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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찿아서 스크랩 원효와 의상대사
김성태 추천 0 조회 14 13.01.05 12: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 나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만드는 이가 짝을 지어 같은 시대를 산 경우가 더러 있다.

그들은 때로 협력자이고 때로 라이벌이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같았다.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은 그 같은 예의 하나이다.

저 낮은 자리에서 바보처럼 우직하게 낮은 자와 함께 한, 두 사람.

그들은 바보 성자(聖者)의 전통을 연 이들이기도 하였다.

 

 

같고도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사람

 

전국의 오래된 사찰치고 원효와 의상 이름 들어가지 않은 곳이 드물다. 

원효와 의상이 창건했다는 절을 합쳐 셈하다 보면,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 이렇게 먼, 이렇게 많은 곳을 다녀갔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이것은 역사상 이 두 승려의 영향력을 웅변한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정신적 축을 지탱하는 불교이지만,

그 축은 다시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걸출한 승려에 의해 떠받들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인물이 수없이 많지만,

한국 불교 역사의 거의 전부라고도 할 만한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다 갔다는 점도, 다른 시대를 산 사람에게는 약간 섭섭한 일이다.

 

원효는 617년생이다.

진평왕 39년이었으니,

신라가 바야흐로 삼국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무렵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변방의 시골 출신이었으며,

출산에 임박하여 이웃 마을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어머니가 갑자기 해산 끼를 느꼈고,

아버지가 옷을 벗어 나무에 건 다음 그 안에서 출생했다.

탄생 자체가 극적인데,

평생을 기층 민중과 함께 살다간 실천적 수행자였던 그로서는

그런 운명을 닮은 탄생이었다.

 

의상은 625년생이니, 원효보다 여덟 살이 아래다.

귀족 집안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고,

“의상은 실천행에 치중하여 미타신앙을 진작시키고 구도적 관음신앙을 강조하였다. 의상은 융합적 사상을 바탕으로

그가 창도한 화엄 교단에서 기층민 출신의 제자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는 강한 신분질서가 유지되던 시점에서

교단 내에서의 평등 보장은 일반민에게는 희망의 대상이었다. (역사학자 정병삼의 평가에서)

의상은 이런 평가처럼, 원효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사상적 행태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 크게 관련된다.

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기는 신라의 통일 전쟁을 전후한다.

비록 승리한 전쟁이었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귀족은 귀족대로 민중은 민중대로 그들의 삶에 짊어져야 할 고통은 컸다.

이 고통의 무게를 덜어줄 종교인의 책임이 원효와 의상에게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이 분명히 달라 보이는 점 또한 있다.

어떻게 다른지 두 사람이 함께 체험했던 몇 가지 일을 가지고 비교해 보자.    


 

 

 

선후배인 원효와 의상,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다

 

의상이 두 번에 걸쳐 중국 유학을 시도했고,

결국에 종남산의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 602~668)을 만나 득도한 사실은 명확히 전해온다.

이때 원효와 동행하여 중국 땅 변방에서 경험한 해골바가지 사건은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지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부석사의 의상 비문을 따르자면,

의상이 당나라에 들어가려 시도한 연도는 650년과 661년이다.

650년에 원효와 함께 가고자 고구려에 이르렀지만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는 것인데,

[삼국유사]에서는 653년 두 사람이 고구려를 지나다 첩자로 오인 받아 붙잡혔다 돌아왔다고,

비문에서 말한 ‘어려움’의 구체적인 정황을 전해 준다.

3년의 차이가 나지만 같은 사실을 말한 것 같다.

지엄을 만나 화엄을 공부한 것은 두 번째 시도였던, 661년이다.

 

해골바가지 사건이 성립하자면 의상과 원효가 동행해야 한다.

첫 번째 입당(入唐)때, 두 사람이 동행한 것은 어느 자료나 같다.

그 자료에는 모두 그들이 붙잡힌 곳을 고구려 땅이라고 전한다.

중국에는 발도 붙여 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무슨 해골바가지 사건이 있었겠는가.

일단 첫 번째 입당 시도는 제외해야겠다.

그런데 두 번째 입당 때는 대부분의 자료에 원효의 이름이 빠져있다.

이때 원효의 나이 벌써 마흔 넷이다.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파계’ 이후이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나이의 원효가 동행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해골바가지 사건은 다분히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마저 짙어진다.

 

 

 

 

사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3대 고승전의 하나인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의상 전기에 나온다.

의상의 입당을 669년이라 한 이 전기에서

의상의 결의에 찬 구도심을 보여주기 위해 나오는 이야기이다.

흔히 입당을 포기하고 깨끗하게 돌아선 원효에게 눈길이 가기 쉬우나,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의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의상의 나이 약관이었을 때 일이라고 하면서 원효와의 이 체험을 소개하지만,

구려에서 첩자로 잡혀 돌려보내진 일은 언급하지 않아,

두 사건 사이의 전후 관계를 맞춰 보기 어렵다.

‘의상의 나이 약관’이라는 표현대로라면 그가 스물다섯 살인 650년의 첫 번째 입당 때여야 한다.

그러나 비문이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때 고구려에서 원효와 함께 붙잡혀 있다 돌아오지 않았던가. 

이러 저리 맞추어보아도 해골바가지 사건에는 누수(漏水)가 심하다.

치밀하지 않고 물이 줄줄 샌다.

다만 [송고승전]도 의상이 두 번 이상 입당을 시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는 하다.  

 

 

원효는 직관을, 의상은 통철을 중시한 길을 걸었다

 

어쨌거나 [송고승전]에 따르면,

두 사람은 당주(唐州)의 경계에 이르렀다.(‘당주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음)

배를 얻어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주변은 어두워지고 큰비를 만나 길가의 토굴에 겨우 몸을 숨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곳은 무덤이요,

그들이 자고 난 옆에는 해골바가지가 뒹굴고 있지 않은가?

목마른 원효가 그 해골바가지에 괸 물을 마셨다는 말은

아무래도 후대에 첨가된 것일 뿐 [송고승전]에는 그마저 나오지 않는다.

또 흔히 원효가 거기서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고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고 이제 중간이다. 

날이 밝았으나 비는 계속 내리고 길에는 물이 가득 고여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두워지기 전 미리 헌 집을 한 채 물색해 잠을 청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원효는 종내 잠을 이루 수 없었다.

지난밤 토굴에서 자던 일이 자꾸만 떠오르고,

눈앞에 귀신의 눈동자가 자꾸만 오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이 샌 다음에야 원효는 탄식하며 의상에게 말한다.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송고승전]에서)

 

원효는 바랑을 메고 발길을 돌렸다.

이 순간 원효는 이미 원효였다.

저 유명한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오.’라는 구절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송고승전]의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의상의 전기이다.

원효의 득오(得悟) 순간을 부각시키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원효가 돌아간 길을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송고승전]의 마지막 대목은 적고 있다.

의상은 그런 사람이었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원효와 달리 의상은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릴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원효와 의상은 서로 가는 길이 분명히 달라졌다.

물론 의상의 굳은 마음을 칭송하고자 [송고승전]은 굳이 이 일화를

집어넣었겠지만, 그렇다고 원효를 낮춰보자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원효에게는 직관(直觀)을 중시한 원효의 길이,

의상에게는 통철(洞徹)을 중시한 의상의 길이 있었다.


 

 

 

두 사람이 걷는 길은 달랐으나, 가고자 하는 목표는 같았다

 

두 사람이 다시 한 자리에 나타나는 건 낙산사 관음보살 이야기에서이다.

670년경,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이

동해 바닷가 굴 안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지금 의상대 옆 홍련암 아래에 있는 굴이다.

7일간의 기도 끝에 의상은 보살이 보낸 용을 만나 선물을 받는다.

그러나 의상은 7일을 더 기도한다.

그의 목표는 용이 아니었다.

처음 목표한 관음보살을 만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그게 의상이다.

결국 관음보살은 의상을 굴 안으로 불러 그 모습을 보여주며, 산 위에 절을 지으라 한다.

바로 지금의 낙산사이다.

철두철미, 용맹 불퇴의 전형이다.

 

그 소문을 듣고 원효가 찾아온다.

들판에서 가을걷이 하는 여자에게 다가가 벼를 달라 하기도 하고,

빨래터에서 개짐을 빠는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기도 한다.

마치 유람 나온 사람처럼 넋 놓고 낙산사 찾아가다 만난 이 여자들이

사실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원효는 보살의 시험에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만 것이다. 

치밀하게 준비하여 목적한 바를 이루고야 마는 의상에 비한다면,

원효는 설렁설렁 대다 실수만 하는 역할을 자주 맡는다.

사복이라는 아이를 만나 나누는 대화도,

해동불교의 좌장 소리를 듣는 원효로서는 자존심 상할 실수의 연발이다.

자원해서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는 파계까지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럴 때는 아주 바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원효이기에 역설적으로 민중의 마음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진일보(進一步)가 이 아니고 무엇일까.

 

 


 

의상도 마찬가지였다.

의상이 무슨 귀족불교의 대표인 양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학문세계가 지닌 성격이 그렇고,

정치권에 가까이 설 기회가 많아서 생긴 선입견일 뿐이다.

앞서 의상은 “화엄 교단에서

기층민 출신의 제자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말하였는데,

그런 전형적인 예가 진정(眞定)이다.

먹을 것이라곤 쌀 한 되밖에 남지 않은 가난한 집 출신의 진정.

그의 어머니는 의상에게 가고 싶다는 아들의 뜻을 이루려 그 쌀을 탈탈 턴다.

주먹밥 일곱 덩이를 만들어 싸주고는,

도를 이루자면 가는 길에 밥 지어 먹는 시간도 아깝다며 밤길에 내쫓는다.

어머니의 비원을 안고 온 이 나무꾼 청년을 의상은 서슴없이 받아들인다.

사람을 아끼고 우직하기로는 의상만 한 이가 없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자신을 ‘바보’라고 했다.

그 말의 깊은 뜻을 평범한 우리네가 섣불리 헤아릴 수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바보라 하니 바보라고 부를 수밖에.

그런데 그렇게 불러놓고 나면

얼마나 다정하고 편안하게 성자(聖者)의 모습이 다가오는지 모른다.

그는 ‘바보’ 아닌 ‘바보 성자’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전통은 벌써 원효와 의상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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