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인데 스키 타러 일본 간다고? 거긴 아직도 스키 탈 만큼 눈이 있단 말이에요?”
스키를 타러 간다 하니 놀라며 묻는 질문이 한결같다. 개나리, 진달래도 시들고 남도는 아카시 꽃향기로 초여름을 알리는 5월. 푸르른 녹음이 한창이다. “다테야마 눈의 대계곡에 쌓인 눈이 15~20m 가까이 된다”고 대답해도, 못 믿겠다는 반응이다.
다테야마(立山)는 겨우내 쌓이는 엄청난 폭설 때문에 3~4월에 산길을 내고 제설차로 정비하면 길 양편으로 거대한 눈 벽이 형성된다. 이 눈길은 4월 16일부터 11월 24일까지 개방된다. 다테야마는 도야마현과 나가노현을 동서로 가르는 88.7km의 산악 관광 루트인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로 유명하다.
히다산맥을 북알프스라고 하며 산맥길이는 105km로 기후현, 도야마현, 나가노현에 걸쳐 있다. 히다산맥 최고봉은 오쿠호다카다케(3,190m)이며 다테야마는 오야마(3,003m), 오난지야마(3,015m), 후지노오리다테(2,999m)의 3개 연봉을 말한다. 병풍처럼 펼쳐진 능선의 다테야마 3산은 죠도산(2,831m), 오야마(3,003m), 벳산(2,880m)이다. 여기서 다테야마가 중부산악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산이다.
- ▲ 오야마 정상에서 활강하는 박용철씨. 무로도 평원의 온천장 일대와 멀리 츠루기다케(2,999m)가 보인다.
봄 스키의 기대감 가득
필자는 2004년 1월, 대학 졸업등반으로 산악부 YB 5명과 북알프스 최고봉 오쿠호다카다케를 종주했다. 매일 설동을 파며 10일 동안 겨울의 능선에 있었다. 폭설과 능선의 칼바람에 고립되어 일정이 늦어져 3개의 현에서 구조 헬기가 떴다. 자력 탈출을 하며 2명이 손과 발, 코에 심한 동상을 입었고 약지 손가락 한마디를 절단했다.
어떤 이들은 동계 북알프스를 히말라야 레벨이라고 한다. 계곡으로 탈출하는 우리의 위치를 헬기로 파악한 산악경찰들은 산악스키를 이용해 우리가 하산하는 곳으로 러셀을 하며 올라왔다. 등산교재에서만 보던 산악스키를 그때 처음 봤다. 1년의 절반 이상, 6월까지 스키와 보드를 들고 산을 올라 700m 가까이 활강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다. 그때는 스키로 러셀하는 것이 굉장히 앞선 선진국 문화로 느껴졌다. 당시 우리 일행은 그 모습이 너무 신기했고, 깊이 고마웠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과 주말, 그리고 어린이 날, 5월 4일 샌드위치데이로 연차를 받아 4박 5일 일정으로 북알프스 산악스키에 도전했다. 강정국 대한산악연맹 산악스키 위원이 배낭여행 형태로 모집한 동호인 행렬에 나도 발을 밀어 넣었다. 겨울이면 주말마다 용평스키장에서 스키 업힐을 하며 만난 분들이다. 9명 중 울산에서 온 우은주 선생님과 나만 여자다.
- ▲ 1 15~20m 높이로 쌓인 눈의 대계곡. 2 능선의 라이초자와 휘테 산장. 눈 블록으로 만든 테이블에서 아침밥을 먹는다.
다이내믹하고 많은 체력을 요하는 산악스키지만, 아쉽게도 국내엔 젊은 층도, 여자도 거의 없다. 뒷받침되는 자연환경도 없고 겨울도 짧아 그런 것 같다. 근래에 엔화 약세로 일본행이 많이 저렴해졌다. 출국 땐 100엔당 920원에 환전했는데 들어오는 날은 820원이었다. 나의 일본행 티켓은 지난겨울에 탄 산악스키대회 상금과 두 번의 산악스키 강습비다. 원전 방사능의 불쾌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봄 스키의 기대감을 가득 담은 배낭을 멘다.
인천에서 두 시간 비행 후 도야마에 도착하니 산악스키 대회로 교류를 맺어온 야마다상이 마중 나왔다. 지난 1월 묘코에 왔을 때도 함께 스키로 산을 오른 바 있다. 일행 중 2명은 야마다의 차량으로 식량과 가스를 구입하러 도야마시내로 갔다. 나머지 7명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테야마역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우리의 베이스캠프인 라이초자와 휘테 캠프장까지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공항셔틀버스로 도야마역에 내려 지방철도를 타고 다테야마역(475m)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7분 만에 비조다이라(977m)에 도착, 전기차로 운행되는 고원버스를 갈아타고 한 시간을 이동해 무로도터미널(2,450m)에 내렸다. 여기서 눈밭 위를 한 시간 넘게 걸어 캠프장에 도착하니 해가 저문다. 산장시설을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야영 일정이라 카고백이 한 가득이다.
온천 주변엔 유황연기가 펄펄 끓고 매캐한 연기에 목구멍이 간질거린다. 몇 명은 남아서 텐트 치고 밥을 하고 몇 명은 남은 짐을 받으러 되돌아갔다. 10명이 누워도 넉넉한 텐트는 100동이 넘는 텐트 중 가장 크다. 1인용 텐트도 6동이나 쳤다. 야영비는 1인에 500엔이다. 식수는 산장에서 24시간 콸콸 쏟아졌고, 화장실도 깨끗하고 시원한 수세식이다. 근처 산장에서 온천(600엔)도 가능하다.
- ▲ 3 며칠 전 큰비가 내려 생긴 물골 자국 위로 줄지어 스키 업힐 중인 행렬.
유황 냄새 가득한 캠프장의 밤
고양시청 앞에서 국수집을 하는 정만 선배는 음식 대접하기를 즐긴다. 용평의 스키 시즌 때도 그렇고 산에서도 마찬가지다. 압력밥솥에 밥을 두 번이나 지어 내놓은 생선초밥에 야마다상도 놀란다. 다섯 살과 10개월 된 아들을 둔 야마다는 결혼 후 야영을 해 본적이 없다며 무척 즐거워한다. 밤 10시도 안 되었는데 야영장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 텐트의 불도 거의 꺼져 있어 분위기상 우리도 일찍 잠자리를 폈다. 텐트 안에 유황을 피워 놓은 것처럼 냄새가 가득한데 환기를 시킬 수 없다.
새벽 5시가 되니 밖이 밝아 온다. 6시인데 사람들이 벌써 산 중턱에 올라섰다. 스키나 설피 없이 아이젠으로 오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밤엔 0℃지만, 복사열 때문에 한낮의 기온은 20℃를 웃돈다. 도야마 시내와 같은 기온이라 낮엔 눈이 푹푹 빠져서 힘이 들 것이다.
눈블록으로 만든 테이블에서 아침밥을 먹으며 어디로 오를 것인지 의논한다. 처음이니 좀 완만하며 긴 슬로프를 고른다. 마사고다케(2,861m) 안부의 산장까지 올랐다. 바람도 구름도 없이 맑은 하늘이다. 뒤돌아본 야영장으로 많은 인파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일본도 황금연휴라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았다. 생각보다 업힐 경사가 가파르다. 도쿄 인근의 가나가와에서 왔다는 젊은 스키어들은 배낭에 피켈과 스키 아이젠도 달았다. 산장까지 한 시간 반이 걸렸다.
- ▲ 4 오야마 정상 위로 떠오른 달빛 어린 설원. 5 업힐 후 휴식하며 플레이트에 붙인 실을 말린다. 햇빛이 일하는 시간이다.
산장 뒤편으로 가니 츠루기다케(劒岳·2,999m)의 벽이 가깝게 보인다. 야마다상이 검(劒)의 모양을 닮은 산이라고 알려 준다. 나이프(Knife)는 아닌데 여하튼 ‘칼’의 모양이란다. 남은 일행이 도착하길 기다리며 양말도 벗고 실(seal : 산을 거슬러 올라갈 때 스키가 뒤로 밀리지 않도록 플레이트 바닥에 붙이는 장비)도 말린다.
갈증과 더위를 날려 준 것은 이어지는 스킹이었다. 실을 떼어 배낭에 넣고 부츠를 고정하고 다운힐을 준비한다. 며칠 전 큰비가 내려 설원 위엔 머리 빗이 쓸고 간 듯 물골자국이 생겼다. 한 턴, 두 턴, 세 턴을 감아 돌고 나니 신이 난다.
하루 두 번 산을 오른 만족감
야영장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오후엔 오야마산(3,003m)으로 향했다. 이치노코시까지 스키로 업힐하고,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눈이 없어 스키를 메고 걸었다. 정상에 서니 멀리 가미고지와 오쿠호다카다케가 보인다. 가시거리가 좋은 날은 후지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정상의 오야마신사(雄山神社峰本社)에서 기념 촬영 후 다운힐 준비를 한다.
야마다는 “내년에 만나자”며 마지막 4시 30분 버스를 타기 위해 무로도 터미널로 바로 내려갔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쿨와르는 최상급 슬로프의 경사도였다. 거기에 베이스캠프까지 뚝 떨어지는 고도감이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턴의 시작을 위해 경사면을 향해 수직으로 몸을 던져내는 한 번의 용기, 긴 쉼 호흡, 심장의 쿵쾅거림이 좋다. 동해바다까지 겹겹인 산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다운힐 하는 모습이 그림이다.
- ▲ 6 간혹 크레바스가 나타나므로 다운할 때 주의해야 한다.
멀리 야영장의 알록달록한 텐트들이 과일맛 사탕을 한 움쿰 눈밭에 뿌려 놓은 것 같다. 걸어서 내려가면 올라오는 것과 비슷한 시간일 텐데 쉬고 기다리며 내려가도 30분이 안 걸린다.
종일 흘린 땀을 씻으러 온천에 갔다. 오래된 공중목욕탕처럼 생겼지만 창문을 열면 다테야마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1,000엔을 들고 가 온천사용료(600엔)를 내고 남은 400엔으로 캔 맥주 한 캔을 샀다. 만 원의 행복이라고 해야 하나? 오전·오후 두 번이나 산을 오른 만족감도 느끼고 온천으로 피로회복을 하니 긴 하루의 마무리가 상쾌하다.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깎아 만든 식탁에 둘러 앉아 낮 동안의 무용담을 나눈다.
“하하! 호호!”
- ▲ 스노보더들은 설피를 신거나 걸어서 산을 올라가 보드로 활강한다.
옥수수알갱이가 깨드득 거린다. 다테야마의 능선 위에 달이 떠올랐다. 내일이 보름인데 오늘도 충분히 빛이 가득하다. 차고 교교한 달빛이 아름다운 산등성이의 사선을 따라 강처럼 흘러내린다. 눈밭에 반사된 달빛에 밤하늘의 반짝임들이 숨죽인다.
달빛에 야영장은 술렁였다. 각자 다른 살림살이들이 흥미롭다. 서쪽으로 기우는 달빛이 걸음을 재촉한다. 랜턴 없이 눈밭을 걸었다. 텐트 앞과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는 달빛은 다른 느낌이다. 캠프사이트를 벗어나니 소곤거리는 사람 소리와 산짐승 소리가 들린다. 관찰자가 된 기분이 재미있다. 이렇게 멋진 밤에 텐트에만 있는 것은 큰 손해다. 잠들기 아까운 밤, 너무 아름다운 밤이다.
설원에서의 둘째 날은 오야마 정상으로 바로 직등했다. 상단부는 너무 가팔라 스키를 배낭에 메고 걸었다. 어제 오후에 내려선 길, 오늘 오른 길과 같은 길로 내려섰다. 다테야마의 3산 능선 종주는 하지 않았다. 능선엔 눈이 없어 스키를 배낭에 메고 걸어야 했다. 날씨가 좋아 능선의 풍광이 멋졌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든다. 다시 이곳에 오게 될 것이다. 알프스를 빼어 닮은 이 나라의 드넓은 설원이 부럽다.
- ▲ 오야마 정상에서 본 북알프스 파노라마. 좌측에 최고봉 오쿠호다카다케 (3,190m)가 보인다. 좌측부터 이경우, 박용철, 정만, 우은주, 강정국, 김갑목, 김영미.
눈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기분
캠프장에 도착해 점심을 먹는데 정상에서 만났던 요코하마 대학산악부 일행이 찾아왔다. 졸업생과 재학생 3명이다. 다음날 철수해야 해서 남은 식량을 줬더니 텐트로 달려가, 라면 한 봉지로 화답한다. 짓궂게 “이거 말고 다른 걸 가져오라”고 했더니, 고민하던 막내는 미소된장 한 봉지를 들고 왔다. 최소비용의 소박한 살림살이가 우리 대학산악부와 닮아 깊은 공감이 일었다. 정만 선배가 음식을 더 얹어 줬더니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른다. 다음날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데 술안주도 없어 텐트에서 뭘 해야 하나 걱정했다고 한다. 다음에 다시 산에서 만나게 되기를 기약했다.
넷째 날 새벽 4시 40분부터 빗방울이 후드득 텐트를 치며 아침잠을 깨운다. 전날 저녁 먹다 남은 밥을 끓여 아침식사를 해치우고 철수 준비를 마치니 오전 6시가 되지 않았다. 부슬비가 추적거리고 안개가 가득해 유황냄새가 더 진해졌다.
무로도터미널에 도착해 구석에서 젖은 옷가지와 장비를 정리하고 버스에 탑승한다. 설원엔 안개가 가득 찼는데 멀리 동해바다까지 경치가 훤하다.
여러 가지 교통수단을 이용해 다시 도야마 시내에 내려섰다. 9명의 일행들은 유황냄새가 밴 옷을 입은 채 강가 벤치에 앉았다. 강둑의 벚꽃나무는 초록 잎이 무성하다. 멀리 구름에 가려진 설산의 다테야마를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5월에 만나는 봄, 여름, 겨울이 어리둥절하다.
지난 1월, 묘코에 다녀간 후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 수상작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아직도 가방에 넣고 다닌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5월의 봄 스키를 끝내니 이제야 차갑게 가라앉은 적요한 눈의 고장에서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