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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강좌. 무비스님 - 불교는 쉽다. 1강 - 4 (2009. 04. 01)
1-4 잡초가 무성하다.
有座主 問,(유좌주 문), 三乘十二分敎(삼승십이분교)가
豈不是 明佛性(기불시 명불성)가
師云, 荒草不曾鋤(사운, 황초부증서)로다.
主云, 佛豈賺人也(주운, 불기잠인야)리오?
師云, 佛在什麽處(사운, 불재삼마처)오?
主無語(주무어)어늘 師云, 對常侍前(사운, 대상시전)하야
擬瞞老僧(의만노승)이로다.
速退速退(속퇴속퇴)하라 妨他別人請問(방타별인청문)이니라.
거기에 마침 좌주가 있었어요. 座主 라고 하는 것은 唐代, 그 당시에 유명한 講師(강사)입니다. 경학박사입니다. 경에 아주 뛰어난 분을 좌주라고 그랬습니다. 좌주가 있다가 물었습니다. 三乘十二分敎(삼승십이분교). 이것은 경전을 종류별로 나누면 이렇게 이야기가 되지요.
三乘十二分敎, 다시 말해서 “저 8만 대장경이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교는 불성을 밝히는 일이라고 이론적으로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실지로도 그렇고요. 그런데 어떻게 밝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저 앞에서 정말 불성을 밝힐 그런 기회가 참 많았어요.
그런데 왜 경전에 얼마든지 그런 불성을 밝힌 것이 있는데 당신이 여기 와서 그런 뚱딴지같은 선 법문. 선 법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고함치고 몽둥이질하고 미친 수작 같은 그런 짓. 좀 심상치 않다 이것이지요.
이거 참, 믿어도 되는 눈 밝은 사람인지 아닌지 그런 의도가 있을 겁니다.
강사들은 분명히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三乘十二分敎,
8만 대장경이 다 불성 밝힌 도리인데 뭐 그것 참 이상한 소리 그리 하고 있느냐 하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荒草不曾鋤(황초부증서)로다. 거친 풀을 일찍이 호미질을 하지 않았구나.
거친 풀을 일찍이 호미질을 하지 않았구나. 호미질을 아니해 놓으니까 이 강사, 좌주의 머릿속에는 3승이 어떻고 12분교가 어떻고 4제 8정도가 어떻고 3귀의 4홍서원이 어떻고 온갖 잡다한 불교 상식이 이 사람의 머릿속에 콱 차있는 겁니다. 그것이 전부 雜草요 荒草요 거친 풀이라는 뜻입니다. 거친 풀을 일찍이 매지 않았구나. 호미질을 하지 않았구나. 머릿속에 너무 잡된 지식과 망상이 가득히 차있다 이 겁니다.
主云(주운), 좌주가 말합니다. 佛豈賺人也(불기잠인야)리오?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였으리요? 그러니까 荒草를, 거친 풀을 일찍이 매지 않았구나 라고 했는데 이 강사는 자기 혼자 소리만 하는 겁니다.
자기 혼자 소리만... 荒草를 매지 않았구나 라고 하는 임제 스님의 말씀과 강사의 이야기는 다른 겁니다. 좌주가 말하기를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였으리요? 그러면 3승 12분교를 부정 했어야 말이지요. 부정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3승 12분교가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강사가 죄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佛豈賺人也(불기잠인야)리오? 강사가 또 어찌 사람을 속였으리요?
그러니까 옳다 잘 됐다하고는 임제 스님이,
佛在什麽處(불재십마처)오? 부처라고 네가 말했는데 부처가 어디에 있느냐? 부처님이 사람을 속였든 부처님이 낮잠을 잤든 부처님이 식사를 했든 부처님이 좌선을 했든 외도하고 싸웠든 씨름을 했든 좋다 이 말입니다. 부처라고 했다는 그 사실. 그러면 그 부처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을 물은 겁니다. 佛在什麽處오? 우리가 이 강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은 지금부터 3000넌 전에 가비라 궁에서 태자의 몸으로 태어나가지고 호의호식하다가 철이 들어 가지고 이것이 아니구나 하고는 출가해서 6년 고행을 했다. 그러다가 뭐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이야기가 나올 것 아닙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어쨌거나 강사는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부처가 어디 있는가? 라고 물으니 제가 금방 토해 놓은 그런 이야기.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主無語(주무어)어늘, 좌주가 아무 말을 못 했어요. 도대체 뭔 소린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럼 무슨 대답을 지금 필요로 하는가?
師云, 對常侍前(사운, 대상시전)하야, 왕상시. 그 당시 전제 군주 사회에서는 벼슬하는 사람은 대단 했거든요. 그리고 常侍. 항상 천자를 옆에서 보호했던 사람이면서 예를 들어서 일개 시. 큰 시에 시장, 지방장관을 맡고 있다면 이것은 대단한 권력가지요. 그런 사람 앞에서 擬瞞老僧(의만노승)이로다. 이 노승을 속이려고 하는구나. 이 점잖은 사람 앞에서 왜 나를 속이려고 하느냐? 부처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대답도 못했다 말입니다. 그러면 임제 스님은 뭔가 좀 알고나온 사람인줄 알았는데, 강사라고 하더라도 알고나온 줄 알았는데 이것 너무 캄캄하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좌중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 이겁니다. 청중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런 살림살이 가지고 나와서 어쩌잔 말입니까?
질문을 해도요? 청중에게 모두 소득이 있는 질문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速退速退(속퇴속퇴)하라. 빨리 물러가라, 빨리 물러가라.
妨他別人請問(방타별인청문)이니라. 다른 사람이 묻는 것, 방해하지 말라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도 묻게 놔둬라. 아무 살림살이도 없는 그야말로 반딧불만도 못한 캄캄한 맹인이 나와서 물어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무슨 소득이 있느냐? 그런 뜻입니다. 경전이나 또 교양대학에서 교리공부 하고는 전혀 딴 맛이지요? 분위기도 다르고 내용도... 이것이 불굔가? 이런 것 외워도 소득이 있으려는가? 참 궁금스럽지요. 고함치고 몽둥이질 한 것. 이것을 조사 어록이라고 귀에 담고 있어도 되는가? 그렇지만 정말 이것이야말로 8만 대장경의 진수중의 진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같이 읽어 봅시다. 읽으면서 글자 아시는 분은 뜻을 한번 가름해 보십시오.
復云, 此日法筵(부운, 차일법연)은 爲一大事故(위일대사고)호니
更有問話者麽(갱유문화자마)아? 速致問來(속치문래)하라.
儞纔開口(이자개구)하면 早勿交涉也(조물교섭야)니라.
何以如此(하이여차)오? 不見(불견)가? 釋尊云(석존운),
法離文字(법리문자)며 不屬因不在緣故(불속인부재연고)라하니라.
爲儞信不及(위이신불급)일새 所以今日葛藤(소이금일갈등)이라,
恐滯常侍與諸官員(공체상시여제관원)하야 昧他佛性(매타불성)이
니 不如且退(불여차퇴)니라.
喝 一喝云(할 일할운), 少信根人(소신근인)은
終無了日(종무료일)이로다. 久立珍重(구립진중)하라.
다시 그 두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앞에서요. 같은 날입니다.
같은 날 법문은 이런 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정도 가지고는 그 날 공무도 다 폐기하고 모두가 이렇게 어렵게 모였는데 뭔가 정말 그 청중들이 귀에 남을 만한 아, 이것이 진짜 불교구나 하는 그런 불교. 그런 불교를 한 마디 해줄 수밖에 없다 하는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앞에 보다 격은 떨어지지요. 앞의 것이 훨씬 격이 높은데 뭐 떨어지나 마나 우리가 이해하기는 또 좀 쉬워요.
임제 스님이 다시 말씀하시기를 此日法筵(차일법연)은 오늘 날 이 法筵. 법문을 하는 자리는 爲一大事故(위일대사고)호니 일대사를 위한 것이다.
앞에서 大事라고 했지요? 一大事. 일대사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부처님은 뭐라고요? 일대사 인연을 위한 까닭에 이 세상에 출현했다.
그 일대사 인연이란 뭔가? 開ㆍ示ㆍ悟ㆍ入ㆍ佛知見. 그랬어요.
부처님이 지혜를 열어주고 보여주고 그것을 깨닫게 해주고 그 속에 들어가게 해주는 그 의무 때문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마찬가지로 임제 스님도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고, 왕상시가 이 법석을 마련한 것도 일대사를 위해서 법석을 마련했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임제록 강설 마당을 차린 것도 결국은 일대사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만고 방향입니다. 만고에 모범입니다.
更有問話者麽(갱유문화자마)아? 다시 물을 사람이 있느냐?
速致問來(속치문래)하라. 빨리 좀 물어라.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 데 빨리 물어라. 그래 놓고는 그 다음에, 그럴 때 누가 나와서 물으면 그것은 잘못 된 겁니다. 이 스님이 말은 물으라고 했지만, 당신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누가 나와서 물어도 儞纔開口(이자개구)하면 그대가 막 입을 열려고 한다면, 누가 나와서 묻든지 간에 早勿交涉也(조물교섭야).
벌써 일대사하고는 교섭이 없어. 일대사하고는 거리가 10만 8천리나 떨어졌다.
불교의 근본종지하고는, 또는 禪의 근본종지하고는 그렇게 멀리 떨어졌다.
何以如此(하이여차)오? 어째서 그러냐? 어째서 그런 교섭이 없느냐?
왜 그러냐? 不見(불견)가? 읽지 못했는가? 경전을 읽지 못했는가?
저~기 유마경이나 능가경 같은데 나온 얘깁니다. 釋尊云(석존운),
석존이 말하시기를 法離文字(법리문자)다. 法은 文字를 떠나 있다 이겁니다. 佛知見.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根本. 그것은 이미 해탈 되어있고, 이미 그것은 불성이고 아무 손댈 것도 없는 그런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로 설명하고 말로 설명하는 것을 다 떠나 있어요. 설명하고 문자로 기록해봐야 그것은 전부 수박 겉핥기 다 이겁니다.
法離文字입니다. 그리고 不屬因不在緣故(불속인부재연고라)라 했습니다. 이것 중요한 말입니다. 경전에도 이런 말이 없어요.
因에도 속하지 아니 하고 緣에도 있지 않다. 여기서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저 대승경전에도 인과를 말합니다. 인과를 말해요.
혹 미완성 대승은, 완성 대승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미완성 대승에는, 중기 대승 같은 데는 인과를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수행하는 것은 인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은 결과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뭐라고요? 因에도 속하지 아니 하고 緣에도 있지 않다.
緣에도 있지 않다 그랬습니다. 本來 이미 완전무결한 겁니다. 아무것도 손댈 것이 없어요. 다듬을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무슨 참선을 한다. 기도를 한다. 6바라밀을 닦는다. 무슨 용맹정진을 한다. 이것 아무 보탬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不屬因不在緣. 그런 용맹정진이라든지 참선이라든지 기도라든지 6바라밀이라든지 뭐 경전을 보는 거라든지 이 모든 불교적 수행은 정말 해탈을 하는데, 견성하는데 성품을 보는데 나의 참 나를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다. 不屬因不在緣(불속인부재연)이라. 이미 완전무결하게 갖춰져 있는 겁니다.
갖춰져 있다고 부처님이 일찍이 말했어요. 말했었는데 그 말 안 들은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다~, 들어서 알고 있어요. 다 갖춰져 있다 이 겁니다. 그런데 갖춰져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얼마나 절절하게 가슴깊이 느끼느냐? 하는 것. 이것이 문제지요. 못 느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참선을 하고 6바라밀을 닦고 하는 것은 전부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이미 다 되어 있는 것을 그런 헛수고라도 해가지고 거기에 정말 눈을 뜰 수 있도록 하는 그런 하나의 방편이지요. 그래봤자 제자리걸음이지요.
설사 눈을 떴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자리걸음입니다.
아무 내가 수고할 필요가 없는 것을 ‘이렇게 내가 수고를 했구나.’ 틀림없이 결국은 그 소리할 겁니다. ‘아니해도 될 일을 내가 왜 이렇게 했노?’ 그 소리 틀림없이 합니다. 바로 그 겁니다. 그것이 不屬因不在緣입니다.
이것이 보통 불교하고는 틀린 것이지요. 얼마나 지금 용맹정진을 강조하고 수행을 닦고 심지어 업장 소멸을 요구하고 아~ 무슨 복을 지어야 되고, 업장을 소멸해야 되고 참회를 해야 되고, 틀었다하면 그놈 참회 하는 것 나옵니다. 완전무결한데 뭐가 그리 참회할 것 있나요? 저급한 불교에서 불교를 보니까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진정한 聖人과 그렇지 못한 성인은 인간에 대한 실체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데 달렸습니다. 인간에 대한 實體를요. 인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에 여기에 소위 진정한 성인인가 아닌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겁니다. 불교 안에서도 진정한 성인은 그 인간은 완전무결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진정한 성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업 덩어리요 죄업덩어리요. 참회를 해야 돼 수행을 해야 돼 업을 녹여야 돼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전부 가짜 선지식이고 전부 인간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무슨 누구의 종이다 그래서 인간을 비하시키는 것. 이렇게 하는 것은 전부 인간을 잘못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종이라고 보는 견해에 있어서는 인간을 돈으로 막 사고팔고 그러잖아요. 얼마 전만 해도 사고팔고 했잖아요. 100년 전만 해도 그렇게 팔려 다니던 사람. 돈 몇 푼에 사고팔고 하던 사람이 어느새 지금은 최 강대국의 지도자가 됐어요. 세월은 그만치 비로소 부처님의 안목에 차츰차츰 접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물리학 쪽에서도 그렇고 소위 인간학이라고나 할까요? 인간에 대한 이해에도 그렇고요. 인간은 부족한 것이다. 참회해야 된다. 수행해야 된다. 닦아야 된다. 계속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을 정말 잘못 보는 겁니다. 인간을 전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오해에서 모든 문제들이 전부 야기되는 것입니다. 이 보십시오.
不屬因不在緣(불속인부재연)이라고 했잖아요.
因에도 속하지 않고 緣에도 속하지 않다. 뭐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그렇지 못하냐? 사람들은 모두가, 저부터라도 그렇지 못하냐?
爲儞信不及(위이신불급)일새. 그대가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들 완전무결한 존잰데 그대들이 그것을 완전무결하다 하는 사실을 그대가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는요.
지금 이 시간부터라도 앞에서 살펴봤듯이 임제 스님이 그렇게 우리 한국 불교에서 부처님이상으로 숭상하고 자기 은사스님 법사스님 보다도 더 이상으로 숭상하고 누구보다도 숭상하는 임제 스님. 왜 임제 스님을 그렇게 숭상하느냐? 바로 이러한 가르침. 정말 쉬운 불교. 정말 완벽한 불교. 그러면서 완벽한 불교입니다. 쉬우면서도 완벽해요.
그런 스승이기 때문에 임제 임제 임제 하는 것이 비석마다 임제 어록 한 구절도 못 봤지만, 임제 스님 후손이라고 이렇게 해서 “아~, 임제 스님 후손이야. 그 비석 함부로 건들면 안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면으로는 한국 불교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임제를 숭상하는데 그 임제를 숭상할만한 이유가 이런데 있습니다.
이제 여기 上堂法語(상당법어)는 그래도 조금 그래요. 저 뒤로 示衆(시중). 중간쯤 가면 3분의 1쯤 지나가면 정말 기가 막힌 대목이 있습니다.
구구절절 정말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불교를 확 뒤집어 놓는 그런 내용들이 막 쏟아집니다. 기대하시라. 이 정도는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못 믿어서 그래요.
인간은 절대 죄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업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참회를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수행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절대 아닙니다.
所以今日葛藤(소이금일갈등)일세. 그래서 사람들이 못 믿어서 오늘 이렇게 갈등 하는 겁니다. 믿기만 하면, 그 사실을 제대로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것을 누가 못 들었나요? 완전무결하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믿기만 하면 갈등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애써서 모일 필요 없어요. 그냥 일찍이 집에 들어가서 잠자는 것이지요. 그래도 편해요. 행복해요. 그것이 佛知見(불지견)입니다. 부처님의 지견이고 지혜예요.
바로 인간에 대한완전무결하다고 하는 사실. 저 뒤에 가면 흠소심마오? 지금 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안이비설신의), 六道(육도). 여섯 가지 길로서 묘적표현용. 쓰고 싶으면 마음껏 씁니다. 보고 싶으면 보고, 듣고 싶으면 듣고, 말 하고 싶으면 말 하고, 손 움직이고 싶으면 움직이고, 잠 자고 싶으면 자고 이렇게 완전무결한 작용을 하는데, 흠소심마오? 부족한 것이 도대체 뭐 있느냐? 네가 뭐가 부족하냐? 지금 이 상태로 완전하지 않느냐? 거기에 우리가 눈을 떠야 됩니다. 그것만 이해하면 정말 불교 졸업입니다. 무슨 반야심경 한 편 몰라도 좋아요. 불교는 천수경 전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恐滯常侍與諸官員(공체상시여제관원)하야,
常侍 = 왕상시. 자주 거론하네요. 벼슬이 좋긴 좋은가 보네요. 그리고 여러 관원들, 이 사람들을 막히게, 꽉 막히게 오늘 설법하는 것은 오히려 이 사람들을 꽉 막히게 해가지고 昧他佛性(매타불성)이니, 그들의 불성이, 이미 활발발 하게 살아있는 저 불성. 내말 잘 듣고 춥고 더운 것 잘 감지하고, 배고픈 것도 잘 알고 시간 되면 왜 빨리 안 끝내나? 하는 그런 신통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생생하게 살아있는 불성을 어둡게 할까 봐 오히려 두렵다. 그것이 겁난다.
잘 하고 있는데, 잘 살아가고 있는데 설법이라고 하는 것. 이것 해가지고 오히려 그것을 더 거리가 멀도록 할까 봐 사실 난 겁난다 말이야. 그런 말입니다.
不如且退(불여차퇴)니라. 또한 이 법상에서 물러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어~ㄱ” 이렇게 한 번 하고는 少信根人(소신근인)은 終無了日(종무료일)이로다. 믿음이 적은 사람. 믿음이 적은 사람은 마침내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 결코 이 공부, 이일. 일대사 큰일. 여기에 대해서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 바로 믿어 들어가면 자기가 완전무결 하다고 하는 이 사실에 바로 믿어만 들어간다면 그것이 끝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 참 안타깝다.
그러니까 信根이 문제다. 여기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견이 아니고 信根이 문제다. 정견은 다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 다 안다. 그것을 얼마만큼 믿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하는 것입니다.
久立珍重(구립진중)하라. 오래 섰으니 그만 돌아가서 쉬시라. 이런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저 앞에서 주고받는 法擧量(법거량). 어떤 승려가 나와서 불법대의를 물었지요?
그래서 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할을 할 때 까지는 제법 괜찮은 안목이 있는 중인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것이 맹탕이거든요. 그래서 한다는 소리가 “이 허공에다 말뚝 박으려고 하는 구먼. 되도 않는 짓이다.” 이렇게 하고... 아주 참 정말 제대로 된 법거량입니다. 법거량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드날리는 것.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 다음에 좌주하고 대화에서도 좋았었습니다.
그러나 격이 낮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그 대목을 다시 보겠습니다. 此日法筵(차일법연)은 오늘에 법문하는 이 자리는 일대사를 위한 것이다. 지견ㆍ지혜.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는 眞我에, 참 나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렇게 말 할 수가 있어요. “누가 물을 사람이 있거든 빨리 와서 물어라.” 라고 해놓고, “설사 어떤 사람이, 부처가 와서 묻고 한다 하더라도 입만 떼면 벌써 그것은 틀린 소식이야.” 왜 그러냐? 경전 혹시 읽지 못 했는가? 석존이 말하시기를 법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면 지혜라고 하는 것은 文字를 떠나 있어. 아무리 설명해 봐야 그것은 근처에도 못가. 그러나 할 수없이 황칠을 하는 격이지만, 그나마 그런 방편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不屬因不在緣故(불속인부재연고) 제일 중요한 말입니다. 결코 수행해서 따 내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이... 수행해서 따 내는 그런 결과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것입니다. 이미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수행을 해서 뭔가 부처를 만들어서 내가 하나 갖겠다고 하는 것은 頭上安頭(두상안두)라 그래요.
여기도 여러 번 나옵니다. 머리위에다 머리를 하나 더 올리는 격이다 그랬어요.
머리위에다 머리를 하나 더 올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괴지요 요괴. 아주 비정상입니다.
정말 사람의 머리위에 머리를 하나 더 얹어 보십시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가정해 보십시오. 그건 당치도 않은 짓이지요. 수행해서 뭔가 따 내겠다고 하는 것. 성불 하겠다 견성 하겠다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짓이다 라고 했어요. 그래서 임제 스님은 그 말 잘 써요. 頭上安頭. 머리위에다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격이다. 머리 버젓이 완전하게 다 잘 되어있는데, 머리를 하나 만들어서 올리면 그것은 어떻게 하잔 말인가? 참 우리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지요. 정말 이것을 우리가 철저히 믿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우리가 못 했느냐? 그대들이 믿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갈등한다.
오히려 설법을 한다고 하는 이것이 왕상시나 관원들ㆍ다른 僧ㆍ尼ㆍ道ㆍ俗(승니도속). 6조단경으로 보면 그렇지요. 僧ㆍ尼ㆍ道ㆍ俗. 온갖 대중들. 여러 종류의 대중들. 이 모든 사람들. 아무 탈 없는데 오히려 그들을, 불성을 어둡게 할까봐 겁이 난다. 두렵다. 차라리 법상에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 이 말입니다.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할을 하고. 그리고 정말 할이 이것이 임제 스님 법문에서 또 진짜 알짜배기입니다. 이 앞에서 이야기한 것은 이해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왁” 하는 이것으로 보여줄 것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할”하는 그 작용이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해요. 여러분들 손 움직이는 것도 제가 하라는 것이나 임제 스님이 하라는 것이나 똑 같고, 고개 움직이는 것도 역시 똑 같은 겁니다. 그러면 이 법문 다 설파했지요. 설파 다 한 것입니다.
더 이상 설파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완전하게 드러냈는데 少信根人(소신근인)은 終無了日(종무료일)이라.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 요는 믿음이 중요하다 하는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우리가 쉬자. 이렇게 해서 일차 법상의 법문을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