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입성 ‘미영 주우적삼’에 얽힌 사연들
(중의 적삼시리즈 4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지난 1970년대까지 ‘미영베 주우적삼’이라는 ‘입성’이 있었다. 무명베로 지은 ‘중의적삼’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입성’이란 표준어(標準語)로 ‘옷’이란 말이다.
솜옷은 ‘소케입성(솜을 넣은 핫옷)’이라 하고, 겹옷은 ‘겹입성’, 솜옷은 ‘솜입성’, 속옷은 ‘속입성’이라고 한다. “입성이 날개”라는 금언(金言)이 있는데, 이는 ‘옷이 좋으면 사람이 한층 돋보이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미영베 주우적삼’은 ‘무명 중의적삼’의 사투리다. 이하에서는 표준어(標準語)인 ‘무명 중의적삼’, '무명중의저고리' 또는 ‘무명 치마저고리’로 통일한다.
무명 중의적삼
‘무명 중의적삼’은 주로 봄가을에 지어 입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은 서민가정(庶民家庭)에서는 한겨울에도 ‘무명 중의적삼’을 겹으로 지은 겹저고리와 겹바지를 입기도 했고, 두 벌을 껴입기도 했었다.
‘무명 중의적삼’의 재료(材料)인 목화를 재배할 밭이 없거나, 소작인(小作人)들의 경우 주인의 허락 없이 곡식이 아닌 목화(木花)를 함부로 심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명 중의적삼’은 목화에서 채취(採取)한 솜에서 실을 뽑아 수직기(手織機)인 베틀에 짠 면포(綿布)로 지어 입는다.
면직물(綿織物)은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 면포(綿布)와 목(木)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색·품질·용도에 따라서 백면포·구승백면포·목홍면포·오색목·백목·극세목·백세목·관목·생상목·홍세목·황세목·초록목·남목·자목·홍목·흑목·아청목 등 각양각색(各樣各色)으로 명명되었다.
무명 베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서는 재래식 베틀로 제직(製織)된 면평직물이 ‘무명’으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명은 광목(廣木)·옥양목(玉洋木)·서양목과 같은 면직물(綿織物)과 구별되어 명명된 우리나라의 토속 직물(織物)로서, 실용적인 춘하추동의 의복 재료 및 침구, 기타 생활용품 재료로 가장 많이 이용된 직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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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무명베로 만드는 바지와 관련한 내력(來歷)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바지에는 ‘바지’와 ‘고이’ 등 두 가지 계통이 있는데, 한자어로는 고의(袴衣)·경의(脛衣)·각의(脚衣)로 표기된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가 심한 우리나라는 어한(禦寒)과 내열(內熱)에 알맞은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는 북방계(北方界) 복식으로, 바지 착용의 역사는 옛 삼한시대(三韓時代)로부터 시작되었다.
무명 중의적삼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삼국시대의 바지에 대한 기록이 있어 능고(綾袴)·청금고·적고 등이 보인다. 또 ‘삼국사기’ 색복조(色服條) 부인복 중에도 ‘고(袴 ; 袴衣 ; 바지)’가 기록되어 있어, 삼국의 남녀 모두가 바지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가지 바지의 명칭(名稱)은 그 모양이나 사용된 옷감, 색깔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가랑이가 넓은 것은 대구고·고대구·태구고, 길이가 긴 것은 장고, 옷감의 종류와 색에 따라 갈고·적황고·청금고·능고 등으로 불리어 졌다.
옛적 벽화(壁畵)에 나타난 바지의 모양은 크게 바지가랑이가 넓은 관고(寬袴)와 관고보다 가랑이가 좁은 세고(細袴), 그리고 가랑이가 짧은 ‘곤(袞)’이 있다.
무명 바지의 재료 목화밭
바지의 폭은 계급(階級)의 상하에 따라 다르게 정하기도 했다. 귀인은 ‘관고’를 입었고, 시중드는 사람은 ‘세고(細袴)’를 입었다. 그리고 ‘관고’는 모두 ‘바지부리’를 묶었는데, ‘세고’는 묶지 않은 채 ‘부리’ 끝에 별색(別色)의 선을 대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리’는 물건의 끝이 뾰족한 부분, 즉 바지의 경우 가랑이 끝을 말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곤(袞)’은 장수나 수문장·역사(力士) 또는 씨름하는 사람들이 주로 입었는데, 이는 근세에서 상용하던 여름용 ‘잠방이’와 비슷한 것이었다.
통일신라시대의 흥덕왕 당시 복식금제(服飾禁制, 834)에서는 남녀 바지의 옷감에 대한 제한이 있었으나, 남녀 모두가 겉옷으로 입는 바지의 형태에 대해서는 제한(制限)을 두지 않았다.
고려시대는 바지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를 거의 볼 수 없다. ‘고려도경’ 장위조(仗衛條)에 궁고·백저궁고(白紵窮袴)가 보이고,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쇠코잠방이(犢鼻絹)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무명옷의 산실 목화밭
조선시대는 탁지정례·국혼정례·상방정례·가례도감의궤·궁중의대발기(宮中衣闕撥記)에 바지와 이의(裏衣)·말군(襪裙)을 만들어 입었고, 봄·가을은 숙고사·진주사 등으로 겹바지를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말한 ‘말군(襪裙)’은 조선 시대 때, 양반댁이나 궁중의 여인들이 치마 위에 입던 통이 매우 넓은 바지를 말하는데, 두 가랑이의 바지에 허리끈이 달리고 뒤가 열려 있어 말을 탈 때 입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바지의 한 가지 특징은 고대(古代)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옷의 기본복식(基本服飾)으로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다만, 바지의 경우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 ‘사폭(邪幅)’이 조금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정도의 변화뿐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폭(邪幅)’은 남자 바지의 마루폭의 안쪽과 허리에 잇대어 붙이는 크고 작은 네 쪽의 폭(幅)을 말한다.
남자바지의 사폭
‘바지’는 하의(下衣)의 기본으로서 옷감으로는 서민의 경우 여름에는 삼베, 봄가을과 겨울에는 무명을 사용했고, 부유층에서는 여름에는 모시·고급삼베(안동포) 또는 엷은 비단천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겨울에는 옥양목(玉洋木)·명주(明紬)·모직(毛織) 등을 이용하였다.
다음, ‘고의(袴衣)’는 여름철에 입는 홑바지로 단고(單袴) 또는 단의(單衣)라고도 하는데, 옷감으로는 여름의 경우 모시·삼베(안동포)를 사용하고 봄가을의 것은 ‘무명’이나 광목을 사용하였다. 겨울에는 무명 겹바지에 솜을 둔 ‘핫바지’를 착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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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한평생을 통해 무명을 심고 가꾸어 감기는 눈을 비비며, 베를 짜시던 애환(哀歡)의 삶을 반추하면서 목화재배와 무명농사의 과정(過程)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여름 어느 고속도로(高速道路)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화단에 관상용 무명(木花)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고향마을 ‘누부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이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꽃이기 때문이었다.
무명 꽃
처음 피어날 때 |
꽃이 질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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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때 소중(所重)했던 우리네 농사 품목이 한쪽으로 밀려나 관상용(觀象用)으로만 본다는 사실이 여간 서글픈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 한 분이 잠자리 날개 같이 한들거리는 그 꽃잎을 만져본다. 잠시 잊고 살아온 지난 세월을 반추(反芻)하시리라.
옛적 혼수(婚需)에는 솜이불 무게가 몇 근(斤)인가에 따라 친정어머니의 주가(株價)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며느리가 해 온 이불솜이 얇으면 두고두고 시집살이를 해야 했고, 친정(親庭) 어머니까지 미움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무명 가꾸기에 온 힘을 쏟았는지 짐작이 간다.
목화 밭
여기에서는 이러한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던 그 시절의 ‘무명’ 농사와 관련한 얘기를 조금 구체적(具體的)으로 곁들이고자 한다. 회원님들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시절에는 농가에서의 ‘무명’ 재배(栽培)는 벼농사 다음으로 소중한 농사였다.
무명농사를 지으려면, 우선 무명씨앗을 밭에 파종(播種)하여야 하는데, 전년도에 목화송이에서 발라놓은 무명씨는 겉 표면(表面)에 솜이 남아있어 낱알이 모두 한 덩어리로 엉겨있어 하나하나 분리(分離)하는 작업을 선행하여야 한다.
3월이 되면 그 씨앗뭉치에 나뭇재를 골고루 묻히고, ‘소매(오줌)’를 뿌려 비빈다. 그래야 무명 씨앗이 낱낱이 따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오줌이 흠뻑 젖은 나뭇재와 목화씨 뭉치에서 목화씨가 낱개로 분리(分離)되도록 맨손으로 비벼 짚으로 만든 소쿠리 등에 정성스레 보관(保管)해 둔다. 당시에는 고무장갑은커녕 목장갑도 없어 모든 것은 맨손으로 처리했었다.
목화 씨앗
이렇게 손질한 목화씨는 ‘손’이 없는 좋은 날을 골라 목화송이가 하얀 뭉게구름처럼 잘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잘 ‘고른’ 고랑에 정성(精誠)껏 목화씨를 심는다.
여기에서 ‘고르다’라는 말은 다른 것들에 견주어 치우치거나, 들쭉날쭉한 데가 없이 한결같다는 뜻의 말이다. 밭고랑이 평평하게 잘 정리(整理)된 상태를 말한다.
목화씨를 심을 때는 포기 사이의 간격(間隔)을 좁게 심어도 목화의 ‘대’가 약하지만, 드문드문 심으면 ‘대’가 너무 크게 자라기 때문에 80cm정도의 간격을 두는 것이 가장 좋다. 여기에서의 ‘대’는 목화의 줄기를 이르는 말이다.
목화 심기
이렇게 심어놓은 목화가 어느 정도 자라면, 커다란 꽃이 피는데, 처음에는 연노랑 빛깔의 큰 꽃으로 피어 연분홍색으로 만개하였다가 자주색깔로 변하여 송이채 떨어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생겨난 ‘다래(목화열매)’가 익으면, 솜사탕 같은 솜꽃을 피어낸다.
그리고 목화 잎이 너무 무성(茂盛)해지면, 목화 꽃이 햇빛을 받지 못해 고사(枯死)하거나, 수정(受精)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성한 가지의 순을 치는데,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순을 치기보다는 ‘다래’를 따먹는 재미로 어머니를 따라 다니곤 했었다.
파란 ‘다래’ 안에는 마늘쪽 같은 열매가 생겨나는데, 그 맛이 달짝지근하여 등하교(登下校) 길에 남의 목화밭에 들어가 ‘다래’를 따먹다가 혼찌검이 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래(추래)
‘다래’가 너무 맛 좋아 옛적에는 고부(姑婦) 간에 함께 ‘미영’ 밭에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기도 했었다. 너무나 배가 고픈 시절이라 아무리 소중(所重)한 무명열매라도 서로 몰래 따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서로에게 들키면, 시어머니는 그동안 고수(固守)해 온 시어머니로서의 권위(權威)가 땅에 떨어지고, 며느리는 그때부터 미운털이 박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다래’를 ‘추래’라고도 한다. “추래가 익어가 미영이 되고, 미영으로 베를 짜가 옷을 해 입는데, 위선 달다꼬 그 ‘추래’로 따 묵우머 어짜노”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목화열매가 익어서 무명이 되고, 무명으로 베를 짜서 옷을 해 입는데, 우선 달다고 그 ‘목화열매’를 따 먹으면 어떡해”라는 뜻이다.
연하고 푸른 ‘다래’는 시일이 지나면 붉은 빛을 띠고 딴딴해져 여름날 태양을 맘껏 쬐다가 초가을이 되면 흰 뭉게구름처럼 터져 올라 새하얀 목화(木花)가 되는 것이다. 목화솜에 티끌이 묻지 않게 따려면 아침이슬이 내린 오전(午前)이 기장 좋은 시간이다.
그 시절 꿀맛 같던 ‘미영 다래’
이렇게 딴 목화송이는 온가족이 호롱불 아래 둘러앉아 ‘무명 씨’를 빼낸다. 그리고 씨를 빼난 목화송이는 좋은 송이와 나쁜 송이를 따로 따로 말려서 상품(上品)은 ‘열새 무명베’로 만들고, 신통찮은 송이는 ‘일곱 새 무명실’로 분류(分類)하여 주로 이불솜과 핫바지 솜으로 사용하였다.
잘 말린 ‘미영송이’는 솜틀집(눌린 솜을 도톰하고 풍성하게 해 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가게)에 가서 솜을 타다가 반듯한 수숫대로 솜을 둥글게 말아 둘레가 지금의 떡볶이 같은 크기의 ‘솜고치(물레로 실을 잣기 위하여 말아 빼놓은 솜뭉치)’를 만들어 둔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솜고치는 ‘물레’로 자아 실을 뽑는데, 이때는 실뽑기 품앗이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여기에서 ‘잣다’라는 말은 사람이 실을 기계(機械)나 ‘물레’ 따위를 돌려 뽑는다는 말이다.
솜틀집에서 솜을 타서 돌아오는 길
노모(老母)는 머리가 파묻힐 정도로 무거운 짐을 이고도 발걸음이 가볍다. 시집갈 딸을 위해 며칠이고 밤을 새며 혼수품으로 보낼 이불솜이다
또한 ‘물레’는 섬유(纖維)를 자아서 실을 만드는 초기형태의 도구로 ‘물레’에서 뽑아낸 실로는 베틀에서 천을 짰다. ‘물레’가 발명(發明)된 곳이 인도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며, 중세에 근동(近東)을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
‘물레’ 이전에 손으로 섬유를 잣던 원시적(原始的)인 방법은 막대기에 달아놓은 털뭉치에서 실을 뽑아낸 뒤 마주 꼬아서 긴 가닥을 만들고, 이것을 다른 막대기에 다시 감는 것이었다.
‘물레’를 사용하는 첫 번째 단계는 ‘물레축(굴똥)’을 받침대에 수평으로 끼워서, 손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큰 물레바퀴에 실이 감기면서 회전(回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굴똥’은 ‘물레’의 중심에 있어 물레바퀴를 돌리는 둥근 나무를 말한다.
물 레
그리고 섬유(纖維) 뭉치가 감겨 있는 ‘가락’을 왼손에 쥐고, 물레바퀴를 오른손으로 돌리면 된다. 이때 ‘가락’에 감겨 있는 섬유(纖維)의 일정한 각도(角度)에 따라 필요한 정도의 꼬임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의 ‘가락’은 물레에 ‘가락’을 걸기 위해 ‘괴머리’의 두 기둥에 고리처럼 만들어 박은 물건을 말하고, ‘괴머리’는 ‘물레’의 왼쪽, 가로대 끝부분에 놓는 받침 나무를 말하는데, 양쪽에 ‘괴머리기둥’을 박고 ‘가락’을 걸 수 있는 고리 모양의 ‘가락고동’을 달아둔다.
그리고 ‘가락고동’은 물레에 ‘가락’을 걸기 위해 ‘괴머리’의 두 기둥에 고리처럼 만들어 박은 물건을 말한다. 회원 여러분께서는 물레의 구조나 부속품(附屬品)을 아무리 설명 드려도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아래 그림을 보시고 적당히 파악(把握)하신 후 그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분은 그냥 넘어가시기 바란다.
물레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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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 유럽에 처음 소개된 ‘색슨(또는 색스니) 물레’는 실을 계속 감을 수 있는 실패와 함께 사용했으며, 수직(垂直)으로 고정시킨 막대에 섬유뭉치를 감았다.
또 이 ‘물레’는 발판을 밟아서 움직였기 때문에 양손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18세기 영국에서 개량직기(改良織機)가 등장하면서 그 직기에 제공할 실이 부족해지자 실의 대량생산(大量生産)이 요구되었다.
그 결과 기계방적(機械紡績)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면서 기존의 ‘물레’를 대신하는 동력(動力)과 기계를 이용한 여러 가지 발명품(發明品)이 등장해 산업혁명(産業革命)의 한 부분이 되었다.
물 레
우리나라에서도 ‘물레’가 오래전부터 쓰였는데, 나무로 된 여러 개의 ‘살’을 끈으로 얽어매어 보통 6각과 8각 또는 원형(圓形)의 ‘둘레’를 만들고, 가운데에 ‘굴대’를 박아 손잡이로 돌리게 되어 있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 사용하던 물레는 주로 원형물레였다.
‘물레’의 모양과 부분명칭(部分名稱)은 지역에 따라 다르나 대략 다음과 같다. 나무로 된 여러 개의 ‘물레살’을 ‘동줄’로 얽어매어 보통 6각이나 8각, 원형의 둘레를 만들고 가운데에 ‘굴똥’을 박아 ‘꼭지마리’로 돌리게 되어있다. ‘물레’ 바탕에 연결된 ‘가랫장’ 끝에 ‘괴머리’를 끼었다 뺐다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괴머리’에는 두 개의 기둥에 각각 ‘쇠고동’을 박아 ‘가락’을 끼울 수 있게 했으며, ‘물레태(줄)’로 물레바퀴와 ‘가락’을 걸어서 돌아갈 때 ‘고치’에서 실이 드려지게 했다.
여기에서의 ‘물레태’는 물레의 바퀴를 말하는데, ‘태’라는 말은 우리들의 고향에서 사용하는 ‘동태’의 축약형(縮約形)이다. ‘동태’란 바퀴나 굴렁쇠를 말하는데, 동태바꾸, 바꾸, 발통이라고도 한다.
설명(說明)을 하면 할수록 도무지 무슨 말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회원님들께서는 아래 그림을 참고하시고, 그래도 이해(理解)가 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시기 바란다.
물레 잦기
본론으로 돌아간다. 좁다란 시골 방안에 대여섯 대 정도 되는 ‘물레’를 놓고 무영 잣기 품앗이가 시작되면, 어머니들의 머리는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무명 털’이 덮였고, 말아놓은 ‘고치’를 왼손으로 잡아 실 가락 끝에 대고 오른손으로 ‘물레’를 돌리면, 하얀 실이 마술(馬術)처럼 뽑아져 나왔다.
일제히 손을 들어 올려 가만히 내려놓으면서 ‘물레 실’ 가락에 실을 감아올리는 기술은 기계(機械)처럼 정확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물레가 돌아가는 소리가 어머니들의 성격(性格)에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아낙들은 성깔 있게 물레를 돌려 요란한 소리가 나고, 어떤 이는 부드러우면서도 시름없이 돌아가는 소리도 있었다. 주인과 ‘물레’가 한 평생을 같이하다 보니 사람의 성격(性格)과 ‘물레’소리가 서로 닮은 모습이 된 것이다.
미영 잣기 물레질 품앗이
깊은 밤 끊어질듯 이어지는 어머니의 ‘물레’소리와 벽에 비치는 어머니의 뒷모습 그림자는 액자(額子)처럼 한겨울 내내 벽에 걸려있었다. 그런데 필자들은 그 어머니의 물레 소리가 듣기 싫어 짜증을 내기도 했었다.
결국 언제나 어머니보다 먼저 잠이 들었지만, 때로는 ‘물레’소리와 벽면에 커다랗게 그려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싫어서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쓴 뒤 억지로 잠을 청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큰 불효(不孝)를 저지른 것 같아 여간 가슴이 아프지 않다.
‘물레’가 빙빙 돌다가 실을 뽑아 올릴 때 내는 그 시절의 ‘물레’ 소리는 어머니들의 한(恨)을 끌어 올리는 소리였고, 손을 내릴 때 내는 ‘물레’ 소리는 체념(滯念)으로 다시 돌아가는 소리와 몸짓이기도 했었다.
필자도 가끔 ‘물레질’을 해 본 일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잠시 이웃집으로 마실을 가시거나, 마을 앞 우물에 물을 깃기 위해 가실 때, 어머니의 ‘물레’에서 실을 뽑아내 보려고 돌렸다가 고치뭉치가 한꺼번에 말려 올라가자 어머니 몰래 그 ‘솜고치’를 버리기도 했었다.
공동 물레질
‘물레’에서 실을 뽑아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한숨을 ‘물레’와 함께 돌려야하는지도 모르면서 섣불리 도전(挑戰)한 대가였다.
이렇게 자아 놓은 실 꾸러미는 마당에 ‘나틀’을 놓고, 그 ‘나틀’ 구멍에 한 올 한 올 꿰어 실을 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틀’은 베실을 뽑아 날아 내는 기구(器具)를 말하고, ‘난다’는 말은 사람이 명주(明紬)나 베, 무명 따위를 길게 늘여 실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때 구멍의 수에 따라 ‘열 새 무명베’가 되거나, ‘일곱 새 무명베’로 나누어진다. ‘새’라는 말은 옷감의 굵고 가는 짜임새를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로 ‘새’가 높을수록 올이 가늘고 옷감이 곱다.
‘물레’를 자아놓은 실을 ‘들말’에 ‘도투마리’를 올려놓고 베를 매는데, 베를 매는 불은 매우 조심해서 조절(調節)해야 한다. 불이 너무 뜨거우면 실이 꼬실라지기 쉽고 너무 약하면 실이 풀려 헤지기 때문이다.
도투마리
여기에서 말한 ‘들말’은 베를 짜는 일에 쓰이는 용구(用具)로 ‘도투마리’를 지탱하는 작용을 한다. 디딜방아의 가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움직이지 않도록 무거운 돌로 눌러두기도 한다. ‘도투마리’는 앞쪽 파일에서 이미 설명 드린 대로 베를 짤 때 ‘날실’을 감는 틀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매다’라는 말은 옷감을 짜기 위하여 날아 놓은 ‘날실’에 풀을 먹이고, 고루 다듬어 말리어 ‘도투마리’에 감는다는 말이다.
뱁댕이
베를 맬 적에는 소나무 뿌리로 만든 ‘삼솔’로 ‘날실’에 ‘좁쌀풀’을 발라 왕겨불에 말려 빳빳하게 한다. 도투마리에 날실을 감을 때는 ‘뱁댕이’(삼 껍질 벗겨내고 난 겨릅대 ; 우리들의 고향에서는 ‘재랍’이라고 한다)를 틈틈이 끼워 넣어 실이 서로 붙지 않게 한다.
베를 맬 때는 또 ‘바디’를 끼워야 하는데, ‘도투마리’에 감은 날실을 베틀에 올려놓고 날실에 ‘잉앗줄’을 걸고 나면 베를 짤 수 있다.
특히 ‘무명베’를 맬 때는 정갈하게 보관(保管)했던 ‘뱁댕이’를 넣어가면서 ‘도투마리’에 감아야 하는데, 지금은 모두 천국으로 가셨지만, 옛적 필자의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둘이서 사이좋게 베매기 작업을 하셨다.
베매기
이러한 ‘베매기’를 마치면, 어머니께서는 날실을 감은 ‘도투마리’를 베틀 위에 얹어 겨우내 밤마다 베를 짜셨다. 이불보나 색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씨실’(필로 된 베, 무명, 비단 따위에 가로놓여서 짜인 실)을 담은 ‘북’을 여러 개 준비해 놓고, 곱게 물들인 실 가락을 넣어 번갈아 가면서 짜면 바둑판 이불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금처럼 전깃불이 있었다면 오죽이나 좋았을까마는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희미한 호롱불 아래에서도 겨우내 찰카닥 찰카닥 무명베를 짜셨다.
어머니의 발에 ‘베틀신’이 걸어지고 그것을 잡아당기면, 실을 걸어 올리는 ‘잉아’가 한 겹 실을 들어올린다. 그 찰나 오른손으로 실이 든 ‘북통’이 지나가고 왼손으로는 ‘바디’를 앞으로 잡아당겨 실오라기 한 겹을 치면, 무명실은 ‘용두머리’에 의해서 교차(交叉)하고, 한 올의 실이 베로 짜이게 된다.
여기에서 말한 ‘베틀신’은 베틀의 ‘용두머리’를 돌리기 위하여 ‘신대’ 끝에 줄로 이어서 달아 놓은 외짝 신을 말하고, ‘잉아’는 베틀의 날실을 엇바꾸어 끌어올리도록 맨 굵은 실을 말한다.
베틀신
그리고 ‘바디’는 흔히 가늘고 얇은 대오리를 참빗살 같이 세우고 단단하게 실을 얽어서 만든 것이고, ‘용두머리’란 베틀 앞다리 위쪽에 있어, 두 개의 다리를 연결하며 ‘눈썹대’를 끼우는 둥근 나무토막을 말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회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베틀의 구조(構造)를 설명 드린다. 우선 베틀의 재료는 순 목재(木材)이며, 여러 가지 부품(部品)으로 이루어진 조립식(組立式) 기구이다.
베틀의 모양은 두개의 ‘누운다리’에 구멍을 뚫어 ‘앞다리’와 ‘뒷다리’를 세우고, ‘가랫장’으로 고정(固定)시킨 것이다. 여기에 ‘앞다리’에는 아래쪽에 ‘도투마리’를 얹고, 위쪽 ‘용두머리’에는 ‘나부산대’를 길게 연결(連結)해 그 끝의 ‘눈썹노리’에 ‘잉아’를 걸었다.
베틀의 구조
여기에서 말한 ‘누운다리’는 ‘눈다리’라고도 하는데, 베틀을 지탱하는 가로로 나란히 누운 굵고 긴 두 개의 나무를 말한다. 그리고 ‘가랫장’은 ‘가로대’라고도 하는데, ‘고싸움’ 놀이에 쓰이는 ‘고’의 머리 쪽에 가로 댄 나무, 또는 가로지르거나 가로로 덧댄 물건을 말한다.
‘고싸움’에서는 ‘멜꾼’들이 이것을 어깨에 메고 손을 받쳐 들어서 ‘고’를 움직인다. 여기에서의 ‘고싸움’은 전남(全南) 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하는 민속놀이를 말하며, ‘고’는 옷고름이나 노끈 따위의 매듭이 풀리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맨 것을 말한다.
다음, ‘나부산대’는 베틀에서 ‘용두머리’ 양끝에 베를 짜는 사람 쪽으로 뻗어 있는 가늘고 긴 두 개의 막대기를 말하고, ‘앞다리’는 ‘선다리’라고도 하는데, 베틀 ‘눈다리(누운다리)’의 앞쪽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 박아 세운 기둥으로 위에는 ‘용두머리’를 얹고 앞에는 ‘도투마리’가 놓인다.
그리고 ‘뒷다리’는 ‘베틀다리’의 뒤를 버티는 짧은 기둥으로 이 위에 ‘앉을개’를 걸쳐놓는다. ‘눈썹노리’는 ‘눈썹대’의 끝 부분을 말하고, ‘눈썹대’는 ‘용두머리’ 앞으로 나란히 내뻗친 두 개의 가는 막대기로 그 끝에 ‘눈썹줄’이 달려 있다.
베짜기
또한 ‘눈썹줄’은 ‘눈썹대’ 끝에 ‘잉앗대’를 거는 줄을 말하고, ‘잉앗대’는 위로는 ‘눈썹줄’에 대고 아래로는 ‘잉아’를 걸어 놓은 나무를 말하며, ‘잉아’는 베틀의 날실을 끌어올리도록 맨 실을 말한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잉앗대’는 ‘말코’에 걸어 ‘부티’로 모이며, ‘부티허리’는 뒷다리 위에 얹힌 ‘앉을개’에 앉는 사람의 허리에 두르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티’는 피륙을 짤 때 베틀의 ‘말코’ 두 끝에 끈을 매어 허리에 두르는 넓은 띠로 나무나 가죽 또는 ‘베붙이’(삼실, 명주실, 무명실 따위로 짠 피륙에 속하는 천)나 짚으로 짜서 만들기도 한다. ‘앉을개’는 베를 짜는 사람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베 짜기
이외에도 베틀의 부속품(附屬品)은 상당히 많은데, 각각의 부속품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눈썹끈’은 ‘눈썹대’ 끝에 ‘잉앗대’를 거는 줄이고, ‘잉앗대’ 밑에 들어가는 나무는 ‘속대’라고 한다. ‘속대’는 ‘잉앗대’ 밑에 들어간 나무 각목을 말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베를 짤 때는 배 모양으로 생긴 ‘북’ 속에 ‘씨실’로 사용하는 ‘실꾸리’를 넣은 다음 ‘북바늘’로 눌러서 실 뭉치가 솟아나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씨실’을 ‘날실’과 교차(交叉)시킨다.
여기에서 말하는 ‘북’은 베틀에 딸린 부속품(附屬品)의 한 가지로 씨올(씨실)의 ‘실꾸리’를 넣는 기구로 ‘날실’의 틈으로 왔다갔다 하며, 씨실을 풀어 주는 기능을 한다.
북
이때 ‘날실’을 고르며 ‘북’의 통로(通路)를 만들어주고, 씨실을 쳐주는 것이 ‘바디’인데, ‘바디’란 베의 날을 고르며 ‘북’의 통로를 만들어 주고 실을 쳐서 짜는 구실을 한다.
가늘고 얇은 대오리를 참빗살 같이 세워 두 끝을 앞뒤로 대고, 단단하게 실로 얽어 만든다. 살의 틈마다 날을 꿰어서 씨를 짜는데, 이 일을 ‘바디질’ 또는 ‘바디친다’고 한다.
‘바디’의 위아래에는 나무를 끼워서 ‘바디집’을 만든다. 베틀에서 베를 짤 때 그 폭이 좁아지지 않고, 일정한 폭(幅)을 유지시켜주는 기구는 ‘최활’인데, ‘최활’은 활처럼 등이 휘고 끝이 뾰족하다.
어머니의 베짜기
여기에서의 ‘바디집’은 ‘바디’의 테를 말하는 것으로 홈이 있는 두 짝의 ‘바디’를 끼우고, 마구리 양편에는 ‘바디집비녀’를 꽂는다. ‘바디집비녀’는 바디집 두 짝의 머리를 잡아 꿰는 쇠나 나무를 말한다.
위에서의 ‘마구리’는 목재나 상자 따위의 양쪽 머리에 있는 면을 말하는데, 쉽게 이해하려면 회원님들이 잠자리에서 베고 자는 베개의 옆모서리를 보시면 될 것이다.
남성회원들은 물론, 베틀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여성회원님들은 이 설명(說明)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명을 구체화(具體化)하면 할수록 더 미궁(迷宮)으로 빠져 들어가기 십상이다.
베짜기
베틀이 옛 신라조(新羅朝)부터 전래되어 온 우리 어머니들의 유산(遺産)이자 애환(哀歡)의 굴레였다는 점을 유념하여 시간이 있을 때 앞쪽에 게재한 베틀의 구조도(構造圖)와 천천히 비교해 보시면, 그런대로 이해가 가시리라 믿는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일생동안 우리들의 옷가지와 이불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긴긴 겨울밤을 지새우다시피 ‘무명베’를 짜던 한(恨) 서린 기구(器具)들이었다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고 살펴보시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다. 회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베틀의 구조(構造)를 그림으로 한 번 더 게재한다.
베틀의 구조
그리고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베틀의 부품(部品)을 도표로 정리하여 게재한다. 자나 깨나 우리들의 어머니들께서 사시사철 베를 짜시던 그 시절을 추억(追憶)하면서 일별해 보시기 바란다.
명칭
|
개요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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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
머리 |
베틀 ‘앞다리’ 위쪽에 있어, 두 개의 다리를 연결하며 ‘눈썹대’를 끼우는 둥근 나무토막 |
나부
산대 |
베틀에서 ‘용두머리’ 양끝에 베를 짜는 사람 쪽으로 뻗어 있는 가늘고 긴 두 개의 막대기 |
눈썹대 |
‘용두머리’ 앞으로 나란히 내뻗친 두 개의 가는 막대기를 말하는데, 그 끝에 ‘눈썹줄’이 달려 있다. |
눈썹
노리 |
‘눈썹대’의 끝 부분 |
눈썹줄 |
‘눈썹대’ 끝에 ‘잉앗대’를 거는 줄 |
잉아 |
베틀의 ‘날실’을 끌어올리도록 맨 실 |
잉앗대 |
위로는 ‘눈썹줄’에 대고, 아래로는 ‘잉아’를 걸어 놓은 나무 |
속대 |
‘잉앗대’ 밑에 들어간 나무 |
북 |
씨실의 ‘꾸리’를 넣고 ‘북바늘’로 고정시켜 날의 틈으로 왔다 갔다 하게 해서, ‘씨실’을 풀어 주어 피륙이 짜지도록 하는 배같이 생긴 나무통 |
북바늘 |
‘북’ 속에 실꾸리를 넣은 뒤에 그것이 솟아나오지 못하도록 ‘북’의 ‘안씨울’에 끼워서 누르는 대오리. ‘북딱지’라고도 한다. |
꾸리 |
‘북’ 안에 들어 있는 실 |
바디 |
베의 날을 고르며 ‘북’의 통로를 만들어 주고 실을 쳐서 짜는 구실을 한다. 가늘고 얇은 대오리를 참빗살 같이 세워, 두 끝을 앞뒤로 대고 단단하게 실로 얽어 만든다. 살의 틈마다 날을 꿰어서 씨실을 짜는데, 이 일을 ‘바디질’ 또는 ‘바디친다’고 한다. |
바디집 |
바디의 테를 말하는데, 홈이 있는 두 짝의 ‘바디’를 끼우고, ‘마구리’ 양편에는 ‘바디집 비녀’를 꽂는다. |
바디집
비녀 |
바디집 두 짝의 머리를 잡아 꿰는 쇠나 나무 |
최활 |
베를 짜 나갈 때, 너비가 좁아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너비를 지켜 주는 가는 나무오리로 활처럼 등이 휘고 두 끝에 ‘최활’을 박았다. |
부티 |
지방에 따라서는 ‘부테’ 또는 ‘부태’라고도 하는데, 피륙을 짤 때 베틀의 ‘말코’ 두 끝에 끈을 매어 허리에 두르는 넓은 띠로 나무나 가죽 또는 ‘베붙이’나 짚으로 짜서 만들기도 한다. |
부티끈 |
베틀의 ‘말코’ 두 끝과 ‘부티’ 사이에 맨 끈 |
말코 |
짜여 나오는 피륙을 잡는 대로 ‘부티끈’을 양쪽에 잡아맨다. |
앉을개 |
사람이 앉는 자리 |
앞다리
(선다리) |
‘베틀 앞기둥’ 또는 ‘선다리’라고도 하는데, 베틀 ‘눈다리’(누운다리)의 앞쪽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 박아 세운 기둥으로 위에는 ‘용두머리’를 얹고 앞에는 ‘도투마리’가 놓인다. |
뒷다리 |
‘베틀다리’의 뒤를 버티는 짧은 기둥으로 이 위에 ‘앉을개’를 걸쳐놓는다. |
다올대
(밀대) |
‘베날’을 풀기 위하여 ‘도투마리’를 밀어서 넘기는 막대 |
끌신 |
‘베틀신’이라고도 하는데, ‘용두마리’를 돌리기 위하여 신끈 끝에 잡아맨 신으로 한쪽 발에 신고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한다. |
베틀
신끈 |
‘베틀신대’의 끝과 신(주로 짚신)을 연결한 끈 |
가로대
(가랫장) |
‘가랫장’이라고도 하는데, 두 ‘베틀다리’ 사이에 가로지른 나무 |
눌림대 |
‘잉아’ 뒤에 있어 ‘베날’을 누르는 막대 |
눌림끈 |
베틀에서 ‘눌림대’에 걸어 베틀 ‘눈다리’에 매는 끈 |
눈다리
(누운다리) |
기다랗게 누워 있다 해서 ‘누운다리’라고도 하는데, 베틀을 지탱하는 가로로 나란히 누운 굵고 긴 두 개의 나무 |
비경이 |
가는 나무오리 세 개를 얼레 비슷하게 벌려 만든 것으로 ‘잉아’ 뒤와 ‘사침대’ 앞의 중간에 있어서 날실을 걸친다. |
베틀
신대 |
베틀의 ‘용두머리’ 중간에 박아 뒤로 내뻗친 조금 굽은 막대로 그 끝에 ‘베틀신끈’이 달렸다. |
사침대 |
‘비경이’ 옆에 있어서 날의 사이를 벌려 주는 구실을 하는 두 개로 된 나무나 대 |
도투
마리 |
날을 감아 베틀 앞다리 너머 ‘채머리’ 위에 얹어 두는 틀 |
뱁댕이 |
‘도투마리’에 감은 날이 서로 붙지 못하게 사이에 끼우는 막대 |
베틀의 부속품(附屬品) 종류가 너무 많고 생소(生疎)하여 필자도 어슴푸레한 기억을 더듬어 겨우 알아낼 정도라 회원님들에게 괜한 부담(負擔)을 드리는 것 같아 여간 송구스럽지가 않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짜인 무명베가 점점 불어나면, 허리에 ‘부테’와 연결(連結)된 ‘말코’에 베를 감아 한필이 짜지면 가위로 베어 낸다. ‘말코’는 짜여 나오는 피륙을 잡는 ‘대’(가늘고 긴 막대)로 ‘부티끈(부태끈)’을 양쪽에 잡아맨다.
그리고 이렇게 베어낸 ‘무명베’는 어머니께서 검은 물을 들이고 풀을 먹여 방망이로 곱게 다듬어 윤을 낸 다음, 또 다시 밤을 지세우면서 손 박음질 바느질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의 옷을 짓고, 우리들의 일상복(日常服)과 교복(校服)을 만들어 주셨다.
그 시절 아이들의 무명베 교복
(1942년 입실공립보통학교(지금의 입실초등학교) 학생들이
‘새말’ 어느 장소로 소풍을 가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다음은 조금은 등급(等級)이 떨어지는 남은 무명베로 쪽물을 들여 고모님의 치마저고리를 지으시고, 당신의 무명치마에는 검은색 물을 들여 ‘밤물치마’를 만들어 입으셨다.
우리가 날마다 덮고 자던 홍화(紅花) 물을 들인 빨간색 머리 깃이 달린 쪽물 남색 이불홑청도 어머니가 짠 ‘무명베’였다.
때가 덜 타게 하려고 풀을 빳빳하게 먹인 이불홑청으로 만든 ‘핫이불’을 덮은 채 우리 형제들은 일렬(一列)로 누워 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어머니께서 짠 ‘무명베’ 덕분이었다.
딸이 있는 가정에서는 시집보낼 딸의 이불솜은 제일 좋은 것을 모아두었다가 그 딸이 시집갈 때, ‘새’수가 높은 무명베 홑청에 두툼한 솜을 둔 이불을 세 채 정도 만들어 주고, 이불홑청도 두어 개 정도 더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낡으면 갈아 끼우라고 여러 필의 무명베를 더 주시기도 하셨다.
베틀 구조
그러나 지금은 우리들의 어머니들께서 일생동안 만드시던 ‘무명베’도, ‘물레’도, ‘베틀’도 모두 사라지고 없어졌다. 그리고 해마다 밤마다 베틀에 앉아 한(恨) 서린 신세타령을 하시던 그 시절 어머니들도 이제는 영원히 되오지 못할 영겁(永劫)의 세계로 떠나가셨다.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을 살아가시던 우리들 어머니의 무명베 인생을 그리워하는 박걸주의 ‘추석빔 무명베옷’을 음미해 본다.
추석빔 무명베옷
박걸주
먹빛 까맣게
물들이고 재봉틀에 꼭꼭 박은
추석빔 무명베옷
온갖 투정 다 부리고 내팽개쳤던
당신, 일하실 때 그 옷 입으셨든가
옛 그리워 심어 놓은
목화 몇 포기
포기 마다 알알이 그리운 생각들
오돌토돌 올올이
요사이야 무명베옷,
멋에 겨워 입을 텐데
찰가닥찰가닥 베틀소리
들을 수 없는, 가슴을 저미는
먹빛 그리움
|
세월(歲月)이 지날수록 그 시절 어머니들의 물레소리, 베 짜는 소리, 실꾸리를 감으면서 흥얼거리던 한탄(恨歎)의 소리도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효과음(效果音)처럼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회원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시절, 베 짜는 일은 오로지 여성(女性)들의 일이었다. 그래서 친정(親庭)에서 길쌈을 배우지 못하고 시집간 여인은 심하게 구박(驅迫)을 받았고, 소박(疏薄)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하루 종일 논과 밭에서 힘겨운 농사일을 하시고도 파김치가 된 몸으로 베틀에 올라 신세타령인 ‘베틀노래’를 부르면서 삼베와 무명베를 짜야만 했었다.
베 짜기
그래서 그때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쪽을 찐 뒷모습으로, 뒷산에서 우는 뻐꾹새 소리에 맞춰 이루어내던 베 짜던 소리는 숱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아직 우리들의 귀에 삼삼히 살아나는 것이다.
“달그닥 찰칵! 째그락 딸깍!”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면, 베틀은 흡사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용두머리’ 고운 소리에 맞춰 ‘눈썹대’가 오르내리고, ‘잉앗대’가 갈라주는 날실 사이로 북이 날고, ‘바딧집’이 내리치고, “달그닥 찰칵! 째그락 딸깍!” 어머니 눈앞에 있던 짜여진 베가 어느새 두루마리에 감기면 점심때가 된다.
그러나 그 시절 어머니들은 좀체 베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다. 며칠 밤 며칠 낮을 땀띠에 시달리며 모기에 시달리며, ‘도투마리’에 감긴 삼실이 다 풀릴 때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끝도 없이 씨름을 하시는 것이다.
베 짜기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고초당초 매운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철마다 날마다 베틀에 앉아 삼베와 무명베를 짜며 부르시던 ‘베틀노래’를 게재하여 음미한다.
‘베틀노래’는 ‘베틀가’라고도 한다. 베 짜는 일이 지루하게 계속되므로 노래도 장형(長型)이 많은 박자 위주의 음영(吟詠)민요이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하게 불리며, 주로 베틀의 구조(構造)와 기능(技能)을 아름답게 노래한다.
베틀 위에 앉은 부녀자(婦女子)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仙女)에 비유하면서 베틀다리에서부터 시작해 '앉을개·부테·말코·용두머리' 등의 모양과 율동적(律動的)인 작업을 의인화(擬人化)하거나 자연계의 실재, 동물의 생태, 기타 현상들에 비유해 형상화(形象化)하고 있다. 가사가 너무 길어 시간이 없는 회원님들은 그냥 넘어가시기 바란다.
베틀 노래
바람은 솔솔 부는 날 구름은 둥실 뜨는 날
월궁에 놀던 선녀 옥황님께 죄를 짓고
인간으로 귀양 와서 좌우 산천 둘러보니
하실 일이 전혀 없어 금사 한 필 짜자 하고
월궁으로 치치 달아 달 가운데 계수나무
동편으로 뻗은 가지 은도끼로 찍어내어
앞집이라 김 대목아 뒷집이라 이 대목아
이내 집에 돌아와서 술도 먹고 밥도 먹고
양철간죽 백통대로 담배 한 대 피운 후에
베틀 한 대 지어 주게 먹줄로 탱과 내어
잣은 나무 굽 다듬고 굽은 나무 잣 다듬고
금대폐로 밀어내어 얼른 뚝딱 지어 내어
베틀은 좋다마는 베틀 놀 데 전혀 없네
좌우로 둘레보니 옥간난간 비었구나
베틀 놓세 베틀 놓세 옥간난에 베틀 놓세
앞다릴랑 도두 놓고 뒤다릴랑 낮게 놓고
구름에다 잉아 걸고 안개비에 꾸리 삶아
앉을깨에 앉은 선년 양귀비도 넋이로다
아미를 숙이시고 나삼을 밟아 차고
부테허리 두른 양은 만첩산중 높은 봉에
허리 안개 두른 듯이 북이라도 나는 양은
청학이 알을 품고 백운 간에 나드는 곳
바딧집 치는 양은 아양 국사 절짉 적에
전못 거는 소리로다 눈썹노리 잠긴 양은
강태공의 낚싯대가 위수강에 잠겼는 듯
사침이라 갈린 양은 칠월이라 칠석날에
견우직녀 갈리는 듯 보경잇대 지치는 양
설운 임을 이별하고 등을 밀어 밀치는 듯
잉앗대는 삼형제요 눌림대는 홀아비라
세모졌다 버기미는 올올이 갈아 놓고
가이세라 저는 양은 청룡 황룡이 굽나는 듯
용두머리 우는 양은 새벽서리 찬바람에
외기러기 짝을 잃고 늙으신네 병일런가
앉았으락 누었으라 절로 굽는 신나무는
헌신짝에 목을 매고 당겼으락 물렸으락
꼬박꼬박 늘어간다 한 낱 두 낱 뱁댕이는
도수원의 숫가진가 이리 도지고 저리 도지고
궁더러꿍 도투마리 정저리꿍 뒤넘어서
봄일기에 명주 짜내어서
은장도 드는 칼은 으르슬큰 끊어 내어
앞 냇물에 빨아다가 뒷 냇물에 헹궈다가
담장울에 널어 바래 옥 같은 풀을 해서
홍두께에 옷을 입혀 아당타당 두드려서
임외직령 지어 낼제 금가위로 베어 내어
은바늘로 폭을 붙여 은다리미 다려 내어
횟대 걸면 먼지 앉고 개어 두면 살질하고
방바닥에 던져 노니 조그마한 시누이가
들며 나며 다 밟는다
접첩접첩 곱게 개어 자개함롱 반닫이에
맵시 있게 넣어 놓고 대문 밖에 니달은면
저기 가는 저 선비님 우리 선비 오시던가
오기야 오데마는 칠성판에 누워 오데
웬말인가 웬말인가 칠성판이 웬말인가
원수로다 원수로다 서울길이 원수로다
서울길이 아니더면 우리 낭군 실았을걸
쌍교 독교 어디 두고 칠성판이 웬말인가
임아 임아 서방님아 무슨 일로 죽었는가
배가 고파 죽었던가 밥을 보고 일어나요
목이 말라 죽었던가 물을 보고 일어나요
임을 그려 죽었던가 나를 보고 일어나오
아강아강 울지 마라 네 아버지 죽었단다
스물네 명 유대군에 상엿소리 웬일인가
저승길이 멀다더니 죽고 나니 저승일세
저승길이 길 같으면 오고 가며 보련마는
저승길이 문 같으면 열고 닫고 보련마는
사장사장 옥사장아 옥문 잠깐 따놔 주오
보고지고 보고지고 우리 낭군 보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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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베 백의민족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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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민족(白衣民族)인 우리의 선대(先代)들은 6.25때도 온통 흰 ‘무명베’ 바지저고리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살았다. 피난을 갈 때도, 농사일을 할 때도, 보국대(保國隊)에 징집되어 전투부대에 보급품(補給品)을 운반할 때도 언제나 하얀 ‘무명베 중의적삼’ 차림이었다.
최전방(最前方) 전선의 경우 군인은 신병(新兵)이라 해도 국방색 군복에 철모(鐵帽)라도 썼지만, 이들 보국대원들은 맨 등짝에 지게를 걸머지고, 먼지로 절은 흰색 ‘무명베 중의적삼’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다 보급로(補給路)는 길도 없는 산등성이라 헤집고 올라가는 것도 이만저만 고역(苦役)이 아니었지만, 모든 보급로가 적(賊)의 사거리(射距離) 안에 들어있어 여차하면 적탄(敵彈)이 날아와 여기저기서 보급대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곤 했었다.
그 시절 흰옷 차림 보국대원들
국방색(國防色) 군복에 위장까지 한 군인과는 달리 사시사철 흰 무명베 중의적삼이나, 백색 핫바지저고리를 착용(着用)한 보국대원들은 그만큼 쉽게 적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여자들 사이에서도 노소간(老少間)에 바지 입는 일이 예사로워졌고, 무릎 위로 두어 뼘쯤은 올라간 짤막한 스커트를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여자들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그러나 농산어촌(農山漁村)에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주로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그것도 요즘같이 시장이나 백화점(百貨店) 같은 곳에 가서 사서 입는 기성복(旣成服)이 아니고, 손수 목화(木花)를 심고 가꾸어 거기에서 수확(收穫)한 솜을 자아서 실을 뽑아 그것을 베틀에 걸어서 짠 무명베로 만든 치마저고리였다.
지금의 미니스커트
그리고 그 시절 시골 여인들의 무명치마는 모두가 흰색이었다. 부유층(富裕層) 여인들이 입는 폭 넓은 스란치마나, 요즘 여자들이 입는 스커트처럼 멋을 부린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베틀에서 걷어 낸 무명베를 눈어림으로 듬성듬성 가위로 잘라 손바느질로 꿰맨 옷이었으니, 거기에 무슨 기품(氣稟)이 있고 운치(韻致)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어린이들은 검정색 물을 들인 무명베 중의적삼이나,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는 앞서 소개한 대로 각 도(道) 교육위원회(敎育委員會)에서 배급하는 국방색(國防色) 양복을 입은 아이들이 듬성듬성 있기는 했으나, 여자 아이들은 거의 모두 검정 무명베 치마저고리였다.
1940년대 입실 공립보통학교 여학생들의 ‘미영베 저고리’
요즘 여자들은 치마를 잘 입지 않고, 바지를 즐겨 입는다. 상당수 여성들이 계절(季節)에 따라 미니스커트를 입기도 하지만, 치마 대신에 입는 바지가 일상(日常)의 활동에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 치마를 입는다 하여도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이 많아졌고, “여자의 스커트가 아무리 올라가도 무릎을 넘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던 어느 디자이너의 말은 이제 고전(古殿) 교과서에나 나옴직한 말이 되어 버렸다.
요즘 여자들도 간혹 한복(韓服) 치마저고리를 입기는 한다. 이를테면, 설이나 추석(秋夕)에 거리에 나가 보면 한복 입은 여자가 눈에 띌 때가 있고, 결혼식장(結婚式場) 같은 데서도 띄엄띄엄 한복 차림의 여자가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미니스커트
그러나 이들의 한복은 평상복(平常服)이 아닌 예복이거나, 혹은 멋으로 입는 옷이 되어 버렸다.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입던 무명베 치마저고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어머니의 무명치마를 노래한 김난영의 ‘사모곡(思母曲)’을 음미하고 넘어간다.
사 모 곡
김난영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미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고 흙에 살던 어머니
땀에 찌든 삼베적삼 기워 입고 살으시다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가신 어머니
그 모습 그리워서 이 한 밤을 지샙니다.
무명치마 졸라매고 새벽이슬 맞으시며
한평생 모진 가난 참아내신 어머니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자나 깨나 자식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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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백의민족
여기에서는 옛 시절, 우리들이 입었던 무명베 교복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학생교복의 변천사(變遷史)를 알아보기로 한다. 옛적 필자들이 입던 교복(校服)은 거의가 ‘무명베’에 검정색 물감으로 염색한 ‘무명베’ 교복이었다.
우리나라에 교복(校服)이 등장한 것은 188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다홍색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러다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에서 자주색 원피스를 교복으로 입은 것을 계기로 여러 학교에서 검정색 짧은 통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었다.
일제시대(日帝時代)에는 우리 민족의 한복을 양복으로 전환(轉換)시키면서 학생들의 교복도 남녀 모두 양복을 입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전시복(戰時服)인 국방색 작업복(作業服)을 입게 했었다.
1882년과 1907년의 이화학당 당복(교복)
1945년 광복(光復) 이후부터는 모든 중등학교에 양복차림의 교복(校服)이 보급되면서 모자, 칼라, 표, 뺏지 등 학교마다 특색(特色)을 살린 교복을 입게 했었다.
그리고 1970년~1974년에는 중등교육(中等敎育)의 평준화에 따라 교복도 평준화(平準化)되어 여름 교복과 겨울 교복으로 구별하여 비교적(比較的) 일정한 형태의 교복을 입었다.
그러나 1982년부터는 교복자율화(校服自律化)로 교복이 폐지(廢止)되었으나, 1990년부터 다시 학교 자체로 교복을 정하여 입는 학교가 많아지고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복
교복은 단체생활을 원활하게 하고, 학생에게 면학의식(勉學意識)을 갖게 하기 위해 의도적(意圖的)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교복은 신분과 소속감(所屬感)·유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며, 학생들의 공식적(公式的)인 의복, 즉 정장의 역할을 한다.
세계적(世界的)으로 교복을 언제부터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있지만, 나폴레옹이 유사시(有事時) 학생들을 군인으로 활용하기 위해 군사훈련(軍事訓鍊)을 시키면서 통일된 교복을 입힌 것을 최초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嚴密)한 의미에서 교복이라 할 수 없으며, 정확히는 영국(英國)의 ‘이튼 칼리지’에서 교복의 시초를 살필 수 있다.
영국의 이튼 칼리지 교복
‘이튼 칼리지’의 교복은 처음에는 ‘재킷’이 파란색이나 빨강색이었지만, 1820년 조지 3세의 장례식(葬禮式)을 계기로 검은색으로 되었는데, 허리까지 오는 짧은 것이었다. ‘재킷’ 속에는 ‘조끼’를 입고 넓은 흰색 ‘플랫칼라(‘이튼칼라’라고도 함)‘가 달린 셔츠에 ’재킷‘과 같은 색의 넥타이를 맸다.
하의(下衣)는 주로 줄무늬가 있는 긴 바지를 입고, 운두가 높은 검은색 실크해트(silk hat : ‘이튼 해트’라고도 함)를 썼다. 이 교복을 시초(始初)로 서양 각국에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복을 입는데, 특히 미국(美國)에서는 유럽풍의 교육을 추종하는 명문사립학교(名門私立學校)를 중심으로 교복을 입는다.
지금의 우리나라 교복은 개화기(開化期)에 학교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남학생 교복은 미국인 선교사 ‘H.G.아펜젤러’에 의해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1898년 당복(堂服)을 학생에게 입힌 것이 시초였다.
이 당복(堂服)은 당시 일본(日本)의 학생복과 비슷한 ‘밴드칼라(쓰메에리)’ 형태였는데, 소매 끝과 바지의 솔기 부분, 그리고 모자에 청·홍선을 두른 것이었다.
배제학당 당복(교복 ; 1908년)
일본에서는 학생복이라 하여 1879년(明治12년) ‘가쿠슈인(學習院)’을 시초로 1886년(明治19년) 도쿄(東京)대학이 ‘밴드칼라’와 금단추를 제복(制服)으로 한 데서 지금에 이른다. 색은 주로 검은색, 짙은 감색, 짙은 쥐색 등이었다.
한편 1904년(광무8) 개교한 우리나라 한성중학교(漢城中學校)는 순 한국식의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색 띠를 두른 것이 교복의 역할을 했고, 여기에 모자를 써서 교표(校標)와 ‘한성’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여학생 교복의 효시(嚆矢)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1886년(고종23) 제정된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복으로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교복이었다.
일반 여성과 같은 한복(韓服)의 치마 저고리였는데, 1908년(융희2)까지 등하교할 때나, 소풍을 갈 때는 쓰개치마를 쓰게 했다. 최초의 양장교복(洋裝校服)은 1907년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에서 처음 실시하였으나, 1910년경에는 다시 한복을 착용하게 했다.
그 시절 무명 두루마기 교복
1930년대에는 본격적(本格的)으로 여러 학교에서 양장교복을 입기 시작했는데, 블라우스·스웨터·주름치마·세일러복·타이·모자 등을 주로 착용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앞에서 얘기한 한성중학교보다 4년 늦게 출범한 중앙학교(中央學校 ;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에서는 보드라운 일제 광목(廣木)으로 지은 교복을 입지 않고, 학교방침으로 무명베 교복을 입혔다는 사실이다.
관립 일본인(日本人) 학교와 같이 일제 광목으로 된 교복을 입히고, 그들이 쓴 모자를 그대로 씌울 수는 없다는 설립자(設立者)의 신념으로 ‘값싸고 질긴 우리 전래의 무명베 교복을 착용케 하여 국산품(國産品) 애용정신을 고취하려 한 것이다.
그 시절 무명베 교복(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0년대에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도 전투태세(戰鬪態勢)를 갖춘 제복을 통일하여 착용하도록 하여 여학생들은 ‘몸뻬’라는 작업복바지에 ‘블라우스’를, 남학생은 국방색(國防色) 교복을 입었다.
그 후 8·15광복(光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상하(上下) 모두 검은색 혹은 짙은 감색 중심의 교복이 착용되었다. 그리고 1969년 문교부(文敎部)의 중학교 평준화(平準化) 시책이 실시되면서 학생들의 교복도 시·도별로 획일화(劃一化)되었다.
학교의 특성(特性)을 없애기 위해 단추·모자를 포함하여 통일된 중고등학생(中高等學生)의 모습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은 1983년 교복자율화(校服自律化) 조치가 실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개방정책(開放政策)의 일환으로 내려진 교복자율화는 두발과 옷차림 등에 제한이 있어 완전 자유화는 아니었지만, 찬반의 의견 속에서 실시되었고, 1986년 2학기부터 학교장(學校長)의 재량에 따라 교복착용 여부가 결정되었다.
1930년대의 여학생 무명 교복
새롭게 착용한 교복(校服)은 이전의 획일적(劃一的)이고 딱딱한 모습과는 달리 학교에 따라 다양한 디자인과 종전보다 밝은 색상(色相)이 주류를 이룬다.
종래의 교복이 어떤 소속감(所屬感)이나 통제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면, 최근의 교복은 소속감과 함께 심미성(深味性)이나 기능성 등을 더 고려하게 되었다.
이제 교복에 대한 일반론(一般論)을 접고, 지난 1950년대에 착용하였던 필자들의 국민학교(國民學校) 국방색(國防色) 교복과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교복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국민학교(國民學校) 2학년 때부터 양복교복(洋服校服)을 입었다. 일제(日帝) 때 무명베로 만들어 놓은 소학교(小學校) 학생용 국방색(國防色 ; 감색) 양복을 운 좋게 구해 입은 것이다.
광복 직후의 남학생 무명베 교복
경상북도(慶尙北道) 교육위원회에서 단위 학교에 1년에 몇 벌씩 배정하고, 학교와 학급에서는 제비뽑기로 지급대상자를 정하면, 학부모가 대금(代金)을 지불하고 착용했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각 도 교육위원회를 통해 한 학교에 몇 벌씩 지급(支給)하다가 남은 것을 예년(例年)과 같이 지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공식교복(公式校服)은 아니었다. 베적삼과 베잠방이, 핫바지를 입고 다니던 그 시절에는 교복이라는 용어(用語)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는 고학년(高學年)이 되면서부터는 철따라 양복을 갈아입는 행운을 가지기도 했었다.
무명옷 백의민족
필자네의 경우는 외갓집이 부산(釜山) 국제시장(國際市場) 부근에 있어 어머님께서 농한기마다 친정에 가서 옷가지와 고무신을 도매(都賣)로 떼어 와서 ‘불국장’과 ‘어일장’ 등지에 내다 팔아 다른 집보다 조금 낫게 현금재산(現金財産)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촌놈주제에 양복이라는 걸 입어보기도 했었던 셈이다.
그러나 “께벗고 칼찬 식”으로 옷만 양복(洋服)이었지 신발은 ‘껌둥고무신’이었고, 고학년(高學年)이 되면서는 흰 고무신을 신었다.
그리고 그때의 ‘국방색(國防色)’ 양복은 그 것이 끝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방색’이란 전투 시 눈에 잘 띄지 않도록 군인(軍人)의 옷에 물들인, 나뭇잎이나 풀잎과 같은 짙은 초록색(草綠色)을 말한다.
6.25가 터져 더 이상 재고(在庫)도 없었고, 6.25 뒤에는 시골에도 미군 야전(野戰) 담요로 만든 ‘담요양복’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담요 양복
오일장(五日場)마다 범람하는 ‘담요양복’을 사서 처음 입을 때는 그 폭신한 느낌이 너무나 좋아 학교(學校)에서 돌아오면 번개같이 벗어 ‘줄대’나, ‘마꾸리’에 걸어두고, ‘합바지’로 갈아입고 대나무 삿자리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宿題)하던 때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여기에서 말하는 ‘줄대’는 ‘줄대뿌리’라고도 하는데, 벽에 걸린 옷걸이 장대를 말하며, 장대의 양쪽 끝에 끈으로 매달아서 옷가지를 걸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꾸리’는 옷이나 수건 따위를 걸게끔 벽에 박아놓은 고리를 이르는 말이다. “얼신, 두루매기 벗어가 ‘마꾸리’에 걸어놓고, 패이 안즈시이소”라는 용례가 있다. “어르신, 두루마기 벗어서 걸이에 걸어놓고, 편히 앉으십시오”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좋던 ‘담요양복’도 털이 모두 빠지고 실밥이 엉성하게 들어나면서 색깔이 바래기 시작하면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옷이 귀했던 그때는 그 양복(洋服)이 제아무리 낡아도 덕지덕지 꿰매어 입고 다녔다.
1958년도의 외동중학교 남학생 교복
(제7회 졸업생 졸업기년사진 : 1학년 때 사 입은 ‘삐가리 우장’
같았던 교복과 모자를 3년 동안 입고, 쓰고 보니 어느 새 몸과
머리에 꼭 맞게 줄어들었다. 다만 부유층 자제들은 예외였다)
이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교복 얘기를 시작한다. 필자들이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입학하면서 사서 입은 검정색 ‘미영베’ 양복이나 광목양복(廣木洋服)은 교복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삐가리 우장’이었다.
‘삐가리 우장’이란 ‘병아리 우장’이라는 말로 어머님께서 오일장(五日場)에 가셔서 사 오신 ‘미영베’ 교복이 너무 커서 이것을 입고 있으면, 마치 병아리가 커다란 우장(雨裝 : 도롱이)을 입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에는 웬만큼 사는 가정에서도 중학교(中學校)에 올라가는(진학하는) 자식놈이 형과 함께 오일장(五日場) 날 교복을 사러 가겠다고 돈을 달라고 하면, 한사코 어머니께서도 따라 나섰다.
아들놈이 몸에 맞는 교복(校服)을 고르자 어머니는 “한 치수 더 큰 것, 한 치수 더…”를 외우시다가 결국 교복이 아닌 외투(外套)를 사 들고 돌아오곤 했었다.
지금의 여학생 교복(하복)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장(市場)에서 돌아오자 말자 어머니는 바늘을 들고 베개에 ‘시침질’하듯 ‘바지 단’을 접어가면서 “이제 네 나이가 훌쩍 크는 때인 만큼, 이렇게 ‘단’을 올리고 하면 한 삼년 입겠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고집스럽게 ‘시침질’을 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침질’이란 ‘바느질할 때 천을 여러 겹 맞대어 듬성듬성 성기게 꿰매는 일’을 말하는데, 양복(洋服) 바지의 길이가 너무 길어 이를 줄이기 위해 ‘바지 단’을 안쪽으로 접어 넣고, 바늘로 그 집어넣은 부분을 성기게 꿰매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시침질’을 한 부분은 2년쯤 지난 뒤에 ‘시침질’했던 부분을 뜯어 본래(本來)의 바지 길이로 늘이면, 그 동안 키가 자라 짧게 보이던 바지가 적당한 길이로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단’이란 말은 ‘옷의 끝 가장자리를 안으로 접어 붙이거나, 감친 부분’을 말한다.
그 시절 교복
어쨌든 그렇게 구입하고 ‘시침질’을 한 교복(校服)은 목의 ‘칼라’가 머리 사이즈와 같았고, 상의(上衣)의 맨 아래쪽 단추는 사타구니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우장(雨裝) 같은 교복(校服)은 또 그렇잖아도 작은 몸뚱이를 더 작게 보이게 하여 남들로부터 ‘오모짜’ 같다느니, ‘축끼’ 같다느니, ‘등신(병신)’ 같다느니 하는 업신여김을 당하게 하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모짜(おもちゃ)’는 일본어로 장난감을 말하고, ‘축끼’는 지방에 따라 ’축구(畜狗)‘라고도 하는데, 둘 다 ’바보‘라는 뜻이다. “축끼 긑치 천날만날 넘한테 속고마 댕기나”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바보같이 매일처럼 남한테 속고만 다니느냐”라는 뜻이다.
1960년대의 외동중학교 여학생들의 교복
(입실역 플랫폼에서)
‘삐가리 우장’ 얘기를 계속한다. 당시의 어머님들께서는 입학철마다 오일장(五日場)에서 아들자식들의 교복(校服)을 구입하실 때는 앞서 말한 대로 1학년부터 3학년 때까지 입힐 양으로 신체(身體) 치수보다 훨씬 큰 것을 고르시곤 하셨다.
어께품은 5~6cm 더 넓은 것으로, ‘소매단’과 ‘바지단’은 15~20cm 긴 것을 골라 소매와 바지가랑이 속으로 감아 넣고, 대바늘로 쭝쭝 기웠다. 맞춤복의 경우 허리둘레도 늘일 것을 대비하여 재단사(裁斷師)가 미리 안감을 깊숙이 넣어서 재단을 해 주었다.
교모(校帽)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머리 둘레보다 한 치수 더 큰 모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컸다. 때문에 길을 가다가 뒤에서 누가 부르거나, 뒤에서 자동차 경적(警笛)이 울려 고개를 휙 돌리면, 모자는 본래의 위치에 그대로 있고, 얼굴만 뒤쪽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런 큰 모자를 머리에 맞게 하려고 모자 뒤쪽을 접어 돗바늘로 쭝쭝 꿰매어 쓰고 다녔다. 모자 역시 ‘삐가리 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교모
입학식(入學式)이 있던 날, 운동장(運動場)에서 풍덩하게 큰 교복과 가분수(假分數)처럼 머리통이 큰 모자를 쓴 아이들이 구불구불하게 줄을 서있는 모양은 마치 전쟁터가 뭔지도 모른 채 몸에 맞지 않은 장총(長銃)을 들고 도열한 오합지졸(烏合之卒)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헐렁한 교복에 어색한 교모(校帽)를 쓴 아이들이었지만, 모두가 신기할 정도로 부쩍부쩍 잘도 자라났다. 그래서 2학년이 되면 어느새 헐렁한 어께 품이 마치 맞게 변해있었다. 그래서 이때는 바지와 소매도 한 단씩 더 늘이곤 했었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새까만 색이던 교복(校服)과 모자가 희끄무레하게 탈색(脫色)이 되어 볼품이 없었고, 엉덩이 쪽은 나무걸상에 하도 문질러서 빤질빤질하게 광이 나곤 했었다.
세탁비누도 세탁기(洗濯機)도 없었던 그 시절에는 잿물을 내려 빨래를 했기 때문에 검정색으로 염색(染色)한 무명베로 만든 당시의 교복(校服)을 잿물에 삶으면 교복(校服)전체가 희끄무레하게 탈색이 되곤 했었다.
‘신주단지’처럼 간직하던 ‘미영베 교복’과 교모
(‘배림박(바람벽)’은 ‘돌가리 조’와 신문지로 도배를 했다)
그리고 3학년에 올라갈 때쯤이면, 체격(體格)이 불어나 품도 좁아지고, 소매와 가랑이도 껑충 짧아져 영 볼품이 없어진다. 마지막 남겨두었던 ‘바지단’과 ‘소매단’을 다 끄집어내도 엉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빤질빤질하게 윤이 나던 엉덩이는 재봉틀로 수도 없이 ‘박음질’을 했고, ‘호크’는 풀고 있지 않으면 숨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교문(校門)에 들어설 때는 ‘호크’를 잠그고, 교실에 들어와서는 풀어 헤치는 일이 일과(日課)처럼 되풀이되기도 했었다.
모자도 탈색(脫色)이 되고 땀에 찌들어 삭아서 푸석푸석 먼지가 일었으며, 챙이 휘어지고 실밥이 터져 넝마가 되었다. 그러나 교복(校服)과 모자를 다시 사지는 않았다.
중학교(中學校)를 마치고, 고등학교(高等學校)에 진학하지 않을 경우는 더 이상 교복이 필요치 않아 값비싼 교복을 구입(購入)할 이유가 없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해도 입학 때 새것으로 바꿀 양으로 그냥 버텼기 때문이다.
그 시절 교복
그래서 신입생(新入生)이 입학하고, 1학년이 2학년이 되고, 2학년이 3학년이 되는 날의 운동장(運動場)에는 ‘삐기리 우장’과 탈색이 되기 시작한 2학년 교복, 엉덩이 가득 ‘미싱 박음질’을 한 3학년 교복(校服)이 무더기를 지어 늘어서서 교장선생님의 훈화(訓話)를 듣곤 했었다.
필자들이 3학년 때인 1958년에는 처음으로 하복(夏服)바지로 쑥색 ‘빤따롱(판탈롱)’ 바지를 입었다. 바지가 터질 것만 같았던 ‘맘보바지’가 들어가고, ‘연애화(戀愛靴)’가 유행하기 시작한 때였다.
위에서 말한 ‘판탈롱(pantalon)’은 아래쪽이 나팔 모양으로 벌어진 여자용 바지를 말하는데, 프랑스어인 ‘판탈롱’은 우리가 일컫는 ‘판탈롱’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일반적(一般的)으로 ‘바지’를 일컫는 말이다.
그 시절 판탈롱 바지
어쨌든 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빤따롱’ 바지를 입기 시작하면서 가랑이 넓히기가 시작되었다. 바지 가랑이를 타서 별도(別途)의 천을 덧붙여 무려 13인치까지 넓혀 입기도 했다.
교복(校服) 바지의 아래 가랑이에 같은 색깔의 천을 대어 나팔 주둥이 모양으로 넓힌 것이다. 1950년대 초가 ‘맘보바지’라면, 연도 말에는 ‘나팔바지’ 시대(時代)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팔바지’를 입고 있을 때 비가 오면, 그 넓은 가랑이가 물투성이가 되어 무슨 치맛자락 같이 펄럭여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는 곤욕(困辱)을 치르기도 했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연애화(戀愛靴)’란 지금의 경우 그런 신발 자체가 없지만, 검정색 고무로 만든 끈 없는 운동화(運動靴) 스타일로 처음 사 신을 때는 까만 색깔에 윤이 반짝반짝 나면서 멋있었지만, 낡으면 탈색이 되고 잘 찢어지는 등 불편이 따랐고, 볼품이 없었다.
새것이라도 발에 땀이 잘 나고, 그런 상태로 비포장도로(非鋪裝道路)를 다니던 당시에는 쉽게 찢어지는 단점(短點)이 있었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 교복얘기는 이쯤해서 접고자 한다.
가난했던 그 시절 '무명베 교복'(1938년)
여기에서 흰 고무신에 무명 치마저고리 입고 봄을 맞이하는 그 시절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작자미상의 ‘무명 치마저고리 입고 오는 봄’을 음미해 본다.
무명 치마저고리 입고 오는 봄
지난 밤 새도록 비가 오더니
산골 여기 저기 봄을 뿌려 놓았는지
햇살 에도 바람 에도 풀내음이 난다.
장독대 빈 항아리에 파란하늘
흰 구름 떠다니고
여인의 살결 보다 부드러운 파문이 이는 것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을 알게 하누나.
남녘에는 이미 꽃이 피고 진다는데
어디쯤 오고 있는지
마중 가야할 봄.
흰 고무신에 무명 치마저고리 입고
아무 말 없이 혼자 오는 봄.
마지막 남은 한 잔술 차마 비우지 못하고
머언 산 봉우리 넘어 마음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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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을 접기 전에 여기에서는 ‘무명치마저고리’와 관련하여 우리들의 고향 경주(慶州)지역에 전해지는 어느 ‘부잣집’ 얘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잣집’이란 선조원년(1568), 1월 2일 경주부(慶州府) 북(北) 현곡촌에서 부친 신보(臣輔)와 모친 황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난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으로부터 12대 손인 최준(崔俊)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이조리와 경주(慶州) 시내 교동에서 만석꾼으로 살던 ‘최부잣집’을 말한다.
이 최부잣집에서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누구를 막론(莫論)하고 3년 동안은 비단이나 모시옷을 금하고, 반드시 ‘무명치마저고리’를 입도록 하는 계율(戒律)이 있었다.
경주시 교동 최부잣집
예나 지금이나 무명옷은 상민(常民)이나 가난한 서민(庶民)들이 주로 입었기 때문에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근면한 생활자세(生活姿勢)를 체득하게 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은 그들 상민(常民)이나 서민들이 입는 ‘무명옷’을 입고, 근검절약(勤儉節約)하는 생활양식을 갖추라는 교훈이었다.
최부잣집의 이러한 좌우명(座右銘)은 제1세인 최진립(崔震立)이 정립한 것으로 그가 만든 육훈(六訓)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참고로 최부잣집의 육훈(六訓)을 소개한다.
최부잣집 육훈(六訓)
①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②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③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④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⑤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⑥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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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는 가훈은 가난한 서민들과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천민들의 서러운 삶을 몸소 체험(體驗)하여 그들에 대한 구제(救濟)와 나눔의 삶을 살아가라는 교훈이기도 했었다.
그 시절에는 서민들이나 천민(賤民)들에게는 비단옷이나, ‘새’수가 높은 모시옷을 입지 못하도록 하는 복식금제령(服飾禁制令)이 온존하고 있던 터라 서민들은 돈이 있더라도 중산층(中産層) 이상의 양반(兩班)들이 입던 비단옷이나, ‘새’수가 높은 모시옷은 입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서민(庶民)들은 사시사철 ‘새’수가 낮은 삼베옷이나, 무명베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먹물께나 먹은 사람(상급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서민들에게 ‘무명저고리’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기도 했다.
무명옷
지난 1950~60년대, 서울에서는 “무명 저고리다”라는 말이 유행(流行)되었는데, 이 말은 무작정(無酌定) 상경한 ‘시골 출신의 무지렁이 처녀’라는 뜻의 말이었다.
가난이 싫고 힘겨운 농사일을 모면(謀免)해 보려고, 무작정 단봇짐을 사들고 상경(上京)하여 부잣집 식모살이를 하던 그 시절 처녀들의 대명사(代名詞)였다. ‘무명 바지저고리’ 얘기가 어쩌다 최부잣집 얘기가 되고 말았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 이쯤에서 파일을 접고자 한다. 배경음악(背景音樂)은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남진의 ‘목화아가씨’를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목화 아가씨
노래 : 남 진
작사 : 정두수
작곡 : 박춘석
목화 따는 아가씨 찔레꽃 필 때
복사꽃 피는 포구 십리 포구로
달마중 가던 순이야
뱃고동이 울 때마다 열아홉
설레이는 꽃피는 가슴
강바람 산바람에 검은 머리 날리며
목화 따는 아가씨
목화 따는 아가씨 봄날이 갈 때
복사꽃 지는 포구 십리 포구로
님 마중 가는 순이야
나룻배가 올 때마다 열아홉
설레이는 꽃피는 가슴
꽃바람 봄바람에 소맷자락 날리며
목화 따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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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수한 옛날 얘기 같은 그 시절로 여행한 기분입니다
남보다 피부가 약해 풀한 무명이나 삼베옷을 입지 못해
몰래 물을 뿌려 입던 기억이 새롭네요
좋은 자료 감사를 드리며늘 화창한 봄날에 건안 하심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