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놀이터라곤 동네 야산, 골목길, 냇가가 전부였다.
집근처에 야산이 있다보니 그 산에서 지낸 시간이
상당히 많았다.
그 산에는 대머리 묘지도 있었다.
아이들이 밟고 뛰고 노는 통에
풀이 자라날 틈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주변머리만 남은 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이따금 연인이라도 오를라치면
아이들은 낮은 포복으로 기며
그 연인들의 뒤를 쫒곤 했다.
어른 들만의 행위를 훔쳐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져보았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성공해본 적이 없다.
여름이면 온통 아카시아나무로 뒤덮였다.
가장 빨리 자라고
푸르러보이게 하기엔
아카시아 나무가 최고였던 것이다.
덕분에 소나무 다음으로
나라를 망치는 나무로 악명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그 산 입구에 울타리가 쳐지고
아이들은 오를 수 없는 산이 되고 말았다.
녹화사업의 일환이었고
그 산을 지키는 산지기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말았다.
그 권력은 당시 녹화사업을 펼치는
대통령의 권력보다 더 높았다.
산에 몰래 오를 때는
그 할아버지가 있나없나 살펴야 했고
산에서 신나게 놀다가도
산지기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순간,
숨어라!라는 소리가 들리고
몸을 감추는 순간 우리는
기어서 순식간에 이삼백미터쯤 달아나서
돌아서가는 산지기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산에 올라가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동네 친구들을 만났다.
하필 그 때 산지기 할아버지가 오고 계셨다.
이놈들! 하는 소리와 함께 친구들을 줄행랑을 쳤고
난 산에 올라가기 전이었으므로 도망가지 않았다.
나는 붙잡혀서 할아버지에게 뺨을 얻어맞았다.
아마! 내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른에게 욕을 해대었을 것이다.
죄없는 나를 왜 때리냐고.
그러나 나는 친구들에게 보여줄 경고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 할아버지가 잡은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을게다.
현행범이 아니던가.
설령 현행범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한다 하더라도
숱하게 산에 오르내린 전력이 있던 터였으므로
그 산지기 할아버지도 당당한 권력의 행사였을 것이다.
그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위기철의 '아홉살 인생'을
딸내미가 알뜰시장에서 건져온 덕분에 읽었다.
10년을 지나도록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그 위기철의 소설을 이제서야 읽은 것이다.
화장실에 들고들어갔다가
다 읽은 다음에서야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위기철이 쓴 '논리야 놀자' 던가,
제목에 대한 기억이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내용은 더 가물가물 하지만,
그 책도 어른들이 읽어도 될 만한 책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하는 말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며
논리에 맞는 말인지 반성해보게 하는 책이었던 것 같다.
위기철은 어른이 읽어도, 아이들이 읽어도
좋을 만한 책들을 쓰는 것 같다.
아홉살 인생,
내용도 상당하지만
그 제목이 근사하다. 그리고 예사롭지 않다.
아홉살.
아홉.
아홉은 완성의 숫자이다.
또한 또다른 인생을 위한 전환점이기도 하다.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그 때마다 느끼는 감정들은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그냥 아홉은 아마 별다른 감정이 없지 않았나 싶다.
있었을까? 있었다면 두자리수를 채운다는
뿌듯한 심정이었을 듯하다.
양 손에 가득 과자를 쥐었을 때
느끼는 감정같은거 말이다.
다만 작년에 느꼈단 아홉수는
이제 내리막의 아홉이었다.
올해도 이제 저물고 있다.
만으로 39살,
그나마 위안을 삼았던 만나이도
이제 40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아홉수를 향해 갈 것이다.
첫댓글 새로운 아홉수를 향해..같이 가자구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