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일치’ 꿰기(단편소설)
이원우
나는 얼마 전 큰 선물을 하나 받았다. 스무 촌쯤 되는 집안 형님이 ‘국화전(菊花田)’이라는 아호를 지어 준 거다. 군에서 수십 년 복무한 예비역 부사관인 내가, 그걸 일상에서 남에게 내세우기 힘들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이번에 문학잡지를 통하여 정식으로 데뷔를 하고 보니 명함도 따로 갖게 되었다, 그래 거기 이름 앞에 이 아호를 박아 넣어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건네는 게 어느덧 습관이다. 형님은 말했었다.
“‘한림정 아저씨’! 나와 동항렬(同行列) 또래는 자네 선대인을 그렇게 불렀다네.”
“…….”
“내가 한림정 아저씨 보고 ‘종태(鍾泰) 아재’라 불렀다가는 상놈이라며 집안 어른들께 경을 치곤 했지.”
“저도 형님을. 함자(銜字)를 앞세워 부르지 않습니다. 형수님의 친정이 부산 봉래동이지 않습 니까? 그로부터 형님은 ‘봉래동 형님’으로 불리게 되셨지요.”
말이 쉬워 그렇지 나는 처음 입에서 쉽게 그 호칭이 나오지 않았다. ‘이름 형님’에 익숙해져 있었던 거다. 어쨌든 형님의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많은 걸 깨달았다.
경주 이 씨 집성촌인 국화전(행정 동명은 국전리) 양지(陽地)만 해도 백여 가구 되었다. 음지와 섬땀에도 경주 이 씨들이 대여섯 가구 살았고.
실제 국전리-‘국전’만으로도 통용-에는 그 옛날 조선 시대부터 국화를 많이 재배했던 고장이었더란다. 형님은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에 유머 비슷한 걸 실었다.
“그러다 보니, 동명이인이 더러 있었어, 물론 한자야 다르지만….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종친이 셋이었어. 막내는 나와 서른 살 차이가 났는데, 타관에서 온 경우일세.”
“한데 ‘국화전’을 그걸 제게 아호로 주시다니….”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노년에 군부대에서 장병들을 대상으로 안보 강연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는가? 자네처럼 평생을 군에서 보내다시피 했고 사단 주임원사 등 간부를 역임한 종친은 없으이. 물론 외자 이름 ‘상(相)’을 쓰는 소령 출신이 자네보다 계급이야 높지만, 그 조카는 대대 참모로 전역했지 않나? 사단 주임원사는 중령 예우를 해 주니 자네야말로 가문을 빛낸 종친이야. 마침 자네가 고향 단장면에서 다섯 번째로 문단에 데뷔한 거 또한 자랑스러우이. 국화꽃 향기를 그윽하게 풍기는 작품을 빚어내리라 믿는 내 소망을 담았다고 생각하게. 처 음엔 ‘국전’이라 할까 하다가, 세 음절인 ‘국전리’와 ‘국화전’ 중 양자택일한 걸세.”
“어리둥절합니다, 형님! 그러나 형님의 배려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서 들먹인 바만으로는 이 이야기의 전개가 어렵겠다. 형님은 국전리에서 십 리쯤 떨어진 태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가서 어렵게 중고등학교 및 초급대학을 마쳤더란다. 그 후 교사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 면내의 무안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더란다. 언젠가 형님은 얘기했다.
“장편 소설로 따로 두어 권 써야 할 일생을 보낸 셈일세.”
어디 형님뿐이겠는가? 나도 파란만장한 과거사가 있다. 줄이고 줄여서 섞어 그 일부만 적자.
나는 예비역 주임원사 출신으로 26사단사령부에서 몇 년 전 전역했다. 군인 연금을 받으니 경제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런데 고통을 줄 게 뻔한 일을 얼마 전에 시작해서 시달리고 있으니 낭패다. 그래 난 근래 독백(獨白)이나 푸념을 입에 달고 산다.
“쯧쯧, 편의점 때문에 힘들어!”
요즘 같은 시기에 이런 심적 갈등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 모두를 관통하고 있다. 아르바이트 학생을 구하기도 힘들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종일은 대학에 다니는 딸이 나와서 도와주기에 망정이지, 녀석이 없다면 그야말로 우린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진다.
해서 녀석의 방학이 끝나거나 시험이라도 있는 기간에는 부부가 더욱 힘들 수밖에. 어쩔 도리 없이 아내와 함께 나는 번갈아 매장에서 땀을 흘려야 하는 거다. 철야(徹夜)도 예사다. 적자를 보는 때가 많고말고. 코로나라도 끝난다면 숨통이 좀 트일 거라는 건 희망일 따름이다.
그래도 난 특유의 군인 정신을 앞세워 굴하지 않고 출퇴근을 어김없이 거듭한다. 항상 가게 문을 연다는 뜻이다. 때로 그 안에 걸려 있는 대형 거울을 들여다보며 거수경례를 올려붙이기도 하는데, 그게 자신에게 불퇴전의 의지를 불태워 준다.
“전진!”
그러나 전진이 안 되는 현실의 냉혹함에 절망하다가도 난 맞은편의 나를 보고 중얼거린다.
“아무려면 어때? 나는 수십 년의 군대 생활 상당 기간을 ‘전진’으로 시작하여 ‘전진’으로 끝나는 1보병 사단 쌍용 연대에서 보냈는걸! 거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왕복 네 시간 남짓 정 도 걸려 다녀올 수 있는 내 모부대(母部隊)가 아닌가? 그래 ‘전진’이고말고!”/
그걸로 끝내지 않고 난 손을 내렸다가, 다시 경례다. 그러면서 우렁차게 외친다.
“공격, 돌격!”
아니 ‘공격’은 뭣이며 또 ‘돌격’은 왜 덧붙이는가? 현장에서 그러는 내 모습을 처음 본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리라. 내친김에 설명하자. 전자(前者)는 26사단, 후자는 8사단 구호다. 뭔가 복잡하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하사로 임관되어 1사단에 배치받았었다. 예하 연대 이곳저곳에서 인사 행정 관련 업무를 보다가, 중사 진급할 때까지 ‘쌍용’에서 줄곧 복무했다. 그러다가 26사단에 전보되고 상사 계급을 단 나는 부관참모부 병적 기록관 일을 보았다. 긴 연한은 아니었지만, 거기서 나는 일생을 통하여 황금기라 할 정도로 군인으로서의 긍지심을 지키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기를 몇 년간 계속하다가 예하 기보대대(기계화 보병대대)에 잠시 내려가 있는 중 원사 계급장을 달았고, 다시 사령부로 스카우트(?)되면서 ‘사단 주임원사’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게 되었던 거다.
이윽고 두 사단이 통합을 한다. 그런데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 앞에 난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경례 구호 ‘공격’은 전군에서 26사단만의 것이었다. ‘돌격’도 마찬가지, 8사단의 전유물(?)이었다. 한데 그 26사단이 8사단에 통합됨으로써 전 장병이 처음엔 경례 구호부터 혼란이 불가피했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된다. 돌격과 공격! 칠 격(擊), 진짜 우연의 일치다.
부대 마크마저도 약간은 닮았다. 불무리 부대(26사단)는 가로로 원(圓) 두 개가 교집합을 이루는 데, 오뚝이 부대(8사단)는 세로로, 원 위에 원을 얹어놓은 형상이니 하는 말이다. ‘공격’과 ‘돌격’, 불무리와 오뚝이! 그 이상의 우연의 일치가 어디 있을까?
형님은 나보다 열대엿 살 많다. 형님은 내게 여태껏 정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름의 끝 자가 당연히 ‘우(雨)’일밖에. 여기서 이름을 전부 밝히면, 이야기도 재미없을 뿐더러 그 형님에게 먼저 누(累)를 끼칠 것 같아 맨 마지막에 가서 가운데 자를 슬쩍 흘리려 한다.
군밖에 모르는 내가 얼마 전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위의 형님 덕분이다. 형님과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형님과의 첫 대면은 사단주임원사실에서 이루어졌다. 반세기 만에 예하 부대를 찾아 장병들에게 안보 강연을 하게 된 형님이 사단장을 면담한 뒤 약속대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서로의 소식은 오가던 중이었다.
그 무렵 사단 사령부에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병사들을 위한 대학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대비한 ‘불무리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교장을 당연직으로 주임원사인 내가 맡아 있었다./
사령부는 물론 예하 여단의 병사들 중 희망자를 대상으로 두 달 동안 집체 교육을 시켜 응시하게 하는 제도인데, 반응이 참 좋을 수밖에. 무엇보다 명문대에 재학 중 입대해 일정 기간 복무한 병사들이 강사진이라, 학습 효과가 컸다. 검정고시 합격률도 거의 백 퍼센트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어느 날 강사(병장)의 어머니가 작고하는 바람에, 자칫하면 수업이 결손을 보게 될 뻔했는데 마침 형님이 부대를 방문한 것이다. 형님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형님이 쾌히 승낙한 것!
난 기쁠 수밖에. 주제가 ‘문학’이었으니, 저서를 몇 권 낸 바 있는 소설가요 수필가인 형님이야말로 대타 강사로 적임자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게다가 형님은 교장으로 정년퇴임했으니 고등학교 학생으로 간주할 수 있는 병사들을 대상으로 수업하기에 최고 적임자였다 하자.
형님의 수업은 나도 120분 내내 직접 들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너무나 재미있었다. 1교시 끝나고 휴식 시간에 내가 형님에게 다가가 한마디 건네었다.
“형님, 정말 배꼽을 잡게 하면서도 귀에 쏘옥 들어오게 하는 강의였습니다.”
“난 자네가 뒤에 앉아 있으니 긴장이 되던데? 지난달 73여단 본부에서의 장병들 대상으로 한 안보 강연 때 여단장이 두 시간 내내 임석해 있는 바람에 마음고생을 했으이.”
“아니 형님도…. 저를 여단장님께 견주시다니요?”
그 말을 듣고 형님은 더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내 소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뜻이라고.
당일 수업 현장 스케치 계속이다. 맨 먼저 형님은 화이트보드에 매직펜으로 ‘또’를 정성 들여 썼다. 한글 궁체였다. 그리고 세로로 괄호를 열더니 又라고 쓰고 묶었다. 그러곤 줄을 바꾸어 ‘우연의 일치’라는 다섯 글자를 적었다. 형님이야말로 반세기 전 26사단 사령부의 모필병(毛筆兵) 아니었던가? 글씨야 빼어날 수밖에, 병사들은 나지막하지만 일제히 탄성을 내뱉었다.
딱 여섯 글자로 형님은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다. 병사들의 표정이 정말 진지해졌고말고. 한데 어떤 병사가 손을 든 것이다. 형님이 지목하자 병사가 일어서서 하는 말이다.
“예, 일병 전병진! 종조부(從祖父) 되시는 분이 유명한 한글 서예가이셨거든요.”/
“그래? 누구신가?”
“돌아가신 지 십 수 년 되었습니다. 함자로 빼어날 수(秀), 가죽 혁(革) 자를 쓰셨습니다.”
“뭐라고? 자네 방금 전수혁(全秀爀)선생이라 하셨나? 우선 이것부터 듣게나. 돌아가신 분께 는 ‘함자’라 하면 안 되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일병 전병진! 할아버지가 소천하시고 난 뒤 이상하게도 가세가 기 울어져서 저도 고 1학년을 마치고 학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님은 다시 돌아서더니 화이트보드에다 ‘휘자(諱字)’라고 썼다. 그러곤 따라 읽으라며 먼저 ‘휘자’를 지시봉으로 가리키며 ‘휘짜’라고 반복하여 소릴 내었다. 이어지는 병사들의 웅성거림! 다음에 이어진 형님의 발언은 모두로 하여금 박장대소가 터뜨리게 했다.
“아니, 이거야말로 우연이 일치이고도 남을 사건일세.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그분이 우리 담임이셨고, 국어를 가르치셨네. 서예 과외 선생님이시기도 했지. 세상에 이런 일이!”
형님이 이번에는 화이트보드를 아까보다 더 정성을 들여 제법 많은 글자로 채웠다. 궁체였다. 옮겨 보자. 제1호/ 표창장/ 사단 직할 공병 중대/ 일병 전병진/ 이 병사는 2020년 본 사단 직할 공병 중대에 배치 받아…/ 날짜/ 제26기계화보병사단장 양ㅇㅇ(*이름은 보안상 생략) 한데 그 글씨 크기가 각각 다르다.
“‘호수’와 ‘날짜’는 제일 작게, ‘표창장’을 제일 크게 써야 하거든? 수여자 즉 사단장 이름이 그다음…. 그보다 약간 작게 ‘제26기계화보병사단장’이지. 예하 부대명이나 수상자 이름은 어떤 수준이어야 할지 짐작할 수 있을 테지. 그건 그렇고. 이 글씨가 자네 할아버지의 고유 체라 할 수 있는 ‘전수혁체’라는 애칭을 받을 정도로 당시 사단에서 인기였다네.”
난 많은 표창장을 접해 봤다. 하나 형님과 같이 상식을 웃도는, 확연한 해석을 하는 분을 만나지 못했었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형님의 말은 계속되었다.
“난, 65년 7월부터 67년 9월 9일까지 이 26사단 부관참모부에서 사단장 표창장을 썼어요. 당시에는 한글을 모르는 병사들이 더러 있었어. 보충 중대에서 일정 기간 이들을 대상으로 문맹 퇴치 교육을 시켰지. 나도 강사로 나설 수밖에. 한데 반세기 뒤 고등학교 졸업장을 목표로 하는 여러 ‘전우’들에게 문학 수업을 하게 되다니,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라 할 수밖에.”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형님은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되새겼다. 물론 수업의 계속 차원이다.
형님이 어릴 때 공비들의 오인 사격으로 아버지가 한쪽 눈을 실명했단다. ‘곰소’라는 큰 웅덩이에서 면내 유지들이 모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 사위가 어둑어둑할 무렵이었다. 형님은 아버지가 공비들이 쏜 총의 유탄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한쪽 눈을 심하게 다쳐 당신은 끝내 실명을 했다. 형님은 이 말을 덧붙였다.
그 뒤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었더란다. 그래 형님은 거의 혈혈단신으로 자랄 수밖에. 부산에 내려가 신문팔이며 구두닦이 등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러니 정식 교사 양성 기관인 사범학교나 교육대(초급 과정일 때)에 다니지 못했다. 일반 초급대학을 마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비사계(非師系) 출신으로 교단에 선 거다. 출신 학교는 승진 등에 큰 손해를 보는 원인이어서 처음엔 교직 생활에서 큰 희망을 가지지 못했다. 곧 군에도 가야 했고. 26사단 말이다.
형님은 군 제대 후 표충사 밑 산동초등학교에 복직했다. 67년도였다. 침식은 사택에서 자취를 함으로써 해결했다. 교감 교장 승진 희망도 없어 ‘무위도식(無爲徒食)’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더란다. 한데 이듬해에 부산에서 교육대학교를 졸업한 여 교사가 하나 부임해 왔다. 이(李) 씨 성을 가진…. 여교사는 성실하고 참했다. 나이는 형님과 동갑인 스물일곱 살. 7명의 교사 중 미혼은 둘뿐이었으니, 그들은 급속하게 가까워졌고 마침내 장래까지 약속한다.
형님도 종친에 관련되는 세세한 것을 잘 몰랐다. 본관이 경주 아니면 모두 타성(他姓)인 줄 알았던 거다. 해서 여교사가 차성(車城)씨라 했을 때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을밖에. 여교사는 본관을 기장(機張)으로 쓰기도 한다고 했다. 어쨌거나 둘 다 부모를 일찍 여의었던 터, 서둘러 찬물 한 그릇 놓다시피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혼인 신고를 하러 갔더니, 면사무소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아닌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채, 그가 흘리는 말이다.
“두 분께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모르셨습니까? 경주 이 씨의 시조는 휘자 알평(謁平)이시지요. 그 뒤로 연대를 달리하여 분 적(分糴) 종친이 생겼는데, 여덟 개입니다. 합천 ‧ 재령 ‧ 원주 ‧ 우계 ‧ 장수 ‧ 차성 ‧ 아산 ‧ 진주 이 씨 등입니다. 혼인 신고가 안 됩니다.”
“그럼 저희는 어쩌면 좋습니까?”
“제가 정답을 내놓을 수 없군요. 당분간은 어려움을 이겨나가셔야 합니다. 머지않아 호적법이 개정되어 동서동본(同姓同本) 간의 결혼을 허용하게 된다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그 기막힌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둘은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둘 사이엔 그때까지 아기를 잉태하지는 않았다. 하여튼 그게 되레 우선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줄이야! 그러던 형님에게 크나큰 전기가 찾아왔다. 산동초등학교에서 도로도 없는 8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분교장(分敎場)이 하나 세워진 거다. 사자평 분교장이다. 형님은 일단 그리로 혼자 옮기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런데 약초를 채취하여 생계를 이어가고자 대도시에서 대여섯 젊은이들이 거기 상당수 찾아든 거다. 그들의 수입이 쏠쏠했다. 소문을 듣고 여러 고장에서 남부여대하여 이사를 오고 몇 년이 지나다 보니 마침내 여남은 가구가 조그마한 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슬하에 자식들도 태어나서 한창 때는 인구가 30명 가까이에 이르렀다나? 어린이들이 취학 연령에 다다르게 되고 교육 수요를 위해선 분교장 설립이 불가피하게 된 것. 첫 입학생이 3명이 고작이었으나 해가 갈수록 학생들이 불어났다. 형님은 오토바이를 이용하여 본교 사택에서 분교장까지 통근을 했다. 1년이 조금 지나자 마침내 1~3학년과 4~6학년으로 나누어 복식 수업을 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택을 지어주는 등 혜택을 제공했지만, 거기 근무를 자원하는 교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교육청에서 아무리 설득을 해도 별무효과여서, 마침내 이런 궁여지책까지 동원하게 되었으니…. 3년 동안 거기서 근무하면 임기가 끝나는 대로 본인의 희망지에 발령을 내 준다는 것. 게다가 귀를 솔깃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달콤한 유혹(?)이 있었으니 ‘송아지’였다. 누구든지 사자평 분교장에 적을 두면 그 첫날 송아지 한 마리를 선물한다는 것! 물론 그런 예산이 교육청에 없을뿐더러 그걸 집행하면 적법하지 않다는 해석도 있었다. 해서 군내 전 교직원이 일정액의 성금을 지원하기로 뜻을 모았더라나? 1인당 당시 500원 정도였고 강제성을 띠지 않았다. ‘송아지 기금’은 그야말로 산뜻한 충격이었다.
그 첫 수혜자가 형님이었다. 그 자초지종은 이랬더란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형수의 분교장 전출이 둘이 이뤄지게 된다. 방 두 개에 부엌 하나인, 사택에 살림을 꾸렸다.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흠이지 생활에 큰 불편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 분교장과는 따로 근무하다 보니 직원들도 둘의 본관이 경주와 차성인 데 대해 괘념치 않더라나? 일부러 그런 것 따위를 캐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사 간접 동성동본인 사실을 안다손 치더라도 눈감아 줄 도량 내지 금도(襟度)도 시골 동료들은 지니고 있었던 거다.
거기다가 둘이 조그맣게나마 쾌재를 부르는 까닭이고도 남을 큰 선물이 하나 있었다. 군내의 교육 동지들이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벽지 중의 벽지인 그곳에 부부가 근무를 자처한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 송아지를 두 마리나 사 준 거다. 1인당 한 마리씩이라 잠정 결정한 사항이지만, 아무리 부부라 해도 남교사 1명+여교사 1명이니 송아지 두 마리가 산술 계산으로는 맞다.
둘은 거기서 6년을 근무했다. 둘의 봉급 액수를 합하니 만만찮았고, 다 자란 우공(牛公)둘이 송아지를 낳는 덕분에 그걸 내다 팔아 거둬들이는 수입도 어지간했다.
그런데 거기서의 6년여 세월이 그 둘에게는 엄청난 인간 승리의 요인으로 작용했으니, 교직 생활에서 다른 사계(師系) 동료들보다 오히려 출세(?)를 앞당기는 계기로 변한 것이다. 설명이 필요하다고? 형님의 말을 빌어서 옮기자.
“교육의 균형 발전을 위해, 정부에서 지정한 도서 벽지 근무 교사에게는 가산점을 부여했거 든? 이윽고 사자평 분교장 같은 곳에 근무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어요.”
그렇게 둘은 ‘꿩 먹고 알 먹는’ 벽지 근무를 마치고 희망에 따라 양산시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부부가 기장초등학교와 일광초등학교에서 제 몫을 다하는 교사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그 두 학교가 부산 시내로 편입되는 게 아닌가?
6년 동안의 벽지 점수가 승진에 큰 보탬이 된 것은 물어보나마나. 게다가 그 사자평 분교장 등과의 특별한 교육적 교유(交遊) 및 비교를 통하여 쓴 실천 사례가 계속 교육감상(연구 실적 가산 점)을 받음으로써 둘은 비슷한 시기에 교감 교장 승진을 하여 교육자 집안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법적인 장애가 없어진 뒤였다,
그 전에 이미 경사가 겹쳤더란다. 어릴 때 농사 지어본 경험이 많아 사자평 분교 근무 시 약초 채취 및 관리와 판매는 물론 원천적인 재배 기술을 연구 보급함으로써 그곳 주민들의 소득을 증대시킨 데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던 것. 그것도 부부가 함께 말이다. 승진에 큰 힘이 되었음을 강조해 무엇 하랴. 장관표창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힘들 때였다.
이것도 둘의 ‘우연의 일치’의 연장이라 할 수 있겠다. 형님은 입대 전 어느 초등학교에서 2년 동안 근무한 경력이 있는데, 학반 어린이들 중 몇몇이 소위 미감아(未感兒)라 해서 음성 한센 씨 병 환자(실제는 전혀 위험이 없는 그러니까 환자가 아니다)의 자녀였다. 그게 승진 가산점이 된 거다. 형수도 양산 일광 초등학교에서 미감아 학반을 맡았더란다.
그런 형님이 제대 반세기가 넘어 그렇게 모부대를 방문, 불무리 고등학교 학생(병사)들에게 문학 수업을 한 것이다. 그렇게 지난날을 재미있게 되새긴 자체가 ‘우연의 일치’ 중 ‘우연의 일치’라 하고 싶다. 작은 키에 약간은 비만한 것조차 둘은 닮았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일찍부터 하얗게 세는 바람에 둘의 뒷모습을 보면서 모르는 사람들이 이러기 예사였다니 모두가 실소하기 십상이란다. 아이고, 언니 동생이 우짜면 이렇게 머리가 하얗노?
형님은 말했다.
“두 시간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수업엔 ‘도입’, ‘전개’, ‘정리’ 등 세 단계가 있어요. 처음 스 승의 손자를 만난 감동이 ‘도입(導入)’이라면, 우연의 일치로 점철된 어쭙잖은 내 일생을 요 약한 게 ‘전개(展開)’이니, 마지막 ‘정리(整理’로, 다 같이 ‘사단가’를 불러요. 오늘 군가 세 곡을 양념 삼아 곁들였는데, 피로할 때 군가를 부르면 쉬 해소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내가 작년 국방 TV ‘우리는 전우’에서 군악대에 반주에 맞춰 열창했었던 ‘사단가!’ 유노윤호 일병이 드럼을 쳤지.”
그러고 나서 형님은 정말 ‘사단가’를 선창했다. 항상 지니고 다니는 지휘봉을 힘껏 휘두르면서…. 지휘 겸 선창은 어지간한 문학 단체의 행사 때 보이는 형님의 전매특허다. 같이 불러보자. 눈부신 햇살 아래 옥토 삼천리/ 짙푸른 향내 나는 내 조국 강토/ 어둠이여…
형님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잠시 시간을 줄 터인즉 오늘의 ‘우연의 일치’ 중 으뜸이 무어냐고 생각해 보라며 병사들에게 권했다. 모두가 눈을 감게 하고서…. 이윽고 대답을 하라 했으나, 병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댔을 뿐 그야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었다. ‘동갑내기 처녀 총각’, ‘동성동본(?) 부부교사’, ‘벽지 교사’, ‘부부 교장 동년(同年) 정년퇴임’, ‘미감아’, ‘부자(富者)’, ‘국민 포장 공동 수상’ 등등.
형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더니, 고생 많았다며 모두가 정답이라고 하곤 병사들을 치하 내지 격려했다. 이걸 듣고도 웃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의학과에 가야 한다며 긴장해 들으라고 엄포(?)를 놓곤, 운을 뗐다. 그러고서 하는 말이 이랬다.
그렇게 일찍 현직에서 물러난 뒤 둘은 힘을 합해 세무서 직원이 운영하는 무료 노인 학교에 잠시 관계했더라나? 마침내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타이페이를 4박 5일 다녀오게 된 것. 90세가 최고령 학생이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부부 학생이 있었는데…. 남편 이름이 ‘박또출’이었더라는 것.
요즘 세상에 ‘또’라는 이름자를 쓰는 사람이 없다. 물론 한자로는 또 우(又)라, 박우출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어지 는 그다음 말에 걷잡을 수 없는 가가대소가 터졌다. 형님이 이랬던 거다.
“부인 이름이 ‘손또분’이었으니 말이야. 아까 썼던 또 우(又)! 우리 맘 놓고 또 웃어요.”
교실 안이 흡사 난장판이었다. 세상에 부부의 가운데 이름자가 ‘또’라니, 설사 ‘우’로 배려해서 불러 준다 한들 듣는 이가 어찌 웃음보를 안 터뜨리고 견디겠는가? 형님은 짐짓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단언(?)했다.
“여러분 중에 정신 의학과에 가야 할 병사는 없고말고!”
형님은 이름 이야기를 하나 더 했다. 당시 노인 학교의 백여 학생 중, 복수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가 넷! 모두 복 복(福) 자, 목숨 수(壽) 자를 썼는데, 황 ‧ 김 ‧ 문 ‧ 손 복수…. 진짜 우연의 일치다. 형님의 말끝이다.
“여러분의 이(李) 교장 즉 주임원사가 이번에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현역 군인으로서 는 극히 드문 경우지요. 이분이 나와 종친이고 이름 끝 자도 비 우(雨)라, 형과 동생입니다. 배꼽을 잡게 하는 ‘이름자’ 또 다른 이야기는 본인에게서 듣도록!” /
다시 얼마 전까지의 나 자신 이야기. 어쨌든 평생을 군에서 보낸 나로서는 군 생활을 시작한 1사단, 그중에서도 12연대! 처음엔 무턱대고 지하철에 승차 문산역에 내려 부대 근처까지 가선 그냥 어슬렁거리다가 돌아오곤 했다. 왕복 세 시간 잡아야 했지만, 마치 여우의 수구초심(首丘初心) 흉내라도 내듯 고향 같은 부대를 향해 집을 나섰던 거다. 그나마 26사단에 대한 그리움은 좀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별 의의가 없었다. 두 부대의 옛 전우들(부사관)도 하나 둘 전출이나 예편을 하다 보니, 방문의 명분도 흐려졌다. 마침내 위병소 근무 ‘병사’들도 나를 외면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그 쩌렁쩌렁하던 ‘전진’이며 ‘공격’이란 구호에서도 기세가 꺾이는 듯했다. 후배인 주임원사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깨닫기까지 그렇게 몇 달이 걸렸다. 그러자 나의 입에서도 무슨 실토이듯 튀어나오는 말.
“부사관은 기수를 따지는데 후배들한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쯧쯧….”
뒤늦은 각성이랄 수밖에. 두 부대가 통합된 지도 어느덧 상당 기일이 지났다. 이심전심, 때맞추어 형님의 발걸음이 잦아진 거다. 의정부에 있는 나의 새 직장에 형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렀으니…. 물론 형님은 제대한 지 반세기가 넘었으니, 새 모부대(母部隊) 26사단을 찾은 명분도 되레 커졌다고 거침없이 얘기한다. 형님은 혼자서 ‘26사단기념관’에 들르기 예사다.
바야흐로 형님과 나는 어떤 일을 도모하려 한다. 국화꽃이 만개할 무렵 둘은 어깨를 겯고 군복 차림으로 현충원에 들를 거다. 각기 따로 현충원을 참배한 적은 있지만 둘이선 처음이라 가슴이 설렌다. 국화꽃 운운은 고향 국전리가 생각나서다. 내 아호도….
극명한 우연의 일치? 내가 이런 표현을 쓰면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을지 모른다. 극명하다는 형용사와 일치라는 명사는 상치되거나 아리송한 조합이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이 워낙 둘은 단순히 웃고 넘길 명제가 아님을 다짐하면서 우리는 군복 차림으로 나설 거다. 첫날 참배할 ‘임’은 네 분이다. 채명신 중장, 문중섭 ‧ 한무협 소장, 준장 박경석(소위 박경석)!
채명신 장군 묘역은 형님뿐만 아니라 내 발걸음도 가장 잦았던 곳이다. 당신의 유언대로 장군은 진짜 전우로 여겼던 사병들 곁에 묻혔다. 거기서 나도 형님의 습관(?)에 따라 ‘전선 야곡’을 따라 부를 거다. 채명신 장군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군인의 표상이었다.
계속 걸어 올라가면 장군 묘역이 나오는데, 문중섭 ‧ 한무협 두 장군은 26사단장 출신이다. 형님이 군 복무 시절 모셨던 분들이다. 두 개의 감사패를 준비했는데, ‘26사단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라는 직함 뒤에 형님의 이름 마지막 우(雨) 자가 한가운데에 오도록 직인도 만들어 찍었다. 단 받는 이의 이름이 형님 것보다 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형님은 그 정도의 의전 내지 예의는 안다. 문중섭 사단장께 대한 것은 두 번째다. 형님 이름 밑에 전화번호를 기록하기 않았던 까닭으로, 유족으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는 게 아쉽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감사패를 교체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한무협 사단장께 대한 감사패는 사무실에 맡겨 둘 생각이란다.
전쟁은 불행하다. 그런데 옷깃을 여미게 하는 미담도 거기에서 생겨난다. 나아가 후세의 인구들에게까지 회자되니 하는 말이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적군들이지만 무조건 증오할 수만은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다. 그래 이제 바야흐로 박경석 장군 묘소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다. 박경석 장군은 아흔 살, 군인이나 소설가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분명 그의 묘소가 장군 묘역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있었는데, 지금은? 글쎄다. 형님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대답하지 못하겠단다.
박경석 장군은 지금 대전 지방에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면서 건강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큰어른이다. 그런데 생도 2기 출신으로 전투 경험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열일 곱 살에 임관, 포천 지방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적군의 수류탄 파편으로 만신창이가 된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경에 이르렀는데, 그를 발견한 적군 병사가 자기 사단장에게 상황을 보고한 거다. 적군 사단장은 이 ‘미소년 군관동무’를 치료하고 난 뒤 갖가지 회유를 한다.
하지만 박경석 소위가 그걸 수용할 리가 만무하다. 겨레와 나라 사랑이 남달랐다는 그는 적군 사단장의 손길을 뿌리치고 홀로 남하하여 조국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이미 그땐 그가 전사했다는 확인이 당국에 접수되었으므로 묘지를 조성하고 비석까지 세운 뒤였더라나? 초대 재구 대대장까지 지내면서 채명신 사령관 휘하에서 베트콩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박경석 장군은 전우들이 생각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자신의 유택에 가서 위로를 받았더라는 것이다.
채명신 장군은 거꾸로 적군 사령관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회와 또 다른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감동을 주었다. 직접 장군 자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아니니 부정확하더라도 양해를 하자며 형님과 내가 짜깁기한 소설 같은 일화다.
채명신이 소령 때였더란다. 그는 유격대장으로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때로는 총격전을 벌이고 인민군 장병을 사로잡기도 했는데, 한번은 굉장히 높은 계급의(사령관) 군관 일행과 싸워 이겼다. 마침내 사령관이 피체(被逮), 채명신과 마주서게 된다. 채명신은 사령관에게 예우를 하면서 병력이며 무기배치 등 정보를 요구했다. 하나 사령관은 완강하게 거절하면서,
“여보, 채 소령! 그러 이러지 마오. 차라리 나에게 자진(自盡)할 기회를 주시오. 김일성 장군 이 내게 선물로 준 권총으로 내 목숨을 끊고 싶소.”
죽음을 초월한 표정을 읽은 채 소령이 그 권총에 실탄 한발을 장전하여 넘겨주고 방문을 나서려는데 적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자기가 기르고 있는 고아가 있는데, 걔를 좀 맡아 달라고…. 채명신도 흔쾌히 승낙하고 문을 닫자 터지는 총성! 그 후문은 기술하지 않는 게 좋겠다.
“두 분이 오랫동안 장군 묘역이 아닌 곳, 서로 몇 백 미터 떨어져 유택을 마련하고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우연의 일치 중 우연의 일치 아니겠나? 난 박경석 장군의 묘지가 없어졌다는 소 문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이. 코로나 때문에 그랬지 실은 거기 찾아가서 온갖 상념에 젖고 했었거든? 피아의 우두머리가 인도주의 정신을 발휘한 아름다운 전쟁 역사라 해도 지나 치지 않을 걸세. ”
이번에 현충원에 들르면 휘(諱) 총우 형님의 유택을 찾고 싶다. 국화전 출신 전사자 중 유일하게 후손이 없는 형님이기도 해서 더욱 그립다.
이제 형님의 이름을 밝힐 차례다. 아니 그날 형님이 사단장실로 다시 올라가고 난 뒤에 내가 잠깐 병사들에게 일러 준, 이름에 얽히고설킨 압권(壓卷)이다. 아래에 적자.
형님은 가운데에 으뜸 원(元) 자를 쓰는 분. 한데 기가 막히는 우연의 일치! 대구에 사는 동명이인 한 분도 동성동본이며, 파(派)도 같다. 수필가이고 교장으로 퇴임했으니 수천 분의 일 확률이라 모두 놀란다. 서울에도 같은 이름의 형님(?) 한 분이 시인으로 있다.
한데 한자까지 같은 자를 쓰긴 해도 전주 이 씨라 한다. 전주 이 씨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연의 일치’의 충격은 더해진다. 마지막 형님이 확실한 ‘동명이인’의 의미를 문단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파급시켰다. 그가 어떤 문학잡지를 발행하는데, 여럿에게 자연스럽게 원고 청탁을 할 수밖에. 혼선이 빚어지는 데 비례해 셋의 존재가 더욱 두드러지는 중이라 한다.
그러나저러나 형님은 서울 근교에 산다. 나 또한 형님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장사를 하는 터, 고향 국화전이 그리워도 자주 찾지 못해 안타깝다. 그래도 ‘국화전(菊花田)’은 내 지갑 안에 있어 그저 좋고말고!
이원우
KNN 부산방송 문화대상, 화쟁포럼 문화대상, 부산PEN문학대상, 경기PEN문학대상 등
소설집 『연적의 딸 …』 등 5권, 수필집 『어머니의 초상화』 15권, 기타 4권 총 24권
국제PEN한국본부 이사(가입심의 위원),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
* 위 약력을 꼭 그대로 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