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린 & pH-1 - Nerdy Love
사랑의
타이밍이
어긋나면
3
1.
알람소리 없이 일어나는 하루는 끝내줬다.
"딸 일어났어?"
"할머니는 필테 가셨어?"
"응. 한시간 더 이른 반으로 옮기셨잖아. 나와서 밥 먹어."
할머니는 10시 요가반에서 9시 필라테스반으로 옮기셨다. 아빠는 내게 관리인 업무를 위임해준 이후로 요리학원에 다녔다. 나날이 늘어가는 요리실력이 나물반찬에서 드러났다.
"오늘 보일러 시공 기사님들 오신댔지? 얼른 먹어. 그 양반들 말한 시간보다 한시간을 일찍 오니까."
"신기하네. 맨날 다들 늦게 오시는데."
아빠는 별걸 다 기억했다. 슈퍼 아주머니가 매주 수요일에는 스피닝 하고 오느라 한시간 늦게 여는 것도, 보일러 시공 아저씨들이 시간보다 한시간 일찍 오는 것도, 다 줄줄이 꿰고 있었다. 관리인을 하면 건물 관리에 꽤 많은 인맥이 필요하다고 했다. 게다가 건물 상태가 쾌적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할머니의 등짝 스매싱이 날라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어머니한테 많~이 많았지."
"난 알아서 잘할게."
"그래. 다 먹었어? 난 오늘 서울 갈 일 있어서 점심 저녁은 혼자 먹어야겠다. 어머니도 필라테스 회원분들끼리 어디 가시나봐."
다들 나름의 이유로 바빴다. 그리고 나도, 나름 바쁘고 알차게 살았다. 아빠가 마련해준 중간 크기의 크로스백을 멨다. 보조배터리, 태블릿, 마스터키, 업무노트까지 다 쑤셔넣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이제 아빠없이 부딪히는 건물 관리인의 첫 시작이었다.
2.
"안녕하세요 사장님들!
중년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싹싹하고 밝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당차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예전 중고등학교 때 잘 생각해보면 사고쳐도 계속 치대는 애들을 좋아하는 선생님들처럼 말이다.
"사장님. 아무래도 오늘 내로 원인 찾기는 어렵겠죠?"
"아무래도 그렇지. 여기까지 뚫어봤는데 안나오는거면 장판 디배서 싹 봐야돼."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점검할게요. 어차피 건물 외벽으로 심각하게 물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서, 제가 오늘 입주자분들한테 문자 돌리고 내일 아침쯤 와주시겠어요?"
"그래요 그럼. 사장님은 어디가셨고?"
"이제 제가 하죠! 물려받았잖아요!"
며칠 전부터 건물 외벽에 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했다. 완전 심한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냥 두면 웅덩이가 조금 생길정도로 쌓였다. 아빠말로는 재작년쯤 보일러실 공사한 게 뒤틀린 거 같다고 했다. 장판 뒤집고 보일러까지 까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공 사장님들께 음료수와 시공비를 쥐어드리고는 내일을 기약했다.
이제 고민이 생겼다. 사실 오늘 공식적인 일은 이거 하나가 끝이었다. 입주자들의 다른 건의사항도 없었고 혹시 모를 건의에 전등 같은 것도 다 새거로 사서 창고에 넣어두었다. 아직 오후 한시였다. 회사 다닐 때는 이때쯤이면 점심 급하게 먹고 "점심시간을 두시간으로 늘려달라!"라는 생각을 하면서 분노의 양치질을 할 때였다. 역시 남의돈 벌 때가, 제일 별로다.
"진짜...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나."
평화. 라고 생각하다가 바로 접었다. 전 애인과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내가 입주자가 아니라 관리인이라니.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아빠는 입주자들의 빠른 불만 해소를 위해서 단톡방도 만들어놨다. 당연히 거기에는 지성씨도 있었고, 이제노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빠질 수 없었다.
"안되겠다."
낮잠이나 퍼질러 자려고 했는데 잠이 확 달아났다. 이제노한테 추하게 매달리는 내 모습. 바닥에 엎어져서 다시 안만나주면 죽어버릴거라고 엉엉 우는 모습. 과거의 나도 참, 나였다. 정말 부끄러움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이제노 얼굴을 다시 못볼 각오로 저지른 짓이기에 이렇게 만날 줄 몰랐다.
"그냥 카페나 가자. 안되겠다."
이렇게 거실에 대자로 엎어져있느니 카페가서 책을 읽든 노트북으로 메이플을 하든 뭘 하는게 나았다. 지금 이러고 있으면 분명 잠도 안오고 잠에 들었다해도 이제노 꿈을 꿀게 분명했다. 급하게 노트북과 가방을 집고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이상하게 오늘은 걷고 싶었다. 어차피 5층인데다가 환경 보호도 할 겸 걸었는데,
"...씨발."
그냥 엘리베이터 탈 걸. 내려가다가 현관문에서 나오는 이제노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목례를 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여주야."
뒤에서 부른다. 세상에나. 이제노가 날 부른다.
"와~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노씨! 오늘 하루도 아자아자 화이팅! 빠샤빠샤!"
매드클라운 저리가라 폭풍 아침인사 랩핑을 보여준 후 1층 카페로 튀었다. 헉헉거리면서 들어갔다. 지성씨는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뛰어..오셨어요?"
"아. 아뇨. 뭔가 못 볼 걸 봐서요...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메이플이나 해야겠다. 원래 잡생각을 없애는 데는 게임이 최고였다.
3.
"지성 씨 손이 왜이렇게 텄어요."
"원래 카페하면...이렇게 튼대요."
어쩌다보니 늦은 점심을 지성 씨랑 같이 먹었다. 오후 알바생이 올 때 지성씨는 늦은 점심을 먹는데, 콩나물 국밥을 먹으러 가는 걸 동행했다. 앞치마도 안벗고 가려는 걸 내가 물었다. 지성 씨 앞치마 입고 밥 먹으러 가게요? 아....아..맞다! 하여튼 귀여웠다.
"그럼 혼자서 다 운영하는 거예요?"
"원래 부모님이 운영하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어머니 건강이 안좋아지셔서 일단 계약은 했으니까 제가 하고 있어요."
"효자네 효자. 하긴 권리금까지 다 줬는데 무르기는 아깝죠."
지성 씨 참 밥을 햄스터마냥 오물오물씹네. 지성씨는 밥 먹는 거도 버거워보이는데 내 물음에 성실히 대답해주고 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개귀여워.
"그래도 혼자 운영하는 거보다는 알바생이나 직원 쓰는 게 낫죠?"
"네. 혼자 하면 아무래도..어깨가 좀 무거워요."
"다 알바분들만 써요? 아니면 직원도 있어요?"
"다음 주부터... 직원 출근해요. 사촌형이 제과제빵 쪽에 일해서 도와주기로 했어요.."
"와 그래도 직원 쓸 정도면 꽤 수익이 괜찮나봐요 화이팅. 그런 기념으로 밥은 제가 살게요."
"어..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미 샀어요."
아...안되는데. 끙끙대는 모습도 귀여웠다. 하지만 이렇게 안면을 터둬야 나중에 관리인으로 만나는 공적으로든 아니면 사적……으로도 편할 거 같았다.
"먼저...들어가실래요?"
"왜요? 같이 들어가요. 같은 건물이잖아요."
"우체국 갈 일이 있어서...."
지성씨는 아까부터 손에 연두색 봉투를 꼭 쥐고 있었다.
"편지예요?"
지성씨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펜팔친구한테 보내야해서......"
"같이가요. 괜찮죠?"
2020년에 종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니. 감탄스러웠다. 입에 주먹을 넣고 꽉 깨물고 싶었지만 나는 지성인이라서 참았다. 우체국은 걸어서 20분정도 걸렸다. 거리에 놓인 나무들은 노랗게 물들었고 대게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단풍이 되었다. 이미 떨어진 애들은 발에 밟힐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성 씨."
"..네?!"
"언제 한번 고구마튀김에 맥주 한잔 할래요?"
낙엽 밟는 소리가 튀김 소리여서 그런 건, 절대 맞다.
"..좋아요."
"술 싫어하면 콜라도 좋고, 탄산수도 좋아요."
이상하게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지성 씨라면 저 편지에 마음을 눌러담아 꾹꾹 쓰겠지. 나도 다음에 편지 같이 교환하자고 할까, 말하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급 접었다. 안좋은 기억을 되살릴 필요는 없었다.
"보내고 와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네...!"
가을 바람은 꽤 쌀쌀했다. 트렌치코트를 꺼낼 새도 없이 겨울이 오고 있음을 증명했다. 지난 봄, 여름에 열심히 축적해놓은 옆구리살이 빛을 발할 때였다. 계속 일에 시달려서 외로움이라는 게 뭔지 모르다가 요새 점점 실감하는 중이었다. 삶이란 뭘까. 인생은 왜 살아가는 걸까. 이런 관념적인 질문을 하는 것보다는 메이플스토리 출석체크를 하는 게 훨씬 더 나았다.
4.
정말 안보려고 했는데, 정말인데!
좋아하는 작가님 책 출간알람이 왔다. 알라딘 앱을 키자마자 보이는 건 최애 작가님과 그리고 이제노의 사진이었다. 다섯 작가분드이 모여서 길고양이에 대한 초단편을 쓰는데, 구매욕구가 들었다가 사그러들었다. 최애작가님은 정말 좋지만, 이제노라니. 일부러 이제노한테 돈 벌어다주기도 싫어서 걔가 들어간 책이나 문예지는 사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요새 마주친 이후로는 마음이 조금 풀려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더 예뻐지고 잘생겨진 얼굴에 과거가 미화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혹시 다르지 않을까? 싶다가도 앞에서 뚝딱거리는 날 보면서 희망을 접었다. 어차피 과거는 과거였다. 더 담담해질 필요가 있었다. 20대 중반인데! 어른답게 성숙하게 행동하자 김여주!
이제노에 대한 건 본능적으로 거부했었다. 헤어지고 난 후에 보일 때마다 족족 트위터 단어차단 먹이듯 다 '관심없음', '이 컨텐츠를 추천하지 않음'을 눌러댔다. 덕분에 내 알고리즘에 청소년 소설 작가 이제노라는 건 하나도 뜨지 않았지만 문득문득 궁금했다. 대학 동기들을 전해전해 들려오는 소식까지는 차단할 수 없었다.
검색창에 이제노만 쳐도 나온다. 아니 머글처럼 다음이나 네이버에 치지 않아도 유튜브나 트위터에 쳐도 잔뜩 떴다. 이제노 자체를 덕질하는 사람, 글을 앓는 사람, 수많은 인터뷰와 자료들이 넘쳐났다.
이제노 (청소년 소설 작가)
2018 청비 청소년문학상 장편부문 당선 |
두 번째 청소년 소설도 스터디 셀러, 이제노 열풍 |
이제노 작가 『농구공이 그쪽으로 건너가는 순간』 넷플릭스 오리지널 제작 |
이제노는 승승장구했다. 본래 전공과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예전에 편지를 주고 받을 때나 연락할 때나, 말 할 떄 꽤 문학적인 감성이 있구나 드문드문 생각은 했는데 등단까지 할 줄은 몰랐다. 애들이 이제노의 소식을 내 눈치보면서 전할 때 흐린 눈과 흐린 귀로 열심히 차단했지만 나도 얼핏얼핏 알고는 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잘나갈 줄은 몰랐다. 우리 건물 세 꽤 비싼편인데 혼자 들어와서 사는 거보면 말 다했지 뭐.
화면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계속해서 정보가 쏟아졌다. 그러다가 한 인터뷰에서 마우스 휠을 멈췄다. 인터뷰 제목은 누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릿터에서 한 인터뷰였다. 스크롤 크기가 작은 걸보니 꽤 긴 인터뷰였다.
[이제노가 문학으로 건너온 순간]
이렇게까지 열심히 읽을 생각은 없었다. 이제노는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에 밀란 쿤데라나 버지니아 울프 이름을 언급하고 그 작품의 깊이와 인물, 구성까지 얘기했다. 진짜 열심히 독서하는구나. 나는 이제노가 독서하는 시간에 열심히 주식창 보면서 단타 쳤는데, 갑자기 인생 헛산 거 같은 기분도 들었다.
Q. 마지막 질문이에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거 같네요. 첫번째 작품에서도, 두번째에도, 그리고 작업 중인 소설에서도 작가님의 주인공들은 긍정적인 감정을 두려워해요. 특히 사랑을요. 제노 작가님께 사랑은 뭘까요? |
A. 끝나는 선이요. 사랑으로 건너가는 순간 끝난다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도 사람이든 사물이든 좋아하는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죽도록 노력해요.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싫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냥 이게 저인 거 같아요. |
좋아하는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죽도록 노력해요. 이제노의 인터뷰 말이 계속 귓가에 멤돌았다. 그러면서 이제노가 나를 찼을 때 했던 말도 함께 떠올랐다. 여주야 너를 더이상 사랑할 수 없어. 겨우 잊었던 자괴감이 몰려왔다. 여태까지는 웃어넘겼지만, 그때 느꼈던 아림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어!"
"놀라셨어요..? 죄송해요. 이거 드시라고..."
현실로 꺼내준 건 지성씨였다. 르뱅쿠키라며 한조각을 접시에 담아 건넸다.
"아..아까 사촌형이 일찍 와서, 시험 삼아 구웠대요. 편하게 드세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래, 어차피 지나간 일 잡고 있으면 뭐해. 르뱅쿠키를 한입가득 넣었다. 통째로 씹히는 호두와 아몬드. 청크초코칩 가득넣은 이 맛은. 어?
나는 주머니에 쑤셔넣은 핸드폰을 꺼냈다. 익숙한 맛이었다. 매일 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요즘 뜸하긴 했다. 나는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 앞에 봐봐.
믿기지 않았다.
"..뭐야? 뭐야 너 왜 여깄어?"
재민은 냉판을 들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전화를 채 끊을새도 없이 재민이 내 앞으로 와서 서있었다. 지성 씨는 카운터에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카페하는 사촌동생 있다고 했잖아."
"..지성씨?"
"응. 우리 쮜송이."
웃음이 터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란했던 마음이 풀렸다. 무언가 좋은 징조 같았다. 지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커피를 들고는 재민에게 건넸다.
"...두분..아는 사이..예요?"
"응."
"엉."
나는 노트북을 시원하게 접었다. 그래 과거 인연은 새까맣게 새하얗게 지우자! 정말 끝이다! 나는 앞에 놓인 르뱅쿠키를 한입에 다 집어넣었다. 재민이는 하나 더 주겠다며 접시에 더 얹어주었다. 미련은 호두처럼 와그작 씹어서 넘겨버리면 됐다.
첫댓글 내주식 지성아 밀어붙여 아자아자아자자자자ㅏ
ㅠㅠㅠㅜㅜㅜㅜㅜㅠ아 너무재밋어요...
와 지성이 재민이 사촌동생이었구나 지성이 되는 주식인가봐 밀어붙여!!!!!!!!!!! 여주 차일 때 제노한테 들었던 말이랑 매달렸던 거 생각하면.... 남주는 지성이 하자 ◠‿◠ 아 너무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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