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
조운(1900~ ?)과 초정(1920~2004)은 조선말로 조선시를 쓰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폐기되다시피 한 시조를 끌어올려 감칠맛 나는 우리말 특유의 말맛과 여운을 살리면서 시조의 형식 실험에 힘을 기울인, 명실공히 시조가 현대시이게 한 대시인요 거장입니다. 또 이 두 거장은 같은 해, 1947년 첫 시조집을 냈습니다. 먼저 조운을 만나 봅니다.
알다시피 조운은 월북 시인으로, 《조운시조집》(조선사, 1947)을 우리 문단에서 공식 논의하게 된 것은 해금 조치 후 《조운문학전집》(남풍, 1989)으로 다시 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근자에 다른 책도 나왔지만 특별히 이 책에는 조운의 시와 시조 그리고 〈병인년과 시조〉(《조선문단》, 1927. 2), 〈근대가요 대방가(大方家) 신오위장(申五衛將)〉(《신생》, 1929. 1~2)과 같은 몇 편 안 되는 산문이 실려 있습니다. 〈병인년과 시조〉는 조운의 시조관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산문이며 〈근대가요 대방가 신오위장〉은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비하고 집대성하여 ‘판소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신재효에 대한 초기 연구라 할 수 있어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사료입니다.
조운의 몇 편 안 되는 산문 가운데 〈술〉(《조선문단》, 1926. 6)을 읽다 보면 그의 ‘고독’과 ‘비애’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궁금해집니다. 그가 입에 술을 댄 것은 그 글을 쓰기 한 해 전으로, 취한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놀라서 “너도 술 먹을 줄 알더냐?” 묻곤 했답니다. 그는 마음 한 모퉁이가 텅 빈 것 같아 무엇으로 거기를 채워야 되겠고 까닭 없는 적막과 비애를 잊기 위해 취해서 쓰러져야만 될 것 같아 값싼 술잔을 손에 든다 했습니다. 마음의 공동(空洞)을 무엇으로 채울까, 고독과 적막한 비애를 무엇으로 채울까 그는 고민했던 것입니다. “술을 빚자, 새 술을 빚자. 그리하여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취케 하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연보에 의하면 조운은 1918년 열아홉의 나이에 동갑내기 김공주와 결혼하여 1924년 협의 이혼하게 됩니다. 그다음 해 7월, 〈숫머슴애〉(《조선문단》)라는 산문을 발표합니다. 연애관을 써 달라는 청탁에 “누구 하나를 사랑해 본 적이 없고 누구 하나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거늘 이러한 숫머슴애에게 어찌 그에 대한 감상이나 경험담이니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음 한 모퉁이가 텅 빈 것 같은 그 고독과 가라앉은 슬픔을 알 것도 같지만, 이 마음의 공동에 깃든 것이란 대체 무얼까. 새 술을 빚자고 외치던 이때부터 혹여 월북의 구실이 싹트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하여 오늘, ‘정감과 인간미 넘치는 해학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탈이념적’이라는 작품에서 ‘월북의 당위’를 읽으려는 시도가 생기는 건 아닐까.
조운이 월북하지 않았다면 그의 작품에서 월북의 당위를 읽으려는 시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권영민 교수가 《문학사상》 2008년 9월호에 발표한 〈김학렬 문고의 설치〉라는 권두논단에 의하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재일 한국인 학자 김학렬 박사가 기증한 북한 문학도서를 ‘학렬문고’라는 개인 문고로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 북한에서 간행된 시, 소설, 연극, 영화, 음악 등 문화예술 관련 서적들이 총망라되어 있는데 해방 직후 월북하여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조운을 포함한 문인들의 저작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운시조집》 이후 그는 또 다른 시집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월북하여 북한 문화계의 ‘큰 별’로 추앙받아 온 조운은 김일성에 대한 찬양이나 사회주의 체제에 동조하는 내용의 〈평양8관〉 같은 시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편들에서는 시조가 봉건시대 착취 계급의 유산이라고 배척하는 북한 체제에 순응하면서 시조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 보입니다. 각각 4행으로 된 시편에서 각 행은 4음4보격의 율격 구조를 보이는데, 마지막 4행만은 종장 특유의 율격 구조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4행의 시편을 3장 시조로 본다면 초장이나 중장이 2장 정도 늘어난 형태를 취한 것입니다. 조운은 초기에 자유시를 썼지만 곧 시조에 주력하게 됩니다. 조운은 “시조의 형식적 틀이 자유로운 근대적 사유와 맞지 않는다고 볼 그 어떤 이유도 없다고 보았고, 시조가 필연적으로 운명을 다했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이 그냥 일본을 통한 구미의 물결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져버렸기에 이는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비록 월북하여 체제 옹호적인 시를 썼지만, 월북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시조를 아껴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에서 이념이 다 무엇이고 목적이 다 무엇입니까. 시는 시 자체로서 우리의 심미적 욕구를 채워 주고 시 자체가 지닌 정서적 울림만으로도 효용을 다하는 것을. 이 소박한 생각에 이르면 조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실 공히 시조가 현대시이게 한 현대시조사 제일석의 거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명편들을 생각나는 대로 꼽아 보면 〈석류(石榴)〉 〈고매(古梅)〉 〈설청(雪晴)〉 〈무꽃〉과 같은 단시조가 있습니다. 〈선죽교(善竹橋)〉 〈비 맞고 찾아온 벗에게〉 〈고부 두승산(古阜 斗升山)〉과 같은 연시조가 있고 단 한 편 남겼으나 현대 사설시조의 전범이 된 〈구룡폭포(九龍瀑布)〉가 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병인년과 시조〉에는 조운의 시조관이 나타납니다. 이 산문은 병인년에 발표된 시조에 대한 독후감으로 그는 육당의 시조에서 ‘알톨한 것, 산뜩한 것, 곱고 매끄럽고 시고 멋진 것’을 찾으려는 것은 잘못이며 ‘외워 가지고 잔디밭이나 시냇가에 누워서 부를 것’은 못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조선 시인 가운데 시조를 어루만지고 가꾸려고 하는 이는 주요한과 이은상이라 하였습니다.
주요한을 평하며, ‘시에도 말붙임새가 묘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 재주는 시조에 와서 맵시를 부릴 대로 부렸다’ 하였습니다. 정지용을 평하면서는, ‘시조와 시조 아닌 것의 구별은 자수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 시의 형태를 안출(案出)함에는 ‘시조의 변형’도 있을 것이요, 시조와 민요를 기초로 하고 외국 시형을 참작한 어떤 형식도 생길 것이며, ‘가지각색으로 연구도 하고 시험’도 해야 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변체적 시형이 나오는 것도 반갑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병인년의 작품 가운데 ‘구투(舊套)를 벗지 못하고 구조(舊調) 그대로일지라도 앵도라진 것’이 한 수도 없음을 애석해 하였습니다. 이처럼 〈병인년과 시조〉에서 우리는 조운의 시조관 또는 창작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를 환언하면, 무엇보다 주제·소재·시어가 참신해야 한다는 것, 시조는 외워서 노래하듯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운은 시조가 ‘노래 부르는 시(시조창)’에서 ‘읽는 시(현대시조)’가 되었다 해도 흔히 말하듯, 음악성을 상실했다거나 음악성과 결별했다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워 가지고 잔디밭이나 시냇가에 누워서 부를 수 있는 시조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말이음새나 말붙임새라는 표현으로써 섬세한 조어법과 언어 구사 능력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관습적인 가락을 따르더라도 조사법이 기능적으로 작용하도록, 요즘 말로 실험적 또는 전위적인 형식 실험과 언어 구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조는 글자 수만 따지는 음수율의 답답한 정형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거쳐서 나오는 변형 또는 변체적 시형도 반갑다 했습니다. 여기서 변체적 시형이라는 것은 시행 배열과 연 구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양장시조를 시도했던 주요한이나 이은상과는 달리 월북 이전의 조운이 시조 3장의 형식적 정체성을 지키며 평시조와 사설시조만을 써 왔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매화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고매〉 전문
이 시조를 천천히 마음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 늙은 매화나무와 거기 드문드문 피어난 꽃송이가 떠오릅니다. 절집 담장 둘러둔 데, 묵은 이끼 덮인 나무등걸이 보입니다. 나무등걸에서 벋어 나아간 가지 위에 드문드문 맺힌 하얀 매화 꽃송이가 보입니다.
적확한 시어가 바로 제자리에 잘 들어앉았습니다. 섬세한 조어와 군더더기 없는 언어 구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장의 시조를 장 단위 3연 6행으로 시행 발화한 까닭은 선명한 이미지 제시와 명확한 의미 전달에 있습니다. 고매의 성글고 거친 가지를 또렷이 보여 주기 위해 초장을 구 단위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장 단위로 연을 나누어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꽃이 피어난 모습을 형상하고 있습니다.
선명한 영상을 전경화하면서 배경에 여백을 두르기 위해 행을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장에 와서 고매는 허울을 다 털어버리고 가지고 있을 것만 가지고 있습니다. 말을 버린 행간에서 의미와 영상과 여운을 얻었습니다. 버려서 얻은 고졸(古拙) 담박(淡泊)입니다. 이 종장의 허울 다 털어버린 행위와 남을 것만 남았다는 말은 상동관계입니다. 그래서 1행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종장은 초장과 중장의 이미지를 주제적 의미로 전환시키는 종장 특유의 미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아 있는 매화 늙은 등걸처럼 인생이거나 문장이거나 잡사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가질 것만 가지라는 거장의 전언 아닌가 합니다.
매화 | 늙은 등걸 | 성글고 | 거친 가지
꽃도 | 드문드문 | 여기 하나 | 저기 둘씩
허울 다 | 털어버리고 | 남을 것만 | 남은 듯.
이처럼 마디 구분할 수 있는 3연 6행 42음절 〈고매〉 3장의 율격을 수치화하면 초장, 2 4 3 4 중장, 2 4 4 4 종장, 3 5 4 3으로 초장과 중장 첫 마디에 아주 적은 음량(음절)을 써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조운 특유의 리듬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고매(古梅)라는 한자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심상 언어입니다. 읽으면서 이미지가 바로 생성되는 시어입니다.
조운이 구사하는 시어는 일상 하는 말로 쓰는 평이한 구어체입니다. 그래서 이을호는 “시어를 읽을 적에는 마치 그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듯한 착각에 젖는다.”고 했습니다. 1947년 《조운시조집》 당시, 이토록 참신한 언어 운용과 형식 운용의 묘를 보여 준 예는 없었습니다. 혁명입니다.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金 剛)에 물이 되나! 금강(金剛)에 물이 되나!
샘도 강(江)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구룡폭포(九龍瀑布)〉 전문(빗금(/)은 인용자)
단 한 편, 조운의 사설시조입니다. 구룡폭포의 장쾌한 물줄기와 구룡폭포가 아우르고 있는 웅장하고 화려한 경개 앞에 경이에 찬 시인이 섰습니다. 몇 생을 거듭해서 내 마음 내 몸을 닦고 닦더라도 다만 ‘금강’에 떨어져 내리는 한 방울 ‘물’이 되고 싶습니다.
‘샘도 강도 바다’도 아니고 ‘진주담과 만폭동’ ‘옥류 수렴’도 아니고 지상에 발 디디지 아니하여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물들지 아니한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 보”고 싶습니다. 한 방울 이슬로 비류직하(飛流直下) 산화하여 금강의 물이 되고 싶습니다.
1947년 《조운시조집》에 수록되기까지 작품 연보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구룡폭포〉는 시조집을 내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1948년 소작인 〈유자(柚子)〉에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유자된지’라는 언표에서 감지되는 일이지만, 해방 공간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며 사상이 무엇인지 깊이 번민했는지도 모릅니다.
한 방울 이슬로 구룡연 천척절애를 굴러 산화하듯, 물을 건너듯 〈구룡폭포〉는 혼탁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백일 수 있습니다. 조운의 이 유려하고 활달한 시어 운용과 그 진폭을 알 수 없이 자재한 상상력이 당시 평론가 윤곤강으로 하여금 위당이나 노산, 육당과 가람, 지용의 시들을 갖다 대어도 이 사설시조와 어깨를 겨눌 만한 작품을 보지 못했다 천명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 〈구룡폭포〉에서 우리는 조운이 제시한 현대 사설시조의 좌표를 봅니다. 말을 구슬구슬 엮어 나가는 사설성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장 단위로 이어 쓴다는 점, 말을 엮어 나가되 이음새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유연하게 치렁치렁 연쇄적으로 이어 간다는 점, 말수 많아져도 언어 운용의 격조를 지녀야 한다는 점, 특히 중장의 흥청거리는 사설이 야기하는 방만한 자율성에 대한 경계와 자유시와의 변별을 위해 명확한 3장 분련 형식으로 가되 압축적으로 시상을 전환하여 종결짓는 종장에 와서는 ‘소음보(3)+과음보(5)+평음보(4)+소음보(3)’라는 종장 특유의 율격을 준수’한다는 점, ‘2음보격 연속체로 사설을 낭창낭창 엮어 가되 빗금(/)과 같이 통사·의미 단위의 4마디로 분할되는 평시조의 분절성을 이어 간다’는 점을 조운은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김상옥 |
이제 조운과 동시대를 살며 일제하에서 우리말 우리글로 시조를 써서 일제에게 고초를 당하고 1947년 같은 해 첫 시조집(《초적(草笛)》 수향서헌)을 낸 또 한 분의 거장 초정 김상옥 선생을 만나봅니다. 영광을 거점으로 조운이 민족의식 고취와 지방 문예부흥 운동의 선봉에 섰던 바와 같이 초정은 유치환, 윤이상, 김춘수, 전혁림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여 향토문화 창달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963년 서울로 이주하여 인사동에 골동가게 아자방(亞字房)을 열고, 시중에 흩어진 문화재를 수집하여 그 가치를 바로잡고,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종합적인 예술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 만큼 초정의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같은 골동서화에 대한 애호와 탐미가 〈청자부(靑磁賦)〉와 〈백자부(白磁賦)〉, 〈이조(李朝)의 흙〉과 같은 시조를 낳게 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요지(窯址)에 가서 파편을 주워 모으기도 했고 또 어릴 때부터 도자기와 연적 같은 골동품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는 초정은 시를 읽으며 시를 배운 것이 아니라 도자기에서 시를 배웠다 했습니다. 그래 훗날 ‘이가 빠진 항아리를 보면 내 이는 못해 넣어도 치과에 가서 순금으로 항아리 이빨을 해 넣’었으며 ‘이 빠진 항아리에게 순금의 의치를 만들어 끼워 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나의 시에도 혹시 자기(磁器)처럼 이 빠진 자욱이 눈에 띄면, 나는 몇날 몇밤을 자지 않고 퇴고를 한다.” 했습니다. 그런 초정을 보고 김동리는 “조사(措辭)는 영악하도록 완벽을 꾀한다.” 했고, 서정주는 “우리나라에 귀신이 곡(哭)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의 시에도 많은 귀신이 나와 곡을 한다” 평했습니다. 이는 《묵(墨)을 갈다가》(창작과비평사, 1980)에 수록된 자유시 “굽 높은/ 제기.// 신전에/ 제물을 받들어/ 올리는―// 굽 높은/ 제기.// 시도 받들면/ 문자에/ 매이지 않는다.// 굽 높은/ 제기.(〈제기(祭器)〉전문)”에 나타나는 초정의 시 정신에 부합하는 상찬이겠습니다.
그래 김용직은 시·서·화·전각·골동 감정 등에 일가를 이룬 초정을 ‘우리 예술계에서 여러 개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거느린 하나의 산’이요, ‘한국 현대시조사에 높이 걸린 성좌’라 했을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교과서에 실려 대중적 인기를 얻고 즐겨 암송되는 〈봉선화〉는 1939년 가람 이병기 추천으로 《문장》에 실린 작품입니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봉선화〉 전문
이 시조를 가만히 읽다 보면 여름비 오고 그 물 함빡 머금어 탱탱하게 피어오른 봉선화 붉은 꽃들이 보입니다. 어린 초정의 손을 잡아 손톱 위에 봉숭아꽃잎을 백반 함께 찧어 얹고 가늘고 긴 잎사귀로 감싸 실로 찬찬 매어 주는 누님이 보입니다.
누님 생각에 손톱 물고 앉았다가 연필심에 침을 발라 편지 쓰는 청년 초정이 보입니다.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절절히 누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봉선화〉는 ‘단순한 감각 차원의 사경(寫景)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체온이 깃들고 나아가 사상·관념이 내포된 차원’으로 승화되어 한국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꽃이 되었습니다.
꿀벌이 꽃을 대하듯 책을 대하라
벌은 달고 향기로운 꿀을 길어가되
그 꽃잎 하나 아직 상한 적 없었느니!
〈봉선화〉를 포함한 〈사향(思鄕)〉 〈백자부〉 〈변씨촌〉 〈다보탑〉, 사설시조 〈선죽교〉 등이 수록된 《초적》의 권두에 실려 있는 〈독서의 명(銘)〉이라는 이 글은 초정에게 아름다운 일화를 안겨 주었습니다. 1960년대 초 전국도서관사서회의가 국립도서관에서 열렸는데 그 회의 도중 누군가 이 글의 출처를 물었습니다. 또 누군가 초정의 시집 권두에 실린 글임을 알렸습니다.
그래 이 글에 ‘감심한 한 도서관 관계자’가 초정을 찾아와서는 책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영하의 날씨에 방은 냉돌인 채로 난로도 전화도 없는 형편을 보고 간 다음 날, 느닷없이 목수 미장이가 들이닥치고 전화국 공원들이 와서 다짜고짜로 전화를 가설했답니다.
목수는 서가를 짜고 마루를 깔고, 미장이는 냉돌을 온돌로 고치고 석유난로도 갖다 놓아 초정의 ‘가엾은 서울살이는 하루아침에 천지개벽’을 하게 되었답니다. 각박한 세상이라고 느끼는 요즘 들으면 놀랍도록 따뜻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1973년 초정의 시집 중 가장 호화판이라는 《삼행시육십오편(三行詩六十五篇)》(아자방)이 나왔을 때, ‘그 무렵 육 여사를 드높여 〈어느 고마운 이의 뜻을 받들어〉라는 후기가 붙은 시집의 값이 겨우 3백 원인 데 비해’ 초정의 시집은 ‘물경 5천 원’이나 되었답니다. 초정은 스스로 이 일에 대해 “이런 불손한 오기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아마 불우했던 나의 소년 시절의 간고(艱苦)에 대한 보상 심리의 작용이 아니었던가 싶다”고 술회하였습니다. 불손한 오기가 아니라 대가 거장의 즐거운 배짱 아닌가 합니다.
그런 즐거운 배짱을 가진 초정이되, 그 ‘정신세계는 준엄하고 견결’하여 시화선집 《향기 남은 가을》(상서각, 1989)에는 103편만을 엄선하여 수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시를 위해 우황(牛黃) 든 소처럼 앓아 왔다. 그러나 거둔 것은 결국 쭉정이뿐이다. 이 중에 한 편이라도 후일에 남을 수만 있다면 분외(分外)의 보람이겠다.”고 권두에 적고 있습니다.
이 준엄하고 견결한 시 정신은 시조 3장을 가지고 우황 든 소처럼 앓아 오면서 구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삼행시’를 주창하였습니다. 시조음악 시대에 마련된 장(章)이라는 구분이 시조를 현대시이게 하기엔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성을 강조하고 시조를 현대시로서 자리매김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초정은 “시가 무엇이며, 시인이 무엇이며, 보람이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권력, 어떤 재화, 어떤 명예와도 바꿀 수 없는 내 슬픈 종교의 삼위일체”라 하였습니다. 시인으로 시를 쓰며 산다는 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요, 삼위일체를 이루는 초정의 슬픈 종교라 했습니다.
슬픈 종교. 그 슬픈 종교는 종내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초정은 세상에 아무리 많은 말이 있어도 꼭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할 말은 한 마디뿐이며, 그 한 마디를 찾아내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 했습니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가 아니라 구도자가 되어야 한다 했습니다. 언어의 구도자. 이 구도자적 신념이 미의 극치는 압축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초정은 어느 대담 중에 난해한 시에 대한 소신을 밝히며 “늘 되도록 남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쉽게 쓰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 했습니다. 시란 어떤 것이라 규정짓겠느냐는 질문에는 “나는 시가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시는 무엇이냐, 바로 인생이다. 인생이 무엇이냐, 내 존재가 무엇이냐, 나는 어째서 있느냐 그런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시를 쓰고 있습니다” 했습니다.
‘시조가 별거 아니’라고 초정은 말했습니다. 그저 우리 한국인들의 정서를 담기에 가장 적합한 그릇으로 ‘일정한 가락과 틀을 갖춘’ 시로서 “김소월이나, 김영랑·박목월·서정주 등 우리가 명작이라고 읊조리는 현대시들 중 대부분이 그 바탕은 시조에 두고 있지 않느냐” 반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정주의 〈문둥이〉(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만 해도 시조 형식과 완전히 일치하는 작품입니다. “다만 작품을 쓴 시인들 본인이 자신의 작품 바탕이 시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큰 비극”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초정은 한국시의 전통이 희미하게 사라지려고 하는 원인이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있고 자칭 타칭 대가라는 시인들이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했습니다.
시는 말을 아끼는 데서 묘미가 나는 것인데 요즘의 시들은 말을 너무 헤프게 쓴다고 지적한 바 있는 초정은 “한국말은 나의 생명이고, 영혼이고, 살이며, 나의 모든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말을 사랑하자면서, 국어는 학문 이상의 사랑이라 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못 알아주고 박대하는 것을 볼 때마다 시를 쓴다는 것이 슬프다 했습니다. 더욱이 문학한다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혹사하는 것은 죄악이라 했습니다. ‘말의 영성(靈性)’을 알아야만 시를 쓸 수 있고 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 했습니다. 말의 영성.
말의 영성이란 무엇일까. 초정의 말대로 ‘유서를 쓰듯 시를 쓴다’면 내 시에도 영성이 깃들게 될까. 초정의 말대로 시인이 판관이라면 그 누가 함부로 붓을 날려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시인이 시라는 그릇을, “신전에/ 제물을 받들어/ 올리는―// 굽 높은/ 제기”로 안다면 누가 그 그릇에 언어를 함부로 담을 수 있을까. 언어의 제물을 시라는 굽 높은 제기에 받들어 올린다면 그 제기에 영성도 상당히는 깃들겠습니다. 영성이 깃든 언어의 제물은 다만 문자에 매이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한 가지 질문이었다,
― 두엄 곁에 핀 달개비꽃도.
그것은 또
애틋한 대답이었다,
― 풀잎을 기는 딱정벌레도.
참으로
뭉클한 슬픔이었다,
― 가까이 들리던 먼 귀울림!
―〈주변(周邊)에서〉 전문
달개비꽃은 왜 피어났을까. 왜 하필 두엄 곁에 피어났을까. 딱정벌레는 왜 기어 다닐까. 왜 하필 풀잎을 기는 것일까. 이들은 왜 내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것일까. 나는 왜 여기 서성이는 것일까.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일까. 달개비꽃이며 딱정벌레는, 이 존재들을 바라보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도대체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듯 혼자 묻고, 바른지 그른지 모를 답을 내려야 하는 우리는 “참으로/ 뭉클한 슬픔”의 존재입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갔습니다.‘그리고 별이 그 길을 환히 밝혀 주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우리에게 답해 줄 시인은 가시었고 우리는 스스로 답을 구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뭉클한 슬픔의 존재입니다.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시에서 답을 내려 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시는 우리에게 화두 하나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이 알 수 없는 공안을 거듭 되뇌게 합니다. 알 것도 같은 먼 귀울림은 있으나 끝내 알아내지 못하는 우리는 참으로 뭉클한 슬픔의 존재입니다. 깊고 먼 여운이 우리의 마음을 잔잔히 흔들어 젖게 하고 있습니다. 초정은 “예술에서도 최선의 미는 아픔이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우리가 풀 수 없는 공안을 지고 가야만 하는, 슬퍼서 아름다운 생의 한 형식임을 일러줍니다.
20년 먼저 태어난 조운과 초정은 같은 해 첫 시집을 낸 것처럼 닮은 점이 많은 시인입니다. 두 시인은 일제하에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했고 지역 문화예술을 선도한 수장이며 국어 작문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두 시인의 시적 탐색, 곧 시조가 현대시로서 어떠한 면모를 지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당대로서는 혁신적 변모를 가지게 하였습니다.
조운은 시행 배열과 연 구성의 형식운용이 시조가 현대시이게 하는 하나의 요건임을 알았습니다. 초정은 ‘삼행시’라는 용어를 쓰면서 문학성 제고를 위한 다각도의 형식 실험을 하였습니다. 두 시인은 평이한 일상어를 시어로 구사하여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쓰고자 노력하였으며 그래서 이들의 시를 읽다 보면 옆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고매〉를 읽다 보면 뒷짐 지고 늙은 매화나무 등걸에 핀 매화를 바라보는 조운 시인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주변에서〉를 읽다 보면 어느 시상식 자리에서 짧게 인사드린 초정 선생의 모습이 애잔하게 떠오릅니다. 선생이 영영 가신 뒤에야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남망산에 시비를 모시고 〈싸리꽃〉을 낭송하던 그날이 아련히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