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군 함평이씨와 함풍이씨의 시조 묘(두 이씨는 남남인가?)
1. 함평(咸平)이씨와 함풍(咸風)이씨
* 함평이씨는 이언(李彦)을 시조로 삼는데 대하여 함풍이씨는 이광봉(李光逢)을 시조로 한다. 현재의 함평군은 신라말과 고려때 함풍현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때 함평현으로 개편되었다. 함평(咸平)이씨는 13만8천명, 함풍(咸豐)이씨는 1만8천명이다. 이씨(兩李)들 주장에 의하면, 같은 혈족이지만 서로가 자기들의 始祖가 옳다는 것이다. 시조묘를 간산하고 족보분쟁을 간략하게 본다.
2. 함평이씨시조 이언 묘(함평 李의 주장 자료에 근거함)
* 시조 이언은 고려초 신무위대장군을 지냈으므로 900년~960년경 생존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려는 918년건국, 936년 후삼국통일, 1392년 멸망). 시조로부터 4대까지 대장군을 역임하였고 이조때에도 무과급제자가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많고 근자에도 육해공군에 장성이 배출되었고 국회의원이 13명 배출되었다. 강골의 혈통이다.
* 시조묘는 함평 성남리793-3에 있는데 오랫동안 실묘하였다가 1811년(순조11년) 후손인 이익서가 함평현감으로 부임하고 보니 현지 이씨들이 이 묘에 대하여 시조묘로 제사지내고 있었다. 수차 조사하였으나 묘지석과 같은 물증을 차지 못였지만 현지 상황에 비추어 시조묘로 확정지었고 묘소를 정비하였다.
* 이언묘의 래룡---
* 이언묘 中局-- 다수는 仙鶴下田形이라고 하나 私見으로 청룡 백호가 태극으로 둘러 싼 모습이 작약꽃술 같다
* 시조 이언 묘---낮고 넓게 장유로 내려 왔는데 미미하게 솟은 곳에 정확히 재혈하였다. 상등초급 대혈이다.
3. 함풍이씨시조 이광봉 묘(함풍 李주장자료에 의함)
* 시조 이광봉(李光逢)은 고려 충렬왕(고려26代 왕) 때인 1275년 출사(出仕 벼슬에 나아가다)하여 충렬, 충선, 충숙왕을 모셨고 충선 충숙왕이 원나라 간섭으로 곤경에 처하자 원나라를 오가면서 진력하여 도왔다.(이제현도 同時代에 원나라에서 활약) 그 공으로 충선왕때(1325년)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에 봉하여 졌다.
* 나는 원래 함평이씨 시조묘를 간산할 계획이고 함풍이씨는 전혀 알지 못했는데 네비로 이언묘소를 찍고 가는 도중에 시골길 옆에 함풍이씨 시조묘 표지석이 있어서 찾아들어 갔다. 재실 앞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원래 금성산에 시조묘와 아들 이연(李延)묘가 있었으나 실묘하고 오랫 동안 봉제사를 하지 못하다가 1963년 후손들이 시조의 3세손 안저, 안상의 묘역(함평 만흥리217-14)에 제단을 설치하고 1988년 금성산 흙을 떠와서 시조묘를 초혼장으로 만들었다.”는 연역이 적혀 있었다. 금반같은 넓은 묘역, 가까운 청룡안, 저멀리 힘찬 一字文星이 일품이다. 묘역 중앙에 있는 묘 옆이 가장 기운찼다. 중등상급대혈이다.
* 이광봉시조 묘역---
* 조안산----가까운 안산과 조산이 일품이다.
4. 兩李씨의 관계
* 해묵은 논쟁이고 그분들 사이엔 심각한 문제이므로 가까이 하기가 조심스럽지만 간략하게 제3자의 눈으로 본다. 함평이씨들의 논거는 ①1688년(무진)족보에 시조가 이언이고 4세손 이순지의 둘째 아들이 이광봉(첫째 아들이 李琳)으로 등재되어 있다. 즉 함풍이씨들이 시조라고 모시는 이광봉은 시조 이언의 5세손이다. ②이언의 묘소부근에 이씨들이 살고 있었는데(함평이씨 발상지 탑이 있다) 이언 묘를 시조묘로 관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함풍이씨들의 논거는 ①무진년 족보는 시조와 5세손까지 생몰연도가 모순되어 신빙성이 없다. ②함풍이씨에게는 1400년대에 작성된 고유한 족보가 있었는데 1545년 전라도사 이춘령이 빌려가고는 반환하지 아니하던중 무진보가 출현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양양부사 이장영이 1587년 고유족보를 등사한 기록이 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이광봉이 시조로 등재되어 있고(註; 시조 이광봉이 1300년대초기까지 생존하였으므로 4대 후손까지 등재되어 있을 것이다) 함평시조 이언에 대한 언급은 없다. ③현재의 이언묘소는 발굴시 송씨비석이 출토되었다. 다시말하면 송씨 묘이다.
* 아마도 1545년 이춘령이 고유족보를 빌려 갔다면 양이씨는 같은 혈족으로 서로 래왕이 있었고 그 무렵에도 시조에 관한 시비가 있지 않았을가 생각된다. 천년전의 上系에 관한 家系와 생몰연도가 헷갈리는 것은 여러 성씨에서 있는 일이고, 이언의 묘소를 정화할 때 부근에서 송씨비석이 출토되어도 이상할 것 없다. 그 사실로 일대전체가 송씨묘역이라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살던 부근의 이씨들이 이언의 묘를 근거 없이 시조묘로 알고 관리하였을 리 없다.
* ①이언은 900년대에 살았던 인물임에 대하여 이광봉은 1300년대 초에 살았다. ②무엇보다 함평이씨는 13만명임에 대하여 함풍이씨는 1만3천명에 불과하다.
* 함풍이씨의 주장에 의하여도 시조 이광봉은 아들 이연과 함께 실묘하였고 손자 이안저 이안상은 묘관리가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兩李씨의 공통 선조가 이광봉이라면 저 많은 함평이씨들이 이안저와 이안상 형제의 후손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 안된다. 결국 咸豊이씨들의 시조가 이광봉이라는데 이의가 없으나 그가 咸平이씨의 시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이광봉이 이언의 후손인가(함풍은 함평의 支派라는 말이 된다), 이언말고 다른 공통 선조가 있는가(본을 달리하는 혈족이다), 공통선조가 아예 없는가(서로 남남이다)라는 문제에 귀착된다. 영월신씨는 영산 신씨시조의 9세손이 분리되어 나오면서 본관을 영월로 창설하였고 정씨들은 도시조(統合시조)지백호에서 120여개의 본관을 달리하는 정씨로 분리되었다. 한산이씨는 시조이윤경의 上系를 알지 못하는 바람에 한산지방에 살던 이씨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상계를 알지 못하여도 명문거족이 되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2023. 6)
첫댓글 본은 지명을 따서 붙이는것이라면 역사적으로 함평과 함풍이
같은 지역인데..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읍니다.. 두가문에
대해서 글을 통해 상세하게 밝혀 주시니 고맙습니다..^^ ^^ ^^
지금 추세로는 함평이씨는 답답할 것 없다고 느긋한 듯 보이고, 함풍이씨는 한번 누구 족보가 옳은지 따져보자는 태도인데 아무래도 다수가 큰소리치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