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어에 있어서 [감]은 신성한 존재, 신인(神人)ㆍ신(神)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단군신화에 [곰]을 내세운 것은 우리의 [감] 사상과 통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여기에는 토테미즘의 냄새가 풍긴다. 감ㆍ검ㆍ곰ㆍ고모ㆍ가마......로 불리던 우리말 이름이 한자로 쓰이게 되면서 현(玄)ㆍ흑(黑)ㆍ탄(炭)ㆍ웅(熊)ㆍ부(釜)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초기에 군왕의 칭호를 이사금이라 하였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이 [이사금]의 뜻에 대하여, 덕이 많은 사람은 이가 많으므로, 떡을 물어보아서 이의 자국, 즉 잇금이 많은 사람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왕의 칭호를 [잇금]으로 한 데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풀이하여 만든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실은 [이은 검(금)] 즉 계승의 왕을 뜻하는 의미였다고 안재홍, 이병도 등이 주장하였으니, 이에 따르면 검이 곧 왕을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 檀君壬(王)儉의 [임검]과도 서로 통하는 것으로서, [검(儉)]과 [금(今)]이 다 같이 신령을 의미하는 우리의 옛말임을 알 수 있다.
2) [밝]의 원천인 새(시 : 東)는 새벽(曙)ㆍ새것(新)ㆍ밝음(明)의 뜻으로 사(沙)ㆍ동(東)ㆍ서(徐)ㆍ사(斯)ㆍ소(所)ㆍ사(泗)ㆍ시(柴)ㆍ신(薪)ㆍ서(西)......따위가 모두 [새]를 나타내고 (뜻 또는 음) 새말, 새터 따위로도 불린다. [밝]의 음을 딴 옛 지명으로 발(渤)ㆍ대(垈)ㆍ발(發)ㆍ불(弗)ㆍ부리(夫里)ㆍ부루(夫婁)ㆍ부부(扶夫)ㆍ비(沸)ㆍ비류(沸流)ㆍ불(不)ㆍ패(浿)......등이 있고, 뜻을 딴 것은 평(平ㆍ坪ㆍ評)ㆍ소(昭)ㆍ명(明)ㆍ혁(赫)ㆍ훼(喙)......등이 있으며, 박(博ㆍ憞)ㆍ백(白)ㆍ벽(碧)ㆍ면(面)ㆍ복(福)ㆍ박(朴)도 [밝]의 한 형태인 [박]의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서는 우리 나라 고유신앙의 하나로서 [밝은 뉘]의 태양 숭배인 민족 종교가 있어 후일에 가서는 [부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천도의 밝은 세상을 실현하는 고래의 민족교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부루]는 하느님께 대제례를 올리고 국가와 민족의 대사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밝은 뉘] 또는 [부루교]는 화랑들이 정신 수련을 위래 명산, 대천을 순례하는 그 주봉이름을 부루와 같은 발음인 비로로 하였으며 비로봉으로 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또 [배오개]는 붉은 고개, 배고개로서 Ꚑ은 흙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곳만은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 밝은 양지를 이루는 고개가 된다. 적은 [밝], [붉]이 [배]로 운전되고, 이는 [배]의 음사이다.
3) [달]은 땅의 어원으로서 지금의 [들]이 이[달]에서 비롯된 말이며, 조상들의 생활이 산악에 근거함에 따라 [달]은 산과 들을 함께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선조들은 이 태양이 광명을 비춰주는 높은 산, 높은 곳을 의미하는 [밝]을 붙여서 [밝달]이라고 불렀다. 즉 광명한 산악, 또는 광명을 주는 산악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특별히 크고 유명한 산에는 [밝달]위에 다시 크다는 의미의 우리말 [한]을 붙여 [한밝달]로 불렀는데, 이러한 [밝달]-[한밝달]의 명칭은 후에 한자로 옮겨져, 박달, 박산, 태백산이 되고, 또 백산, 백악, 태백산 등으로 기록되었다. 우리 나라의 명산인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등은 여러 사서에서 태백산, 장백산, 백악 등의 이름으로도 불렀던 사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명산들이 노두 [밝달], [한밝달]로 불리어졌던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또 천, 황, 왕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백이라는 뜻의 비로와 같은 의미라고 마라고 있다. 즉, 천신은 산을 통해서 인간 세계로 오며, 산악은 곧 하늘세계와 인간세계와의 매개체로, 산과 봉은 밝은 뉘->밝안->박->발이 되고 [부루]로 되었는데, 이것은 한자로 백과 같은 것이며, 후세에 승려가 불교 경전속에 있는 같은 발음의 문자를 빌어 쓴 것이 비로라 했다고 주장한다.
화랑도가 부루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사실보다는, 화랑도가 산천을 순례하며 심신을 연마하기 위하여서 관동의 여러 승지와 지리산,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명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산천이 주는 정신적, 육체적인 영향을 크게 감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화랑도가 바탕이 되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것은 잘 알려진 것이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벌서 이 진흥왕 시대(540~576)에 우리 나라 산천의 [산]의 우리말이 달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높은 곳을 [달]이라 하였고, 그것이 다시 한자의 [산]으로 고쳐지게 되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4) 말(말, 마루, 마르)은 일과 몬의 으뜸자리였다. [말]은 주재와 종주의 뜻을 지닌 우리의 옛 말로서, 말(언어), 마을(정치결성체; 혈연결성체)과 관련 있는 말이었는데, [말] [마로] [마리] [마라] [모라]...로 새끼친 말이, 뜻으로는 말, 말, 마르다따위로, 음으로는 말, 마라,모라, 마로......따위로 나타났다. 우리말의 [마루]가 대청을 뜻하고, 또 한편으로 [마을]이 관부를 뜻했던 것도 일맥상통함을 보인다. 마립간은 [말한]의 대자였는데 신라가 부족 회의를 열 때 왕이 앉는 자리, 최상의 자리가 그 마루(말)로서 거기 앉는 [한(임금)]이었던 데서 [말한(마립간)]이라 했다고 보고 있다. 마산)이 지난날에는 [말메] 혹은 [마루(르)메]였고, 모레내는 [ 내]->[말내] 또는 [몰내]->모래내, 강화도의 마니산 제천단의 마니산은 [마리산]을 음역할 때 글자(한자)를 잘못 썼던 것이며, [마리]는 즉 [머리]이니 마리산은 가장 높은 산, 거룩한 산, 즉 신산, 성악이라는 뜻이다. 말섬, 마루섬, 말도῀두도, 마도, 마로도 따위가 모두 이 [말][마루, 마르]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북한산의 우리말 지명은 [부루칸모로]였는데, 이를 풀이하면 부루+칸(으뜸)+모로(뫼)->산신령의 산이라고 한다. [칸]은 [한]과 유사음이며 신라의 마립간이나 거서간의 간(한)도 바로 이 뜻에 해당한다.20) 모로(모루)는 산의 뜻을 가진 옛말로서 이 말에서 파생된 현재말에 뫼, 마루(꼭대기), 머리등이 있다.->모러->모이->뫼, 모로->모루->머루->마루, ->모리->머리가 되었다.
5)[살]은 살음(삶)이었는데, 밝달(밝의 땅)의 살, 살->사람, 사랑, 슬기로 새끼를 쳤고 [살]은 생활의 수단이며 능력이었다. [살]을 소리대로 적은 것은 살이고, 뜻으로 적은 것으로는 전, 미, 시이다. [사리][사을][사리][살고지]...로 표기된 지명들은 [산]에 근거를 둔 것이고, 살은 다시 설, 솔, 술...로 형태를 달리하여 갔다. 강원도 고성의 명승지 삼일포의 [삼일]은 사흘, 사흘은 [살]로 그대로 읽힘으로 해서이다. 전국 각지의 송자든 마을도 이 [살]과 관계 있는 [솔]로 불리고 있었던 것을 느끼게 해준다. 또 송자가 아니더라도 소리, 소을῀소라...같은 이름도 [살]의 변형 [솔]로 심어졌고, 뜻으로는 성자 따위가 쓰이고도 있다. [살]은 또 설로 발전했으며, [술]의 변형인 수리는 다시 새겨서 취, 거 따위로도 번져갔다.
6)[갈]은 강하나 늪 또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우리 옛말의 근본 형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섯 가라국의 [가라]도 본디는 [갈]이었을 것이며, [갈]이 [가라][가리][걸][골][고르]......로 변해 갔을 것이다. [갈]은 삶의 터전으로 [고을][골]로까지 번져 왔던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갈]의 지명으로 갈메마을, 골메, 갈재, 노령, 갈촌, 갈월동 등이 있다.
7) [알]은 일과 몬의 핵심을 일컫던 우리 옛말의 원형으로 영장῀장상의 뜻이며, [알]에서 출발한 말이 [아리][올][오리][울][우르][우리]로 나타났다. 알고 있다는 것, 그 [알음]이라는 것 얼이며 한자로는 하란, 오열, 엄리, 욱리, 어라, 월라, 위례, 아례, 어란, 우라 따위로 나타내고 있었다.
8) [한]은 다, 대, 성, 일 뜻이며, 지금도 남아있는 말이다. [하다]는 [하고 한 날]따위로 쓰여 [많고 많은 날]의 뜻이 되듯이, 중세에는 [많다]는 뜻으로 쓰였다. 하나가 이 [한]에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란 모든 사물의 근원이요 시작이었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한]은 크고 많으며 높고도 강성한 외에 모든 일의 시작으로 생각되는 우리 고유의 말이었다고 생각된다. [한]은 크고 많으며 높고도 강성한 외에 모든 일의 시작으로 생각되는 우리 고유의 말이었다고 생각된다. [하늘]도 [한]과 [을]에서 시작된 말로, 하늘은 [한을]로 모든 사물의 중핵이며 시작을 의미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삼한시대의 마한, 진한, 변한의 한, 한 역시 우리말 [한]의 한자식표기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왕의 위호를 표시하는 거서간, 마립간, 오간, 이벌간의 간이나 거슬한,서발한, 서불한의 한이 모두 [한]의 사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몽고의 성길사한은 영어로 Chengiz Khen인데 한은 왕 따위에 붙이는 칭호였다. 서울 신촌쪽의 노고산은 한양의 서쪽 꼬리에 있다 하여 [한미산]이라 불렀는데, 그 [한미산]이 [할미산]이라 불리다가 [할미]의 뜻으로 [노고산]이 됐다는 것이다.
단군왕검이 아사달산에 도읍을 세우고 조선을 세웠다는 [아사달]의 [아사]는 옛말 아([일찍][새로][아침]의 뜻)에서 온 것이고, [달]은 땅(들)의 옛말이니 결국 이 이름은 [아침의 땅]이란 뜻이 된다. 그러므로 [아사달]을 한자로 풀이함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고구려, 가라(가야)와 같은 지명도 순수한 우리말인 [크다]나 [땅(나라)]의 뜻을 가진 옛말이 한자로 표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 [불]은 성기로서, 삼각산 인수봉의 옛이름 부아악을 아기를 업은 형상이라 함은 한자龁 뜻풀이에 불과하고, 그 음을 향찰식으로 읽어 [불메], 즉 남근모양의 봉우리라는 것이다. [불당굴]은 [불안골], 굳이 말하면 사타구니 안골이니, 그것은 지형을 인체에 비겨, 고봉준령 속에 폭 파묻힌 골짜기 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가오실]은 가오리, 가좌리, 가곡리혹은 가곡으로 적기도 한다. 한자의 뜻은 이 경우 아무런 상관이 없고, [실]만 옛말로 골짜기의 뜻이 된다. 이 [가아][가자][가사]는 모두 [강]즉 가장자리, 변두리로서 벌판의 가장가리 혹은 벌판을 내다보는 산 아래 마을들이 모두 그렇게 불린다. 굳이 말하면 갓동네, 기슭마을 뜻이니, 북한산 우이동 못 미쳐 수유2동 가오리나, 남양주군 천마산 의 보광사 아랫마을 가곡리, 또는 서울 서대문구의 가좌동, 인천시 북구 석남리 아래 가좌리가 모두 그런 뜻의 이름들이다.
서술산, 술모산, 수리산, 영취산, 차산은 모두 [수리뫼]이다. [수리]는 으뜸가는 수로서, <<삼국유사>>에는 범어에서 나왔다고 하여 소슬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굳이 말하면 [큰 산](큰 덩어리의 산)을 말한다. 따라서 경기도의 축령산 남쪽 기슭을 가로지르는 [수레너머고개]나 남양주군 마석의 차산리에서 덕소로 넘어가는, 같은 이름의 고개를 한자로 차유현, 차유령으로 기록하는 것은 반 풍수로 유식한 이의 표기법이오, 본 뜻은 [영너머고개]가 거기 알맞은 이름이라 하겠다.
산은 원래 다신교에서 여신산이다. 오늘날 더러 산기슭이나 절간의 산신각에서 보듯이, 백발의 늙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옆에 호랑이를 꿇어앉히고 또 부인 두엇을 뒤에 거느린 그 산신상은
모두 부권사회가 형성된 후에 이루어진 흔적들이다. 본디는 할미산, 어미산, 한자로는 노고산이나 아미산이니, 그것은 생산과 풍요를 그 산 아래 안겨다주는 이른바 [영원의 어머니]로서 의식되었었다.
티벳트쪽에서 에베레스트를 쵸모룽마, 즉 [영원한 여신의 산]이라는 듯으로 부르는 것도 그 까닭이다. 지리산 산신은 누구나 아는 성모대왕이오, 속리산은 또 대자재왕이니 모두 여신들이다. 민속적 전승에 의하면 성모대왕은 백무촌의 법우화상의 아내가 되고, 대자재왕에게는 달리 그 기슭 법주사 대중들이 이른 봄에 나무로 깎은 남근을 둘러메고 지신을 밟으면서 치올리는 시늉의 굿판을 벌임으로써 혼배를 시켰으니, 그런 민간 신앙의 제의 행사는 모두 여신의 고합으로 그 산과 그 산 기슭의 생상과 풍요를 기원하는 사례들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한자 표기를 기원하는 사례들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한자 표기로 남아있는 수리뫼의 설화적 흔적들이니, 그것이 의인화하면 수로부인, 술례부인으로도 나타난다.
수리뫼를 내려서 불당굴에 이르면 [물막골]이 나온다. 골짜기안 시내 끝에 수원지를 마련했던 흔적이 그것이다. 골짜기를 빠져나오면 덕현을 넘고 아현을 넘는다. 덕현은 [덕재] 즉 [큰 고개]이고, 아현은 [ 재] 즉 [작은 고개]이다.
한편, [솔]은 높이 솟은 모양을 의미하는 한자 고, 용의 의미요, 수리는 상, 신을 의미하는 말이다. 또 이러한 명칭은 그대로 산악, 봉만의 의미로 쓰여지기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솔], [수리] 등의 명산은 소, 우, 송, 숭, 증, 차, 취, 수리 등으로 적혀 전하는데, 이는 모두 [높고 신령함]을 의미하는 우리말 [솟을][솟아][수리] 등을 한자의 음 또는 훈으로 표기함에 불과한 것이다. 원래부터 신령한 산이라는 의미의 [수리뫼]의 명칭으로 불려지고, 그 [수리뫼]를 한자식의 영취산 또는 영산으로 옮겨 적음에 따라, 후에 선도성모의 수연도래설(연을 타고 물을 건너왔다는 이야기)이 생겨 전하기까지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들에 알맞은 이름을 지어 불렀다. 그 중심 되는 주거지의 방향에 따라, 동산, 서산, 남산, 북산 또는 서악, 북악 따위로도 불렀지만, 좀더 아름답고 유서 있는 이름으로 부르려고도 하였다. 산의 모양에 따라서는 자모산, 부악, 마이산, 용산, 종산, 발산, 상산, 옥녀봉, 장군봉, 투구봉 등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주위에서 있은 사실을 기념하여, 원수봉, 승전봉, 봉화산, 성산등 등으로 이름 짓기도 하였다. 또 많은 지방에 [신성][고용]을 의미하는 숭, 수리, 시루산과 [크다][신령]을 뜻하는 대, 한, 검, 금산 따위 명산이 있고, 삼국시대 이후 불교의 전래, 승려들의 산사생활과 함께 석가, 마니, 금강, 보현 등의 산명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산명 연기를 크게 나누어 보면 벌판, 들판은 모두 [불]계지명으로 표기되니, 불, 화, 각, 골화 등 이두식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뜻을 한자로 풀이하여 기록되기도 하였다.
2.지명의 변천
1) 지명 변천의 모습
지명이란 오랜 세월 전승되어 내려오는 동안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생기는 지리적 변화, 지명어의 음운 형태의 변천과 더불어 파생되는 의미의 변화 때문에 그 지명이 붙었던 본래의 뜻을 그릇 판단하기 쉽고, 본래의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을 지어 볼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하고 말기도 한다. 언어학적 지식 없이는 그 뜻과 내용을 옳게 판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간적으로 언어가 발달한 과정인 통시적고찰 및 수평적, 공간적으로 현존하는 언어의 형태, 성질, 내지는 방언을 연구하는 공시적방법의 비교 연구가 아울러 필요하다. 지명의 교체, 소멸, 신생의 과정에 따라, 유연성이나 의미가 변하는 원인은 다음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1) 발음의 부정확과 음운의 변천
향토인들 사이에 오랜 세월 불려 오면서 그들의 불완전한 발음의 와전이나 발음하기 쉬운 대로 나타나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특히 방언에 의한 음운의 동화현상으로 모음변이(umlaut)
현상은 뒤에 오는 '螡'음이 그대로 존속되면서 자음이 게재된 위에, 앞에 오는 '葡''蓡''薡' 따위가 '蕁''蒁'로 각각 변하는 것이데, 장승배기(박이->배기) 따위가 그 예이고, 또 비음화, 설측음화, 구개음화, 어두강화,축약, 첨가 등의 현상이 있다.
(2) 문자의 바뀜
첫째, 의미의 유사로 말미암아 표기 문자가 달라진 지명이 있는데, 부여군 홍산면은 대산현->한산현->홍산현면으로 바뀐 것으로서 [한]은 [대]를 뜻한 음차이고, [대]와 [홍]은 다 의미상 비슷한 훈차자로서 문자가 교체되었다.
둘째, 음이 같은 이유로 문자가 바뀌어진 지명으로, 칠전이 칠전(전라남도)으로 바뀐 것에서 보는바와 같이, 우리말로 [옻밭]이라 옻 칠자를 썼는데, 쓰기가 불편하여 [七]자로 빠꾼 데서 본 뜻이 숨겨지게 된 것이다.
셋째, 본래의 음이나 의미에 직접 관련 없이 전연 다른 문자를 써서 새로운 지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있다.
(3) 지역의 병합에서 달라진 지명
함풍현+연평현->함평현이 된 것처럼, 두 개의 또는 그 이상 지역을 병합할 때 각 지명의 표기 문자 중 한 자씩을 떼 내어 합하여 새로운 지명을 붙인 합성지명의 경우 본래의 의미가 달라진 경우가 있다. 이런 예는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에서 특히 심했다.
(4) 동음 견인에 의한 의미 변천
이것은 고대의 지명어를 현대어로 기록할 때, 특히 한자로 표기할 때 생기는 유연성 혹은 의미의 변천이다. 옛날에 도둑이 많아 도적골이라 한 것이 변하여 도덕골 또는 도덕이라 하다가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도덕리로 된 예와 같은 것이다.
(5) 기타 우발적으로 지어진 지명 등 그 지역의 역사, 풍속, 지리 뿐만 아니라 전설, 민담 따위도 세밀히 조사하여 이를 종횡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명명의 동기나 유연성, 나아가서는 어휘의 구조나 의미 분석 등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억지의 추론이나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하겠다.
우리 나라 지명은 외국의 지명보다 유난히 난립되어 있는데, 이것은 <1>지명은 정치적 또는 지리적 조건에 의해 변경되는데, 옛 지명이 그대로 통용되기도 하고,<2>지명이 장구한 세월을 두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음상으로 변경되어 불리게 되거나, <3>우리 나라 고유의 민속 지명이 한자로 표음화되는 과정에서 [달래섬]이 [월출도]로 잘못 명칭이 바뀌어지는 등, 지명 호칭의 난립을 조장시키는 요소가 되어 왔던 것이다. 이처럼 한 개의 지점에 수개의 지명이 복합 호칭되고 있는 데서 지명 표기에 많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 행정 구역 개편과 지명 변천
인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지명도 시대에 의해서 변천하여 왔다. 지명은 지역의 지리성과 역사성을 내포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천하여 왔기 때문에 과거의 지명을 오늘날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완전히 없어져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는 곳도 있다. 그리고 지명 중에는 시대에 따라 위치도 다른 수가 있다. 특히 변방지대의 지명변천은 시대성이 많고, 따라서 그 위치도 다른 수가 있다. 특히 변방지대에 지명 변천은 시대성이 많고, 따라서 그 위치도 유동적인 것이 많아서, 동일지명이 동일장소가 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지명으로 바뀌거나 없어지기도 하고, 다른 지명에 흡수돼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지명이 자주 바뀌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지명들이 삼국->고려->조선시대로 왕조가 바뀔 때마다 행정구역 개편을 겪었다. 고대 지명의 독법은 음, 훈등 여러 가지가 쓰여 난해한 부분이 매우 많다. 신라 제 35 대 경덕왕 때 (742~765)점차 쇠퇴해 가는 왕권을 회복하려고, 행정 구역을 고쳐 9주, 5소경, 293현으로 세분하여 전국의 지명이 일제히 변경되었으며, 당시의 지명 개칭에는 <1>옛 지명을 유사음으로 고친 것(심파화->진보, 음달 ->어해, 구지->금지), <2>음독하기 좋은 말로 의역하기 위하여 의역한 것(첨직->삼척 ,오사달 ->오산), <3>음독하기 위하여 의역한 것(구화->고구, 아화옥->비옥), <4>훈독하기 위하여 의역한 것(모산->운봉, 대산->한산)등이다. 그러나 지명의 변경은 반드시 규칙적으로 정연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고, 옛 지명의 음, 훈과는 관계없이 고친 것도 있다. 특히 군현명은 삼음, 훈과는 관계없이 고친 것도 있다. 특히 군현명은 삼국 때부터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그 때마다 그 이름을 고친 것도 있고, 오랫동안 그 명칭을 고치지 아니한 채 사용한 것도 있다.
일제 때 전 군, 면을 폐합하였다. 1912년 1월 1일 317군, 4,315면이었던 것이, 1933년 1월 1일에는 220군, 2,446읍,면으로 감소되었는데, 이때 옛 군, 면 이름이 없어진 것이 적지 않았다. 또 리동명도 여러 개의 리, 동을 폐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 많았으니, 1912년 62,532리, 동이던 것이 1933년 1월 1일에는 28, 336개로 격감되었으므로 리, 동명이 없었진 것은 더욱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이름 가운데 현재와 같이 리 혹은 동으로 표시된 것이 많았으나, 예외로 리, 동의 명칭이 붙지 않은 것도 있었다. 리, 동명의 변경 방법은 단지 리를 동으로 개칭하거나 동을 리로 개칭한 것이 있었고, 또는 전, 항, 등, 곡, 치 등과 같이 지형, 지세를 표시하거나 정과 같이 교통의 뜻을 표시한 것 등이 있었다. 특기할 사항은 이들 리동의 폐합에 있어 유서 깊은 지명이 한낱 지방 관리에 의하여 임의로 개폐되어 하등의 연고도 없는 무의미한 지명으로 바뀐 것도 적지 않아, 고사나 지명 연구에 많은 차질을 빚고 있다. 2개 내지 10여 개 리, 동을 폐합하여 새로운 동명을 그대로 새로운 호칭을 붙이거나 병합된 리, 동 중1개 리의 동명을 그대로 새로운 동명으로 한 것이나 다시 옛 지명을 동음(同音)또는 유사음(類似音)의 다른 한자로 고친 것, 혹은 쉬운 한자로 바꾼 것도 있다. 예컨대, 上長里를 上長里로, 士基里를 沙器里로, 蛤井洞을 合井洞으로 고친 것들이다.
3) 행정 단위의 승강과 지명
고려 이후 조선 말기까지에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왕조와의 관계에 따라 지역이 승격되기도 하고 강등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중앙집권체제를 기반으로 성립된 고려, 조선왕조의 정치적 체제 구축을 위한 현실적 통치책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지역이 승격된 사례를 보면 첫째, 외군의 침략이 있을 때 그 고장에서 출생한 장수가 이 침략군을 격퇴하거나 그 고장 주민이 일치 단결하여 침략군이나 반란군을 격퇴하였을 때에는 그 지역을 승격시켰다. 공민왕 10년 (1361) 홍건적에 의하여 송도가 침략당했을 때 왕이 남쪽으로 몽진한 뒤에 이웃 여러 고을에서 대항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안성주민들이 도둑떼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하여 이 공로로 안성현이 안성군으로 승격되었다.
둘째, 지방에서 국가 공신이 배출되면 그 지역을 승격시켰다. 고려 태조 13년 (930)에 후백제의 견훤을 격퇴할 때 안동군의 장 길, 김선평, 권 행이 태조를 도운 공이 컸으므로 안동군을 안동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셋째, 왕비(王妃)의 고향이나 어태(御胎)를 묻은 곳은 그 고장을 승격시켰다. 인천은 고려 숙종조(1096~1105)에 모후(母后)인 예태후 이 씨(李氏) 문향이라 하여 소송현에서 경원군으로 승격되고, 인종조(1123~1146)에는 모후 순덕왕후 이(李)씨의 문향이라 하여 인주라 하였으며, 공양왕 2년 (1390)에는 7대(문종조~인종조) 어향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되었으나, 조선 태종 13년(1413)에 인천군으로 강등되고, 세조 6년(1460)에 모후 소헌왕후(召獻王后) 심 씨(沈氏)의 외향이라 하여 다시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한편, 지명이 강등된 사례(事例)를 보면 첫째, 적군에게 항복하면 강등시켰다. 강원도 양양군은 고려 고종 8년(1221)에 거란병을 잘 막아 양주방어사(楊洲防禦史)로 승격하였으나 같은 44년(1257)에 호족에게 항복한 사건으로 덕녕현으로 강등되었다.
둘째, 인륜(人倫)에 어긋나는 이를 한 사람이 있으면 그 고을을 강등시켰다. 경상도 밀양군은 조선 태종 때에 밀양도호부였으나, 중종 13년(1518)에 이 고을에서 부친을 살해한 자가 있었으므로 강등하여 밀양현이 되었다.
셋째, 역적이 나온 지역은 강등시켰다. 충청도 중원군은 명종 4년(1550)에 이 홍윤의 사건으로 강등되어, 유신현으로 되었다가 진으로 되고, 광해군 5년(1613)에 유 인발의 반역으로 인하여 중원현으로 강등되었다.
4) 지방특수행정 구역
신라, 고려 시대 군,현 이외의 지방특수행정 구역으로 장,향,처,소,부곡이 있었는데, 이는 지방제도사뿐 아니라 행정구역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 읍면의 지역이나 명칭 설정 근거에 기여하는 바 크다 하겠다. 특히 신라 때에는 주와 군,현을 설치 할 때 그 면적이나 장정들의 인구 수가 아직 현이 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고을은 향 또는 부곡이라 하여 그 고을이 있는 군,현에 소속시켰다.
고려 때에도 소라 칭하는 고을이 있었는데, 금소,은소,동소,철소,사소,주소,지소,와소,탄소,염소,묵소,자기소,어량소등의 구별이 있어서 각각 그 고장의 특산물 산출을 담당하였고, 또 처,장이라는 고을은 궁전이나 사원 및 내장실에 예속되어 세금을 부담하였다. 부곡의 발생은 상고시대의 씨족 제도가 붕괴하여 속민 제도가 생기고 속민 제도에서 부곡 제도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씨족 제도에 따르면, 공동체 상호간의 정복전에서 승리한 종족이 패배한 종족을 복속시킨 데서 종족노예제의 소산으로 향, 소, 부곡이란 것은 지역적 차별로서 신라 때부터 조선조 초기까지 특수한 지방 하급 행정 구역으로 지칭되어 왔었다. 따라서 그 지방에 정착하여서 거주하는 주민은 일반 양민과는 신분적으로 구별되는 천민들이었으며, 광산, 제염, 목장에 종사하는 주민들이었다. 이런 주민들에게는 갖가지 제약이 있어서 고려 시대에는 선비나 양민들에게만 허가된 국학에 입학할 자격이 없었다. 형제면에서는 노예에게 부과하는 형벌과 같은 정도로 다루며, 자손들의 귀속문제에 있어서는 천인으로 대우하며, 승려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등, 실로 많은 신분상의 제약을 받았다. 이렇게 신분상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같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국가나 상류사회에 공납하는 농경이나 광산 활동 등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조선 초기에 이르러 소멸되면서 주, 군, 현으로 흡수되고, 뒤에 읍면 성립의 기본 골격(관할 구역 명칭)이 되었다.
오늘날 전국 각 시, 군, 읍, 면 지역 중에는 관할 지역의 불합리성으로 인하여 조정을 해야 할 곳이 많다. 이는 조선 태종 때 시행된 견아상입이란 제도에 기인된 부산물로서 당시 지방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특수 시책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의 영신폐현의 주에 보면, 현재 존재하지 않은 영신현이 있었는데, 그 고을이 옛날에는 아주 작은 넓이로서 양성현에 속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견아 상입제에 의하여 수원부에 이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견아상입 제도는 중국의 한나라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는데, 행정 구역을 마치 개의 위아래 이빨처럼, 윗니가 아랫니의 사이로 쑥 들어가 박히고, 아랫니는 윗니 사이로 들어가 서로 엇물리게 경계를 정하는 제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하의 지방관이 모반하였을 때에는 인접한 다른 고을에서 공격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태종이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비할 때 이 제도를 써서 모든 군현이 서로 엇물리도록 하였기 때문에, 군현의 연혁을 밝히는 데에 아주 복잡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군현 구획법이 조선조 말기까지 계속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등의 문헌이 모두 이 제도를 기준으로 설명되어 있다.
3. 시대별 지명 변천사
통일신라 시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 22대 지증왕때(500~513)까지는 임금을 <왕>이라 하지 않고, 거사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등, 순 우리말 이름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땅이름에도 [永同縣本吉同縣...淸風縣本高句麗沙熱伊縣...]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길동현이 [영동현]으로 되고 청풍현은 본래 고구려 때의 [사열이]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동현의 [永]은 길동현의 [吉]을 우리말 [길다]로 풀어 [永]이라 하고, [사열이]는 [사늘하다]는 뜻으로 새겨 [淸風]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말을 향찰식으로 표기한 것마저 [永同],[淸風]따위로 뜻풀이해서 한문화해 버렸다. 또 이런 보기는 전국적으로 수많이 있다. 오늘날의 대전은 본래 [한밭]이고 이리는 [솜리]이며, 청주의 학평리는 [두룸벌], 두송리는 [잣골]이었다. 그래서 행정지명으로는 앞것이 되어있으나 현재도 그 지방 주민들은 거의 토박이 이름대로 부르고 있다.
그러면 순 우리말 지명이 한자식으로 된 유래를 잠깐 살펴보자. 제 30대 문무왕8년 (668) 신라는 3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의 잔존 문화가 통치를 방해하므로 국력을 배양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그때는 우리의 고유문화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던 중에 당나라로부터 한문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드디어 제 35대 경덕왕16년(757)에 왕은 결단을 내렸다. 그때까지는 주로 구전하던 고유지명을 모두 한자식으로 통일, 표기화했다. 옛 고구려, 백제의 영토까지, 온 나라에 걸친 대대적인 작업이었다. 군현의 명칭은 물론이고, 3자 이상 토박이말로 된 다른 주요 지명까지 모두 2자를 원칙으로 하는 한자식 지명으로 고쳐지었다. 그 뿐 아니라 인명, 관명까지 그렇게 하자니 억지와 무리가 따르게 되었다. 우리 토박이말을 한자로 표기하자니 그 작업이 매우 어려워서 어던 것은 음으로, 어떤 이름은 뜻으로 적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 행정 구역 이름을 모조리 한자로 통일하였으니, 그 시행이 1,200년도 더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
우리 나라의 행정구역은 당제를 모방하여 산천의 세와 호족들의 세력을 주된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또 행정구역의 계층적 구분에 있어서는 신라 시대에는 주, 소경, 군, 현으로, 고려 시대에는 경, 부, 목, 군, 현, 속군, 속현따위로 등차를 두었으며, 경, 부, 목과 주요 군현에는 중앙에서 감무관을 파견하여 그 고을과 여타의 속군, 속현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는 전국 각처에 산재하는 호족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을 통하여 민중을 지배하되, 그들의 거주지에 주, 부, 군, 현과 그밖에 향, 소, 부곡 등도 동시에 거기 상응하는 지위와 격식을 주는 것이니, 주, 군, 현의 칭호는 동시에 호족 세력의 대소, 강약과 주민 신분의 고하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즉 이러한 등차는 국가의 군사상, 행정상 중요성이나 왕실의 연고, 호족의 세력 관계 등에 연유한 등차였지만, 고려 때에는 근본적으로 호구의 다소, 토지의 광협에 따름으로써 이를 합리화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고을의 이름은 신鿁 경덕왕 때 중국식으로 개칭한 후, 고려 태조 23년 (940)에는 여러 주, 부, 군, 현의 이름을 개정한 데에 이어 성종 11년에는 다시 주, 부, 군, 현과 관, 역, 강, 포의 이름까지 개정하였다. 같은 14년에 설치한 10도는 당의 도명과 마찬가지로 산천 경계에 의하여 명칭을 정한 것이다.
한편 왕족의 안태지, 왕후나 외척의 고향, 왕사, 국사등의 출신지, 지방인의 국가와 완에 대한 공죄,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도나 부모 살해 등의 요인들 때문에 고을의 승강이나 행정구역의 치폐가 자주 이루어졌던 것이다. 군, 현 이름에 주자가 붙는 곳은 대개 큰 읍이어야 하는데 부, 군은 고사하고 중소 현에까지 [주]자로 된 명칭이 많아 같은 [주]자를 쓰는 마을에도 목이나 부뿐만 아니라 지사부, 속군, 속현 등이 허다하였다. 고려 제 8대 현종 9년(1018)지방 제도 개편 때, 전국을 경, 부, 목, 주, 진, 현 등으로 구획하여 외관을 두고, 나머지 군현과 향, 소, 부곡 등을 지방관이 있는 주현에 분속 시켜 관내로 하였다. 속현은 원칙적으로 외관이 파견되지 않고 있는 주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향교는 대개 속현에는 두지 않았으나 특수한 곳에는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 주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속현에는 조세, 공물의 수납, 조조, 진제(구제)등의 필요에서 각종 창고를 두기도 하였다. 고려 때에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지리지>>가 간행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새 지명이 많이 수록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간행 때 새 지명이 수록된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실린 지명은 8,129개인데 별도로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에는 7,202개의 지명이 실려있다. 양성지의 <<팔도지리지>>, 노사신등의 <<동국여지승람>> 및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는 지명이 약 20,000개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에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 거의 한자로 표기되어, 할미산이 노고산, 모래내는 사천, 애오개는 아현, 삼개는 마포와 같은 식으로 되어 있다. 고려 때는 중앙행정 감독의 편의 상 전국을 5도, 양계로 하고 조선시대에 8도제를 실시할 때 도의 명칭은 도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부, 주의 이름을 따서 정했고, 그 고을의 격이 승강될 때에는 도명도 바뀌어졌다. 중국처럼 산천, 지세 등 자연 경계명을 사용하지 않고 주명위주의 도명이기 때문에 해당 주, 부가 반역, 강상죄등의 비상 사태로 등급이 격하되면 따라서 도명도 바뀌게 되는데, 그 가장 심한 예가 조선시대 초의 함경도와 후기의 충청도의 경우였다.
도명의 변천을 보면 이러하다.
* 양광도의 일부-충청도-공청도-공흥도-충흥도-충청도(충주, 청주, 공주, 홍주 등 읍명을 적용)
* 전라도-전남도-광남도-전광도-전라도(전주, 나주, 광주, 남원 등 읍면을 적용)
* 고려 때 경상주도, 경상진주도, 경상도 등등으로 불렀으나 조선왕조 전기를 통해 경상도로 고정(경주와 상주를 적용)
* 고려 때에 강릉도와 교주도 및 회양도가 합쳐서 교주강릉도라 불리어졌으나, 조선시대에는 강원 도-원양도-강양도-강원도(강릉, 원주 양양을 적용)
* 고려 때의 서해도, 조선시대의 풍해도-황해도-황정도(황주, 해주, 연안을 적용)
* 고려 때의 동계가 조선시대에는 영길도-함길도-영안도-함경도(함흥, 영흥, 길주, 경성을 적용)
* 고려 때의 패서도, 북계, 서해도가 조선시대 평안도로 고정(평양과 안주를 적용)
반계 유형원은 도명이 위와 같이 자주 바뀌는 폐단을 비판하여, 우리 나라는 종전부터 주군은 사람으로 인하여 그 등급이 오르고 내려지는 까닭에 변경함에 상도가 없고각 도는 주를 따라 그 이름을 정하기 때문에 또한 자주 변경되는 것이다. 즉 충청도의 경우, 충주가 현으로 강등되면 공청도가 되고 청주가 현으로 강등되면 공홍도가 되며, 공주를 현으로 강등하게 되면 또 고쳐서 홍청도로 하는 것과 같이, 도명을 바꾸므로 갈래가 많아 인식되지 않으니, 차라리 천고에 변함이 없는 산천의 이름을 따서 도명을 고정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라 제안하고 있다.
태종 3년(1403) 11월 사간원의 진언에 따라, 같은 13년 10월 도명 개편과 동시에 읍호도 개칭케 되었으니, 즉 종 2품 부윤의 임지인 부와 정 3품 임지인 목이외의 고을에는 주자의 사용을 금하게 하여 도호부이하 군현은 모두 [산][천]의 두 글자로 대체했다(대도호부에도 [ ]자 사용을 금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자 대신에 평, 원, 성, 양 등으로 개칭한 사례도 있었다. 수주->부평, 수주->수원, 구주-> 구성, 양주->양양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군현제를 개편하였다. 고려 왕조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였지마는 신라 시대부터의 토호적 향리의 세력이 강하여 그들을 주, 부, 군, 현에 계층적으로 편입시키고 주, 부와 일부 군, 현에 파견관을 두어 이들을 감독케 한 데 불과하고, 외관이 파견되지 못한 이른바 속군, 속현은 주된 부, 군, 현의 감독하에 토호적 향리들이 다스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 결과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은 토호들의 세력 판도에 의하여 혹은 크고 혹은 작아졌고, 또 대체로는 너무 세분되어 고르지 못하여 견아상 또는 월경처도 많았다.
이와 같은 고려의 행정 구역에 대해 조선왕조가 실시한 시책은 첫째, 향리가 통치하던 속군, 속현, 향소, 부곡등 각 임내(관내)의 폐지, 둘째, 군현의 병합, 이속에 의한 개편, 셋째, 월경처는 물론, 견아상입지를 정리하는 일 등이었다. 태조 때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이 작업은 태종 14년 (1414)에 군현을 폐치, 병합할 것을 결정하여, 그 실시를 각도에 시달하고 세조 때 종결을 보게 되었다. 그 병합과 이속의 예를 보면 용구와 처인을 병합하여 용인으로 하고, 부령과 보안을 합하여 부안으로 하였으며, 계림(경주) 임내의 해안을 대구로 이속시키는 것 등이었다.
<1> 조선의 지방행정상 부, 목, 군, 현의 계층은 국가와 왕실에서 인정하는 주요도, 토지의 광협, 호구와 전결이다. 소로 등차를 두었는데, 대도호부와 목은 민호가 1,000이상, 전결은 10,000이상이었다.
<2> 모든 부, 목, 군, 현은 모두 도산하에 있는 병렬의 단위로서 통례적인 명칭을 고을이라 하고, 그 지방관직들을 통칭 수령이라고 불렀는데, 다만 그 수령의 품계가 대도호부사(정 3품), 목사(정 3품), 도호부사(종 3품), 부윤(종 4품), 군수(종 4품), 현령(종 5품), 현감(종 6품)으로 각각 다를 뿐이고, 행정적으로는 모두 병렬적인 지위에서 관찰사의 통할권안에 든 것이 고려조와 달랐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령이 군사직을 겸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로 말미암아 수령간에 상하의 계통이 서게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렇듯 수령이 겸임하는 군사직의 상하관계는 일단 유사시에 수령간의 명령 계통을 확연히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3> 조선왕조에서도 왕자, 왕비의 안태지나 외척의 고향, 충신, 효자가 난 고을 등의 현을 군으로, 군을 부로 승격시키고 반면, 역적, 간신배가 난 고을은 부를 강등하여 군으로, 군을 낮추어 현으로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폐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으나, 대체로 3년 정도가 지나면 다시 복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신라와 고려 초에 지명을 취하여 왕명을 붙인 것과 인명을 취하여 지명을 개칭한 바 있으나 이는 드문 예이고, 일반적으로 이름 혹은 이름자를 취하여 지은 지명은 적은데, 고려조 이후 혐명사상으로 인하여 이름자를 취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특히 지명 중 왕명, 대신의 이름, 궁전명 등은 피하여 개칭케 한 바도 있었다. 군현을 병합할 때 새로 정해지는 이름에 대해서는 복잡한 문제가 많았다. 주와 현처럼 등급의 고하가 있는 것을 병합할 때, 그 이름은 으레 상위의 지명이 하위의 것보다 우선 되겠지만, 같은 등급의 거슬 병합할 때에는 쌍방이 모두 자기 고을이름을 새로 정하는 군현명의 첫 자에 배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하여, 그 지방 주민들의 세력 강약에 따라 군명의 배자선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주현과 속현을 병합할 때에는 원칙상 주현의 명호를 앞에 배치하고 군현과 향, 소, 부곡을 병합할 때에는 의당 군현의 글자를 앞에 두었다.
한편 조선 초기에 이르면 호구수를 기준으로 하여 군현의 등급과 칭호를 정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엿보인다. 군현의 등급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건 가운데 인구 수가 기본이 되는 것은 고금이 다를 바 없으나,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기준이 무시된 채, 여러 가지 불합리한 요인에 의한 군현 등급의 승강이 빈번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종조부터는 그러한 폐단은 점차 없어지고, 세종의 말대로 군현 명호는 그 지방 인구의 다과에 따라 정해졌다. 이러한 원칙은 특히 태종 13년(1413)지방 제도의 일대 개혁이 있은 뒤부터 일반화한 듯하다.
<4> 부, 군, 현 밑에는 면또는 사, 방이 있고 그 아래로 동, 촌, 리, 계가 있었다. 면, 사, 방 가운데 부, 군, 현의 청사 소재지를 당시 통칭 <읍내>라 하였다.
<5> 군, 현의 청사 소재지, 즉 통칭 읍내들은 그 규모에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정보의 집적지였고, 대부분 5일마다 시장이 서서 상업적 거래지였으며, 그 주민의 상당한 부분은 비농업적 또는 반농업적 직업인들이었다. 특히 당시의 정보 매체 중 가장 큰 몫을 담당한 도로나 하천의 접합 지점에다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읍내에서 이웃 읍내까지의 거리가 60리에서 110리, 평균 약 80리 정도가 보통이었다. 예를 들어 경주를 중심으로 이를 보면 울산, 언양, 영천은 각 80리이고, 연일은 60리, 흥해, 장기는 각110리였다. 읍내에서 그 영역 내의 모든 중심 마을은 일일 왕복권 내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보행 교통에만 의존했던 시대에 일일보행의 적정량인 약 80리(30km)를 안팎의 위치마다 결정 지점이 생겨 큰 마을이 생기고, 여기에 군, 현의 청사가 서게 되어 <읍내>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통례가 그렇다는 것이고 높은 상이 연이은 평안, 함경, 강원의 3도에는 읍내 상호간에 일일 이정(里程)을 기준할 수 없었으며, 반면 삼남에는 토호의 세력이 강했으므로
군현 개편이 뜻대로 되지 않아 30~40리에 읍내가 존재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주, 부, 군, 현이 각기 읍치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등 몇 개(주로 4면)의 방향으로 면을 나누고, 이런 면 밑에 리, 동, 촌 등 자연부락이 부속돼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면, 리, 촌, 사, 동, 방 등의 용어가 실제는 명확한 구분 없이 서로 혼용되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던 것이다. 한편, 면, 리제의 실시와 함께 초기의 권농관과 이정에는 재향품관 내지 유식자들이 임명되었던 것이다. 권농관은 제언, 관개, 파종 등을 관리하는 수령의 직사에서 나온 것이다.
19세기말, 일본이 대륙 침략의 길잡이와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한국의 지형도를 간행하려고 본격적인 지명 조사에 착수했으므로 서울 합정동의 <蛤>을 <合>으로 고치는 따위 등, 일본인들의 사용에 편리한 지명으로 변경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구리개라 하던 것을 일제가 저들의 어운을 따서 황금통이라 변경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다시 우리말로 을지로로 바꾸었다. 또 조선 시대의 한성을 경성으로 진고개는 본정(혼마찌)으로 일제가 바꾸었는데, 광복 후에 각각 <서울>, <충무로>로 개정하였다.
1914년부터 실시한 일제의 행정 구역 폐합과 같은 행정상의 커다란 변혁 때마다 고우어 지명은 차츰 소멸 일로를 밟게 되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창씨 개명에 앞서 전국적인 지명 변경을 시시한 것이었다. 지명과 성씨는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두 개 이상 지명의 한 자씩을 떼어 붙여 새 지명을 만드는 , 소위 합성지명이 이 때 무의미하게 양산되었다. 또 당시 지형도에는 일본 문자인 [가다가나]를 병기했기 때문에 혼란이 심했다. 오늘날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의 지명이 서로 다른 점이 많은 것은 이 지형도 간행 때 일본군이 저질러 놓은 결과이다.
정부 수립 후
1945년 8월, 광복 후에는 다시 한국적 지명으로 개칭되었으며, 유럽과 미주등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명(호, 시호 등)을 취한 지명으로 개칭된 것도 있다. 그리고 행정 구역 분리 때에 새 지명을 붙일 경우 복고적인 지명을 취하는 수가 많다. 그래서 지명에는 신라 이후 변화 없이 그대로 현재까지 계속된 것이 있는 반면에 여러 번 개칭된 것도 있으며 , 혹은 동일한 지명이 장소(위치)가 상이 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명을 시대에 따라 명확한 위치를 알아야 역사 연구에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10여 년 전, 한 때 한자 교육 폐지에 따라 부정확한 발음 지명과 오기가 많아서 지명의 혼용, 오용이 많아졌다. 한편, 지도상의 지명과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르거나 차이가 있으면 군사상에도 혼란을 겪는다. 우리 지명의 로마자 표기를 살펴보면, 신문, 잡지에서는 메큔, 라이사워 방식(M.R 시스템)과 정부에서 제정한 문교부 방식(M.O.E 시스템)의 혼용으로 어려움과 혼란을 겪어왔으나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두 가지 방식을 절충한 표기 방식이 새로 채택되어 시행 중에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한 곳이 두 가지 이상의 이름으로 불리는 복합호칭 지명도 지도상의 통일 표기를 위하여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1958년 국방부 지리 연구소에 중앙 지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각 도, 시, 군, 읍, 면 지명제정위원회가 구성되어 지명을 조사, 심의한 결과 남한 지역만 총 124,198개의 지명이 채택되어 이를 토대로 신판 제도를 제작하였다.
현재는 1980년 측량법에 중앙지명위원회와 각급 지방에 지명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규정하여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