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인/달성인 서유구는 조선말의 문신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이었고, 부친은 이조판서 서호수였으며, 서유구 자신은 나중 조부처럼 대제학에까지 오른 대학자 관료였다. 조선중말기 조선을 대표한 국반 중 하나인 대구서씨의 후손 서유구의 생모되시는 분이 바로 한산인 도승지 수남 이이장 충정공의 따님 한산이씨 (1736-1813) 이셨다. 그런데, 서유구가 자신의 집안의 여성들 즉 어머니 한산이씨와 부인, 그리고 형수에 대해서 기록한 내용을 보면 얼머나 청빈하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데, 궁핍한 생활 그 자체였다. 특히 어머니 한산이씨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서유구는 자기 집안이 곤궁하여 중인 집안만도 못하다 하였다. 그럼에도 어머니 한산이씨는 당신이 살림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주변 사람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들 조차 그 집안의 어려운 생활환경을 도무지 몰랐다 한다. 다들 대갓집 답게 집안살림이 넉넉한 줄만 알았다는 것이다. 물론 상업을 하여 부를 축적한 경제력이 탄탄하였던 거부 (?) 중인에 비한 상대적 빈궁일수 있고, 사실 끼니가 걱정되는 그 수준은 절대 아닐 것이라고 <조선시대 양반가 여성의 생애와 풍속> 의 저자 김미란 님은 추측을 한다. 단지 청렴을 강조한 지조와 절개가 곧은 선비가문의 가풍에 의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또한 서유구에 의하면 어머니 한산이씨는 (불우)이웃돕기, 즉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며 돕는것을 즐겼다 한다; "어머니 한산이씨는 집안의 여분이 있어도 저축하여 쌓아놓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관직에 오르시게 되니 집안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고 손님들은 모두 접대하다 보니 어머니 일은 더욱 많아졌고 더욱 고생스러워졌다. 그리고 아버지 봉록이 많아지긴 했지만 돈도 부족하여 빌려 쓸 수밖에 없어서, 때로는 이자를 두 배로 주기로 하고 빌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빚쟁이들이 빚을 받으러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알까봐 매우 두려워 하셨다..." 라고 회고하였다...
청렴하고 맘씨는 너무 좋은데 어떻게 보면 선비집안의 따님으로 해맑게 크셨는지, 도대체 대책없게만 보이시는 당돌한 한산이씨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