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문학동네∣ 2017
식물도감에 펼쳐진 풀이름들이 기막히다. 기생초 실망초 송장풀 명주실풀 까치수염 여우각시풀처럼 낯선 이름이 대부분이지만, 질경이 애기똥풀 겨우살이풀 끈끈이주걱 도둑놈의갈고리 애기도둑놈의갈고리 큰도둑놈의갈고리… 하고 연이어 부르다 보니 함께 들판을 내달리던 고향 친구들같이 눈에 익어 정겹다. 더러 천하고 무례하고 낯간지러운 이름도 섞여 있으나 모두 고만고만한 사연은 있을 터. 그래도 이 넓은 산천에 돋은 조그만 풀들에게 첫 이름표를 달아준 이름 모를 선각자들을 경배한다.
풀과 꽃 이름 짓기도 어렵겠지만 사람 이름은 더욱 고민에 빠지게 된다. 기왕이면 자녀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그러나 ‘좋은’이라는 뜻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의미가 좋아야 하는지 우리말 이름이 나은지 사주에 맞는 작명이 옳은지 글로벌 시대를 생각하여 매끄러운 발음이 우선인지 헛갈리기 마련이다. 이름이란 원래 한 사람의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모두의 것이 되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즈음은 스스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 대세다. 과연 개명 허가를 신청한 이름들을 살펴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생만 김방구 김치국 백김치 신호등 우동국 이십원 하지마’ 등 대부분 딱한 이름으로 놀림거리가 되어 꽤나 속앓이를 했겠다. 이참에 지인들의 옛 이름도 무시로 바뀌고 있다. 그동안 내 것인 양 부르고 다녔던 터라 하루아침에 개명 통보를 받으면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린 것같이 서운하지만, 심사숙고한 명찰 주인을 위해서는 새 이름이 입에 붙도록 부지런히 연습을 한다. 물론 영자 명순 애숙 미애보다 은서 서영 지원 혜리가 세련됐으나, 개명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굳은 혀와 신통찮은 기억력 때문에 늘 진땀을 흘리고 있다. 멋진 이름을 가진 자가 반드시 멋진 사람은 아니지만 멋진 문구나 카피가 마음을 잡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사람이라면 이왕지사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불려지길 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
개명과는 달리 ‘부캐’ 열풍이 일고 있는 것도 굉장히 흥미롭다. 요컨대 ‘부캐’는 ‘본캐’와 다른 것. 개명은 본캐의 연장이지만 부캐는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나’를 창조한다. 이미 텔레비전에서 많은 연예인이 부캐로 인기를 끌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누가 봐도 본래의 캐릭터가 버젓이 드러나는데 짐짓 본인은 당사자가 아니라고 휘휘 손을 내젓는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레 목소리를 깔고 “그분과 닮았다고들 해요.”라는 말을 덧붙이기 일쑤다. ‘둘째이모 김다비’만 보더라도 개그우먼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이모’라는 부캐로 젊은 ‘조카’들의 삶을 위로한다. ‘지갑 한번 열어주라, 휴가 좀 주라, 퇴근시켜 주라.’며 대표님을 저격한 노래 ‘주라주라’가 폭발적인 관심을 받은 것도 ‘주라’라는 강한 메시지를 친숙한 ‘이모’의 말로 압축한 까닭이 아닐까. 이처럼 부캐에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작명의 기술이라고 하겠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존재를 증명해내는 일이다. 한번 정해진 이름이 끝까지 가기도 하지만 개명으로 중도에 바뀌거나 부캐라는 또 다른 자아로 나눠지기도 한다. 본캐 없이 부캐도 없겠지만 한결같은 것만이 무조건 좋은 것일까. 상황에 맞게 가면을 달리 써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지인의 촌스러운 이름이 바뀌듯 풀꽃 이름도 시대 따라 개명을 한다. 큰개불알꽃이 봄까치꽃으로 바뀌고 그늘돌쩌귀가 투구꽃이 되었으며, 복수초가 얼음새꽃으로도 불려진다.
어쩌면 인생은 이름을 부르고 또 이름을 지워내는 일인지도. 어느 시인의 문장처럼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고 또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르듯 그러니 가끔 잊었던 이름 하나 떠오르면 주저 없이 한번 불러줄 일이다.(*)
- 김정화 리뷰에세이 ≪말 이상의 말, 글 이상의 글≫에서
첫댓글 이름에 다시 생각해보게 하네요
어쩌면 본캐가 더 중요한데
부캐도 결국 난데 하고 되돌아보게 하네요^^
프라다님, 그렇지요?
저도 상대에 따라 부캐를 설정하지만
결국 본캐에 함몰되고 마는.... 저의 부캐는 늘 힘이 없어요 ㅠㅠ
많이 더우시죠~^^
농막에서 지내는 김득진입니다!
리뷰 에세이의 롤 모델로 손색없는
선생님 글에 기가 죽습니다.
책으로 읽는 것과 폰으로 읽는게 느낌이
다른 것도 묘하구요.
스테디셀러가 될 게 틀림없으니 고이
간직할 작정입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길요~~^^
김득진 선생님, 성원 감사합니다.
폭염이 이어지는군요.
8월에는 멍해져서 수업도, 원고쓰기도 비껴가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군요.
더위 잘 이겨내시길 빕니다!
본명과 필명 사이에서 주저주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본명은 부모님께서, 필명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제가 직접 작명했는데
그 사이가 왜 이렇게 낯설까요. 작의란, 비록 제 2의 자아라 해도 태생적 한계를 무시할 수 없나 봅니다.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본명과 필명과 또 '목련'이라는 부캐가 있어도, 목련님의 문학은 중심축이 단단하니까 탈주하지 않고 빙빙빙 거리를 잘 지킬듯요^^
@창가에 선생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자랑질 좀 할게요. 아니 부캐 목련 자랑질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이 카페에 계셨던 분이 아주 잘 되셔서 책을 냈습니다.
저, 목련과 나눈 몇 줄의 댓글과 답글이 잊혀지지 않아 꼭 책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옆집 건너고 또 옆집 건너서 제 주소를 받아서 책을 부쳐왔답니다.
문득, 니가 해라 목련, 하면서 무심한 척 제게 닉네임을 만들어 주었던 친구이자 문우가 생각납니다.
@목련 부캐는 뜻밖의 이유로 만들어지더군요.
저는 수십 년 전, 고향 친구가 노래방에서 김남훈의 '창가에'란 노래를 불렀는데,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이 노래는 남자가 불러야 멋지더군요.
아, 노래방 안 가 본지가~~ㅎㅎ 언제 '선수필' 뒷풀이가 있으면 그때를 ~~~^^
저에게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촌스러운 순희란 이름 대신 我珍이란 새로운 이름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저를 알고 있던 지인들은 順熙라는 이름이 더 좋다고들 해서 둘 다 붙들고 삽니다~ㅎ
아진님, '순희' 이름도 참 좋아요. 제가 아는 '순희'님들은 모두 좋으신 분들이에요.
'아진'은 세련미가 있고요~~^^ 둘 다 붙들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