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터키를 다녀와서
2005. 5. 17 ~ 5. 25
한국시각 2005. 5. 17(화) 10시 20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여객기는 우즈베키스탄 항공 보잉767 쌍발제트엔진 기종으로 이코노미석에 탑승한 우리 일행은 당초의 우려(政情 불안)와는 달리 순조롭게 경유지인 우즈베키스탄의 首都인 타슈켄트에 도착하였다 (한국시각 오후 6시, 이곳 시각 오후 2시)
우리가 알기로는 타슈켄트는 옛 고려인들과도 인연이 깊다. 스탈린시대에 韓人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지역으로 우리에게는 악명이 높은 지역으로 면화의 집산지로도 유명하다.
이곳 공항대기실에서 우리 일행은 터어키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시간으로 저녁 8시 55분 이륙하여 터어키 이스탄불로 향하는 이곳은 이곳 시각으로 오후 4시 55분으로 쾌청한 오후이다.
이스탄불행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우즈베키스탄 山野는 흰색구름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넓디 넓은 평원으로 모래사막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이스탄불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우리 시각 5월 18일 오전 01시20분경 (이곳 시각 오후 7시 20분경)랜딩기어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이스탄불 공항에 다다른다.
한국시각으로는 5월 18일 오전 01시 30분 이곳 시각으로 6시간의 시차를 감안한다면 이곳은 5월 17일 오후 7시 30분이다.
우리가 묶을 「아스코치 호텔」로 가는 과정에 유명한「보스포러스해협」을 지나면서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좁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黑海가 나온다.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특히 「마르마라海」가 인상적 이었는데 뜻은 대리석의 바다 즉, Marble Sea로서 로마가 쳐들어와 7~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견고한 성곽이 해안가 주변에 쌓여 있었으며, 터어키의 조상인 오스만 제국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른 흔적이 성곽 곳곳에 남아 있었다.
돌대포로 무장한 오스만 터어키군이 결국 점령군인 로마군을 물리치고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스탄불 시내로 들어오면서 비좁은 도로로 교통체증이 심하였는데 그 원인은 이들의 독특한 이슬람 건축조형물이 역사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아 유네스코로부터 문화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도시개발이 제한받았기 때문이다.
터어키인들은 한국 특히, 남한사람들에게 대단히 우호적이다.
6.25전쟁 당시 피를 흘리며 공산주의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운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와 혈맹국가라고 생각한다.
당시 참전 군인의 나이가 20세 미만 18~19세 내외로 한국전에서 700명이 전사하였다.
이스탄불은 인구가 약 1,200만명(유동인구 포함)이며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럽쪽에 속해 있다.
EURO에 가입하는 여러 조건중에 화폐개혁을 하는 금년도에 급격한 화폐가치 변화를 겪으면서 생활하고 있으나 의연히 대처하는 것 같았다.
이스탄불에 우리 교민이 70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300명은 수도 앙카라 등 전국에 분포하고 있으며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이 이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현지(터어키)종업원들이 하루에 한가지 일만 하고 더 이상 하려고 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한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본격적인 이스탄불을 포함한 터어키 관광을 시작하였다.
블루 모스크(Blue Mosque)를 첫번째로 방문하였는 데 6개의 첨탑이 둘러싸고 있으며 내부는 약 5만개의 청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으며 聖 소피아성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건축시기는 성 소피아 성당과 약 1000년의 시차를 두고 있다.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오벨리스크탑을 보았는 데 원래 이 탑은 이집트에 있었으나 AD 395년 로마의 국교로 그리스도교를 인정한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羊가죽으로 浮力을 이용한 거대한 뗏목을 만들어 海路를 이용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였는 데 원형이 아주 잘 보존되었다.
탑에는 상형문자가 조각되었는 데 고대 이집트 파라오인 투트모스3세의 업적을 기린문자이며 이 탑의 무게는 자그마치 30톤에 이르며 높이는 20미터에 달한다.
오전 9시 20분 블루모스크 맞은편에 위치한 St. Sophia성당을 구경하였는 데 532년에 건축하였으나 오스만제국에 의하여 함락되어 모스크 사원으로 개조되는 비운을 맞은 아름다운 성당이다.
당시의 건축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맞은편에 있는 1000년 후에 지어진 블루모스크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가이드 말로는 당시 오스만의 건축술이 로마시대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성당의 외벽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피(Blood)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때 건립된 것으로 콘스탄티누스大帝가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現,이스탄불)에 도시국가(Polis)를 건설하였으나 오스만의 술탄 마흐메드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였으나 聖 소피아성당의 아름다운 건축미에 감탄하여 파괴하지 않도록 명령하였다.
세계 미술사 및 건축사에 길이 빛날 작품이며 또한 종교사에 있어서도 그 중요성은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특히 성당내부로 들어서면 커다란 나무로 된 검은문이 있는데 물론 당시에는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었는 데 긁어낸 것으로 추정되나 백향묵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져 수천년이 흘러도 썩지 않아 변함없는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및 중세유럽의 건물양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Dome양식은 하늘을 나타내지만 건축기법상 대단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지붕의 하중을 받치는 기둥을 가급적 쓰지 않으려는데 있으며 천정까지의 높이는 50미터, 약 15층 높이에 해당한다.
2층(건물의 5층 높이에 해당)에는 왕비가 기도드리는 장소로 되어 있으며 올라가는데 계단이 없으며 경사진 길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곳에는 십자군전쟁 당시 선봉장인 단달로 장군의 무덤이 있다.
오스만 제국이 건설되면서 성당 내,외부에 걸쳐 심하게 원형이 훼손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우리는 터어키의 오래된 재래시장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 데 8세기경에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당시에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에는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이곳 터어키의 특산물로는 올리브열매가 유명한데 올리브는 샐러드에만 뿌려먹으며 튀겨먹으면 영양분이 손실된다고 함.
우리 일행은 12시 30분 식당에 도착하여 터어키 전통요리인 됴네르 케밥(Kebab)을 먹었는 데 이 요리는 양고기를 긴 쇠꼬창이에 끼워 빙빙돌리면서 불에 구운 것으로 맛이 일품이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 우리 일행은 점령군인 로마군을 무찌르고 1453년 오스만제국을 세운 6년후인 1459년에 건립한 도프카푸(돌대포)궁전을 관람하였는데 특히 로마시대의 영향을 받아 庭園이 발달하였으며 당시 동쪽의 거대세력인 중국(明·淸나라)과 실크로드를 통하여 활발한 교역을 하였는 데 도자기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궁전안에는 당시 술탄들의 의상이 시대별로 전시되었는데 대부분의 술탄의상은 목이 좁고 소매가 넓고 길며 스카프를 사용하였으며 붉은색 계통의 몽고풍으로 비단과 양털로 직조한 것이 특징이며 도자기류 중 특이한 것은 발톱5개 짜리 도자기와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가 전시되었으며 현재 지구상에 있는 다이아몬드중 2번째로 큰 82캐럿트짜리 다이아몬드가 세월의 영겁도 잊은채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으며 다이아몬드와 관련한 일화를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는데 한 어부가 그물에 다이아몬드가 걸렸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은수저 2개와 바꿔「은수저2푼 다이아몬드」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현지시각 5월 19일 07:00에 우리는 터키 중서부지방인「카파도키아」로 향하였다. 카파도키아라는 뜻은 ″좋은 말의 産地″라는 뜻으로 카파도키아는 기괴한 암석으로 이루어졌으며 3개의 산(에르지에스,핫산,골류산)에서 화산이 분출되었다고 한다
AD 1세기경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연약한 암석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7세기경 아랍인이 침공하면서 같이 거주하였으며 그후 오스만 제국 건설 이후 기독교인들을 그리스로 이주시키고 현재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고 있지 않으며 이곳에는 낙타, 말, 당나귀가 많이 살고 있으며 양파, 감자의 주산지로 유명하며 특히 감자의 경우 유럽생산 1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포도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닌 「데린구유」라는 기독교인들의 은신처를 방문하였는데 마을 주변은 우리나라 60년대와 흡사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으며 이스탄불과 달이 주택,보건,생활편의시설이 전반적으로 크게 낙후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전국민의 98%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마을곳곳에는 어김없이 모스크사원이 있으며 기독교인들의 은신처인 굴을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개미집 구조인 迷路로 형성되어 있어 나올 때 표식을 보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웠다. 약 3만명이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지하에서 생활하는 관계로 폐질환 환자가 많이 나왔으며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슬람 군사들의 감시를 피하려고 주로 야간에 밖으로 나가 짐승의 복장을 하고 식량을 구하러 다녔다고 한다. 거주지 구조를 보면 개미집구조로 되어 있는 데 지하 13층 규모로 되어 있으며 1층에는 가축을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환기구가 3개에 불과하여 공기순환이 잘되지 않아 폐질환 환자가 많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前述한 바와 같이 「데린 구유」라는 뜻은 깊은 우물을 뜻하며 이딜은 주로포도주를 음료수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석회질이 많이 함유 된 물이 대부분으로 음료수로는 부적합하며 지금도 음료수는 생수를 사서 먹고 있다.
이러한 지하도시는 1936년 마을의 농부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키우던 닭이 아침에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데 발견된 장소와 없어진 장소가 매번 달라 이상하게 여긴 농부가 관찰하니 환기구가 있는 굴을 발견하여 터어키 정부에 발굴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 카파도키아와 에게해쪽 이즈미르 등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다. 관람을 마치고 점심에는 역시 케밥을 먹었는데 이곳 케밥집은 동굴속에 자리잡고 있어 약간 특이 하였으며 다른 지역과 달리 항아리 속에서 익혀져 나왔는 데 항아리 케밥(쵸믈렛 케밥이라고 현지인들은 부름)으로 항아리속에 양고기 대신 소고기를 넣고 감자, 고추, 양파 등 갖은 양념을 하여 80℃의 온도에서 3시간 동안 조리하여 나온 것으로 맛이 대단히 뛰어 났으며 특히 느끼하지 않아 좋은 것 같았으며 고춧가루 같은 향신료(Spicy)를 첨가하여 먹으니 매콤한 맛이 나 우리나라 음식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괴뢰메」골짜기로 이동하였다. “괴뢰메”라는 뜻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이라는 뜻으로 그리 험난한 곳은 아니었으나 예전의 교통수단으로 볼 때는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365개의 동굴 교회가 있는 데 1년이 365일이라는 뜻으로 365개의 동굴교회를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매일같이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곳의 교회는 주로 문이 넓은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교가 공인 된 이후 만든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 카파도키아 學派에는 3명의 敎父가 있었는 데 바실리우스, 닛싸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조 그레고리우스이며 이중 바실리우스가 교회를 설립하였다.
三位一體를 근본으로 3개의 祭壇, 프레스코화 기법으로 내부를 그려놓았으며 그림물감은 양파와 천염염료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괴뢰메 골짜기는 기괴한 암석들이 많아 영화「스타워즈」 촬영지이기도 하여 유명해졌다.
이곳에는 수도사들의 무덤터가 있으며 비둘기들이 살던 조그마한 골짜기가 있으며 당시에 포도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사마교회를 보면 성서의 내용을 문자가 아닌 프로스코화로 그린 것으로 보아 당시의 높은 문맹률을 감안하여 예수의 행적을 그림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지상요새인「우치사르」로 이동하였는 데 먼저 방문한 카파도키아는 로마황제가 통치할 당시 자원이나 지역여건으로 보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Pasa Bagi 즉, 장군포로라는 뜻의 바위가 특이하여 설명을 들었는 데 당시 St. Simon이라는 수도사가 평생동안 동굴에 은거하면서 수도생활에 정진하였는 데 죽을 때까지 한번도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고 전해짐
5월 20일 우리는 드넓은 콘야 평원지대를 장시간 이동하여 지났는데 터어키의 國父인 Mustafa Ataturk Kemal Pasa 무스타파 아타투르크 케마파샤(1881 ~ 1938)가 여러개혁조치중의 하나로 이슬람을 국교로 인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로 종교생활을 할 것을 권장하였으나 이곳 콘야지방은 대단히 보수적인 이슬람문화가 남아 있어 아직도 酒類판매가 허용되지 않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콘야지방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면 이슬람의 한 종파인 “예블라나”종교의 발생지로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 케말파샤가 금지시킴. 춤(Dance)으로써 명상에 잠기면서 시도하는 신비주의 종교로서 춤의 이름은 “세마 춤”으로 춤을 추면서 연주하는 악기는 “케만”으로 8줄로 이루어진 바이올린과 비슷한 악기임.
콘야지방은 힛타이트시대를 거쳐 리디아왕국 그리고 알렉산더의 지배를 받고 AD25년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번성기를 누림. 로마시대에 “이고니움”이라고 불리며 사도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때 지중해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이동시 콘야를 거치셨으며 터어키 최대의 밀의 곡창지대로서 자두,살구 등의 열매와 과실이 풍부하며 “콘야”라는 뜻은 “羊의 가슴”이라는 뜻으로 풍부한 농산물 생산지라는 것을 알 수 있음
콘야 지방을 장시간 이동한 후에 “파묵깔레”에 도착하여 과거에 존재한 “히에라 폴리스”라는 옛 고대도시 유적을 관람하였는 데 유적지 입구에 돌로 만든 石棺이 즐비하였다. 당시의 공동묘지라고 설명을 들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공중목욕탕이 있었으며 기독교 공인 후 교회로 활용하였으며 노상 온천이 있어 발을 담그고 기념촬영도 하였다.
5월 21일 셀주크 투르크의 古都인 “에페소”로 이동하였다. 성서에 나오는 “에페소서”의 지명으로 당시 사도바울이 역시 전도여행을 온 지역으로 유명하다. 셀주크의 역사는 불과 200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후에 나타난 오스만 투르크의 조상은 몽고의 유목민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슬람과 융합하면서 살아 왔는 데 중국인들은 투르크인들을 “돌궐족”이라 불렀다. 또한 에페소는 사도요한이 죽을 때 이곳에 묻히기를 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 주민들은 지금 전기세가 비싸서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한 시설들이 지붕곳곳에 있었다
이곳 터어키의 결혼풍습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여자집에 찾아가 커피를 대접받는데 물론 여자가 커피를 타오는데 맛으로 결혼여부를 결정짓는 다 커피맛이 달면 마음에 있다는 표시이고 커피맛이 쓰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로 정중한 거절의 표시로 중매를 하는 관습이 남아 있다.
이곳 파묵깔레에서는 婚期가 꽉찬 여자의 집에는 지붕에 빈 사이다 병을 올려 놓는데 동네총각이 이집 처녀가 마음에 들면 병을 깨드린다. 그러면 중매장이가 맞선을 주선하여 역시 여자집에 양가 부모들이 모여 커피 대접을 받고 전술한 바와 같이 커피맛으로 결혼여부를 결정한다.
10시 35분경 고대도시 “에페소”에 도착하였는 데 원형극장을 구경하였다.
기원전 88년 당시는 가장 큰 항구도시로서 원형극장 2개가 있으며 하나는 음악당이고 하나는 귀족들의 원로원이었으며 앰프가 없던 시절에 음향공학적으로 설계되었으며 모든 건축자재들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관람석은 높이가 2미터 정도 되어 있어 당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며칠씩 굶긴 사자들을 풀어놓아 싸우게 하고 관람석에서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설계로 보임.
조금 더 들어가 보니 당시 병원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아스클레피온(의약의 神)상이 있었으며 당시에는 희랍어(헬레어)와 라틴어를 공용하였다고 한다.
도시안에는 우물이 많이 있어 더운 날씨를 식히는 기능을 하였다고 함
사도바울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 27개월에 걸쳐 전도여행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는 多産을 의미하는 아르테미스 神을 그리스도교 이전에 믿고 있었으며 승리의 여신 나이키(한손으로는 월계관, 한손으로는 올리브잎, 즉 자이툰을 상징하고 있음) 우리나라에서 이라크로 파견한 부대이름이 “자이툰 부대”임
또한 고트족(불가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부족이름)과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멤누스장군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당시 멤누스장군 등 13,000여명이 침략군인 고트족에 대항하여 싸우다 전원이 전사한 것을 추모하는 전적비가 서있고 헤라클레스 조각상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거주하는 공간과 평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분리됨
트라이아누스 황제 방문시 만든 우물이 있으며 고대 에페소는 지진으로 멸망하였으며 생존자는 가까운 셀주크로 이동하였음
종교는 메두사 등 많은 女神 들을 믿었으며 많은 쇼핑거리가 남아 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방문하였으며 공중화장실이 있었음
화장실은 칸막이가 없으며 그 이유는 남자들도 당시에는 긴 치마를 입고 다녀 서 용변을 보는데 큰 불편이 없었기 때문임
건물은 주상복합건물도 있었으며 1가구당 300평 규모로 대단위임
셀수스 도서관 자리도 있으며 소아시아의 총독인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도서관으로서 도서가 약 12,000여권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양피지로 만들었고 이중으로 벽을 만들어 습기와 외부의 급격한 온도변화로부터 도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도 하였음
도서관 맞은편에는 집창촌이 있었으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주로 이용하던 것으로 남의 이목을 피하여 도서관 근처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집창촌으로 갔던 흔적이 남아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거리옆에는 靑銅으로 장식한 가장 큰 원형극장이 발굴되었으며 2만5천석의 좌석으로 보아 당시 도시 인구를 25만에서 30만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St. John (聖 요한) 기념 교회터를 보았는데 정문에는 박해의 문이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에 박해를 받았던 교회의 문을 뜯어 옮겼음
사도 요한이 가장 긴 전도여행을 한 에페소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며 그의 무덤이 있음. 교회터에 어두운 터널이 있으며 터널을 통과하면 罪를 赦 한다고 믿었으며 비잔틴시대의 프레스코화가 남아 있고 또한 영세를 받기위한 침례터(Baptism)가 남아 있었음
1773년「이사베이 모스크」가 교회옆에 있으며 인근 「불불산」정상에 聖母님의 생가가 남아 있음
이 지역은 항구도시인데 「멘델레스」강이 범람하여 전염병이 돌아 주민들이 전부 이주함
아르테미스 신전은 127개의 기둥(18미터 높이)위에 30톤의 석가래가 얹혀 있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파르테논 신전보다 3배 크다고 전해지고 있음
5월 21일 오후 7시 25분 아름다운 에게해가 내려다 보이는 호텔에 우리의 피곤한 몸을 맡기고 쉬는 데 시드니, 베네치아와 달리 유람선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끝없이 펼쳐지는 검푸른 바다가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였다. 고대의 상인들이 주름잡았던 무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막이 내린 무대와 같이 고요함과 적막감만 있을 뿐 이었다.
우리가 잘아는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트로이의 왕자(파리스)와 스파르타의 공주(헬렌)가 결혼하자 스파르타의 왕이 격노하여 그리스 연합군을 결성하여 유명한 오딧세이장군과 아킬레스장군을 앞세워 장장 10여년에 걸친 전쟁을 치뤘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흔히 발 뒷꿈치를 이야기 하는 아킬레스건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전설에 의하면 스틱스강에 몸을 담그면 몸이 강철같이 단단해진다는 말에 따라 아킬레스의 어머니는 아들이 건장하게 자라줄 것을 염원하여 스틱스강에 발 뒷꿈치를 잡고 강물에 아들의 몸을 담그웠다.
그러나 발목 부위(아킬레스건)는 물이 닿지 않아 상대적으로 약해진 상태로 놓였기 때문에 이 부분에 화살을 맞고 결국 아킬레스는 죽었다. 그래서 신체중의 약점을 말하거나 취약점을 말할 때 아킬레스건이라는 말이 유래된 것이다.
트로이 목마에 대하여 얘기를 하면 스파르타가 주축이 된 그리스 연합군이꾀를 내어 트로이 목마를 만들어 성벽에 놓고 패하여 후퇴하는 것처럼 물러나고 패잔병으로 위장한 그리스연합군의 병사가 포로가 되어 심문을 받던중 목마를 성밖에 놓으면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다고 말하자 트로이 군사들이 성안으로 끌어들이면 자기네들이 승리할 것으로 믿어 성안으로 결국 목마를 끌고 들어와 승리의 축배를 들고 곯아떨어지자 다음날 새벽에 목마안에 숨겨두었던 정예병사들이 트로이 성을 공격하여 일시에 트로이성을 불바다로 만들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트로이가 역사의 뒤안길로 결정적으로 사라진 것은 이 전쟁에서 패하였다기 보다는 지진으로 멸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에게해 인근에 있는 트로이는 독일인 상인 하인리히 슐리히만이 호머의 詩「일리어드」를 읽고 트로이 유적을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많은 보물을 강탈하여 갔다. 현재 트로이 유적중 상당수가 독일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지진으로 완전히 고대유적이 소멸되어 현재로서는 복원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임
트로이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3200년전에 존재한 시대로서 바다가 인접해 상인들이 자주 왕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많은 문명이 공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트로이 유적에는 로마시대의 건축물이 남아 있으며 그리스도교의 공인 이전에는 多神주의가 지배한 것으로 보임.
이제 터어키의 여행을 모두 마치고 이스탄불로 향하기 위하여 차나칼레 해협을 도선을 이용하여 건너기 앞서 이곳에서 영국,프랑스의 침공에 맞서 격렬한 독립전쟁을 치른 터어키의 독립전쟁에 대하여 가이드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터어키의 국부인 아타투르크 케말파샤가 죽은 터어키 병사들의 피가 차나칼레해협을 붉게 물들인 가운데 한 병사가 詩를 읊는 것을 전해 들은 케말파샤가 터어키 국기를 붉은 바탕에 승리를 상징하는 초승달과 별을 그렸으며 오늘날의 터어키 국기의 모태가 되었다.
터어키의 차나칼레해협을 45분에 걸쳐 건넌 다음 우리일행은 버스편으로 이스탄불로 향하였다. 이것으로 터어키 방문을 모두 마치고 터어키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앙숙관계에 있는 그리스 아테네로 향하였다.
터어키 이스탄불공항에서 이륙하여 약 1,100km를 남하하여 그리스 아테네공항에 도착하였다.
이곳 한국인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는 3000여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삼성휴대폰이 최고 인기품목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리스는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라고 소개하였다. 그래서 이 나라는 수천년부터 혼혈을 장려하였으며 그 유명한 1896년에 개최된 근대올림픽 경기장을 둘러보았는 데 원형이 아주 잘 보존되었다.
그리스 선박의 80%가 한국에서 건조되었으며 도심지를 운행하는 Tram(전차)도 한국의 삼성중공업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운행중인 승용차의 10대중 2~3대는 한국산 승용차이며 주로 중산층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부유층들은 독일의 벤츠,BMW,Audi 등을 이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이러한 프리미엄카를 개발하여 이들과 경쟁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
또한 신혼부부가 가정살림을 장만할 때 한국산 TV, 오디오, 전자레인지, 세탁기,냉장고를 일괄구입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는 1,100만명이며, 남한면적의 1.5배이며 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정교회(Greek Orthodox)를 믿고 있으며 언어는 희랍어로 불리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음. 1인당 국민소득은 14,000불 정도로 한국과 비슷한 소득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곳 시간 13:50분 그리스 최대 항구도시인 삐레우스 항구로 이동하여 쾌속선 편으로 에기나 섬으로 이동하여 깨끗한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수영을 즐겼으며 이들이 즐기는 해산물인 문어를 구워먹어 보았는데 우리나라 것보다는 맛이 없었다.
이곳의 바다는 인근에 음식점이 즐비한데 깨끗한 이유를 묻자 바다를 오염시키다 적발되면 2대에 걸쳐 장사를 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단속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하며 바다를 오염시키면 자식의 입에 독약을 넣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의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유럽에서도 이혼률이 가장 낮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돈간의 유대가 돈독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 근대올림픽 경기장을 가다가 우리는「제우스 신전」이 있는 것을 보았다. 건축기간이 무려 7세기동안이며 오랫동안 터어키의 지배를 받은 그리스인들은 노예생활(500년 동안)을 전전하면서 살아왔다.
국회의사당을 방문하였는데 2명의 근위병 복장과 제식동작이 매우 특이하였다. 국회의사당 벽에는 무명용사비가 그려져 있는데 조상의 영혼을 달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터어키의 그리스 지배기간은 1450~1838년 까지로 약 500년동안 지배 피지배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터어키가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자 위협을 느낀 유럽의 맹주인 영국,프랑스,러시아가 주축이 되어 기독교문명을 지키자는 결의하에 연합군을 결성하여 터어키를 치게 된 것이다. 이후 국제조약을 통하여 에게해 연안 섬들은 전부 그리스로 돌려주고 고대 그리스 지배하에 있던 콘스탄티노플(현,이스탄불)은 터어키로 주고 오랜기간 지속되어온 영토분쟁을 종식시켰다.
현대 그리스의 의회정치는 300석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민주당이 원내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징병제도로는 18~48세의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에 입대하여야 한다.
대통령관저와 수상관저를 보았는데 대단히 소박하며 경비경찰관 2명만이 서 있을 뿐이다. 우리돈으로 대통령, 수상의 봉급은 160만원에서 180만원 사이이며 인근에는 2500년전에 돈을 받고 학생을 가르친 「아카데미아」가 있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가 학생들에게 이곳에서 돈을 받고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밖에 도서관, 예술대학원이 건립되었으며 시청앞에 2500년전의 지도자 페리클레스의 동상이 서 있다. 아테네 시청을 방문하여 이곳의 부시장 비서에게 설명을 들었는데 지금의 아테네 시청은 1974년에 건립되었으며 내부에는 사도바울과 파르테논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방문기념 사진촬영을 한 시청입구에는 올리브 나무와 페리클레스 및 부인의 흉상이 있다
고대 그리스는 2500년전에 민주주의가 탄생하여 유럽민주주의의 시초가 되었음. 시청내부에는 바다의 神 포세이돈, 아티네(미네르바) 신화가 전해지면서 아티네로 명명되었으며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사도바울이 시민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1840년 이후 터어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아주 귀중한 자료실로 일반인에게는 거의 공개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 일행에게는 공개를 하였다.
1939년에 지어진 자료관은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림의 스타일은 「비잔틴」양식이며 그리스의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 소포클레스, 소크라테스 기타 主敎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치마를 입고 상의는 갑옷임)
알렉산더 대왕은 태양을 상징하며 말을 잘타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천정 태양문양은 마케도니아 국기(National Flag)를 상징함.
아테네 시청은 부시장이 2명이며 1명은 남성으로서 건축공학 전공자이며 나머지 1명은 여성으로 법학전공의 대학교수 출신임.
그리스는 인구가 1,100만명으로 인구중 97%가 사회보장혜택을 받고 있으며 태어나면서 유아세례, 성당에서 결혼하며 장례도 성당에서 치르며 3년동안 매장했다가 3년후 뼈만 납골당으로 이전하여 다른 사람이 죽으면 묻을 장소를 내주는 등 전국토가 묘지화 될 우려가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의료혜택도 전국민이 무상으로 치료를 받고 의사가 처방한 약은 전액 무료로 제공된다.
私교육이 없는 나라로서 公교육이 잘 갖추어져 있음. 우리는 한국교민이 운영하는 한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아크로 폴리스로 이동하던중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을 보았다.
BC 469년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수염선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惡妻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妻 산티페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악처로 낙인찍히지 않고 생활능력이 없는 남편 소크라테스를 구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언변이 뛰어난 사람으로 돈을 버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으며 “無知를 아는 자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설파하였다.
수사학을 가르치는 사람을 Sophist라고 하며 철학(Philosopy)은 Phil=사랑하는 것과 Sophia = 지혜를 의미하며 “철학자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을 다음 4가지 덕목을 갖추고 살아가기를 당부하였다
첫째, 고대그리스의 神을 존경하기
둘째, 酒法을 지키며 살아가기
셋째, 부모를 공경하기
넷째, 친구와의 우정쌓기, 이웃을 사랑하기
이상과 같은 4가지 덕목을 실행하면 이 세상에는 전쟁과 다툼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책을 쓰지 않았다. 글을 쓰면 이미 그것은 죽은 진실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들이 좋아도 했지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일반민중과 一問一答式 즉석토론을 좋아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전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당국에서는 그를 법정에 세웠다.
죄목은 고대 그리스 神을 믿지 않고 청소년을 혼돈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毒杯를 바시고 죽은 소크라테스는 나중에 유명한 유언인 “악법도 법이다”라고 죽은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다음 방문지인 아크로폴리스는 이로디아디쿠스가 아내를 위하여 야외극장을 만들었는데 현재도 공연을 하고 있음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 등 3 Tenor)
5000석 규모인데 오데오(Audeo) 극장이라고도 함.
다음은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을 올라가 보았는 데 웅장한 규모에 놀랐다
BC437~432년 5년의 짧은 기간에 걸쳐 완성하였는데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한 기념으로 만들었다고 함. 파라테논 신전은 현재에는 지붕은 없고 기둥만 남아 있으며 처마끝에 조각한 작품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오스만 투르크군이 이곳을 점령하여 화약고로 쓰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하여 폭발을 일으켜 지붕이 날아가고 아테네 시내가 48시간동안 불에 탔다고 전해진다. 엄청난 폭발에도 기둥만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나라에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방식대로 기둥이 가운데가 볼룩하게 나온 것이 특징이며 내진설계 등을 하여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기둥 윗부분은 도리아식 건축양식이며 사자가 소를 잡아먹는 장면을 만들어 神에 대한 경외심을 일반인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로마의 르네상스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철저하게 계승한 것이며 이탈리아의 대부호「메디치家」가 메켈란젤로 등에게 문예부흥운동을 하라고 재정적 지원을 하였음
끝으로 고대그리스 문화의 변천을 간략히 소개하면 기원전 9천년전 데살리스국가가 신석기문명을 일으켰고 에게해 연안 신석기시대의 티클라데스 諸島,
7천년전 크레타섬에서 신석기시대, 이지미르, 에페소는 그리스가 지배하였으며
BC 776년도 도시국가 Polis인 아테네, 고린토스, 스파르타(군사국가),델피,다리우스의 페르시아군과의 마라톤 전투, 살마미스 해전에서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파르테논신전을 만듬. 스파르타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스파르타의 승리,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키,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인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로 이어지는 화려한 그리스문명은 헬레니즘 문화로 승화되어 인도로 넘어가 간다라문명을 꽃피우는 등 실로 인류문명의 발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의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방면에 걸친 언어, 의상, 머리모습 등에 영향을 끼친 고대그리스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조차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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