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중 솔마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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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로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하였는데
오늘 아침이 되자 잔뜩 흐린 하늘에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촉촉이 젖은 흙과 물기 머금은 연두색 밭에서 싱그러운 봄향기 베어 나온다.
그러나 겨울의 잔해는 우리들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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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산행이 아닌 울산 도심 속에 있는 '솔마루길 걷기'이다.
우리는 늘상 먼 곳으로만 기웃거리면서 막상 자신이 살고있는 주변 가까운 곳은 외면하였다.
오늘은 작심을 하고 전체 구간 24km 중 14km 구간만 걷기로 했다.
출발 지점은 야음초등학교 근처인 선암 호수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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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계곡으로 내려앉은 호수도 연초록 봄물을 머금고 있다.
소나무조차 이 계절에는 우리네 옛적 산골 소녀처럼 웃는다.
소나무의 웃는 얼굴에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포개본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말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유배된 스승을 한결같이 공경하는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추사의 세한도에서
이른 봄날 같은 추사의 여린 마음을 본다.
나는 세한도의 갈필 사이사이에서 봄바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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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곡선의 세계이고 인공은 직선의 세계이다.
산, 나무, 계곡, 강, 바위... 그 선은 모두 굽어 있다.
아파트, 빌딩, 책상, 핸드폰... 도시의 모든 것은 사각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곡선이고 죽은 것은 직선이다.
하늘로 향해 쌓은 사각형 공간 속에서 현대인들은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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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 호수공원을 내려와서 도로를 건너 다시 대공원으로 오른다.
도로로 인해 끊긴 솔마루길 명맥을 육교가 면면히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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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비된 솔마루길 산책로는 적당한 오르 내림을 반복하면서 꾸준히 이어진다.
얕은 산의 키 작은 소나무 숲길이 상쾌하다.
도심 속이지만 밟는 흙의 질감이 행복하다.
젊어서는 좋아하는 것 보다 잘하는 것을 찾아 선택해야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여생이 행복하고 보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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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길 옆, 생강나무 여린 꽃망울이 수줍게 웃고 있다.
그 웃음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겨울을 이겨냈다는 따위의 우쭐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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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 급한 진달래꽃도 나 보란 듯 먼저 피었다.
따듯한 여린 분홍빛 꽃잎이 봄처녀처럼 참 곱다.
나는 따듯한 마음이 내장되지 않은 지조와 절개를 믿을 수 없다.
뜻 높은 이들의 꺾이지 않는 의지는 작고 여린 것에 대한 연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연결된 카르마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존재의 상호연기성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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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원 숲길에서 아직 공사 중인 육교가 개통되지를 않아 7번 국도로 내려왔다.
아직 이곳의 주변 풍경은 겨울이다.
마치 고집 센 노인네의 표정이다.
이러다가 문득 꽃잎들이 봄비에 젖어 내릴 때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봄날은 간다'고 비탄조의 가락을 읊조리겠다.
제대로 봄을 느껴 보지도 않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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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솔마루길을 벗어나 옥동공원묘지를 가로 지른다.
영혼은 이미 저승으로 떠났으나 육신은 떠나지 못하고 이승에 머물고 있다.
자연의 세계에는 선악, 미추, 호오, 염정 따위의 분별 개념이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죽기 살기로 그것을 따진다.
전쟁을 일으키면서 평화를 갈구하고, 선을 추구하면서 그만큼 악을 키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가 ‘소유’ 개념을 알면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니까.
또한 농경을 시작하고 화폐가 등장하면서 본격화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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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저절로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산은 산, 물은 물’의 관계다.
그 세계에서는 ‘산은 물, 물은 산’이기도 하다.
이것은 화두처럼 깨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명징한 사실이다.
벼랑에 매달린 소나무가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세계를 구성하는 관계의 그물망에서 인간이 개입된 부분만 그물코가 엉켰거나 뚫어져 있다.
태화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전망대에서 버드나무처럼 흔들리는 소나무와
아무렇지도 않게 봄을 들어올리는 생강나무 꽃,
삼동을 나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물소리를 들으며 떠올린 한 생각이다.
강 건너 오산 만회정(晩悔亭)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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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젖줄인 태화강변에 둥지를 튼 삼호마을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산을 업고 강을 따라 삶을 면면히 영위해 왔다.
옹기종기 모여 성냥갑처럼 붙어있는 집들이 차라리 눈물겹다.
저 속에서 우리들은 웃고, 또 울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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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이들면 경험이 깊고 풍부해진다.
그러나 그 경험이 오히려 더 좁은 방을 만들기도 한다.
자기 생각, 자기 고집의 틀에 갇혀 더 좁아지고 옹색해지기 쉽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장점보다 단점을,
좋은 것보다 유독 안좋은 것만을 꼭 집어 말하기를 즐겨하게 된다.
정신세계의 넓이는 그 사람의 입술에 달려나오는 말에서 드러난다.
반면 산의 나무는 그러하지 않고 큰 나무일수록 의연하다.
나무처럼 나이가 들수록 말과 행동이 아름다워야 노년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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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밝은 이들은 다 알고 있다.
태화강변 대숲을 일렁이며 바람에 댓잎 사운대는 소리가 얼마나 인상적인지,
부지런한 이들도 안다.
그 강변에 가을이며 흐드러지게 억새가 피어나고,
봄의 여린 꽃들은 길섶에서 어떤 몸짓으로 속삭이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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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마루길의 정수리인 은월봉, 정말 남산루에서는 달을 볼 수 없을까?
오늘 걷는 길, 이곳에 다다르면 거의 다왔다.
봄 마중 나온 남산 길,
태화강변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봄 노래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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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서 내려와 도심의 복잡한 도로를 건너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신정시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진다.
한나절 솔마루에 깃들어 있는 동안
모든 사회적 의무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산길에서 한 호흡 한 호흡 한숨을 토해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던 것이다.
비록 짧은 유예기간이었지만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를 새삼 느낀다.
솔마루길에 들면서 절절히 느끼게 되는 새로운 즐거움이다.
나는 오래도록 이 즐거움을 탐할 것이다.
첫댓글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밟는 도심의 흙길은 황홀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뜻이 통하는 도반들과 함께 하는 발걸음은 더욱 즐거웠습니다.
산속이기는 해도 넓디 넓은 길, 팔짱 끼고 손 잡고 걸어도 넉넉한 길
높낮이 기복이 심하지 않아서 대화 하면서 걸어도 힘들지 않는 길
가까워서 힘들게 먹거리 지고 걷지 않아서 가벼웠던 길
산과 강이 어우러져 눈 호강까지 시켜준 길
그 길을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봄날입니다.
아기자기한 솔마루길의 하루가
생강나무꽃과 진달래로 봄 마중하셨음을 알려주시는것 같습니다.
솔마루길 그림을 보니 갈산 삶의 여정이 배여있는 매케한 그리움의 갈증으로 다가 옵니다....
장학금 받은 기마이로 선암 저수지에서 친구들과 막걸리 한 바게스 마셨던 생각, 선암사에 소풍갔던 기억, 옥동공원묘지에 묻혀있는 나의 흔적,
지금 내가 살고있는 삼호마을 성냥갑 같은 작은집, 한때 신정동 밤안개라는 별칭으로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자주 들렸던 신정시장 돼지 국밥집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