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적성가도를 타고 내려오다
경순왕 김부의 능을 찾았다. 민통선위에 있어 지난번에는 입구에 있는 군초소에 신분증을 맡긴 후 들어
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게 해 놓았다. 그러나 보완책인지 능으로 가는 길옆너머에는 철조망과 함께 '지뢰매설'이라는 경고판이 붙어있다. 순간적으로
'진짜일까'하는 생각이 스치나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능은 우리가 서울근교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석조물등이 조선후기 것들이라한다. 고려때부터 방치되어 오다 영.정조대에 경순왕능에 신경을 쓴 까닭이라 한다. 나라를 들어 바쳐 경주지역의
사심관을 지낸 그가 왜 다른 신라의 왕처럼 경주지역이아니고 그렇다고 개경지역도 아닌 이 곳에 묻히게 되었는 지 알 길이 없다. 비석에 6.25때 피아간의 총격전으로 탄흔이 역력하다. 아마 사후에도 주위가 꽤나 시끄러웠으리라.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나라를 바친
행위를 아주 잘한일이라고 기술했다. 만일 끝까지 항거했더라면 많은 국민들이 죽었을 것이고 또한 그 일족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좀 이상한 논리다. 만일 지금 이북이 핵미사일을 쏘면 국민의 희생이 클 것이므로 남한을 들어 바치자 해도 하등 이상 할 게 없지
않을까, 오히려 민초들을 구하는 영웅적인 행위로 자화자찬을 할 수도 있다.
하여튼 그는 개인적으로,겉으로 보면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다. 망국의 왕으로서
목숨을 보전했고, 그는 왕건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부마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의 딸을 왕건에게 바쳤고
그들 사이에서 난 손자가 암살을 피해 서울의 진관사에서 숨어지내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긴 하지만 고려왕(현종)으로 등극을 하게되고 이후 고려왕들은 모두 현종의 자손이 맡게되니 그들의 외가 조상이 된다. 그런데도 왜 그의 무덤이 고려조에서 조차 석조물하나 없이 방치되다시피 되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망국당시 마의태자로 알려진 장남 김일과 그의 아들들의 생애는 그와는 달리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아들들은 그리 행복했던 것같지는 않다. 이중에서도 대표적인 주전파로 알려진 마의태자의
뒷소식이 궁금하다. 과연 삼국사기에 나온대로 개골산에 들어가 평생마의를 입고 풀을 먹다 죽었을까. 늦은 시각에 능을 찾은 탓에 아무도 없는 능앞에서 상념에 잠겨있으려니 벌써 서쪽으로 해가 누엿누엿 넘어가 서쪽하늘이 석양에
곱게 물든다. |
첫댓글 아하~ 그랬군! 직접 찍은 사진과 겯들인 옛날얘기가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