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창작 강의노트 (6)> C 어떻게 쓰는가 ― 송기숙의 <칠일야화>
소설을 ‘어떻게 쓰는가’와 관련하여 기성 작가들의 설명을 듣는다.
작가 자신의 작품 중 한 편을 택하여 그 창작 과정에 대한 직접 설명한 것을 읽다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어떻게 쓰는가’의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대상 작품을 찾아 읽고 설명을 읽기를 권한다.
소설 창작 과정 (3)
결말부터 떠오른 영감, 그리고 정확한 자료 조사
― 송기숙의 <칠일야화>
송 기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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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보듯이 종합학술조사단의 일원으로 조사를 나갔다가 오랜만에 그곳 사람들의 질박한 정서와 생활에 젖다보니 돌아오는 선상에서 여러 가지로 감회가 뒤얽혔다. 유독 마지막날 밤 이야기꾼을 여관으로 데려와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설쳤던 내 꼴이 떠올랐다. 마음씨 좋은 그이가 돌아가면서 나더러 무어라 했을까, 혼자 쓴웃음 웃고 있다가 언뜻 그이가 했을 법한 말이 떠올랐다. 순간 그 말을 소설의 결말로 삼으면 재미있는 소설이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소설 전체의 구성까지 잡혔다.
며칠 동안 다니면서 실감했던 일들을 정리하면 경제 개발의 음지인 농촌의 세태를 어지간히 들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도시와 농촌간의 불균형 발전에서 농민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이며, 공무원을 포함한 지배계층과 도시인들에 대한 불신 등, 구체적인 사례들로 가시 찌르듯 아프게 다가오며 소설의 구성이 잡혀갔다. 제목도 <천일야화>를 본떠 <칠일야화>로 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 수집해온 설화는 내던져 놓고 소설부터 쓰기 시작했다. 칠일 동안 겪었던 일들이 일곱 가지 이야기로 어렵지 않게 꾸며졌다. 그 뒤 개작을 두 번했는데 한번은 작품집에 실으면서 이야기 한 대목을 바꿔넣었고, 그 다음에도 다른 데 실으면서 문장을 손봤다.
진도는 ‘진도아리랑’이나 ‘진도씻김굿’ 같은 것에서 보듯이 이 섬 하나가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민중문화의 보고라 할만한 곳인데, 그곳 도깨비굿은 이산가족 문제를 다룬 중편 「어머니의 깃발」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도깨비굿은 직접 볼 기회는 없었지만 조사 때의 현장 체험이 그 굿을 묘사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칠일야화」는 며칠간의 체험이 바탕이 된 것인데, 작가들은 현장 조사를 해야 할 때가 많으므로 현지 조사에 대한 내 경험을 몇 가지 이야기하려 한다.
역사소설처럼 현장이 있는 소설이나, 작품 배경이 구체적인 모델이 있는 경우는 현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사건이 새로운 각도에서 보이기도 하고 사건 전개의 새로운 모티프를 얻기도 한다. 두 번 갔을 때가 다르고 세 번 갔을 때가 다르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조사를 나갈 때는 미리 기초 자료를 널리 모아 익히는 등 준비를 튼튼히 해야 제대로 보인다. 기초 지식이 없거나 준비 없이 현장에 가면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겉모습만 훑게 된다. 매사가 그렇지만 이런 데서도 준비한 만큼만 보인다.
이 소설에서 농협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전부터 당시 농협의 실상을 상당히 깊이 알고 있는 편이었다. 말만 협동조합이지 박정희 정권 때 제정한 ‘임시조치법’이라는 악법에 묶여 조합원들이 조합장이나 이사를 선출하지 못하고 관에서 임명했기 때문에 농민들이 조합의 주인 행세는커녕 농협직원들한테 저 아래서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고, 농협은 농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농민을 수탈하는 기구가 되어 있었다. 일테면 당시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우리 나라는 비료 수출국이면서도 우리 농민들이 사는 비료값은 수입하는 나라 농민들이 사는 비료값의 두 배였다. 수출경쟁을 하느라 생산비보다 더 싸게 수출을 하도록 하고 정부는 그 손해만큼을 우리 농민들의 비료값에 얹어버렸던 것이다. 그게 수출보상금이라는 것인데 농협은 그걸 시정하려는 노력은커녕 그런 수탈의 하수인 노릇만 하고 있었다. 소설에 나온 그 부분 대화는 물론 픽션이지만 확실한 사실들에 근거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쓸 수 있었고 리얼리티라면 일정하게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었다.
어촌계 이야기는 또 다른 수탈의 현장이었다. 그런 섬은 음지 중에서도 음지였는데 이럴 경우 그들에게 국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개탄이 앞섰다. 당시 근대화는 경제개발의 명분이었으나 이런 섬들은 근대화는커녕 식민지시대 일본 사람들이 손댔던 근대화 정책이 중단된 상태에서 국가는 전에 없었던 입어료란 것만 챙겨 농민들한테는 근대화 이전보다 되레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일본 총독부가 논밭 경계를 정확히 조사하여 토지 소유권을 정확히 하려고 1909년부터 토지조사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어업 소유권을 확정하려고 기초조사를 했던 모양인데, 섬사람들은 소유권을 이전해올 몫돈이 없어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다. 사실은 섬사람들한테는 거기 있는 섬을 누가 떠메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섬사람들이 침범하는 것도 아니므로 그들에게는 소유권이란 게 무의미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여서 사실대로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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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편 <녹두장군>을 쓰면서는 현장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는데 그 사이 여러 가지 요령이라면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경우도 있다. <녹두장군>의 경우 전봉준 장군의 아버지가 농민들의 앞장을 서서 등장, 요사이 말로는 탄원서를 냈다가 곤장을 맞아 장독으로 죽었는데 죽은 시기가 3 월설과 6 월설로 대립되어 있다. 이 사실은 전봉준 장군이 봉기에 앞장선 원인과 관련지어 생각할 경우 중요한 쟁점이 되는데, 나는 그런 사감이 전봉준 장군의 그런 결단에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는 보지 않는 편이라 그 사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현장에서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3 월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방증 자료를 얻었다. 전봉준 생가가 있는 이웃 동네서 조사를 할 때였다.
“전봉준 아버지 탈상 때는 부조가 산더미만큼 쌓였는데 이 동네 아무개 할머니는 하도 가난해서 부조를 가재도 가지고 갈 것이 없어서 파 한 다발을 뽑아 들고 부조를 갔더라요. 깔깔.”
나는 파 한 다발이란 말에 귀가 번쩍했다. 파를 뽑아서 다발로 들고 갈 수 있는 절기는 초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음력 유월은 대개 양력으로 7월이며 그때 파는 씨로 갈무리되어 처마 밑에 걸려 있을 때다. 부조의 양이 집더미가 산더미로 과장 될 수는 있겠지만 쑥갓이나 가지 따위가 파로 바뀔 수는 없을 터이다. 이런 경우는 내가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좀 전문적인 경우는 준비가 부실하면 사실 여부나 과장 여부를 알 수가 없고, 문헌에서 읽은 이야기인지 전해 내려온 이야기인지도 구별할 수가 없다.
역사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을 철저하게 섭렵해야 하고, 사건의 역사적인 의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기 관점을 지녀야하는데 내가 <녹두장군>을 쓸 때만 하더라도 이 방면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사건 자체에 대한 정리마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상태였다. 문헌만 보고 현장에 가보면 문헌에 있는 지명이 아예 없는 경우가 있고, 특히 전투현장에 대한 기술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현장 조사를 통해서 정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노력하면 웬만큼 해결할 수 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하나 나타났다. 백산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황토재싸움에서 감영군을 격파하고 황룡강싸움에서는 조정군을 물리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전주성에 입성했다. 그런데 백산봉기 때 만 명에 가깝던 농민군이 전주 입성 때는 수가 되레 줄어들었다. 한달 사이에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그 동안 병력 손실이 다소 있었지만 충천하는 사기로 보아 몇 배로 불어났어야 할 농민군이 되레 줄어든 것이다. 더구나 그런 농민군이 입성한지 보름 쯤 뒤에는 관군과 화약을 맺고 해산해버린다. 화약을 맺은 데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가 출동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개입의 명분을 주지않으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농민군들의 수가 줄어든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문헌을 뒤져도 우선 수가 줄어든 까닭을 알 수 없었고, 화약을 맺더라도 그렇게 쉽게 응해버린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논문에서는 사실만 기술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소설은 글자 그대로 픽션이지만 인과관계가 생명이라 이런 부분은 논문보다 엄격할 수밖에 없다.
문헌자료를 수없이 뒤지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우연히 백산에서 봉기한 날자(양력 4월 30일) 무렵에 현장에 갔더니 들판에 보리가 피고 있었다. 바로 이거구나, 나는 혼자 무릎을 쳤다. 보리가 피고 있을 때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보릿고개 절정기였다. 그때는 웬만한 집에는 식량이 떨어져 사람들은 얼굴이 누렇게 뜰 지경이었다. 그런데 농민군들은 관곡을 빼앗아다가 제대로 밥을 먹었다. 농민군에 나가면 관에 대한 분풀이도 할 수 있고 배가 터지게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달 뒤는 사정이 또 달랐다. 그때는 보리가 익어 집에서도 밥을 먹을 수 있고, 보리타작에 모내기에 농사일이 천장만장이었다. 농민군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고, 나갔던 사람들도 빠져나갔을 건 뻔한 일이었다. 의기야 충천했겠지만 생활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농민군들은 모두 가난한 밑바닥 농민들이므로 대부분의 가족 구조는 자신을 중심으로 늙은 부모와 처자식이었다. 보리베기와 보리타작은 농사일 가운데서도 가장 고된 일인데다가 일이 시각을 다툰다. 그 무렵은 비가 자주 올 때라 보리를 베어 놓고 사흘만 비를 맞히면 싹이 나버리고, 보리를 집으로 나르고 도리깨로 타작하는 일은 노인들이나 여자들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 그 판에 집안의 기둥이 빠져나와버렸으니 다 지어놓은 보리 농사를 망칠 판이었다. 하늘에 구름만 끼여도 집안일 걱정에 좀이 쑤셨을 것이다.
농민군들은 정규군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나온 의군들이라 제 발로 돌아가면 지도부는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농민군이 관군의 화약 제의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때가 농사철이었기 때문이었다는 내 설명은 그 뒤 학계에서도 채택되었다. 이차 봉기를 눈발이 날리는 11월에 했던 것도 농사철을 피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이름 모를 산새니, 이름 모를 꽃들이니 하는 표현을 더러 쓰는데 일반 사람들의 가벼운 수필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런 표현은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 있는 새들은 텃새에다 철새를 합쳐도 보통사람들 눈에 띄는 새는 50가지 남짓이고 꽃이나 나무도 그 정도이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은 산을 좋아해서 호도 요산인데 그 분은 등산을 갔다가 이름을 모르는 나무나 꽃이 보이면 반드시 꺾어다가 이름을 알아냈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산에 다녀오면 방안에 나무와 풀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
- 이병렬 외 엮음,<소설, 나는 이렇게 썼다>,평민사,1999.10) 중에서
[출처] <소설창작 강의노트 (6)> C 어떻게 쓰는가 ― 송기숙의 <칠일야화>|작성자 이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