼘씩 푹푹 들어간다.
“다 된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시작이야.”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 자연은 또 다른 과제를 준다. 막히는 곳이 있기에 뚫는 힘이 생기고, 길이 없기에 길을 낼 거다. 아니지. 길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이 못 찾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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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가 너무 많아 올해 고추 농사가 힘들었다 |
ⓒ 2005-10-27 [ 오도엽 ] |
| | “여긴 다른 마땅한 작물이 없어. 제일 타산이 맞는 게 풋고추야. 그래서 풋고추를 많이 하지. 풋고추가 잘 되는 거야. 신이 났지. 그런데 한 포기씩 죽는 거야.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지. 물 조리개로 물을 주니 흙이 푹 들어가는 거야. 보니까 두더지 구멍이야. 아, 이 두더지가 이젠 너무 많아서, (두더지가) 뿌리를 잘라버리는 거야.” 이것도 하나 배우는 거라고 감사해야지 한다. 모든 걸 하나 깨우쳐 주는 일이라고 고마워한다.
새로운 걸 깨우칠 기회
-그때 자연농업센타에 문의를 하시질 그랬어요? “아냐. 좀 안된다고 물어보고, 좀 안되면 물어보고, 그래서야 어디 제대로 내 것을 만들겠어.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 해 봐야지. 하나에서 열까지 다 말해주면 내가 농사하는 게 아니지. 내가 도저히 풀지 못하고, 아주 고민이 될 때까지는 해보는 거야. 내 농사잖아. 회장(조한규 회장)님께 전화를 해야 하나 많이 고민도 했지. 하지만 아직은 아냐.”
올해는 이렇게 땅을 영양가 있게, 그리고 곱게 갈아 줘 고맙고, 또 새로운 걸 깨우칠 기회를 줘 고맙다고 한다. 스스로 다독이고, 채찍질하며 하나씩 깨우쳐 가는 김오식씨의 신앙심과 농부의 마음이 자연농업을 한 계단 위로 올려놓는 디딤돌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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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나는데로 녹즙과 효소를 만든다 |
ⓒ 2005-10-27 [ 오도엽 ] |
| | 김오식씨의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배워가는 농사는 마을을 조금씩 바꿔가고 있다. “나는 마을에서 자연농업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 몸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좋은 게 없어. 봐야지 따라오는 거지, 억지로 끌고 와서는 안돼.”
마을에서 제초제는 이제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도, “요 걸 객지에 나간 내 자식이 먹는다고 생각해 봐. 내 자식이 안 먹는다고 볼 수 없잖아. 약 안 치고, 비료 덜 치고 해야지.”
제대로 농사를 짓기 전까진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겠다는 김오식씨, 하지만 말보다 몸으로 보여 준 생명의 농사는 새벽 안개처럼 조용히 마을을 감싸고 있다.
흙과 세상을 바꾸어가고
마을 어르신들 밭에 가서 부족한 게 있으면 액비를 만들어 밭에 쳐준다고 한다. “어느 집에 가니 술을 갖가지 담아놨어. 소주만 마시면서 취미로 갖가지 약초며 과일로 술을 담아 전시를 해 둔 거야. 내가 그랬지. 저기에 좋은 것은 다 있네. 내일 저 거랑 저 거랑 해서 이리 섞어서 뿌려 줘 봐. 진짜로 해보니 좋거든.” 마을 사람들이 두 해동안 자연 효소와 미생물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솔잎을 긁어 퇴비로 쓰는 집도 생기고, 녹즙이나 쑥 효소를 직접 만드는 집도 생겼단다. 말로 흙을 살리고, 약을 치지 말고, 비료 쓰지 말자고 백 번을 강조하는 것보다 김오식씨의 몸으로 보인 노력이 자연스럽게 흙과 세상을 바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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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을 뺀 나머지 반찬은 직접 재배한 거다. |
ⓒ 2005-10-27 [ 오도엽 ] |
| | -약을 치고 싶은 갈등도 생겼을 텐데요? “올해 노지에는 탄저병이 온 거야. 우리 집사람이 노지에만 약 한 번 치면 안 되겠냐고 하는 거야. 그 때 작물이 연약할 때 된장 간장이 좋다는 말이 언 듯 머리에 떠오르는 거야. 애(고추)들도 생명인데 내 먹는 영양 있는 것을 나눠 먹어야지. 아 그래. 마침 장아찌, 마늘, 양파, 고추 장아찌 담았던 간장이 조금 남아 있는 거야. 올커니. 그것하고 영양제 만들어 둔 것하고, 막걸리 소주 넣어 뿌렸지. 참 신기 하더라. 그대로 가다마리가 되더라고. 꼼짝도 못하고. 나머지는 생육이 되고.”
병을 잡은 것보다 기쁜 것은 “자신감을 가진” 거라고 한다. “자연농법이 가르치는 데로 가면 할 수 있다. 작물을 인위적으로 키우려고 하지 말고, 도움을 주는 조력자 역할을 하자. 작물한테 땅한테 사람 대하는 것보다 더 겸손하게 대하면, 자연은 내게 넘치게” 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푸른 하늘보다 더 넓은 평화
김오식씨는, “내가 먹는 것 열개 가운데 하나, 아니 반이라도 작물에게 십일조 하듯 주면, 자연은 내게 육십배, 백배 돌려 줄 거”라고 한다. 자연에게 겸손하고 나눌 줄 아는 모습에서 사람 김오식은 사라지고,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형상만이 남아 있다.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은 사람을 참 따뜻하고 포근하게 해준다. 푸른 하늘보다 더 넓은 평화를 전해준다. 김오식씨의 오른쪽 눈은 의안이다. 삼년전 보육시설에 봉사활동에 갔다가, 방에서 나온 쓰레기를 소각장에서 태우다가 파편이 날아와 한쪽 동공을 다 들어냈다. “나는 한쪽 눈 잃은 것도 고마워해요. 두 눈으로 보며 교만하게 살지 말고, 한쪽 눈은 내 마음을 보라고 거둬갔겠지.”
처음 천주교 봉사자로 선교를 위해 내려온 김오식씨는, 이젠 하느님 말씀을 교리만이 아닌, 흙을 살리는 농사로 실천하면서 선교하고 있다. 농사짓는 사람들 품속에서 함께 흙을 먹으며 살아가는 그를 보며 언 듯 호미든 예수를 떠올린다.
-교구에서 물질적 지원은 없습니까? “여기 공소에 딸린 논밭보다 더 큰 물질이 어딨겠어. 뭘 바래. 여기서 자급자족하며 살면 되지. 아무튼 오기 전 아파트 전세금 받은 것 야금야금 다 쓰고…. 이젠 농사로 먹고 살아야 해. 군자금이 없어. 아직 (내가) 덜 비웠나봐. 더 비워야 채워주겠지. 교리 책 잔득 싸들고 왔는데, 다 치웠어. 내가 농사 잘 지어야, 농민들이 공소로 찾아 들 거야. 이게 내게 준 소명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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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불로 덮인 고추밭 |
ⓒ 2005-10-27 [ 오도엽 ] |
| | -자식은? “아들하고 딸이 있지. 둘 다 대학생이야.”
왼쪽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교육비가 많이 들텐데요? “그게 문제야. 자식들이 학비 걱정하지 말라고 해, 나한테. 지네가 벌어서 다니겠다고. 아버지는 농사만 신경 쓰며,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해. 아들은 지난해에 제대하고 일년 아르바이트해서 올해 복학 했고, 딸은 올해 입학 했는데, 한 학기 다니고 지가 휴학해서,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학비 벌고 있어.”
김오식씨의 실명한 오른쪽 눈은 자주 눈물이 고였는데, 자식들 이야기를 하며 왼쪽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이야기를 듣는 기자의 가슴은 흠뻑 적셔진 지 오래다.
* 기사로 쓰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너무 겸손하시고, 아직은 자신의 행동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시기 때문입니다. 김오식 선생이 이 기사를 보면 기자에게 화를 내고, 다시는 만나주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무례를 무릎 쓰고 기사를 쓴 까닭은 지금 걷는 길이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 함께 어깨를 걸고 가야할 길이기에 섣불리 기사를 올립니다. 실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 김오식 선생의 허락으로 실을 날을 기다립니다. 아마 그 때는 마을 전체가 흙이 숨쉬는 땅에서 자란 풋고추가 싱싱하게 달려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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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 스런글 감사히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