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 국제금융기구
설립연도 : 1944년
소재지 : 미국 워싱턴
설립목적 : 세계무역의 안정된 확대를 통하여 가맹국의 고용증대, 소득증가,
주요활동 : 외환시세 안정, 외환제한 제거, 자금 공여
규모 : 가입국 182개국
1944년 체결된 브레턴우즈협정에 따라 1946년에 설립되어, 1947년 3월부터 IBRD(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세계은행)와 함께 업무를 개시한 국제금융기구다. 이 두 기구를 총칭하여 브레턴우즈기구라고도 하며, 약칭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이다. 2000년 현재 가맹국은 182개국이며, 본부는 미국 워싱턴에 있다.
총회·이사회·사무국과 그밖에 20개국 재무장관위원회, 잠정위원회, 개발위원회 등이 있다. 최고기관인 총회는 각 가맹국이 임명하는 대표 1인과 대리 1인으로 구성되며, 회합은 연차회합과 임시로 열리는 특별회합이 있다.
100억 달러로 출발해 여러 차례 증자를 통해 1970년 10월 30일부터 총액 289억 510만 달러가 되었다. 가맹국은 일정한 할당액에 따라 25%를 금으로, 75%를 자국 통화로 출자한다. 할당액은 가맹국의 요청에 따라 조정할 수 있으며, 이것은 각 가맹국이 IMF의 자금을 이용할 때 대출한도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출자금은 SDR(Special Drawing Rights:특별인출권)로 표시한다.
1. 목적 및 활동
국제통화기금은 세계무역의 안정된 확대를 통하여 가맹국들의 고용증대, 소득증가,생산자원개발에 기여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활동을 하고 있다.
① 외환시세 안정:제2차 세계대전 전 평가절하 경쟁이 세계경제를 혼란으로 빠뜨린경험이 있어, IMF를 설립할 때는 외환시세의 안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외환시세의 기초가 되는 각국 통화 환평가는 금 또는 미국 달러 가치를 기준으로 표시한다. 각 가맹국은 IMF평가의 상하 각 1% 이내로 외환시세를 안정시킬 의무를 진다. 다만 가맹국의 경제에 기본적 불균형이 있을 경우에는 절상·절하 등 평가 변경을 인정하며, 10% 이내면 IMF의 사전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나, 10% 이상이면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1971년 통화위기 때 무시되어 다각적인 평가조정이 이루어졌다.
② 외환제한 철폐 :가맹국은 IMF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외환제한을 철폐할 의무가 있다. 첫째는 경상적 지불에 대한 외환제한의 철폐다. 가맹국은 IMF의 승인이 없는 한 상품무역이나 용역거래를 위한 지불에 제한을 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차별적인 통과조치의 철폐다. 쌍무적 무역협정이나 복수환율제 등 다른 나라와 다른 결제방법을 사용하거나 다른 외환시세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셋째는 외국인 자국통화 보유잔액의 교환성이다. 외국인이 보유하는 자국통화의 잔액을 요구하는 대로 금, 미국 달러, 상대국 통화로 교환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외환제한의 철폐에 관해서는 IMF협정 제8조에 규정되어 있으며, 이를 승인한 나라를 IMF 8조국이라고 한다.
③ 자금 공여:가맹국의 국제수지가 일시적으로 불균형(적자)이 되었을 경우, 평가절하·수입제한을 피할 수 있도록 IMF가 외화자금을 공여할 수 있다. 이 경우 외화자금의 공여는 관계국 통화당국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며, 대가로 자국통화를 IMF에 지불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경상거래를 위한 지불에 필요한 경우에 한하며, 한 나라가 이용할 수 있는 외화자금의 양은 그 나라의 출자액의 125%까지고, 3∼5년 이내에 상환해야 하였다.
그러나 1980년 IMF·IBRD 합동 연례총회에서 비산유 개발도상국의 부채 격증에 따른 국제수지 악화를 집중 논의하면서 IMF 융자한도 600% 확대,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구조 조정차관 확대 등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1981년에 열린 IMF·IBRD 합동 연례총회에서 선진국들이 긴축정책을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하여 빈국들에 대한 원조증대의 기대가 무산되었다.
2. 운영자금
국제통화기금은 각국의 국제무역 규모, 국민소득액, 국제준비금보유량 등에 따라 회원국 정부의 출자로 이루어진다. 회원국은 일시적인 국제수지 불균형이 있을 경우 필요한 외환을 IMF로부터 자국통화로 구입할 수 있다. 또 회원국들의 일시적인 국제수지 불균형을 지원하기 위한 방편들도 마련하고 있다. 1952년 대기성 차관협정(Standby Arrangements)을 도입하여 회원국이 실질적 필요를 예상해서 미리 대출한도액을 협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61년에는 10개국이 대기성 차관(standby credit)을 제공하는 일반차입협정(General Arrangements to Borrow)을 체결하였다. 1963년에는 수출변동에 대한 보상금융제도(Compensatory Financing of Export Fluctuations)를 도입하여 개발도상국이 갑작스런 수출액 감소에 직면했을 때, 외환을 통제하거나 극심한 불황을 겪지 않고도 이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국제거래의 규모가 확대되고 금융위기가 잇달아 발생함에 따라 국제수지 안정을 위해 쓰일 추가 준비금이 필요해지자, 1969년 10월 IMF 연례회의에서 국제유동성 공급을 영구적으로 확대하는 SDR 창설을 승인하였다. SDR로 인해 금이나 회원국들의 자국통화를 추가로 출자하지 않고도, 사실상 회원국들의 할당액이 증가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1986년부터는 IMF는 IBRD와 함께 빈곤한 나라들을 원조하기 위한 수십 억 달러의 공동대출자금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3. 활동의 평가
국제통화기금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금융 외환기구를 마련하여 외환을 안정시킴으로써 세계무역의 확대, 세계경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한 국제 금환본위제(金換本位制)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국제거래가 증가한다. 이에 따른 국제 유동성의 증가는 미국의 국제수지에 적자를 일으키고, 이는 다시 달러 신인도를 하락시키는 모순이 있다. 반대로 달러 신인도를 회복시키려면 미국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해야 하고, 그것은 국제유동성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
싫어하는 이유라기 보다는 IMF 란 단어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제기구로 인식하기 보다는.. 상황적인 요소로 생각하여 IMF~ IMF~ 할머니 부터 어린애들까지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나라가 IMF 구제 금융을 받게 된 원인 부터~~~~
97년 1월 한보그룹은 빚을 10조원이나 지고 무너졌다. 한보의 침몰은 제일은행 등 금융기관 을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 곧이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등 굴지의 기업이 부도로 치달았다.
이어 한국 경제를 일거에 휘청거리게 만드는 대형 사건이 터진다. 재벌 순위 8위인 기아 가 부도 위기에 몰리고 제일은행은 기아에 부도유예협약에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에 돈을 빌려준 국제 금융기관들은 그동안의 의심이 확신으로 돌아선다. 한국경제가 위험하다. 빌려준 돈을 회수할 수 있을까. 외국은행들은 한국을 투자 위험국으로 지목했다.
이때부터 외환위기설이 정가와 재계에 나돌았다. 10월 1일, 고건 총리는 외환위기설을 전 면 부인했지만, 시중에 나도는 풍문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기아에 대한 해결책을 세우지 못하던 정부는 10월 21일 기아를 산업은행 출자회사라는 기 묘한 형태의 공기업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외국은행들이 채권 발행을 거부함으 로써 산업은행의 목을 죄었다.
10월 중순부터는 외국계 신용은행들이 잇따라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외국 금융 기관들은 우리나라 은행과 종금사에 대한 자금 공급을 완전히 중단됐다. 한국 경제를 비관 적으로 보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10월말 주가는 400선으로 추 락했다.
11월에는 해태, 뉴코아가 화의를 신청했다. 대기업 연쇄 부도설이 현실로 나타났다. 금융기 관들은 대기업으로부터 자금을 대거 회수하기 시작했다.
11월 3일, 한국은행은 10월 말 현재 외환보유고가 3백5억달러라고 발표했다. 끊임없이 나도 는 외환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수치가 엉터리라고 의심했다.
이무렵 종금사들은 외화 차입금을 갚기 위해 한밤중 한국은행으로부터 수억달러씩 자금을 빌리는 급박한 상황에 내몰렸다. 11월 13일 종금사들은 한은이 외환부도를 막든지 부도들 내든지 알아서 하라는 항복선언을 해버렸다. 시중은행장들도 은행들이 개별적으로 외화 차 입을 할 수 없으니 정부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한은은 급박해졌다. 10월말부터 11월초까지 34억달러를 방출했다. 또 이 사이 만기가 돌아온 외채를 갚기 위해 1백억달러를 빼냈다. 11월말 가용 외환 보유고는 72억6천만달러뿐이었다.
11월 6일께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총재는 IMF 구제금 융 신청을 밀도높게 의논했다. 우선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정부 는 IMF에 문을 두드리라고 종용했다. 13일 강부총리는 IMF 캉드쉬 총재의 방한을 요청했 으며 16일 캉드쉬 총재가 극비리 방한해 강부총리와 만났다. 대통령도 이즈음 외환위기의 급박성을 인지했다.
주가는 이미 500선 아래로 떨어지고 환율은 연일 제한폭까지 상승하여 거래 중단 사태가 벌 어졌다. 정부는 11월 19일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상하 2.25%인 환율의 하루 변동폭을 10% 로 확대했으나 적용 첫날 역시 거래중단사태가 빚어졌다.
19일 새로 취임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21일 오후 10시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미 일 등 선진국이 한국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지만 IMF 행 선언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다.
국가 신용등급이 하루가 멀다 하고 떨어졌다. 환율은 1900원대까지 치솟고 기업은 연쇄 부 도를 일으켰다. 살아있는 기업도 조업을 중단했다. 수출 수입선이 끊기고 시중의 돈은 바닥 났다. 대기업은 너나없이 외화 사재기에 나서 달러난을 더욱 부채질했으며 서민들 사이에서 는 설탕 밀가루 등 수입원자재 의존율이 높은 생필품 사재기 열풍이 불었다. 총체적인 국가 위기를 맞은 것이다.
◆ 한국 경제위기 일지
97년 1월 23일 한보철강 부도, 대외신인도 추락시작
97년 3월 19일 삼미그룹 부도
97년 4월 21일 정부 부도유예협약실시, 진로그룹 첫적용
97년 5월 28일 대농 부도유예협약적용
97년 7월 16일 기아그룹 부도유예협약적용
97년 9월 19일 주가 700선 붕괴
97년 10월 13일 16개 종금사에 1조원 한은 특융
97년 10월 22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97년 10월 28일 주가 500선 붕괴
97년 11월 1일 해태그룹 계열사 화의,법정관리신청
97년 11월 4일 뉴코아그룹 화의신청
97년 11월 9일 정부 종금사에 10억 달러 지원 검토
97년 11월 10일 환율사상 처음으로 달러당 1,000원 돌파
97년 11월 16일 미셀 캉드시 IMF 총재 극비 방한
97년 11월 17일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 IMF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지원 검토 보도 재경원 '사실무근'이라며 부인
97년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팀 경질, 임창열 부총리 임명
97년 11월 20일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 전격 방한,
임창렬 신임부총리와 지원문제 협의
97년 11월 21일 한국 IMF에 구제금융 신청 공식발표
97년 11월 22일 정부, IMF에 구제 금융 공식요청
97년 11월 23일 재정경제원, IMF 협의단(단장 강만수 차관) 편성,
IMF 실무협의단 1진 도착
◆ IMF 구제 금융 신청까지의 뒷 이야기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까지 정부가 한 일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도 정부 관련부처들이 늑장대처함으로써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된 것 이다.
큰 문제는 구제금융 신청이었다. 당시 재경원 등에서는 외환 위기를 해소하자면 구제금융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환율 급등도 문제지만 만기가 돌아온 왜채를 갚으려 면 당장 외국에서 돈을 꾸어와야 하고, 그 유일한 방안이 IMF행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11월 6일께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 총재가 모여 IMF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김수석은 이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김영삼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인지한 시점은 이때부터이다.
외환위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0월 말이었으니 늑장보고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만 하다. 강경식 부총리는 이보다 일주일 뒤인 14일이 되어서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도 11월 6일 경제수석이 보고한 이후에야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알았다면 큰 문 제다. 이전부터 언론에서 그토록 외환위기를 경고했으며, 각종 경제지표가 그 사실을 입증하 건만 이를 몰랐다니.
외환위기의 인지와 사태보고를 두고 재경원과 한은 사이에 책임론이 나왔다. 재경원은 한국 은행이 위기상황을 자신들에게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한국은행은 위기 상황을 매일 보고했지만 재경원이 이를 소홀히 다루었다고 했다.
청와대 재경원 한은 가운데 어느 한쪽 만이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대처방안을 적극 모색했더라면 파국까지 치닫지는 않을 수도 있었으나 모두가 책임만 떠넘길 뿐 전면에 나서 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19일 입각한 후 이틀만에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 임창렬 경제부총리에 대해서도 의구심 이 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검찰에 제출한 환란 답변서에서 11월 12일, 17일, 19일 세 차 례에 걸쳐 IMF행을 임부총리에게 알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임부총리는 19일 취임 직후 '캉드쉬 총재 면담결과'라는 문건을 전달받고 나서야 정부가 IMF와 협의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임부총리는 그 문건에 19일 구제금융을 신청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지 않아 자신은 구제금 융 신청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21일 구제금융 신청은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결정이 라고 말한다.
그러나 YS가 19일 경제부총리를 경질하면서 임창렬 새 부총리에게 가장 중요한 현안인 IMF행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점이 의혹으로 남는다.
어쨌든 임부총리는 경제팀이 교체되던 날 전임 강부총리가 발표하기로 했던 종합금융대책 을 발표하면서 당초 계획된 IMF 구제금융 신청 내용을 빠뜨렸다. 임부총리는 이날 IMF구 제금융 신청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 이틀 사이에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 환율 변동폭이 10%로 확대되었고, 20일엔 외환시장 이 마비되면서 원화의 급격한 평가절하 사태가 초래되었다.
만약 19일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하고 동시에 환율 변동폭 확대도 이루어졌더라면 심각한 사태변화를 미리 막을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 당초 계획했던 19일 발표가 이틀이나 미 뤄지면서 IMF측에 정책신뢰도마저 잃어 더욱 혹독한 조건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되었다.
임부총리의 구제금융 신청 지연은 지방선거의 쟁점이 되었고, 환란 수사에서도 끊임없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 협상에 대한 의혹과 불안감
IMF 협상에 있어서도 우리는 정부에 대한 의심이 끊이지 않았다. 종합금융회사들이 대거 업무정지를 당한데 이어 이번엔 거래약정규모 8위인 고려증권의 부도, 자산기준 재계서열 12위인 한라그룹이 최종 부도처리, 거기에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사이에서 부실 금융기관들의 처리대책이 마련됐다는 보도까지 겹쳐 위기감이 고조되어졌다.시시각각 다가 오는 사태에 대한 충격과 불안과 함께「IMF 신탁통치」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부실도가 특히 심한 국내금융기관들은 말 그대로 존폐의 위기에 직면했었다.고객들은 고사 하고 이젠 금융기관들조차 서로를 믿지못해 거래를 꺼리는 상황이어서 모든 경제가 위축되 어졌다.이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기업의 연쇄부도가 발생하였으나, 정부 관계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금융산업 구조조정 과정이라고 설명할 뿐이었다.정부는 개별기업 및 금융기관의 자 금난에 직접 개입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하였다.관여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 다.IMF에 경제주권을 넘겨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IMF의 요구를 받 아들여 서명하고 발표하는 역할이 고작이었으니까. 정부는 사태가 파국에 이를 때까지 수 수방관하다가 국가경제 전체를 IMF의 관리에 넘겨준 것과 마찬가지로.그러고도 태연히 굴욕적인 발표를 거듭하였다.국민들은 날마다 새로운 충격에 충격이었고, 정부에 대한 불 신만 깊어갔다.
당시 전해지는 바로는 정부가 엉터리 낙관론으로 국민을 기만해온 것으로도 모자라 IMF와의 협상과정에서까지 은폐 또는 축소조작된 자료를 내놓았다.그게 IMF측을 자극하 는 바람에 협상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일방적 통고만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 는 협상 내용과 이행계획을 찔끔 찔끔 내놔서 날마다 국민에게 불안감을 더해주기만 하였 다. 이러한 정부의 사태 은닉의 의혹은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감만을 최고조에 달하 게 만들었다.
◆ 엉터리 외환통계
IMF 시대가 시작되면서 IMF 구제 금융을 받기전까지의 외환통계가 도마위에 오르게 된다. 과연 그렇게 말도 안되는 외환통계가 가능한가? 한국은행, 재경원은 그당시의 외환위기를 모르고 있었을까? 한국은행의 보고채널은 국제부장→국제담당임원→부총재→총재의 라인으 로 보고된다. 이 통계는 동시에 재정경제원으로 넘어가 외화자금과→금융총괄심의관→금융 정책실장→차관→부총리의 순으로 올라간다. 또, 한국은행과 재경원이 청와대의 경제수석비 서실로 이 통계를 보고하는 것도 관례다.
특히 청와대에 대해서는 환율문제가 심각해진 11 월초부터 재경원이 급박한 상황을 일일보고로 상세히 전했다고 한다. 또 부총리. 한은총재. 청와대 경제수석이 1주일에 두번씩 만나 외환사정을 협의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적어 도 한국은행과 재경원 측은 사태의 심각성에 대하여 알고 있엇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안이한 소리만 했던 걸 보면 실제 가용외환, 또는 방대한 기업 현지외채의 존재 등 실 제 지급능력과 직결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알리지 않았거나 또는 모르고 있었거나, 아니면 정책실기 (失機) 등에 따른 책임을 면키 위해 허위로 보고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 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조작이 가능한가? 의도적으로 숫자를 날조할 수는 없다고 한다. 통계를 내는 방법은 세계 은행이 정한 기준에 따라 자동적으로 프로그램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환보유고의 경 우 구성항목을 밝히지 않아 오해를 사고 있다.
외채규모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으로 나누어 집계된다. 공공부문은 공공기관이나 지방자치단 체가 들여온 차관을 재경원이 일괄 집계해 한국은행에 넘겨준다. 민간부문의 외채는 한은이 각 외국환은행을 통해 파악한다.
외채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국제화바람 이 불면서 기업이 해외에 진출해 현지에서 외화를 빌려쓰는 경우가 늘어났는데도 이것을 외 채로 계산하지 않았었다. 해외법인의 경우 국내기업과는 달리 현지에서 독립채산으로 운영 되므로 통계상으로는 '우리의 외채' 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해외법인이 돈을 빌릴 때는 대 개 국내 모기업의 지급보증을 받아가는 것이 문제다. 해외법인이 쓰러지면 국내 모기업이 빚 부담을 고스란히 지게되는데도 외채에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다.이번 협상에서 IMF의 구 제금융규모가 비교적 커진 것도 기업외채를 감안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은행은 97년 10월말엔 외환보유고가 3백5억1천만달러로 9월말보다 조금 늘었다고 발표 했다. 한국은행은 아직 11월말 공식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환율상승을 막으려고 연일 달러 를 풀었는데도 외환보유고가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국민들의 외환통계 에 대한 불신이 이때부터 번져나갔다. 시장개입에도 불구하고 외환보유액이 줄지 않은 것은 한국은행이 '외화예탁금' 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내은행 해외지점의 외채 결제용으로 다 사용됐기 때문에 한국은행의 부실채권만 늘어난 것이었다. 수치상의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외환 보유고는 바닥이었다.
◆ 합의 결렬재협상 막판진통/협상 스케치
◎캉드쉬 협의안 번복에 심야 마라톤협상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자금지원을 위한 협상이 잠정합의결렬재협상이라는 반 전을 거듭하며 우리 정부가 IMF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채 2일 새벽 마무리됐다.이 번 협상은 시종일관 철저한 보안과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으며 경제적 주권을 상실하 게된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은 1일 밤 10시30분쯤 1차협상을 마치고 난 뒤 기자들에게 『IMF측과 실무안에 대한 협상을 끝내고 최종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있 다』며 『하루정도 지나면 협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임 장관은 또 이날 미 셸 캉드쉬 IMF총재와의 전화통화에서 잠정합의안이 결렬된 이유를 묻자 『결렬된게 아니 고 여러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율과정을 거치는 것일 뿐』이라며『IMF뿐만 아 니라 IBRD 등 국제금융시장의 종합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건을 충족시 켜야 한다』고 대답.
○…1차 협상이 결렬된 이후 다소 맥빠진 상태로 진행되던 협상은 2일 새벽 0시30분 쯤 이경식 한은총재와 김영섭 청와대 경제수석이 회담장소인 서울 힐튼호텔에 도착하면서 다시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이들은 임 부총리와 함께 휴버트 나이스 IMF실사단장 과 연쇄회동을 갖는 등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정부측이 IMF측의 요구조건을 대부분 수용하는 방향으로 회담이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했다.곧이어 새벽 3시쯤 임부총리 등 협 상팀이 회담을 마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회담장소를 빠져나가 가까스로 실무협상이 마무리됐 음을 알렸다.
○…당초 1일 오후 발표하기로 했던 합의안은 이날 오전 캉드쉬 IMF총재가 IMF협상 단에 실무합의안에 대한 수정을 지시하면서 재협상에 들어가게 됐다.이날 새벽 임부총리는 회담장을 나서며『실무협상이 마무리됐다.오전중으로 IMF총재와의 조율을 거쳐 결과를 발표하겠다』며 협상타결에 자신감을 보였고 재경원측에서는 국무회의가 끝나면 보도한다는 조건으로 이날 오후 언론에 합의자료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오전에 있었던 임부총 리와 IMF총재와의 전화통화에서 캉드쉬 총재가 단호하게 잠정합의안을 거부,재협상에 들어가게 되자 국무회의가 무기한 연기됐고 발표도 취소돼 버렸다.
○…한편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이때부터 콸라룸푸르발로 『캉드쉬 총재가 「아직 아무 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했고 과천 재경원청사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곧이어 임 부총리가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뒤 재경원을 빠져나갔고 재경원 협상팀도 부랴부랴 협상자료를 챙겨 회담장인 힐튼호텔로 향했다.임 부총리는 이날 밤 8시쯤 기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협상하고 있으니 결과를 기다려달라』 는 말을 남기고 지하1층 회담장으로 향했다.〈1997. 12.2 국민일보, 이춘재〉
◆ IMF의 의미는?
I.M.F 세 글자를 이용하여 시대상황을 풍자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초기 구제금융을 신청하자마자 환란을 미처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 또는 그 어려운 시기에도 돈벌이 재주를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I'm F(나는 역시 F학점이야) 혹은 I'm Fool(나는 바보야) 등의 자조섞인 목소리가 나오더니 본격적인 정리해고를 맞아서는 I'm Fire! (나는 해고) I'm Fly! (나는 파리목숨) I'm Finish! (나는 끝)로 거칠어졌다.
또 감원바람을 피하기 위해 I'm fixed(나 바닥에 딱 붙었어)를 외치더니 다행히 해고 바람에서 견딘 일부는 I'm fine(나는 괜찮아)하며 안도하기도 했다.
기업인들은 꽁꽁 얼어붙은 자금난 탓에 I'm freezing(나 얼어붙고 있어)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신세대들은 'IMF'를 영문으로 뜻풀이하면서 International Money Festival(국제적인 돈자랑 축제)이라고 표현, 은근히 IMF에 대한 반감과 경제주권을 상실당한 심정을 우회적으로 담았다.
또 It’s monetary fight(이건 돈싸움)로 국가간의 국경없는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풍부한 외화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 보였다.
신세대들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게 되자 I'm fighting(pocket money)즉,‘용돈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절규하기도 하고, Idle my father(실직당해 빈둥거리는 우리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고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이밖에 실직자의 마음을 한마디로 정의한 I am free(나 한가해요)도 씁쓸함을 담고 있다.
IMF로 인해 고통이 예상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담은 It’s mournful future(슬픈 미래)는 우울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경제국치를 당한데 대한 실망감으로 I(아이고)M(미치고) F(환장하겠네)로 풀이하기도 한다.
한편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지는 한국 경제가 IMF관리체제로 들어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자조적인 농담으로 퍼지던 IMF신조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주간지는 한국에서 맨 처음 구제금융 지원과 함께 대량 해고가 예상되자 I'm Fired(난 해고야)로 시작됐던 이 세 글자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I'm Fine(괜찮아)로 바뀌었다고 말하고, 최근 경제 사정이 조금 나아지자 I'm Forgetting(잊어버렸어) 증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한국인들은 이 모든 현상에 I'm Fed-up(지겨워)을 내밷고 있다고 보도했다.
◆ IMF형 단어들
IMF한파
느닷없이 불어닥친 한국의 외환위기. IMF초기에는 이 한파를 몰아내고자 일부 관공서에서 난방을 뜨끈뜨끈 때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IMF처녀
직장 풍속도. 결혼을 했지만 기혼녀부터 자르려는 회사 방침을 알고 처녀행세를 하는 가짜처녀. 결혼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거나 남편과 당분간 따로 살며 급할 때 몰래 만나기도 한다.
IMF총각
정리해고를 당해 직장을 잃자 젊은 마누라가 도망가 도로 총각이 돼버렸다.
IMF시대
암흑시대를 말한다. 모두들 이 시대가 빨리 지나가길 바라지만, 사회 흐름과 우리네 행태를 보건대 그냥 곱게 물러갈 것 같지는 않다.
IMF체제
고리대금업자인 IMF에게 돈을 빌려 쓰고 그들의 예속하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졸업하려면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지만 정치권, 권력기관, 재벌 등 일부에겐 당초 허리띠란 게 없는 모양이다. 아직도 흥청망청이니 졸업이 가능할지.
IMF스트레스
대표적인 현대병이 스트레스인데 IMF스트레스까지 가세했다. 해고스트레스, 부도스트레스, 장사스트레스, 보증 돈떼일까 스트레스…. 걱정은 걱정을 낳는다고 했으니 걱정을 위한 걱정이나 하지 말길.
IMF모델
미녀의 광고모델비도 깎였다는 얘긴가. 굳이 따진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IMF시대에도 물건이 사고 팔려야 경제가 돌아가는 법. 거품을 빼라는 것이지 소비를 금하라는 말은 없다. 그래서 자동차도 거품을 빼고 작게, 싸게 만든 것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IMF모델로는 아토스, 마티즈 등. 자동차 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들도 경쟁적으로 IMF 모델을 내놓았다.
IMF무풍지대
얼마나 바람직한 지대인가. 수출만 많이 하던 기업은 오히려 IMF로 인해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1원에 팔던 것을 2원에 파니 오죽 기쁘랴. 그러나 이런 무풍지대가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무풍지대가 있다. 일도 안하는데 IMF를 타지 않는다. 놀면서 나랏돈 꼬박꼬박 챙기는 정치권, 여전히 호황 누리는 강남일대 룸살롱, 이런 곳 뻔질나게 드나드는 재벌 2세들…. 뼈빠지게 고생하는 서민에게 'IMF무풍지대'라는 말은 좋은 뜻으로 와닿지 않는다.
IMF인생
일자리는 잃고, 오라는 데도 없고, 살기는 막막하고. 뭔가 속시훤히 뚫릴 만한 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방구석에 처박혀 꽁초나 물고, 답답해 거리로 나오면 눈에 보이는 게 사기꾼이요, 밟히는게 낙엽이다. IMF인생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자살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IMF특수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게 마련. IMF 덕분에 M&A(기업 인수합병) 관련업종은 호황을 맞았다. 로펌(법률사무소), 회계법인, M&A중개업체 등에는 기업을 팔려는 한국업체와 투자하려는 외국투자자들의 문의가 줄을 이으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청계천 헌책방거리도 IMF특수를 맞았다. 중고서적을 찾는 고객들이 급증, 때아닌 호황을 누린 것. 허리띠를 졸라매며 아껴쓰던 개발연대 소비패턴이 부활된 것이다.
중고품 시장과 PC통신, 인터넷 관련업체도 종목에 따라 IMF특수를 누렸다.
IMF형 코쿤족
여가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은 "in-Door형 여가"로의 전환이다. 집안에서 여가를 즐기는 "IMF형 코쿤(cocoon 누에고치)족이다. 교외 나들이가 심적 물적 부담감으로 기피되면서 여가, 취미를 집안에서 즐기는 경향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IMF형 피서
지난 여름 피서는 호텔 콘도 대신 텐트 생활이 주류를 이뤘다. 이른바 알뜰피서. 그러나 영호남 지역의 집중호우로 '휴가비 아낀다던’IMF형 피서객들은 죽음의 벽을 넘고 말았다.
IMF형 식단
야채나 곡물중심 알뜰 식단. 대형 유통점의 기초생필품 구매장소인 슈퍼마켓에서 생선과 정육 판매가 줄고 채소류가 큰 폭으로 늘었다.
IMF형 기업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인력을 최소화하여 해외시장에 파고드는 기업.
IMF형 가정불화
사상 최악의 실업사태에 가장의 실직이나 회사의 부도후 가출 등 경제문제로 가정이 깨어지는 일이 많다.
IMF형 상품
외모보다는 내실을 추구하는 소비자 심리에 맞추어 내놓은 값싸고 질좋은 상품. 생필품에도 IMF형 상품이 있는데 라면, 건빵, 소주 등을 가리키며 한때 불티나게 팔렸다.
IMF형 범죄
IMF는 범죄도 많이 불러왔다. 대형 경제범죄도 많지만 좀도둑이 늘었다는 것이 특징이면 특징. 하루벌이 일자리도 없자 급기야 남의집 담을 넘게 된다. 예전 같으면 귀금속이나 현금만 훔쳤지만 IMF도둑은 단돈 천원짜리라도 돈되는 것이라면 손에 쥐고 본다. 그야말로 생계형 범죄이다. 공중전화의 동전통을 터는 IMF형 좀도둑도 늘었다.
IMF형 실직자
실업자 3명중 2명은 지난 1년이내에 비자발적으로 직장을 잃은 IMF형 실직자 인 것으로 나타났다.
IMF형 재난
가정마다 소득이 급격히 줄어 들면서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발생한 재난. 전기료를 못내 단전되자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 불이 이불에 옮겨 붙어 집안을 모두 태운 일이 있다. 또 난방비를 줄이려고 방안에 숯을 피워놓고 잠을 자다 질식해 쓰러진 사람도 있다.
IMF형 매질
실직한 가장이 화풀이로 가정에서 자식들에게 매질을 가한다. 이유도 없이 "너때문에 힘들어 못살겠다, 자식이 원수야" 하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늘었다.
IMF형 하객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무단취식을 하는 사람. 혼주들은 결혼식 분위기를 망칠 수 없어 그냥 넘어간다.
IMF형 다이어트
비만한 이들의 체중조절 형태는 두가지 IMF타입이 있다. 하나는 낭비했던 부분을 줄여 절제해 먹는 I'M Fit(살이 빠져 건강한) 타입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시대에 음식을 남기는 건 죄라며 음식을 다 먹어치우는 I'M Fat(계속 살만 찌는) 타입이다. 이제 비만한 이들은 돈들이지 않는 IMF형 다이어트를 할 때다. 식품구입시 반드시 메모를 해서 꼭 사야 할 음식만 장만한다. 아무거나 눈에 띄는 대로 사서 먹다 살이 찐다. 둘째 음식을 조금만 만들어 식탁에 올린다. 셋째 외식의 기회를 가능한 한 줄인다.
IMF형 고아
엄마에게는 자식이냐, 일거리냐 하는 모진 선택의 고통뿐이었다. 결국 엄마는 '원치 않는' 생이별을 했다. 생계 때문에 아이들을 사회시설에 맡기는 거죠. 참 딱한 세상이….
IMF형 자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 급증,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IMF형 낙태
실지에 따른 생활고와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아이를 낳기를 포기한다. IMF형 낙태를 선택한 주부들은 특히 20대후반에서 30대초반의 직장여성으로 둘째애를 임신한 경우가 가장 많다.
IMF형 부도
매출 급감과 자금경색에 발목이 붙잡혀 잘 나가던 기업도 하루아침에 도산한다.
IMF형 정부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 초기 청와대 개편구상에서 작고 효율적인 IMF형 정부를 추구했다.
IMF형 금융분쟁
이름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잘못 섰다가 피해를 보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IMF 탓에 직장을 잃거나 봉급이 줄다 보니 돈을 빌린 사람도 계획대로 빚을 갚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개인부도를 내고 만다.
이상입니다...
두서없이 정리한거 같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앞으로도 신조어가 많이 나올듯 싶습니다. ㅡㅜ
누구신지 답변 정말 성실하시다
대단 하네요....
저때 정말 많이 죽었습니다. 아마도 전쟁 일어나는거 아니고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다시 보진 못할거에요
저는 거의 기억이 없네요. 산다고 바빠서 뉴스도 못봤는지....저도 힘들었던때네요. ;;;
저때 직전하고 너무 많이 비슷합니다.
뭔가 미친듯이 흘러갔고, 그 흐름에 타기만 하면 큰돈 벌꺼같고, 흐름에 안타면 낙오될꺼같고.
부동산 값도 마구 오르고 주변에 돈이 정말 많아 보였어요.
그런데 한방에 무너지고 부도나고 ... 무시무시하더군요.
imf 때보다 지금이 자살율이 더 높으니 상상 하기도 싫습니다
IMF형 단어들이 많네요
정말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18년이나 흘렀군요
제가 저때 언론사에서 근무....아직도 가슴아픈......그리고 생생한...
탐크루즈가 근무하는곳이군요. impossile mission force 였나?
헬게이트 오픈하던데죠... ㅠ.ㅠ
저때 교수님도 저희들에게 "남자는 군대가고.. 여자는 시집들 가라..." 라고 하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