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리 외 1편
박수서
수선화는 피었지요?
불현듯 전화라도 하고 싶은 날입니다
수선화라고 말하면 누군가 부르는 것 같은,
상처도 때때로 입안에 담아두지 말고
입 밖으로 내몰아야 꽃 핍니다
아픔 한 잎이라도 날려버릴 수 있으리라
사연이 긴 벚나무가 귀찮다고 도리질을 하자,
꿀벌 한 마리 벚나무 아래 철쭉으로 내려와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은 질색이라고 귓속말을 합니다
마음 약해서 떠났답니다
안부
해남 어디 방앗간에서 만들었다는 들기름 한 병
한동안 아까워 아껴 먹다 언제부터 잊고 지냈나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막히지 않고 흘러가는 기름진 생도 아닌데
진득하게 고이는 기름이
기한이 있으면 또 어때?
김치라도 볶아서 두부에 올려 먹어야지
그렇게 한참이 지난 기한을 연명했고
결국 비워버린 들기름병을 버리지 않았어
버너 앞에 빈 병을 고이 놔두고
찌개라도 끓일 때 한 번씩 바라봤지
어느 날은 깨끗이 씻어 다시 빈 병만 올려놨지
들기름병에게 안부를 묻는다
퍽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너도 나처럼 속없이 잘도 살고 있냐고
― 박수서 시인, 『날마다 날마다 생일』 (생명과문학 / 2023)
박수서
전북 김제 출생. 2003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마구간 507호’외 2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박쥐』,『공포백작』,『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해물짬뽕 집』,『갱년기 영애씨』,『내 심장에 선인장 꽃이 피어서』 등. 사랑시집 『이 꽃 지고 그대 떠나도』. 시와창작 문학상 수상. 서민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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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서 시인의 이번 시집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파토스와 에토스의 시적 승화는 불혹에서 지천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현학적으로만 풀어 내지 않는데 있다. 개별적 현상을 보편적 서정으로 수용하여 시가 지녀야 할 치유의 기능을 잘 구현해내는 특징이 이번 시집에 오롯이 담겨 있다. 본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날마다 생일’은 어쩌면 시인이 자신에게 혹은 가족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고백하는 가장 소박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어려워지는 시대일수록 시는 결코 에토스 즉, 공감의 통로를 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시집에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김윤환 (시인, 문학평론가)
고독한 여행자는 시를 놓지 않고 무려 30여 년을 썼다. 그 시간 앞에서 나도 그도 어리둥절하다. 기실 어리둥절은 스물아홉에도 서른아홉에도 겪었지만, 마흔아홉의 어리둥절은 약봉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아홉수에 걸린 시들은 대체로 성찰적이다. 마흔아홉의 시인은 “시를 못 짓겠다고도” 생각한다. 긴 시력을 이어온 시인의 고백이 아프다. 그래, 그는 아팠다.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염증과 여러 병증들과 알약들. 수면장애와 불안장애. 그런데 그는 못 짓겠다는 시를 지었다. 시가 나왔을 게다. 그래서 약봉지 같은 마흔아홉에 쓴 이번 시집은 쓴 것이라기보다 쓰여진 시집이다.
―송기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