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七章 태동(胎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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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수림은 안개로 자욱했다.
일 장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안개 바다였다.
밤에는 아름다운 줄 몰랐는데 해가 뜨는지 세상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짙은 갈색을 띈 나무 줄기들이 눈에 들어오자 세상에
동떨어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유소청은 우중충한 습기에 젖은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몸을 풀어야 한다.
그나마 비가 그친 것이 다행이다. 완전히 그친 것인지 잠시
멈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처럼 무지막지하게 폭우가 쏟
아진다면 집무실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했을 터이고, 크게
맘먹은 일을 결행에 옮기기 힘들었으리라.
심공(心功)을 일으켜 몸 속 진기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유가의 심공은 운학심공(雲鶴心功)이라 한다.
결좌부좌(結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 자세로 왼손은
어깨 높이로 하여 수평으로 뻗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활짝 펴
앞으로 내민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이 학으로 변해 구름 속을
노닌다고 생각한다.
- 관(觀)은 진(眞)으로, 진(眞)은 기(氣)로 화(化)한다.
기가 우주를 돌고 돌아 활(活)을 찾고, 활(活)은 영(靈)으로
화해 육신으로 돌아온다.
심공의 제일 관문은 관법(觀法)이니 심상(心象)을 키우고 믿
어라.
유소청의 오른손이 꿈틀거렸다.
다섯 손가락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우아한 날갯짓을 하기 시
작했다.
진기가 전신을 유통하여 피의 흐름을 활발하게 해주고, 정신
을 안정시켜 주고,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린 다음 다시 단전(丹
田)으로 모여들었다.
유소청은 청각(聽覺)을 열어둔 채 운공(運功)에 몰두했다.
"아이구! 깜짝 놀랐네. 이거 산 속에서 사람을 만나니 무섭
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럽니다. 하하!"
"에끼! 이 사람아! 놀라기는 나도 놀랐네. 꼭두새벽부터 어
딜 가는 길이누?"
"가는 길이 아니고 오는 길이죠. 순창(純昌)에서 여모산(黎
母山)을 넘어 보정(保亭)까지 가렵니다."
"그런가? 나는 창화(昌化)에서 여모산을 넘어 회동(會同)으
로 가는 길일세."
짙은 안개에 가려 말을 나누는 두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
았다. 하지만 음성은 또렷이 들렸다.
"걸음을 빨리 해야 될 게야. 산중에서 비를 만나면 난감하
지."
"하하!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합디다.
영기(靈氣)가 서린 여모산인데 설마 비를 피할 곳이 없겠습니
까."
"여모산의 영기는 사흘 동안만 지속된다네."
"폭우는 이틀 동안만 내릴 겁니다."
밀어(密語)다. 우화대원이 나누는 밀어가 틀림없다.
우화대는 워낙 비밀스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서로를 알지 못
한다. 그래서 같은 우화대원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신분을 확인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해남파에서는 밀어에 사용되는 몇 가지 예(例)를 수집해 놓
았다.
날씨를 이야기하며 중간에 날짜를 넣는 것, 생업(生業)을 이
야기하다가 난데없이 출산(出産)이라든가 회갑(回甲) 같은 경
조사(慶弔事)를 말하는 것, 가족과 바다를 연계시키는 화제,
신체와 죽음을 연계시키는 화제……
유소청은 깊게 숨을 고르면서 진기를 거둬들었다.
"산길이 상당히 미끄럽죠? 이거 신발을 새로 샀는데……"
"나도 그렇다네. 새로 사 입은 옷인데 길이 안 좋아서……"
길과 의복.
유소청은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우화대원이었다니……"
"저도 뜻밖입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넓고도 좁은 게 세상
이에요."
두 사내는 신분 확인이 끝나자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
작했다. 그럴 것이다. 아무리 몸조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깊은 산중에, 그것도 이제 막 새벽빛이 몰려드는 시각에 자신
들 외에 다른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리라.
"어느 쪽 일을 맡고 있어요?"
"흑월."
"아!"
젊은 사내 쪽이 짧은 경탄을 터트렸다.
흑월에 대한 풍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해남도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흑월이 얼마나 놀라운 무공을 지녔는지
는 모르지만 우화가 고용한 살수라는 점만으로도 흥분을 일으
키기에는 충분했다. 자신들이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족
인들에게는.
유소청은 앞으로 뛰쳐나가려다 멈칫 섰다.
이들은 그녀도 관심이 많은 흑월에 관해서 대화를 나눈다.
천고일우(千古一遇)의 기회. 우화대원은 한결같이 신념으로 똘
똘 뭉친 사람들이라 고문으로도 얻어내지 못할 정보이지 않은
가. 이렇듯 우연한 기회에 고급 정보를 듣게 될 줄이야.
"흑월이 종적을 감췄다면서요?"
"낸들 아나? 나는 중간 연락만 맡고 있는데. 소식이 두절된
것은 사실인 모양이야. 흑월 때문에 산을 오르내린 게 일곱 번
째라네."
"힘드시겠어요."
"힘들기는…… 다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일인데."
그들의 말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잰걸음으로 걷고 있으리라. 또 잠
시 후면 언제 만났냐는 듯이 낯선 남남이 되어 걸어왔던 길로
돌아가리라.
유소청은 검 자루를 움켜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맥없이 풀렸다.
진기를 바짝 끌어 올려도 손바닥이 끈적거리고,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공이 무너진 탓이다.
검을 휘두르기 전에 마음부터 굳건히 다잡아야 하는데 처참한
비명과 짙게 흩어지는 피보라가 눈앞을 가리니……
'한 번만…… 검 한 번만 휘두르면 끝나. 수련 때처럼 부담
없이 전개하는 거야.'
입술을 잘끈 깨문 유소청은 신법(身法) 양염섬(陽炎閃)을 펼
쳤다.
양염섬은 표홀한 신법이다.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올라가듯이
의념(意念)을 발바닥 밑 용천혈(湧泉穴)에 두고 날아간다는 기
분으로 펼쳐야 한다.
"자네는 언제부터 우화를 따랐나?"
"얼마 안돼요. 한 오 년 되었나?"
"나도 오 년쯤 되었는데. 그럼 우린 얼추 비슷하게 우화를
따른 셈이네."
"정말 그렇네요. 하하!"
"하하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뿐만 아니라 두 사내의 신형(身形)도
확실히 보인다.
일 장 거리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두 사내는 뒤에서 누가 자신들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쒜에엑!
매서운 검풍(劍風)이 공기를 가르고……
그제야 두 사내는 무엇인가 께름칙한 느낌을 받았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화등잔만 하게 부릅떠진 눈, 눈, 눈……
쒜에엑……! 퍼억!
"아악!"
"헉!"
유소청은 일 초식으로 두 사람을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초식이 흐트러졌다. 놀라서 부릅뜬 눈
을 보는 순간, 엄청난 힘이 뒤에서 머리채를 끌어당기는 느낌
을 받았고 손속이 늦춰졌다.
잘려진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느렸다.
시간이 이토록 더디 가는 것일까?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치고, 아직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 머리
는 천천히…… 무척 천천히 떨어져 땅에 곤두박질했다.
유소청은 자신이 얼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음에서 시작한
두려움은 육신을 지나 검까지 딱딱한 바위로 만들었다.
"죽엿! 내가 할까!"
등 뒤에서 쩌렁한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유소청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수습했다.
그래. 어차피 살인을 시작한 것. 저 사내는 죽는다.
쉬익!
유소청의 신법은 한결 부드러웠다.
방금 전처럼 긴장하지 않은 듯 비무대회에서 보여주었던 놀
라운 무공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쒜에엑!
다시 검풍이 피어났다.
"사람 살려! 아아악……!"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란 산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인이 익
힌 신법에는 당적 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재수 없었다.
하필이면 꼭 살인을 해야만 하는 유소청 앞에 모습을 드러냈
으니. 다른 무인에게 발각되었으면 최소한 하루, 이틀쯤은 생
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텐데. 다행일지도 모른다. 고문을 받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고통이 없어졌으니.
유소청은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백치(白痴)처럼 하얗게 비어
져, 생각의 끈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두 사내는 모두 목이 잘렸다.
일검양단(一劍兩斷), 깨끗한 검공이다.
사람의 살은 의외로 질기다고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질긴
것이 사람살이라는 말도 들었다. 검을 잘 갈아놓지 않으면, 검
을 쳐낼 때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깃든다면 단칼에 끊어지지 않
는 것이 목.
두 사내는 죽음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깨달을 틈도, 죽음
에 대한 공포도 느낄 겨를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기분이 어때?"
조금 전, 등 뒤에서 경각심을 일깨워준 목소리가 말을 건네
왔다.
"이게 사람을 죽이는 기분이야. 후후! 해남오지? 개가 물어
갈 소리. 유매, 똑똑히 알아둬. 우리는 앞으로 이십 년 간 인
간백정이 된 거야. 우리 검날에 죽어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후후!"
붉은 피가 안개를 타고 흐른다.
목이 떨어져나간 시신은 무엇이 아쉬운지 손가락을 꿈틀거린
다. 몸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지 무엇이 아쉬워 잔 경련을
끊임없이 일으키는가.
"이런 생각을 해봤지. 무인으로 태어났으되 평생 동안 한 사
람도 죽이지 않고 산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나중에야
알았어.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천하제일인(天下
第一人)이란 걸. 모든 무인들의 꿈, 여망, 환상에 불과한 천하
제일인."
범위였다.
유소청은 범위를 일부러 불렀다.
그가 제시한 조건, 우화대원 두 명을 죽이는 현장을 직접 목
격하라는 뜻에서.
당시만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토록 처참한 기분에 빠지
게 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
은 시신은 자주 보았기에, 자신도 가볍게 일을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가슴이 꽉 막힌 듯 착잡해지는 기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약속대로 비건이 제 일급 관찰 대상자로 선정된다면 관찰자
로 유매를 밀어주겠어.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울리
지 않는 말이지만…… 유매는 비건을 잊지 못했어. 잊은 척 할
뿐이었지. 비건을 만난 다음부터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
어. 알아? 알고 있겠지. 말하고 싶지는 않을 테고. 혹시 비건
과 싸울 일이 생긴다면 그냥 물러서. 검을 뽑는다면…… 비극
이지. 유매가 아니라 내게. 그런 일은…… 휴우! 내가 할게."
말을 마친 범위는 나무둥지에 걸려있는 안개를 실실이 흩트
리며 떠나갔다.
그는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유소청도 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전에는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그것이 모두 적엽명을 아직 잊지 못하기 때문이란 말인가.
그를 만난 그 날 새벽부터 불면(不眠)에 시달리는 것이 모두?
야속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결국 죽고 말 것이라는 냉
정한 생각과 그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모두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란 말인가? 팔 년이나 지났는데? 방심(芳心)이 저지른
풋사랑에 불과했을 뿐인데?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가 제일급 관찰대상자로 선정되었을 경우, 관찰자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피냄새가 역겹게 코를 찌른다.
* * *
"뇌주반도에서 좀처럼 들어오지 않던 황함사귀가 들어왔습니
다. 백석산의 황유귀, 만천강의 수귀, 감은성의 호귀도 움직였
습니다."
가물함 수좌 하파의 음성은 무척 나직하고 단조로워 듣기에
따라서는 권태롭게까지 들렸다.
"사귀?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놈이 기댈 곳이라고는 그
쓰레기들 밖에 없겠지. 불쌍하군. 알아봤나?"
"알아봤습니다. 적엽명은 해남도를 벗어난 직후 적수노인(赤
手老人)이라는 흑도 거물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적수노인?"
"살인청부의 대가입니다. 일 년에 한 건만 청부를 맡는 것으
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죽인 인물도 대단하겠군."
"죽인 인물들보다는 아직까지 활동한다는 사실이 대단합니다.
살수계(殺手界)는 무림과 달라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설혹 목숨을 보존했다 할지라도 무림을
떠나는 것이 그들의 법입니다."
"아직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오십 년 동안입니다."
"오십 명이 죽었겠군."
"적엽명은 최근에까지 적수노인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남만
(南蠻)으로 갔습니다."
"남만?"
"그 후로는 행적이 묘연합니다."
"후후! 하파가 알지 못하는 정보가 있던가?"
하파는 한광의 비웃음을 귓가에 흘려버리며 담담히 말을 이
었다.
"적엽명의 행방이 묘연해짐과 동시에 명부객이란 자가 세상
에 등장했습니다."
돌연 한광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들은 적이 있다.
남만(南蠻) 최고의 살수(殺手).
묘족(苗族)들에게는 죽음의 신으로 군림하는 자.
그는 묘족이 아니다. 한인이다. 그것도 젊은 사람.
한인이 왜 묘족 땅을 밟았고, 살수업을 하는지, 그를 움직이
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은형술(隱形術)이 신기(神技)
에 달했다는 말만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하파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것으로 하파의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적엽명이 명부객이라는 살수?"
하파는 적엽명에 대해서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대답도 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묶은 두루마리 서신을 내놓았다.
"뭐야?"
"연서(連書)입니다."
"연서?"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에게 연서를 받았습니다."
한광은 하파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모습을 관찰했다.
종알종알 잘도 말한다.
늙은이의 입술이라 거무죽죽하고, 메말랐지만 거침없이 종알
대는 입술이 탐났다. 여자가 저렇게 종알댔다면 당장 베어냈을
텐데.
"우화는 명부객을 불렀습니다. 흑월이란 명부객을 지칭하는
말……"
사라진 적엽명, 새롭게 등장한 명부객.
우화가 명부객을 불렀는데 적엽명이 해남도에 나타났다.
"우하하하핫!"
한광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트렸다.
적엽명의 기도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겨우 살수의 기
도란 말인가.
살인 대상자가 허점을 드러낼 때까지 처마 밑에 쭈그려서,
쥐들이 바글대는 대청바닥에 드러누워서, 냄새맡기도 역겨운
뒷간 오물을 뒤집어쓰고 눈만 반짝이고 있는 살수.
적엽명과 살수의 일반적인 모습을 연상하자 터져 나오는 웃음
을 참을 수 없었다.
하파는 한광의 돌발적인 행동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
이 할 말을 담담하게 흘려냈다.
"소공께서 우화대원을 징계하려 하실 때, 적엽명이 '흑월이
란 말은 죽음을 뜻하는 여족인의 흑호'라고 두둔했고, 그들을
비가에 데리고 갔습니다. 흑월, 우화와 연관이 있으니 관찰대
상자로 선정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바다에 투신한 여족인이
'흑월이 유살검 한광의 목을 벨 것이다.'라고 떠들고 다녔더군
요. 소공께서는 이해 당사자이시니 직접 나설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한광은 웃음을 멈추고 호기심 깃든 얼굴로 하파를 바라보았
다.
전자의 말은 사실이지만 후자는 하파가 조작해 낸 말이다.
하지만 연서에는 그런 사실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으리라.
놀라운 일이다.
여족인은 앉으라면 앉고, 누우라면 눕고, 죽으라면 죽는시늉
까지 하는 족속들이지만 동족을 아끼는 마음은 잣대로 잴 수가
없다.
우화에 대한 충성심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에게 우화는 하늘이다. 우화는 땅이고, 식량이다. 우화
는 그들의 전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했기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
였기에.
혈연으로 맺어진 것도 아니고,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얼굴 한 번 본적도 없으면서, 겉으로는 바보같이 헤헤거
리며 순종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하늘을 배신하게 만든 재주는 무엇일까.
그들이…… 우화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간들이 우화가 고용
한 살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우화가 파견한 우화대원들이 무
슨 말을, 무슨 행동을 했는지 연서에 적어?
하파는 보름만에 모든 일을 끝냈다.
연서는 보지 않아도 된다. 연서를 아버지에게 들이밀면 적엽
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하파가 하는 일은 언제나 완벽
하니까.
"지금까지는 죽음의 길입니다."
"……?"
"이대로 진행한다면 적엽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중양절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당장."
"여운이 남는 말 같은데.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이대로 하면 적엽명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제일급 관찰대상자로 선정됨과 동시에 죽게 됩니
다."
"이대로 하면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중양절에 죽이시기를 바란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된다
는 말입니다."
"으음……! 하파…… 알아내지 못했구나."
한광은 신음을 터트렸다.
하파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뒷말을 아
리송하게 했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게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적엽명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파를 동원했는데…… 적엽명의 종적은 중원
천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엽명
이 명부객일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
"……"
한광은 하파를 주시했다.
쭈글쭈글하니 광택을 잃은 피부, 혼탁한 눈, 앞니가 빠져 말
을 할 때마다 보기 싫게 드러나는 잇몸. 번지르한 의복이 아니
다면 다리 밑에서 동냥밥을 얻어먹어도 하등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인물.
저 늙은이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계책이 숨어있을까.
하파의 얄팍한 입술이 다시 움직거렸다.
"흑월이 등장해야 합니다. 해남파 무인들 중 한 명 정도는
죽어야겠죠. 그렇게 되면 적엽명이 흑월이라 할지라도 쉽게 움
직이지 못할 겁니다. 중양절까지는 살릴 수 있는 방책이지요.
제 일급 관찰대상자로 선정된다 하더라도."
"놈이 파랑검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도 중양절까지 기
다려야 하는 이유는?"
"기다리면 두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
한광은 흥미가 생긴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적엽명 촌경. 적엽명은 비가를 밝혀 줄 횃불입니다."
"같잖은 소리!"
하파는 거친 말에도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제가 적엽명이라면 우선 비가를 일으키겠습니다. 그래야 해
남십이가로 인정됩니다. 해남파에 들어설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고, 중양절에 소공과 겨룰 수 있습니다."
"무슨 힘으로."
"말입니다."
"말?"
"적엽명이 뚫고 나갈 길은 말밖에 없습니다. 황담색마. 적엽
명은 황담색마를 찾을 겁니다."
"후후! 어폐(語弊)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황담색마라면
더욱 길이 없지. 비가가 몰락한 뒤로 황담색마는 강성오가에서
가지고 있는 몇 필 밖에 없어.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한 종자
를 얻을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있습니다."
"……?"
"관부에 종모마 세 필이 있습니다. 뇌주반도에 팔려나간 황
담색마를 되살 수도 있습니다. 우화도 황담색마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뜻밖에도 황담색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한광은 호기심이 치미는지 상체를 앞으로 바싹 기울였다.
"황함사귀는 수전노(守錢奴)라고 소문나있는 인간입니다. 그
는 분명 황담색마를 살만한 돈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또 호귀
도 있습니다. 노노가 창기(娼妓)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동전 몇
닢에 불과하지만 호귀라는 인간에게 모였을 때는 큰돈이 됩니
다. 그들이 적엽명에게 모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황담색마를
팔려는 사람만 나타나면 비가는 옛날의 성세를 일으킬 수 있습
니다. 그리고 적엽명이 상귀(商鬼)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
니다."
적엽명의 몸 속에 흐르는 피 중에 절반은 여족인의 피다. 많
이 생각해 줬을 때 그렇다. 육삭둥이이니 아버지가 누군지 모
르고, 아버지 또한 여족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
고 있지만- 적엽명은 분명 여족인이다.
해남파 무인들은 여족의 관습에 비유하여 적엽명에게 귀(鬼)
를 붙여서 불렀다. 상귀라고.
"비가가 몰락한 후, 황담색마의 맥은 끊어졌습니다."
"종부술(種付術)을 모르기 때문 아닌가?"
"이제는 알게 됩니다. 적엽명이 왔으니까요. 비가보에 말에
미친 인간을 심어놨습니다. 그 자라면 종부술을 파악해 낼 겁
니다. 소공께서 황담색마와 종부술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것이
바로 일가(一家). 십이대 해남오지 건곤검 한혁님께서 백 년
만에 태어난 귀재라 하더라도, 해남오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수굴일지라 해도 비가를 얻으면 장문인직은 소공님 차지. 적엽
명은 차후에 죽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파는 죽이라는 말을 할 때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후후! 꿩 먹고 알 먹으란 말이군."
한광은 옷을 툭툭 털었다. 첫눈처럼 새하얀 무복에 먼지라도
앉은 냥. 습관이었다.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한가에서 비가의 종부술까지 얻으면 강중약으로 대변되는
해남십이가의 균형이 무너집니다. 한가가 최정상으로 올라서게
되고 차후로…… 해남파 장문인직을 두고 해남오지들간에 다툼
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재미가 없어진다는 말이군."
"때문에…… 한가에서 종부술을 얻었다는 소식은 가장 늦게
알려져야 합니다. 완벽하게 종부술을 얻은 다음. 그리고 자칫
발목을 잡고 늘어질 수도 있는 비가 일족을 완전히 몰아낸 후
에 말입니다."
"비가가 재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 흑월로 몰아
붙여도 안 됩니다. 숨통만 간신히 붙어있는 상태로."
"세 가지 안배를 동시에 펼칩니다. 먼저 장문인을 움직입니
다."
"후후후! 많이 건방져졌군."
"죄송합니다. 장문인께서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각 세가마다 적엽명에게 혈채(血債)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가를 집적거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일들은 누가 하나?"
"제가 합니다."
"간단하군."
"적엽명과 동조한 네 귀신은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비록 외면 받는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귀자가 붙은 인간들. 막
상 그들을 죽이면 여족인들은 빠른 속도로 우화에 흡수됩니
다."
'마음에 안 들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마음껏 청소할 수
없다니.'
한광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언젠가 해남파 장문인으로 등극하는 날, 실행으로 옮기면 된
다.
"해남도에서 축출하는 선에서 마무리."
'머릿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똑같겠지? 지혜가 뛰어난 인간
이라도 죽으면 똑같아. 역시 육체의 아름다움이야.'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내가 문제입니다. 무인인 것 같은
데 정확한 신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두 놈……"
"비파가 이미 장문인께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하파, 네 정보는 나보다 빠르구나."
한광은 하얗게 웃었다.
하지만 하파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점이 기분 나빴
다. 하파는 언제든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신경질 나게 목숨처럼 값없는 것이 없다는 투로.
"적엽명을 제 일급 관찰 대상자로 선정하시되, 관찰자는 오
진검 범공자님에게 양도하시고 소공께서는 무예 수련에 전념하
시기를. 명부객은 한 번도 꺾이지 않은 무적의 무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무적이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
한 번의 패배가 있지 않은가.
빌어먹을 놈의 패배.
한광은 기분이 무척 나빠져서 의자에 눕다시피 몸을 기댔다.
기분이 한 번 나빠지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피를 보면 좋을 텐데…… 그렇다! 소예를 가졌던 두 번째 사
내, 단대인! 그 자를 잊었다. 소예는 죽었다. 선장 추형도 죽
었다. 단대인이 죽지 않는다면 죽은 영혼만 불쌍하다.
한광은 하파와 말을 더 나누기 싫었다.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힘줄은 불끈 치솟았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백짓장처럼 창백했던 나신(裸身), 움직임이 시간 너머로 사
라진 아름다움, 황홀……
"기회가 좋습니다. 마지막 검을 시험할 상대로 적엽명……
이만하면 마지막 검을 수련하실 생각이 치밀지 않습니까?"
하파는 하얗게 웃었다.
단대인은 약이가 중 단가주의 둘째형이다.
단가는 해남도 색염(色染)을 거머쥐었지만 수요가 많지 않아
가세가 부유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단가 역시 한족이다.
초기, 해남도에 들어온 선조들은 가세가 모두 그만그만했고,
이족(異族)으로부터 목숨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이유도 같아
쉽게 뭉칠 수 있었다.
단가는 염색을 하며 익힌 손놀림을 무공에 접목시켜 쌍검법
을 창안했다.
용봉쌍검(龍鳳雙劍).
수많은 접전을 통해 일 대 일로 싸우는 것보다는 이 대 일로
싸우는 것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인합격술(二人合擊術)
을 한 몸에 지닐 수 없을까 고심하던 끝에 창안해낸 검법이다.
창 과 창이라면 창대가 길수록 유리하다. 검 대 검이라면 검
하나보다는 두 개가 좋다.
생각은 간단했다. 하지만 검 두 개를 한 몸에 지니기 위해서
는 수많은 시행착오(施行錯誤)를 거듭해야 했다. 어설픈 검법
때문에 죽어간 사람이 얼마인지.
다행스럽게도 단가 식솔들이 주업(主業)으로 택한 염색은 막
대기 두 개를 필요로 한다. 염료에 천을 담고 휘저을 때도, 건
져낼 때도, 천을 쫙 펴서 말릴 때도.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용봉쌍검은 해남파 절기 중 하나
가 되었다. 비록 비가의 일장검법, 강가의 잔월검법과 함께 약
삼가로 분류된 검법이기는 하지만 세상 이치는 만류귀종(萬流
歸終)이라, 숙련도에 따라서는 상대하기가 극히 난해한 검법이
었다.
단가주 단적(段積)은 용봉쌍검을 극성으로 익혀 역대 가주
중 제일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단가주의 둘째형인 단성(段星)
도 과거 해남오지에 강력하게 도전했던 인물이다.
단성은 실종된 지 이틀만에 단가보 뒷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피살(被殺)이었다.
흉수는 극히 깨끗하고 정교한 무공을 지닌 듯 수리도(手裡
刀) 한 자루를 정확히 심장에 틀어박았다.
고양이 두 마리도 죽었다.
단성은 고양이 두 마리를 친자식 마냥 애지중지 했다. 백설
처럼 하얀 털을 가진 암컷과 흑오석(黑烏石)처럼 까만 털에 윤
기가 자르르 흐르던 수컷.
두 마리의 고양이는 주인을 따라 심장에 각기 하나씩의 수리
도를 박고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사인(死因)이 너무 깨끗하고 단순해서 무공의 종류 및 정도를
알아낼 수 없었다. 단서라고는 오직 하나, 흉수가 자신이라고
알리기라도 하듯이 시신 곁에 떨어져 있던 마분지(馬糞紙) 한
장이 고작이었다.
마분지에는 숯으로 그린 검은 달 하나가 둥그렇게 그려져 있
었다.
흑월.
흑월의 존재는 적엽명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들불 번지듯 퍼
졌으며, 해남 십일가는 각기 나름대로 대비책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들은 무공을 오성(五成)도 채 못 익힌
무인들. 그들은 살수 대상으로 가장 적합했다.
몰랐다. 흑월이 단성을 죽일 만큼 고절한 무공을 지녔을 줄
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