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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리(새미실)
이 미 화
작두산 이 골 저 골짝에서 발원된 물이 금방 솟아난 것처럼 시원했다. 물은 서로 모여 쉬지 않고 아래로 흘러 논을 채워서 연년이 풍년이었다. 실개천 따라 나이어린 버드나무 가지가 새미실 입구까지 봄의 천사처럼 휘이휘이 춤을 추는 곳 그곳이 미천리였다.
평야를 가로지르듯 사계가 뚜렷한 미루나무가 펼쳐진 내 기억 속 신작로, 언제나 바람결에 부딪히는 잎새소리 다정한 봄이었던 것도 같고, 때로는 매미소리 진동하는 통에 허기졌던 여름 같기도 하다. 어쩌면 코스모스 하늘거리고 하늘 높은 가을만 있었던 것도 같이 아물거린다. 발등까지 올라오는 눈을 밟으며 학교 가던 길은 집으로 뒤돌아 가고 싶었던 혹한에 겨울도 꿈속같이 녹아서 아련하다. 책보를 허리에 차고 오리 길을 걸어 다닐 때 가끔씩 차가 지나가며 먼지를 뽀얗게 피우는 것도 마다않고 손을 흔들었다. 새미실 앞을 지나다 보면 야트막한 지붕들이 정겨웠고, 방앗간 굴뚝에서는 따뜻한 연기가 모락모락 풍요롭게 느껴왔었다. 도란도란 평화만이 깃들어 있을 것 같던 미천리, 가깝게 있을 것 같은 풍경은 기억만 남기고 사라졌다 …. 새미실의 새미는 샘을 이르고, 실은 谷(계곡)이다. 샘이 있는 골짜기를 이르는 이름이다.
역사 변화와 인생사, 막힘과 걸림이 없는 물을 소제로 비유나 상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방대한 댐이 생기고, 문의면 소재지가 수몰되면서 보이지 않았던 지역이 출몰 한 것처럼 미천리 구역이 넓어졌다.
소재지 문산리에 있었던 백년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애환을 담고 있었던 학교가 사라졌다. 천 육백 명이 넘는 많은 학생이 있었으나 수몰로 전국 각지로 흩어져 떠나고 삼백 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는 미천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하루에 스무명 서른명씩 전학을 하는 학생들은 이런 일이 왜 생겨야 하는지 알았을까. 단청이 바래어 역사를 말해주던 문산관, 작열하는 태양을 가로막아 아이들을 그 아래 깃들게 했던 방울나무, 교실 앞 등 굽은 노송을 바라보다 눈물 젖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옛 명칭인 문의국민학교는 댐 안에 고이 잠들어 깨울 수가 없고, 미천리 양성산자락에 문의초등학교가 새로운 세기의 탄생으로 건강하게 커주기를 바랄뿐이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일수록 뒤 돌아보면 추억은 아름다운 법이던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꿈이 순정처럼 살아난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꿈을 꾸기도 한다. “노루실 강변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을 잘못 디뎌 신발을 물에 떠내려 보내고 싸리문 울타리를 서성이며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꿈을 깨어 뒤척인다. 깊은 한(恨)이 된 호수가 병 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물 속의 고향을 걸어보지 못하는 ” 씁쓸한 해몽으로 실향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객지에서 비상의 성취가 있었다 한들 댐 속에 가두어 둔 그리움이 잊힐 리가 있을까.
호시절 다 놔두고 유독 가난하고 힘겹게 살던 고향이 그리워 생각하다보면 마음은 어머니 곁에 다가가지 못하는 고아처럼 허황하다.
미천리에 남아서 사는 사람들도 새로 조성한 소 도읍이 아직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패(殿牌)를 모시고 초하루 보름날에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는 문산관(文山館)도 수난을 겪었다. 1979년에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수몰지역에 문산관이 있게 되어 문의향교 옆으로 옮겨졌었다. 다시 1997년에 미천리에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그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요지부동 그 자리를 지킬 것 같이 높게 보였던 문산관 댓돌, 두 팔로 감싸 안아도 모자랐던 기둥의 풍채를 잊지 않고 어린 시절 잠재된 큰 안목으로 간직되었다.
문의에 향교가 있어서 이 고을의 상징처럼 꼽는다. 본래 양성산 아래에 있었던 것을 광해군 때(1609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숙종이(16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현재 향교는 1980년에 다시 짓고 1988년에 보수한 것이다. 그러나 부실한 복원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그 실태는 문화재 관리에 허점이 드러나 안타깝다.
또한 이 지방 향토사연구 자료인『교임선생안』·『청금록』 등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지만 서책을 보관하는 마땅한 설비가 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조상을 숭상하고 전통을 이어받는 고유의 얼을 가진 민족이다. 눈이 멀어 눈앞에 있는 문화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이 고을 미천리에 횃불이 밝혀져야한다. 우리의 진실한 문화를 밝혀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첫댓글 눈물 젖었던 고향을 떠나 무릉동산에 간 들, 어이 고향을 잊으리오.
" 객지에서 비상의 성취가 있었다 한들 댐 속에 가두어 둔 그리움이 잊힐 리가 있을까.
호시절 다 놔두고 유독 가난하고 힘겹게 살던 고향이 그리워 생각하다보면 마음은 어머니 곁에 다가가지 못하는 고아처럼 허황하다.
미천리에 남아서 사는 사람들도 새로 조성한 소 도읍이 아직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향교는 교육의 중심지였지요. 자부심이 대단하시겠네요.
단청이 바래어 역사를 말해주던 문산관, 작열하는 태양을 가로막아 아이들을 그 아래 깃들게 했던 방울나무, 교실 앞 등 굽은 노송을 바라보다 눈물 젖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옛 명칭인 문의국민학교는 댐 안에 고이 잠들어 깨울 수가 없고, 미천리 양성산자락에 문의초등학교가 새로운 세기의 탄생으로 건강하게 커주기를 바랄뿐이다.
우리는 조상을 숭상하고 전통을 이어받는 고유의 얼을 가진 민족이다. 눈이 멀어 눈앞에 있는 문화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이 고을 미천리에 횃불이 밝혀져야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마음이 찡합니다. 글이 너무 훌륭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름이 정겹습니다.
그 학교를 가득 메웠던 초등학생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
세월이 많이 바뀌었죠?
00실..이라고 할 때 '실'이 '계곡'이라는 뜻이었군요.
많이 궁금해 했었습니다.
감상...잘 하고 갑니다..^^
새미실, 노루실...참 정겨운 이름들을 가진 지역입니다.
물이 많고 산이 좋고 동네이름들도 좋아서 문의에서 문인들이 많이 나오는가봅니다. 교수님처럼 선생님처럼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