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기 싫은 새
1)
배가 고파.
날기 싫은 새가 말했다.
"배가 고파서 날 수가 없어. 네 모자를 잠시 빌릴게."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원래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나였지만 이번 역시 배가 고프다는 그 새를 그냥 별 관심 없이 모자 위에 앉혀주었다. 그 새는 꽤나 말이 많았다. 병아리 만한 크기에 색깔도 노란 색이지만 윤기 흐르는 털을 가진 새.
"이봐, 이봐... 그쪽은 내 고향에서 너무 멀다고. 앞길로 돌아서 가면
금방 인데, 좀 돌아서 가는 셈치고 가주면 안되겠어? 어차피 여행자면서."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끝내 곧 약간의 신경질도 부리지 못한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0.6km만 가면 내가 잘 아는 오므라이스 가게야. 후회 안 할걸?"
오므라이스 따위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지만 갑작스런 그 새의 말과
반짝이는 눈빛에 어느새 오므라이스가 먹고싶다는 생각이 들게 됐다.
"이봐. 생각은 가면서 하라고!"
충고라도 하는 듯 한마디 내던진 채 그 새는 다시 모자위로 기어올랐다.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나는 그냥 귀찮다는 잡생각과 함께 오므라이스 집을 향해 걸어야 했다.
보다시피 난 여행자다.
꽤 오랜 기간 우리 고향에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여행중이다. 내게
이렇다 할 뚜렷한 지름길은 없었지만 목적지는 있었다. 그걸 볼 때 이
길은 내게 약간의 시간 낭비와 노자손실을 안겨줌과 동시에 약간 행로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일주일이면 끝날 직선거리를 약간 돌아가는
방향이었으므로.
꽤 걷다보니 새의 말수가 더욱 늘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몸집도 작은 게 그래도 여행자라고 자기와 동행하는 것을 큰 행운으로 알란다.
특히 이쪽 길은 꿰고 있으니 염려 말라고.
"내가 날기 싫은 경우는 딱 두 경우야."
"뭔데?"
"배고플 때랑 배아플 때."
하지만 난 곧 새에게 그 두 경우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오므라이스 집에 다다라 오므라이스를 먹고 다시 길을 나서 벌써 한나절이 지났는데도 그 새의 나는 모습을 나는 볼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오히려 당연시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 새는 좀 많이
먹는다. 오므라이스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쳐줘도 그 양은 지나치게
많다.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녀석이 나보다 많이 먹는 모습이란... 우리는 허름한 민박집에 다다랐다.
오므라이스 가게로 시작되는 그 마을은 작았지만 이것저것 볼 것은
많았다. 사실 조금도 후회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민박집에 집을 푼 뒤
마을 구경을 나갔다. 밤중에 구경하는 마을 경치가 기대되었다.
"같이 갈래?"
내가 처음으로 새에게 먼저 건 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기쁘다는 기색도 없이,
"혼자만 하는 구경은 외로울 거야. 나도 외로움은 좀 타는 편이지."
하고 말한다. 그리고는
"배가 아파."
날기 싫은 새는 변명이 많다.
"또…?"
2)
내 모자는 또 다시 그의 안장이 되었다. 새의 말이 되다니.
새와 함께 돌아본 그 곳은 풍족하진 않았지만 여유 로운 풍경의 마을이었다. 시장 안의 작은 다툼소리 정도는 정겨움으로 들렸고 오랜만에 느끼는 인간냄새가 나는 그런 곳이었다. 연신 고개를 돌려대며 시장 터를 구경하던 새가 말했다.
"난 개하고,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것들은 무식하거든."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묻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날기 싫어하는 새는 말했다.
"무식한 녀석들답게 짖어대기나 하고 걸핏하면 뒷다리로 여기저기
차기나 하고. 그런 무식한 녀석들은 정말 질색이야."
역시나 나는 말이 없다. 모자 위에 앉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친절을 베푸는 중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새는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한다. 새는 참 작다. 모자위로 느껴지는 무게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무언의 규칙으로 자리잡던 질문의 벽이 곧 그 무게도 없는
새로 인해 깨졌다.
"넌 왜 여행을 해?"
처음부터 시작한 버릇없는 반말이었지만 넓은 맘으로 참았건만 이제는 아예 '너'라고 한다.
"얼마나 한 거야?"
봇물이 터지듯, 새의 유난히 볼록한 양 볼 안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대답하기 귀찮은 것들뿐. 버릇없는 새는 내 눈치는 살필 필요도 없다는 듯 질문을 계속해댄다.
"어디로 갈 거야?"
이제 난 대답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스스로 지쳤는지, 아니면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는지 이제는 조건까지 내건다.
"넌 참 말이 없구나?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야. 말처럼 무식하진 않아서 다행인데? 내 질문에 대답해주면 내가 왜 날지 않는지 말해줄게.
어때?"
평소 같았으면 꿈적도 않는 나지만 계속 궁금해하던 차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날지 않는 건데?"
새를 만나서 내가 꺼낸 두 번째 질문이었다. 대답 따윈 해준 적도 없지만.
"우선 내 질문에 대답해줘야지. 여행은 왜 해?"
집요하기까지 하다.
난 답을 생각했다. 복잡하지 않고, 잘난척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대답을.
"나에게 있어 조건 없이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여행해도 다 못 돌아볼 만큼 세상은 넓었다.
한곳 한곳을 세심히 정복해 나가는 것, 걷는다는 것, 여행자가 된 이유...
하긴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것이 여행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말하기엔 너무 주제넘은 듯 했다. 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인간 같지 않아서 좋다, 야. 맘에 들었어! 앞으로 너의 여행해 동반자가 되어주지."
그건 말도 안 되는 발언이었다. 이렇게 교만하고, 잘난척하고, 건방진 새는 처음이었다. 말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지만. 더 이상 이런 새 따위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다음
해야 할 질문도 잊은 채 잠자코 있으니까 이 수다쟁이 새는 또 말을
꺼낸다.
"내가 왜 날지 않는지 궁금했지?"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이미 앞서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었다.
"왜 날지 않는 건데?"
새는 마침내 여태 하고싶었던 말을 꺼낸다는 양 잘도 이야기를 끌어냈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그의 말은 날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난 날기가 싫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이유는 수천 가지지만. 새가
날기 싫다고 하면 다들 비웃겠지? 새 주제에, 그나마 날개가 있으므로
제 몸 하나 건사한다고, 감사한 줄 알라고. 항상 그래왔어. 새는 약하다, 그래서 날개가 있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라고. 안 그래?"
정신없이 듣던 나는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인간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하지만 난 난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약자 취급당하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더군다나 너흰 잔인해,
안 그래?"
새의 말들이 너무 진실하고 간절하게 들렸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내가 잔인하단 말엔 인정해 줄 수 없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있자 새는
큰 눈을 굴리며 말했다.
"아니, 너희 인간은 잔인해. 우리를 약한 존재로 여기면서 왜 그렇게
총으로 쏴 죽이는 줄 알아? 그건 날기 때문이야. 어딘가 평화롭게 앉아있는 새는 쏘지도 않지. 놀라 도망가며 날아가는 우리를 무참히 쏘면서 쾌감을 느껴. 그게 바로 너희 인간들이야. 난 이유도 없이 죽어
널브러진 새들을 수도 없이 봤어."
새의 보라 빛 눈동자 아래로 뭔가 차 오르는 걸 바라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먹을 것도, 어디다 팔 것도, 돈이 궁해서도 아니라 그냥, 그냥 약하니까. 그런데도 살아 움직이니까 그래서 죽이는 거야. 그래서 죽는 거라고…."
말을 마치며 새는 울먹였다. 그 당당하고 잘난 척 하던 새는 사라지고 비로소 그 강한 겉모습 안에 숨기려 했던 약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래서 슬펐다.
"우리가…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그래서 쏴 죽이는 거야."
상처받은 새의 얼굴 모습이 마치 옛 일을 회상하는 듯 해서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검은 자수정 같은 빛을 내는 작은 새의 까만 눈동자에서 투명한 이슬이 몇 방울 흘러내리는 걸 보자 질문 주머니가 쑥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 애초에 넌 다른 인간들이랑 다르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는 내 작은 몸집도, 그리고 날지 않는 이유도 아무 문제
삼지 않았잖아. 우린 그냥 여행자일 뿐이야, 그렇지?"
새는 다시 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게 새 본래의 모습인지, 아니면 아까 봤던 모습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새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래, 우린 함께 여행중인 여행자야."
새의 얼굴이 기쁨으로 붉어졌다.
"오래 함께 할수록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거야. 그렇지?"
이번엔 그냥 미소로 답해주었다. 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새의
이야기는 짧지도, 길지도 않았지만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그 본래 풍경보다 훨씬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새는 분명 그 중요한 사실을 무척이나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 거다.
"혹시 모자 위가 너무 무거운 건 아니지?"
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걱정 말아. 내 느낌으론 넌 무게도 없는 종이 한 장 같으니까. 날기
싫은 새야."
나보다는 훨씬 멋지게 느껴지는 새에게 처음으로 다정한 한마디를
해주었다. 난 너무도 평범하고, 걱정 없고, 소박한 사람이라 나에게
일어나는 이 상황들을 어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난 걱정 없는 사람이라 걱정도 안되고, 복잡한 생각도 안 한다. 소박한 내 삶에 이 작은 깨달음과 선물처럼 다가온 새가 내가 만나고 봐왔던 모든 것들보다 소중하게 여겨졌다. 사실 뭔지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이 소중하다는 게 아닐까 한다.
평온한 표정의 새가 잠이 들었다. 그 작지만 너무 깊은 눈동자가 몇
번 끔뻑이다 스르르 감길 때는 내 눈이 감기는 듯 했다. 기껏 해봐야
내 손톱에 4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지만. 멀리 마을의 등불마저 꺼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 내가 가만히 새를 바라보고 있었나보다. 나도 하루를 마감했다.
3)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이거 원, 게을러서 같이 여행 못해주겠네.
해가 중천에 떠서 사정없이 내리 비추는데 아직도 양심 없이 누워있기야?"
건방진 새의 떽떽거리는-보통은 짹짹거리지만- 소리에 난생 처음 새벽 6시란 시각에 일어났다. 하지만 그예 만만치 않은 내 눈꺼풀은 뜨려는 동공 세포의 의지마저 무시하고 무심하게도 그만 덮어버렸다.
"한심하긴, 그 등치에 자기 눈꺼풀 하나 못 이겨? 빨리 안 일어나면
안 보여 줄 거야?"
무얼 보여 준다는 건지도 모른 채 나는 벌떡 일어났다. 침대 위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았는데도 떠지지 않는 무심한 눈꺼풀에 나는 그 길로
화장실로 향했다. 무작정 세수를 하자 그제야 떠지는 강인한 놈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길래 이 새벽에 사람을 깨우고 그래!"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이렇게나 긴말을 하다니. 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하지만 얼굴은 기대감에 차 있다-말했다.
"나는 거 보여줄게."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 새를, 기대하고 바라봤다. 새가 난다는 걸 이렇게 뚫어져라 기대하며 본다는 사실이 조금은 웃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말 기대되는 일이었다.
새의 무척 작은 날개 두 개가 퍼덕거렸다. 발이 곧 탁자 위로 떠오르더니 정말로 나는 것이다.
"봐, 날았다. 봤지?"
금새 탁자로 내려온 새가 말했다. 일어난 보람이 거의 없는 나였다.
그래도 일단은 안심이다. '날기 싫어하는 새'가 아니라 '날지 못하는
새'일까봐 내심 걱정했던 모양이다. 나는 제법 무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탁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겨우 그거 보여주려고 이 새벽에 날 깨웠단 말이지?"
"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
"새가 나는 게 뭐가 어때서 그걸 고민해?"
새의 표정 역시 나 못지 않게 무거워졌다. 또 다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나는걸 보고 너도 날 쏘고싶어지지 않을까 겁이 났어."
난 아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너라면 안심이야."
내 표정을 살피던 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감동 아닌 감동을 받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새는 타고, 또 타고
내 모자위로 올라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배가 아파' 하며 말이다.
4)
이젠 제법 익숙해진 새와의 동행은 이렇게 새가 내 모자 위로 타오르면서 시작한다. 새가 잘 안다는, 오므라이스를 잘 하는 가게가 있는,
오랜만에 정감이 느껴지는 이 곳을 오늘 떠난다. 내 목표인 고향으로,
꽤 먼길로 코스를 바꾼 것이 약간의 문제라면 문제지만 새를 만난 그
자체는 내게 전혀 손해 본 일이 아니었다.
여행을 오래 하다보면 이내 말수가 줄어드나 보다. 새와 나는 조용했다.
"사람들이 왜 다들 너만 쳐다보는 거지?"
꽤 번화한 도시에 다다라서야 새가 이상한 듯 물었다.
"너를 모자 위에 얹고 다녀서겠지."
그러자 새는 더욱 이해 안 된다는 투였다. 당연히 이상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는다. 사실 새가 말을 한다는 것도 아직도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구나 나와 대화를 하는 이 새는. 그리고
새는 또 덧붙였다.
"배가 아픈 친구를 돕는 건 당연하잖아."
서슴없이 친구라 말하는 그 새의 말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 마을에도 오므라이스 잘하는 가게가 있는지 어디 찾아볼까?"
"좋아. 내가 너보다 높은 곳에 있으니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약간은 거만한 대답이었지만 새는 곧 오므라이스 집을 찾아냈다.
"저기야, 저기."
이제는 또 배가 고파진 새가 다급한 목소리로 가리켰다.
지난 마을만큼 아름답고 깨끗하진 않았지만 사람들로 넘치고 활기
있는 거리 풍경에 우리는 신이 났다. 찾아간 오므라이스 가게는 담배냄새 하나 없이 향긋한 토마토 냄새와 허브 향으로 가득 찬 그런 곳이었다. 새의 것으로 오므라이스 한 그릇과 맥주 한잔을 시켜 기분 좋게
들이키고는 오므라이스집 주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이 마을의 명소는 어디이며, 여관은 어디가 좋은지 등.
외부 손님이 오랜만인지 듣기 좋은 목소리로 걸걸하게 웃어넘긴 사내의 말투가 시원스러웠다.
"여관은 널린 게 여관이요, 명소라면 이곳 자체가 명소지. 하하, 괜찮다면 여기 묵어도 좋고. 이 마을에서 제일 유
명한 곳은 오렌지 나무 공원이요. 퍼런 오렌지들이 잔뜩 열린 나무들로 가득 찬 그 공원에 가면 절로 싱그러워진다니까! 호수도 하나 있어
산책하기에 아주 그만이지."
"그럼 여기 묵도록 하죠. 한 사나흘 묵을 겁니다."
"그러쇼. 그래도 딴 데보다 아주 싸다구. 잘 온 거요."
털털한 주인장 덕에 오랜만에 회포를 늘어놓은 후 다시 배가 아픈 새를 모자 위에 낮고 주인이 안내하는 방으로 향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다. 맥주도 들이켰겠다,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5)
호프 집 주인의 말에 따라 이튿날은 호수 공원을 산책했다. 시끄러운
친구 하나를 모자 위에 얹히고서.
"이야, 저것 좀 봐. 물고기가 엄청 큰데?"
공원내의 분수대 속에서 주황빛으로 빛나는 잉어들을 보고 새는 호들갑떨었다. 숲 속에서만 살아온 새에겐 무척 큰 물고기로 보이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분수대는 계단식으로 물을 뿜어대고 있었는데 그리 커다란 것은 아니었지만 꽤 맑은 물방울들이 밝은 햇빛에 수정 알처럼 빛나며 튀기고 있었다.
"좋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렇게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네."
연거푸 칭찬을 늘어놓는 새의 목소리가 잠시 시끄럽게 느껴졌지만
이내 체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였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연거푸 달려드는 붕어들도, 싱그러운 불과 이름표를 반짝거리는 갖가지
나무들도. 사람들이 많은 것에 비하면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의 도시 내 명소였다.
"우리 내일도 여기 오자!"
새가 소리쳤다.
"하지만 내일은 오렌지나무-"
"이렇게 멋진 곳은 처음이야. 아, 저기, 저기!"
이젠 아예 말까지 끊고 외쳐대는 새였다. 하지만 그렇게 신나서 들떠있는 모습을 가라앉히고 싶진 않았다. 처음 보는 밝은 모습이었기에.
"어디? 어디라고?"
"저어기! 빨리!"
하지만 그것은 싱겁게도 제법 울창한 버드나무 한 그루였다.
"저게 왜?"
괜히 새가 설쳤다고 생각된 나는 김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마을 바로 입구에는 저거보다 훨씬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어. 가지도, 잎도 많고 특히 아주 커서 나무 자체가 하나의 쉼터 같은
느낌이 들어."
새는 잠시 조용했다. 이상해서 쳐다보니 새의 표정이 이상했다.
"저, 저기 이제 그만 돌아가. 나 아, 아픈 것 같아."
난 놀라서 걱정도 됐지만 잠시 당황했다. 새가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비록 말은 한다해도 단지 아픈 것 같다는 새의 말만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괘, 괜찮아. 여관에 돌아가면 괜찮아 질 거야."
걸음을 빨리 해 여관을 돌아갔다. 새는 자신의 잠자리에 힘없이 엎드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새가 작은 부리를 약간 움직였다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너무 불안해서 그 마을의 마지막 등불이 다 꺼지고 나서도
잠을 못 이루었다. 그리고 부산히 뒤척거리다 겨우 눈을 붙였다.
한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새의 말처럼 콕콕 쏘아대는 햇빛에 눈을
떠보니 새는 이미 깨어 있었다.
"일어났네? 왜 안 깨우고…."
눈을 비벼 대며 겨우 잠을 깬 나는 미동도 없는 새의 모습에 다시 한번 의아해 했다. 새는 창 쪽으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6)
"이곳을 떠나 제일 처음 만나는 숲이 바로 내 고향이야. 버드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깊숙이 잣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근데 어느 날부턴가 커다란 총이란 걸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내 고향으로 왔어.
하나둘씩 멋진 깃털과 몸체를 가진 새들이 그 총이란 거에 죽어가고
우리 가족과 친구들은 두려움에 떨었어. 그러던 중에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어. '좀 더 작은 거 없나? 큰 거만 잡으니까 원 싱거워서'
'그래 우리 누가 더 맞추는가 내기하자'.난 그게 분명 우리가 될 거라고 확신했어. 하지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됐는지 우리 가족과 친구들은 땅위에 발붙이고있는 그들이 빠르게 날아가는 우리를 결코 맞추지 못 할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사람만 만나면 재빠르게 날아올랐어.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됐는데?"
"제일 먼저 날아오른 순서대로 하나씩 붉은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떨어졌어. 그런데도 우리 가족은 또 다시 날아올랐고 그렇게 나만 남기고 모두 죽었어. 난 되도록 날지 않으면서 도망쳤어. 가지 사이들로
숨어 다니면서. 날면 죽는다는 걸 알아 차렸던 거지."
난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렇게 도망치다 도착한 곳이 너와 만났던 그곳이었어. 난 너무 두려웠고 널 처음 본 순간 도망치려 했었어. 근데 너는 그 사람들처럼
총을 들지도 않았고 더 이상 도망칠 힘도 없었던 나는 마지막이라 여기고 그냥 널 믿어 버렸던 거야.
새는 여전히 창 쪽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처음 새를 만났을
때 그 모습을 생각했다. 버릇없게 말을 건내던 모습이며 이것저것을.
"이제 다시 그곳에 도착하면 난 또 다시 그곳에서 지내야겠지? 어차피 우리의 여행은 나는 내 고향으로, 너는 네 고향으로 가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그제 서야 새가 왜 그토록 침울해 했는지 알아차렸다.
"많이 아쉬워… 이제서야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새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너는 아마도 많이 강해 졌을 거야. 나보다 훨씬 더."
그렇게 말하는 나도 어느새 몸이 새처럼 떨렸다.
"그럼 우리 오후엔 오렌지나무 숲에나 가볼까?"
금방 밝게 말하는 새의 얼굴이 빛났다. 오후를 기다리며 아직은 조금
침울한 듯 한 새의 표정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때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날 만나도록 도망쳐 살아줘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새의 존재에 감사했다.
이윽고 오후가 되고 그날 아침의 상황과는 너무도 다르게 맑은 날씨였다. 우리는 여관집 주인이 알려준 대로 호수공원 왼편을 따라 쭉 걸어갔다. 약간은 비탈져 동산의 느낌이 드는 길이었다. 조금씩 동산 넘어가 보이는 듯 하더니 거의 정상에 다다르자 초록빛 물결이 펼쳐졌다.
"세상에!"
새도 비명을 질러댔다
"정말 이게 나무들이야?"
너무도 빽빽이 들어 차있는 오렌지 나무들은 아직 익지 않아서 잎과
별반 차이 없이 퍼렇게 느껴질 정도로 아주 진한 초록빛을 뽐내고 있었다. 오렌지 나무 특유의 두꺼운 이파리가 햇볕에 반짝이자 마치 정글의 물결이 넘실대는 듯 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숲의 모습에 새와
나는 한동안 할말을 잃었다.
"언젠가-."
"뭐?"
"언젠가 이곳의 오렌지가 모두 익어서 아주 노랗게 변해 버릴 때쯤.
다시 한번 여기 와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다."
"그럼 우리 만날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나오는 새의 대답에 약간 놀랐다. 이제 출발하게될 다음 마을이 바로 새의 고향이었다. 아마 여기서 하루 더 묵고 간다 하더라도 내일 중으로 도착 할 것이다. 기분이 씁쓸해졌다.
"괜히 섭섭하네."
새는 내 말에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다시 작아졌다.
"나도 그래."
그렇게 여관으로 돌아오는 동안, 돌아와서 서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느라 고요하게 하루를 마감했다. 아마도 내일이 되더라도 더 나아지진 않을 것이다. 역시 얼마 눈도 못 붙인 채 깼다. 새는 또 혼자 일찍
일어나 짧은 다리로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뭐야? 아침부터, 뭐해."
"그냥…슬슬 떠날 준비해야지."
안 그래도 되는데 괜히 서두르는 새가 얄미웠다.
"천천히 해도 될 거 왜 아침부터 그래?"
"너도 빨리 고향에 가야 되고, 나도 빨리…."
섭섭한 기분이었다. 길진 않았지만 어젯밤 잠도 제대로 못 이루던 내
모습이 생각나 못내 서운했다. 나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짐을
쌌다.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던 새의 움직임이 잠깐 멈칫했다.
"나 한숨도 못 잤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너무 울 것 같아서……."
새의 말에도 나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묵묵히 짐을 챙겼다.
"빨리 가자. 지금 출발하면 점심때쯤 도착할거야."
난 일부러 더 서둘렀다. 그렇게 새와 나는 아침도 거른 채-먹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지만-새의 고향으로 출발했다. 이 마을에 머문 지 딱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왠지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가는 내내 착잡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던 나는 말 한마디하지 않았고 새도 몹시 피로한 기색으로 쥐죽은듯이 내 모자 위에 앉아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지만 곧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 기분마저 떨쳐버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슬픈 기분에 젖어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느린 걸음 때문이었는지 새의 고향 어귀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이을
때쯤이었다. 새의 고향이란 데는 그의 말대로 온통 버드나무 길과 잣나무 숲으로 어우러진 그냥 숲이었다. 야속하게도 내가 묵을 만한 여관 하나도 없이. 중간쯤 지나자 정말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제…."
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았다. 하지만 나는 못들은 척 무표정하게 계속 걸어갔다.
"내려 줘."
성급한 새의 말에 울컥 목이 메였다. 손바닥에 가득 싸이는 조그만
새를 조심히 쥐어 내렸다. 내 눈 높이 즈음의 버드나무 가지에 새를
올려주자 울고있는 새의 조그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난 너랑 계속 함께 지내고 싶었는데…. 하지만 너랑 나는 같이 있으면 안된 다는 걸 알았어. 네가 생각하는 어떤 이유도 아닐 거야. 그러니까 생각하지마. 네가 만약 계속 여행하는 그런 여행자였다면 나도
계속 너와 함께 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너도 곧 너의 마을에 정착할 테고 그럼 너도 나와 살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계속 말을 끊고 반문하려는 나를 막으며 새는 말을 이었다.
"내가 날아오르면 이 길로 곧장 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보지
말고. 명심해, 돌아 보면 안돼. 난 이제 잣나무 숲으로 갈 꺼야."
난 새가 몇 마디라도 더 해주길 기대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난 결국
단 한마디도 못한 채 그저 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높이 나는 새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새를 보며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도 모르게 날아오르는 새를 그대로 떨어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빨리 가! 뒤돌아보지 말고!"
새가 소리쳤다. 난 재빨리 뒤돌아 섰다. 그리고 성큼 성큼 걸어갔다.
파랗게 변한 내 얼굴 색을 새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새가 잣나무 숲 쪽으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만, 이상하게도 뒤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새와의 약속이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걸었다. 난 빠른 걸음으로 어두운 숲 속에 한줄기 빛을 따라 걸었다.
이윽고 숲을 벗어나는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탕'
그것은 분명 총소리였다. 연이어 나뭇잎이 후드득 떨어졌다. 사방은
쥐 죽은 듯 했다.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냥 멈춰서있는데
두 세 명쯤 되어 보이는 사냥꾼 무리가 숲 쪽에서 걸어나왔다.
"한동안 새들이 안보이던데 어떤 멍청한 새가 이곳에 들어왔나 몰라?"
"그렇지? 나도 그렇게 작은 새는 처음 봤어. 조금만 빨랐더라도 우리가 저녁내기에서 이기는 건데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하여간 그놈들 조그만 새 맞추는데는 도사라니까?"
"고것 참, 노란 게 색깔도 예쁘던데. 박제로 만들면 그럴 듯 할거야?"
난 사냥꾼들이 나왔던 어두운 숲 속 한가운데로 달려가고 시은 충동을 이겨내려 애썼다. 그리고 빌었다. 제발, 제발 그 숲 속 한가운데에
노란 깃털에 붉은 핏덩이를 묻히고 쓰러져 있을 그 새가 내가 아는 그
새가 아니기를. 그리고 쓸데없는 총성에 놀랐을 날 안심시키기 위해
방긋거리는 얼굴로 새가 다시 나와주기를 기다렸다. 야속한 내 눈에선 강렬한 한줄기 빛에 눈이 아파서인지 자꾸 이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쓸데없이 못생긴 내 손은 자꾸만 덜덜 떨렸다.
더 이상 퍼덕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7)
그 이후의 일은 잊어 버렸다. 인간은 워낙 잔인해 잊고 싶은 기억은
너무 빨리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아직도 가끔은 그때 그 사냥꾼들의 대화소리가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귓속을 맴돈다. 그때 그 사냥꾼들이 말하던 새가 바로 그 새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때 내 기분이 상당히 불안했다는 것, 총소리에 숨도
쉴 수 없었다는 것들이 아직도 내가 그 무언가를 확신하지 못하게 한다.
고향에 돌아와서 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인가 새의 얘기를 했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여행 중에 만난 아주 말 잘하는 새 친구가 있었다고.
새 주제에 날기 싫어하고, 건방지고, 남의 모자 위에 낮기나 좋아하고, 항상 배가 아픈 노랗고 윤기 나는 털을 가진 새 친구가. 역시 그들은 날 정신병자는 아니지만 허풍쟁이로 몰아갔다.
자꾸만 새를 잡고싶어했던 그때의 내 기분이 떠오른다. 나도 증오하고 인간도 증오한다. 나도 별 수 없는 인간이어서 인간을 증오한다.
그리고 반신반의한다. 지금도 그 어느 날 새와 함께 갔던 그 오렌지
나무 공원의 오렌지가 노랗게 익을 때면 새가 날 보러 오지 않을 까.
새의 깃털만큼 그렇게 노랗게 변해버리면 그때 그 약속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면서.
첫댓글 새가 말을 하는 것에 주인공이 좀더 의아심을 가지고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면 어떻게 그 새는 말을 하는지 또 그 말을 알아들을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하네요. 비현실의 세계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생긴 이유들을 자세이 묘사함이 좋을 듯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건필 하세요.
감사합니다, 고등학교때 썼던거 그냥 일부러 안고치고 올려봤는데 부족한게 많네요. 약간은 어른의 동화쪽이 요소가 강해서 새의 설명에 대한 부분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작품 읽고 평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