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년 전에 나일강변에서 세계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킨 이집트의 역사!
1798년 7월 이집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패해 점령당했지만 넬슨이 나일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이집트인들이 끈질기게 저항하는 가운데..... 오스만 투르크군이 상륙해
이집트인들과 함께 프랑스군을 물리쳤지만, 그 후에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이후
식민지로 삼으려 하자 이집트인들이 궐기해 영국과 싸워서 1922년에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이집트는 북아프리카와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 아랍 국가이자 지중해와 홍해의 연안국이며
이스라엘을 접해 중동으로도 분류되고 또한 아프리카로는 리비아와 수단의 접경국에,
메소포타미아와 더불어 세계 최초의 문명이 일어난 나라이니 5천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영토는 한국의 10배인 100만km²이지만 사막이 많고 인구는 1억명입니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축복” 이라는 말이 있으니 브룬디에서 발원한 백나일강과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된
청나일강이 수단의 하르툼에서 만나 북쪽 이집트로 흐르니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특징은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의 계절성 폭우로 정기적으로 범람하는데 그 시기가 9월에 아스완등 일정하니
사람에게 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와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져다 줍니다.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으며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과 응전” 이라
했으니.... 세계 최초의 문명이 5천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에서 탄생한 것은 이집트인들이
범람한 땅을 측량해 새로 구획을 정하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문명과 국가가 탄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강수량이 적은 지역에서 농사를 하려면 물을 끌어다 쓰는 관개농업이 필요한데 장기간 하게되면
지력 소모뿐만 아니라 토지에 소금이 쌓이는 염해가 발생할수 있으니 한때 나일강 유역
만큼이나 번성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사막이 된 이유이지만 나일강 유역은 주기적으로
범람하면서 소금을 씻어내었으니 좋은 환경에서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있으니...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4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 영역을 벗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원정을 했을 때,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한
이집트인들이 보고 놀란 것은 거꾸로 흐르는 이테루(강)였으니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나일강만
보다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보았으니 비상식적인 존재로 여겨 놀랐다고 합니다?
한국에 알려진 국호 이집트는 영어에서 유래한 외래지명이고 아랍어 토착지명은 “미스르
아랍 공화국”, 표준 아랍어로는“줌후리야트 미스르 알아라비야(Jumhūriyyat Miṣr al-ʿ
Arabiyya)” 이며 1953년 당시에는 이집트 공화국이었는데, 가말 압델 나세르는
강경한 아랍 민족주의자로 아랍 전역의 통합을 주장해 시리아와 합쳐 저렇게 불렀습니다.
이집트 제1왕조는 남쪽 테베의 상이집트 나르메르가 기원전 3150년 북쪽 멤피스의 하이집트
를 정복하고 전 이집트를 통치하는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시작되는데 덴, 카아,
세네지등 시기에 이집트의 전통적 종교관, 세계관, 사회관의 기반이 형성되면서 이후
5천년간 지속될 이집트 문화의 토대를 놓았으며 기원전 2686년에는 파라오 조세르가
제3왕조를 개창하니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자 대피라미드가 지어집니다.
피라미드는 138개로 카이로 서쪽 아부라와슈에서 일라훈 까지 나일강 서안 사막에 흩어져 있는데...
왕을 매장했던 마스타바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발전했으니 파라오 조세르(Djoser) 시대에
임호테프는 높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하여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
Snefru)는 피라미드 각이 예각이라 붕괴 위험 때문에 공사중 각도를 수정하니 굴절 피라미드입니다.
파라오 쿠푸(Khufu)는 완성된 선대 파라오의 피라미드에서 규모를 극대화했으니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쿠푸왕은 10만명은 아라비에산맥 채석장에서 네일로스강까지 돌을 운반하고,
10만명은 돌이 배에 실려 네일로스강 건너로 전해지면 리비에 산맥까지 끌고 가게 했으며 3개월
동안 노역했고, 길을 닦느라 10년간 고생했으며 피라미드 자체를 만드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1989년 피라미드 근처에서 마을이 발견된후 당시까지 내려온 인식이 바뀌었으니 마을에는 노동자
가 살았던 숙소, 공방, 저장고, 물품 관리소, 관리들이 살았던 저택의 흔적이 남아 있고 묘지의
벽화를 보면 사람들이 빵, 맥주, 고기, 채소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유물과 상형문자
는 성경에 적힌 것 처럼 히브리인이나 마을 사람들이 노예 처럼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만족
하며 일했음을 보여주며 실제 동원된 사람들 숫자도 20만이 아닌 2만명 내외였을 것으로 봅니다.
쿠푸와 카프레, 멘카우레 등 명군들이 현재 우리가 기자에서 볼수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3기를
완성했고, 이와 같은 크기의 피라미드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더이상 지어지지 않았으며
페피 1세등 걸출한 명군이 등장하며 오랜 번영을 누렸으나 제6왕조 출신의 페피 2세가 지나
치게 장수하면서 후계 구도가 무너지며 고왕국은 붕괴했고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도래합니다
8, 9, 10왕조때 혼란기가 이어지다가 멘투호테프 2세가 기원전 2055년경에 하이집트의
제10왕조를 무릎 꿇리고 130여년 만에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제11왕조가 시작되니
중왕국으로 지방 귀족들의 힘을 빼기 위해 파라오 직속의 지방관들을 파견하여
귀족들을 견제하며 귀족들의 자제를 볼모로 잡아 수도에서 감시하면서 안정을 이룹니다.
하지만 기원전 1650년경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이집트왕국이 무너지면서 제2중간기가
시작되는데 힉소스인들은 “전차”라는 이집트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신무기를 가지고
이집트를 침략했으니 뛰어난 기동성에 이집트 군대는 그대로 쓸려나갔고, 힉소스인
들은 하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일대를 장악한후 파라오를 칭하니 제15왕조라고 부릅니다.
이집트인들은 남쪽으로 밀려나 테베의 상이집트를 중심으로 제16왕조를 세웠지만 북쪽에서는
힉소스인들이 점령해 통치했고 남쪽에서는 쿠시왕국의 누비아인들이 약탈하러 오면서
양면에서 치였는데, 기원전 1582년경 힉소스인들에게 수도 테베가 함락되어 망합니다.
그러한 폐허 위에 들어선 17왕조는 힉소스에 속국으로 굽히다가 세케넨레 타오가 전쟁으로 맞서
아흐모세 1세가 기원전 1550년경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제18왕조를 개창하니 신왕국 입니다.
신왕국은 이집트 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영광이나 부유함이 정점을 찍었던 시대였으니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전쟁왕 투트모세 3세, 최초의 유일 신앙을 내세운 아케나텐, 소년왕 투탕카멘, 이집트
최고의 군주 람세스 2세 등이 나왔는데....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의 시절에 영토와 영향력을
넓히며 대제국으로 성장했으니 아멘호테프 3세도 전쟁에서 승리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집트는 다신교니 신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새 머리에 뱀이
감고 있는 태양원반을 이고 있다) “라” 는 이후 파라오가 그의 아들임을 칭하면서
최고신이 되었으며 상이집트 테베의 수호신(타조깃털 2개를 머리위에 쓰고 있다)
“아몬” 은.... 테베가 이집트의 수도가 됨으로써 “아몬-라” 가 되어 최고신이 됩니다.
호루스 신화에는 저승의 신 오시리스, 그의 부인 이시스신, 아들이자 독수리 머리를 지닌 하늘의
신 호루스가 나오며 그외 소의여신으로 뿔과 태양을 인 하토루신, 고양이머리 바스테트신,
따오기머리를 한 지혜의 신 토토에 개모양의 저승사자 아누비스신, 죽은사람의 수호신
네프티스신, 질서의 타조깃발 마아토신, 사람을 찬조한 목우머리의 크눔신이 있으며 고왕국
시대는 파라오 자신이 신이었으나 신왕국시대의 파라오는 아몬신의 비호를 받는 존재로 변합니다.
유대인들은 BC 6세기경 바빌론 포로 때 출애굽기를 완성하는데 모세의 출애굽 시기는 700년 전인
BC 1250년 람세스 2세때로 보는데.... 그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10계명을 얻어 돌판에 새겨서
내려오니 유대교는 다신교 민족과 구별되는 유일신 사상을 가진 세계 최초의 종교로 일컬어집니다.
이집트 18왕조 아멘호테프(아멘이 만족한다) 는 재위 5년에 아케나텐(아텐의 영광)으로 개명하였는데
재위기간은 기원전 1352년~ 기원전 1335년으로 아크나톤(아케나텐)은 아멘(Amen, 테베의 수호신)
에게 제사 지내는 신관들의 세력이 왕권을 억제할 정도로 커지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을 제어하려고
다신교인 이집트의 종교를 금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창안합니다.
또한 아멘 숭배와의 완전한 단절을 위해 수도를 테베에서 오늘날의 알-아마르나 지역으로
옮기고 아케타텐(Akhetaten“아텐의 지평선”)이라 이름지었으니 신들의 상을 파괴
하고 유일신 아텐만 섬기도록 했으니 아마르나 개혁이라 하는데 아텐은 태양 원반의
형태로 수많은 손을 가지고 있으니 많은 백성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또한 왕비 네페르티티와 함께 테베로부터 나일강을 277킬로 정도 내려간 동해안의 새로운 수도
아케트 엔 아텐(아텐의 지평선)에서 아마르나 미술인 사실적· 개방적인 예술을 낳았으니....
파라오 아케나텐도 못생긴 그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그러나 새 종교를 받아들인 것은
상류층 뿐이었고, 아크나톤이 죽은 뒤 아멘 신앙이 부활하였으며 수도도 다시 테베로 돌아갑니다.
제18왕조 아멘호테프 3세후 즉위한 아케나텐은 갑작스레 이집트의 전통신앙을 부정하고 유일신
아텐 신앙을 내세우며 사회의 급변을 일으켰으니 일부 학자는 80년 후에 모세의 유일신앙
에 힌트를 주었다고 말하는데.... 그러나 아케나텐이 죽자 이집트는 다시 옛 신앙으로
돌아갔고 아들 투탕카멘 시대에 이집트는 아케나텐의 치세가 마치 없었던 것 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저 모세가 출애굽할 때 장정이 60만명이 넘으니 사람만 250만명 이고 소와 양 등 여러 가축
까지 합치면 어미어마한 인파인데도 성경에는 출발하는 기간이 얼마되지 않는 것 처럼
보이는데.... 수나라 양제의 군대 30개군 113만이 탁군을 출발하는데 하루에 1개군씩 출발
하니 출발에만 40일이 걸렸으며 선두와 후미의 거리가 천리(416km) 에 달했다고 사서는 전합니다.
그럼 군대 보다 느린 가축과 짐수레까지 거느린 모세의 대중은 출발에만 100일 이상이
걸릴 것이고, 선두와 후미 거리는 이미 3천리에 걸치는데, 히브리인들이 모두 떠난후
람세스왕이 전차를 몰고 부산에서 추격을 시작했다면 도로에 가득찬 저 엄청난 인파
들을 제치고 3천리나 떨어진 신의주에 도착한 모세의 선두를 어찌 따라잡을 수 있나요?
6.25때 서울시민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피난길에 올라 도로를 가득 메웠을 때 몰래 빠져나갔던 이승만
대통령은 수원에서 녹음방송으로 국군이 북한괴뢰군을 물리치고 북진하고 있다는 거짓방송을 내보내
피란민들을 집으로 귀가시킨후 도로가 비자 국군과 경찰에 국회의원과 장관이며 상류층들이 빈 도로를
도주했으며 북한군 탱크가 미아리고개에 나타났을 뿐인데도 겁에질려 한강 철교를 폭파시켰던 것입니다?
출애굽을 학자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BC 1250년 람세스 2세 때로 보는데, 20세기 들어
일부 학자와 종교인들은 BC 1446년 투트모스 3세 때로 보는등 2가지 견해가 있으니,
“십계” 를 포함한 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전자를 근거로 만들어 졌는데 전자를
택한다면 람세스는 53세로 전차를 몰고 모세를 추격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어야 합니다.
그는 90세로 죽어 1881년에 미라 가 발견되었으니 이를 어쩐다??? 람세스 2세 미라 발견후 등장한
후자 학설은 강에 버려진 모세를 이집트 공주가 주워 왕궁에서 키웠다니 여자 중에서 저런 간 큰
짓을 할 여인은 이집트 역사에 유일하게 여왕에 올랐던 공주 하트셉수트 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후자를 택한다면 출애굽 160년이 지난 BC 1286년에 시리아에서 카데쉬 전투 가 벌어지는데
람세스 2세는 2만 대군을 끌고 북상해 무와탈리스 히타이트 왕과 세기의 결전을 벌였
으며, 이때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 지방을 자국 가듯이 편안하게 진군하고 팔레스타인
병사들이 위기에 빠진 람세스 2세를 구하는 전투에 적극 참전하는데 팔레스타인을
점거하고 100여년을 살아온 이스라엘 12부족이 이집트왕의 지배(?) 를 받았으며 또 지원했다?
이집트는 훈련받은 전문적인 서기를 두고 왕실과 나라 대소사를 매일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250만명
에 가축까지 대거 탈출하는 대사건 이 일어났다면..... 당사국인 이집트는 물론이고 이웃나라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것인데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히타이트나 아시리아에 출애급 기록이 전무합니다.
이 보다 300년 전에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에 위치하는 텔 하리리(Tell Hariri)에는 마리(Mari)라고
불리던 도시국가가 있었는데,‘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에 의해 기원전
1759년 초토화되었으며 1930년대 초반 프랑스 고고학 탐사팀에 발견된후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에서는 2만 5,000점이 넘는 점토판이 4천년 이상 묻혀 있었으니....‘마리 서신’ 이라고
불리는 서신에는 왕이 주변 국가에 파견한 세작들이 자신들이 담당한 도시국가의
동향을 시시각각 보고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나라의 지도자들은 항상 이웃나라의 동향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저런 미증유의 대사건이 당시 관련국 어느나라에도 단 한줄의 기록조차 전혀 없고 오직 성경의 기록
이 유일한 것이니.... 역사학자들은 저런 대규모 탈출 자체는 아예 없었고 기록할 정도의 가치
조차 없을 정도의 소규모 탈출이 여러번 있었으며 여호수아는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부족들과 힘을 합쳐 평야지대에 도시국가를 세운 가나안인들을 공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대 이집트 군대는 지중해 세계에서 훈련도가 높고 막대한 군비 지출 덕분에 강력한 정예군이었
으니.... 고왕국과 중왕국 시절에는 창과 칼, 그리고 가죽을 덮어 만든 나무 방패가 주요 무기
였으나 제2중간기에 힉소스인들이 신무기였던 전차를 몰고 이집트에 들어왔고, 힉소스인들을
상대하면서 전차의 위력을 실감한 이집트인들은 신왕국 시대에 거대한 전차 부대를 운용했습니다.
힉소스인들은 전차 외에도 말과 합성궁도 가져왔는데... 이집트 군대의 구성이 급속도로
바뀌었으며 또한 인근의 히타이트가 조악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철로 주조한 철제
무기의 사용으로 급격히 강력해지자 이집트 역시 철기를 받아들여 군대의 질을
급격히 높였으니 신왕국시대 이집트 군대는 역사상 최강의 세력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전차에는 2명이 탔으니 기수가 말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뒤쪽에 병사가 멀리서부터 활을 쏘아 적을 제압
했으며 그후 창을 뽑아 싸웠으나 보통은 화살이 떨어지면 즉시 본진으로 귀환했고 병사와 기수는
상체에만 가볍게 경갑옷을 걸쳤는데, 하체는 전차가 막아주었기에 무거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고
파라오가 모는 전차는 4마리의 말들이 끌었으며... 보석과 황금으로 호화롭게 치장된 갑옷을 입었습니다.
이집트 군대는 보병과 기병, 그리고 전차병으로 이루어졌으니 보병은 징집병과 용병이 섞인 혼성 군대
였는데, 봉급을 받거나 전쟁에서 얻어낸 전리품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보상을 해주었으며.....
고왕국 시기부터 누비아인들이 합류했고 나중에는 시리아, 소아시아, 페니키아, 그리스등 수많은
곳에서 이집트에 몰려와 돈을 받고 대신 싸워주었는데 하지만 이집트 군대의 핵심은 전차병이었습니다.
2마리의 말들이 전차를 끌었으니 기동성이 극도로 뛰어나 치고 빠지기에는 그만이었고, 특히
말들의 엄청난 진격 속도로 인해 파괴력도 엄청났으니 파라오나 군사령관들은 전투
초기에 멀리서 활을 쏴 적진에 혼란을 불러온 다음, 직후 전차병들을 진격시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전차를 물린 다음 적들이 흩어진 틈을 타 쓸어버리는 전술을 주로 썼습니다.
람세스 2세 대왕은 팔레스티나를 지나 시리아에서 중동의 패권국 히타이트와 카데시 전투
를 벌여 오리엔트의 패권을 다투며 이집트의 최대 강역을 이룩했고, 아부심벨과
라메세움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건설해 이집트의 황금기를 이룩했으니 모세의
출애굽(?) 시대로 람세스 2세가 죽자 신왕국은 쇠락했고 결국 기원전 1077년에 멸망합니다.
그후 정체불명의 해적 집단인 바다 민족들이 그리스 미케네 문명,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에 치명타
를 입히고 문명세계를 암흑으로 되돌렸으며 가장 강력했던 이집트에도 바다 민족들은
해적 함대를 꾸려 나일강의 항구도시들을 습격했고.....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 라고 불리는
람세스 3세가 이들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그후 신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그냥 당하게 됩니다.
제21왕조, 제22왕조, 제23왕조, 제24왕조 등이 연달아 등장하며 혼란스러운 가운데 서로 패권을
다투었고, 이집트는 셀수 없이 많은 누비아계 소왕국들과 도시들로 잘게 쪼개져 분열된
상태에 이르니 남쪽 쿠시왕국의 왕 피이가 분열된 이집트를 통합하고 파라오를 칭하며
제25왕조를 세웠는데 당시 파라오들은 에티오피아계 흑인이었기에 '흑인 파라오' 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강대국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파라오 타하르카가 쫒겨나고 대신 아시리아의 봉신 왕조인 제26
왕조가 들어서며 본격적인 외세 간섭기인 이집트 말기 왕조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아슈르바니팔
이후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제26왕조는 신바빌로니아, 나중에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침략하여 파라오 프삼티크 3세를 죽인 뒤에 페르시아의 제1차 점령기를 시작합니다.
이 페르시아의 통치기를 '제27왕조' 라 부르니 파라오직은 페르시아의 황제들이 겸임했는데 다리우스
1세 등 페르시아 군주들은 이집트의 종교를 존중하며 관대한 지배를 했지만 그러나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에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며 재원이 부족하자 부유한 이집트의 세금을 괴중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페르시아가 왕위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제28왕조를 세워 독립합니다.
이후 제28왕조, 제29왕조, 제30왕조가 연달아 세워지는중에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35만명에 이르는 대군을 몰고 침략하며 무너졌으니 페르시아의 2차 통치기를
제31왕조로 구분하지만..... 이집트 정복 11년만인 다리우스 3세 시대에 페르시아가
무너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며 페르시아의 식민 지배는 끝이 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요절하자 신하들이 제국을 나누어 가졌는데, 이집트 지방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기원전 305년 왕조를 건국했고,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회복하겠다는 야심 따위는 갖지 않았고, 오히려 부유한 이집트를 제대로 소유하기만 바랐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제32왕조로 불리니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으니 이때 이집트는 그리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마케도니아인의
외부 왕조였으나 토착종교를 존중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받아들였으니 이집트는 상업이 활발하고
여성 상속권이 인정되며, 파로스 등대와 세계최고 도서관이 있는 당대 최고의 선진문명 이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시대에는 거대한 함선인 포티를 건조하는 위엄을 보였지만.....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한 외국인 왕조였고 통치력의 근간은 강력한 군사력에 있었으니 이 점에서
그리스- 마케도니아인들은 이후의 로마인, 아랍인, 튀르크인에 비해 훨씬 덜 성공적이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시대 셀레우코스 왕조를 바빌론까지 밀어붙이는 기염을 토하며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
로 군림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반트 지방을 상실하며
쇠락하면서 신흥 강대국 로마의 힘을 빌어 목숨은 보전했으나 결국 최후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끌던 로마 해군에 대패하면서 멸망하니 이집트는 로마 황제가 직접 통치합니다.
“그녀의 코가 한치만 낮았어도 세계역사는 바뀌었다” 라는 말을 낳은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
마이오스 왕조 13대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BC 51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근친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 통치 하다가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왕위에서 쫓겨난 클레오파트라는 BC 48년 이집트에 원정 와 있던 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인연을 맺고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카이사르와 전투중에 전사하자 BC
47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이집트를 공동 통치 합니다.
그녀는 카이사르 와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아 카이사리온 이라고 했는데 빈객으로 로마에 가서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게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황급히 이집트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협력 그리스까지 진군해 카이사르를 죽인 원로원파 10만대군
과 BC 42년에 필리피전투를 벌였는데, 전쟁을 모르는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수에게 패배했지만
전쟁 경험이 풍부한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군을 격파한 며칠 후에 브루투수군까지 섬멸해 로마를
구했지만 BC 37년 옥타비아누스와 사이가 틀어진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찾아와 결혼합니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로마의 동방 속주 전체를 주었으니 격노한 옥타
비아누스와 BC 31년의 악티움 해전 이 벌어지는데 그전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터키 서부 에페소스에서 전쟁준비를 마치자 사모스 섬과 아테네를 돌면서 축제 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서부 코린트만에 있는 해군기지 파트라에 야영지 를 마련한 후 북상해서 또
다른 해군 기지인 악티움으로 이동했는데 배들이 큰 전함에다가 대규모의 이집트 함대
가 정박하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 옥타비아누스의 도전을 기다리며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배가 노가 3층인 3단 노선 위주인데 비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함선은 노가
5층인 5단 노선이 대부분이라 크기에서 비교도 안되고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데서 자신만만했으나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옥타비아누스 함대 전투선들이 빠른 기동력을
갖춘데다가 뱃머리에 충각을 장착하였으며 또 화약 무기 까지 갖춘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지요?
BC 31년 9월 2일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옥타비아누스의 전투선단과 육중한 안토니우스의 선단이
악티움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니..... 안토니우스 함대는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공격해 오는
옥타비아누스 선단을 당해내지 못하는데, 주변의 섬 마저도 옥타비아누스 함대가 점령해 버립니다.
옥타비아누스의 대리인 아그리파의 함대에 포위되면서 군수품 보급을 받을수 없게된 안토니우스 함대는
힘을 잃기 시작하자, 정면으로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돌파하여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으나 아그리파
의 기만전술 에 빠진 안토니우스의 전투 선단은 옥타비아누스의 전투 선단에게 격파 당하기 시작합니다.
전장에서 불길이 솟고 배가 부숴지자 공포에 질려 파라오 왕에서 일개 아녀자로 변해버린 클레오
파트라는 선단을 이끌고 빠져나와 이집트로 도망치자 안토니우스도 전투를 포기하고 그녀
를 쫓아가니 지휘관이 도망친 함대는 이제 적에게 투항하기 시작했으며....... 육군은 닷새나
안토니우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언덕에서 버티다가 결국에는 어쩔수 없는지라 항복합니다.
그후 옥타비아누스군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까지 추격해 오자 안토니우스 는 기원전
30년 8월 1일 새벽에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떠나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향해 용감하게
나아갔으나.... 이집트 함대는 노를 위로 들어올려 항복했고 안토니우스의 기병대도
그를 버리고 도주했으며... 얼마 남지 않은 보병대는 한번 패하자 금세 흩어져 버립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벌린 거짓 연극에 속아 혼자 목숨을 끊자 이제 38세의
여인은 옥타비아누스를 유혹 하려고 했으나 이미 중년이 다된 그녀의 몸은 이제는
옥타비아누스를 녹일 수 없었으니 로마로 끌려가지 않으려면 자살의 길 밖에 없었지요?
클레오파트라를 물어 죽인 코브라는 하이집트 신의 상징이었으며 태양신 아몬-라 의
대리자의 표상이었으니 코브라로 하여금 자신을 물어 죽게 한 것은 그녀가 신성
과 불멸의 지위를 획득하여 신의 대열에 끼여들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집니다.
그녀는 용모와 자태에 있어서 여성적 매력과 수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발휘해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 로마의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격동기
이집트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 나간 능력이 출중한 여왕 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는 문학 작품의 좋은 소재로서 예전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안토니우스전”과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있으며.....
근세에 와서 쇼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등이 유명하며 여러차례 영화화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사람을 죽게 만드는 코브라로 하여금 자신의 가슴을
물게 만들어 자살했다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의사와 의논하며 여러 차례 실험을 거듭해
코브라의 독으로 고통 없이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집트인들의 발명품 중에 종이로 사용된 파피루스가 있으니 파피루스 Papyrus ( 종이 Paper 라는
단어 유래됨)는 BC 4천경부터 풀의 속을 말려서 종이로 만들었으며 BC 288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건립했는데, 그후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Pergamene 이
도서관을 세우고 학문적으로 일어나자 시샘을 한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종이의 수출을 금지합니다.
이에 페르가몬왕 에우메네스가 BC 190년에 양의 가죽으로 양피지 종이를 만들었는데 4각으로
잘라서 철하였으니 페르가몬(20만권 소장)과 경쟁하는 중에, 동방을 정복한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과 그후 안토니우스 장군은 클레오파트라의 환심을 사기위해 페르가몬의
장서를 이집트에 선물하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70만권의 서적을 갖춘 세계 최고의
도서관이 되었으나.... 카이사르의 로마군과 전투중 배에 난 불이 옮아 붙어 소실 되었습니다.
로마 편입 이후에도 이집트는 동방의 중심지이자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로서 중대한 위치
를 유지했으니 로마시는 밀을 대부분 속주에서 공급받았는데 3대 곡창중 한 곳이 이집트
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으니 몇차례의 알렉산드리아 방화와 폭동, 디오클레티아누스 말년
까지 빈번하게 이뤄진 기독교 박해에 기독교 국교화 이후의 '이교도' 탄압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헬레니즘시대처럼 그리스 문화와 토착 문화, 기독교가 한데 섞인 독특한
문화가 번영했으니 부유한 지역이었고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이슬람 발흥 이전까지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더불어 5대 총대주교좌 중의 하나로서 특히 아프리카 대륙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는 이슬람 발흥 이후 640년경 아랍인의 침공을 받아 아랍
치하에 들어가는데 곡물을 착취받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와 매우 사이가 나빴던 이집트라
아랍에 자진해서 항복할 기미를 보이자 동로마 제국도 지킬수 없는지라 아랍인들에게 양도합니다.
지배 초기에 아랍인들은 인두세만 받는 선에서 이집트 기독교도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시행
하였으나, 이슬람 통치가 확고히 자리잡은 이후로부터는 관용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어서, 이슬람화는 천천히 진행
되었고 무슬림 인구가 기독교도 인구를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물로 둘러싸여 제국과 연결이 어려운 알렉산드리아 대신 642년에 멤피스 근교 푸스타트라는 신도시
가 세워져 이집트의 행정, 군사수도가 되었고..... 이후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661~750),
아바스 왕조(750~963년) 시대를 거쳤으니 이 시대의 주요 건축물로는 이븐 툴룬 모스크가 있습니다.
이집트는 969년 튀니지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 통치에 들어가 카이로(알-카히라)를 수도로 번영을
누렸으나 12세기에 카이로는 십자군의 침공을 받아 청야작전으로 잿더미가 되니 이슬람 군주
들은 기독교도들을 처형하거나 강제추방하는등 박해하며 노예로 삼았으니 유럽 기독교도들과
내통한다고 의심받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는 황폐화 되었고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됩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대활약한 재상 출신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이 창건한 아이유브 왕조(1169~1252)
의 땅이 되었으니..... 이집트의 이슬람은 시아파 시대는 끝나고 순니파 시대가 돌아왔으며
십자군과의 전쟁은 아이유브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의 휴전와 개전을 거치며 진행됩니다.
아이유브왕조는 12세기 시리아에서 셀주크 튀르크 통치자 밑에서 활동했던 살라딘의 쿠르드족 용병
가문인 아버지 아이유브에서 왕조의 명칭이 유래했으니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인 욥을 뜻하는
아랍어인데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 총독에 임명되자 동생 시르쿠와 함께 십자군과의 전쟁에
대비해 시리아를 통일했고..... 삼촌 시르쿠가 죽은후 살라흐 앗 딘은 재빨리 이집트를 장악 합니다.
살라딘은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 알 아디드가 죽자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켰고 나아가 열성 무슬림들을 동원해 십자군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했으며 이집트를 당대 세계 최강의 이슬람 국가로 만들었으니 이후
예루살렘왕국을 침공해 하틴 전투에서 괴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업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살라딘이 죽자 친척인 가신들은 각자의 속주에서 자치적 성격의 내정을 시행함으로써 아이유브 왕조
는 분권화하고, 반봉건적 성격의 가문 연합체로 변모하는데 장남 알 아프달 알리에게 다마스쿠스,
차남 알 아지즈 우스만에게 카이로, 삼남 앗 자히르 가지에게 알레포를 맡겼으며 동생 알 아딜에겐,
그의 야심을 경계하여.... 동북변의 자지라 지역을 맡겨 그가 아들들의 방파제가 되어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형제간의 반목 끝에 오히려 알 아딜이 조카들을 쳐내고 자신의 아들 알 카밀을 카이로
총독으로 두고, 자신은 다마스쿠스에서 술탄이 되는데 그의 통치시기에 신성 로마제국
과 긴장관계가 완화되었으며 해상강국 베네치아에게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사용
특권을 부여하며 교섭하는등 주변국에 회유 정책을 폈고 무역 활성화로 경제가 발전합니다.
1218년 로마 교황은 아크레에 쟝 드 브리엔느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제5차 십자군을 보내는데
8월 5차 십자군의 침략으로 이집트의 다미에타 공방전이 한창일 때,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전갈을 받은 알 아딜이 급사하였고 전염병으로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가니
아들 알 카밀은 십자군이 다미에타에서 철수를 조건으로 예루살렘을 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에 십자군 총사령관 쟝은 수락하려고 했으나, 추기경 펠라기우스가 이 기회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 의견을 피력했으니 의견이 갈라진 십자군에서 여러 제후들이 귀환하였고, 쟝과
펠라기우스는 십자군과 다미에타를 2년간 공격해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더 이상 진격할 힘은 없었습니다.
펠라기우스가 전쟁을 계속한 근거는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지원해 줄것이란 희망이었으나,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성전에 무관심 했고 결국 펠라기우스는 지원을 받지 못힌 군대를 이끌고
델타의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150km, 다미에타에서 서남쪽으로 60km지점까지 침공해 왔지만
알 카밀은 나일강의 범람을 이용해 대승하니 승리를 거둔 지역을 만수라(승리)라 부르며 기념하고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이후 포로석방을 조건으로 다미에타를 돌려받고 5차 십자군 전쟁은 끝납니다.
12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왔으나 큰 전투는 별로
없었으니 알 카밀은 이를 기회로 보고 프리드리히 2세와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여전히 무슬림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지 않으며,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을 기독교측에 내주고 6차 십자군을 종결시킵니다.
알 카밀은 성지를 팔아넘겼다며 비판받았으나 그가 맺은 조약 덕분에 예루살렘에서는 조약
에서 명시한 1239년까지 평화가 이어졌으니, 알 카밀은 유럽세력들과 평화협상 기간
동안 반란을 제압하고 아나톨리아 지역의 룸 술탄국과 아루투크 왕조와의 전쟁을 이어
나갔는데 그러던 와중에 아라비아 반도까지 진출한 몽골제국의 침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238년 알 카밀이 죽고 아들 사이에 후계 다툼이 일어나는데 1239년 휴전협정이 끝나고 아이유브
왕조의 요르단 지역을 통치하던 알 카밀의 조카 앗 니시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1243년에 내전을 이유로 십자군에게 다시 반환했으며 1244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 알 살리흐
는 호라즘 왕조가 멸망한 뒤 남은 군벌들과 손잡고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와 예루살렘을
공격해 점령했으며.... 당시 내전 중이던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는 십자군과 동맹하여 대항 합니다.
이슬람 세력이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에 자극을 받아 1249년 6월,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 루이9세
가 3만 6천의 군을 이끌고 제7차 십자군을 선포하니 술탄 알 살리흐는 알 카밀처럼 예루살렘 양도를
조건으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루이 9세는 거절한뒤 다미에타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진군하지만
십자군은 만수라에서 바이바르스 군에 패배하였고 루이 9세가 포로로 잡히며 7차 십자군은 종결됩니다.
7차십자군 전쟁에 승리했지만 술탄 알 살리흐가 병사하고, 후계자 알 투랸샤가 바이바르스에게 숙청
당하면서 1250년 맘루크가 권력을 승계하는 것으로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망했으나 맘루크의
손아귀로 넘어간 뒤에도 아이유브 왕조의 일원들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갖춘채 시리아와 레반트
에서 할거했으나, 문제는 동방에서 불어오는 거대하고 강력한 신의 재앙 과도 같은 폭풍(몽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