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초월
문제는 외적이 아닌 내적인 거이기 때문에
'의지력'(에고)으로 강박적 갈망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좀처럼 성공하기 힘들다.
그것은 끝없는 욕망의 충족 역시 마찬가지다,
욕망의 충족은 일시적휴식을 주는데 그치고 만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보다 파괴적인 형태의 강박적 욕구는
믿음을 기초로 하는 치료 프로그램과 모임들에 대해 가장 좋은 반응을 보이며,
이와 같은 치료 프로그램과 모임들의 기본 토대는
12단계 모임들이 이루어 낸 성공 사례를 따르고 있다.
그러한 모든 조직은 동일한 기본 기념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겸손함, 내적 정직성, 책임, 자신보다 더 큰 어떤 힘에의 내맡김이다.
그러한 프로그램들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에고의 핵심자체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놓기 꺼려하기 때문이다.
장애의 고통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지 않는 이상, 에고에게 내맡김은 기피 대상이다.
덜 심하지만 성가실 정도로 욕구에 내몰리는 상태는
요구를 선호로 바꾸고 각각의 충동을 올라오는 대로 신에게 내맡김으로써 초월할 수 있다,
또 다른 수행은 "그다음에는 무엇?"이라고 묻는 영적 과정인데,
이 과정에서 모든 두려운, 예상되는 귀결은 하나하나 신에게 맡겨진다.
처음에 이 과정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조사해 보면 '불가능'은 그저 꺼려함 자체일 뿐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그래서 내맡김은, '못하는'이 아니라 '하기를 원함'에 달려 있다
'그다음에는 무엇?'이라고 묻는 과정의 또 다른 예는 이런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러저런 것을 포기한다면 난 지루하고, 불행하고, 고립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궁핍해질 거야."
그래서 참을 수 없다고 추정되는 조건들의 목록은 계속되는데,
살펴보면 그중에서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참을 수 없음은 조건이 아니라 저항 때문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예: 만약 위의 이야기에 현실성이 있다면 부자에 유명인이 아닌 이들은 누구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꺼려함과 저항은 책임을 회피하고 에고 동기의 내맡김을 피하기 위해
"난 못해"라고 핑계 대는 형태를 취하는 일이 잦다
이러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가면을 벗길 수 있다.
"누군가가 장전된 총을 당신 머리에 들이대고, 내맡기지 않으면 쏘겠다고 한다면, 당신을 그러게 하겠소?"
그 답음 물로, 할 수 있다 이다.
그래서 문제는, '가능'이 아니라 '의지'이다.
'피골이 상접한 ' 금욕적 생활 방식조차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세속과 절연한 사람들이나 혹은 '적을수록 좋다'는 원리의 신봉자들이 모인 수많은 영성 공동체가 있다.
하나의 선택으로서의 단순성은 수용 가능하지만,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분개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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