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자에 들어가면서
늘 궁금한 게 있었다. 불교에 지대한 업적을 남기신 큰스님들,
경허스님, 한암스님, 만공스님, 그리고 후대의 청담스님, 성철스님, 법전스님, 법정스님...
(여기에 종범스님, 통도사 시절, 법문을 해 주시던 경봉스님을 넣어 드리고프다22/6/22,11:28)
이 선사분들은 천장사. 해인사. 봉암사. 월정사. 청계사. 도선사 등등 내 시각이 미치는 지근거리에서 활동반경을 갖고 계셨었다. 그래서 친근하게 느껴지므로 인해 대개는 다녀왔다. 해인사. 동화사. 대승사 등등이 합천. 대구. 문경 먼 곳에 있지만 내겐 먼 땅은 아니다.
그런데 계룡산의 갑사나 동학사, 하동의 쌍계사, 속리산 법주사를 산행 간에 찾고 나서의 생각은 '이곳을 중창한 (훌륭한)스님은 어떤 분일까?' 그런 생각이 노상 내게 의문으로 남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너무 멀어서 가지 못한 게 아니라 마음이 그 절에 미치지 못하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뒤돌아 보면, 금정산에 올랐었고 금정산성 막걸리도 먹으러 갔었지만 하지만 그 유명한 범어사는 들르지 않았다. 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9.9할은 범어사를 들렸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혜원(고산 스님) 스님은, 바로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분이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에 계양도서관에서 『지리산 무쇠소』 를 만났을 때 정말 낮선 책 제목이자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제목은 웬지 무겁고 거추장했다. 지리산은 낯이 익지만 '무쇠소'는 너무나 무겁고 꼰대 느낌이다. 안 읽을 요량으로 책을 펼쳐보았는데 하동의 쌍계사가 주 활동무대가 아닌가. 쌍계사는 경산의 윤ㅊ용 화백과도 들렀었고, 아무튼 지리산 종주 할때마다 종종 들렀던 절이다. 책의 서두를 읽는 그 찰라에 이 책이, 아니 혜원스님이 내게로 먼저 말을 건네왔다. "쌍계사와 범어사의 생생한 이야기를 니 듣고잡나?"
스님은 궤적과 말씀만이 아니고 행정전문가의 면모가 유별나셔서 더욱 돌올하게 느껴진다.
[인터넷에서 모셔옴. 고산큰스님]
고산 큰스님은 내가 그 이름을 안 21년 12월(엊그제)로부터 불과 9개월 전엔 2021년 3월 23일 입적하셨다. 지리산 종주하느라 21년에만 세 번, 윤화백과 관람차로도 갔었지만 큰스님의 존함에 대하여는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불일폭포도 올랐었지만 그곳에 정자를 짓고 밭을 개간한 분이 고산큰스님이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그 몰랐다는 사실이 아프게 내 가슴을 후빈다.
아래는 고산스님의 인생 기록이다.
공자의 삼계도에 "一生之計 在於幼 一年之計 在於春 一日之計 在於寅' 이라는 말이 있다. 하루의 일을 잘하려면 인시寅時(03:00~05:00)에 일어나서 구상을 잘해야 하고, 한 해의 일을 잘하려면 봄에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일생을 행복하게 잘 살려면 어릴 때에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불기 2552년 납월
서기 2008년 12월
著者 고산 씀
우리나라의 표준시는 동경 127.5도 이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동경135도 표준시를 한국 표준시로 변경한 이후 아직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시간보다 30분 느린 시간이 정확한 한국 표준시입니다.
자시(23:30~01:29) = 삼경 축시(01:30~03:29) = 사경 인시(03:30~05:29) = 오경 묘시(05:30~07:29) 진시(07:30~09:29)
사시(09:30~11:29) 오시(11:30~13:29) 미시(13:30~15:29) 신시(15:30~17:29) 유시(17:30~19:29) 술시(19:30~21:29) = 초경 해시(21:30~23:29) = 이경
1각은 약 15분입니다.
경은 밤시간의 5등분입니다. (술시:초경 ~ 인시:오경)
1장
어린시절
부친 해주 오씨 응수 거사와 밀양박씨 용순 여사 사이에 5남2녀 중 4남으로 음력 1933년 12월 9일 술시에 경남 울주군 상북면 천전리 42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일만 만 뿌리 근, 萬根으로 姓을 합하면 '오만근'이다.
윗동네 뒷산에는 장군대가 있는 높은 산이 있고, 이 산의 장군대 밑이 바로 우리집이다. 집에서 서쪽으로 약 5리 들어가면 공동묘지가 있고 거기서 10리 길을 더 들어가면 간월산이 있는데 산 중턱에 신라 때 대찰이었던 간월사지가 있다. 지금도 석불상이 남아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태백산의 한 맥이 동남으로 흘러 이 간월산을 이루고 이 간월산맥이 다시 흘러 통도사가 자리잡은 영취산을 이루고 또다시 동남으로 흘러 범어사가 있는 금정산을 이루었다.
동남쪽으로 5리를 가면 언양읍이 있고 동북쪽으로 30리 정도 올라가면 신라 때 도의 국사께서 창건하신 석남사石南寺가 있으며 아랫마을 한가운데는 용화사가 있어 마치 불국토를 방불케하는 아름다운 고장이기도 하다.
일곱 살 되는 해, 1939년 3월 23일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길천공립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담임은 야마구치 선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일본 말, 일본 글만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자그마한 패쪽을 10개씩 나눠주면서 조선말을 하는 사람을 보거든 일본 말로 '미다!' 라고 하면서 패쪽 한 장씩을 받아내라고 했다. 우리들은 영문도 모르고 친구들 가운데 우리말 하는 사람만 있으면 신바람이 나서 '미다!' 라고 외치면서 패쪽 빼앗기에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10장을 다 빼앗기면 학업점수까지 삭감했다.
나는 학교에서 체육시간이면 배가 아프다고 빙자하고 언제나 수업에서 빠졌다. 이유는 평소 부끄러움을 많아서 옷을 벗기 싫었기 때문이다. 오줌을 눌 때도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는 보지 않고 대변보는 칸 안에 들어가서 보았다.
3학년이 되어 장우와 나는 장군대에 올라갔다. 나는 장우에게 시를 한 수 지어보자고 제안했다. 먼저 장우가 시를 지어 가로대,
"아좌산상견하니, 천하안중수로다"고 하였다. 뜻을 풀이하면 '내가 산 위에 앉아보니 천하가 눈 안에 있도다'이다. 이어서 내가 시를 지어 가로대, "묵좌장군대 하니 백운임왕래로다"라고 했다. 뜻을 풀면, '묵묵히 장군대에 앉았으니 흰 구름이 마음대로 오고 가는구나'이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천자문을 읽기 시작했다. '천지현황 하고 우주홍황...' 하면서 낭랑하게 읽었더니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글 소리를 뚝 그치고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내다보니 옆집 형수님이 물동이를 이고 섰다. 나는 왜 그렇게 서 계시느냐고 물었다. '글 읽는 소리가 하도 듣기 좋아서 잠깐 서 있었다'고 하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좋았다.
친구들과 아랫마을 용화사로 놀러 갔다. 나는 친구들보다 먼저 절을 하고 나서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 곁으로 다가갔다. 바싹 다가선 나는 부처님 두 귀를 붙잡고 볼에 뽀뽀를 하고 "나는 부처님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귀는 참 크네요"라고 말하고 그 다음 두 손으로 부처님의 머리를 만져보았다. 그러자 부처님의 머리 하나가 빠졌다. '부처님, 머리 하나가 빠졌네요'라고 말해도 부처님은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빙그레 웃으시기만 한다. 그래서 나는 빠진 머리를 도로 제자리에 두고 뒤로 물러나와 '부처님 머리를 하나 빠지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고 다시 절을 세 번 더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모두 불당 밖으로 나왔다.
세월은 쉬지 않고 흘러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큰 추위는 다소 지나 음력 설이 돌아왔다. 그 당시 나는 명절이 오면 누구보다도 부산에 사는 둘째 형이 제일 기다려졌다. 둘째 형은 도시에 있어서 해마다 설날이면 일본에서 나오는 자스미캉, 캐러멜, 요캉, 사탕 등 많은 선물을 사오기 때문이다. 나는 그믐날부터 놀면서도 자주 아랫마을을 내려다보았다. 형은 그믐날에 오기도 하고 초하룻날 올 때도 있었다. 친구들은 도시에 나가 있는 형을 둔 나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늦가을 졸업 여행을 석남사로 가게 되어 어머니는 내게 잡비 50전을 주셨다. ...나는 스님을 따라가지 않고 혼자 뒤처져서 재빨리 신을 벗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부처님 앞으로 다가가서 어머니가 주신 50전을 몽땅 다 네어서 부처님 앞에 갖다놓고 "부처님! 이 돈 모두 드릴께요. 저를 훌륭한 사람 되게 해주세요! 네?" 하고서 절을 열 두 번이나 했다. ...계곡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수석이 있었다. 이렇게 깨끗한 물과 반석은 처음이었다. 물이 맑다 못해 푸른빛이 나고 반석은 몇 천 년 동안 씻고씻기어 이끼 하나 없이 흰 장판처럼 반질반질하다. 계곡가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22/1/2
2
출가(1945년~1947년)
1945년 3월 20일(음력 2월7일)은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다. ...답사를 읽을 때 친구들은 정든 학교와 정든 선생님을 떠난다는 생각에 모두들 울었다. 졸업장을 받아들고 기념촬이 끝난 다음, 집으로 돌아오려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왔으나 마음은 학교와 친구들에게 가 있었다.
졸업 후 하는 일 없이 매일 빈둥거리면서 놀기만 하니 아버지께서 어릴 때 읽던 명심보감을 새로 읽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한지 약 한 달이 지난 4월 22일에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를 부르시더니 '너 절에 가서 공부할 생각은 없느냐"고 하셨다. 나는 전에 석남사에 갔던 생각이 되살아나서 "그러면 참 좋지요!"라고 선뜻 대답했다.
언양 읍내로 가서 양산행 버스를 타고 통도사에 도착해서 일주문을 지나고 천왕문에 들어서니 주먹만한 눈알을 부라리고 서 있는 사천왕이 무시무시했다. 나는 이쪽과 저쪽을 향해서 각각 반배를 하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공부하러 가니 잘 봐주세요'라고 되뇌이며 앞서가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구하스님께서는 돋보기를 끼셨는데 그 안경 너머로 한참 굽어보시더니 "좀 더 크거든 데리고 오시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네! 알았습니다." 하고 나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으로 중단하고 다른 말씀을 나누시다가 엽차 한 잔씩 얻어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만 3일이 지나고 나흘째 되는 날 양력 4월 26일(음력 3월 15일) 에 아버지께서는 또 나를 부르시더니 "너 오늘 동래 범어사에 한번 가 볼래?" 하셨다. 나는 "네! 그리하세요." 라고 답했다. 언양 읍내에서 부산가는 버스를 타고 팔송정에 내려 약 1시간 이상 걸어서 범어사에 도착하니 오후 2시쯤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한 스님의 안내를 받아 하동산河東山 조실 스님을 참방했다. 인사를 드린 다음 아버지께서 말씀드리기를 "오늘 큰 스님을 찾아뵈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놈이 제 넷째 아들놈인데 큰스님의 상좌로 드릴까 해서 데리고왔습니다."라고 하니 큰스님께서는 아버지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작 올것이지 왜 이제 왔어!"라고 하셨다. 통도사 구하 스님과는 말씀하시는 것이 현지현격이었다. 첫눈에 이 스님을 보는 순간 평소에 친한 스님처럼 마음에 다정함을 느꼈다. 인자하신 모습이나 말씀하시는 모습이나 전부 내 마음에 들었다. 큰스님은 시자를 불러서 나를 행자실로 안내케 하시고 아버지에게는 잘했다고 치하하셨다. 이날이 바로 나의 입산득도일이 되는데 1945년 4월 26일(음력)이다.
큰 행자 하나가 내게 나이를 물었다. 열세 살이라고 답했더니 다시 그 행자는 "왜 학교에 가지 않고 여기에 왔느냐"고 물었고, 나는 얼른 받아서 '그러는 형은 왜 학교에 가지 않고 여기에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야 이놈 봐라? 나는 학교 보내줄 사람이 없어서 왔지! 너도 그러냐?" 라고 물었다. 나는 "절에 오면 더 공부 잘해서 사명대사처럼 된다기에 왔다"고 했더니 그 행자는 "그렇게 되려면 일생 내내 해야 하는데 너는 일찌감치 집에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게다"라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나는 "그런 소리 마세요! 나는 꼭 해내고 말 거예요!"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행자실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스물한살 제일 큰 행자가 밥 짓는 '공양주'요, 열 여덟 살 먹은 행자가 국 끓이는 '갱두'요, 나머지는 모두 반찬 만드는 '채공'이요, 나이 작은 행자는 판 닦고 수저 놓는 '간상'이라고한다.
어느덧 행자 생활도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예불을 드리고 와서 보니 갱두하던 행자가 예불 드리는 시간에 예불은 안 드리고 소지품을 챙겨서 가고 없었다. '나는 이때다, 내 실력을 발휘할 때다' 라는 생각으로 내가 갱두를 하겠다고 했다. 큰 행자는 "야! 네가 어떻게 국을 끓여? 국이 너를 끓이지"라고 빈정댔다.
나는 며칠 동안 갱두가 하는 것은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무국을 끓일 때는 먼저 무를 엷게 삐져서 큰 양지기에 담고 다음에는 두부를 골패쪽처럼 두 모를 썰어서 간장과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국솥으로 가서 먼저 국솥을 행궈내고 빈 솥에 불을 지핀 다음 간장 한쪽자 반을 달궈진 솥바닥에 부어서 국자로 골고루 저어서 말리고 한참 달군 다음 얇게 삐진 무를 부어 또 골고루 뒤적이면 노랗게 간장물이 든다. 그때 참기름을 한 숟가락 넣고 고춧가루도 한 숟가락 넣어서 골고루 저은 다음 공양주가 받아놓은 쌀뜨물을 부어 국자로 몇 차례 저어서 그때 두부를 넣는다. 그런 다음 작은 그릇에다 국물을 조금 떠서 찬간으로 와서 짜고 싱거운지 맛을 보았다. 좀 싱거운 것 같아서 간장을 조금 더 넣고 본격적으로 불을 때기 시작했다. 한참만에 김이 동시루처럼 솟아나왔다. 국은 달여야 맛이 있으므로 한참 불을 더 때고 나서 부엌 앞을 쓸고 일어났다.
...국 맛을 본 모든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늘 국은 참 맛이 좋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나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갱두를 맡은 지도 벌써 한 달은 된 것 같다. 하루는 국솥에 불을 때는데 공양주도 같이 불을 땠다. 불을 때다가 공양주는 갑자기 설사가 났다면서 불을 같이 좀 때달라고 하기에 한참 불을 때다 보니 밥이 넘는다. 나는 밥 짓는 요령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찬김이 나오는데도 한참을 더 때고 있으니 그때 공양주가 들어와서 보고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다그쳐 말하기를 "야! 이놈아, 밥솥에 불도 하나 제대로 못 때는 놈이 어떻게 부처가 되겠어?" 라면서 고함 소리를 듣고 불을 꺼내고 있는 나의 엉덩이를 발로 차서 부엌 아궁이에 이마를 받아 피가 났다. ...그날 밥은 꼬두밥에 누룽지는 장판같이 눌어서 대중 대여섯 명의 밥이 모자랐다. 나는 얼마나 송구하던지 밥 먹을 생각마저 사라졌다. 후원 대중들은 모두 누룽지를 나눠 먹고 끼니를 때웠다.
그후 며칠이 지나 공양주 행자가 감기 몸살로 드러누웠다. 그래서 별좌 스님이 공양주를 한다고 했다. 밥을 다 지어서 밥을 푸다 말고 별좌 스님은 원주 스님이 부른다고 솥뚜껑을 덮어놓고 나갔다. 나는 전날 공양주 행자가 푸던 것을 여러 번 보아온 탓으로 솥뚜껑을 열고 보리쌀을 고루고루 섞어서 밥 양동이에다 퍼담고 있는데, 별좌 스님이 들어왔다.
...별좌스님이 밥주걱을 빼앗아서 번개처럼 나의 양쪽 뺨을 후려쳤다. 눈에 불이 번쩍번쩍했다. 별좌 스님이 때리고 나서 하는 말이, "야, 이놈아 그대로 두지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왜 건방지게 건드려? 큰방에 들여놓는 것은 보리쌀을 덜 섞어야 하는데 후원에 갈 것을 똑같이 섞어 놓았으니 어쩐단 말이냐? 시키지 않은 짓을 왜 해?" 라고 크게 나무랐다.
그 당시는 쌀이 귀해서 보리쌀과 좁쌀을 많이 섞어서 밥을 지어먹던 시대라 큰방 대중에는 쌀을 좀 더 섞었던 모양인데 내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나는 별좌 스님에게 잘못했다고 거듭 용서를 구했다. 그러면서 연방 볼에 붙은 밥을 떼어먹었다. 떼어먹다 보니 흥부 생각이 떠올랐다.
행자 생활 석 달 만에 나는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 고향집으로 갔다. 며칠 쉬었다가 절로 간다는 것이 보름이 다 되어갔다. 그해 8월 15일 해방이 됐다. ...나도 다른 사람을 따라 즐거워 날뛰다보니 절에 가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버지로부터 다시 명심보감을 통해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은 지나 늦가을이 왔다.
셋째 형도 이제 해방이 되었다며 농촌을 벗어나 도시에서 취직을 하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나도 며칠 뒤에 부산의 형 집으로 내려갔다. 형은 나에게 양복 만드는 일을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형은 다시 시계방에 취직을 시켜주었다. ... 그 다음 다시 책이나 실컷 보려고 책방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이제 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매일같이 극장으로, 용두산 공원으로 놀러만 다녔다. 그러자 형은 영도조선소에 취직을 시켜줬다. 하지만 나는 여기도 그만뒀다.
너무 빨리 생을 마감한 어머니
이러한 와중에 1946년 3월 20일 언양중학교에 입학했다. 일제강점기에 어렵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일본 글을 배우다가 우리글을 배우니 즐거움이 가득했다. 1학년 1학기 때 이미 2학년 책과 3학년 책까지 모두 외우다시피 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음력 8월 초 어머니 생신날 가족은 한자리에 모여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드리고 단란하게 식사를 마쳤다. 해 질 무렵에 어머니는 낮에 먹은 음식이 체했는지 속이 안 좋다고 하시며 자리에 누우셨다. 다음 날이 되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셨고 몸이 아프다고 계속 누워계셨다.
...양력 9월 14일(음력 8월 19일)에 어머니는 청천벽력처럼 인생의 종말을 고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하늘이 무너진 듯, 땅이 꺼진 듯 나는 앞도 뒤도 보이지 않고 주위도 사람도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머님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했다.
어머니 만나게 해주신다는 큰스님
아버지가 하루는 나를 불러 전에 듣지 못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얘야, 어머니가 그렇게도 보고 싶으냐?" 고 하셨다. 나는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좋다. 네 어머니를 만나게 해줄 터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그럼 내일은 의복과 필수품을 챙겨서 다시 범어사로 가자. 큰스님께서 틀림없이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실 것이다" 라고 하셨다.
"스님!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언제 만나게 해주시렵니까?" 큰스님은 웃으시면서 "아, 그거야 시킨대로 공부 잘하고 못함에 따라서결정되느니라."고 하셨다.
학교 문제는 아버지가 며칠 전 학교에 찾아가서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을 만나 "내 아들이 입산수도하게 되었으니 퇴학을 시키지 말고 기말고사 시험을 칠 때만 알려주시면 나와서 꼭 시험을 치를 터이니 선처해 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한다. ...나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일 년에 두 차례 시험 통지서를 받고 학기말 시험을 치고 무난히 졸업을 하게 된다.
동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그렇게 한달여가 흘렀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우리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신다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오늘은 꼭 가서 여쭤야지 하며 마음먹고 있다가 점심공양을 끝나고 바로 시자 스님을 통해서 큰스님을 친견했다. "큰스님! 우리 어머니는 언제 만나게 해주시렵니까?" "오! 그것 말이야? 그것은 네가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앞으로 계를 받고 관음기도를 지극히 모시면 만나게 된단다." "그럼 그때가 언제입니까?", "아! 그것은 네 노력에 달렸다. 하루라도 빨리 행자 과정을 끝내면 빨리 만날 것이요, 늦게 끝나면 늦게 만날 것이니라." 나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는 말씀만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보살계 때 사미계 수계를 한다는데 거기에도 엄격한 규정이 있다. 득도한 후 삼년 동안 행자생활을 한 자, 행자 이수과정을 마친 자, 부모가 출가를 허락한 자, 병이 없다고 건강진단을 받은 자, 신원 조회를 해서 범죄 사실이 없는 자 등이 수계 대상이 된다고 한다. 1948년 음력 3월 15일 하동산 스님의 상좌로 사미계를 받게 되니 법명은 慧元지혜.으뜸이다. 이제는 행자 생활도 졸업이고 서지전 강원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강원에 입방한 지 닷새가 지나고 나는 또 조실방을 찾아갔다. 어머니 만나는 문제로 다시 참방한 것이다. "오! 마침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고 하던 차인데, 너 오늘부터 관음전에 가서 하루 4분정근으로 21일간 3.7기도를 하여라! 그러면 관세음보살님께서 틀림없이 네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실 것이다. 일체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관세음보살만 생각해야 하느니라."
......삼주째 접어들어 더욱 열심히 하다가 마지막 삼일은 밤잠과 휴식도 없애고 용맹기도를 했다. 회향 하루전인 한밤중에 목청을 높여 큰소리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데 비몽사몽 간에 우리 어머니가 나타나서 내 앞으로 다가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기쁘던지 치던 목탁도 던져버리고 뛰어가서 "어머니!" 하고 껴안는 순간 어머니는 사라지고 내가 관세음보살을 껴안고 있었다. 깜짝 놀라 이것이 웬일이냐?', '어머니는 어디 가고 관세음보살이라니....'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좌악 쏟아졌다. ...어느덧 도량석 목탁이 울리고 새벽예불 시간이 되었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어 더욱 큰소리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6시에 정근이 끝나고 아침 흰죽 공양을 했다. 사시에 기도 회향이라고 원주 스님이 과일도 올리고 떡도 올렸다.
점심공양이 끝나고 나는 조실 스님의 방을 찾아갔다. 삼배를 올리고 꿇어앉아 말씀드리려는 순간 먼저 조실 스님께서 말을 꺼내셨다. "왜! 어머니를 만나서도 대화를 하지 못했느냐?" , "스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 "너의 정성이 부실하면 만나기는 했어도 대화를 못하느니라. 앞으로 여가가 있거든 100일 기도를 해보아라. 3.7일 기도에 만나기만 했어도 다행이 아니냐?"
나는 조실스님에게 따지려고 잔뜩 벼르고 갔는데 미리 다 아시고 계시니 할 말이 없었다. 강원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큰스님께서 아직 내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더 노력하라고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력 4월 14일 하안거 결제방을 짜는 날이었다. 저녁예불이 끝나고 청풍당 큰방에서 사내 대중이 다 모여 결제방을 짜는데 공양주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했다. 현재 행자가 공양주를 하고 있지만 아직 서툴러서 여름 결제에 대중만 해도 80여명인데 사내 스님 중에서 누가 한사람 나가서 한철 공양주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보다 못한 내가 일어나서 절을 한 번 하고 "미숙하지만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조실 스님부터 온 대중이 칭찬해 마지 않았다.
첫째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길이요, 둘째는 대중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요, 셋째는 나의 심신을 단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대중 스님네로부터 공양 잘 짓는다고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부지깽이 장단에 염불을 익힌 탓인지 여러 스님으로부터 목탁을 잘 친다는 말을 항상 들었다. 나는 수시로 틈만 나면 조실스님이 은사스님이라서 그런지 두려운 생각도 없이 자주 찾아가서 묻고 뱅고 그러면서 화두도 받았다. 시삼마是(바를시) 삼(甚심할심)麽(잘마) 화두다. 시삼마는 '마음이 아니라 이 몸을 끌고 다니는 물건(주인공)이 도대체 무슨 물건인고' 하는 것이다. 나는 아침, 저녁예불 끝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낮에 일할 때는 "이 뭣고?" 하다가 저녁예불이 끝나고 정진 시간이 되면 금어선원에 들어가서 취침 시간까지 2시간씩 "이 뭣고?" 화두를 들고 참선했다. 나이 어린 사미가 공양주 소임을 해가면서 참선한다고 대중 스님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일왕월래日往月來라더니 말이다.
3장
해불암 시절(1948~1951년)
고통과 장애가 나의 스승이다
기장 해불암에 걸망을 풀다
어느 날 관음재일이었다. 신도님이 많이 왔다. 불공시식이 끝나고 오공午供을 했다. 오공을 마치고 대웅전 부전 스님과 이야기하던 끝에 노전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들었다. 비구스님으로 착실한 분인데 이제 여기를 떠난다고 했다. 법명은 성윤 스님이라고 하는데 은사 스님께서 부산 기장에 있는 해불암海佛庵에 계셨는데 열반하셨기 때문에 이제 가서 인수인계를 받아 살게 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 나도 그런 곳에서 한 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을 눈치채고 부전 스님은 즉시 소개해 주셨다. 성윤 스님은 내가 인사를 드리자 쾌히 승낙하고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때가 1948년 양력 9월 26일(음력 8월 24일)이었다.
나는 조실 스님에게 말씀드리면 절대 허락하시지 않을 터이니 말없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소지품을 챙겨서 성윤 스님을 따라 나섰다. 오후 늦게서야 해불암에 도착해서 행장을 풀었다. 한 철만 지나고 다시 범어사로 간다는 생각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이 일이 영영 5~6년이 걸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 절에 대중은 주지 스님, 화주 보살, 주지 스님의 부친, 그리고 나와 고시생 2명 등 6명이 전부였다. 이 절에는 농사도 짓고 소도 기르는데 논농사가 절 주변에 열 마지기 되고 밭농사가 네다섯 마지기나 되었다. 모두 절에서 자작한다고 했다. 주지 스님의 부친도 소먹이고 농사짓기 위해서 와 계시는 모양이다. 나도 처음에는 농사일이 서툴렀지만 점점 배우면서 익숙해졌다.
마을은 먼저 절 가까이 있는 연화리와 대내리, 당사리, 대변리, 기장읍 등인데 가을철에는 보통 한 마을에 백미 두세 가마씩이었고 봄철에는 보리쌀 한두 가마씩이었다. 많을 때는 소에다 실어오고 적을 때는 내가 지게에다 조금씩 여러 차례 져다 날랐다.
추어탕 끓이려고 잡아온 미꾸라지를 살려주다
이제 추수도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하루는 중학교 학기말 시험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주지 스님께 허락을 얻어서 고향으로 시험도 치를 겸 발걸음을 옮겼다. 기장에서 버스를 타고 동래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언양에 도착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향을 다 그리워한다더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옮기는 발걸음이 무척 가볍고 기쁜 마음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학우들을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다. 나는 한걸음 앞서 교무실로 가서 여러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시험 치는 교실로 갔다. 이렇게 시험이 시작돼 1시간 40분 만에 모든 시험이 끝났다. 시험이 끝나니 오전 11시 40분이었다. 모두 점심을 먹고 다시 교실에 모여 공지사항과 상급생으로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듣고 하교했다.
이튿날 세수를 하려고 물을 찾던 중 부엌으로 가서 여기저기 옹기그릇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때 한 옹기에서 미꾸라지가 잔뜩 담겨 있었다. 나는 세수도 미루고 양동이에 미꾸라지를 옮겨 담아서 앞 강으로 뛰어갔다. 강물에 미꾸라지를 전부 살려보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그만 시끄럽다. 범인이 여기 있다"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도본 사람도 없고 또 말씀드린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과연 부모 자식 간에는 일거일동을 직접 보고 듣지 않아도 느낌으로 다 아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우리집에서는 추어탕을 끓여먹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1949년 3월 울산 고교에 입학하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고 가족과 친척, 친구들과 고향산천을 하직하고 다시 부처님 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에 해불암에 도착한 나는 여기가 내 고향이고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처님과 스님을 대할 때 환희의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인 1949년 봄을 맞이했다. 2월 25일, 졸업식 통지서를 받고 나는 삼일 전인 233일 다시 고향으로 갔다. 졸업식을 하자 없이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결같이 친구들이 울산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동의했지만 출가 수도자가 가능할 지가 의심스러웠다.
절에 있는데 20여 일 만에 고향집에서 고등학교 입학과 관련하여 즉시 집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주지 스님께 말씀드리고 그날로 출발해서 고향집에 도착한 뒤, 입학에 대한 모든 수속 절차를 밟고 1949년 3월 23일에 울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약 1개월간 다니다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저는 다시 절로 가겠으니 중하교 다닐 때와 같이 시험을 칠 때만 나오게 해주세요."아버지는 내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말씀드리자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용화사 법당에 가서 석불님께 수없이 절을 하고 마음속으로 축원했다. '부처님이시여, 제발 오늘 학교에 가거든 선생님께서 제가 요청하는 대로 쾌히 승낙하셔서 제가 수도 생활을 잘하도록 도와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축원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학교에 갔다. 교무실에 가서 교장 선생님과 담임선생님께 상세한 말씀을 드리고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
사흘 만에 죽었다 살아난 사연
해불암에서는 약간의 양귀비를 요사 뒤 화단에 심었다. 봄에 일찍 심어 여름에 수확하는데 꽃이 지고 나면 뿌리만 베어버리고 줄기 잎 전체를 솥에다 하루종일 삶은 다음 줄기와 잎은 건져내고 이 물을 채에 바쳐서 다시 불을 때기 시작해서 완전히 졸아 들어서 고약처럼 되면 이것을 도토리 크기만큼 기름종이에 싸서 10여 개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가정 상비약이다. 누구든지 구토, 설사, 이정, 두통, 치통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녹두알 정도를 물에 개어서 먹으면 특효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예불을 드리고 기도 정근을 모시는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정근이 끝나고 바로 내려와서 나는 화주보살이 주고 간 그 약을 눈 딱 감고 그릇째로 들고 마시는데 뻑뻑해서 잘 넘어가지 않기에 물을 부어 저어가면서 깨끗이 다 마셔버렸다. 공양솥에 불을 때는데 앉아서 부억문 쪽을 보니 부엌문이 옆으로 슬슬 넘어가고 밖에 하늘이 황금색이요, 내 몸도 비실비실 자꾸만 옆으로 스러져갔다. 나는 약을 먹어서 그런지 모르고 '아! 이제 죽으려고 그러나보다' 하고 겨우 밥을 지어 솥거죽을 씻고 부엌 앞을 깨끗이 쓸어놓고 죽어도 부처님 곁에 가서 죽어야 불국토에 간다는 생각으로 법당 옆문으로 들어가서 신중단 탁자 밑에 들어가서 눕고 말았다.
그날 이후 사흘이 지나서야 아침에 비몽사몽 간에 화주보살님이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얘야! 이렇게 누워 있어서야 되겠느냐? 자! 이것 마시고 일어나거라!" 하고 하시기에 내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참기름이라고 하셨다. 그걸 공손히 받아 마시니 참기름이 아니고 꿀물이었다. 나는 꿀물이 너무나 맛있어서 보살님께 조금 더 달라고 하자 보살님은 그것만 먹어도충분하다면서 손을 내밀며 일어나라고 했다. 내가 보살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순간, 깜짝 놀라 깨니 꿈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문을 조금 열어보니 주지 스님과 화주보살님과 할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아침공양을 하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그 아이가 삼일 전에 아침밥만 지어놓고 저희 집으로 가버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문을 확 열고 나가서 할아버지를 향해, "내가 언제 우리집에 갔습니까. 밥 짓는 중에 너무 어지러워서 법당에 들어가서 탁자 밑에 누웠다가 잠이 든 모양인데요"라고 했더니 주지 스님이 내말을 제지시키면서 전후사를 설명하라고 하셨다.
고추 농사를 망치다
하루는 아침공양을 끝나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할아버지께서 산에 나무하러 가자고하셨다. 그래서 나는 지게를 지고 할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갔다. 소나무 가지를 잘라서 다발을 묶어 한 짐씩 지고 절로 오는데 할아버지는 앞에서 잘 가시는데 나는 얼마나 무거운지 걸음이 잘 옮겨지지 않아 비틀거리다가 내리막길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나무를 짊어진 채로 세 밭퀴를 굴러 나무 밑에 깔려 일어나지도 못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울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앞에 가시다가 나무를 받쳐놓고 와서 나무를 밀어 나를 일으키면서 '나무도 하나 못 지는 것이 어찌 부처가 되려나"라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힘에 부치게 너무 많이 지었으니 안 넘어지고 어떻게 버티나? 건대쌀 거둬 놓은 것은 힘에 알맞게 지고서 10리, 15리 먼 거리도 잘만 지고왔는데'라고 했다.
겨우공양을 지어 마지를 올리고 점심공양 준비를 해놓고 방에 들어가 누웠더니 모두들 많이 다쳤느냐고 병문안을 왔다. 허리가 몹시 아프다고 했더니 생지황을 찧어서 즙을 내서 한 그릇 가져다주었다. 그것을 마시고 누웠더니 어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났다. '어머니, 어머니! 나를 두고 어디로 가셨나요? 아! 관세음보살님도 너무 야속하십니다. 아침저녁으로 그렇게도 애원했건만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그 후 열흘이 지난 다음 할아버지께서 고추밭에 가서 비료를 주라고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비료를 주느냐고 물었더니 "고추포기 옆에 호미로 파고 비료를 조금씩 넣고 흙으로 덮어주면 된다"고 하셨다.
점심공양을 허러오신 할어버니는 고추밭 거름을 다 주었으면 오후에는 다시 산에 나무하러 가자고 했다. 조심스럽게 나뭇짐을 가볍게 묶어서 지고 오니 무난히 절에 오게 되었다.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나뭇짐을 쌓아놓고 오전에 비료를 준 고추밭에 가보니 오롱조롱 제법 달려 있었던 고추가 전부 시들어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이놈아! 비료를 한뼘 띄워서 줘야지 바싹 가까이 뿌리에다 주었으니 그대로 타서 죽지 않느냐? 너를 시킨 내가 잘못이지." 할아버지는 크게 상심하셨다. 나도 마음이 아프고 무안하고 두렵고 송구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죽고 싶었다. 절에 가서는 주지 스님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할어버지는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해의 고추 농사는 폐농이 되었고 가을철에 구입하는 데 막대한 돈을 허비하게 되었다.
일체 노동 빠짐없이 연마 습득- 호박 농사법
2022/2/2 20:20, 終 오늘 일요일 싸락눈을 오전.오후에 치웠고, 김제식씨가 은근히 자기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걸 보아 거림칙하다. 저녁 해장국 먹으로 가면서 뒷담화를 했다. 모텔이 김반장꺼라는 걸ㅋ 음식물통을 4-2의 누수물을 담다. 내일은 조회가 있는 월요일. 센터장이 '대충대충 해요'라고 김반장에게 했다는 말을 반추하는 일요일.
2022/1/3 오늘은 조회일
호박을 한 구덩이 심어서 250덩이를 따서 먹는 방법. 호박 구덩이의 깊이를 30센티 자로 두자 깊이와 둘레 일곱 자, 직경 두 자를 파서 돌은 전부 주워내고 부드러운 흙만 주변에 있는 것을 전부 끌어 모아 둘레에다쌓아놓고 깊이 파낸다. 파낸 바닥에다 소 밟힌 거름이나돼지 밟힌 거름, 혹은 풀을 베어 말려서 겹겹이 소변을 뿌려 쌓아올려 뜨게 한 다음 그 퇴비 거름을 한 짐 정도 넣고 인분을 두 바가지 정도 붓는다. 또 부엌재를 반 양동이 정도 가져다가 구덩이에 모아놓은 흙과 골고루섞어서 구덩이를 메운다. 이 메운 흙이 지면보다 약 20센티 정도 높게 하여 위를 평평하게 고루어서 가운데가 약간 낮게 해서 거름물이 밖으로흐르지 않게 한다. 그런 다음, 대한민력 절후에 청명 되는 날에 가까운 벼논에 가서 벼 뿌리를 수십개 호미로 케어와서 그 벼 뿌리 하나에다호박씨를 하나씩 넣어서 넓은 대야에 뿌리가 아래로 가도록 가지런히 세워놓고 모래로 벼 뿌리가 약간 보일 정도로 덮는다. 그 다음 조로에 물을 담아 고루고루 뿌려서 따스한 방으로 옮겨 놓으면 일주일 만에 호박이 지면에 약간 올라오게 된다. 이럴 때 들고 나가서 미리 만들어놓은 호박 구덩이에다 한뼘 정도 간격을 떼어서 윗부분에 둘레로 심는다. 한 구덩이에 뎌덟 포기씩 심어 자라는 과정을 보아서 충실치 못한 것 세 포기는 뽑아버리고 다섯 포기만 기르는데 호박씨에서나온 두 딮 말고 4단계 잎이 나오도록 자랐을 때 원순 끝을 잘라준다. 그리하면 4단계 마이마다 순이 나와 5~6개 내지 7~8 가닥으로 뻗어나간다. 여기에서 다섯 가닥씩만 두고 나머지는 제거해서 한 구덩이에 스물다섯 가닥씩 뻗어나가게끔 키운다. 이렇게 하면 두 자 길이 정도만 자라면 호박이 열린다. 호박 맺은 꽃이 활짝 피었을 때 그 다음 맺은 것을 하나만 제거해주면 꽃핀 호박이 빠지지 않고 그대로 잘 자란다. 이와 같이 하면 한꺼번에 호박이 스물다섯 개씩 자라난다. 두 주먹 합친 것 정도로 연하게 자랐을 때 모두 다 따줘야 그 다음 맺은 것이 또 자라나게 된다. 두 번째 자란 것까지 따먹고 씨로 남길 것을 세 번째 여는 것 중 제일 충실한 것을 두 개만 새끼줄로또아리를 만들어 받쳐줘야 상하지 않고 잘 자란다. 이 씨통을 놓아둔 그 줄에는 다시는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이 호박넝쿨을 잘 관찰해보면 거름기운이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한번 따먹은 다음에는 호박 구덩이 가운데를 호미로약간 지피를 벗기고소변을 모아 두었다가한 바가지 정도 호박 뿌리에 묻지않게 부어줘야 한다. 이렇게 해서 가을까지 십여 차례 넘도록 따먹기 때문에 고정적으로 250덩이 내지 270덩이까지 따먹게 되는 셈이다.(참 대단하시다...고 감탄한다. 호박을 한번 이렇게 키워볼까? 그런 생각도 한다ㅋ)
22/2/5, 소한. 금일 07:00경 경기최씨 결산보고 하다.(-35000 결손처리) 일체 노동 빠짐없이 연마 습득- 나물 볶는 법(이 내용도 집자하고 픈데 시간이 없다. 오늘 오전부로 집자 완료하고 오후엔 쩡이.이서방 원서접수 수고해줬으므로 커피 한잔예정)
동네 해녀들과 놀다 혼쭐
열뎌덟 살 되던 해 여름, 하루는 일기 청명하여 구경 삼아 바닷가로 내려갔다. 바다에는 해녀들이 잠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간 소쿠리에 파래, 톳, 까사리 등을 뜯고 있었는데 해녀아가씨들이 망태기에 무엇을 많이 잡아서 끌고 나오면서 "스님, 무얼 하세요?" 한다. 나는 깜짝 놀라서 나물 좀 뜯는다고 답했더니 해녀 아가씨들은 망태기 속에서 미역과 소라 등을 꺼내주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소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할아버지께 여쭈었더니 할아버지가 모두 삶아 드셨다.
다음날 점심공양이 끝나고 어제 그 아가씨들 다섯 명이 법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나온 뒤 법화경을 읽는 내곁으로 몰려왔다. 때마침 주지 스님은 출타하고 할아버지는 밭에 나가시고 고시 공부하는 학생 세 명과 나 혼자 있었다. ...두 살 위인 두 아가씨가 나더러 동생하자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러자고 했다. 나보다 어린 아가씨들은 대뜸 그럼 자기네들은 오빠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역시 그러라고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주일간 매일 찾아와서 손수건도 사다주고 과자와 사탕도 사다주면서 놀다가 가곤 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밭을 매다가 들어오셔서 그 아가씨들과 노는 것을 보고 크게 꾸짖으면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밭일도거들지 않고 마을 가시네들만 꾀어서 연애질만 하고 있나? 잘 놀아난다!"라고 야단을 치셨다.
주지 스님에게 "저 애가 못된 짓만 찾아가면서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두지 말고 내보내자"고 했다. 나는 창피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이해해줄 어머니도 없는데 더 살면 무엇 하나 싶어 바다에 빠져 죽고 싶은 마음에 바닷가로 뛰어내려 갔다. 높은 바위에 올라가 막 떨어지려는 찰나에 고시 공부하러 온 한 학생이 언제 따라왔는지 뒤에서나를 끌어당겼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절에 있는 학생이다. "스님에게 꾸지람 한번 당했다고 바다로 내려가는 태도가 수상쩍어서 뒤따라왔어요." 학생은 이어서 "아무리 화가 나도 죽는다는 경솔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해요. 어른들에게 많은 꾸지람을 받아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니자 절에 큰 재가 들어왔다. 49재를 치르는데 초재부터 15리나 떨어진 먼 기장장을 보아다 지내야 했다. 언제나 나는 지게를 지고 화주보살님과 같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 와서 보살님과 음식을 만들었다. 내 손으로 부처님께 차려 올려서 내가 천수경을 읽고 나면 주지 스님이 올라오셔서 불공시식을 하셨다. 이같이 재가 하나 들어오면 여간 고달픈 게 아니다.
49재 막재 때는 법사 스님을 모셔서 법문을 듣는데 주로 최일해 스님을 모셔다가 법문도 하고 법주로서 어산도 하신다. 당시 영남에서는 어산제일에 최일해 스님과 박보륜 스님이 유명했다. 나는 이때 최일해 스님에게 경상도 어산과 예식 부처님 복장식 하는 것을 배우고 북, 광쇠, 징 치는 방법도 배웠다.
빵 한 조각도 부처님께 먼저 올려라
해녀 아가씨들은 이후에도 바다에 잠수하러 나왔다가 어김없이 절에 들러 나를 만나고 갔다. 나는 이것이 못마땅해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대문을 잠가놓고 공부를 하다가 누가 대문을 두드리면 사람을 확인하고 열어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가씨들이 와서 대문을 열어달라고 두들겼다. 나는 목소리를 들어 이미 알고 절대로 열어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 아가씨들은 우물 있는 쪽 산으로 올라가서담장 너머로 내 이름을 부르다가 "오빠! 동생!" 하면서 떠들어 댔다. 나는 참고 견디다 못해 뛰쳐나가 물을 마구 덮어씌우면서 "요 못된 가시나들 같으니라구! 한번 오지 말라면 말 것이지 왜 매일 와서 성가시게 구노"하고 연거푸 물을 떠서 퍼부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다음 이들의 자취도 끊어졌다.
이어서 6.25동란이 일어나 사회는 어수선했다.
저녁공양 시간에 주지 스님이 낮에 먹다 남은 김을 찾으셨다. 나는 청천벽력 얼굴에 불을 담아 부은 듯 화끈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송구해서 떨리는 마음을 겨우 안정시켜 대답하기를, "제가 설거지하면서 다 먹어버렸습니다"라고 실토했다. 주시 스님은 엄숙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 가정교육을 받았다는 아이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잘 챙겨 두었다가 어른 드릴 생각은 아니하고 저 혼자 먹어치우느냐. 앞으로 한번 더 그런 일이 있으면 두 가지 판단이 있을 줄 알아라." 나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주지 스님은 정색하면서 "네가 가든지 내가 가든지 결판을 낸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똥물을 뒤집어 쓰다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할 정도인데 할아버지가 긴 작대기로 휘휘 저어놓으니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게 나던지 아침 먹은 것이 도로 나오는 듯 했다. 똥장군에다 가득 퍼 담아서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지고밭으로 가셨다.
할아버지처럼 휘휘 저어서 똥물을 퍼붓는데 가득 담으면 무거울테니 반쯤 넘게 지고 가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일어서는데 이리 출렁 저리 출렁 전후좌우로 마구 출렁이는 바람에 나는 아무리 이를 악물고 힘을 써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똥통을 진 채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 똥장군이의 밑이 빠져 넘어 진 채로 온몸에 똥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에끼 고얀 놈 같으니라고! 일이 하기 싫다고 반만 퍼 담았으니까 넘어지지" 라고 할아버지가 고함을 쳤다. ...절로 들어가서 삽과 빗자루를 가지고 나와서 엎질러진 똥물을 말끔히 청소하고 또 물을 길러다가 깨끗이 씻어놓은 뒤, 욕실로 들어가서 몸을 씻고 또 씻었다. 그때야 비로소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많이 묻었을 때는 전혀 모르겠더니 몸 부분에 조금 묻은 것이나 다소 씻은 몸에서 더욱 냄새가 나는 것은 나와 분리되기 때문인 것 같다.
똥 속에 있는 구더기가 똥 속을 천당으로여기는 것이 당연지사다. 이런 점을 미뤄볼 때 모든 중생이 오욕락을 천당락으로여기고헤어날 줄 모르는 것을 불보살님께서 연민히 생각하시고 구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항상 구박만 하는 할아버지
추수가 시작되어 얼마나 바쁘던지 눈코 뜰 새 없었다. 아침, 저녁 예불과 사시마지, 공양주와 도량 청소, 재불공의 시장짐은 다 나에게 부여된 책임이다. 이 절에 온 지 5~6년 동안 단 하루도 낮에 방에 앉아 조용히 공부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밤 11시까지 공부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이 철칙이었다. 속담에 '입 안에 든 혀는 물릴 때가 있어도 중의 상좌는 물릴 때가 없다'는 말과 같이 매일매일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할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못마땅해 여기셨다(ㅎㅎ 젊었을때 자길 닮았다고느껴서겠지ㅜㅜ 이를 내 일로 느껴보니 오랜 군대시절이 생각난다. 귀여움 받는 쫄병이 있고 눈밖에 나보이는 쫄병이 있기 마련이지).
도끼자루가 부서져도 내가 그랬다, 낫의 이가 빠져도 내가 그랬다, 학생들이 그릇을 하나깨뜨려도 내가 그랬다, 대문 자물통이 고장 나도 내가 망가트렸다고갖은 욕을 다 퍼부었다. 심지어 나를 보며 "저놈은 절을 망해 먹을 놈"이라는 욕설까지 거침없이 했다. ...그럴때면 바다로 가기도 하고, 때로는 옷걸망을 챙겨서 다른 절로 도망을 치기도했다. 그러나 과거에 이 절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무슨 빚을 졌기에 열 번도 넘게 도망을 갖지만 매번 도로 붙들려 돌아오곤 했다.
관세음보살님 덕에 강제모병 면해
사중에서 고시 공부하는 학생은 매일 저녁 한 시간씩 내게 공부를 가르쳐줬다. 고마움에 답례로 나는 반찬과 밥도 잘 지어주고 내 몫의 과일도 자주 가져다주었다. 새봄을 맞아 선생님들의 너그러우신 배려로 고등학교는 무난히 졸업했다. 학교 졸업을 하고 나니 그때가 6.25 동란 때라 17~8세가 넘는 청년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강제모병으로 붙잡혀갔다.
이유여하를 묻지 않고 두 손목에다 수갑을 채워 지서로 가자고 했다. 송정지서에서나온 형사들인 모양이다. 뒷산길로 한참 따라가다가나는 꾀를 냈다. "여보세요 아저씨! 나 어제부터 배탈이 나서 계속 설사를 하는데 더 이상 갈 수가 없네요. 여기 길 옆에서 잠깐만 용변을 보고 가도록 해주세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자 나이 많은 형사는 허락을 했교ㅗ 나느 수갑을 채운 손을 내밀었다. "수갑을 풀어주던지 내 옷을 벽겨주던지 해주세요." 형사는 한쪽 손만 수갑을 풀어줬다. 나는 열 걸음 떨어진 소나무뒤에 가서 용변을 보는 척하고 앉아서 보문품을 지송하기 시작했다. "혹수금가쇄 하야 수족피추계라도 염피관음력으로 석연득해탈하며..." 하는데 갑자기 왼손에 채워진 수갑이 저절로 철거덕하면서 풀어져 땅에 떨어졌다. 나는 의아해서 깜짝 놀랐다.
아! 이것은 틀림없이 관세음보살님의 도우심이다.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지' 했다. 나는 떨어진 수갑을 주워서 형사들이 앉은 데로 던짐과 동시에 산토끼처럼 뛰고 반은기면서 도망을 쳤다.
그 뒤 몇 차례나 형사들이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허탕을 쳤다. 공양주 할 일만 끝나면 바닷가 바위굴 안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니 형사들의 눈에 띨 리 만무했다. 내 사정으로 인해 사중 일에 등한시하다 보니 틈틈이 주지 스님의 부인되는 이가 자주 절에 와서 재가 있을 때마다 도와주곤 했다. 당시는 일제 통치의 여습이 남아서 승려의 결혼이 허용됐다.
"저놈이 요즘 자네 부인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주고받고 놀아나는데 참으로가관이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저 아이를 내쫒아라.' 이 말을 들은 주지 스님은 나를 불러서 호되게 꾸지람을 했다. 그런 뒤 어린 마음에 하도 억울한 생각이 들어 죽을 결심을 하고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이번에는 주지 스님의 어머니가 내 뒤를 따라와서 바닷가 절벽에 서 있는 나를 잡아 주었다. "할머니, 저는 억울해서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너만 청백하면 그만이지 죽기는 왜 죽어? 참고 견디어 부지런히 배워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할머니의 애정 어린 말씀에 수긍하고 할머니와 같이 다시 절에 올라왔다.
어느 날 재가 있어 그 부인이 시장을 봐서 이고 왔다. 나는 즉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내 공부만 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난 뒤에 손님이 오시고 법당에 염불하려고 들어오신 주지 스님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탁자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책만 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주지 스님은 무엇했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 절 살림살이는 전체 내가 도맡아서 살아온 터라, 모든 기구나 물건, 그릇 하나하나 내가 찾아주지 않으면 차려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지 스님이 나를 불러 벼락 치듯 고함을 치며 나의 뺨을 내리쳤다. "너는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혼자 맡겨 놓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같이 이야기하면서 일을 하면 서로 좋아한다 하고, 같이 일하지 않으면 후려치니 나더러 어찌하란 말인가.' 할 수 없이 다시 부엌으로 나가서 재물을 차려 올렸다. 나는 한 부엌에서 같이 일을 하면서도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묵언을 했다. 아무런 내용도 모르는 그 보살은 계속 나에게 다그쳤다. "왜 그래? 내가 무슨 잘못한 게 있어? 왜 그래?" 나는 시종일관 묻는 말에 대답 없이 내 할 일만 했다. 그 부인도 재불공만 끝나면 치워놓고 돌아갔다.
일본인 사기꾼에 속다
하루는 주지 스님과 할아버지도 다 출타하고 없었는데 어떤 신사 세 명이 절에 왔다. 자기네들은 일본서 무역을 하는 사람인데 삼일간 쉬었다가 일본에서 오는 물건을 찾아서 가려는데 숙식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가방에서 우데나 구리무를 한 통 꺼내주면서 물건이 도착하면 두둑하게 사례할 터이니 잘 좀 부탁한다고했다.
...때마다 진수성찬으로 대접했다. 삼 일째 되던 날 아침식사를 하고 나를 부르더니 오늘 일본에서 물건이 오는 날이니 우리가 모두 가서 물건을 찾아올 테니 그리 알라고 했다. 나는 그대로 믿고 가방을 다 들고 가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그길로 도망을 가버렸다.
다음날 주지 스님과 할아버지와 화주보살까지 오셨다. 내말을 듣고 난 스님은 '낯선 사람을 어디 믿고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에 질세라 할아버지도 '어리석은 놈! 못된 짓은 찾아가면서 다 하다가 이제는 절 망해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만" 하시며 크게 야단을 치졌다. 나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바닷가 절벽에 서서 큰한숨을 내쉬고 투신하려 했다.
그때 어떤 30대의 수좌가 말쑥하고 잘생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위험한 짓을 하는 것 같아 구제하려고 왔다고 했다. 그때 수좌 스님은 "조금만 더 고생하면 앞으로 큰 광영을 볼 것이니 참고 견디면 자연히 큰절로 가게 되어 선지식의 지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스님과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도중 갑자기 앞서 가던 스님이 전후좌우 아무리 살펴봐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위틈으로산으로찾다찾다 못 찾고 나 혼자 절로 왔다.
다시 범어사로(1592~1598)
취모검吹불취毛劍을 뽑아들다
[범어사 강원 개강기념
원 안이 혜원스님
해불암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해선지
뼈와 거죽만 붙어있다]
1952년 9월 주지 스님의 주선으로 다시 범어사로 가서 동산스님의 지도하에 금어선원에서 참선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은사인 동산조실스님에게 오후 휴식 시간을 틈타서 매일같이 선요를 배워가면서 참선을 했다. 당시나는 삼동결ㅈ제 동안에 하루 12시간씩 가행정진을 했다. 그런데도 암자에서 조석예불과 공양주와 농사일과 15리 시장 짐을 지고 다니는 것도다 훨씬 수월해서 마치 시골 농부가 장관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암자에서 종일 고달프게 일해도 보리밥과 보리 누룽지 찌꺼기만 먹다가 이제 그러한 힘겨운 일도 없고 가만히 앉았다가 바릿대만 펴면 쌀밥에다 산해진미가 삼시로 올라오니 부처님의 무량복에 새삼스레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었다.
천강유수 불휴식 하야
래집창해 성일미 로다
청정해수 부증감 하야
불유사시급오물 이로다.
일천강물이 쉼 없이 흐르고 흘러
한 바다로 들어가 한 맛을 이루고
청정한 바닷물을 넘치거나 줄어듦이 없이
더러운 시체와 더러운 오물을 머물러 두지 않네
나는 나름대로 이 시를 조실 스님에게 설명해드렸다. 그러자 조실스님은 '그래 네 말도 그럴듯하니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깨달은 다음 남을 제도하도록 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일이 있은 다음 조실 스님께서는 더욱 나를 격려해 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이 역력했다.
22/01/08, 토욜 20:30 집자始作, 오늘에서야 비로소 간신히 청우년말결산보고를 카톡에 상재했다. 년말결산을 준비하는 마음자세가 21년12월 보름쯤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마음을 定정하고, 가닥을 잡은 후에는 첫째는 회비부터 시작했었지. 그런데 기록하다보니까 누구 누구의 계산의 처음을 몰라서 멘붕의 얹어리에 빠졌다. 그리고 이전의 통장들..., 다 필요없다고 생각되어서 없애버리고 회비통장3질과 여행통장1질만 보유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됐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서 박ㅊ빈이가 정산한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거기서 부터 다시 시작했다.
여행경비 역시 최초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지만 결국 2018년으로 가야 했고, 그것으로부터 기초를 잡았다.
오늘 오ㅇ수반장에게 저녁을 산다고 하고 같이 회비정산. 여행비정산을 하고, 그것을 usb에 넣고, 컴의
네이버에 들어가서 내게 메일을 보내고, 그것을 다시 다운로드하여 저장했다. 그것을 카톡에 상재한 것은 17:00가 조금 지나서였다.
" 왼쪽 회비통장
우측 여행통장임
'결산보고'가 쉬운 능력자도 계시겠지만 나는 열흘여 개고생을 했다ㅜ
누가 불시에 찾아오는 총무의 이 무간고통을 알아줄 것인가!
차기 총무에게 일임해드리고 이후 자연인으로 해방만셰아~~~"
회비를 제 때에, 최소한 당해년도 12월 31일 안에 내는 것이 가장 총무를 도와 주는 것. 이 건으로 인하여 근 일주일을 전기기능사 시험접수를 해놓고도 한자도 들여다보지 못하였고, 하물며 이 책도 손에 못 잡았고, 지금에사 고산 큰스님의 그 페이지를 찾는다. 범어서 강원 개강기념 때의 사진이 흑백으로 고적하다.
별좌 소임 맡아 장 담그기
부산 초량에 사시는 김만덕화 할머니는 직접 짜신 스웨터와 실장갑과 나일론 바지저고리며 나일론 비누 상자 등 제품을 많이 사다 주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격려해주셨다. ..동반들은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나는 부러워하는 이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K양의 연애편지
하루는 원주스님이 불러서 갔더니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전에 암자에 있을 때 자주 놀러와 성가시게 굴던 나보다 한살 어린 K양의 편지였다. "보고 싶은 오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요? 나는 항상 오빠 생각만 하고 살아요. 오빠! 나도 머리 깍고 오빠 곁에 가서 살고 싶어요!" 도반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혜원 수자에게 연애편지가 왔다고 얼마나 비웃고 놀리던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참을 수가 없어서 해불암에 다녀올 것을 허락받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암자로향했다.
나는 바닷가로 데리고 나가서 이유를 막론하고 번개처럼 뺨 두 대를 후려쳤다. "왜 때려? 뭣 때문에 사람을 치는거야? 말로 해! 말로!" "너의 잘못을 몰라서 대드는 거야? 첫째 수도하는 스님에게 연애편지를 보낸 것이요. 둘째 내가 언제 너를 좋아했다고 네 마음대로나를 좋아한다고 하고 내 곁에 와서 있겠다는 것인지, 셋째 네가 어찌 내 동생이냐?" 그러자 그 아이는 "상대방이 좋아하든 말든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것이 무슨 죄며, 그냥 안부 편지 한 것인데 무슨 연애편지며, 전에 '오빠'라고부른다고했을 때 하라고 했잖아!" 라며 적반하장으로 대들었다.
나는 정색하고 엄격하게 경고를 했다. '내가 지금 옳고 그른 시시비비르 ㄹ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니 앞으로절대로 편지 같은 것 보내지 말 것이며, 혹시 만나더라도 아는체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너의 손목을 한번 잡은 것도 아니고 너를 좋아한다고말한 적도 없으니 나의 수도 생활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두번 다시 나에게 편지를 한다거나 오빠라고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라! 알겠어?"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와 해불암으로 가서 점심공양을 하고 다시 범어사로 왔다. 맘이 편치 않아서 관음전으로가서 108참회를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후 약 열흘이 지나서다. <<동아일보>> 사회면에 애정관계로 청춘남녀가 음독자살했다는 보도가 실렸다. 그중 죽은 여자는 과거 내게 편지를 보냈던 K양이었다. K양이 송정해수욕장에서 다섯 살 연상의 남자를 만나서 석달 간 교제하는 동안에 지극히 사랑해서 결혼을 약속했는데 근간에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는 것이다. 총각이라고속이고 장래를 약속하여 순정을 농락한 것에 너무나 분개해서 농약을 사 음료수에 섞어 남자를 불러내어 남창수원지로 가서 나눠마시고 껴안고 죽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정이 들 때는 몰라도 헤어질 때는 안다더니, ...왜 이다지도 마음이 아프고 나 때문에죽었다는 죄책감이 났는지... 49재 날까지 지장기도를 드려서 기도 입재를 했다. '아! 부처님이시여! 당신의 말씀에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오백생 인연이 있다고하셨는데 과연 그러한 것 같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게 도와 주십시오.'
4대 적멸보궁을 참재하다
일행은 나와 심인 스님, 도안 스님이다. 율재에 '석자출행에 필수삼인'이라는 말씀이 있다. 제일먼저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부터 참배했다. 두번째는 정선 정암사를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 울진 불영사를 참배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여러 시간 만에 울진에 도착하여 불영사까지 장장 70리를 걸어가야 한다기에 일행은 걸망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막상 절 앞 200미터 가까이 와서 보니 큰 강이 하나 가로막혀 있었다. 일행은 하나씩 빼니어 놓은 걸망끈으로허리끈에 묶어 세 사람이 서로 떠내려가지 않게 연결해서 걸망을 머리 위에 이고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중간쯤 들어가니 겨드랑 밑까지 물이 차는데 얼마나 물살이 강하던지 앞에 가던 도반 하나가 억 하는 순간 물에 떠내려가기 시작하니 뒤에 가던 우리도순서대로넘어져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모두 물을 몇 개기씩 먹고 허우적거리면서도죽을 힘을 다해 걸망을 꽉 잡은 채 안간힘을 다 써서 돌머리만 보이는 한바위돌에 걸려떠내려가다 멎었다.
주지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길 건너는 4, 5미터 밑에 용소가 있어서 거기에빠지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영사는 선덕여왕 5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3층 무영석탑이 있으며 이 절을 창건할 때 용소를 메워 지었다고 하며, 이 절이 앉은 산 이름은 천축산이다. 천축산 중턱에 큰 바위가 하나 서 있는데 창건하기 전에는 이 용소에 바위 그림자가 비추었거니와 창건 후에는 도량내에 연당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연당에 산 중턱의 바위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마치 부처님 모양과 똑같다고 해서 불영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행은 상동 꼴두바위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하루는 온종일 먹지 못하고 해가 기울 무렵에 한 민가에 들러 걸식을 했다. 한참 후에 소반에다 찬물 세 그릇과 옥수수 세 자루를 쪄서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잠깐 사이에 다 먹어치우고 밥 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성질 급한 내가 나가서 "우리 밥 안 주요?" 했더니 "아까 드리지 않았느냐'며 "여기서는 그것이 점심이에요. 조금 있으면 저녁 드릴 겁니다"고 했다. 날이 저물고 나니 문밖에서 저녁공양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었더니 이번에는 소반에다 냉수 세 그릇과 찐 감자 세 그릇이 전부였다. 감자는 한 그릇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감자가 세 개씩 담겨 있었다.
일행은 다시 하루종일 걸어 해질 무렵에 분천이란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정암사까지는 아직 하룻길이 남았다고한다. 할머니는 염불을 하는 우리 곁에서 계속 절을 했다. 염불을 마치고 얼마 있으니 할머니는 쌀을 많이 섞은 보리밥에 먹음직스러운 반찬을 손수 지어서 차려가지고 왔다. 이날 저녁에는 새로지은 집에서 편안히 쉬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서 독경을 해드렸더니 아침공양도 융숭하게 차려 와서 잘 먹고 주신 여비까지 감사히 받았다. 부처님의 목이 이와 같이 광대함을 미처 몰렸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야 정암사에 도착했다. ...옛날부터 객스님들의 최상 대접은 큰방 대중공양에 같이 참례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어찌해서 우리에게 최상 대접을 했을까. 나중에 알아보니 주지 스님께서 우리 일행이 108참회와 기도 정근과 보문품과 보안장을 지송하는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더니 시키지도 않은 도량 청소까지 하는 것을 보고 요즘에도 저런 수자들이 있는가 하더라는 것이다. 하긴 당시만 해도 객승들이 예불도 잘 안 드리고 늦도록 자고 도량 청소는 고사하고 자기가 잔 방도 잘 치우지 않고 밥만 먹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 터무니없는 액수의 여비를 요구하는 이도 많았던 시대였다.
자장율사의 유골함이 모셔진 산봉의 굴 속까지 가서 유골함을 보았다. 유골함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었다. 이유인즉 중생의 어떠한 중병이라도 자장율사의 유골함을 세번만 핥으면 낫는다는 말이 전해졋기 때문에 중환가가 모두들 혓바닥으로 핥아 수마노석으로 만든 유골 석함의 가운데가 패인 것이다. 자장율사께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인 치사리, 발사리, 육사리를 모시고 어디에 봉안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문수보살이 허공에 나타나서 "칡을 따라 들어가서 칡꽃이 핀 세 봉에다 봉안하라"고 해서 율사께서 칡을 따라 들어가니 지금 정암사의 3봉에 칡꽃이 만발해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칡을 따라와서 절터를 창건했다고 해서 일명 갈래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3봉에다 금탑과 은탑, 수마노탑을 모셔서 절을 창건하니 천의산중 삼갈반지 정암사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終. 마친다. 눈이 피곤하다. 청우결산보고도 보고이려니와 샤워하고 아령과 바를 들어올렸더니 영 눈이 곤하다ㅜㅜ)
22/01/09, 集字始作 일행은 정암사 보궁에서 삼 일간 용맹정진을 마치고 다시 사자산 법흥사 보궁을 향해서 떠났다. ...주천에서 법흥사까지 40리인데 순 자갈밭이어서 얼마나 발바닥이 아프던지 절며 뛰며 죽을 힘을 다해 가거 결국 저물게 도착한 것이다. 부엌으로 가서 먹다 남은 밥이라도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너무 어두워서 찾을 수가 없기에 다시 법당으로 가서 성냥과 양초를 가지고 가서 불을 밝혀 샅샅이 뒤져 보았다. 밥은 고사하고 짠 장아찌가 전부였다. 부엌문 밖에 나와보니 자그마한 김칫독이 하나 덮여 있었다. 동치미였다. 나는 됐다 하고 큰 양재기를 하나 찾아 가지고 한 양재기 가득 담아서 도반들과 맛있게 나눠 먹었다. 다시 오대산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다음 날 상원사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양을 마치자마자 다시 중대中臺 보궁을 향했다. 108참회를 하고 계속해서 환희심에 넘쳐 용맹 기도에 들어갔다. 7일 만에 회향하고 상원사로 내려와서 빨래도 할 겸 이틀을 푹 쉬고삼 일째 되는 날 범어사를 향해 출발했다.
화두를 들되 의심이 순일무작純一無雜해야 하느니라
아래는 책을 선독할 때 작성해둔 메모,
"2021/12/26 일욜, 주방의 물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도 들린다. 영례는 쌀을 앉히고 있고 나는 굴회에 탁주를 질팍한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男子로써 행복이란 거 이런걸까? 내가 벌오 놓은 돈, 아내가 뒤돌려칠까봐 불신하며 다투며사는 것은 참 도리가 아니다. '지리산 무쇠소'를 읽고 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 과연 그는 내게 무슨 앎을 주시고자 하는가? 휴일 저녁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다. 내일은 동파, 언 배관 때문에 종일 바쁠 것이다. 허상인 얼음, 동파 앞에서 멘탈이 무너지지 말자! 탁주 한잔과 아내의 정성깃든 안주 하나면 더 이상 바랄 것 없노라!"
나는 매일같이 도감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금어선실에서 가행정진해서 어느덧 반산림이 지나고 해제를 맞게 되었다. 조실 스님은 해제 법문에서 보조국사가 법제자인 원묘국사에게 설한 선법게송을 주제로 법문을 설했다.
파란波亂에 월난현月難現이요
실심室深 갱등광更燈光이라
권군勸君 정심기正心器하노니
물(말물)경勿傾 감로장甘露醬하라
파도가 어지러이 흔들리면 달이 나타나기 어렵고
방이 깊으면 등불은 다시 빛나노라
그대에게 마음 그릇 바로하기를 권하노니
감로의 장을 기울게 말지어다
나는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어 점심공양을 끝나고 조실방에 들어갔다. 나는 스님에게 삼배를 올린 뒤에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산하대지 비로체毘盧體요
초목총림叢林 문수안眼이며
일월성숙星宿 제불안諸佛眼이요
무변허공 혜원심慧元心이로다
산하대지는 비로자나 법체요
초목총림은 문수보살의 눈이며
해와 달과 별은 모든 부처님의 눈이요
가없는 허공의 혜원의 마음이로다
게송을 들은 조실스님은 "오! 네가 삼동에 공부를 애써 했구나" 라고 칭찬해 주시고 시삼마是甚(심할심)麽(잘마) 화두를 열심히 들어서 화두를 타파해야 생사해탈이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화두를 타파하려면 화두를 들되 의심이 순일무잡해서 사호絲毫만치도 다른 생각이 없이 앉아도 앉은 줄 모르고 서도 선 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 모르고 배가 고파도 고픈 줄 모르고 한 생각아 만 년 가서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내딛어야, 대마디 튀 듯 크게 깨닫는 것이니라. 쉬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거라."
수자를 때려 눕힌 까닭
당시 종단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있던 대처인은 승이 아니고 비구여야 승이라는 정화불사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전국비구승려대회가 열려 조실 스님께서도 몇 차례 서울을 다녀오셨다. 문득 나는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어떠한 법문을 설하셨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알기 위해 스님께 말씀드리고 서지전 강원으로 옮겼다. 강원에는 당시 대처승계의 주지인 영재 스님의 상좌 보선이라는 수자가 나와 같이 치문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은사 스님이 주지 스님이라고 얼마나 으스대고 거만하게 행동하던지 꼴불견이었다.
"혜원 수자! 귀 후비게 성냥 돔 갖다줘"라고 했다. 조금 뒤에는 차를 엎질렀다면서 닦을 걸레를 가져오라고 해서 갖다줬더니 닦은 걸레를 다시 주면서 갖다 놓으라는 것이었다. 속세 나이도 나보다 두 살 적은데다 소임도 딱 한 개 맡고 있으면서 자기 은사 스님만 믿고 지나치게 교만하고 몰상식했기 때문이다.
"야, 이놈아!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네 손으로 가져다 쓰고 네 손으로 내어다 놓으면 안 되나?" 그러자 "무엇이 어째?" 하면서 내 멱살을 잡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 발휘해서 그 수자를 들어서 방바닥에 내리쳤다. 쓰러진 그 수자는 다시 일어나 또 덤볐다. 다시 한번 힘껏 내리쳤더니 "어디 두고 보자"라는 말만 남기고 체념한 듯 사라졌다.
예불선창先唱도 부끄럽던 시절
나는 내성적이어서 예불선창 차례만 되면 어쩐지 심장이 뛰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도저히 선창을 할 수가 없었다. ...아예 예불시간에 걸망을 지고 일주문 밖으로도망을 치곤 했다. 그렇게 도망을 나와 짧게는 열흘, 길게는 한 달 정도의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의 사찰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불공과 시식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잘한다고 항상 칭찬을 듣는데 나도 알 수가 없다. ..."스님 대중 앞에서 말할 때와 예불선창할 때 떨리고 심장이 뛰는 것은 어떻게 해야 고쳐집니까?" 스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야 천하에 쉬운 일이지! 자네는 오늘부터 도반들이나 아무에게나 먼저 시비를 걸어서 얻어터지기도 하고 욕을 얻어먹기도 하면서 계속 면역성과 담을 키워야 한다. 그러면 두세 달 만에 괜찮아 질 것이야." 그 후부터 나는 매일같이 도반들이나 아무나 닥치는 대로 알밤을 주기도 하고 엉덩이를 차기도 했다. 그렇게 뺨을 얻어맞고 욕을 먹을 행동을 계속했는데 약 석 달이 지나서 예불선창을 했고 대중 앞에서 말도 잘하게 되었다.
대성암 비구니 스님 골탕 먹인 일
추석이 지나자, 대성암 비구니 스님들이 모두 와서 큰스님에게만 인사를 하고 우리 작은 스님들에겐 보는 둥 마는 둥 인사는 고사하고 합장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때마침 괌음재일 전날 비가 많이 왔다. 대웅전 앞마당 박석 깔린 옆에 물이 잘 빠지지 않게 막아놓고 호미로 흙을 파서 진흙탕을 만들어놓고 어서 내일이오기만 기다렸다. ...오전 10시가 되어 마지 종을 치고나니 비구니 스님 일행이 나타났다. 맨 앞에 만성 스님부터 약 열다섯 명이 탑 앞을 통과해서 대웅전 앞으로오고 있었다. 나는 급히 대웅전 앞 박석 위에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비구니 스님 일행이 모두 진흙 마당에 들어서서 박석 가까이 왔을 때 큰소리로 "큰스님들 모두 내려오십니까? 하고 땅바닥에 큰절을 했다ㅎㅎ 엉겹결에 절을 받은 비구니 스님들은 나를 따라 큰절을 하고보니 곱게 빨아 다린 장삼이 모두 '진흙반죽'이 되고 말았다. 비구니 스님들은 모두 울상이 되었다. 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한 말씀 던졌다. "비구니 스님들이 젊은 비구들을 무시하고 하도인사를 안 하기길레 먼저 인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대성암 비구 스님들은 작은 스님 큰 스님 할 것 없이 먼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지나가곤 했다.
정화한 범어사서 재불공을 올리다
1954년 9월 28일에 대한 불교 조계종 종헌이 선포됐다. 그해 10월에는 범어사 조실 스님인 동산 스님께서 범어사 초대 주지로 부임했다. 중앙에서는 비구-대처의 싸움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던 때였다.
조실 스님이 주지직을 겸하여 대처한 스님을 모두 내보냈다. 수자 스님만 모여 사는 범어사는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약자로 일대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정화의 초기라서 과거의 대처승들이 재불공 때 징과 꽹과리와 북을 사용하고 향수례와 사성례로 예불하던 것까지 모두 바꿨다. 22/01/09終07;15 운동하러 옥상가자꾸나.
10:10, 김형택반장으로부터 1차 필기시험 팁을 선물받고, 집에 와서 밥 먹고 또 이 책을 잡고 있다. 불과 16일 남았는데도 나는 '고산큰스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혁신이 좋은 점도 있지만 큰 손실을 가져오기도 했다. 일체의 재불공이 들어오지 않고 쫓겨난 대처승의 절로 다시 가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비구승들은 징과 꽹과리를 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예식도 전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예 비구승이 있는 절에는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북과 징을 사용해서 얼마나 신바람나게 했던지 참석한 신도들의 환희와 찬탄의 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그 뒤부터는 비구승과 예식을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재와 불공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우룡 스님과 일구월심 치열했던 수행
삼동결제를 해제하고 많은 스님이 오고가는 2월 중순쯤 되어서다. 그때도 나는 도감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해제철이라 별좌를 보던 스님도 어디론가만행을 떠나버리고 없었기에 별좌 소임까지 내가 맡았다. 그때 사중에서 강고봉 노스님을 강주 스님으로모시게 되어 노스님께서 상좌인 우룡 스님을 데리고 오셨다.
"누가 공양상을 이렇게 따로따로 차리라고 했느냐?" "제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네, 제 아버지로부터 배웠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겸상을 할 수 있으나 부자간에는 겸상을 할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노스님은 알았다며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그 후 며칠 지난 뒤 강주 노스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우룡 스님과 이력을 같이 보라고 권했다.
우룡 스님과 능엄경부터 보기 시작해서 같이 일구日久月深 피나는 노력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능엄경을 보는 도중 우룡 스님과 같이 비구계를 받았는데 서른 명 중 아홉 명만 받았다. 능엄경을 마치고 우리는 기신론을 연구했다.
하루는 고봉 스님께서 곡차를 몇 잔 드시고는 조실 동산 스님의 방에 가서 법담거래와 방광을 하시고 다음 날 울산 태화사로 떠나셨다. 우룡 스님과 내가 신심을 내서 부처님의 일대장경을 열람하고자 했던 결심이 수포로 됐다.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돌아다니다가 내 어깨를 힘껏 세 번 후려쳤다. 나는 죽비에 맞는 순간 전광석화와 같이 한 생각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진짜 나를 치지 못하고 송장만 치는구나!" 그러자 입승스님이 할㿣을 했다. 나는 그 할이 끝나기가 무섭게 더 큰소리로 "역부여시亦復亦是 도봉타월掉(찧을도)棒打月이로다. 또한 다시 그와 같은 할은 방망이를 잡아 달을 치는 격이라는 뜻"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조실 스님께서 "니우끽철봉 하니 석인이 유혈루니라. 진흙 소가 쇠망이를 맞으니 돌사람이 피눈물을 흘린다는 뜻" 나는 조실 스님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뇌리에 번개처럼 한 생각이 지나가서 큰소리로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행패부리는 상이용사들과 한판 대결
1956년 음력 3월 15일 구족계를 수지하고 도감 소임을 살 때 일이다. 하루는 6.25 전쟁 때 크게 부상당한 상이용사들 7~8명이 후원 채공간에 들어와서는 쇠갈고리를 내밀면서 국가유공자를 몰라보고 대접을 소홀히 한다면서 마구 행패를 부렸다. 그들은 '중놈의 새끼들 다 때려 죽인다!" 고 괴성을 지르면서 닥치는대로 때려 부수고 사람들을 때리면서 난동을 부렸다.
나도 보살이 되지 않은 이상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벽력같은 소리로 "야 이놈들아, 여기가 수도장이지 너히 뒷바라지 하는 곳이냐?" 하면서 한판 붙을 요량으로 밖으로 유인했다. 당시 국가에서도 그들에게 아무런 대책을 세워주지 못했고 돈 많은 부자들도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놈들의 버릇을 고쳐줄 것을 결심하고 보제루 앞마당까지 유인해 나갔다. 그런 다음 별좌 스님을 시켜서 대중 운집 목탁을 치게 했다. 대중 스님들이 순식간에 100여 명이 됐고, 100여 명의 대중 스님들이 10명도 안 되는 상이군인들을 에워쌌다. "이 도적놈들을 잡아라!" 내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자 아무것도 모르고 나온 대중 스님들은 이들이 정말 도둑놈인 줄 알고 일시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다친 스님들에게 간단한 진술만으로조사가 끝나도록 '내가 시켰다'고 만 하라 했다. 상이군인들은 그날부터 지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형사는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성질이 좀 고약해 보였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첫말에 대뜸 "야 이 자식아, 왜 싸웠어?"라고 시비조로 물었다. 나는 그형사가 말버릇도 버릇이거니와 너무나 넉살스럽고 얄미워서 아예 입을 봉해버렸다. "본적이 어디야?" 역시 나는 말하지 않았다. 세 번째 말이 터져 나왔다. "이 새끼야 본적이 어디냐 말이다!" 그래도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이 뭣고' 화두만 들고 있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선정삼매에 들어버렸다.
담당 형사는 직속상관인 수사 과장에게 불려가서 꾸지람을 당하고 또 동료 형사들에게 충고를 받고 있었다. ......"스님! 오전에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온종일 화장실도 한번 안 가고 바위처럼 꼼짝도 않고 눈을 감고 앉았다가 그제서야 눈을 뜨고 한마디 했다. "남을 멸시할 때 내 인격이 떨어지고, 남을 존경할 때 내 인격이 올라갑니다."
오전에 그토록 독사나 살쾡이처럼 추악하고 험상궂었던 얼굴이 180도 변해서 이제는 관음보살처럼 자비상을 보였다. 사람이 마음가짐에 따라 어쩌면 이렇게 변할 수 있나 하고나는 마음속으로 한 번 더 놀랐다.
중간 중간 내가 "왜 반문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수도하시는 스님께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한나절에 내가 선정력을 발휘해서 한사람을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마음이 기뻤다.
절에 와서 행패를 부릴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소를 취하하고 저 사람들을 용서하고 석방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부처님이시여, 죄송합니다. 조용한 수도장을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용서하소서." 깊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절로 돌아왔다. 이러한 일이 있은 다음 범어사는 물론이요 전국 각 사암에서 말할 수 없이 많은 상이군인들의 행패가 일시에 그쳤다. 상이군인들 사이에 삽시간에 그 소문이 전파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말을 냈으리라. "너희들 절에 가서 행패 부리지 마라. 중들 떼거리가 불개미 떼와 같아서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데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고 살아서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야."
대중은이 도리를 알겠는가?
조실스님께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대중은 이 도리를 알겠느냐?' 하시는데 벽력같은 소리로 '악!"하고 할을 했다. 조실 스님께서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저런 미친놈봐라! 저런 미친놈 봐라!" 하시니 다시 사천왕이 "욕득불초무간업인댄 막방여래정법륜欲得不招無間業 莫謗如來正法輪하라!" 하고 소리쳤다.
이는 조실 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신 것은 모든 대붕이 부모에게 몸 받아 나기 이전 本分을 보이신 것인데 사천왕이 여기에다 할을 했으니 조실 스님은 틀렸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사천왕은 자기 소견으로 바로 이것이라 하는뜻으로 할을 한 것인데 꾸짖어 욕만 하니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업을 부르지 않고자 하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역시 조실 스님게서 "저 미친 놈 쫒아내라"고 하시니 사천왕은 누가 미쳤는지 모르겟다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법문이 끝나고 오후공양을 마치자 나는 어느 정도 신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큰방 지대방으로 가서 휴식하고 있는 사천왕을 보고 "어이 사천왕! 자네 아직 물과 불을 구분 못 하는 애송이더군!" 했더니 휴식한다고 벽에 기대 앉았던 사천왕이 벌떡 일어나서 "무엇이 어째?" 하고 나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기에 번개처럼 피하고 마당 한가운데 가서 섰다. 그는 맨발로 뛰쳐나와 마당 옆에 군불을 때다 남은 장각개비를 마구던지면서 이것은 덕산방이요, '왝왝' 소리를 지르면서 이것은 임제할이라고했다. 그래서 나는 대응하기를 "이 어리석은 자야! 그런 행동이 덕산방이고 임제할이라면 미친놈의 발광은 다 선법문이겠다! 너 뭐 좀 아는 줄 알았더니 폭력이나 쓰는 벽창호구나! 폭력은 그만두고 어이 알았거든 한번 보여 봐라!" 라고 했더니 입을 다물고 지대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전후사를 살펴보건대 이 사람도 공부는 애써 한듯하나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을 합쳐 범어사 사답을 지켜내다
1957년 여름이었다. 정부는 부자들의 토지 소작제도를 폐하고 토지를 분배하여 자작하도록 국법을 제정하여 천하에 공표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불교는 일차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국에 산재한 寺畓이 하루아침에 소작인에게 분배되어 10년, 20년 상환제로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직책은 도감이지만 원주를 보는 심인스님과 사중전반사를 총책임지고 주지 직인까지 보관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찰 토지를 부치고 있는 소작인을 모두 사찰 머슴(고용인)으로 해서 서류를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제1조는 사찰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고용인이라고 한다. 제2조 1년 경작의 소출 중 3/10은 갑에게 바치고 7/10은 을의 소유로 한다. 제3조 천재지변으로 인한 파괴의 보수는 갑이 3/10을 부담하고 을이 7/10을 부담키로 한다. 제4조 농경비 전체는 을이 부담한다. 제5조 경작 계약 기간은 1년으로한다.'
나는 미리 재운 스님과 간단한 '밀담'을 했는데, 1,2,3 조항은 절대 변동시키지 말 것을 재차 당부했고 차를 대접하기 위해 들락거리면서 주먹을 쥐어 보이면 절대 굽히지 말고 완강하게 통과시킬 것이며, 손바닥을 펴서 보이면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라는 등의 약속을 했다.
이렇게 해서 제3조항부터 조금씩 양보해줘서 이 고용계약이 원만히 성립되어 온종일 실랑이 끝에 모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원만하게 해결이 됐다. 사찰에서 이처럼 고용계약을 체결한 것은 전국에서 범어사가 처음이었다.
경봉 스님께서 오른손을 펴 보인 의미
이럭저럭 큰 사고 없이 무난히 방생법회를 마쳤다. 그날 온천장 임구에서마지막 해산을 하는데 먼저 경봉 스님께서 택시를 잡아서 타려고 하시다가 택시를 기다리고 있던 동산스님을 보시고는 '동산 스님이 나보다 더 바쁘다고 하던데 이 차를 먼저 타고 가시오, 나는 뒤차를 타고 갈테니"라고 했다. 동산 스님은 그렇게 하겠다면서 차에 올랐다.
그때 경봉스님께서 오른손을 펴 보이시면서 "도인의 작별은 이것이야"라고 하시자, 동산 스님께서는 왼손 주먹을 쥐시고 차창문 밖으로 내어보이시면서 "이것 아느냐?"라고 하셨다. 그때 경봉 스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입을 꽉 다무신 채 저쪽으로 가셨다. 과연 도인상견에 대면희의喜宜, 즉 얼굴을 대함에 알아차리고 기뻐한다더니 양미순목陽眉瞬(눈깜빡일순)目과 거수동족이 법담거래 아님이 없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몸 가운데 왼쪽은 마음의 바탕인 체體요, 오른쪽은 마음의 작용인 용用이다.
그래서 경봉 스님이 오른쪽 손을 펴 보인 것은 차별이니 엄지손가락, 집게 손가락, 긴 손가락, 무명지가락, 새끼손가락이 각각 다르듯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김씨, 박씨, 이씨가 각각 제멋대로 흩어져 간다는 뜻이다.
동산 스님이 주먹을 쥐어 보인 것은 무차별이니 비록 몸뚱이는 각각 ㅎ슽어진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한곳에 같이 있다는 뜻이다. 입을 다물고 저쪽으로 가신 것은 무차별인 본분에 있어서는 입을 열면 그르치고 또 법담에 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울산 문수암에 걸망을 풀다
추석을 지내고 나도 걸망을 지고 만행길에 올랐다. 통도사에 가서 큰절과 암자를 두루 참배하고 극락암에 계시는 경봉 스님을 각별히 친견하여 경책을 받은 뒤 다시 걸망을 지고 울산으로갔다. 마지막으로 울산 문수암에 올라갔다. 문수보살의 상주 도량인 기도처라 더욱 환희심이 나고 다른 데로 갈 생각이 없어졌다. 주지 동헌 스님은 '여기는 방사도 없고 양식도 모자라고 해서 더 이상 대중이 살 수가 없다"고 하셨다. 나는 입산 후 수차례 타사에 가서 방부를 들인 경험이 있기에 주지 스님의 말씀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가 당신의 절이요? 부처님 절이지! 받고 안 받고가 어디 있나요? 같이 살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고 걸망을 정돈하여 벽장에 넣고 옷을 벗어 세탁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나는 목청을 돋우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도량석을 하기 시작해서 도량을 한 바퀴 돌아서 주지 스님 방 앞으로 가서 더욱 큰소리로염불을 했다. 놀라서 뛰어나온 주지 스님은 세수하러 가시다 말고 우두커니 서서 염불하는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나는 못 본 척하고 그대로 염불을 계속하여 끝내고 쇠송까지 하려고 종 앞으로 갔다. 거기에 부전을 보고 있던 대처승 노장이 앉아 있었아. "노스님! 제가 쇠송해 드릴게요." 하고서 종 망치를 잡으니 잔뜩 화가 난 노장이 종 망치를 훽 빼앗아 갔다. ...절하다 말고 문득 생각이 났다. 내가 목성도 좋고 게다가 젊은 비구승이고 하니 자기의 부전직책이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 그런 것 같았다.
예불이 끝나고 한 시간 동안 관음정근을 모시고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을 마치고 나서 도량 주위를 돌면서 참회게와 보문품과 보안장을 지송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먼동이 틀 때까지 좌선을 했다. 동녘이; 환해지자 나는 또 밖으로나가서 도량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기 시작해서 한 시간 만에 끝냈다. 주지 스님은 도량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시찰을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랐다. 아침공양 목탁소리가났다. 공양방으로 들어가서 공양을 하고서 양치를 하고 객실방에 앉았는데 주지 스님이 부르셨다. 주지 스님은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서 함께 살자고 했다. 마음속으로 은근히 좋으면서도 어제 하셨던 말씀이 서운애서 한마디 했다. "아니요! 여기는 양식도 없고 방도 없다기에 한 삼 일 쉬다가 다른 데로 갈 겁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바싹 다가앉으면서 간곡하게 만류하며 보현암과 칠성각 부전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못이기는 측하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승규에 타사에 가서 객으로 삼 일 이상 머물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꼭 그 절에 살고 싶으면 법규를 어겨가면서도 내 밥값은 하고 꼭 한 철 이상 살았다.
하루 종일 쉼 없이 불공을 올리다
1958년이 설날을 맞게 되었다. "오늘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불공하는 신도가 많이 오기 때문에 노스님은 숨이 가빠서 헐떡거려 많은 신도의 불공을 못할 터이니 보름날까지만 혜원 수자가 큰법당 부전을 하고 노스님은 칠성각 부전을 맡아 하시오." 노스님이 싫어하는 눈치라 나는 얼른 대답하기를 "지금까지 맡은 바 그대로 하고 노스님이 바쁘실 때 얼마든지 돕겠다'고 했다.
...한 말이건 두 말이건 모두 남김없이 밥을 지어 각 단에 다 올려서 불공을 하는데, 70, 80여 명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오랫동안 정성을 드릴 시간이 없었다. ... 아침 공양을 할 겨를도없이 불공 50여 자리를 하고나니 너무나 지쳤다.
불공에 드린 밥도 너무 많아 낭비
이제는 나도 이력
이 나서 정법계진언이고보공양진언이고 다 생략하고 지심정례공양 세 번 하고 끝에 탄백하고 나서 축원하며 끝을 맺었다. 이제는 목구멍이 따가웠다. 불공이끝나고 부엌으로 가 보았더니 공양주보살은 머리에 이고 나갔다. 뒤따라 갔더니 마당바위로 갔다. 밥을 태양에 말리는 것이었다. "아, 이거 말이요? 이것은 이렇게 말려서 스님이 지금 자시고 있고 또 불공신도들이 와서 드시는 강정을 만드는 것입니다."나는 재차 물었다. "하루에 불공을 드린 밥만 해도 이렇게 많은데 일 년 내내 불공 드린 밥을 다 말리면 그 많은 것을 다 어떻게 합니까? " 이 산중에는 별미가 없어서 전부 강정을 만들어서 일 년 내내 오시는 불공 신도들에게 한 바가지씩 드리며 나눠드린답니다."
나는 결심했다. 내가 앞으로 훌륭한 스님이 되어서 이 같은 폐단을 고치고 말 것이라고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한 끼만 공양한다고 경전에 분명히 명시가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온종일 공양을 드린다는 것은 법에도 없거니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혜원 스님이 지금 고생하고 계시는 '문수암'은 문수사로 바뀌었나보다'
불공은 끝이 없었다. 잠깐씩 소변을 보고 들어가서 계속하고 저녁공양을 먹고 나서도 불공은 잠자리에 들때까지계속되었다. 그다음날도 불공은 어제와 같이 계속 이어졌다. 3일, 4일, 5일, 6일 해서 정월 15일까지 매일 불공은 하루에 40, 50자리씩 계속되었으니 누구나 상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시줏돈은 불사에 써야 합니다
다음 날 새벽에도 몇 사람의 불공을 해주고 '오늘은 본사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걸망을 챙겨놓고 아침공양을 했다. 주지 스님은 잠깐 앉으라고하더니 벽장문을 열고 뭔가 가득 담긴 밀가루 포대를 하나 들고 오셨다. 이것은 혜원 수자의 것이니 꼭 가지고 가야 한다면서 갖고 가고, 그렇지 않고 같이 좀 더 살면 표가 나게 무엇을 하나 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혜원 수자가 그동안 불공할 때마다 신도들이 탁자에 놓은 불전이야. 여기에서는 전부터 불전은 부전 스님의 것으로 정해져 있으니 가지고 가야 해!" "스님! 다른 돈이면 몰라도 불전을 제가 왜 가집니까? 신도님들이 자기의 자녀들을 잘되고 해달라, 명을 달라, 복을 달라는 등 가지각색의 염원이 붙은 그 무서운 돈을 왜 제가 가져야 합니까? 그런 돈은 그들의 복전이 되는 불사에다 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자가 무슨 돈이필요합니까? 두 번 다시 저에게 그런 권유 마세요. 저에게 주시고 싶으시면 주지 스님 호주머니에 있는 돈 몇 푼만 주시면 본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주지 스님은 호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전부 털어 내어주셨다. 그 돈이면 기차로 서울을 왕복할 만한 액수였다. 나는 그중에서 두 푼만 집어들고 나머지는 도로 드리니 끝까지 거절하시고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발길을 옮기는데 마치 부모님을 하직한 것처럼 가슴이 뭉클하고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었다. 참으로 인정이란 무서운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어디든지 석 달 이상 살지 말라고 하셨나 보다. 본사에 돌아온 나는 더욱 새로운 듯 전보다 배나 신심이 더하여 기도와 정진에 여념이 없었다.
범어사로 다시 돌아오다
하루는 아침공양이 끝나고 청풍당 뒤 해우소에 가려고 급하게 갔더니 조실 스님을 시봉하는 각성 수자가 대야에 뒷물을 들고 서서 "동산! 동산! 이제 그만 나오세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영문을 물었더니 조실스님께서 해우소에 들어가신 지 20분이 넘었는데 물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고 나오시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놈아! 그러면 못써." 하시고는 웃어넘기셧다. 만약 다른 이가 그렇게 했다면 크게 꾸짖으시고 매질까지 하셨을 터인데 도인의 경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도감시절 수계자들과 함께. 두번째 줄 왼쪽이 능가 스님,
세 번째 줄 오른쪽이 필자]
노스님 보시기는 정말 어려워
어느 날 한 수자가 대밭에 가서 조실 스님에게 반찬을 해드리려고 죽순을 한아름 부수어 안고 왔다. 이것을 본 조실 스님은 이유 여하를 묻지 않고 수자의 뺨을 치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양쪽 뺨을 쉴 사이도 없이 수십 대 계속 치고 있기에 나는 뛰어가서 "스님! 이 수자가 죽순을 꺽은 것이 아니라 도적놈들이 꺽어가는 것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면 도적놈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얼른 둘러대면서 "죽순만 버려두고 벌써도망갔다"고 했다. 그러자 조실 스님은 "다음부터는 사람을 세워서 지켜라"고 말씀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도감 스님! 감사합니다. ...제가 맞는 것은 괜찮지만 노스님의 열기를 쉬게 하였으니 참으로 감탄했습니다"라고 하고는 걸망을 싸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조실 스님이 조금 전에 때리시면서 "너 같은 놈은 아주 몹쓸 놈이니 내 눈앞에서 썩 없어져라"고 하셨으니 이제 다른 데로 갈 생각이라고 했다.
한사코 막았지만 이 수자도 고집이 센지라 끝까지 듣지 않고 걸망을 지고 나가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조실 스님에게 인사나 하고 가라고 했다. 때마침 조실 스님이 해우소에 가시려고 나오다가 걸망을 지고 있는 수자를 보셨다. 대뜸 하시는 말씀이, "이 좋은 데를 두고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이런 박복한 놈 봤나?"라고 했다. 그러자 그 수자도 지지 않고 조금 전에 스님께서 없어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따져 물었다. 조실스님은 또 한 번, "저런 박복한 놈 봤나? 내가 언제 여기에서 없어지라고 했느냐"며 "당장 들어가지 못해?"라고 했다. 나는 수자의 손을 이끌고 지대방으로 갔다.
산 나무도 함부로 베지 말라
'사천왕' (모스님의 별칭)도 도량 대청소를 하다말고 관음전 앞에 있는 향나무를 탑 모양으로 만든다고 하면서 톱으로 마구 잘라서 손목 잘린 팔뚝 모양으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흉물을 만들어 놓았다.
조실 스님께서는 관음전 앞에 흉하게 된 향나무를 보시고는 불호령을 내렸다. "어느 놈이 이런 짓을 했느냐? 당장 이놈을 잡아오너라. 이 미친놈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 그대로 두면 온 도량에 나무를 하나도 못쓰게 만들 터이니 어서 잡아오너라." 잡아오지 아니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대중이 뛰어가서 사천왕을 불러왔다.
키가 크고 덩치고 크며 험상궂게 생긴 사천왕이 조실 스님 앞에 대령하고 우뚝 서니, 조실 스님은 전에 죽순 꺽은 수자의 뺨을 칠 때와는 달ㄹ리 밧줄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노스님께서는 손수 밧줄로 사천왕의 두 손을 죄인처럼 꽁꽁 묶어서 지대방으로 데리고 가서 빨래를 두드리는 다듬이돌에다 얽어매어놓으시고 도망을 못 가게 잘 보살피라고 일렀다. 본심이 돌아올 때까지 붙들어 매어놓지 않으면 온 도량의 나무를 다 베어버린다는 것이다.
사천왕은 나더리 풀어주라고 애원했다. 나는 풀어주고 "이번에는 그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으니 후원에 가서 공양 드시고 조실 스님이 큰방 공양이 끝나고 나오시기 전에 바로 여기를 떠나 타사에 가서 한 철 지내고 오세요"라고 제안했다. 사천왕도 쾌히 승낙햇다. 원주 스님에게 가서 차비를 얻아다가 사천왕에게 줘서 떠나 보냈다.
"이놈이 어디로갔어?" 나는 급하게 뛰어 갔다. "스님, 우리 공양하는 동안에 어떻게 풀었는지 도망가버리고 없습니다." "그러게 지키라고 했잖아. 어서 나가서 온 도량을 찾아보아라. 그 놈 미쳐서 또 어디 나무를 자를 게야." 나는 한참 후에 다시 조실 스님에게 가서, "온 도량을 다 찾아보았는데 아무데도 없습니다. 아마 겁이 나서 멀리 도망갔나 봅니다." 라고 말했다. 조실 스님은 "허 그것 참! 마음가짐을 고쳐서 보내야 하는 건데 큰일 났구만. 어디 가서 또 무슨 짓을 할런지! 큰일이여 큰일!"이라며 혀를 차셨다.
대중이 차고 넘쳐도 방부를 받지 않는 일이 없었고, 대중과 함께 예불과 도량 청소도 함께 하셨다. 은사 스님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 나 역시 지금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상관없이 예불에빠지는 일이 없다.
희사통에서 돈이 없어진 사건
"우선 원주 스님! 당장 큰 돈 두 장만 주세요." 그 당시 큰돈이란 100원짜리고 작은 돈은 10원짜리였다. 나는 빳빳한 지폐 200원을 받아서 돈 뒷면 한쪽 귀퉁이에다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작은 표시를 해서 관음전에 뛰어가 한 장은 관음보살 앞의 불반위에 놓고 또 한 장은 신증단 탁자 위에 놓고 나왔다.
"관음전 기도 정근이 끝나나거든 희사통을 열어보세요. 100원짜리 두 장이 있으면 부전 스님의 소행이 아니고 만약 없으면 부전 스님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공양 끝에 대중공사를 부쳤다. 입승 스님은 지월 스님이었다. 전후사정을 다 들으신 스님 앞에서 나는 "이 사람은 끝까지 양심을 속이고 뉘우치는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산문출송을 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수자는 "참회를 시키고 새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입승 스님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생각이라고만 하시고 한 시간이 넘도록 공사의 결론을 내리지 않으셨다. 결국 그날 아침 대중공사는 결정 사항이 없이 넘어갔다.
저녁공양 후에 대중공사를 했지만 아침과 마찬가지로 입승 스님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쫒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 참회를 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란 말씀난 되풀이 했다. 같은 말씀만 반복하는 입승 스님의 모습에 화가 치민 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겠다고 나섰다.
"부처님께서도 율장에 말씀하시기를, 살생을 범하면 불공주不共住라고 해서 먹물 옷을 벗겨서 내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산문출송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자 역시나 입승 스님은 "그것도 좋은 말씀입니다"라고 하시길레 나는 다른 스님의 반대 의론이 나오기 전에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입승 스님의 말씀에 따라 산문출송할 것을 결정하겠습니다. 대중 스님네는 그리 하시길 바랍니다."하고 죽비를 치고 일어났다. 나는 즉시 대중 스님들을 총지휘하여 바로 산문출송을 집행했다.
삼 년 뒤에 내가 다른 이를 구타하고 산문출송을 당할 줄 누가 알았으랴. 참으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며, 자작자수 아닌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이니, 이 글을 읽는 자는 반성하고 돌아보기를 바란다.
보문품을 지송하며 시장을 보다
당시 범어사에 차도가 제대로 나지 않아서 산림벌목 할 때 트럭을 대절해서 싣고 올라가는데 비만 오면 바퀴가 미끄러져 그나마 올라가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였다. ...항상 온천장까지 걸어가서 시장을 봐 걸망에 가득 담아서 양손에 무겁게 들고 오곤 했다. 한손에는 참기름 두 되를 들고 또 한 손에는 태유를 두 되 들고서 30리를 걸어다니는데 언제나 범어사 밑 수원지 위 어느 산소에서 쉬어가곤 했다.
몸이 피곤할 때면 언제나 해불암에서 농사짓고 등짐으로 15리 시장 봐다가 재를 지내던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일은 수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실 스님께서는 외국을 다녀오신 후에 다른 사람은 제대로 못한다며 내게 화초씨를 주시면서 잘 심어 가꾸어 보라고 하셨다. 조실 스님께서 나를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워 하시고 대견스럽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직접 대할 때는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한번은 조실방에 도배를 해야겠다고하시기에 당시 국화무늬 도배지를 사와서 내 손으로 직접 정성을 다해 도배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기둥이 있는 곳이라 기술적으로 붙여도 모양이 삐뚤어지게 보였다. 나중에 조실 스님이 보시더니 도배가 잘 되었다고 칭찬하시면서 누가 했냐고 물으시며 이렇게 말씀했다.
"오! 혜원이 네가 했으면 틀림없이 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집이 좀 기울어서 넘어가는구나! 목수를 불러서 고쳐야겠다!" 나는 어찌나 무안하고 송구하던지, "스님! 제가 도배를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집이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지만 조실 스님은 "아니다 도배는 잘했는데 기둥이 넘어간다. 언제 목수를 불러서 고치도록 해라." 고 하셔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온천장에 가서 도배지를 사다가 똑바로 도배를 해놓았더니 스님께서 보시고 기둥이 바루어서 되었다고 하셨다(눈물이 난다. 왜 이토록 눈물이 나오는가. 저러한 믿음을 한 번도받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손맛 배인 반찬 좋아하신 조실 스님
하루는 선방의 여러 스님께서 "도감 스님! 우리 선방 앞에 무궁화 한 그루가 있는데 여름이면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정진을 하니까 무궁화나무의 진드기와 벌레가 날아와서 덤비니 어떻게 처리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나는 톱을 가지고 와서 사람의 키가 훨씬 넘는 큰 나무를 세자 정도 둥치만 남겨두고 잘라 버렸다.
사시마지를 올린 다음 오공을 하기 위해 선방에 오신 조실 스님에게, 선방의 한 수자가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견하면서 "도감 스님이 저 나무를 잘라버렸다"고 말하자 천만뜻밖에도 조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도감이 그랬다면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그런 다음 조실 스님은 아무런 화도 내지 않고 공양하시러 큰방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의식은 비구승도 잘한다
그동안 정화한 지 수년 동안 49재라고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비구승이 정화를 하고 징, 꽹과리, 북 등의 사용을 금한 까닭에 49재만은 대처승 절에 가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처럼 큰 재가 들어왔으니 이번 기회에 본보기를 보여 주어서 비구승도 예식 잘한다는 소리가만천하에 들리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종정이셨던 하동산 조실 스님에게 전후사정을 간곡하게 말씀드려서 꾕과리는 제외하고 징과 북 사용을 허락받았다.
그리하여 선덕화 댁의 49재 때는 노전 스님과 내가 법주와 바라제를 번갈아 주고 받으면서 징과 북을 사용하고 어산과 독경 염불을 전심전력을 다해서 배운 대로 발휘하니 대중 스님과 신도들의 탄성이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로부터 전국 방방곡곡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삽시감에 퍼져서 비구스님들도 참으로 예식을 잘한다고 하여 비구 스님들의 절에도 49재가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대중 120명 ...,공양미가 동났다!
선원에서는 생활필수품을 청구하는 청구서를 원주실에 보내오면 아무리 딱한 사정이 있더라도 즉시 사다 드려려 한다. 만약에 다른 복잡한 일로 해서 이틀 사흘 늦어지면 대중공사가 붙고 원주와 도감에게 참회를 시켜야 하느니 갈아치워야 하느니 설왕설래 많은 말이 오간다.
시은施恩이 일미칠근이라
법문이 끝나자 한 수자가 나를 찾아와서 "우리나라 제일도인이신 전강 스님을 찾아가서 공부하는 길을 물어보자"고 했다. 나는 결제 중이니 해제나 하고 가자고 하니, 그 수자는 "우리가 입산할 때가 결제요 성불하여 마쳤을 때가 해제입니다. 선지식을 찾아가는 데 결제 해제가 어디 있습니까? 생각났을 때 가는 것입니다. 생사가 급한데 무엇을 망설입니까? 라고 했다. 나는 소임과 여러가지가 걸렸지만 눈 찔금 감고 원주 스님에게 며칠 휴가를 얻어서 떠났다.
그때 전강 스님은 군산 은적사에 잠시 주석하고 계셨다.
[군산 은적사]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같이 간 수자가 대뜸 묻기를, "수행자가 어떻게 공부해야 빨리 생사해탈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 전강 큰스님께서는 조용히 묻기를 무슨 화두를 들고 있느냐고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시삼마'를 하고 있다고 했다. 큰스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되, "시은이 일미칠근임을 생각하여 쉬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여라" 라고 하심에 나는 " 그 말씀은 이미 치문에서 배워서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적절한 말씀을 해 주십시오!" 했더니 또 "시은이 일미칠근입을 생각하여 열심히 하여라"라고 하셨다.
같이 갔던 수자가 이번에는 "큰스님! 그것은 유치원생에게나 해당하는 말씀이지 저희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일초즉입여래지 하는 경절언구를 설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스님께서는 역시 "시은이 일미칠근입을 생각하여 쉬지말고 부지런히 하여라" 하셨다.
큰스님의 말씀이 끝나자 그 수자는 "선지식이라고 하더니 유치원 선생 노릇이나 하고 있는 노장이구만! 혼자 선생 노릇이나 많이 하세요!" 하고 나의 다리를 꼬집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따라 일어나서 대문으로 나오다가 뒤돌아서서 이번에는 내가 좋은 말씀을 들으려고 멀리뛰어온 것이 분해서 조실방을 향해 큰소리로 "조실 노릇하려면 무엇 좀 알고 하던지! 어린애 달래는 소리만 하고 있어. 조실? 대추 조 字에다 열매 실자 조실이나 실컷 해라!" 하고는 나왔다.
본사에 돌아온 우리는 전강 스님게서 말씀하신 것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밥을 받을 때는 더욱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시주의 빚만 지고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방에서 공양 끝에 대중공사가 붙어 원주, 도감 긴급 호출이란다. 하판에 보니 공양주와 채공이 이미 불려와서 꿇어 앉아 있었다. 원주 스님은 시종일관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겠습니다" 라고 참회를 하는데,
나는 울화가 치밀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전강 스님에게 다녀오지 아니했으면 잘못했다고 참회를 했을 지 모르지만 그스님에게 다녀온 뒤로는 나의 생각이 너무나 달라졌던 것이다.
'시은이 일미천근이라 채근목과위기장 하고 송낙초의차색신으로 수도해야 할 우리가 밥투정 반찬 투정 할 때인가' 라는 생각에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소리치듯이 말했다.
"네! 저는 신심도 없고 성의도 없고 스님네 말씀과 같이 대중 스님 외호할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그러니 잘하는 스님들께서 돌아가면서 잘 해보세요! 저는 오늘로써 소임을 그만하겠습니다." 그러고서 절을 한 번 하고 나와 버렸다. 1598년 음력 5월 25일경 도감 소임을 사임하고 오후에 바로 걸망을 지고 산문을 나와 울산 태화사로 갔다.
5장 해인사 시절(1958년~1961년)
부처님, 혜원이는 떠나갑니다
당시 태화사에는 강고봉 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셨다. 나는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한번 열람해볼 것을 결심하고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감수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기 때문에 방부를 드리고 경을 보면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초가을 어느 날 점심공양 때 고봉스님께서 가을 상추 쌈을 싸서 잡수시다가 옆집에서 여자들이 너무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니까 쌈을 들고 일어서서 담 너머로 넘어다보시고 "옛기 고얀년들!" 하시면서 욕을 한마디 했다. 여자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고봉 스님에게 항의하기 시작하는데 상좌인 종한 스님이 백배사죄하여 여인들을 돌려보냈다. 창피하여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노스님은 짐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다음 날 우리 일행은 목적지를 해인사로 정하고 모두 떠났다. 당시 해인사에 조실은 전강 스님이시고 주지는 청담 스님이셨다.
하루는 점심공양이 끝나고 고봉 스님 방에 갔더니 전강 스님과 고봉 스님께서 바둑을 두고 계셨다. 그때 학인 7,8명이 대강백이신 고봉 스님께서 와 계시니 의심나는 공부를 묻고자 법복을 입고 가서 바둑을 두고 있는 고봉 스님에게 정중히 삼배를 드린 뒤에 꿇어 앉아 대표로 한 학인이 물었다.
"스님, 신광이 불매 하여 만고 휘유한 소식을 일러주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봉 스님은 얼굴을 들어 전강 스님에게 물으라는 시늉을 하셨다. 학인들은 한로축괴와 마찬가지로 다시 전강 큰스님에게 큰절을 한번 하고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전강 스님이 얼굴을 들어 고봉 스님에게 물어보라는 시늉을 하셨다. 아직 알아듣지 못한 학인들은 이번에는 또다시 고봉 스님에게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고봉 스님은 벽력 같은 소리로
"이놈들아! 계속 보여줘도 모르느냐?"라고 하자 학인들은 "네, 알겠습니다"하고는 모두들 절을 하고 물러갔다. 양미순목과 면명수수와 양구방할등이 모두가 신광이 불매하여 만고에 희유한 소식 아님이 없음을 두 스님께서는 그대로 학인들에게 문자 밖의 소식을 바로 보여주신 것이다.
첫댓글 나는 다음주 수요일, 22/12/12일에 3차 접종이고 장지칠길은 오늘12/08 접종한다.
내일 산행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웬지 3차 접종이 꺼려져서 미뤘지만 더 이상 미루기도 힘겨워졌다.
조금씩조금씩그렇게되어가는 것이다
이성과 오전에 붙어서 만방으로깨졌다.
어제 양동에 힘을 써서 생각의 정념불씨가 약해서 졌다.
홍삼2 도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