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校里)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는 법정리(里).
교리는 기장읍의 북쪽에 있으며, 남쪽은 서부리, 동쪽과 북쪽은 일광면 삼성리, 서쪽은 만화리와 접한다. 북서쪽에 일광면과 경계를 이루는 일광산[317m]과 서쪽에 샛드산[136m]이 있다. 이곳 산록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흘러 만화천에 유입되고, 유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와 멀지 않으며 평야 지대이다. 기장군의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다. 높은 건물과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 있으며 기장체육관이라는 공공 시설도 위치해 있다.
교리는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기장현 동면 고성리(古城里)로 기재되어 있다.
-1356년(공민왕 5) 현재의 기장 읍성이 축조되어 옮겨 가기 전까지는 기장의 중심 읍지였던 곳으로 보이며 기장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추정된다.
-1895년(고종 32) 동면 교동(校洞)이 되었고,
-1914년 동래군 기장면 교리가 되었다.
-1973년 경상남도 양산군에 통합되었다.
-1980년 기장면이 기장읍으로 승격하였고,
-1986년 양산군 동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95년 부산광역시에 편입되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가 되었다.
마을에 기장 향교(機張鄕校)가 있어 교리(校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기장 향교는 1617년(광해군 9) 기장의 유림들이 중건한 것이다. 교동(校洞)이라고도 부른다. 교리란 이름은 과거에 향교가 있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자연 마을로 교리 1리와 교리 2리, 교리 3리와 박곡 마을, 홍문간 마을, 고성이 있다. 교리는 본동 마을로 기장 향교와 교리초등학교가 있다. 교리 2리에서는 5일장이 열린다. 홍문간 마을은 기장 향교 어귀에 형성된 마을로 이곳에 있던 홍살문에서 지명이 비롯되었다. 고성은 과거에 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0.81㎢이며, 인구는 4,839가구에 총 1만 757명으로 남자가 5,283명, 여자가 5,474명이다(2021년 12월 현재). 북쪽으로 기장 고읍성과 기장 향교가 있다.
이처럼 역사적 유적이 많이 남겨져 있으나 현재는 대부분 시가지화가 되어 과거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마을의 서쪽으로 부산 울산 고속 도로가 지나가고, 동쪽으로는 기장 대로와 동해 남부선 철도가 지나간다. 법정동인 교리의 행정동으로는 교리 1리·교리 2리·교리 3리·교리 4리·교리 5리가 있다.
교리(校里)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있는 법정리(里).
교리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鳥致院邑)에 있는 법정리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관공서 건물이 주를 이루면서 조치원의 중심지 기능을 하여 왔다.
교리는 조치원읍 중앙에 있다. 동쪽은 평리, 남쪽과 서쪽은 원리, 북쪽은 내창천과 연접한 지역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매우 시가화된 지역이다. 마을 동쪽으로 조천천이 흐른다.
본래 조치원리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1914년 조치원리에 속하여 있다가
-1931년 면제 개정으로 조치원면 관할에서 조치원읍 관할로 바뀌었다.
-1940년 이 지방이 갑자기 번창함에 따라 조치원리에서 갈라져 길야정(吉野町)으로 분리되었으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으로 학교의 중심지이므로 교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88년 교리로 개명되었다.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에 속해 있다가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웝읍으로 편입되었다.
교리는 연기현 북면 침산리 지역이었으며, 마을 중앙으로 하천이 관통함에 따라 마을을 형성하는 데 장애가 있었다.
그러나 일부 지대가 높은 지역에는 연기군청, 심상고등소학교, 우체국, 척식회사 등이 입지하였다.
교리(校里)라는 지명은 학교[초등학교, 여고, 여중]가 밀집된 지역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자연마을로는 교동이 있다. 교동마을은 교리가 시작된 마을이며, 지명유래 또한 교리의 그것과 동일하다.
조치원 읍사무소 소재지로서 조치원역과 가깝다. 마을 내에 교동초등학교, 조치원 여자중학교, 보건소, 우체국, 시민회관, 어린이 놀이터 등과 함께 현대아파트·계룡아파트·목화아파트·제일연립 등 주택이 있는 마을이다.
학교와 관공서가 많은 곳이라 하여 주민들의 자긍심이 높다.
총 1,430가구에 2,75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20년 8월 기준). 면적은 0.202㎢이다.
조치원 중심가 중 하나인 새내로 12길은 왕성극장을 비롯한 극장들이 있었고, 홍익대학교와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즐겨 찾아 젊음의 거리라고 불렸다. 자동차 진입을 막지 않았지만 사람이 많아 자연스러운 보행전용도로가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권이 서창리와 침산리로 옮기면서 침체하였다. 또한 어지러운 전선과 좁은 길에 세운 불법 차량으로 인하여 사람도 차도 모두 다니기 불편해지면서 시민들에게 외면받았다.
그러나 주민 스스로 주도하는 경관협정사업을 통하여 세종특별자치시 원도심 도시재생 모델이 되고 있다.
교리(校里)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있는 법정리(里).
교리천이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 아래쪽 완경사면에 자리 잡은 마을로, 완경사면은 너비 약 250m, 길이 약 800m 정도이다. 북쪽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져서 마을 동쪽 지역은 좁은 계곡을 이루고 북쪽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남한강 강변의 평탄면으로 이어진다.
북쪽의 금성면 성내리 무암제1제 동남쪽 경계에 423m 고지, 423m 고지 동쪽에 499m 고지, 동쪽 학현리와의 경계에 모래재가 있다. 교리천이 성봉[824m] 남서 비탈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다 모래재 서쪽에서 서류한다. 탑곡천이 작은동산[542m] 남쪽 기슭에서 서쪽을 향해 만남의 광장 북쪽 탑골에서 교리로 흘러 교리천과 만나 청풍호로 흘러든다. 교리천 하류에는 약간의 충적 평야가 발달하였다.
조선 말 청풍군 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금성면 교리가 되었고,
-1947.1.31 청풍면에 편입되었다.
-1980.4.1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교리가 되었고,
-1991.1.1 제원군의 명칭이 제천군으로 환원되면서 제천군 청풍면 교리가 되었다.
-1995.1.1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교리가 되었다.
1590년(선조 23) 청풍향교가 물태리에서 옮겨 오게 되면서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교동 또는 교동리라 부르게 되었다. 달리 향교골 또는 향곳골이라고도 부른다. 청풍향교를 이축하면서 교동(校洞)이라 칭하였고 향교골이라고도 불렀다.
교리는 1985년 충주댐 건설로 대부분 지역이 수몰된 마을이다. 면적은 5.25㎢로 이 중 경지 면적은 논이 5,000㎡, 밭이 7만 7000㎡이며 총 42가구에 60명[남자 39명, 여자 2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0.9.9 현재). 동쪽과 동남쪽으로 학현리, 남쪽으로 도화리, 서남쪽으로 청풍호, 서북쪽으로 북진리, 북쪽으로 금성면 성내리와 이웃한다. 서쪽에 제천과 청풍을 이어 주는 지방도 82호선이 남북으로 지나고, 남단 부근에서 학현~소야 간 군도 16호선이 동쪽 학현리로 이어지며, 리도 212호선이 동쪽 학현리 모래재로 연결된다.
2000년부터 청풍리조트, 청풍랜드[힐호텔, 레이크호텔], 교리관광농원 등 호텔과 음식점, 위락 시설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민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2002.4.13 개장한 청풍랜드 번지 점프장은 국내 최고 높이인 62m이며, 번지 점프장 오른쪽에는 세계 수준의 인공 암벽장이 있다. 인공 암벽장에는 국제 공인 규격 1식[15m×16m 규모의 3코스]과 볼더링 연습용 암벽 1식[5m×20m]이 설치되어 있다. 문화 유적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인 제천 교리 방단석조물이 있다.
충주댐 건설 이후 관광지로 변하였다. 인공암벽장, 충주호, 고사분수, 번지점프장 등이 있다. 금수산에서 송이버섯, 능이버섯 등 여러 버섯이 생산되며, 뱀장어, 붕어, 매기 등 자연산 민물고기로 유명하다.
교리(校里)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에 있는 법정리(里).
무등산 자락이 나한산을 이루고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뱃머리처럼 생긴 교리 뒷등과 낮은 산이 있다. 교리 저수지 위쪽에 두루봉이 있으며, 대리 쪽에 좆등, 일심리 부근에는 십등이 있다. 이전에는 마을을 대동이라 불렀으며 학교산 뒷편에 대동샘이 있는데 이곳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화순읍 신기리, 서쪽으로는 화순읍 이십곡리, 남쪽으로는 화순읍 훈리, 북쪽으로는 화순읍 동구리와 이웃한다.
화순군 화순읍 교리는 단일 자연 마을인 교촌 마을로 이루어졌다.
1789년 『호구 총수』에는 화순현(和順縣) 읍내면(邑內面) 교촌(校村)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67년 『대동지지』에는 화순현 읍내면,
-1895년에는 나주부(羅州府) 화순군(和順郡) 읍내면(邑內面),
-1896년에는 전라남도 화순군 읍내면,
-1908년에는 능주군(綾州郡) 원화순방 읍내면,
-1912년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는 능주군 읍내면 교촌(校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 화순군(和順郡) 화순면 교리[교촌]로 개편되었다.
-1963.1.1 화순읍 승격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교리가 되었다.
교리란 지명은 교촌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초인 1433년에 건립된 화순 향교가 있어 향교촌이라 부르던 것이 후에 축약되어 교촌·교동 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자연마을로는 교촌마을이 있다. 교촌은 조선시대 초 1433년에 건립된 화순향교가 있어 향교촌이라 불리던 것이, 후에 축약되어 교촌, 교동 등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교리는 화순읍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1.4㎢이며, 총 1,039가구에 2,886명[남자 1,453명, 여자 1,433명]이 거주하고 있다(2011.12.31 현재). 9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민들은 주로 자영업이나 근로 소득에 종사한다. 국도 15호선이 북서쪽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에서 구 보건소 앞 삼거리에서 동편으로 이어져 읍내 중심지로 연결되고 있다. 1975년부터 외곽 도로의 신설로 삼천리 방향으로 직진한다.
문화재, 유물 및 유적으로는 고인돌 6기, 화순 향교, 화순 향교 대성전[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63호], 화순 향교 만화루[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60호], 현감 홍명하 숭유비, 현감 김준흠 숭유비, 현감 김윤현 유비, 현감 송면로 숭유비, 현감 이중익 숭유비, 현감 민영석 숭유비, 현감 김요협 숭유비, 기천홍 선생 제단 터, 양사정 터, 고자원 터 등이 있다.
이 지역은 시내 중심의 일부를 이루며 학교와 관공서가 많이 있다. 동쪽으로는 화순 초등학교, 공간 아파트, 서쪽으로는 원모퉁이, 화순군 선거 관리 위원회와 변전소, 유창 아파트, 남쪽으로는 화순 군내 버스 정류장, 화순군 공공 도서관, 북쪽으로는 학교산과 화순 향교, 교리 저수지 등이 있다. 교촌마을은 학교와 보건소 등이 있는 시가지이다.
교리(校里)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법정리(里).
교리는 중남부 지대가 대부분 평지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서쪽은 옛 하양현의 진산(鎭山) 무학산(舞鶴山)[588.4m]이 감싸고 있다. 동쪽에는 마을 골짜기를 막아 못을 만들어 이름을 붙인 교곡지(校谷池)[3,456㎡]가 있다. 교리의 동쪽은 한사리, 북동쪽은 대학리, 북서쪽은 사기리, 남서쪽은 양지리와 접한다.
고려 말 공민왕 때 결성 장씨가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교리는 본래 하양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교동동·교서동이 경산군 하양면 교동으로 개설되었다.
-1973.7.1 경산군 하양읍 교동이 되었으며,
-1988년 군조례에 의해 교동이 교리로 개편되었다.
교리(校里)는 경산시 하양읍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행정리는 교리 한 개다.
교리는 고려 말 공민왕 때 결성 장씨가 마을에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며, 당시에는 상리(上里)라 불렸다고 한다. 하양향교가 들어서면서 향교골 또는 생교골이라 하였다가 후에 교촌 마을, ‘교리’로 개칭되었다. 금상동은 금호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며, 봉등은 봉의산 밑에 자리한다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또한 이곳은 성주 도씨들의 집성촌이 있다.
평지가 대부분의 지역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며 한우를 키우는 농가가 많고 자두와 복숭아가 많이 생산된다. 마을 서쪽을 무학산이 감싸고 있으며, 동쪽에는 교곡지가 위치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교촌, 금상동, 봉등 마을 등이 있다. 금상동 마을은 금호의 위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며, 봉등 마을은 봉의산 밑에 자리한다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금상동은 성주 도씨 집성촌이며 ‘구읍내’로 불리는 마을에는 모장터라는 옛 장터가 있다.
교리의 면적은 2.1㎢이며, 인구는 101가구, 193명[남자 101명, 여자 92명, 외국인 제외]이다(2020.5.31 기준).
교리에는 한우를 키우는 농가가 많고 자두와 복숭아 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전체 가구 중 절반 정도가 복숭아 작목반을 결성하여 과수재배에 힘쓰고 있다. 남쪽의 교리길을 통해 주변 지역과의 왕래가 활발하다.
문화재로 하양향교(河陽鄕校,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7호)가 있으며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최문환의 집인 동산재가 있다. 심우중을 배향하는 봉양재가 있고 사찰 쌍림사가 있다. 하양향교 명륜당 뒤편의 높이 24m, 둘레 6.1m에 달하는 25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교리(校里)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법정리(里).
마을 뒤로 형제봉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잿골못, 용동지가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 마을이다. 비봉산 동쪽 봉황의 왼쪽 날개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14세기 도량 할머니란 이가 전 재산을 팔아 향교를 세우고 마을 이름을 향교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교동(校洞)이 되었고,
-이후 지금의 선산읍 교리가 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校村)이라 하였다. 또한 향교에서 유생들이 공부를 하고 마을에 초시에 합격한 생원(生員)들이 많아 생원골 또는 생골이라고도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향교마(생기골, 생골, 교촌), 댕대이(당대, 당대이), 동편, 장터걸(구장터), 용동골, 한우마을, 잿골, 주막걸 등이 있다. 향교마는 예전에 선산 향교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생기골, 생골 혹은 교촌이라 하였는데 후에 교리가 되었다. 댕대이는 용동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서는 당대에는 잘 살 수 있으마 후대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천한 사람이 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동편은 생골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장터걸은 전에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면적은 0.37㎢이며, 총 901가구에 2,794명[남 1,449명, 여 1,34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08년 12월 현재). 농업 중심의 농촌 마을이었으나 1990년대 초 당시 선산군에서 택지 개발을 시행하여 도시 계획 지구로 편입되었으며, 아파트가 들어서고 외지 인구가 유입되어 선산읍 관내에서는 인구가 많은 편에 속한다.
선산 도시 계획 사업 확장 추진으로 동부리·노상리·이문리로 이어지는 도시 계획상의 소방 도로가 개설되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로 가는 길이 단축되었다. 주요 시설로 향토 부대인 501대대를 비롯하여 유림회관, 우시장, 중소형 슈퍼마켓, 농기계 대리점, 식당이 들어서 있다. 문화유적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된 선산향교가 있고, 선산읍성 서쪽 1호 광장 소공원에 죽림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낙동강식당 뒤쪽에 교리 지석묘군 3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부근 도로변과 농지에도 많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교리(校里)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에 있는 법정리(里).
낮은 산악지형이다. 마을 앞으로 감천이 흐르고 뒤로는 구산(龜山)이 마을을 호위하듯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말 지례군 하현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교리·범박골이 통합되어 김천군 지례면 교리로 개편되었다. 1914년 부평동을 병합하여 교리라 하고 김천군 지례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금릉군 지례면 교리로 개칭되었고,
-1971년에 교리, 교촌 지역을 교1리로 나누었다. 1971년 교1리·교2리로 나누어졌다.
-1995년 김천시 지례면 교리가 되었다.
조선 세종 8년에 향교가 세워져 행교마, 향교촌, 교촌으로 불리었다. 조선 시대 지례향교(知禮鄕校)가 세워지면서부터 교동(校洞), 교촌(校村), 향교마 등으로 불리었다. 지례향교는 1426년(세종 8) 정옹(鄭雍)이 현감으로 있을 때 창건하였고, 1485년(성종 16) 김수문이 현감으로 있을 때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774년(영조 50)에 사반루(思泮樓)를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지례향교가 소실되었을 때 공자를 비롯한 다섯 성현의 위패를 구해낸 호성위도(護聖衛道)의 공적을 두고 의성 김씨와 은진 송씨 집안에서 분쟁이 일기도 하였다.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던 스승 장지도(張志道)를 지극 정성으로 섬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서즐은 스승의 기일에 폭설로 길이 막혀 제물을 구하지 못해 통곡하자 효성에 탄복한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 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는 정성고개의 주인공이다.
자연마을로는 교리, 범밧골, 온평(溫坪) 등이 있다. 교리는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접경한 군사적 요충지여서 신라 경덕왕 때 여기에 현을 두어 이때부터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후 조선 세종 8년에 지례향교가 건립되자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행교마, 향교촌, 교촌, 교동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리라 하게 되었다. 범박골(범밧골)은 옛날 마을 뒷산에 큰 호랑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호랑이 세 마리가 마을에 있는 호랑이바위틈에 죽어 있었다고 해서 이 마을의 이름을 범바위골 또는 범밧골이라고 했다. 또 호랑이 형상을 한 바위의 보살핌이 있어서 마을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고 농사가 잘 되어 부유하게 살 수 있다고 마을 이름을 부평이라고도 한다. 옛날 마을 뒷산 큰 바위에 호랑이가 올라앉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하여 범바위골이라 한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 이름이다. 마을 주민들은 호랑이가 출몰했던 이 바위를 정성으로 섬겼는데 그 덕택인지 마을에 큰 부자가 나오고 자손들이 번창해 부평동(富坪洞)이라고도 하였다. 구 도로를 중심으로 지례향교 맞은편 일대 장터는 오래전부터 지례면, 부항면, 구성면, 증산면, 대덕면 상권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지례장이 섰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지금도 마을회관 일대에는 큰 장이 섰던 공터와 점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온평은 국도 3호선 변에 자리 잡은 마을로, 온평은 조선 고종 18년에 정선 전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보고 정착하면서 마을 앞들이 움푹 들어가서 평온하고 따뜻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온평들이라고 했다. 이에 연유하여 이 마을을 온평, 온팽이, 따슨평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달리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아서 대촌, 옛날 마을 규모가 컸으므로 대촌(大村)이라고도 하였다.
교리는 면적은 2.24㎢이며(2010.11.30 기준), 인구는 총 254세대에 468명(남자 244명, 여자 22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5.12.31 현재). 교1리·교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김해 김씨·남평 문씨 집성촌이다. 공공기관으로 지례면사무소, 교육 기관으로 지례초등학교·지례중학교가 있다. 문화 유적으로 지례현아 터, 지례향교, 양효위사 윤은보 서즐 정려각이 있다. 지금의 지례면사무소 일대에 있었던 지례현아 동헌을 수경당(垂慶堂)이라 하였고, 현감 밑에 좌수 한 명, 별감 두 명, 군관 30명, 인리 38명, 지인 20명, 사령 19명, 관노 20명, 관비 25명이 있었다. 지례현감 이채(李采)[1745~1820]는 상권의 중심인 교리를 수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례방천을 축조할 때 상부리와 교리 중간에 보조제방인 세뚝을 추가로 쌓기도 하였다.
교리(校里)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법정리(里).
구릉성 평지에 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동쪽으로 송야천을 경계로 노하동과 인접해 있고, 남쪽으로 풍산읍 막곡리와 인접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촌리와 대석동이 통합되어 교리가 되었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서후면 교리가 되었다.
고려시대에 이 지역에 향교가 있었다고 하여 향교골 또는 행겟골이라 하였다. 고려 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했던 권인(權靷)이 이곳의 지명을 소야(所夜, 일명 솟밤)에서 송파(松坡)로 바꾸어 불렀다고 하는데,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를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자연마을인 시묘골은 1545(인종 1) 참봉을 지냈으며, 효자로 이름 난 권기(權紀)가 이곳에서 시묘를 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마을 왼편으로 작은 하천이 흐른다. 향교가 있던 곳이므로 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향굣골(향교골), 들마, 새마, 시밋골(시묘골), 대석동마을, 평촌·한석골·운곡 등이 있다. 향굣골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교리의 그것과 같다. 들마마을은 들이 넓은 평지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마마을은 교리 북동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시밋골마을은 권씨 성의 효자가 이곳에서 시묘를 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대석동마을은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서후면 동쪽 끝에 있는 마을로, 안동 시내에서 솟밤다리를 지나 봉정사(鳳停寺)로 연결되는 지방도와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3.28㎢이며(2008년 12월 기준), 인구는 총 289세대에 421명(남자 202명, 여자 21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5.12.31 현재).
문화 유적으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호인 관물당(觀物堂), 송암 구택(松巖舊宅),안동권씨 송파재사(松坡齋舍), 권인 유허비 등이 있다. 한석골에는 사두재에서 한 석공이 돌을 다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벼락바위 전설이 전해 온다.
교리(橋里)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에 있는 리(里).
계곡과 골짜기가 많이 있으며 여기저기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주로 밭농사를 많이 지으며 사람이 살기 이전에는 숲이 우거졌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다릿골(교동:僑洞), 옛다리골 등이 있다. 다릿골은 징검다리가 수없이 많이 세워져 있어 다릿골이라 이름 붙였다. 옛다리골 역시 다릿골 남동쪽에 위치하는 마을로 계곡이 많아 다리가 많이 놓여져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계곡에 마을을 이루고 또 다릿골의 원마을이 된다 하여 옛다리골이라 불리고 있다.
교리(橋里)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에 있는 법정리(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하였으며 작은 하천이 흐른다. 교리는 주왕산 줄기의 장군봉(將軍峰)[686.8m]의 서쪽 능선으로, 크고 작은 골짜기가 합쳐지고 갈라지는 지형을 이용하여 계단식 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계곡의 규모가 큰 만큼 경작지를 조성할 수 있을 정도의 완만한 경사지의 면적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신못, 구못, 남개곡지 등의 작은 못도 많이 있지만 산간 지방인 만큼 전체적으로 농경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교리는 청송읍의 남동편에 있는 지역으로 행정리는 교리 한 개로 이루어져 있다. 교리는 동쪽으로는 주왕산면 상의리·하의리와 접해 있으며, 서쪽은 청송읍 청운리, 북쪽은 청송읍 거대리와 마주하고 있고, 남쪽은 청송읍 송생리와 접하고 있다.
본래 청송군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다릿골 또는 교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곡, 송생리 남개곡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교동이라 해서 청송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청송면이 청송읍으로 승격되어 청송읍 교동으로 개편되었으며,
-1988년에 군조례에 의해 교동이 교리로 개칭되었다.
개척 당시 마을 계곡에 다리가 하나 있었으며, 이 다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다릿골, 교동, 교리라 했다. 앞에 큰 다리가 놓여 있으므로 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교동, 한실, 주솔, 평풍방우, 향촌마을 등이 있다. 교동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교리의 그것과 같다. 한실마을은 처음 개척할 당시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 물이 매우 차서 한천(寒泉)이라 한 것이 명칭의 유래라는 설이 있으며, 계곡이 넓은 곳에 마을이 이루어졌다 하여 한실[大谷]이라 한다는 설도 있다. 교동 남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솔마을은 소나무가 줄을 지어 서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평풍방우마을은 병풍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향촌(香村)은 마을 앞에 몇 백년 묵은 향나무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행정리는 교리 한 개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7.1㎢이며 인구는 전체 54가구에 101명[남자 53명, 여자 48명, 외국인 제외]이다(2016년 12월 말 기준).
교리의 마을들은 산지를 뒤로 한 채 계곡을 끼고 발달해 있다. 골이 깊으나 계곡을 따라 가옥들이 흩어져서 분포하기보다는 한 곳에 집중되는 편이며, 다소 불규칙하게 덩이 형태로 들어서 있는 괴촌(塊村)의 형태를 보인다. 자연마을로는 다릿골과 한실, 향촌, 남과실이 있다. 다릿골은 교리의 본 리로서 그 유래는 교리와 같다. 북쪽의 고개를 통하여 청송읍 거대리와 이어지며 서쪽의 고개로는 남과실과 통한다. 교리의 본 리이기는 하나 깊은 산지에 위치하여 교리 남쪽의 큰 도로인 주왕산로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규모 역시 작은 편이다.
한실은 한실삼거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좁은 협곡이 나오는데, 이 협곡을 지나서 나타나는 넓고 평탄한 구릉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교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수십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향촌은 청송읍 송생리에서 교리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마을로 북서쪽으로 들어간 작은 골짜기를 따라 위치한다. 남과실은 교리의 다른 마을들과는 분수계(分水界)[인접하는 하천 유역의 경계]를 달리한다. 남과실이 위치한 유역은 교리의 주요한 유역의 서쪽에 위치하며 그 크기 또한 작다. 상대적으로 평탄한 지역도 적어 농경과 거주가 쉽지 않아 마을의 규모도 작은 편이다.
교리에는 논농사부터 고추, 담배, 사과와 같은 과수농사까지 고루 발달한 편이다. 특히 교리의 초입부인 향촌 인근에서 논농사가 활발하다. 하천 상류 지역의 경사진 곳에서는 계단식으로 경작이 이루어진다. 교리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앙로와 한실삼거리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간 교하로가 주요 교통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중앙로는 서남쪽의 송생삼거리에서 주왕산로와 연결된다.
교리(校里)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있는 법정리(里).
낙동강이 흐르는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여 논농사가 주로 행해지는 곳이다. 교리는 구릉지와 평야로 되어 있다. 남쪽으로 경호천(鏡湖川)을 끼고 있다. 서쪽의 수리봉[163.5m]을 우회하여 경부선이 지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인동군 약목면(若木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명원, 세덕 등의 일부를 병합하여 교동이라 하고 칠곡군 약목면에 편입하였다.
-1988.5.1 교동을 교리(校里)로 변경하였다.
약목현의 향교(鄕校)가 있던 마을이라 교촌(校村) 또는 교동(校洞)이라고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교촌, 명원리, 호박골마을 등이 있다. 교촌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교리의 그것과 같다. 명원리마을은 교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 서원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박골마을은 교촌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위 골짜기에 큰 호박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경호천을 따라 자연 마을인 명원리(明院里) 마을, 향교마 마을, 호박골 마을이 있다. 명원리 마을은 교리의 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시덕로가 마을을 비껴 지난다. 명산 서원(明山書院)이 있었으나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동쪽의 향교마 마을은 옛날 뒷산에 향교가 있었던 마을이다. 시덕로의 서쪽에 호박골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뒷산에 은광이 있었다.
교리의 면적은 2.5㎢이며(2013년 12월 현재), 인구는 2011년 8월에는 227가구, 525명으로 남자가 299명, 여자가 226명이었으나, 2013년 12월 현재 220가구, 479명으로 남자가 267명, 여자가 212명이다. 주민은 대부분 약목 평야에서 쌀농사를 한다. 이곳의 ‘다송쌀’은 우렁이와 친환경 농법에 의해 생산되는 대표적 브랜드이다.
교리 서부 경호천 변에는 일반 공업 지역이 조성되어 라이텍, 수영 전자, 영진 하이테크, 동서 테크, 유엔 테크, 태산 산업, 피엔텔, 진영 제지 공업, 하이텔 등의 산업체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교리(校里)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리(里).
평지가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북쪽에는 영취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남쪽으로 영산천이 흐르고 있다. 영산천 아래로 이정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비옥한 토지로 조성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골룡, 교동 마을 등이 있다. 골룡 마을은 용의 뼈가 발굴 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교동 마을은 향교가 있어 교동 마을이라 불린다.
문화재로 문화재자료 109호 창녕영산교리신씨고가 (昌寧靈山校里辛氏古家), 문화재자료 제354호 창녕교리신씨고가2(昌寧校里辛氏古家2), 시도유형문화재 제213호 영산향교(靈山鄕校), 문화재자료 85호 영축산성 (靈鷲山城)이 있다.
교리(校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리(里).
완만한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 관룡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이문재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마을 남쪽으로도 명덕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교동, 갈전, 사청 마을 등이 있다. 교동 마을은 향교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갈전 마을은 전에 갈밭이었다 해서 갈전 마을이라 불린다. 사창 마을은 전에 창고가 있었다 해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창녕향교(昌寧鄕校)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