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leesunsin1.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leesunsin2.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leesunsin3.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leesunsin4.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leesunsin5.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DSC06631.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DSC06632.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DSC06636.jpg)
▲ ▼ 이 충무공 가묘(假墓) 터, 80여일 간 이 곳에 임시로 안장했다가 선영이 있는 아산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DSC06637.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DSC06639.jpg)
▲ 클릭하시면 약산도 서북쪽 땅이 가로막아 바람과 풍랑을 막아주는 묘당도 앞 바다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DSC06640.jpg)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DSC06642.jpg)
▲ 읽는 이여 저 푸른 바다와 멀고 가까운
섬과 산이 그 때의 그것이니 여기서 李(이) 忠武公(충무공)을 생각하라. 친히 뵈옵는듯
하리라.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11%2F07%2F28%2Fahimsa_DSC06641.jpg)
|
◈ 충무공 가묘(假墓) 터 고금도 ◈
● 강진 마량에서 고금대교를 건너니(2011. 7. 24,日) 충무공 가묘터 안내판이 보입니다.
아침에 먹은 맥주와 음식의 부조화로 화장실 기운이 잦아 제대로 느끼고 감상할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습니다.
참피온님의 글을 옮겨(각색)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예전 글을 다시 올립니다.
물 난리에 모두 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
(음력)1598년 11월 18일 저녁 6시경.
"5백척 규모의 왜선단이 남해로부터 쏟아져 나와 노량으로 몰려온다!"는
급보가 고니시 유키나가 군의 도주를 막기 위해 왜교성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조명 연합함대 지휘부에 전달됩니다.
이 때 조선으로 건너온 전 왜군부대들은 히데요시 사후, 본국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은 상태였고,
고니시군을 제외한 전 왜군부대들은 일본으로의 철군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있었죠.
그러나 고니시군만은 이순신에게 퇴로를 봉쇄당한 채 순천 왜교성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다급해진 고니시는 남해에 주둔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에 구원을 요청하죠.
이미 고니시의 탈출작전을 간파하고 있던 이순신은 자칫하다가는
안팎의 적에게 포위되어 협공당할 것을 우려해 먼저 시마즈군부터 치기로 합니다.
조(朝)명(明) 연합함대는 왜교성 앞에 복병 함대를 남겨두고 저녁 10시경 기동하여
19일 새벽(am) 2~4시경 노량에 도착합니다.
결전을 앞둔 8천명의 조선수군은 전의를 불태웁니다.
대다수의 병사들은 원균 통제사가 지휘한 칠천량해전에서 수중고혼이 된 병사들과
정유재란때 코 베이고 도륙당해 죽은 백성들의 유족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전의는 처음부터 비장했죠.
<조명 연합함대의 규모/전투편제>
* 전선: 250여척
* 병력: 2만1천명(조선군 8천 / 명군 1만3천)
* 총사령관-진린 / 좌선봉장-등자룡 / 우선봉장-이순신
연합함대로서는 노량의 왜군들을 최대한 빨리 격파하거나 쫓아낸 후,
회항해서 고니시군을 무찔러야 했습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니시는 임진년에 왜군 선봉군 제1대를 이끌고
부산-충주-한성-평양을 함락하며 선조임금과 피난조정을 위협했던 제1의 원흉이었고,
또한 정유재란 전, '요시라'를 통한 반-간계(奸計)로 충무공을 옥에 갇히게 했던 원수였죠.
게다가 불과 수개월 전, 칠천량에서 조선함대를 송두리째 파멸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고니시가 퇴로(退路)를 열어달라며 온갖 교설과 뇌물공세를 퍼부었음에도
"환란의 원흉을 어떻게 보내줄 수가 있겠느냐!"며 해상 봉쇄망을 풀지 않았던 것이죠.
다시 말해서 장군에게 있어서 진정한 적은 다가오는 시마즈군이 아니라
왜교성의 고니시군이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죠.
해전이 시작되자 조.명 연합함대는 서양식 대포와 동양식 화약무기,
심지어는 장작불에 불을 붙여 던지는 근접전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법을 총동원한
총력공세로 왜군들을 몰아칩니다.
야간에 치러진 전투였던 관계로 해전은 초전부터 대혼전으로 접어들었고,
이같은 혼전 속에서 왜군 시마즈 요시히로의 직속 선단이 야음(夜陰)을 틈타
연합함대 사령관 진린 도독의 본함대를 기습합니다.
그러나 시마즈의 선단은 명군의 강력한 반격에 뒤로 밀려났고,
밀리다보니 뒤가 막힌 관음포구 속에 갇히게 됩니다.
진린의 선단은 관음포로 추격해 들어가 왜선단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때 포구 외곽에 포진해 있던 또 다른 왜선단이 시마즈 선단을 구원하기 위해
진린의 선단을 포위 공격합니다.
이렇게 되자 진린의 본함대는 포구 안팎의 왜선단으로부터 협격을 받게 되었고
사령관 진린은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에 진린은 전 함대에 "나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우선봉장 이순신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린을 구해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렵 명나라의 다른 장수들은 모두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진린만은 조선 조정과 이순신의 간청을 받고 생사를 무릅쓴 최후 기동에 동참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령을 떠나 의리와 도의적으로도 최선을 다해 구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진린을 구원하려는 과정에서 좌선봉장 명나라 등자룡과 진린의 아들이 피탄되어 전사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진린마저 전사하게 된다면 전투의 승패를 떠나 이 문제는
훗날 명나라와의 정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진린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함대에
"진린 도독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관음포를 향해 즉각 달려갑니다.
11월 19일, 오전 6시경.
조.명 연합함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진린을 구원하기 위해 관음포로 내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왜군들의 시야에 이순신의 기함이 통제사의 깃발을 펄럭이며
조총의 유효사정거리 50m 안으로 접근해 오는 광경이 잡힙니다.
왜군들로서는 7년간을 기다려온 회심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표적을 확인한 왜군 조총수들은 이순신의 기함 장대(함교)를 목표로
일제히 밀집사격을 퍼붓습니다. 수천~수백발의 조총탄이 탄막을 형성하며
이순신의 기함 장대로 쏟아집니다.
그 중 한발이 2중 3중으로 쳐놓은 방패와 방패 사이를 유탄처럼 날아들어
북을 두들기며 독전하고 있던 이순신의 가슴에 명중합니다.
옛 싸움에서는 장수가 전사하게 되면 이기고 있던 싸움도 전세가 역전되어
장수를 잃은 쪽은 대타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전사 사실이 아군이든 적군이든 외부에 알려졌다면
조명 연합함대는 칠천량에서와 같은 패전을 당하게 되고,
이순신을 포함한 연합함대 수뇌진의 시신마저 빼앗겼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러한 점을 우려해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즉 그때가 죽을 시점이 아닌 위기의 시점임을 강조한 것인데요,
이 대목은 장군의 위기관리 리더십이 빛을 발한 불후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무공의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숙종때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의 <김충장공유사>라고 합니다.
이민서는 여기서 '이순신은 전쟁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민서의 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90년 후에 쓰여졌죠.
즉 이민서는 임진왜란 11년 후에 나온 이분 공의 <이충무공행록>을 읽지 못한 가운데
자신의 취향에 따라 글을 쓴 것이죠.
당시 <이충무공행록>은 소량 발간되었을 것이므로 정조대왕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대량으로 발간되기까지는 일반의 사랑방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민서의 주장대로라면 충무공에 앞서 진린을 구원하기 위해 돌진해 들어가다가
피탄되어 전사한 명나라 등자룡도 갑주를 벗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당시 조, 명, 왜의 갑옷은 조총의 유효사정거리 50m 안에서 피탄되면 예외 없이 뚫렸습니다.
또 충무공은 임진년 5월 사천포해전 때에도 조총의 유효사정거리까지
접근한 끝에 피탄되어 부상을 당한적이 있는데 그러면 이때에도 갑옷을 벗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외에도 자살설의 소스로 많이 거론되는 이야기 중에
"왜 하필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봉에 섰느냐?" 하는 것과
"당시 정치적 희생양이 될 것을 우려해서 의도된 죽음을 택했다"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 정광수님은 진린의 기함이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게 되었을 정도라면
엄청난 혼전이었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칠흑과도 같은 암흑 속에서 벌어진 대혼전......
피아간에 대형과 진은 이미 무너졌고 연합함대의 모든 선단은 진린을 구원하기 위해
선봉, 중군, 후군 따질 것 없이 앞을 다투어 달려갔을 거라는 겁니다.
그 상황에서 한가하게 함대의 진형을 따진다는 발상 자체가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대장선이 선봉에 섰다는 것을 의도된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 또한 유치한 발상이죠.
노량해전에서 많은 수의 연합함대 장수들이 죽음을 맞았고
부상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조선 측에서는 이언량, 이영남, 고득장, 방덕룡 등의 장수들이 피탄되어 전사했고,
명나라 측에서는 진린의 아들을 비롯해 등자룡, 진우충, 진천의, 도명재 등이 전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가 선봉에 섰기 때문에, 혹은 갑옷을 벗었기 때문에 죽은 것일까요?
아니면 이들 역시 자살을 기도했던 것일까요?
이순신 장군은 정치군인이 아닌 참군인이셨습니다.
일신의 안위나 훗날의 고초 따위를 우려해서 대의를 저버릴 분이 아니라는 거죠.
설혹 훗날 정치적 역학구도에 의해 희생양이 된다 하더라도 굽힘없이 군인의 길을 가셨겠죠.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회고해 보면 두고두고 가슴이 아픈 장면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둔 장면이죠.
장군께서는 넬슨 제독처럼 승리를 확인하지 못한 가운데 숨을 거뒀다는 겁니다.
"원수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시던
소원을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하시고 떠나셨다는 거죠.
아마도 그것이 장군에게 천추의 한으로 남으시지는 않으셨을지..."
진중음(陣中吟)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녘으로 위태롭구나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함에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알아주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이 한 몸 죽음을 어찌 사양하리오
-충무공 이순신-
★ ▼ 아래 그림과 글은 예전에 둘러봤던 현충사와 고흥 '충무사'입니다.
▲ 요즘 지은 공원이나 새로 꾸민 도시의 공간과 비교할 때 현충사 건물들은 소박하고 아담한 편입니다.
약간 노쇠하고 빛이 바랬다는 느낌을 안고 왔습니다.
▲ 이순신 장군 생가는 아니고 친척집입니다?
▲ 현충사에 심어진 소나무 그룹 중 반송이 휼륭 하더군요. 이렇게 키 크고 번듯한 반송을 본 적이 없네요.
■ 살려고 하는 자와 죽으려고 하는 자!! ■
▲ 충무공은 1545년(인종1년)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 부근(건천동)에서 태어났지만,
가세가 어려워 8세 때 어머니 고향인 충청도 아산군으로 이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충무공의 고향을 현충사가 있는 아산으로 착각하는 이유 중 하나죠.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즉, 그때가 죽을 시점이 아닌 위기의 시점임을 강조한 것인데요,
이 대목이 장군의 위기관리 리더십이 빛을 발한 불후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기 전에
"원정군이 본국으로 무사 귀환할 때까지 나의 죽음을 절대 비밀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죠.
그보다 오래 전에 몽골의 칭기즈칸도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밖으로 새어나가게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여러모로 많이 비교되고 있는 영국의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전사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저는 제 임무를 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만족합니다!"
넬슨은 이 유언을 통해 야전의 지휘관에게 부여된 최고의 사명이 승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투에 임하는 장수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승리겠죠.
이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는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우리는 그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연전연승을 하고 지형과 지세를 이용했다."
아마 이 정도로만 알고 있죠.
이순신 장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빼어난 생각을 지닌 전략가였습니다.
장군은 한 번도 불리한 여건에서 전투를 시작한 적이 없습니다. (명량해전 제외- 임란 마지막 전투)
황선벌의 '계백장군'은 5천군사로 5만군사의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워,
일당 십의 기세로 초장 유리한 판세를 이끌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수적으로 열세이면 반드시 적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고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해 미리 노력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조정에서 공격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_^
이미 싸우기 전에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겁니다.
중략(中略)
누구나 다~아 충무공처럼 '리더십'을 갖고자 원합니다.
회사에서 과장- 부장- 상무, 간부가 되면 지위가 높아질지 모르나
리더로서의 품격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리더십은 일과 철저하게 연관되어 있죠.
일처리를 잘해야, 일처리 능력은 리더십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현장에서 일어난 문제, 꼬이고 꼬인 일들을 앞에 두고 해결 못해
쩔쩔매는 윗사람을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연승무패의 신화를 일군 최고의 전략가인 충무공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의 속성이 '이익을 좋아하고 위험을 피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장군은
부하들에게는 유리한 위치에 있어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주어
단결심(팀워크)과 자신감을 주었고, 적과의 전투에서는 이를 잘 활용했습니다.
역발상이죠.
산길을 가보면 누구나 공통되게 길이 인도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장군은 당연한 생각과 행동에 반한, 역발상을 이용한 전략가였습니다.
지금 이 지구촌이 당한 어려운 시기에 장군처럼 진정한 팀워크를 이뤄
어려운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런지요?
지금의 '현충사'는 빛바래서 바닥은 약간 지저분한 듯 느껴지고,
거리나 건물의 모양들이 쇠퇴하고 노쇠해 보여, 찾은 제가 더 마음이 가라앉지만,
말없이 전해주는 금언들은 소리 없이 가슴에 배입니다.
서울대공원이나 서울의 숲처럼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이가 말없이 전해주는 말은 ‘홈리스’인 단풍이나
쳇바퀴 직장인에게도 '받들고 세울 말'인 거죠.
"윗 사람이라고 리더십이 있어야 되고, 아랫 사람은 아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리더십이 있어야 되고, 나이 어린 사람은 리더십과 관계 없다."
윗 사람이나 아랫 사람(요즘은 평등구조 수평관계라고 하죠)이나
리더십을 키우려면, 어려서부터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 품은 뜻을 이야기 하는 교육이 되면 좋겠네요.
▲ 전남 고흥군 발포리에 있는 '충무사'입니다. 충무사 옆에 백로 , 왜가리 도래지가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봤는데 나무 위에 하얗게 올라간 새들을 보니 좋은 카메라로 가까이 다가가 찍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더군요.
충무사 탐방 후에 나로도항으로 옮겨 유람선을 탔죠.
지도에 나온 오동도는 여수 오동도가 아닌 고흥군 발포면 오동도입니다. 발포성에서 한 눈에 바라보이죠.
'충무사'란 이름을 가진 사당이 이 곳 고흥말고도 많습니다.
제가 둘러본 고흥 발포면의 충무사는 장군이 36살 때 부임한 직장입니다. ^_^
1545년(인종1년)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 부근(건천동)에서 태어났지만,
가세가 어려워 8세 때 어머니 고향인 충청도 아산군으로 이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충무공의 고향을 현충사가 있는 아산으로 착각하는 이유 중 하나죠.
21살 때 보성군수 진의 딸 상주 방씨와 결혼했습니다.
23살(명종22년) 되던 해 맏아들 '회'르 낳았고, 4년 뒤인 1571년(선조4년) 27살 때 둘째 아들 '울'이 출생했죠.
지금도 그렇지만, 아들을 둘이나 둔 가장으로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어려운(?) 상황이 떠오릅니다.
28살(1572년, 선조 5년), 둘째 아들 낳은 다음 해에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를 다쳐 실격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시절 읽은 책에 나오기를 부러진 발을 동여매고 나머지 시험을 치룬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강한 의지, 베이징올림픽 역도선수 '이배영'같은 모습이네요.
32세 되던 1576년(선조 9년)에 식년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으니, 시기적으로 상당히 늦어다고 봐야겠죠.
식년 무과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무관을 뽑기 위해 실시하는 시험이니
지금 공무원 시험 붙기위해 재수, 삼수하는 친구들 생각이 납니다. ^_^
시험에 합격해 함경도 국경수비대로 가서 근무합니다.
(권관 : 변경의 수비를 맡은 작은 진보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
35살 때 한양으로 돌아야 한계급 올라간 종8품의 벼슬로 훈련원에서 근무합니다.
(훈련원 내의 최하위직에 속함. 이순신은 인사관계를 주로 담당함)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35살 10월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이 됩니다.
(병마절도사 : 각 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
2월에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돌아와 종8품 최하위직으로 훈련원에 있다,
8달 만에 종2품 병마절도사가 됐는데, 제 생각으로는 어려서 같은 동네에서 생활한
유성룡의 천거(薦擧)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36살 때는 전라좌수영 관내에 있는 발포에서 부대장격인 수군만호가 됩니다.
'발포' 는 전라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있는 성(成-수군)입니다.
위- 아래 사진에 보이는 곳에 남해 바다라 바라보이는 발포 성의 일부분입니다.
(수군만호 : 수군 조직은 수사 밑에 첨사와 만호라는 직책이 있었음. 만호는 종4품)
38세 군기 경차관(조사관)인 서익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상부에 보고하여
수군만호에서 파직되니, 그의 인생에서 첫번째 파직(1월-1582년 선조15년)이죠.
다행인 것은 4달이 지난 그 해 5월 함경도 훈련원 봉사로 재임용 되네요.
요즘처럼 취직이 어려운 시절, 공무원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하기야 제가 20살 무렵에는 대학못들어간 친구들이 공무언 시험봐서 많이 합격했습니다.
지금처럼 머리터지는 경쟁률이 아니라 그럭저럭 무난하게 들어갔습니다. ^_^
1583년(선조 16) 7월 39세 함경도 병마절도사인 이용 휘하의 군관이 되고
11월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했죠.
(참군 : 훈련원의 관직으로 정7품) 벼슬-품계가 들락날락- 파직을 당해서 그렇습니다.
당시 여진족에게 잘보일 걸? 나중에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할 줄 누가 알았나요?
오랑케로만 보던 만주족- 여진족이었으니까요. 세종조(4군6진- 김종서)
39살에 아버지 이정의 사망(11월 15일)으로 인해 관직을 쉬고 충청도 아산에서 3년상을 치뤘으니
시대조류상 당연한 일이라기 보다는 효자라고 저는 봅니다. 저도 하고 싶은 일이 3년상입니다.
고향 산소주변에서 홈리스 하는 일도 할만 하거든요? ^_^
42세(1586년-선조 19년 1월)사복시 주부에 임명됩니다.
(사복시 주부 : 사복시는 궁중의 가마·말·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이며, 주부는 사복시에 속한 종6품 벼슬)
사복시 주부에 임영된지 16일 만에 여진족의 침략으로 인해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천거됐으니
하늘은 이렇게 영웅에게 일거리를 내립니다. ^_^
(조산보 : 함경도 경흥군에 있던 보로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음)
43살 때 백의종군합니다.
여진족의 기습을 받게 되어 격퇴하였으나,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게 되죠.
공격을 할 것이냐 미룰것이냐, 상관과의 의견차이가 강등의 사유입니다.
(백의종군 : 장졸이 상관의 명령을 어기거나 실수를 했을 경우, 계급을 박탈하고 일개병졸로 강등시킨 다음
평민의 옷인 흰옷을 입고 나라를 위해 싸우게 함)
44살(1588년-선조 21, 6월)에 충청도 아산군 백암리로 낙향합니다.
45세 전라도 감사 이광 휘하의 조방장이 되구요(2월).
(조방장 : 부관에 해당하는 군관의 직책)
12월에 전라도 정읍현감이 되고(태인현감을 겸무함).
1591년(선조 24) 2월 47세 진도 군수로 임명되나 부임전 가리포 수군첨사로 전임 발령 됩니다.
(군수 : 각 군의 우두머리로 종4품에 해당하는 지방 관직, 가리포 : 지금의 완도)
47살(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하고 얼마 후 전라좌수영에 부임합니다.
(수군절도사 : 각 도 수군을 총지휘하기 위하여 두었던 정3품 외관직 무관)
1591년 47살 때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 됐고 이듬해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최초의 해전인 옥표해전을 시작으로 최후를 맞는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웁니다.
그 이후의 일은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생략합니다.
세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시련은 가장으로서는 무능력이요,
개인적으로도 스팀받을 만한 일이지만, 그 이의 인품에 우선 순위가 있었으니
이 나라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던 백범처럼 그 이도 나라의 안전과 평화가 우선이었겠죠.
군인출신 박정희대통령이 띄운 스타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생각보다
그의 한평생이 국민 누구나 존경할 만한 소재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에 고개가 숙여지네요.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한평생을 살다 간 분입니다.
|
첫댓글 역사는 찬란합니다..공부 많이했습니다..읽으면서 다 알고있던건데 설명하라하면
하나도 생각이 않나는 역사...즐감했습니다..^*^
막상 이순신장군에 대해 누가 물어오면 막연해서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풍전등화의 전란에 충무공의 펼친 기운은 세계 해전사의 한 페이지로
역사가 되어 후학들에게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해전에서 이순신의 전법을 흉내내는 일은 다반사일 정도로
지구 역사상 최고의 해전 전략가로 평가되고 있죠.
부하들에게 싸우면 이긴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게 제일 중요했습니다.
질 싸움을 하지 않는 거죠. 이길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기는 싸움만 했으니까요.
그러니 조정에서 싸우라고 독려해서 싸울 수가 없었던 거죠.
지는 싸움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단풍님의 글은 언제나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것처럼 여러가지 정보와 역사가 녹아 들어 있습니다![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5.gif)
로 숱하게 가는 현충사인데 설명을 건성으로 보고 다녀서 말이죠![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제가 이렇답니다
게다가 이해를 도와주는 다양한 사진까지 곁들여서...
아산에 사는 저도 충무공의 탄생지가 아산인줄 알았습니다
현충사 가는 입구의 은행나무숲이 좋아서 계절
그러고보니 서울이 출생지였었다는걸 읽은 기억이 나네요
서울 인현동은 지금 인쇄골목입니다. 백병원에서 연결이 되는데,
당시 유성룡과 어려서 같이 장난하며 자란 동네가 인현동이죠.
많은 형제들과 놀다가 잘못한 일이 있어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게 되었는데,
형들은 징징 울고 짜고 했지만, 이순신만 독하게 눈깜짝하지 않고 회초리를 맞았다고 하죠.
무과에 응시, 말에서 낙마 골절이 되었는데, 끝까지 골절을 숨기고 무과를 치른 일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회의 초고령화 진입이라는 것에 걸맞게 현충사도 노쇠한 기운을 보이더군요.
코드는 1970년대에 맞춰서 있어서, 2010년을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쇄락해 보이고
퇴색해 보이는 것이 현충사이기도 하죠.
이렇게 비오는 날 여유롭게 천천히 읽는 재미가 솔솔 합니다~ 일단 글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니까요~ ㅎㅎㅎ
음주 해독이 안되어 이번 주는 고생이 많습니다.
남도 여행 그림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숙제가 밀려 있으니까요.
첫째는 고딩동창을 만난 것이고 둘째는 진도식당에서 마신 탓입니다.
점점 술을 이기는 힘은 없어지거나 약해져서 술이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