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 8기-2학기 18차시 자료 (12월 16일 용)
수필창작의 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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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품 첨삭
1. 아모르 파티 /김옥수 4
1. 해마다 경로대학 어르신들을 모시고 봄·가을 소풍을 갔다. 각 반을 맡은 자원봉사자들을 버스 한 대에 두 명씩 배치시켜 어르신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매주 목요일, 150~170여명이 참석하는 경로대학은 성경반, 서예반, 한글반, 한국무용반, 노래반이 있었는데 노래반 어르신 수가 가장 많았다. 45인승 버스 4대에 반별로 어르신들을 배치하는데, 노래 반 어르신들 버스는 항상 시끌벅적하다.
2. 어르신들이 워낙 장거리 소풍을 좋아하시는지라, 10년 간 남한의 명승지는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다. 출발 전, 하루 간식을 나누어주고 나면, 운전기사가 주로 아침드라마를 틀어준다. 드라마를 보다가 주무시는 분들도 있고, 옆 사람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거나 창 밖 풍경을 즐기는 분들도 있다.
3. 노래반도 일단 소풍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조용한 편이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반드시 어르신들의 신청곡을 틀어주어야 한다. 기사가 미처 최신 가요들을 준비하지 못하면, 어르신들의 만족도는 급격히 하락한다. 또 울산 진입 30분 전에는 복도 춤 파티를 허용해주어야 한다. 일어서서 리듬을 타는 어르신들은 10명 남짓, 돌아가며 다리를 푼다. 만일 그런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소풍지 등 사회복지법인에서 준비한 서비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었다.
4. 한 동안은 노래 반 탑승을 자제했었다. 그 반 버스에서 종일 어르신들과 함께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일주일 정도 가요 멜로디와 가사가 머리 속과 혀에 뱅뱅거려 싫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노래 반 어르신들이 “처장님은 왜 맨날 다른 반에만 탑니까. 우리를 무시하는 거지예?” 라고 따졌다. 깜짝 놀라, 바로 그 반에 올라 어르신들을 다독였다.
5. 예상했던 대로, 돌아오는 시간이 문제였다. 어르신들은 노래반에서 배운 모든 가요를 떼창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모르 파티’는 되풀이하여 듣고 따라 했다. 특히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라는 대목에서는 거의 열광을 했다.
6. 그때까지 나는 김연자라는 가수를 몰랐지만, 쿵짝쿵짝 참 신나는 노래구나 라는 생각은 했었다. 너무 시끄러워 전체 가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모르’는 불어로 사랑, 파티는 영어인줄 알았다.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리듬도 재미있지만, 몇몇 가사에 관심이 가서 가사를 찾아보았다. 리듬도 신나지만, 어르신들이 특히 좋아하는 이유를 발견했다. 아모르 파티는 ‘사랑 잔치’를 벌이는 그렇고 그런 가사가 아니라,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었다.
7.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용어로서 ‘운명애’를 말한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어려움까지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방식의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즉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가치전환하여,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8. 칠순이 넘은 어르신들의 인생이 만만했을 리 없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실망과 회한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사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을 강조한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다고 응원하고,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이야기 같은 인생을 결과와 상관없이 사랑하자고 권면한다. 고민하고 방황했던 시간들도 사랑하고, 쏜 화살처럼 지나간 사랑의 추억들도 눈이 부시면서 슬펐던 행복이라고 노래한다. 어르신들이 특별히 아모르 파티를 좋아하고 반복해서 듣고 따라 부르는 이유가 가사에 있었다. 가사를 통해 위로 받고, 신나게 흥얼거리며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회환들을 등 뒤로 던져버렸을 것 같다.
9. 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 태반이겠지만, 아직도 한 분 한 분, 소중했던 어르신들의 얼굴이 기억난다.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마주하니, 대부분의 어르신들과는 서로 수인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몇 주일 안 보여 연락해보면, 돌아가셨거나 요양원에 가 계시기도 했다. 험한 시대를 짊어지고 살아낸 분들이다. 어떤 삶이었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 그분들의 인생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10. 만일 그 노래반 어르신들의 버스에 다시 합승할 수만 있다면, 이제는 그분들의 떼창에 진심을 다해 나도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2. 安住하다 / 백복순 2
1. 여고 시절 젊은 선생님 몇 분이 유독 인기가 많았다. 선생님은 학습 진도를 어느 정도 끝내고 유리창 넘어 교장, 교감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다가 사회의 불합리한 일들을 자주 얘기해 주셨다. 사춘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어른이 되어 옳지 않은 일에 목소리를 내야지 하는 다짐도 했다..
2.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전문대에 진학한 것은 내 성적 탓인데, 집안 사정을 탓하며 학과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역사동아리 활동에 푹 빠져서 2년을 보냈다. 흔히 얘기하는 운동권 동아리였다. 동아리 선택에는 여고시절 수업시간 시사이야기도 한몫 했다. 졸업 이후에도 진보적인 뉴스에는 환호를, 보수적인 뉴스에는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사회단체 활동에서 만난 남편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3. 보수와 진보를 나누기가 께름칙하지만, 나는 극도의 보수집단에 취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조창립문제로 직장은 시끌벅적했다.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동참하였고, 할 수 있는 일에 적극 힘을 보탰다. 하지만, 어렵게 시작된 노조창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위기를 맞았고, 동료 간 불편한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4. 시간이 지나면서 직장 노조는 잠잠했고, 해직된 직원들이 복직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지났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상충되는 의견이 있고, 차라리 노조창립 이전의 모습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6. 언제부터인지 쏟아져 나오는 뉴스와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를 보며 30여 년간 가졌던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내 생각을 얘기할때마다 여고 친구들과 남편은 자신감 넘치는 설명으로 나를 다잡아 주었고, 매번 얕은 판단력에 이리저리 갈피 못 잡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7. 어느 날, 출근 준비를 하는데 여고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서이초등학교 교사 49재 ‘공교육 멈춤의 날’동참과 관련된 설문조사에 긍정적인 답변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문자를 보고 순간 발끈 화가 났다. 선생님들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만약 선생님이 연가를 내고 행사에 참여하면 고등학교 2학년 내 아이는 수업시간에 자습을 하게 된다. 찾아지는 권리에 맞서 빼앗기는 권리도 생각해봐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었다. 친구의 문자를 무시하고 출근했다.
8. 내내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서 보수가 된다더니 설마 나도 그런 건가. 아니면 애초부터 아무 생각 없이 분위기에 이끌려 다녔던 것인가. 여고 친구는 뉴스를 보고 '가짜다, 왜곡되었다'라는 판단을 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타인을 설득까지 하는데, 나는 그저 맥없이 설득당하는 갈대다. 친구의 자신감은 수많은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나만의 신념을 차곡차곡 쌓기 위한 노력의 부족도 부끄럽지만, 점점 변화와 발전을 회피하고 안주(安住)하려는 나의 무심함이 더 겁이 난다.
3. 고모 / 윤경희 5
1. 고모는 세찬 바람이 불어와 허공에 떠다니는 마른 잎 같았다.
2.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후 큰집으로 돌아온 고모를 반겨줄 친척은 없었다. 동정과 우려의 시선이 주변에서 쏟아졌지만 정작 고모는 주눅이 들지 않았고, 겉으로 슬픔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3. 고모는 처음에는 큰집에 있었다. 그러다 친척 집에 돌아가며 살았다. 고모는 큰집에 있을 때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거리가 가깝기도 했고, 우리 남매가 성인이었기에 편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길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떠나버린 집에 고모가 들어오다니. 더욱이 큰집 식구들과 엄마는 불편한 상태였다. 절박했던 고모 상황이 짐작되었지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4. 큰 가방을 들고 온 고모 모습을 본 엄마는 얼굴은 굳어졌지만, 며칠 후에 가겠다는 고모의 말을 믿었다. 친정에서조차 마음 편하지 않은 고모의 처지가 안쓰러웠으리라.
5. 며칠이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고모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초대받은 손님처럼 자유롭게 지냈기에 엄마의 일은 늘어갔고, 식구들의 불편도 커졌다. 어느 날 고모가 훌쩍 다른 집으로 옮겨간 건 엄마의 한계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6. 함께 사는 건 불편했지만 고모는 나에게 친구였다. 꾸미는 걸 좋아하는 고모와 유행하는 옷이나 액세서리에 대해 공유하고, 월급날이 되면 맥줏집에서 만나기도 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한 거침없는 욕설이나 저주를 듣고 있으면 속이 후련해지기도 했다. 남의 일에 열을 올리는 것과는 달리 고모는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7. 말하기 힘든 마음을 감추느라 크게 웃고 다녔던 것일까? 갑자기 생긴 암 덩어리는 무섭도록 빠르게 전이되었다. 빠진 머리카락을 가린 모자 아래 화장기 없는 얼굴에서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모는 다른 사람의 일인 듯 태연했다. 다음 문병 때는 나풀거리는 챙이 달린 모자를 받고 싶다고 했다.
8. 고모는 그 모자를 받을 수 없었다. 다시 고모를 본 것은 입관할 때였다. 병색이 사라진 얼굴은 고왔다. 금방이라도 깰 듯한 잠을 자는 모습이었다. 고모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아까움이었다. 아름다움과 젊음, 고모의 미래가 사라졌다. 벚꽃이 가득한 지금이 고모에게는 없었다.
9. 고모가 떠나고 첫 명절을 맞았다. 친척과 왕래가 끊겼기에 명절은 쉬는 날일 뿐이었다. 그런데 명절이 끝날 무렵 가슴 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허전함은 커졌다. 알 수 없는 우울의 끝에서 고모가 떠올랐다.
10. 고모는 친척 집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묻지 않아도 듣고 싶지 않아도 친척 집의 근황이 전해졌다. 다른 집에 가서는 우리 집의 풍경을 부지런히 늘어놓았을 것이다. 명절 때는 무작정 음식을 가지고 사촌들과 함께 들이닥치는 통에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고모로 인해 우리는 좋든 싫든 약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었다.
11.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던 끈이 고모와 함께 사라졌다. 나를 존재하게 했던 여러 문들이 한꺼번에 닫히는 느낌이었다.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세계와 단절시키는 죽음의 실체를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고모가 있어 여러 끈이 오랫동안 이어져 있었고, 아빠가 떠난 후 천천히 친척들과 멀어질 수 있었다. 느린 이별의 기회를 준 고모에게 고마웠다.
12. 매년 봄이 오고 벚꽃이 날리면 고모가 생각난다. 고모는 저 하늘 어디에 있을까? 한곳에 정착해 있는 고모는 상상할 수 없다.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를 떠다니며 자유로움을 만끽하지 않을까.
4. 은행나무 길 / 박정애2
1 집에서 남편 회사까지는 직선으로 일 킬로미터가 되지 않는다. 짧은 거리지만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그중 한 곳에 은행나무가 길을 따라 양옆으로 줄지어 있다. 은행나무는 가을이 오기 전까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초록의 가로수일 뿐이다.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이 들어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그 은행나무다. 이미 은행나무임을 알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녹색 잎을 벗고 노란 잎을 입을 때가 되어야 사람의 눈길을 끈다.
2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남편과 며칠 전에 그 길을 걸었다. 삼 십 여 년 전 이맘 때, 남편은 직장이 있는 이 도시에 왔다. 남편은 형편상, 힘든 직종이었던 조선소 노동자로 일했다. 많은 날을 출퇴근하며 그 길을 지났을 것이다.
3 물들어 떨어져 내리는 은행잎이 곧 회사를 떠날 남편과 닮아 보였다. 나는 남편이 그 길을 지나는 동안 힘들었을 날들과 즐거웠을 날들을 상상했다.
4 은행잎이 바람에 떨어지고 낙엽을 쓸어 담는 청소부의 빗질이 빨라졌다.
‘잠시 두면 안 될까. 이제야 저리 고운데 잠시 머물다 가도록.’
빠르게 잎을 내려놓는 은행나무와 빗질을 서두르는 청소부가 야속했다.
5 앞서 걷던 남편이 멈췄다. 고개를 우러러 은행나무를 보았다. 그가 지났던 많은 시간을 은행나무와 함께 되돌아보는 것일까. 그 생각으로 그의 눈가가 촉촉해 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6 멈춰선 남편의 곁으로 몇 걸음을 가며 어떤 위로를 보낼까 생각했다.
‘당신도 이 은행나무처럼 지금이 제일 멋져.’ 그렇게 말할까.
7 이제야 남편의 출퇴근길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미안해졌다. 그동안 그 은행나무 길은 나에게 그저 아름다운 가을 길이었다. 어쩌자고 많은 시간, 그가 지났을 은행나무 길에 무심했을까. 그날은 은행나무 길에서 그의 노동, 그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잎이 떨어지기 무섭게 빗질을 하던 청소부도 잠시 손을 놓고 은행잎의 짧은 비행을 보고 있었다.
8 나는 멈춰 선 남편의 곁으로 갔다. 쑥스러워도 ‘당신이 있어 고마웠어.’ 라고 말을 하리라.
9 다가가니 남편의 눈에 물기는 없었다. 그는 곁에 선 나에게 말했다.
“여기 언제부터 은행나무가 있었어?”
남편은 다른 길로 다녔고, 그 은행나무는 오늘 처음 본다고 했다. 뒤늦게 남편을 이해하는 척했던 나는 머쓱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다녔던 길은 내 상상속의 은행나무 길이 아니었다.
10 그가 다녔던 길에 은행나무가 없어도 어떠랴. 그 길이 어디든 아름다울 것임을 믿는다. 은행나무의 잎이 은퇴를 앞두고 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다. 찰나에 떨어지는 잎이 남편의 눈에 담겼다가 사라졌다.
5. 나의 선생님/ 홍미애5
1. 밤새 잠을 설친 탓에 얼굴이 푸석했지만, 아침 운동으로 처져있는 몸을 깨운다. 며칠 전 여고 은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먼저 안부를 전해야 하는데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시다니 반가움과 기쁨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언제 만날 수 있겠니? 요일과 시간을 맞춰보고 편한 곳으로 내가 갈게.” 하셨다. “이동 중이라 일정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하고는 며칠이 훅 지나버렸다.
2. 한 번 뵙기 힘드니 선생님이 아꼈던 후배와 같이 선생님을 뵙고자 했지만, 그와 시간이 맞지 않아 놓친 것이었다. 하던 일을 미루고 선생님께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잖아도 전화 기다렸어. 우리 홍 원장 생각하는 중인데 보고 싶구나. 내일 볼 수 있을까?” 물으셨다.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시내 중심인 서면 영광도서 맞은편 벤치에서 만나자며 “내가 미리 가 있을게. 내일 보자. 고마워.” 하고 끊으신다. 선생님과 만남이 급히 이루어진 것이다. 선생님은 얼마만큼 변해있을까? 아마 크게 변하지 않았을 거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3.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한껏 멋을 부렸다. 멋이라 해봐야 미용실에 들러 손질 받는 것이 전부지만, 바람이 불어도 자연스럽게 찰랑거리는 웨이브 머리로 변신을 했다. 평소 잘 쓰지 않는 향수도 살짝 뿌려 보았다. 물론 선생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실 것이다. 모처럼 만나는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꼭 여행 전날 밤잠을 설쳤던 감정과도 같았다.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4. 여전히 멋있을 선생님을 생각하며 약속장소를 두리번거렸다. 벤치 저 끝에 앉아있는 뒷모습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옆을 기웃대며 “선생님!”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선생님은 손을 내미시며 “오오 왔구나!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냐.” 하시며 벤치 옆자리를 권했다. 그날따라 세차게 부는 바람에 은행잎은 바스락대고 벤치 주변에는 누워있는 노숙자도 보였다. 왠지 스산한 분위기였다.
5. 선생님은 “우리 밥 먹자. 내가 잘 가는 초밥집이야.” 하며 식당 대기표를 보여주었다. 일찍 도착해 좌석을 예약하신 것이다. 손님들이 줄지어 있는 것만으로도 이 식당은 맛있는 초밥집인듯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이 번호가 지나갔다며 다시 안내를 받으러 서둘러 걸어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이 작아 보였고 왠지 쓸쓸하게 보였다.
6. 일식집에 앉아 초밥을 먹을 때도 “이건 활어고 이건 참치야.” 하시며 선생님 접시에 있는 연어 몇 점을 내 접시에 덜어 많이 먹으라고 챙겨주신다. 오랜만에 먹는 초밥. 그것도 존경하는 선생님 앞에서 후배도 친구도 없이 나 혼자 겸상을 하며 맛을 음미하다니 감개무량의 기쁜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초밥을 가리키며 “앞으로 밥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밥은 실컷 사 줄 테니. 맛있는 밥집 몇 군데는 우대 손님이라 할인도 되니 걱정하지 말고 전화해라. 알겠지?” 하신다. 그 말 속에는 자주 전화하고 만나자는 말씀이 녹아있었다. 따뜻한 선생님의 밥을 얼마만큼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7. 우리는 이야기보따리를 안고 선생님이 이끄는 전통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용한 곳에 가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입구에서부터 웅성대는 소리로 손님이 많음을 느꼈다. 우리는 창가 좋은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가끔 들리는 곳인지 주인은 친절하게 대했다. 유리창에 비친 은행나무를 선생님과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지나간 추억을 회상했을 것이다. 나는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고 선생님과 더 많은 얘기로 무르익어 갔다.
8. 희미해진 친구들 소식과 여러 선생님의 근황을 들으며 “그중에 선생님이 제일 으뜸이고 아직 청년 같으세요.” 하고 엄지를 치켜든 나를 보며 선생님은 말없이 웃으셨다. 선생님은 가져온 종이가방에서 포장지를 뜯었다. 사모님이 나를 만나는 걸 알고 선물로 준비해 놓은 거라 했다. “이거 십 년 묵힌 보이차야. 차 끓일 때 조금씩 우려 마시면 좋단다.” 하시며 발효차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시는 선생님은 따뜻이 몸을 데워 온기를 나눠 주는 난로 같았다.
9. 못 뵙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선생님은 척추 협착증으로 두 번의 힘든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오늘은 잘 보이고 싶어 그냥 던지고 왔다는 말에 순간 가슴이 쿵 돌 맞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선생님의 뒷모습에 시선이 간 것도, 선생님 키가 많이 줄었다는 느낌도 그 때문이었다. 어떠한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는 아프지 말고 내내 건강하셔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10. 선생님은 허리가 아프신지 일어나실 듯 십전대보탕이 담긴 찻잔을 비우셨다. 나는 몇 시간이고 선생님과 얘기할 작정이었는데 그것도 마음뿐이었다. 떼를 쓰듯 “선생님 나는 차 천천히 마실께요.” 했다. 선생님은 “그래, 그래.” 하시며 창밖에 비친 은행나무를 보며 “저 황량한 은행잎을 봐라, 떨어지기도 하지만 남아있는 잎사귀도 있을 테고, 땅에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다가 사람들에게 밟히기도 하고, 쓰레기더미에 버려지기도 하고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기도 할 것이며 우리도 언젠가는 저 은행잎처럼 그렇게 되겠지.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되는 거야.” 하셨다.
11. 우리 또 언제 만날까 하시며 아쉬운 듯 일어서는 선생님을 향해 나는 “어쨌든 건강하세요. 자주 찾아뵐게요.” 하며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찻집을 나섰다. 때마침 마주 오는 빈 택시가 보였다.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우고 선생님의 걸음에 맞추어 부축해드렸다. 택시를 태워드린 뒤 조심히 가시라는 말만 남긴 채 차는 떠났다.
12. 아뿔싸. 뭔가 허전했다. 선생님께 택시 결제도 못 했다. 참 못났다는 생각을 하며 뒤돌아섰다. ‘다음에 잘해드려야지. 아냐, 다음은 없어.’ 나는 하나인데 내 마음속 두 마음이 토닥토닥 싸움질했다. 머잖아 다시 선생님을 모셔서 작게나마 꼭 한번 용돈도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