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 방산리 이산해 묘(비보를 하여 명혈로 개선되었는가)
1 이산해와 토정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토정의 조카로서 선조와 광해군때 영의정을 지냈고 문인(文人)이다. 5세때 병풍에 글을 쓴 신동이고 뒤에 이언적과 조광조의 묘비를 썼다.
* 토정이 10세때 할아버지 이장윤을 장사지내게 되었는데 지관이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토정의 3형제중 장.차남은 정승아들을 얻게되나 막내인 토정은 자식을 잃게 된다”고 말하였고 이에 형님(이지번 이지무)들이 망설였으나 토정이 자기를 개의하지 말고 쓰자고 강권하여 묘를 썼다. 그 뒤 형님들은 정승자리에 오른 이산해와 이산보를 낳았으나 토정은 자식 넷을 일찍 여의었다는 설화가 있다.(나는 토정의 부친 이치의 묘를 결혈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이산해를 이치 묘의 발복으로 보지 않는다. 토정의 가족묘 간산기 참조)
2. 이산해의 묘
* 중국---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산7-1에 있다. 광덕산이 태조, 봉수산이 소조산이다.
* 묘역---양주조씨와 단분합장이다. 외형상 보기로는 주산에서 내려온 맥이 높은 곳에 유돌을 이루면서 혈장을 만든 것같이 보인다. 안산도 가깝고 좋으며 방산저수지의 일부가 파구를 만들었다. 다수는 대혈이라 한다. 혈장은 원래 비스듬히 경사진 곳인데 입구에 연못(삼신선도)을 파고 그 흙을 옮겨서 혈장의 아랫 부분을 보토하여 평평하게 만들었다. 입구에 만든 연못은 헤픈 수구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위 이덕형과 아들 이경전이 조성하였다. 다수설은 이렇게 묘역의 아랫 부분을 보토하여 빈약한 혈장을 보완하고 연못을 파서 수구를 보완하는 비보(裨補)를 함으로써 명혈이 되었다는 것이다.
* 봉분 뒤에서 본 모습---
* 그러나 이곳은 혈이 맺히지 않는 느낌이 들고 관룡자로 재어 보아도 기운이 자주 끊어진다. 무엇 때문인가? 여기(餘氣)가 내려오는 모양이 혈처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이 곳과 같이 높은 곳에 혈이 생기면 밑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여기(餘氣)가 지각(枝脚, 일종의 전순이라 할 수 있다)을 만들어야 하고 지각의 모양은 적당한 경사를 이루고 넓어야 된다. 만약 높은 곳에 돌(突)의 형태로 생겼다면 아랫 부분에 수염이 달려 있어야 된다. 이 곳 혈처에서 아래로 내려간 지각은 경사가 급하고 좁고 뾰족하여 코뿔소의 코와 같이 생겼다. 위에 있는 기운을 끌어 내리는 모습이다. 대구서씨와 춘천 신숭겸의 묘와 비교해 보라.
* 밑에서 본 모습---
* 지각 지도---
* 대구서씨 시조 서한 묘---지각이 비교된다
* 춘천 신숭겸 묘---지각에 생기가 내려오지 않아야 된다.
* 이덕형과 이경전이 옥녀탄금형에 맞추어 연못을 파고 나무3개를 심어 三神仙島를 만들었다. 옥녀탕금형 이라고 하나 글쎄다.
3. 벼슬발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여건
* 이산해의 아들 경전이하 14세손까지 절손된 가정없이 대를 이었고 큰 벼슬은 못해도 작은 벼슬은 끊이지 않았다. 비보의 효력으로 명혈이 되었는가? 상당한 약효는 있었겠지만 등급을 격상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당시의 정치지형(地形)이 이산해 후손에게 정승급으로 올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 이산해(1539~1609)는 北人의 우두머리로 西人의 정철(1536~1594)과 대립하였다(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이다) 정철은 정여립 모반사건때(임란3년전, 기축옥사) 위관으로 조사를 맡으며 3년에 걸쳐 1천여명을 숙청하였는데 정적 이발의 80세노모와 어린 아들을 곤장으로 죽였다. 이 사건은 선조가 주동이 되어 왕권강화 목적으로 선비들을 숙청한 것인데 東人이 많이 희생되었고 조사가 악독하였던 것이다. 이발은 호남 명문가이었는데 일가족이 멸문당하고 이발문중원은 그 원한으로 지금도 고기를 썰 때 “정철 정철”이라 하고 정씨들과 혼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산해도 엮일 뻔하였으나 선조의 신임으로 화를 면했다. 이산해는 정철과 원수지간이 되어 뒤에 정철이 실각하자 사형에 처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서인의 처벌을 두고 동인은 강경파인 大北과 온건파인 小北으로 분할된다) 정철은 세자책봉을 건의한 건저사건으로 선조에게 믿보여 실각하고 1593년 명나라에 왜적이 조선에서 철수하였다는 허위보고를 한 죄로 강화도로 귀향가서 그 해 굶어 죽었다. 주색에 망가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민심을 잃어 현지인들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동인은 광해군이 1608년 즉위할 때 적극 지지한 덕으로 이산해의 大北이 집권하였으나 1623년 서인이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북인의 씨를 말렸다. 다행이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은 당색이 약하여 살아 남았다. 숙종때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할되고 정조 사망후에는 특정 외척 가문이 주도하는 세도정치가 정착되었다. 대북의 수령인 이산해 가계는 서인의 집권기간과 외척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출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묘가 명당이라 하더라도 발복이 기대되는 2~5세 후손까지는 정치지형이 불리하여 인물이 날 수 없었다고 본다.
* 방산저수지 아래에 아계의 12대 후손 수당 이남규고택이 있는데 아계의 청상(靑孀)이 된 손자며느리가 1637년 건축하였다. 수당은 일제시 부자(父子)가 함께 순국하였다. 수당으로부터 4대(증손 이장원은 해병장교로 6.25때 전사)가 훈장을 받았다. 선비기상이 연연히 이어진 존경받을 가계이다.(2023.7)
첫댓글 풍수에 대한 진념이 대단하십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현장을 직접보고
분석하는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풍수에 답은 없습니다!
개인이 생각해서 명당이면 명당인거죠
혈은 결국 본인의 선택이 아닐까요?
조선 8대 명당도 지관마다 다르니
각자의 기준이 중요하겠죠
풍수는 답이 없다 단정 하시는 것은 너무 앞서 가시는것 아닐까요.
왜 답이 없을까요. 저가 생각하기엔 아직 혈을 찾을수 있는 단계의
부족함이 아닐런지요..과연 우리는 풍수지리학문이 어디쯤 와 있는
지를 가끔 자신에 자문을 하곤 하지요..
그 뜻으로 문.견.험.각.행.당의 지법을 상기하곤 합니다.
아무리 천번을 듣고 만번을 본들 경험이 없고 자연의
이치를 터득 못한다면 과연 명당의 혈을 찾을수 있을런지요.따라서
풍수는 답이 없다 단정하시는것은 풍수를 사랑하시는 분들에 대한
실망을 드리는 말씀으로 조심스럽습니다..지관마다 기준이 다른것
은 찾는 능력의 차이겠지요..열심히 하면 풍수는 답이 있다라는 정
답을 득하게 될겁니다..호산가인님의 쓴소리 잘 새기겠읍니다..^^
@지향 이정호 지금까지 같은 묘지에 대해 지관들마다 동일한 결론을 본적이 없어서요.
그래서 명당찾기 이전에 명사를 먼저 찾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산가인 네.. 지관.교수.박사라는 분들은 많지만 그분들중에 과연 혈을 소점 할수 있는분이
몇분이나 되실런지??? 호산가인님이 언급을 하셨듯 진정한 명사를 만나는것은
큰복이겠지요..지사가 땅의 선생이라면 교수.박사란 개안의 법안.신안의 경지에
입문하신 분들을 일컬어 신의 영역에 계신분들을 말함인데...음.양택의 감정이
다르다면 아직도 기와 진혈을 소점하기엔 미완성으로 동일한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라고 봅니다..
풍수란 개안이 어렵고 무언이 어렵다 했읍니다. 기와 혈을 찾지 못한다면 아무리
언변술. 문장술.실전경험이 많다해도 묘지 간평시 오답이 내려지는것은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진정한지사지관. 교수.박사님 이시대가 요구하는
희망의 끈 아닐까요..풍수정답은 있는데 이 정답을 낼수있는 지관이 없다....^^ ^^ ^^
.
일전에 가보니 혈장은 좌선혈장으로 혈은 맺혔으나 인좌신향으로 좌향을 잘못잡아 혈심에서 벗아난것으로 보입니다
좌향을 정하는 방법에서 중요한것은 용진혈적. 태식잉육, 풍수지리오결의 균형조화를
중요시해야 되겠지요..용세와 국세를 이룬곳에 명혈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좌향설정 기준은??? 혈의 가상점에서 현무 산봉을 수차래 용맥의 맥로를
찾아 지각요도 몇절룡으로...1절룡과 입수 입혈맥의 폭과 기측정. 천산72룡.투지60룡.
좌우선용에 의해 1차적으로 좌향을 정한 다음 득수와 파구 수격에 의한 의수입향의
패철론의 용수격. 사대국포태법에의한 좌향론을 대입 한다면 신장 이장시 좌향 설정의
오류는 없을 것으로 사료 됩니다..간혹 혈의 중심과 봉분의 위치가 벗어나거나 상이 한
것은 래룡맥과 풍수지리 오악을 잘 인식하지 못하여 오류가 발생 했다고 생각이 되고
혈이 결지 되었드라도 좌향이 잘못되면 혈처를 버리는것과 같다는 말 명심해야 된다고
봅니다..인혁님의 말씀을 토대로 표현해 보았읍니다..감사합니다..^^
예, 조선 8대명당의 내용도 다르고 혈처가 아니라는 견해조차 있으니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모르겠어요 ^^ ^^
8대명당은 어느분이 정했는지요.. 명당이 아니라는 분은 또
누구신가요. 풍수영양 공청회라도...자칫. 호산가인님 말씀
되로 풍수는 답이 없다가 정답?????...이러한 논쟁 뒤에는
반드시 풍수지리학이 새롭게 진일보 될수도 있으리라.....
하남촌장님
노고에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수고 하셨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