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8-28절
설교제목 : 내가 붙잡아야 할 것
다가온 AI 시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봄을 시샘이라도 하듯 갑작스런 폭설로 2월의 끝자락에 많은 눈을 구경하였습니다. 제주도에는 이미 유채꽃이 피어 세상을 물들인 사진 몇 장이 이제 봄이 왔음을 실감케 합니다. 우리 세계와 환경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가는지 주시하고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맹목과 맹신, 무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쇄락의 길, 심지어 파탄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습니다.
세계 시장 경제와 미래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입니다. 기술의 집약적 발전으로 ChatGPT와 그림 인공지능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알파고는 수년 전에 딥러닝 방식으로 바둑에서 2개의 인공신경망을 활용하여, 수백만~수억 개의 매개변수를 가지고 바둑의 수에 따른 승률 같은 매우 복잡한 함수계산이 가능했기에 인간을 능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테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을 약인공지능이라고 흔히 부릅니다. SF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욕망, 감정까지도 지닌 강인공지능은 아직까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사회, 경제변화가 아직은 불확실한 상태로,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데이터와 확률이 인간의 모든 삶의 방식과 내용을 결정한다면 인간 사회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인간 정신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셀 수 없는 데이터의 총합으로 산출된 정보와 그 값이 인간 정신안에 내재된 본능과 정서 등을 대신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오류가 있는 데이터의 총합은 그 자체로 대중 집단을 맹목과 맹신의 길로 안내할 것이 자명합니다. 자기 인식을 가진 반성적인 자만이 AI와 함께 건설적으로 미래의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C.G 융이 “발견되지 않은 자기(현재와 미래)(The Undiscovered Self(Present and Future)”에서 던지는 메시지를 깊이 상고해 봅니다.
“자기 지식을 통해, 즉 자신의 영혼을 탐구함으로써 본능과 본능의 이미지 세계를 발견한다는 바로 그 사실은 정신 속에 잠들어 있는 힘들에 대해 어느 정도 빛을 던지는데, 우리가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한 이를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가장 큰 역동성의 잠재력이며, 이러한 힘과 그와 관련된 이미지 및 관념의 침입이 건설이나 재앙을 향한 경향이 있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의식적인 마음의 준비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Jung C.G(1970): Civilization in Transition, C.W.10, para.582.]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의 태도가 미래에 다가올 낯선 것에 대하여 건설적일지, 재앙이 될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서 편지하면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소개합니다. “그 눈이 불꽃과 같고, 그 발이 놋쇠 같으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런 불꽃과 놋쇠를 특별히 강조하여 주님을 표상한 것은 옛 이름 ‘펠로피아’ 혹은 ‘유힙파이’라고 불리던 두아디라 지역이 태양신 아폴론과 긴밀한 연결이 있고, 태양신 아폴론과 그리스도를 대비한 것입니다. 놋쇠는 당시 청동업이 발달한 두아디라 성도들에게 주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태양처럼 빛나는 눈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지닌 신성한 인식이지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는 시각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며, 사람의 외면과 내면을 꿰뚫어 인식하십니다. 이것은 자기의 인식, 무의식의 절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꽃같은 눈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고 비추는 특성을 지니며, 시공간을 넘어서 인식하는 신성한 지혜입니다. 두아디라 성도들에게 주님의 불꽃같은 눈을 늘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피시고 우리 마음에 깊은 곳을 보시는 주님을 기억할 때 나의 삶의 현재로 인하여 위축되거나 자만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발이 놋쇠와 같다는 말씀은 시편 2편 7-9절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합니다.
“나 이제 주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네 것이 되게 하겠다. 네가 그들을 철퇴로 부술 때에, 질그릇 부스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이런 시편의 노래는 쇠의 이미지로 표상된 주님을 상기시키고, 무엇보다 본문 2장 27절 말씀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쇠막대기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민족들은 마치 질그릇이 부수어지듯 할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를 표상한 것이 바로 쇠의 이미지입니다.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통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146편 기자는 선포하며 노래합니다.
“너희는 힘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 146:3-5)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께 희망을 걸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세벨의 유혹
주님은 두아디라 성도들의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참음을 알고 네 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칭찬합니다.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은 분명히 인격의 태도가 성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성숙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자칭 예언자라 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이런 행위는 에베소와 버가모 교회에서 니골라당의 행위가 유사했습니다. 이세벨이라는 명칭은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내였던 이세벨의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언가 잘 되어갈 때 우리에게 유혹이 찾아옴을 알아야 합니다. 일종의 자아의 심리가 팽창되어 자만해지면 스스로 생각과 결정, 상태를 누군가에게 제시하고 그것이 마치 정답인냥 선전합니다. 그 사람이 가진 힘과 경험에 동조하면 사람들을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세벨의 유혹은 일종의 아니마의 유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남성의 심리 속에서 정서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면 마력적인 힘으로 정신을 사로잡는 마음 속에 있는 부정적 여성 인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놓이면 물질에 중독적 성향을 보이고, 유토피아적 이상에 매달리고, 외부 여성에 투사로 인하여 부정적 사랑의 관계에서 허우적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의 내용을 고려할 때, 인간의 진정한 죄는 무지이자 무의식성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품고 행하는 것에 담긴 어두운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의식적 투사로 이끌리는 마음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면 이런 이세벨의 유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이세벨의 유혹은 무엇인지 늘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끝까지 붙잡아야 할 그 하나
이세벨의 유혹에 빠진 이들에게 회개하라 말씀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까지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런 죄의 속성은 자녀들에게까지 유전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부모의 콤플렉스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전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콤플렉스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해야 할 최상의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고 말씀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오심의 시간동안 내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시간을 위해 나를 굳게 붙들 수 있는 것이 내 손에 쥐어져 있습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스위스에서 2000년도 쯤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습니다. 입학 후 두 번째 스위스에서 방문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부족한 저를 저의 선생님이신 한수엘리 에터 박사님은 당신의 집에 초대하여 하룻밤을 묵게 하시고 식사도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날 밤 꿈에서 대도시의 높은 빌딩 사이로 너무나 짙은 검은 황사가 몰려왔고, 급기야는 홍수인지 해일인지 물이 차올라 20여층 높이까지 차올라 옥상으로 대피해서 저는 올라갔습니다. 그 옥상까지 대피해 올라갔지만 그곳까지 물이 세차게 넘쳤습니다. 저는 옥상 난간 철봉 하나를 붙잡고 그 물을 견디며 버티었습니다. 그 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거센 해일이 몰아쳐도 철봉 하나를 굳건히 붙잡을 수 있다면 살 수 있을 것임을 넌지시 알 수 있었습니다. 강력하게 붙잡을 수 있는 그 철봉 하나면 어떤 시련도 난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은 융심리학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처음 행위였던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굳게 붙잡을 그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
주님의 입을 빌어 요한은 “이기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고, 쇠지팡을 그들을 다스리며 민족들을 마치 질그릇같이 부수는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다스리는 것과 같을 것이고, 샛별을 주시겠다”고 편지합니다.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는 말은 우리를 왕의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함을 시사합니다. 당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리는 것은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로마의 황제의 권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힘,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것을 심리적으로 이해하면, 의식적이고 개성화된 인간이 지닌 강력한 정신적 영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융은 “발견되지 않은 자기”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은 같은 마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거나, 스스로 창조하는 개인의 변화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설득이나 설교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통찰하여, 무의식과의 접속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행사한다는 잘 알려진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C.W.10, para.598]
누군가가 자신의 행위를 통찰하고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면, 무의식적 요소들이 현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어떤 영향력을 주위세계로 미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연결 속에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향력은 인간의 영역에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내밀한 기도가 하나님의 영향력을 활성화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군자의 말은 천리밖에서 응한다는 장자의 말과 유사합니다. 주님과 깊은 연합을 위해 끝까지 내가 가진 것을 붙드는 자는 주위에 어떤 영향력을 펼쳐질 것입니다.
샛별을 주시겠다는 말씀도 이와 유사합니다. 샛별은 새벽별입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새로운 여명입니다. 이기는 자, 개성화된 인간은 새로운 여명의 빛을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자신 안에 주위 환경 속에 비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기는 자가 되어 주위 세계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고, 새로운 여명의 빛을 드리는 그런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