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지역 참배
◊ 기원공(휘 한지) 묘소 참배.
◊ 위치 :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산119-1번지
<기원(휘 한지)공의 묘소>
<명필사세지묘>
지난해 가을(2008.9.20)에 이곳 음성의 비산리(비석촌)에 소재한 기원공(휘 한지)의 묘소를 참배하고자 하였으나 직접 찾아뵙지 않는다고 성을 내시는 할아버지의 노한 음성(音聲)과 함께 토해내시는 피눈물(억수같은 비)에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부지런을 떨었던 결과 다행이도 이번에는 불과 몇방울의 비만 내리시고 편안하게 우리 일행 20여명을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전국에서 제일크다는 마태사의 불상을 바라보면서 우리일행을 기다리던 기원공의 직계 자손이시며,우리카페의 선목대의원을 비롯한 음성과 충주일가님들을 반갑게 만나 인사를 나누고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비를 대비하여 서둘러 묘소를 향하여 길을 서둘렀습니다.
포천과 충주에 계시던 4세분의 묘소를 이곳 음성의 유택으로 이전하고는 처음으로 많은 자손들이 찾아뵙는 이곳 비산리의 묘소에는 앞이 잡목으로 가려저 있어 나무를 베어 냇으면 하는 나의 생각과 같이 다른 일가님들도 앞은 물론 뒷편의 나무들도 베어 냈으면 하는 생각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묘소에 이르자 제일먼저 눈에 띄이는 것은 "명필사세추모비문"이 새겨져있는 비석이였습니다.
왼쪽으로 네분의 묘소가 나란히 계셨는데 맨 왼쪽이 기원공의 부친이신 삼정재(휘 언수)공의 묘소, 다음이 기원공, 다음이 아드님이신 경호공(휘 화주)의 묘소였으며 맨 오른쪽이 기원공의 손주이신 남강공( 초환)의 묘소로 일열횡대로 뫼셔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난해의 잘못을 용서드리고 제일 어른이신 삼정재공의 묘소에서는 카페 유명준회장이, 기원공묘소에서는 이번행사를 위하여 애를 많이 쓰신 유중근운영위원장이 참배를 드렸으며, 경호공(휘 화주)의 묘소에서는 지난 2기 운영진에서 카페 수석부회장을 지내신 바 있는 수원의 형근대의원께서 참배를 하셨으며, 끝으로 남강공(휘 초환)의 묘소에서는 저 멀리 대구에서 올라오신 카페 유성근 현 수석부회장께서 잔을 정성스럽게 드리고 참배를 드린 바 있었습니다.
이어서 묘소앞에 빙 둘러서서 상호 인사를 나눈 후 명준회장, 형근 대종회 사무처장님 그리고 기원공의 자손이신 대준어른의 환영인사와 더불어 보충자료와 함께 설명을 하셨으며 아울러 이렇게 찾아준데 대한 감사의 인사말씀이 계셨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만들어가지고 간 참배자료를 나누어 드리고 내용설명를 하였으며, 명필 사세추모비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인사와 함께 내용 설명을 듣고 있는 우리 일행들의 모습>
<명필사세추모비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뒷줄 좌로부터(존칭생략) 형근(수원), 홍근(일산), 일준(日濬, 충주), 이(일)준(二(逸)濬, 충주), 병태(충주종친회장), 창배(부천), 병덕(서울), 성준(수원), 춘식(수원), 태준(수원. 사무국장), 병갑(서울), 중근(파주), 앞줄 좌로부터 병호(남양주), 병직(서울), 성근(대구), 병억(남양주), 대준(음성), 명준회장, 상근(남양주), 유섭(포천), 광근(서울), 형근(하남. 사무처장), 흥식 (서울)등 23명이며, 늦게 도착하신 민준(연기), 동겸(충주), 그리고 카메라맨 선목등 모두 음성에서 참배한 인원은 26명이었습니다.>
이렇게 2년에 걸쳐 계획하였던 음성 기원공의 참배행사가 모두 끝이 날 무렵 기원공의 후손이신 음성의 대준 어른께서 (대전의 성겸, 흥겸, 동겸의 집안 형제분들이 뜻을 모아) 이르기는 하지만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지자는 제안이 있어 이를 거절하기도 어려워 함께 내려와 황태구이식당에서 황태구이 백반과 대구의 성근부회장이 가지고 올라온 인삼주를 반주로 하여 5차의 건배를 제의하는등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각기 집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운영위원장 일행과는 이천휴게소에서 다시 만나 양평에서 주신 용문산 더덕막걸리 한병을 더 마신 후 헤어져 양평의 양수리에 상근 아저씨를, 남양주 월문리에서 병호 자산공파 사무국장을, 차산리에서 병억 대종회부회장님을 내려드리고 귀가하니 때는 이미 오후 10시가 되었으며, 내일부터 있을 모내기 준비를 위하여 그대로 잠이들었으며, 몇일동안 계속 바쁘다보니 참배기를 쓸 시간이 없어 이제야 글을 올림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면서, 한가지 부연할 말씀은 이번 양평 음성참배에도 집에서 새벽에 떠날때에는 비가 내렸으나 차산리의 일가님들을 만날 즈음하여서는 그친 비가 하루종일 오려다가는 말고.....하는 힘든 날씨를 보였으나 결국은 무사히 아름다운 참배를 마칠 수 있었다는데 선조님들의 가호가 이번에도 있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말씀드리면서 뜻 깊었던 참배의 글을 마칩니다. 함께하여 주신 일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관련 사진들은 각자 올려주신 사진방을 참조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명필사세추모비문을 올려드리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09. 5. 22.
기계유씨카페 카페지기 兪 燮 상
○ 명필사세추모비문(名筆四世追慕碑文)
(三定斎, 綺園, 鏡湖, 南岡)
山淸公의 諱는 彦鏽요 字는 肅夫이며 號는 三定斎이다. 公은 新羅 阿飡 兪三宰公의 後裔로 綿綿世世 顯達하여 中宗祖의 禮曹判書 景安公 諱 汝霖 明宗朝의 戶曹判書 肅敏公 諱 絳은 七, 八兩代 名卿이라 江原觀察使 諱 省曾은 高祖요 全羅觀察使 忠簡公 諱 榥은 曾祖이며 祖는 贈 吏曹判書 慈敎堂 諱 命賚이다. 考 進士 諱 廈基公은 學問과 隱德으로 行世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終身하였으며 妣 昌寧成氏는 必泰의 女이다.
公은 景宗辛丑(1721)에 生하니 幼時로부터 聰名絶人하고 成長함에 따라 學問에 精進하였으며 특히 筆才에 뛰어나 中國과 韓國의 名人筆法을 習得하여 [楷譜]를 펴내기도 하였다. 公의 筆蹟은 洪城參判公墓碑(휘 해) 등에 남아 있다.
公은 晩年에 山淸縣監을 再任하여 善政碑를 얻었고 正祖丙年(1721)에 卒하니 享年 66 처음 抱川 龍床洞에 合窆하였다가 塋域으로 移窆하였다.
漢芝公은 字는 德輝요 號는 綺園이다. 英祖庚辰(1760)에 生하여 司馬에 中하고 官이 監役 永春縣監등을 거처 通訓大夫繕工監 副正에 이르렀다. 公은 특히 筆才에 뛰어나 考 山淸公의 家法을 이어 받고 널리 中國의 篆과 隸을 習得하여 마침내 大成하니 我東方 篆隸의 巨峯이라 일컬어진다.
海東號譜에 이르기를 兪綺園은 篆隸을 잘하여 그 名聲이 一世에 떨쳤다 했고 秋史 金正喜는 公의 篆보다도 隸가 더 能했다고 했다.
그러나 公이 成就한 篆隸中 隸는 그 후 많은 變化를 일으켰으나 篆은 아직도 獨步的인 境地에 우뚝 서 있다. 公의 筆蹟은 지금도 全國名地에 散在하여 所藏者 들의 賞讚의 對象이 되어 있다. 특히 碑文글씨를 많이 썼는데 그 중에도 永川의 李影坡大師碑, 山淸의 文益漸神道碑, 廣州의 忠穆公神道碑, 江陵의 鏡浦臺懸板 등이 有名하다. 公은 純祖甲午(1834)에 졸하니 향년 75 配 咸平李氏는 復運의 女요 後配 淸州韓氏는 命楫의 女이다.
처음 抱川 龍床洞에 三合窆하였다가 이 塋內로 移窆하였다. 자는 華柱 女는 完山 李承初다.
華柱公의 자는 聖執이요 號는 精一斎 또는 鏡湖라 했다. 正祖丁巳(1797)에 생하여 哲宗庚申(1860)에 졸하니 향년 64 공 또한 書畵에 能하여 家聲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다.
配 延安李氏는 永奎의 女다. 공은 처음 抱川 龍床洞에 뫼셨다가 이 塋內로 移窆하였다. 자는 初煥, 能煥이다.
初煥公의 자는 伯善이요 號는 南岡이다. 純祖己卯(1819)에 생하여 己亥에 진사가 되고 哲宗癸亥에 文科에 及第하였다. 공은 才局이 卓越하고 學文이 深奧하며 文章에도 能했다. 또 先三代의 필법을 이어받아 글씨가 精妙하였다. 公의 筆蹟은 楊州車山理 醉翁公 墓表등에 남아 있다. 벼슬길에 사서, 典籍, 修撰, 正言, 佐郞, 持平, 校理, 正郞, 掌令, 司成, 應敎, 承旨, 大司諫 등을 역임하여 通政大夫吏曹參議에 이르렀다. 마침내 高宗癸巳(1893)에 卒하니 향년 75 配 咸安趙氏는 涉의 女요 後配 廣州金氏는 梓喜의 女다. 公은 처음 忠州 松江里에 合窆하였다가 庚午年에 이 塋內로 移窆하였다. 繼子는 致珪요 女는 龍仁 李喬榮 楊州 趙雲熙다.
○ 명필사세추모비문(名筆四世追慕碑文) 번역문.
(삼정재, 기원, 경호, 남강)
산청공의 휘는 언수요 자는 숙부이며 호는 삼정재이다. 공은 신라 아찬 유삼재공의 후예로 면면세세 현달하여 중종조의 예조판서 경안공 휘 여림 명종조의 호조판서 숙민공 휘 강은 칠, 팔량대 명경이라 강원관찰사 휘 성증은 고조요 전라관찰사 충간공 휘 황은 증조이며 조는 증 이조판서 자교당 휘 명뢰이다. 고 진사 휘 하기공은 학문과 은덕으로 행세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종신하였으며 비 창녕성씨는 필태의 녀이다.
공은 경종신축(1721)에 생하니 유시로부터 총명절인하고 성장함에 따라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필재에 뛰어나 중국과 한국의 명인필법을 습득하여 [해보]를 펴내기도 하였다. 公의 필적은 홍성참판공묘비(휘 해) 등에 남아 있다.
공은 만년에 산청현감을 재임하여 선정비를 얻었고 정조병년(1721)에 졸하니 향년 66 처음 포천 용상동에 합폄하였다가 영역으로 이폄하였다.
한지공은 자는 덕휘요 호는 기원이다. 영조경진(1760)에 생하여 사마에 중하고 관이 감역 영춘현감등을 거처 통훈대부선공감 부정에 이르렀다. 공은 특히 필재에 뛰어나 고 산청공의 가법을 이어 받고 널리 중국의 전과 예을 습득하여 마침내 대성하니 아동방 전예의 거봉이라 일컬어진다.
해동호보에 이르기를 유기원은 전예을 잘하여 그 명성이 일세에 떨쳤다 했고 추사 김정희는 공의 전보다도 예가 더 능했다고 했다.
그러나 공이 성취한 전예중 예는 그 후 많은 변화를 일으켰으나 전은 아직도 독보적인 경지에 우뚝 서 있다. 공의 필적은 지금도 전국각지에 산재하여 소장자 들의 상찬의 대상이 되어 있다. 특히 비문글씨를 많이 썼는데 그 중에도 영천의 이영파대사비, 산청의 문익점신도비, 광주의 충목공신도비, 강릉의 경포대현판 등이 유명하다. 공은 순조갑오(1834)에 졸하니 향년 75 배 함평이씨는 부운의 녀요 후배 청주한씨는 명즙의 녀이다.
처음 포천 용상동에 삼합폄하였다가 이 영내로 이폄하였다. 자는 화주 녀는 완산 이승초에게 출가하였다.
화주공의 자는 성집이요 호는 정일재 또는 경호라 했다. 정조정사(1797)에 생하여 철종경신(1860)에 졸하니 향년 64 공 또한 서화에 능하여 가성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다.
배 연안이씨는 영규의 녀다. 공은 처음 포천 용상동에 뫼셨다가 이 영내로 이폄하였다. 자는 초환, 능환이다.
초환공의 자는 백선이요 호는 남강이다. 순조기묘(1819)에 생하여 기해에 진사가 되고 철종계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재국이 탁월하고 학문이 심오하며 문장에도 능했다. 또 선삼대의 필법을 이어받아 글씨가 정묘하였다. 공의 필적은 양주차산리 취옹공 묘표등에 남아 있다. 벼슬길에 사서, 전적, 수찬, 정언, 좌랑, 지평, 교리, 정랑, 장령, 사성, 응교,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여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마침내 고종계사(1893)에 졸하니 향년 75 배 함안조씨는 섭의 녀요 후배 광주김씨는 재희의 녀다. 공은 처음 충주 송강리에 합폄하였다가 경오년에 이 영내로 이폄하였다. 계자는 치규요, 이녀는 용인 이교영과 양주 조운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번역 : 인당 유동재)
* 참고로 기원공의 글씨는 차산리 숙민공 재실 옆에 있는 소요헌(휘 한갈)공의 묘갈문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내기를 마치시느라 고생 많으셨구요.
일준(충주), 이준(충주) ..... 일준(日濬, 충주) 이(일)준(二(逸)濬, 충주).. 동근(음성) 동겸(東兼, 음성) 아버지는 아명인 이준이 호적에 족보상에 일준으로 되어 있습니다. 충주 4종형님은 동근이 아닌 동겸이므로 바로 잡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정하였으며, 이제야 그날 뵈웠던 어른들을 제대로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했읍니다 모내기 등 농번기에 바쁘신 중에도 좋은글 올려주셔서 고맙읍니다
아버지와 재종간이신 대준(음성) 재종당숙부님은 함 치영의 후손이시며 아버지 사촌 돌아가신 대준 당숙은 함 치규의 후손이십니다. 함자가 같습니다. 한자도 같으셔서 족보상 찾아보시고 헛갈려 하시는 분들이 있어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대준 재종숙부님께서 아버지를 종손으로 소개 하신 연유는 집안사이므로 자세한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처음에 족보를 보고는 그렇게 생각하였답니다.
음성 기원공 참배 후기 감사드리며 음성 충주 종친회의 환대 감사 드립니다.명준 회장님을 비롯한 집행 위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80년도에 포천에 3대분이 모셔져있을때 찾아 뵈온적이 있는데 ...관리가 안되어 마음이 언잖았는데 후손 흥겸씨께서 이폄해서 추모비도 세우고 治山하는데 힘을 기우려 4대분이 한곳에 모신게 보기 좋습니다.
그러셨군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