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만성 정규병의 《만성유집》
1. 가계와 생애
1) 가계
선생의 이름은 규병(奎炳) 자는 태첨(泰瞻) 호는 만성(晚醒)이며, 계출(系出)은 나주(羅州)이다. 정씨(丁氏)는 당 대양군(唐大陽君) 덕성(德盛)이 동방으로 온 시조이며, 그의 둘째 아들 금성군(錦城君) 응도(應道)가 관향을 받은 조상이다. 고려시대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 윤종(允宗)의 훈업(勳業)이 세상에 현저하여 후예 6대가 동정(同正)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 신(愼)의 호는 기옹(寄翁)으로 성균 생원(成均生員)인데,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천거되어 배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분이 면성(綿城)에 거주한 조상이다. 3대를 내려가 영효(榮孝)의 호는 의암(毅菴)으로 벼슬은 훈련첨정(訓鍊僉正)이며, 그 소생 응시(應時)는 통덕랑(通德郞), 그 소생 암(嵓)의 호는 청헌(清軒)으로 증 통정대부(贈通政大夫)이다. 이는 선생의 10세(十世) 이상이다.
고조 진희(震禧)의 호는 청재(清齋)이다. 증조 한충(漢忠)의 호는 석전(石田) 수 통정대부(壽通政大夫), 조부 대빈(大彬)의 호는 죽포(竹圃), 부친 면섭(冕燮)의 호는 송오(松塢)인데 문행(文行)과 필법(筆法)으로 세상에 저명하였다. 모친 밀양박씨(密陽朴氏)는 택준(宅準)의 따님으로 사덕(四德)을 겸비하였다.
2)선생의 생애
선생은 시례세가(詩禮世家)에 태어나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율곡(栗谷)이이(李珥)-›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정통 주자학을 계승한 성담(性潭)을 사숙(私淑)하였다. 증조 석전공(石田公)이 성담한테 도(道)를 전수받고, 이로써 아들 죽포(竹圃)에 전하여 손자 송오(松塢)에 이르렀는데, 송오는 바로 선생의 부친이다.
선생은 사림(士林)의 영수(領袖)이며 문원(文苑)의 석장(碩匠)으로서 조선 말기로부터 6·25동란 등 격랑의 시대에 처하여 한 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로 안연(顏淵)의 낙을 즐기고, 홀로 맑고 홀로 깨어 굴평(屈平)의 지조와 같아 실로 우활하고 속된 선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에 마음을 오롯이 하여 교육에 게을리 않고, 전긍임리(戰兢臨履)의 공에 힘을 다하여 몸가짐을 더욱 근실하게 하였다. 특히 사서오경에 대한 해박한 강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사방 후학이 종사(宗師)로 추앙하였으며, 제자로 수학(受學)한 자가 반천(半千) 가까이 되었다.
〇경오년(1870) 정월 26일
면성(綿城) 남쪽 박곡 도림산 집에서 태어났다.
〇갑술년(1874) 5세
부친 송오공에게 글을 배우고, 필법을 익혀 글자 획이 곧았다.
〇15세 전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근본삼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숙독하여 문명(文名)이 여러 고을에 자자하였다. 시부(詩賦)의 문(文)은 일가 할아버지 금석(錦石) 선생과 일가 어른 창랑(滄浪) 선생 문하에서 연마하였다.
〇을유년(1885) 16세
삼가례(三加禮)를 행하였다.
금석ㆍ창랑 양선생 문하에서 시부(詩賦)를 연마하였다.
나주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정씨(丁氏)의 문단(文壇)을 과장(科場)에 드날렸다.
12월에 이천서씨(利川徐氏) 계룡(桂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금실이 좋아 손님처럼 서로 공경하기를 하였다.
〇정해년(1887) 17세.
3월 1일. 부친상을 당하여 피눈물로 아파하니, 보는 이들 모두 눈물을 흘렸다. 3년을 한결 같이 조석성묘(朝夕省墓)를 하였다.
선친이 세상을 떠나고 산업이 점점 쇠퇴하여 몸이 궁하였으나 마음은 더욱 독실하였다. 과거 공부에 뜻을 접고 주경(主敬)의 학(學)에 근원 하여 명(銘)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〇기축년(1889) 20세
약관(弱冠)에 이르러 명성(名聲)이 높아 홍종(洪鐘)이 울리기를 기다린 듯 먼 곳에서 벗들이 찾아왔다.
〇갑오년(1894) 25세
동학군이 향리를 강탈하자 선생이 좋은 말로 타일러 보내 향리가 무사하였다. 경장(更張) 후 국사가 날로 쇠퇴함에 보유재를 강학당 삼아 후학을 양성하였다.
〇을미년(1895) 26세.
백형(伯兄)이 자식 없이 젊은 나이에 죽으니, 좌우 어깨를 잃은 듯 울음을 삼키며 잠 못 이루고 수척하여 상할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이 막내아들로서 편모를 30년 동안 봉양하면서 색양(色養)을 지극히 하였다.
〇무술년(1898) 29세
부인 서씨가 소생 없이 요절하니, 슬픔을 견딜 수 없었지만,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모친을 위로하여 무사하였다.
〇경자년(1900) 31세
달성배씨(達城裵氏) 철수(哲洙)의 따님을 맞이하여 공경하기를 전배(前配)에 하듯이 하였다.
〇계묘년(1903) 34세
족제 규명(奎明)과 고삐를 나란히 하여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선생 문하에 배알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미발(未發)한 바를 발(發)하고 전에 미달(未達)한 바를 발하여 얻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선생이 특별히 칭찬하였다. 선생을 배알하고 가천(佳川)에서 오는 길에 구점(口占)한 시가 있다.
저문 골목에 초저녁 달빛 비추니 昏衢初夜月光囬
날씨가 동남으로 늦게 열리도다 天氣東南向晚開
한하노니 달님 둥글게 구르는 곳에 只恨銀輪圓轉處
강바람이 안개 불어 하늘 가림이여 江風吹霧蔽空來
〇을사년(1905, 광무9) 36세.
종중에서 보유재(報裕齋)를 중건(重建)하므로중수기(重修記)를 지었다.
〇무신년(1908) 39세
조정에서 단발령(斷髮令)을 내리자 본고을 수령 한치유(韓致愈)가 여론을 탐지하고자 선생에게 편지로 물었다. 선생이 “맹세코 죽을지언정 머리를 자르는 것은 불가하다”라는 뜻으로 답하자 본고을 수령이 그 지절(志節)에 경탄하였다.
〇경술년(1910) 41세
국치[屋社] 후로 일본의 책력을 보지 않고 뜰에 무궁화를 심어 절후를 체험하였다. 평소에 조용히 스스로 수양하여 세상 이끗에 마음 쓰지 않고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하였다.
〇무오년(1918) 49세
모친 밀양박씨(密陽朴氏)가 91세로 졸(卒)하였다.
〇기미년(1919) 50세
자최(齊衰) 중에 고종(高宗)이 승하하시자 지방 사림을 도림산 위에 모아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1년 동안 복상(服喪)하였다.
〇무신년(1928) 59세
11월에 부인(夫人)배씨(裵氏)가 졸하였다. 소생은 1남 1녀이다.
〇갑자년(1954) 86세
문인(門人)과 종중(宗中)‚ 향당(鄕黨)이 합력하여 만성당(晩醒堂)을 건립하니,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안빈낙도에 처하여 독실히 호학(好學)하며, 구문(舊聞)을 모아 후예를 깨우치며, 보계(譜系)를 밝혀 종족을 돈독히 하며, 사잠(四箴)을 새겨 후손을 권면하며, 구사(九思)를 본받아 성명(性命)을 기르며, 구용(九容)을 본받아 심신(心身)을 단속하였다.
〇경진년(1960) 1월 22일 91세
정침(正寢)에서 역책(易簀: 별세)하였다. 26일 도림산 앞 기슭 율항 선영 아래 손좌(巽坐) 언덕에 장사하니, 가마(加麻) 문생(門生)이 2백 30인을 넘었다.
2. 문집의 편찬 및 간행
선생 사후에 문생(門生)인 족질 정유진(丁有鎭) 공이 사방에 산재한 유문(遺文)을 낱낱이 필사하여 수습하고, 조성원(趙晟元)ㆍ정인면(鄭仁勉)ㆍ서석종(徐錫鍾)ㆍ임종수(林鍾秀) 씨를 비롯하여 정병순(鄭昞珣)ㆍ서정환(徐珵煥)ㆍ배태춘(裵太春) 씨 등 다사(多士)들과 함께 정리하여 문생과 일가의 호응으로 1964년에 간행하였다.
3. 문집의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석판본으로 원집(原集) 4권, 부록 1권, 합 2책(二冊)으로 구성되어있다. 권수(卷首)에는 1963년에 배석면(裵錫冕)이 쓴 서문이 실려있으며, 이어서 원집 목록이 있다.
원집 1권에는 180제(題) 214수(首)의 시(詩)와 24편의 서(書)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오언절구 9수, 오언율시 1수, 칠언절구 123수, 칠언율시 81수가 대체로 시체에 따라 배열되어있다. 내용을 예로 들면 탄 고목(嘆古木) 외 56수는 자연을 읊고, 직포(織布) 외 26수는 생활의 고뇌를 읊고, 면 이생 자순(勉李生子淳) 외 45수는 학문을 권면하며, 차 자락정 운(次自樂亭韻) 외 20수는 차운하고,만 묵헌 김공 치오(輓黙軒金公致五)외 11수는 만시(輓詩)이며, 서(書)와 답(答) 24편이 수록되었는데, 열람시 감응이 있을 것이다.
원집 2권에는 논어강설(論語講說)을 비롯한 26편의 잡저(雜著), 6편의 서(序), 23편의 기(記)가 수록되어 있다. 서(書) 중에 상답추사오장(上答秋史吳丈)의 요지는 추사 오창수가 좋은 학생을 보내 가르침을 부탁함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많은 편달을 바란다는 취지이며, 답 후계 서정권(答後溪徐正權)의 요지는 후계가 궁핍한 선생을 위하여 쌀과 담배를 보내주었으므로 사례하는 내용이다.
원집 3권에는 8편의 제문, 6편의 상량문, 13편의 행장이 수록되어있다. 제문 중에 제선비박씨문(祭先妣朴氏文)에는 선비(先妣)의 생신에 올리는 제문과 선비의 대상(大祥)에 올리는 제문이 수록되고, 제천기우문(祭天祈雨文)은 사람을 살리기 좋아하는 하늘에 비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상량문은 압해 정씨(押海丁氏) 석류재 상량문(錫類齋上樑文)과 영석재 상량문(永錫齋上樑文) 등이다. 행장중에 당 대양군 행장 추지(唐大陽君行狀追識)의 요지는 대양군의 훌륭한 업적이 가문에 전하나 당사(唐史)에 증거가 없어 안타깝다. 전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구하면 실수가 되고 천착이 되니, 전한 바는 전한 대로 기록하고 전하지 않은 바는 전하지 않은 대로 기록한다는 취지이다. 선조고 훈련첨정 의암공 행장 추술(先祖考訓鍊僉正毅菴公行狀追述)의 요지는 항상 조문석사(朝聞夕死)의 뜻을 지니고, 명종(明宗) 년간에 훈련관이 되어 양병안민(養兵安民)의 대책을 누차 진언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집 4권에는 훈련주부 정공 묘갈명(訓鍊主簿敬齋丁公墓碣銘) 등 14편의 묘갈명(墓碣銘), 1편의 숙부인 이씨 묘비 음기(淑夫人李氏墓碑陰記), 6편의 묘표(墓表), 10편의 유사(遺事), 10편의 사실(事實)이 수록되어 있다.
원집 5권 부록(附錄)에 족질 유진(有鎭)이 쓴 만성당 상량문(晩醒堂上梁文) 1편을 비롯하여, 배석면(裵錫冕)이 쓴 만성당추기(晩醒堂追記) 1편과 문생 조성원(趙晟元)ㆍ정인면(鄭仁勉)ㆍ정대연(鄭大衍)ㆍ서석종(徐錫鍾)ㆍ정규태(丁奎泰)ㆍ서한종(徐翰鍾)ㆍ정병순(鄭昞珣)ㆍ정해준(丁海俊)ㆍ임종수(林鍾秀)ㆍ정재술(丁在述)ㆍ정규진(丁奎珎)ㆍ서상태(徐相台)가 연명으로 혹은 단독으로 올린 제문 9편과, 서한종이 쓴 행장 1편, 배석면이 찬한 묘갈 1편이 수록되었다. 이어서 문생록(門生錄)에 문생 386명이 수록되었으며, 정노수(丁魯壽)ㆍ정인면(鄭仁勉)이 쓴 발문이 각 1편씩 수록되었다.
4. 맺는 말
선생은 사림의 영수(領袖)이며 문원(文苑)의 석장(碩匠)으로서 후학으로부터 종사(宗師)로 추앙받았으나, 불행히 자손들의 부주의로 증조로부터 선생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전적(典籍)과 유고(遺稿)가 일제 강점기와 6.25의 혼란기를 거치며 자손의 부주의로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한 점 고기로 온 솥의 국맛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권 1의 주옥같은 시(詩)에서 선생의 시재(詩才)를 볼 수 있고, 권 1의 서(書)와 권 2의 잡저(雜著)에서 선생의 개왕개래(繼往開來)의 정신을 볼 수 있으며, 잡저의 〈논어 강설〉에서는 정연한 학문적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이 글 전체를 통하여 선생의 고매한 사상과 탁월한 품격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8월 일
東洋文獻學會 文會齋에서
講長 盧 炳 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