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대에 누각이 보인다.
19세기 청하현 지도. 청하읍성의 동문과 서문, 객관, 해월루, 아사, 연정, 향교, 송라도찰방역관, 용산, 조경대, 강성산(오두촌), 호학제, 호학산, 응봉, 삼동석, 내연산, 신구산, 용추, 보경사, 학산서원, 도리산 봉수대, 달현산, 봉송정, 교통로, 산줄기, 물줄기
2013. 6. 8-9 보리수필 영덕 문학기행 자료
유내영산록 발췌
1. 평해군(平海郡)의 황응청(黃應淸)과 영해(寧海)의 백현룡(白見龍)
叔父大海先生居東海六十年。不與鄕人立。不求當世達。蕭然竹屋書史自娛。其道冲如也。白髮今春。適遭家禍慈天所蔽。悒悒不自寬。有猶子霞潭者。請遊內迎山。其志豁如也。
숙부 대해(大海) 선생이 동해 바닷가에 사신 지 육십 년에 고을사람들과 더불어 서지 않았고, 당세(當世)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쓸쓸한 대나무 울타리 집에서 경사(經史)를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으니 그 도덕이 근원의 자리에 들어가신 것 같으시다.
백발이 된 올해(1587, 지은이 32세, 대해 선생 63세) 봄에 가화(家禍)를 당하고 ‘하늘의 어짐(慈天)’이 가리어져 시름에 잠겨 울적해 하시었다. 자식 같은 하담(霞潭)이 있어서 내영산(內迎山)에 노닐어 그 지기(志氣)를 시원하게 하시라고 청하였다.
惟八月一日戊午。始理南行。古詩一匣。秋露一壺。糧枕一馬。叔姪二人。其行淡如也。叔爲詩姪必和。姪爲酒叔必酬。對而評者非山則海。行而遇者有農與漁。外此約無談當世事。其言灑如也。是日歷郡侯高。高欲下一榻。邀叔父而尊老之。不敢焉。點栗峴溪邊。止丹陽飛盖洞。過朴公儉宿白而正。余退與白惺軒叔夜話。
8월 1일 무오. 처음 남쪽 여행을 준비하였다. 옛 시(詩) 1갑(匣), 추로(秋露) 1동이, 식량과 베개를 실은 말 한 마리, 숙부와 조카 2인이니 그 여행이 담박하였다. 숙부가 시를 지으면 조카가 반드시 화답하고, 조카가 술을 권하면 숙부가 반드시 대작하였다. 짝하여 평하는 것은 산이 아니면 바다이고, 여행하며 만나는 것은 농부와 어부였다. 이 밖에 당세의 일은 말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그 말이 속되지 않았다.
이 날 평해군(平海郡) 고(高) 태수를 만났는데, 고 태수가 의자 하나를 내려놓으며 숙부를 맞이하는데, 숙부를 노숙(老宿)으로 존대하여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였다. 율현(栗峴) 계곡 가에서 점심을 먹고, 단양(丹陽)의 비개동(飛盖洞)에 머물며 박 공검(朴公儉)을 만나고 백 이정(白而正) 댁에서 묵었다. 나는 물러나 백 성헌(白惺軒) 아저씨와 더불어 밤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2. 영해부사(寧海府使) 최경회(崔慶會)와 남몽오(南夢鰲)
二日己未。晴暫風。朝陪惺軒同省叔父。叔父命余往辭丹陽伯崔三溪慶會。盖以余識崔。崔亦乞暇而寧于南也。崔雅愛士。常願一識叔父面。樂聞叔父來。卽以案前使起居之。繼以白應聖丈翌致之。禮于東上軒。觴于海晏樓。館于河淸堂。白丈叔父之姻也。是日領其鄕僚鄭泓,鄕老白眉英與其鄕先生朴水使世賢昆季。祖其侯之行。而賓萬戶金浣,敎授南景祥及吾叔父。叔父讓以服于南射廳。崔又張夜飮。叔父大醉。
8월 2일 기미. 맑았고 바람이 잠간 있었다. 아침에 백 성헌 아저씨를 모시고 같이 숙부에게 문안인사를 드렸다. 숙부가 나에게 단양 부사 최 삼계(崔三溪) 경회(慶會)에게 가서 인사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나로 하여금 최 부사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최 부사 또한 휴가를 내어 남쪽 고향으로 어버이를 뵈러 가고자 하였다. 최 부사는 아정(雅正)하여 선비를 아꼈는데, 늘 한 번 숙부를 만나보고 싶어 하였다. 숙부의 방문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며 책상머리에서 바로 우리 일행이 관아에 기거(起居)하게 하였다. 이어서 백(白) 응성(應聖) 어른 익(翌)을 초치하여 동상헌(東上軒)에서 인사를 나누고 해안루(海晏樓)에서 술을 마시고 하청당(河淸堂)에서 여장을 풀었다. 백 어른은 숙부의 인척이다.
이날 향료(鄕僚) 정홍(鄭泓), 향로(鄕老) 백미영(白眉英)과 향선생(鄕先生) 박(朴) 수사(水使) 세현(世賢) 형제들이 그들 관장(官長)의 남행 송별연을 열었는데, 만호(萬戶) 김완(金浣), 교수(敎授) 남 경상(南景祥) 및 우리 숙부를 손님으로 초청하였다. 숙부는 복상(服喪) 중이므로 남사청(南射廳)에서 술을 사양하였다. 최 부사가 밤에 또 술자리를 베풀어서 숙부가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크게 취하였다.
3. 영덕현(盈德縣)의 신곤(申崑)과 김호(金浩)
三日庚申。晴且暑。質明酒腸雷鳴。余呼定非薏苡來。來則圓味也。將朝飯于酒登驛。驛家湫陋。因投野城城北申崑之小亭。亭有無窮花一樹萬年松二株。有苦瓠施于松上。余以煑鶴責崑。叔父笑而已。申丈麟祥於叔父再從兄也。自三近村佩一沙壺。與其姪經濟致慇懃。金老浩年八十。亦叔父之丈人行也。軾其門。命其子鳳瑞酒且飯。是日宿南驛。
8월 3일 경신. 맑고 더움. 동틀 무렵, 술을 마신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내가 정비(定非)를 불러서 율무를 가져오라고 하였는데, 내온 것은 원미(圓味)이었다. 아침밥을 주등역(酒登驛)에서 먹으려고 하였는데 역가(驛家)가 너무 누추하여 야성(野城)의 읍성(邑城) 북쪽에 있는 신곤(申崑)의 작은 정자에 들어갔다. 정자에는 무궁화(無窮花) 한 나무와 만년송(萬年松) 두 그루가 있는데 표주박이 만년송 위에 달려 있었다. 내가 ‘학을 굽는다’며 신곤을 나무라자 숙부는 웃을 뿐이었다. 신(申) 어른 인상(麟祥)은 숙부에게 재종형이 된다. 삼근촌(三近村)에서 술 한 항아리를 차고 와 그 조카와 더불어 대접하려는 자세가 은근하였다. 김(金) 노인장(老人丈) 호(浩)는 연세가 팔십인데 또한 숙부의 장인 항렬이다. 그 문에서 절을 하니 아들 봉서(鳳瑞)에게 명하여 술과 밥을 대접하였다. 이 날 남역(南驛)에서 묵었다.
북
남
북
남
4. 청하현(淸河縣)의 해월루(海月樓)
四日辛酉。甚暑。信馬抵德城。日正午也。太守趙廷幹字大立自號梅堂。叔父之年友也。延叔于海月樓。樓之下有池。池則蓮也。池之上有塢。塢則竹也。竹之外有百日紅。焯灼穠姿。暎日輝烟。紅之傍有老梅。病査杈枒。若蒼虬偃卧而鱗甲剝落。其上有一莖兩莖靑梢。樓舊名梅竹。有金太守者新之。孔寧海瑞麟改以臨溟。周愼齋記之。其後李太守者增其制高其基。豁其軒楹而專其海月。遂改以今名。李先生晦齋記之。噫玆樓三變名而得遇兩斯文大手。一日而遂名於嶺之南七十州。信乎。物之遇各有時也。人而不遇。白首潛荒。所謂時者孰主張耶。是未可知也。酒三行。趙慰叔父曰老兄遠來良苦。是夕有一官人列炬而喧且來者。乃蔡新寧雲龍云也。
8월 4일 신유. 매우 더움. 말을 타고 덕성(德城)에 닿으니 날은 정오였다. 태수 조정간(趙廷幹)은 자가 대립(大立)이고 스스로 호를 매당(梅堂)이라 하였는데, 숙부와 같은 해에 과거를 본 벗이었다.
우리를 해월루(海月樓)로 맞아 들였다. 누각 아래에 못이 있는데, 못에는 연꽃이고 못 위에는 둑이 있는데 둑에는 대나무였다. 대나무 바깥에 백일홍(百日紅)이 있는데 불타는 듯 무성한 자태가 햇빛을 받아 자욱하게 빛났다. 백일홍 옆에는 늙은 매화나무가 있는데 병이 들고 가지가 엉키어 있었다. 푸른 규룡(虬龍)처럼 누워 있고 비늘이 떨어지는 것 같았으며 그 위에 한 두 줄기 청색 가지가 나 있었다.
누각의 옛 이름은 매죽(梅竹)이었는데 김(金) 태수가 있어서 누각을 신축하였고, 공(孔) 영해(寧海) 서린(瑞麟)이 이름을 임명(臨溟)이라 고친 일의 기문(記文)을 주(周) 신재愼齋)가 썼다. 그 뒤에 이(李) 태수가 누각의 규모를 증축하고 토대를 높여 그 처마와 기둥을 시원하게 하여 그 바닷달을 오로지 하였으니 드디어 지금 이름으로 고치기에 이르렀다. 이(李) 선생 회재(晦齋)가 이런 일을 기문으로 남겼다. 아! 이 누각은 이름이 세 차례나 바뀌었고, 두 사문(斯文)의 큰 손길을 만나 하루아침에 영남 칠십 고을에 이름났다. 진실하구나! 사물이 대우 받음은 각기 때가 있다는 것이. 사람이 대우 받지 못하고 백수(白首)로 황야에 묻히는 것도 이른바 때라는 것을 누가 주장하였던가?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술이 세 차례 돌고 조 태수가 숙부를 위문하며 말하기를 ‘노형(老兄)이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날 저녁에 한 관인(官人)이 있어서 횃불을 열 지어 들고 떠들썩하게 왔는데, 채(蔡) 신녕(新寧) 운룡(雲龍) 현감이라고 하였다.
5. 청하현의 조경대(釣鯨臺)
五日壬戌。雨。趙盛廚飭筵。欵蔡與叔父于東軒。酒罷陪叔父往遊釣鯨臺。臺在縣之南東十里。松林竹樹。處處漁家。淡烟疎雨。依然如畫。遂登臺以望。遠而北洋天濶。西山雲矗。近而奇巖森立 綠鏡可唾。浮鷗翔鷺。悠然往來。舴(舟+同)數十。日暮爭漁。傍有一舟。歌欵乃而南去。叔父與余。籍翠沙憑冷風。各引數觴歸。崔丹陽已到月樓。紅燭靑娥。逈若瑤臺。然比鯨臺雄致則野馬也塵埃也。
8월 5일 임술. 비 옴. 조 태수가 진수성찬을 차려 정성껏 채 현감과 숙부를 동헌에서 대접하였다. 술자리가 파하고 숙부를 모시고 조경대(釣鯨臺)로 유람 갔다.
대는 현의 남동 10 리에 있었다. 솔숲과 대나무가 있고 곳곳에 어부들의 집이 있었다. 옅은 안개가 끼고 이슬비가 내리는데 그대로 그림 같았다. 마침내 조경대에 올라 바라보자니 멀리 북쪽 바다 위에 하늘이 광활하였고 서쪽 산에 구름이 우거졌으며, 가까이에 기이한 바위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짙푸른 거울 같은 수면에 침을 뱉을 수 있었겠는가. 물 위에 떠있는 갈매기와 나르는 백로(白鷺)가 한가로이 오갔다.
작은 배 수십 척이 저물녘에 다투어 고기를 잡고, 곁에 배 한 척이 있어서 노래를 부르며 남쪽으로 노 저어 갔다. 숙부와 나는 비취(翡翠) 빛 모래를 깔고 앉아 찬바람에 몸을 맡겨둔 채 술을 몇 잔 따르고 돌아왔다. 최 단양은 이미 해월루에 도착해 있었다. 붉은 등불 푸른 미녀가 요대(瑤臺)같이 빛났지만 조경대의 웅장한 경치에 비하면 아지랑이이고 티끌이었다.
6. 보경사(寶鏡寺)의 가람배치와 비로자나삼존불
六日癸亥 晴。旣送崔。又辭趙。將入山。趙斬樓前二竹杖贈。且以一首詩別。皎然白駒。焉可夕乎。山在縣之西北十五里。第一面曰寶鏡寺。寺有金堂。堂有三立佛。木天而中者。毗盧闍那。袈裟以左右者文殊普賢。堂後有地藏殿。殿後有觀音閣。閣最軒敞。東偏有圓眞國師碑。龜趺圓頭。師名承逈。俗姓申。山陽人。蓋麗朝寶文閣大學士成均館大司成者撰之。其姓名石剜難詳。寺之北有浮圖且有菴。爲師而創者也。寺之傍厥草藤厥木楮。居僧之業而資者也。
8월 6일 계해. 맑음. 최(崔) 부사를 환송(歡送)하고, 또 조(趙) 태수에게 인사하고 내영산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더니 조 태수가 누각 앞의 대나무 둘을 잘라 지팡이로 만들어 선물하였다. 또 시 한 수를 지어 작별을 하였는데, ‘깨끗한 흰 망아지, 어찌 저녁일손가(皎然白駒。焉可夕乎).’ 라 하였다.
(중략)
16. 영덕의 남강서원(南江書院)과 호호대(浩浩臺)
而罷歸野城。訪南江書院。院甚荒凉。正門頹碎。中庭蕪穢。半爲菜圃。其外有一兩村嫗。治麻語不休。下馬登堂則塵埃滿席。蟲鳥爭喧而已。余於甲戌年。暫此皷篋。時周太守博聚縣之俊秀而絃誦焉。殊有立院興化之美意。不數十年而堙沒如此。所謂俊秀絃誦者。無一人復見。豈獨吾黨所羞。抑爲國者憂耳。惟後臺名浩浩者。嶄然獨存。松栢千章。臺前一帶長江。依舊寒淸。有魚數十。洋然而逝。江邊且有水鳥大如鵠。赤冠黑翎。方西向立。覽且歇。馳入城。太守安士欽張酒于淸心樓。樓之冠於東南古矣。今不錄。
자리를 파하고 야성으로 돌아가 남강서원(南江書院)을 방문하였다. 서원은 심히 황량해져 있었는데, 마당(中庭)은 잡초로 우거졌고, 반이 채소밭이 되었으며 그 바깥에 두 명의 촌 할미가 있어서 삼을 삼으며 말을 쉬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 강당에 오르니 먼지가 자리에 가득하고 벌레와 새가 다투어 울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갑술년(1574)에 여기서 잠시 가르쳤는데, 당시, 주(周) 태수(太守) 박(博)이 현의 준수(俊秀)한 학생을 모아 교육하였다. 서원을 세우고 교화하는 아름다운 뜻이 각별히 있었지만 몇 십 년이 되지 않아 이와 같이 묻혀버려서 이른바 준수한 학생으로 교육 받는 자는 한 사람도 다시 볼 수 없으니, 어찌 다만 우리 무리(吾黨)만의 부끄러운 바이겠는가? 곧 나라를 위하는 자가 걱정할 뿐이다.
오직 서원 뒤의 호호(浩浩)라 이름 하는 대(臺)만이 홀로 높이 남아 있으며 솔과 잣이 천년에 늠름하였다. 대 앞에 한 줄기 긴 강을 띠고 있어서 옛날대로 차고 맑은데 물고기 수십 마리가 있어서 가득히 헤엄쳐 갔다. 강변에 또한 고니 같은 물새가 있었는데 붉은 갓에 검은 깃털을 하고서 서쪽을 향하여 서 있었다.
구경하고 또 쉬면서 말을 달려 야성으로 들어갔다. 태수 안사흠(安士欽)이 청심루(淸心樓)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는데, 누각은 동남 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지금 (그 연혁을) 기록하지 않는다.
17. 영덕의 김난서(金鸞瑞)와 영해의 이함(李涵)
九日丙寅大雨。在東軒飮安侯酒。出鄕射堂。醉申丈麟祥酒。又大醉金虞侯麟瑞酒及其弟鸞瑞酒。又醉申崑酒。到丹陽又大醉朴水使酒。又醉朴延日及奉事酒。
8월 9일 병인. 큰비. 동헌에서 안 태수와 술을 마시고 향사당(鄕射堂)으로 나갔다. 신(申) 어른 인상(麟祥)과 술에 취하였다. 또 김(金) 우후(虞侯) 인서(麟瑞)와 그 동생 난서(鸞瑞)와 크게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또 신곤(申崑)과 술을 마셔 취하였다.
단양에 이르러서 박(朴) 수사(水使)와 크게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또 박연일(朴延日)과 봉사(奉事)와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十日丁卯。又大醉李養源酒而歸于家。夜深始醒。蘧蘧然忽覺旬日爲醉中行矣。
8월 10일 정묘. 또 이 양원(李養源)과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술이 깨었다. 놀랍게도, 열흘 동안을 취중에 여행하였음을 홀연히 깨달았다.
晦齋先生集卷之六
記
海月樓記 a_024_406c
邑之有樓觀。若無關於爲政。而其所以暢神氣淸襟懷。以爲施政之本者。亦必於是而得之。蓋氣煩則慮亂。視壅則志滯。君子必有遊覽之所高明之具。以養其弘遠淸虛之德。而政由是出。其所關顧不大哉。
읍에 누관이 있는 것이 만약 행정하는 것과 무관하여도 그 신기를 화창하게 하고 그 감정을 맑게 하는 것은 행정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또한 반드시 이에서 그를 얻는 것이다. 대개 기운 번잡하면 생각이 어지럽고 시선이 가리면 뜻이 막힌다. 군자는 반드시 노닐며 보는 곳이 높고 밝은 곳을 갖추어야 한다. 그 넓고 멀고 깨끗하고 빈 덕을 길러서야 행정이 이 덕성에서 나오니 그 연관되고 돌이켜보아야 하는 것이 크지 않은가.
淸之爲縣。僻在海隅。客館之東。古有小樓。陿隘低微。隱在雉堞中。四顧無眼界。無以宣暢湮鬱。導迎淸曠。至使浩渺無涯之壯觀。礙於咫尺而莫收。所見者半畝方塘。數叢梅竹而已。
청하의 현이 된 모양이 바닷가 모퉁이에 궁벽지고 작은 누각이 예부터 있는데 좁고 낮아서 하잘 것 없으며 성의 치 가퀴 중에 숨어 있으며, 사방으로 둘러보면 경계가 끝이 없지만 기분을 펴고 맺힌 마음을 풀어주며 맑고 시원한 세계로 이끌고 맞이하여 넓고 아득하여 가없는 장관에 이르게 하지만 지척에 장애가 있어서 이러한 풍경을 거둘 수 없다. 보이는 것이라곤 반 무의 네모난 연못이고 몇 떨기의 매화와 대나무뿐이었다.
嘉靖戊子冬。縣宰金侯自淵。始欲改構。增其舊制。峻而寬之。滄溟浩汗。擧眼斯得。人之登斯樓者。不知樓之高。而怳然如天開地闢而敞豁也。遂名爲臨溟閣。
가정 무자년 겨울에 현감 김자연이 처음으로 이 누각을 고쳐 지을려고 하여 옛 건물의 규모를 널리고 높이고 넓혀서 바다가 호한하고 눈을 들면 이러한 풍경을 얻게 되었다.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이 누각이 높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어 시원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래서 임명각이라고 이름하였다.
第以匠不得良。築址不牢。營構失宜。不數年而傾側。厥後柳茂繽繼之。支撑起正。未久旋頹。賓客之至縣者。雖當夏月。困於炎蒸。而徘徊却立。不敢登者殆將十年矣。
장인이 훌륭하지 못하고 축대가 견고하지 않으며 건물 지은 것이 바르지 못하여 몇 년 되지 않아서 기울어졌다. 그 뒤에 유무빈이 현감으로 와서 누각을 지탱하는 기둥을 세워 바로서게 하였지만 오래지 않아서 퇴락하여 현에 온 손님이 여름철에 더위로 곤란하여 누각 주변을 배회하고 서성이지만 감히 누각에 오르지 못한 것이 거의 10년이 되어갔다.
歲丁酉秋。鐵城李侯股。以親老出紐縣章。游刃之餘。慨然有志於重修。尙慮邑殘力薄。重勞疲氓。乃搜吏民之欠科納者。隨其多少而稱其役之輕重。又求助於水使李公夢麟。得隣境戍卒之闕防應罰者百名。除其罰而用其力。不煩民而事集。累土築基。結構精緻。碧簷丹檻。玲瓏宛轉。材頗仍舊而制作一新。乃改扁爲海月樓。屬余記之。
정유년 가을에 철성 이씨의 이고가 부모님이 늙어서 고을 원으로 나가서 업무를 보는 틈에 안타까이 여기며 누각을 중수할 뜻이 있었다. 하지만 읍의 세력이 약하고 재력이 부족하며 노역을 무겁게 하여 백성을 지치게 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아전과 백성 중에 세금을 미납한자를 찾아내어 그 미납액의 다소에 따라 노역의 경중을 매기고 또한 수군절도사 이공 몽린에게 도움을 청하여 이웃 고을의 수자리 임무를 가진 병졸 중에서 벌을 받아야 할 사람 100명에게 그 벌을 면제해주고 그들의 힘을 이용하였다. 그래서 백성을 번거롭게 않고서도 공사 일을 할 사람을 모으고 흙을 쌓고 터를 잡아서 누각을 세우니 건물이 정치하고 푸른 처마에 붉은 난간이며 날아갈 듯이 아름다워서 재목이 자못 낡았지만 건물이 새로워졌다. 편액을 고쳐 해월루라고 하였다. 나에게 그 기문을 쓸 것을 부탁하였다.
余惟吾鄕距縣纔數程。庶幾一往登覽。以滌塵煩。而繫官于朝。願莫之遂。然茲樓之勝狀。因其名而求之。亦可得其一二矣。
생각해보니 나의 고향과 현이 겨우 수십 리 떨어져 있어서 거의 한 번 가서 누각에 올라서 세상 티끌과 번잡함을 씻어내고 싶지만 조정에서 관직을 하는데 얽매어서 원하지만 그렇게 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누각이 빼어난 모습은 그 이름에서 구하는데 또한 한두 점을 얻을 수 있다.
欄縱目。萬景森羅。邇延野綠。遠混天碧。鬱然而峙於北者。內延山也。巍然而秀於西者。回鶴峯也。松林遠近。蔥翠可玩。煙嵐朝暮。變態萬狀。而獨取二物以爲名者。志其所見之大者也。見其大而有得於懷。豈但快目玩物而已哉。
난간에서 눈 가는대로 보면 삼라만상이 가까이로는 들의 녹색에 이어지고 멀리로는 하늘의 푸름에 섞이며 울창하게 북쪽에 솟은 것이 내연산이다. 높고도 빼어나게 서쪽에 있는 것이 회학봉이다. 솔숲이 원근에 있어서 푸른 기운을 완상할 수 있고 아침저녁으로 이는 연무와 이내가 천태만상이지만 오직 바다와 달 두 자연물만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은 그 보이는 것이 큰 것에 뜻을 둔 것이다. 큰 것을 보고 가슴에 얻는 것이 어찌 다만 눈만을 즐겁게 하려고 하는 것이겠는가.
若乃桑暾照波。煙霧初消。淼淼漫空。一碧萬里。浟㴒瀲灎。浮天浴日。浺瀜滉瀁。不見涯岸。憑高而極目。渺茫邈乎。如凌虛御風而臨河漢。使人心境廓然廣大寬平。而浩然之氣充塞於兩間。此則觀海之善者也。
아침 해가 바다 물결에 비추면 물안개가 처음 걷히고 아득하고 아득한 바다 물결이 한 결 같이 푸른 빛깔이 일만 리 펼쳐지고 넘쳐흐르는 물결이 출렁이고, 떠있는 하늘이 해를 목욕시키고 넓디넓은 물결이 끝없이 출렁이고 해안을 볼 수가 없으며 높은데서 눈에 가득하게 아득하고 아득하게 멀리 바로 보인다. 허공의 바람을 타고 은하수에까지 닿고 사람의 마음을 확연하게 넓고 크고 관대하고 잔잔하게 하여 호연지기가 몸에 가득 차게 하니 이것은 바다를 보는 일의 좋은 점이다.
至若氣霽坤倪。雲斂乾端。氷輪輾碧。暮靄橫白。水天混光。星河韜映。霽色嬋娟。澄輝皎潔。人在危樓。愛而玩之。寄身於淸高之域而寓目於虛明無盡之境。杳然如離世絶俗而登蓬瀛。使人胸次洒落。査滓淨盡而本然之天。浩浩於襟靈。此則玩月之善者也。
비가 개고 대지가 드러나고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나타나면 얼음바퀴 같은 달이 푸른 하늘에 떠오르면 저녁 안개가 희개 걸리며 바다와 하늘이 빛을 뒤섞고 은하수가 그림자를 감추며 비갠 풍경이 곱고 어여쁘다. 맑은 달빛이 휘영청 밝고 깨끗하다. 사람이 높은 누각에 있어서 이러한 풍경을 아끼고 완상하며 맑고 높은 공간에 몸을 맡기고 텅 비고 밝아서 다함이 없는 경계에 눈을 두어서 아득히 세상을 여의고 속세를 끊어서 신선이 사는 봉래산과 영주에 오르게 한다.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며 가슴 속 찌꺼기를 모조리 쓸어내고 본연의 천성으로 돌아가게 하니 영혼과 마음이 걸림 없이 넓고 넓어진다. 이러한 것은 곧 달을 완상하는 좋은 점이다.
嗚呼。君子之觀物。異於俗眼。觀其物。必悟其理。而體于心。故觀天行而不遑寧息。察地勢而思厚其德。侯之以海月名樓。夫豈徒然哉。海以取其寬。月以取其明。寬以弘吾量。明以昭吾德。雖以之治天下可也。而況於爲一邑乎。登斯樓者目其額而思其義。則庶免於俗眼矣。
아! 군자가 자연을 관찰하는 것은 속인의 안목과 다르다. 그 자연을 관찰하는 데는 반드시 그 이치를 깨닫고 마음에 체득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고 편안히 쉴 겨를이 없고, 땅의 지세를 살피어 자신의 덕을 두텁게 할 것이다. 현감이 해월로 누각을 이름한 것이 어찌 쓸모없는 일이겠는가. 바다로서 그 관대함을 취하였고 달로서 그 밝음을 취하였다. 그 관대함으로 나의 국량을 넓히고 그 밝음으로 나의 덕을 밝게 한다. 비록 천하라도 이러한 덕이면 다스릴 수가 있다. 하물며 한 고을을 위하여서야. 이 누각을 오르는 자는 그 편액을 보고 그 뜻을 생각하면 거의 속된 안목을 면할 수가 있을 것이다.
嘉靖癸卯三月下澣。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驪江李彥迪。記。
가정 계묘년(1543) 3월 하순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여강 이언적 적음.
조경대, 그 아래의 바위들
해안 초소 서쪽에 누각터가 확실하게 남아 있다.
갯메꽃과 방풍(허브)
기린초
월포 백사장
조경대에서 바라본 바다. 실제로 고래를 보고, 어민들이 고래 사냥하는 일도 잦았고, 고래회도 많이 먹었다.
海月先生文集卷之一 詩
조경대에서 노닐며 遊釣鯨臺
翠㠐逈如翺。푸른 산 멀리 날아가듯 하고
滄溟平不濤。창해는 잔잔하여 물결 일지 않네.
天開萬里鏡。하늘이 열리니 만리의 거울이고
石露三山鰲。돌이 드러나니 자라 머리 위의 세 산이다.
*금자라 머리 위에 있는 신선이 사는 3산(봉래, 방장, 영주)
造化鍾奇壯。조물주가 기이하고 장한 경치를 모았고
鬼神分下高。귀신이 높고 낮은 데를 나누었다.
人間愛此地。인간이 이 땅을 아끼고
吾與白鷗曹。나는 흰갈매기 떼와 어울린다.
海月先生文集卷之一 詩
조경대에서 또 짧은 7언 절구 又短絶
半入滄波半太淸。반은 푸른 물결에 들고 반은 짙푸른 창공에 드니
長風破浪韻流鈴。긴 바람이 물결을 부수고 소리가 방울처럼 흐른다.
十年不試任公手。십 년이나 임공자처럼 고래 낚시를 하지 못하다가
今日南溟始釣鯨。오늘에야 남녘 바다의 조경대에 비로소 오르네.
醉吃集卷之三 詩
端午日。與淸河柳使君。思璟 遊照鏡臺。贈柳秀才觀之。名蓂。太守之子。
단오날 청하 현감 류사경과 조경대에서 노닐며 태수의 아들 류수재 관지 명에게 줌
*수재는 진사, 관지는 자, 명은 이름
*유숙은 조경대 표기를 의도적으로 다르게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거울처럼 맑은 수면에 우주가 있는 그대로 투영되는 의미를 부여한 것일까.
의상대사의 화엄경 법성게의 能仁海印三昧中이 생각난다.
1.浪吟登眺海山阿。속절없이 읊조리며 언덕에 올라 바다와 산을 바라보는데,
2.又喜遨頭載酒過。또 태수는 기쁘게 술을 싣고 지나간다.
3.萬里蒼涼看日近。만 리의 서늘한 바람에 해를 가까이 보고,
4.半仙飄拂馭風多。그네를 높이 뛰어 많은 바람을 탄다.
5.竹枝舊曲傳荊楚。죽지사(어민들의 뱃노래)는 형초(청하현) 땅의 풍속을 전하고,
6.棟糉新包贈汨羅。마룻대(배)에 송편을 새로 싸서 멱라수(월포)에 던진다.
*오두(遨頭) : 송대(宋代) 태수(太守)의 별칭이다. 오두는 수령을 뜻하는 말로, 《성도기(成都記)》에 “태수가 두자미(杜子美)의 초당(草堂)에 나와서 놀고 잔치할 때면 사녀(士女)들이 너른 뜰에 의자를 늘어놓고 앉는데, 이 의자를 오상(遨牀)이라 하고 태수는 놀이의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오두라고 하였다.” 하였다. 송(宋)나라 때에 성도(成都)에서는 정월부터 4월까지 꽃놀이를 하였는데, 태수가 출유(出遊)하면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였는바, 이때 사람들이 태수를 오두라고 불렀다 한다. 《成都記》1월부터 4월 사이에 태수(太守)가 들놀이 하는 것을 말한다. 《노학암필기(老學菴筆記)》에 “4월 19일을 성도(成都)에서 완화일(浣花日 완화계(浣花溪)에서 노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름)이라 하여 오두연(遨頭宴)을 두보(杜甫)의 초당(艸堂) 창랑정(滄浪亭)에서 여는데, 성중 사람이 다 나와서 금수(錦繡)가 길을 메웠다.” 하였다. 성도(成都) 사람들이 4월 9일을 오두(敖頭)라 하여 봄놀이를 하는데, 그날 봄놀이에 나오는 태수(太守)를 오두라 일렀었다.《成都記》오두는 당(唐) 나라 때 성도(成都)에서 정월(正月)부터 4월 19일인 완화일(浣花日)까지 태수(太守)가 출유(出游)할 적에 사녀(士女)들이 나가 구경을 하면서 태수를 오두라 일컬은 데서, 즉 태수가 나가 노니는 것을 말한다. 4월 19일을 완화일이라 한 것은, 곧 이날 완화계(浣花溪)에서 놀이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른 말이라 한다.
*죽지사(竹枝詞) : 악부(樂府)의 한 가지 체(體)로서, 주로 남녀의 정사(情事) 또는 지방의 풍속 등을 읊은 것이 많다. 당(唐)의 유우석(劉禹錫)이 낭주(郞州)에 귀양가 있을 적에 신사(新詞) 9수를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멱라수: 굴원이 자결한 강. 한식풍속
*1~6구는 단오날 풍정을 묘사하였다.
7.莫笑醉歸遺錦襪。술 취해 돌아오며 비단 버선 버려둔 것을 웃지 마소,
8.江妃收拾步微波。옥을 얻었는데 강비는 잔잔한 물결을 걸으며 사라졌다.
*주(周)나라 정교보(鄭交甫)가 초(楚)나라 한고대(漢皐臺) 아래에서 강비(江妃)인 선녀 두 사람을 만나 사랑의 표시로 패옥(佩玉)을 달라고 청하자, 그 선녀들이 허리에 찬 패옥을 풀어서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전설이, 진(晉)나라 곽박(郭璞)의 〈강부(江賦)〉에 나온다. 《文選 卷6 江賦 注》 여기서는 매화의 흰 꽃잎을 형용하였다.
*강비: 전설 속에 나오는 신녀(神女)로, 한 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 강비이녀(江妃二女)에, “강비 두 여인은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인지 모른다.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가에 나와 놀다가 정교보(鄭交甫)를 만났는데 그들을 보고 기뻐하여 그들이 신인(神人)인지도 몰랐다.” 하였다. 강비(江婓).
*7~8구는 단오날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9.方丈浮來碧海灣。방장산이 푸른 바다굽이에 떠내려 왔고,
10.鼇頭猶壓地維頑。자라머리는 삼신산에 눌린듯하고 신선의 땅을 굳게 묶고 있다.
*오두 : 신선 세계를 말한다. 삼신산(三神山)을 자라가 떠받치고 있다 한다.
효우정려비가 내려진 이원량, 보경사에 승탑과 탑비가 있는 오암 스님이 조부 남해현감 김석경의 손자로 태어난 마을인 오두촌(강성산)이 가까이 있다.
*금오는 동해(東海)에 있다는 금색(金色)의 큰 거북[巨鼇]을 가리킨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에는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신산(神山)이 있는바, 이 산들이 조수(潮水)에 밀려 표류(漂流)하여 정착하지 못하므로, 천제(天帝)가 이 산들이 서극(西極)으로 흘러가 버릴까 염려하여 큰 거북 15마리로 하여금 이 산들을 머리에 이고 있게 함으로써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는데, 뒤에 용백국(龍伯國)의 거인(巨人)이 단번에 이 거북 6마리를 낚아감으로 인하여 대여, 원교의 두 산은 서극으로 표류해 버리고, 방호, 영주, 봉래의 세 산만 남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1.兩三鹽竈晴沙上。두세 곳 소금 굽는 움막이 깨끗한 모래 위에 있고,
12.遠近漁舟返照間。원근의 고기잡이 배는 석양 속에 돌아온다.
13.老蚌落盤珠滿殼。늙은 조개를 쟁반에 담으니 진주가 껍질에 가득하고
14.長鯨飛膾雪堆山。고래를 회를 써니 눈이 산처럼 쌓인 것 같다.
*9~14구는 조경대 주변 월포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15.何人錯道他鄕苦。어느 사람이 타향에서는 고생이라고 잘못 말하는가,
16.萬里登臨始解顏。조경대에 오르니 만 리 바다가 펼쳐져 비로소 얼굴이 풀어진다.
17.浴蘭初罷振荷衣。난초향에 처음 목욕하고 연잎 옷을 털어 입고서,
18.照鏡臺前倚落暉。조경대 앞에서 석양에 기댄다.
*욕란: 1)난탕(蘭湯)은 향기로운 난초를 넣어서 끓인 물을 말하는데, 옛사람들이 난초가 불상(不祥)한 것을 물리칠 수 있다 하여 난탕으로 목욕재계를 했다고 한다. 《대대례기(大戴禮記)》〈하소정(夏小正)〉에 의하면 “단오일에는 난탕으로 목욕을 한다.〔午日以蘭湯沐浴〕”라고 하였다.
2)<<초사》 구가(九歌) 운중군(雲中君)에 “난초 끓인 물로 몸을 씻고 향초 끓인 물로 머리 감는다.〔浴蘭湯兮沐芳〕” 하였다. ‘세 번 향기 쐬고’는 삼목삼훈(三沐三熏)의 준말로 세 번 목욕하고 세 번 향기를 쐰다는 뜻이다.
*하의: 강호에 은거한 고사(高士)가 입는 옷을 말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연꽃 잎으로 웃옷을 해 입고, 부용 잎을 모아 바지를 해 입는다.[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라는 말이 있다. 헤진 옷.
19.此日偶逢蒲酒醉。이날 만나서 창포 술에 취하지만
20.去秋曾揷菊花歸。지난가을 일찍이 국화를 머리에 꽂고 돌아갔지.
21.夢中眞跡鴻泥在。꿈속의 진적이 정처가 없고,
22.別後淸風舶趠稀。이별 후의 맑은 바람에 배가 드물다.
*홍니(鴻泥) : 진흙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으로, 종적이 정처 없음을 뜻한다. 소식의 시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에 “우리 인생 가는 곳마다 어떠한고. 응당 나는 기러기 눈 속 진흙 밟은 듯하리. 진흙에 우연히 발톱 자국 남기지만, 기러기 날아감에 어찌 동서를 따지리오.〔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한 데서 유래한다.
23.秪有海翁猶滯影。다만 해옹이 있어서 그림자 머무는 것 같고,
24.滿汀鷗鷺亦依依。물가 가득 갈매기 해오라기 또한 선명하다.
*해옹은 《열자(列子)》에 나오는 바닷가에 사는 사람을 말하고, 기심(機心)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간사한 마음이다. 바닷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를 좋아하여 매일 아침 바닷가에 나가면 그의 곁에 수백 마리의 갈매기가 내려앉곤 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가지고 놀고 싶다고 잡아오라 하여 이튿날 바닷가에 나가니 갈매기들이 날개만 칠 뿐 내려오지 않았다 한다.
*15~22구는 단오날 조경대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25.不惜千金繫一瓠。천금을 아끼지 않고 배운 재주로 표주박 하나 매고
26.隨波浩蕩沒輕鳧。호탕한 물결 따라 가벼운 오리처럼 잠긴다.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주평만(朱泙漫)이 용 잡는 기술을 지리익(支離益)에게 배우면서 천금의 가산을 모두 소비하였다. 3년 만에 기술이 이루어졌으나 쓸 곳이 없었다.” 하였다.
27.操舟忘水聞漁子。배를 저으며 물을 잊고 어부의 노래 소리 듣고
28.被髮遊梁見丈夫。머리 풀어헤치고 양(梁)에서 놀며 장부를 본다.
*한나라 경제(景帝)의 아우 양효왕(梁孝王)이 문사들을 우대하여, 화려하게 정원을 꾸며 놓고 사마상여, 추양(鄒陽), 매승, 엄기(嚴忌) 등 뛰어난 문인들을 초대하여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57 司馬相如傳》
29.疑是泗中搜禹鼎。아마도 사수(泗水)에서 우 임금의 솥을 찾는 것 같고
30.錯敎淵底探龍珠。연못 바닥에서 여의주를 찾게 하는 것 같다.
*우정(禹鼎) : 옛날 하우씨(夏禹氏)가 구주(九州)의 동(銅)을 모아 주조한 9개의 정(鼎)이다. 이 정에 온갖 물상을 새겨 넣어 사람들로 하여금 간물(姦物)을 식별해 해를 입지 않게 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宣公3年》
*25~30구는 해녀의 활동 모습을 묘사한 것 같다.
31.古今哀溺知何限。고금의 슬픔에 빠진 것이 얼마였는지 알지만
32.獨笑零陵帶貨愚。다만 영릉만을 웃으며 어리석게도 화물을 지녔다.
*영릉(零陵) : 진 공제(晉恭帝)를 말함. 유유(劉裕: 남조 송 태조〈南朝 宋太祖〉임)가 원희(元熙: 공제의 연호) 원년에 공제를 폐하여 영릉왕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해에는 마침내 공제를 시해하고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국호를 송(宋)으로 했었다.
*31~32구는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바닷가 해녀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고,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자신, 숙부 유몽인, 광해군을 영릉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33.海上丹丘第一層。바닷가 단구의 제일층(조경대)에
34.老翁今與少年登。노옹은 이제 소년과 더불어 오른다.
*단구(丹丘): 밤이나 낮이나 항상 밝은 땅으로, 선인(仙人)이 산다는 전설적인 지명이다. 굴원(屈原)의 〈원유(遠遊)〉에 “우인을 따라 단구에서 노닒이여, 죽지 않는 옛 고장에 머물렀도다.[仍羽人於丹丘兮 留不死之舊鄕]”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楚辭 卷5》
35.藍田日暖含明玉。남전의 날이 따스하니 밝은 옥을 머금었고
36.華岳峯尖立俊鷹。화악의 봉우리가 날카로워 보라매가 앉았다.
*남전, 화악은 현감 류사경 가문을, 명옥과 준응은 진사가 된 아들 류명을 비유하고 있다.
37.自笑形容吾潦倒。스스로 웃는 얼굴 나는 늙어 쇠약하였고,
38.欲將追逐子飛騰。뒤쫓아 가고자 하나 자네는 날아오른다.
39.分留物色知誰共。남겨 놓은 물색은 누구와 함께 할지를 알겠으니,
40.三絶奇才世所稱。삼절의 빼어난 재능은 세상에서 칭찬하는 바이다.
*삼절: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난 것.
*33~40구는 류사경 가문과 그 아들 류명에게 칭찬과 격려를 하고 있다.
醉吃集卷之三
詩
고래 사냥을 구경하며 觀獵鯨 a_071_060b
何物憑陵怒且鳴。무슨 생명체가 해안에서 성나고 우는가,
眼光雙閃月珠明。한 쌍의 눈빛이 번쩍이는데 명월주(明月珠) 같다.
龍頭贔屭千尋岳。비희(용의 맏아들)의 머리가 천 길의 산악이고
鼇背崚嶒萬雉城。거북의 등짝은 높기가 만 길의 치성(雉城)이다.
橫陸縱爲獱獺笑。뭍에 퍼진 모습을 수달이 비웃고
揚波猶作震雷聲。물결을 헤치며 우레벼락 같은 소리를 낸다.
呑舟罪大難容赦。배를 삼킨 큰 악인(고래)은 용서 받기 어렵고
輸與漁人奏凱行。끌고 온 사람과 잡은 사람들은 개선의 노래를 부른다.
長鯨將死亦哀鳴。고래가 죽으며 또한 슬프게 울고
一索功高海宇明。한 밧줄에 공이 높은데 바다 하늘은 밝다.
斫肉丘山分獵戶。살을 언덕과 산처럼 베어내어 사냥한 집에 나누고
燃臍燈火照江城。배꼽기름 태우는 등불이 강성(江城)을 비춘다.
波濤淨洗腥膻氣。파도가 비린내를 깨끗이 씻어가고
魚鱉咸歸鼓舞聲。물고기와 자라 모두 돌아가고 북치고 춤추는 소리 들린다.
聖化涵濡誰敢梗。성군(聖君)의 교화가 산하를 적시니 누가 감히 어긋나겠는가,
扶桑小醜莫橫行。부상(일본)의 오랑캐(왜구)은 횡행을 하지 말라.
聞道蒲牢半夜鳴。듣자하니 포뢰(용의 셋째 아들)는 한밤에 운다하니
始看鯨力擊空明。비로소 고래의 힘이 허공을 치는 것을 본다.
木華賦得橫滄海。목화*의 <해부(海賦)>가 창해를 가로질러 얻었고
李白騎來向赤城。이백이 말 타고 적성(赤城신선의 땅)을 향하여 온다.
天地亦知供壯觀。하늘과 땅도 또한 장관을 알고 이바지하고
魚龍應解助詩聲。물고기와 용도 응당 시 읊는 소리를 알고 돕는다.
可憐誤落任公釣。불쌍하게도 임공자의 낚시질에 잘못 떨어지니
咫尺風濤不復行。지척의 바람과 파도라도 다시 가지 말아라.
*명월주(明月珠): 전설에 의하면 고래의 눈이 변하여 명월주가 된다고 한다. 《文選 吳都賦 注》
*탄주: 탄주어(呑舟魚) : 배를 통째로 삼킬 만한 큰 고기. 전하여 대악인(大惡人).
*탄주어: 성호사설 제6권 만물문(萬物門) 탄주어(呑舟魚)
당형(堂兄)이 이르기를, “옛날 물고기 중에 배를 삼킬 만한 큰 물고기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믿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내가 동해(東海)로 이사한 후에 어떤 대머리를 만나서 그 대머리가 된 까닭을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일찍이 세 사람이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서 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고래[鯨]에게 삼킨 바가 되었다.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앞이 깜깜해지면서 천지를 분별할 수 없었던 바, 이것이 바로 고래의 뱃속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칼날로 고래의 창자를 이리저리 그으니, 고래도 배길 수가 없어 삼켰던 우리들을 도로 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중 한사람은 죽었는지 알 수 없었고 두 사람만이 고래 뱃속을 벗어 나왔으나 머리가 익어서 다 벗겨진 후에는 털이 다시 나지 않았다’ 한다. 이로 본다면, ‘배를 삼키는 물고기가 있다.’는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니다.”고 하였다.
[*고래 기름 [ 鯨油 , whale oil ]: 고래의 지육, 장기, 뼈, 가죽 등의 부분에서 채취되는 유지. 긴수염 고래, 정어리 고래 등의 수염고래류에서 얻게 되는 큰고래 기름과 향유고래, 혹등고래 등의 치경류에서 얻게 되는 향유고래 기름이 있다. 보통 고래 기름이라고 하면 수염고래의 기름-[네이버 지식백과]
*강성: 조경대 북쪽에 강성산이 있다.
*목화(木華): 서진(西晉) 발해(渤海) 광천(廣川) 사람. 자는 현허(玄虛)다. 진혜제(晉惠帝) 때 태부(太傅) 양준부(楊駿府)의 주부(主簿)를 지냈다. 사부(辭賦)에 뛰어났지만 작품은 대부분 실전되어 「해부(海賦)」 한 편만이 전한다. 이 작품은 대해(大海)의 광활한 광경과 변화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웅장하고 아름다우면서 문사가 심오하고 미려하여 서진 부단상(賦壇上)의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1.20, 이회문화사)
*이백이 고래를 타다: 전설에 의하면 이백이 채석기(采石磯)란 곳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술이 취해 물속의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매성유(梅聖兪)의 시 채석강증곽공보(采石江贈郭公甫)에 이백의 죽음을 두고 “응당 굶주린 교룡의 입에 떨어지지 않고 고래를 타고 푸른 하늘로 올라갔으리.〔不應暴落飢蛟涎 便當騎鯨上靑天〕” 하였으며, 송나라 마존(馬存)의 연사정(燕思亭)에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니 강남의 풍월은 오랜 세월 한산해졌어라.〔李白騎鯨飛上天 江南風月閑多年〕” 하였다.
*임공:《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나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선진(先秦) 때 임공자(任公子)라는 사람이 50필의 거세한 소를 미끼로 매달아 회계산(會稽山)에 걸터앉아서 동해 바다로 낚시줄을 던졌는데, 1년 뒤에 큰 고기를 낚아 이를 건육(乾肉)으로 만든 뒤 절하(浙河) 이동, 창오(蒼梧) 이북의 사람들을 질리도록 먹여주었다는 내용이다.
조경대 해안 절벽
조경대 앞 바다에 자라 머리 모양의 바위(삼신산을 떠받치는 오두?)도 드러나 보인다
조경대 석축
조경대에서 발견되는 극미량의 백자편
조경대 석축
현충일에 촬영한 화산불 해당화
청하현감에 제수되어 서울을 떠나는 것이 영조 9년(1733) 3월경이다.
이 소식을 듣고 간성군수로 나가있던 順庵 李秉成이 시를 보냈다.
미원장 늙어 미쳤다 성내지 말게, 不忿元章老且顚
縑煤隨處載行船
겸옹의 이 걸음도 좋은 물건 없고, 謙翁此去無長物
주역도 오직 옛날에 강하다 남은 헌책뿐이라. 羲易惟殘舊講篇
영남 사람 응당 사또 이름 알테니, 嶺人應知使君名
복사꽃 오얏꽃 산에서 피고(桃李山은 청하 봉수대가 있는 바닷가의 산)
학이 춤추며 맞으리라(呼鶴山은 청하읍 진산). 桃李山開舞鶴迎
해당화 피는 백사장 다 밟고 나서 멀리 배를 부르게, 踏盡棠沙遙喚艇
죽서루 위에는 우리 형님 계시니. 竹西樓上有吾兄
(순암집 권4, 贈元伯之淸河)
-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범우사)
현충일 화산불 갯방풍
조경대 아래 해변에서도 자라고 있는 해란초(바다 난초)
청하읍성 동문쪽 예안 각자
청하읍성 서쪽의 이단 성벽
주춧돌. 아마도 신라시대의 절터에서 가져와 재활용한 것 같기도 하다.
호호대, 남강서원, 임경대, 청심루, 주등역, 남역, 읍성과 관아 향교, 도로, 산세, 수세 등이 한 눈에 보인다.
영덕 호호대 앞에 있는 고인돌 위에 세운 새천년의 숲 기념비
김하락 장군 순국기념비도 없고, 호호대 안내 이름도 없다.
호호대가 언제 개발 새발의 포크레인날에 찍혀서 파괴될 지를 모르겠다.
애구...우리시대 사람들의 천박한 문화인식과 무식함이여!
남강서원터 오르는 길가 어느 집 대문간에 떨어진 앵두알들
경상도읍지의 영해부도. 관어대, 향교, 영해부 관아, 인량리, 유금사, 장륙사, 물줄기, 산세, 도로 등이 시원하게
나타난다.
해동지도 영해부도. 관어대, 읍성의 문루와 옹성, 해안루 등 관아, 향교, 단산서원, 산세 수세, 도로가 한 눈에 파악된다.
목은 선생의 시조
부벽루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다.
성은 텅 비었는데 조각달이 떴고 돌은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에 변함없네.
기린은 가고 오질 않고
하느님 해모수, 주몽의 자손들은 어디에서 사는가.
(글자 何가 河로 잘못 새겨져 있다.)
길게 휘파람 불고 바람부는 언덕에 서니
(글자 등(石+登)이 丹으로 잘못 새겨져 있다.)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더라.
시비에 새긴 원문이 완전히 엉터리다.
목은시고 제2권
시(詩)
영해부(寧海府)로 돌아가는 신석보(申碩甫)를 송별하다. 이름은 언(彦)이다.
회오리바람은 어찌 이리 부는고 / 飄風何發發
흰 구름 또한 아득하기만 한데 / 白雲亦茫茫
이 사람은 은거할 생각이 있어 / 之子有遐想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누나 / 超忽歸故鄕
새 임금이 한창 선비를 중시하여 / 新王方重士
대각에 난봉이 모두 모였는데 / 臺閣集鸞鳳
어찌하여 자기 일만을 숭상하고 / 如何尙其事
흰 망아지는 밭 곡식도 안 먹는고 / 白駒不食場
단양 고을은 나의 고향으로 / 丹陽我鄕曲
경치가 동방의 으뜸이거니와 / 雲物冠東方
공명은 그런대로 이루었으니 / 功名苟云可
건강할 때에 땅 가려 집 짓고 / 卜築及康強
우리 함께 관어대에 올라가서 / 共上觀魚臺
해돋이의 빛을 한 번 마셔야겠네 / 一吸扶桑光
*자기 일만을 숭상하고 : 은거(隱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고괘(蠱卦) 상구(上九)에, “왕후를 섬기지 않고, 자기 일만을 숭상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 한 데서 온 말이다.
*흰 망아지 …… 먹는고 : 《시경》 소아 백구(白駒)에, “귀여운 흰 망아지가 내 밭 곡식 먹었다 핑계 대고, 발과 고삐를 묶어 놓고서, 이 아침을 길게 늘이어, 귀한 우리 이 손님을 더 놀다 가시게 하리라.[皎皎白駒 食我場苗 縶之維之 以永今朝 所謂伊人 於焉逍遙]”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어진 사람이 왔다가 돌아가려고 할 때 조금이라도 더 놀다 가게 하려는 주인(主人)의 아쉬운 정을 노래한 것이다.
목은 생가터(무가정지-고려의 대학자인 가정이 살고 유학의 종장인 목은 태어나 어린 날을 보낸 집터로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명당에 자리잡은 터인가?)
가정 목은 양 선생 유허비
괴시리 해촌고택의 앞마당에서
살구가 익어간다. 웬지 살구는 향수를 자극한다. 전원주택을 지으면 마당엔 반드시 살구나무를 심을 것이다.
괴시리
괴정
젯상
경목재 목은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는 공부방
원구리 퇴계선생의 친필 현판. 경수당 박공검 세순은 임란의병장 박의장의 숙부이기도 하다.
재령 이씨 이양원 함의 아들 우계종택의 담장 아래에 인동초가
우계정. 여름철엔 고택 체험 숙박 가능.
재령 이씨 갈암 이현일 선생, 소설가 이문열
경수당 박세순이 울릉도 향나무를 옮겨 심었다. 수령 700살. 한국 문화의 힘과 한국인의 기상과 한국인의 뿌리깊은 정신을 웅변한다. 이 나무 앞에서 우리는 언어 이전의 꿈틀대는 그 어떤 감동을 느낀다.
괴시리 괴정에서 작설차를 얻어 마시며 행다 주인장의 등 너머 창문을 통하여 내 눈에 보인 글씨.
입춘방으로 붙였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봄의 신이나 조상님께 올리는 차일까?
차를 마시며 봄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 몸을 적시고, 우리 집에 감돌라는 뜻일까?
차례라는 말도 있지만 조선초기에 유교식으로 의례가 바뀌기 전에는 불교식 의례를 지냈고,
술을 마시지 말라는 불교의 계율로 의례에 술 대신 차를 쓰고, 술 대신 차를 마셨다.
은나라의 유교문화는 술 문화이다.
우복집 제2권
시(詩)
입춘일(立春日)에 우연히 읊조리다.
초상 들고 도루를 붙이느라 시끄런데 / 椒觴桃壘競喧嗔
싸늘한 등 홀로 대해 쓸쓸하게 앉았어라 / 獨對寒燈坐悄然
오늘에사 내 지은 죄 크다는 걸 알겠나니 / 今日始知余罪大
금오문 밖에서 새해 온 걸 맞이했네 / 金吾門外候新年
[주C-001]입춘일(立春日)에 …… 읊조리다 : 이 시는 마지막 구절로 보아 병진년(1616, 광해군8) 2월에 지은 것인 듯하다.
[주D-001]초상(椒觴) …… 시끄런데 : 초상은 산초(山椒)와 여러 약재를 섞어서 만든 술을 말하고, 도루(桃壘)는 도부(桃符)로, 옛날에 액막이를 하기 위하여 복숭아나무로 판을 만든 다음 울루(鬱壘)와 신다(神茶) 두 신(神)의 형상을 그려 대문의 양쪽에 붙인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입춘날에 하는 풍습이다.
[주D-002]울루(鬱壘) : 신(神)의 이름이다. 〈독단(獨斷)〉에, “바다 속에 도삭산(度朔山)이 있고 산 위에 복숭아 나무가 있어 삼천리를 반굴(蟠屈)하였으며, 그 낮은 가지의 동북쪽에 귀문(鬼門)이 있어 온갖 귀신이 출입한다. 울루(鬱壘)의 신은 신다(神茶)라는 신과 함께 모든 신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고, 악독한 귀신에 대해서는 위색(葦索)으로 잡아 묶어 호랑이에게 넘겨준다.” 하였다.
틱낫한 스님의 글씨. 운다상즉.
구름이 비로 내리고 물이 되고 차가 된다. 찻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된다. 구름과 차는 서로 원인이자 결과이다.
구름과 차는 서로 얽혀 있다. 우주만유가 모두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 화엄경.
틱낫한 스님은 서양인들을 위하여 주로 영문 서예(캘리그래피) 글씨를 쓰신다.
관세음보살님처럼 연민심을 가지고 들어라. 이해와 연민이 곧 진실된 사랑.
괴정
무슨꽃인지? 해촌고택 마당에서
해촌고택
조경대 아래서 주운 조약돌 네 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보리수필 글벗님들께 틱낫한 스님으로부터 배운
조약돌 명상법을 조경대 솔밭에서 가르쳐 드렸을텐데...
첫번째 조약돌을 왼손 손바닥 위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바쳐들고
들숨에 나는 꽃이다
날숨에 새로워진다
들숨 꽃 날숨 새로움
들숨 꽃 날숨 새로움
이라고 마음 속으로 말한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꽃처럼 피어나고 새롭고 생기가 감돈다.
어른들은 시들하고 생기가 없고 뻣뻣하다.
이 명상으로 어린이처럼 스스로가 꽃이 되고 새로움의 에너지를 길어 올린다.
두번째 조약돌을 손바닥에 올리고
들숨 산 날숨 굳건함, 3번
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굳건함이 있어야 사랑하는 사람도 우리를 의지할 수가 있다.
세번째 조약돌을 손바닥에 올리고
들숨 잔잔한 수면 날숨 있는 그대로 비춤, 3번
수면이 잔잔하면 구름과 산과 나무가 있는 그대로 수면에 비추어진다.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 두려움, 분노, 탐욕, 우울 같은 번뇌를 만들고,
우리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번뇌들을 옮긴다.
네번째 조약돌을 손바닥에 올리고
들숨 공간 날숨 자유, 3번
마음이든 물리적이든 공간이 있어야 우리는 걸림 없고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조약돌과 호흡을 매개로 하는 조약돌 명상을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르쳐 드릴께요. ^^
영해는 길이 좋아서 포항에서는 금방 갈 수 있다.
다음에 여유있게 시간을 내어
영덕 추암고택, 영해읍성터, 가족과 괴시리 고택체험,
관어대, 대진과 고래불 해숙욕장, 벽산 도해단, 장륙사, 인량리, 원구리를 돌아보아야 하겠다.
목은 생가에서 블루로드를 트레킹해 보아야 하겠다.
포항 청하읍성, 해월루, 조경대, 오두촌 이원량 효우비,
영덕 호호대, 남강서원터에 우선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주면 좋겠다.
동학 이필제의 영해부 관아 습격 사건.
그리고, 해월루, 조경대를 어서 복원하면 좋겠다.
역사적 근거와 인문학적 콘텐츠가 확실하기 때문에
포항이나 영덕 사람들에게는 둘도 없이 좋은 자연과 문화의 유산이다.
시정이 어서 무지에서 깨어나길
시민이 깨어 있어야 시정이 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첫댓글 사가적 전문성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이채롭습니다.
역사와 현장에 정통하신 어링불님의 사진, 깊은 감명으로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