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롱베이.하노이.앙코르왓 여행을 다녀오다 2006.10.29~11.3 금년도 사삼회 두번째 해외여행으로 베트남의 하롱롱베이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왓을 다녀왔다. 동남아여행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이 두곳 여행지는 누구나 선망하는 코스로 계절상 가장 좋은 시기랄수 있는 11월초 로 확정하고 클럽 공지사항으로 공개모집을 하여 22명이 확정,출발하게 되었다. 10월29일 일요일 오후 5시30분에 인천공항에 모이기로 하였다. 시간이 되자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 다. 늘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부인들이라 언제봐도 반갑기만 하다. 우리일행을 태운 아시아나 항공 733편 은 저녁 7시50분이 되어서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착지인 하노이까지는 4시간이 걸리고 시차가 두시간 있어서 밤 10시15분경에야 도착하였다. 한국시간 으로는 12시15분이니 첫날부터 강행군인 셈이다. 숙소로 가면서 가이드의 베트남에 관한 간단한 브리핑과 내일 스케쥴에 관해 안내가 되었는데 스케쥴이 빡빡하다. 아침기상이 5시반이라니-- 아침 7시에 호텔을 나섰다. 일찍 서둘러야 길이 덜 막힌다고 한다. 하롱베이까지는 4시간이 걸리므로 부지 런을 떨어야 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워인지 도로에는 온통 자전거와 오토바이 물결이다. LG프랑카드가 붙 어 있어 반갑기도 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한국의 대기업들의 활약이 눈에 선하다. 베트남 하롱베이/하노이편 베트남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 가는 도중에 베트남에 관해 여러가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쪽에 S자 모양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지도를 보면 용이 거꾸로 서 있는 모습이다. 면적은 약33만 평방 KM로 인구가 81.600,000명이나 된다. 사회주의국가로 불교가 80%를 차지한다. 수도는 정치 문화의 중심지인 하노이市이다. 전국 4개시(하노이,호치민,하이퐁,다낭)와 57개성에 54개 민족이 살고 있다. 이나라의 또 하나의 특징은 孝를 중시한다. 갤럽에서 조사한 바로 부모를 포함한 어른恭敬度 조사에서 한 국 청소년이 17%를 얻은 반면 베트남 청소년은 무려 95%를 나타낸다니 가히 禮儀之國은 베트남이 단연 앞선다. 여행의 필수- 몇마디의 베트남 인사말부터 / 중국말이 4성어인데 베트남말은 6성조라니 무척 어렵다. 안녕하세요? : 씬짜오/Xin chao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 씬 깜은/Xin Cam on 죄송합니다,실례합니다 : 씬 로이/Xin loi 그외 부를때(여보세요) : 에머이, 깎아주세요:잠자, 얼음주세요:쮸다냐 화장실:야배신 혹은 WC(세계에서 한국과 베트남만이 공통어로 사용) 하노이 시내를 통과하면서 느낀점 -오토바이군단과 마스크쓴 여인들- 온통 오토바이와 자전거군단이 길거 리를 완전히 메우고 있다. 메뚜기떼라고 표현 한단다. 걸어다니는 사람은 외국인 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리고 동남아 특유의 게으름은 볼 수 없고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정신없다. 꼭 한국의 거리 같다. 오토바이는 필수자가용으로 하도 많아서 1가구1대로 제한하는 정책을 사용하는데도 불법차가 많다고 한 다.먼지가 많아서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공해방지 목적도 있지만 여성들의 햇볕 가리개인 셈이다. 여성의 활동이 눈에 띄게 많다. 베트남 중에서도 북쪽 여성들은 매우 활동적인 반면 남자들은 노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30분을 지나니 하노이시 외곽과의 경계를 이루는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가이드가 손으로 가리키는 강이 홍강이란다. 중국의 장강이다. 중국,라오스,캄보디아,태국을 잇는 장장 1,600KM나 되는 대 하천이며 베트 남에서 만 600KM를 흐르며 2,600개의 지류를 이룬다. 베트남을 일명 "신이 내린 축복의 땅"이라고 한다. 자원이 너무나 풍부하다. 베트남은 쌀농사(4모작이 가능)가 주류룰 이루며 세계 쌀생산 4위, 수출 6위의 국가이다.사탕수수,땅콩,옥 수수,코코넛,커피,차,노니 등 농산품이 풍부하고 석탄,천연고무(라텍스), 석유가 많이 난다. 버스로 달린지 두시간만에 태극기와 쉼터라는 한국이름 간판이 있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화장실겸 잡화매 장이 있고, 이곳에서 건강식품인 노니를 시식판매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끊임없는 안내멘트가 이어지고- 드디어 대망의 하롱베이가 눈 앞에 펼쳐진다. 버스에서 내려 유람선을 탄다. 하롱베이 [Ha Long Bay] 중국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넓이 1,500㎢에 이르는 만이다. 베트남 제1의 경승지로, ‘바다의 구이린[桂林]이 라고 불린다. 1962년 베트남의 역사·문화·과학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 그 아름다운 경관으로 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 계유산 목록 가운데 자연공원으로 등록되었다. 석회암의 구릉 대지가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닷물이나 비바람에 침식되어 생긴 3,000여 개나 되는 섬과 기 이 에메랄드 그린의 바다 위로 솟아 있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을 이루고 있는 작은 섬들, 환 상적인 동굴이 있는 섬들이 기후나 태양 빛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과 빛깔을 미묘하게 바꾸는 광경 등이 절경을 이룬다. ‘하(Ha)’는 ‘내려온다’, ‘롱(Long)’은 ‘용’이라는 뜻으로, ‘하롱’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라는 의미이다. ‘하롱’이라는 지명은, 바다 건너에서 쳐들어온 침략자를 막기 위해 하늘에서 용이 이곳으로 내려와 입에서 보석과 구슬을 내뿜자, 그 보석과 구슬들이 바다로 떨어지면서 갖가지 모양의 기암(奇岩)이 되어 침략자를 물리쳤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긴 세월에 걸쳐 자연이 조각해 낸 기묘한 이 조각의 세계에는 개·귀부인·물개·사람머리·엄지손가락 등 이 이 붙어 있는 기암만도 1,000여 개나 된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사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 무인도이지만, 많은 종류의 포유동물과 파충류, 조류가 서식하고 다양한 식물상이 존재 한다. 주로 바문섬과 캣바섬에서 열대림이 발견되며, 바다에는 1,000종 이상의 어류가 있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섬들에는 종유동(석회암동굴)이 있는 곳이 많다. 수억년의 세월에 걸쳐 석회를 머금 은 물은 천정으로부터 종유석을 흘려 내려보내고 바닥에서는 석순을 쌓아올렸다. 몇 개의 섬에서는 450 년 전의 잘 다듬어진 돌도끼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베트남 본토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는 돌도끼였으며 , 혼가이섬에서는 호아빈 문화로 알려진 1만 년 전 인류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해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외국인을 포함하여 100여 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진에서만 보던 하롱베이를 실제 눈으로 보는 그 아름다움은 글로 표현키가 어렵다. 에메랄드 바다에 떠 있는 유람선과 그 뒤 배경으로 기암괴석의 바위섬이 각기 제 모습의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사열하듯 늘어 서 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호수처럼 파도가 전혀 없고 안개가 조금 있었지만 경관을 감상하는데는 전 지장이 없었다. 도리어 먼 수평선에 늘어 서 있는 바위들은 아련히 보이고 가까이 갈수록 선명하게 다가와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모두들 어린애마냥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다. 선상위로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어댄 다. 어디를 배경으로 하더라도 모두 걸작품이 나온다. 과연 하롱베이는 최고의 풍경 명승지 다웠다. 하롱베이만은 3천개의 섬으로 되어 있고 그 중 오늘 유럄선으로 둘러보는 700개의 섬이 세계문화유산으 등재되어 있는 관광코스이다. 섬이 많아 자연히 파도가 없고 파도가 없으니 해저에 있는 물고기들이 올라 오지 않아 갈매기도, 낚시꾼도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유람도중에 선상파티가 있었다. 옵션으로 들어있는 다금바리와 선상씨푸드를 단체로 시켰다. 다금바리는 열대지방의 심해에서 낚시로 잡는 희귀 고급어로 제주도에서는 1kg에 15만원~20만원하는 고급어이다. 이곳에에는 1kg에 30불이니 엄청 싼 편이다. 회를 뜨면 1kg이 실제 300g이 고작이란다. 다금바리 외에 황 금돔,새우류,조개류,랍스타 등 푸짐한 해산물에 한국서 가져간 소주 그리고 이곳의 전통술까지 곁들 여 포식하였다. 배가 유람 도중에 닿은 곳은 석회암동굴이 있는 섬이었다.배에서 내려 예쁜 꽃들이 만발한 섬계단을 따라 오르니 웅장하고 규모가 큰 동굴입구가 나왔다. 지금껏 다녀 본 동굴은 모두 지하였는데 이곳은 도리어 계 단을 타고 올라가서 입구가 있었다. 여늬 동굴과 같이 기기묘묘한 석순의 모습에 신기하기도 하고 가이드 의 이상한 설명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무꾼과 선녀동화에 나오는 선녀가 하늘로 오르기 위해 옷을 벗은 나체의 선녀모습이 있고 그 맞은편에 부처가 곁눈질하며 침을 흘리고 보는 모습 설명에는 배꼽을 잡았다. 하롱베이관광을 마치고 숙소인 하노이로 오는 도중에도 가이드의 마이크는 여전히 살아 있다. 베트남전에 참가한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라이따이안(현재 2,000명이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베트남처녀의 한국 농촌총 각과의 국제결혼문제 등 관심사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베트남은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전쟁이 계속되고 늘 지배를 당하면서 역사가 이어져 왔다. 1,000년의 중국 지배, 100년의 프랑스 식민지, 3년의 일본침략 식민지,그리고 월남전으로 인해 10년간 미국의 지배하에 있 었다. 그런 중에서도 중국과 프랑스에 대한 감정은 좋은 편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대단하다 한다 미국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못한 편이라고- 월남전에 참여시 중부의 학살사건과 관련 한국에 대한 감정 이 아주 좋지 못했으나 지금은 굉장히 호전되었다 한다. 그 배경에는 한국의 한 기업(포스코)이 중부지방에 초등학교를 50여개를 무료로 설립하고 지역주민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호전시켰다 한다. 최근 한류의 영향으로 베트남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두가지가 축구와 한국드라마라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하노이시에 돌아와 한국식당(1번지식당)에서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한후 시내에 있는 수상인형극을 보러 갔다. 베트남 여행시 인기도조사에서 5위를 차지하는 푸로그램이라 한다. 초라한 원형극장에서 펼쳐지는 수상인형극은 이 작품이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수상인형극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니 그 상만으로도 작품 가치가 있어 보였다. 물위에서 기교를 부리는 인형극의 섬세한 기술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시간 가량 계속되는데 마감시간 조금전에 모두 나왔다. 옵션으로 되어 있는 베트남 전통 전신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1시간 30분동안 계속되는 시간에 생전 처음으로 얼굴에 오이맛사지까지 받고--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하노이 시내관광 이른 아침 길거리 산보를 나갔다. 하노이 시민들은 아침식사를 식당에서 많이 한다. 베트남쌀국수를 말고 있는 주인여자-아들이 일손을 도운다. 이틀째 관광은 하노이 시내관광이다. 아침 8시 호텔을 나서서 먼저 호치민묘소를 찾았다. APEC정상회담이 곧 이곳 하노이에서 열리기 때문에 묘소내부를 관람할 수 없다고 한다. 묘소앞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남기 고 묘소 뒷편에 있는 생존시 사무실 및 거소를 둘러 보았다. 호치민 묘소 (Ho Chi Minh's Mausoleum) 호치민 사망(1969)후 1975.9.2에 완공된 석재묘소로 건물내부에 호치민 주석의 시신이 유리관 속에 안치 되어 있음. 호치민 주석은 생전에 화장을 원했으나 레닌, 스탈린의 예를 쫓아 베트남 국민의 단결을 표상 기 위해 현재와 같은 묘소 건립하였다. 묘소 뒷편(500m)에 호치민 주석 생존 당시 거소 및 사무실용 목조 건물,호치민 박물관이 있으며, 전면의 바딩(Ba Dinh) 광장(국가 주요행사 장소)을 중심으로 주석궁(Preside ntial Palace), 공산당사, 국회, 외무부, 외국공관등 핵심기관들이 위치한다. 매일(월·금요일 제외) 08:00-11:00 일반에 공개 되며 매년 9-11월 초순간 연례 보수기간에는 문을 닫음( 호치민 주석의 시신을 러시아로 옮겨 부패방지 처리함). 입장시 두줄로 줄을 맞춰어야 하고 경건한 분위기 유지해야 함. 반바지나 소매 없는 옷은 입장이 불가능하고 카메라나 가방은 리셉션에 맡겨야 함. 호치민은 베트남의 살아있는 전설로 방부처리된 그의 시신은 죽어서도 관광객 수입으로 국가경제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철저한 검소주의로 일관되었고 가족들과도 절연하였고 그가 죽으면서 3가지 유언 을 남겼는데 '나의 시신을 화장을 하라' '나에 관한 박물관을 짓지말 것' '나에 대한 책을 발간치말라'이었 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모두 정반대로 시행되었다. 1945. 9월2일 이 광장에서 독립선언을 하였고 24년 후인 1969년 9월2일(독립 직전)에 사망하였다. 그의 죽 음은 북부국민만이 아니라 남부에서도 흰상복을 입을 정도로 온국민의 추앙을 받았던 영웅이었다. 호치민 생가로 가는 길에는 호수를 따라 많은 인파가 줄을 잇고 있었다. 호치민이 3개월간 기거했다는 주 석궁이 푸른 잔디위에 우뚝 서 있었다. 노란 건물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호치민은 주석궁을 마다하고 베트 남식 전통가옥에서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호수가에 위치한 전통가옥은 호수에 비친 노란집의 운치를 빼고 는 특별한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집이었다. 호치민의 생가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베트남의 국부가 살던 집 치고는 너무나 협소했다.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침실 그리고 집무실의 집기는 그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로 관광코스가 되어 있었다. 호치민 생가 안에는 참으로 신기한 나무들이 많았다.나무 안에 또 다른 나무가 들어 있다고 한다. 돌처럼 생긴것이 옆에 수없이 늘어서 있는 새끼 나무들은 큰나무의 뿌리라고 한다. 땅 속으로 깊이 뿌리가 들어가 지 못하여 위로 솟는다고 하는데 큰 나무가 죽으면 이 많은 새끼나무중 하나만 살고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 고 하니 이 무슨 조화인가?. 그리고 호치민이 즐겨 먹었다는 자몽나무에는 자몽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호치민 생가와 집무실 코스구경을 마치고 일행은 일주사와 문묘를 찾았다. 국자감 문묘 베트남은 약 1,000년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11세기에 이르러서 독립 왕조를 세우게 된다. 중국의 식민 지로 중국풍의 유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것이 문묘이다. 이는 국립 교육기관으로 여기 에서 유학을 가르쳤다. 경내에는 1484년부터 약 300년간 시행한 과거시험 합격자들의 명단이 각각 새겨져 있는 거북비석들이 있 다. 비석을 떠받치고있는 거북의 머리가 반질반질한데 머리를 만지면 수능에 좋은 성적으로 패스한다는 속 설의 기대로 시험기간이 되면 수험생이나 부모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베트남은 한국과 같이 유교문화권이며 우리나라와 사회시스템, 사고방식, 역사가 아주 흡사하다.중앙에 공 자를 모신 사당이 있다. 정원이 하도 아름다워 산책을 하였다. 일주사 (一柱寺) 베트남 해방의 주역인 호치민 묘 옆에있는 절로 하나의 기둥위에 세워져 일주사(一柱寺) 즉 One Pillar Pag oda라 불린다. Mot은 하나를 Cot은 기둥을 의미한다. 규모는 작지만 그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어 하노이를 선전하는 화보에 빠지지않으며 5,000VND짜리 동전에도 새겨져있다. 1049년 Ly Thai Tong 황제에 의해 왕 궁의 동쪽 해가 뜨는곳에 세워졌다가 전란으로 여러차례 훼손되었으나 다시 복구 되었다. 원래 기둥은 나무였으나 지금은 돌로 돼있다. 전설에 의하면 Ly Thai Tong 황제가 후사 가 없어 걱정하 던 차에 부처님이 연꽃을 타고 나타나서 사내아이를 주는 꿈을 꾸고 평민 처녀와 결혼해 아들을 얻었고, 이에 감사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연꼿이 가득한 연못 위 에 새워진 아담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옆에 는 Dien Huu라는 작은 절이 있다. 씨클로 옵션으로 시클로를 타고 시내 시장구경을 하였다. 우리의 남대문 같은 재래시장을 구경하는 코스인데 22명 이 한사람씩 타고 일렬로 가는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나누어준 마스크를 쓰고 시장 여기저기를 눈으로만 구경하였다. 내려서 쇼핑도 해보고 싶었으나 금지시켜서 일행을 이탈할 수가 없었다.시장 안은 물론 길거리의 서민들이 생활하는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쇼핑시간이다. 라텍스(천연고무제품) 침대매트와 베개 전시장에서 무려 만불 가까이 구매를 하는 현상이 벌 어졌다. 합해서 15%를 DC받아 8천8백여불로 가이드 입이 벌어졌다. 300명이나 되는 하노이시내 가이드들 중 누계 6위가 무난하다고 하며 6위상품으로 김치냉장고를 탈 수 있 을 것이라는 기대에 그는 너무도 기뻐하였다. 쇼핑이란 이상한 마력이 있는가 보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아 무도 안사면 어떻하나 했는데 너도나도 안 산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점심은 당초 한식을 바꾸어 현지식으로 주문하였다. 식당은 일반 가정집 같은 외관의 고급주택가에 있었는 데 메뉴가 좋았다. 모두들 잘 바꾸었다고 만족해 하였다. 오늘의 코스관광은 모두 끝났다. 비행기로 캄보디아 씨엔립공항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만 이틀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하롱베이와 하노이 시내관광을 만족스럽게 마쳤다. 하노이는 오토바이 천국 수상시장 하롱베이 풍경 지상 동굴 호치민 묘소에서 국자감 문묘 대성전 공자상 씨클로를 타고 캄보디아 앙코르왓편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가는 오후 4시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점심식사후 하노이 공항으로 갔다. 하노이 공항 에서 씨엠립까지는 2시간이 걸린다. 가이드 말로는 푸로펠라 경비행기라고 했는데 타고 보니 보잉기였다. 규모가 큰 보잉 747은 운행이 안된다고 한다. 앙코르왓의 균열 예방차원이란다. 비행기안에서 캄보디아로 입국하는데 필요한 3종류의 서류를 기재하느라 끙끙댔는데 공항에 도착하니 여 권과 사진만 받는게 아닌가! 이상해서 물었더니 입국 비자수수료가 20불인데 급행료로 5불을 더 주기 때 문에 이런 게 다 필요없고 비자도 도장을 찍어서 다음날 호텔로 갔다 준다고 한다. 돈의 만능을 실감한다. 시간도 예상시간보다 빨라서 저녁시간을 6시30분으로 당겼다. 식사후 숙소인 PRUM HOTEL에 여장을 풀 었다. 내부시설이 베트남 보다 훨씬 좋았다. 준특급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라고- 남자회원들이 이심전심으로 총경리인 조병무 싱글룸으로 모였다. 권중화가 가져온 소주에 과자 등을 안주 로 술상을 벌였다. 여행중 에피소드 그리고 과거 여행의 무용담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웃고 떠들다 보니 밤 10시반이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앙코르왓을 찾아가서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감각으로 느끼는 날이다. 각각 방에서 샤워를 하고 일찍 쉬기로 하였다 캄보디아 앙코르왓 관광을 시작하면서 캄보디아에 관한 기본자료를 조사했다. 국토의 면적은 우리나라(남한)의 2배 가 되는 18만 1035㎢, 인구는 약1200만, 수도는 프놈펜이고 공용어는 크메르어다.북동쪽으로 라오스, 동쪽 과 남동쪽으로 베트남, 북쪽과 서쪽으로 타이에 접해 있고 남서쪽으로는 바다인 시암만에 접해 있다. 캄보디아는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평원국가로 평지가 국토의 75%나 된다. 지형은 바다에 접해 있는 남쪽을 제외한 3방향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산지의 중앙에는 넓은 평원이 전 개되어 있어 마치 얕은 대접 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주위의 산지는 가장 높은 남서부의 카르다몸(크라 반)산맥도 해발고도가 1,000~1,500m에 불과하다.이들 산지는 중앙부를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져 있으며, 서부에서 가장 움푹 팬 부분이 캄보디아 사람들이 마음의 고향처럼 생각하는 톤레샆('큰 호수'라는 뜻)이 다. 내일 이 톤레샆 호수를 관광한다. 반티아이스레이 사원 당초 예정된 코스일정을 바꾸어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반티아이스레이 사원을 먼저 가기로 했단다. 아침 7시 씨엔립 시내에 있는 호텔을 출발했는데 1시간 15분이 걸려 사원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캄보디아 의 시골 풍경을 차창 밖으로 감상하였다. 오늘 관광스케쥴은 반티아이레스-앙크로톰-바이욘사원-바푸온사원-코끼리테라스-피미에나나까스사원- 타푸롬사원-그리고 마지막으로 앙코르왓을 구경한다. 앙크로왓은 전 앙크로 유적지 중 가장 하이라이트인 이유로 맨 나중에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거꾸로 보게 되면 다른 유적지가 시시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일몰시간에 맞춰 프놈바킹에서 낙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로 하였다. 반티아이스레이는 1914년 프랑스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붉은 사암으로 건축된 반티아이스레이는 석 양으로 물든 낙조시간이면 장미빛 불길이 훨훨 타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앙코르 유적중 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히는 곳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붉은 사암으로 쌓아올린 건축물의 단 아함 때문에 복원작업에 참여하였던 프랑스 건축가들이 '크메르 예술의 극치'라는 찬사를 남겼다 한다. 특히 붉은 사암에다 나무에 조각하듯 정교하게 새겨넣은 조각과 치장물등은 그 화려함과 섬세함이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린다. 사원전체의 화사한 아름다움은 마치 공들여 치장을 마친 여인네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인지 반티아이 스레이라는 이름의 뜻도 '여인의성채'라는 의미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긴 보도가 나오고 이 보도를 걸어가면서 옆으로 늘어선 돌기둥에 조각된 작품부터 감상 하게 된다. 보도 끝에는 신전으로 들어가는 탑문이 외벽과 함께 서 있고 탑문안으로 들어가면 크다란 해자 가 나온다. 해자에는 아름답게 핀 연꽃이 반긴다. 해자에 비춰지는 사원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림자로 드리 워져 있다. 신전 입구의 탑문에 조각된 부조는 너무나 섬세하여 감탄이 절로 난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재위 944~968년)가 다스리던 시기에 귀족이 세운 힌두교 사원으로 지붕과 회랑마다 새겨진 부조는 앙코르의 수많은 유적 중 최고로 꼽힌다. 특히 중앙 사당에 조각된 풍만한 가슴의 테바다 여신상이 관심을 끈다. 동양의 모나리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 부조는 한때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앙드로 말로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몰래 밀반출을 시도했다는 일설까지 있을 정도이다. 앙코르톰 다음 목적지인 앙크로톰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돔사원을 눈으로 보면서 지나고, 한시간 뒤 앙코르톰에 도착하였다. 앙코르톰은 1200년대 100만명이 거주했던 어마머마한 대도시였다. 앙코르 톰은 자야바르만 7세가 조성한 앙코르 왕국의 마지막 수도다. 앙크로톰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바 욘사원이다. <앙코르 문화의 대표적 사원, The Bayon> 앙크로톰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앙코르톰을 대표하는 사원으로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톰의 위대한 건설자 인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가 12세기말에 앙코르톰의 중심에 건립한 불교 사원으로 54개의 탑에 새겨진 소위 '앙코르의 미소'라 불리는 관세음보살의 사면불(四面佛)이 200개를 넘는다. 정확하게 동서남북 을 향하고 있어 더욱 놀랍다. 거대한 바위산 모양으로 건설된 이 사원은 앙코르의 유적 중 유일하게 우물 을 갖추고 있다. 바이욘 사원 탑에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한 자야바르만 2세로 추정되는 웃는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부처와 동일시된 왕의 위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회랑의 벽면에는 그 당시 크메르인들 의 역사와 일상 생활을 책대신 기록한 부조가 벽면 따라 사방으로 새겨져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2층 으로 올라가면 자야바르만 2세로 추정되는 거상들이 기다리고 있다. 흔히 앙코르왓과 견주기도 하지만 앙코르왓이 힌두교의 철학에 의해 지어진 사원인 반면 바이욘 사원은 블교양식에 의해 지어져 있다. 따라서 설립 목적이, 설계, 건축과 장식에 있어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지 어졌으므로 바이욘과 앙코르왓을 잘 비교해 보면 불교와 힌두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바푸욘사원> 앙코르 톰 경내에 위치한 바푸욘사원은 북쪽 테라스를 나와 공터를 가로질러 좌측으로 보이는 높은 산봉 우리 모양의 사원이다. 앙코르 지역에서 3번째로 건립된 유서깊은 사원으로 앙코르톰이 건설되기 이전부 터 이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다야디트바르만 2세에 의해 1060년에 완공된 바푸온은 힌두교의 쉬바신에게 바쳐진 웅장한 성소였으며 훗날 쟈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건설할 때 바푸온을 경내에 넣 었다. 때문에 앙코르톰 내의 다른 건축물들과는 건축 양식이 현저하게 다르며 더 많이 훼손되었다. 덩그러니 높다란 산 모양의 사원은 멀리서 보면 단조롭지만, 내부는 멋진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 사원으로 유명하다.그러나 보수중이라 내부를 관람할 수가 없다. <코끼리테라스> 코끼리 테라스는 그 길이가 300m가 넘는데(건기에는 마르고 우기에는 물이 찬다) 이 테라스의 외벽은 세 단으로 나뉘어져 아주 깊게 부조되어 있다. 남쪽의 계단에는 머리 셋 달린 코끼리가 코로 연꽃을 모으는 조각이 새겨진 기둥이 받쳐 있고 각 단의 벽은 중앙 계단을 받치고 있는 사자와 가루다의 조각이 있다. 300m가 넘는 긴 벽을 따라 무수한 무리의 실물 크기의 코끼리떼가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텃치로 새겨져 있어 '코끼리 테라스'라 불리운다. <타프롬사원(Ta Prhom)> 12세기 중반 자야바르만 7세때 축조되었다. 아침이 정글의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사원 이름은 '브라흐마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타프롬은 통행로 만 만들어 놓은 것을 빼고는 전혀 복구를 하지 않은 사원이다. 자연이 어떻게 사원을 무너지게 했는지 그 과정과 결과들을 그대로 보여 주기 위하여 일부러 복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무의 생명에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가 자라면 유적이 위험해지고 그렇다고 나무가 죽으면 마찬가지로 유적이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나무는 크지도 죽지도 못하는 슬픈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생명촉 진주사와 억제주사를 교대 로 맞는다고 하는 넌센스-- 밀림 속 자연과 함께 살아온 이 사원은 당시의 영화보다 더실감나는 현실을 살고 있다. 500년 이상 된 스펑나무가 돌로 된 사원을 곳곳에서 먹고 있어 붕괴와 공존을 함께하는 기괴한 느낌의 사원이 되었다. 자연의 생명력 앞에 무력해지는 인간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곳이다. 그리고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영화 '톰레이더'의 촬영장소로 더욱 유명해졌다. <피미아나까스(Phimeanakas)> 10세기 라젠드라바르만 2세때 건축된 이곳은 "하늘의 궁전" 이라 불리우며 왕궁 내부의 왕실을 위한 사원 이었다. 또 '황금탑'이란 이름도 갖고 있으며 원나라 세관원으로 톰에 거주했던 주달관(周達觀, Zhou Dagu an)의 방문기에 의하면 3층의 성소 꼭대기는 황금으로 입혔다고 전해온다. 피미아나까스 사원 앞에서 열대 과일을(코코넛)을 먹으면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앙코르왓 앙코르유적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앙크로왓을 보기 전에 여러 다른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폭 200m, 길이 4km의 해자 저 너머가 바로 앙코르왓이라는데 마치 무슨 보물을 숨겨두고 애를 다루는 것 같다. 세계 7대불가사이의 하나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단일건물로는 규모가 세계 제1이다. 가로 1.3km, 세로 1.5 km 건물로 60만평에 펼쳐저 있다. 1,863년 프랑스의 앙리무어가 동남아 지도를 만들기 위해 태국을 방문 했다가 길을 잃고 헤메다가 이곳 앙크로왓의 거대한 문화를 발견하고 그 뒤 프랑스 탐험대에 의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들어내게 되었다고-- 12세기 초 수리야바르만2세에 의해 37년간에 걸쳐 건축된 앙코르 왓은 정말로 장대하고, 섬세한 부조들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뛰고 설레이는 곳 이다. 앙코르 유적 중 개별 사원으로는 가장 크고 크메르 건 축 예술의 극치인 역사적인 예술로 인정받은 곳이다. 돌로 만든 "우주의 모형"이라는 사원으로 사방 200M 의 해자와 사각형의 외벽 길이가 5,5Km, 3개 층으로 높이가 65M인 세계최대의 거대한 단일 건축물이다. 앙크로왓이 밀림속에 묻혀있어서 16세기 왕국이 사라진지 400년이나 자연속에 방치되어 있었기는 하지 만, 지금은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불과 6km 떨어진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쉽고 보존상태가 비 교적 양호하고 부근에 있는 앙크로톰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건축물이어서 연중 관광객이 들끓고 있다. 앙코르왓의 5개의 탑이 앞 해자에 비쳐 10탑을 이룬다. 아래는 뒷면이 가려 마치 3개의 탑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앙코르왓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3일동안 내용을 감상하면서 관광해야 하나 마치 번갯불에 콩구워 먹는 식으로 다니다 보니 빠뜨린 것도 많고 차에서 가이드로 부터 들은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인물 들과 건축물 벽면의 부조나 작품을 하나하나 연관 시키면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쉽다. 앙크로왓 관광을 마치고 일몰시간에 맞춰 프놈바킹으로 향했다. 구름이 많아 일몰을 보기가 힘들 것으로 예상되지만 일단 기대를 해보면서 -이곳도 경사가 심한 계단으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야만 한다. 정상에 오르니 많은 관광객들이 주변 경관을 구경하고 있었다. 구름이 너무 짙어 결국 포기를 하고 씨엠립 으로 귀환하였다. 숙소로 돌아와 더위에 흘린 땀을 샤워로 말끔히 씻고 저녁식사를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저녁식사는 압 살라 민속디너쇼를 겸하였다. 전통악기의 음악에 맞춰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 남녀의 춤과 공연이 흥을 돋 구었다. 저녁시간도 바쁘다. 공연을 마치고 야간시티투어에 나섰다. 옵션의 하나인데 삼발이 툭툭이를 두명에 한대 에 같이 타고 시내 번화가를 구경했다. 도중 카페에 들러 생음악을 들으며 생맥주 파티를 열었다. 링가는 생맥주, 요니는 음료를- 미리 사온 열대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결국 열대과일의 황제라 불리는 두리 안은 계절상 귀해서 먹지 못했다. 냄새가 지독하지만 맛은 최상이다. 신청곡을 불러주는데 다 듣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내일은 톤레샆호수 와 인공호수인 웨스트바레인호수를 관광한다. 톤레샆호수 오늘은 그다지 시간이 바쁘지 않은지 아침을 늦게 먹고 8시30분에 호텔을 나섰다. 하루종일 버스,배, 비행 기를 타는 날이다. 육해공군수송수단이 모두 동원되는 날이다. 가는 도중 이 지역 특산물인 상황버섯 전시 판매장에 들렀다. 공군대령출신인 사장이 이 지역 산중에서 자라나는 수십년된 상황버섯을 군을 동원해 채 집하면 약용으로 만들어 수출한다고 한다. 보통 30~40년된 것에서 부터 120년 된 것까지 다양하며 년수가 많을수록 희귀품이라 한다. 캄보디아산 상황버섯도 알아주는 모양이다. 서융덕동문이 거금을 들여 오래된 희귀품을 구매하였는데 건강을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크메르인들의 생활터전으로 자연호수에 펼쳐지는 그림같은 수상가옥을 감상하는 시간이다. 어제와는 달리 역시 호수로 나오니 덥지않고 시원하다. 마음이 무척 편안해 진다. 톤레샆 호수는 세계에서 바이칼 다음으 로 큰 호수이다. 그러나 건기가 아닌 우기에는 바이칼호수보다 더 넓단다. 수심은 깊은 곳이 4~5m이나 만 수시에는 7~8m까지 오른다. 월남이 공산화되면서 자유를 찾아 보트피플로 캄보디아를 찾은 이들 수상가 족들은 이제 캄보디아에 정착하여 캄보디아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 얘기만 듣던 수상전통가옥이 신기하다.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한 점이 많다. 이날이 우리식으로 따져 손없는 날인지 이사하는 장면이 눈에 많이 띄였다. 앞에서 동력선이 끌고 수상가옥이 어 디론가 이사를 가고 있었다. 가옥안에는 여러가지 살림도구가 다 있고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한국인이 설립하여 운영하는 수상학교에는 태극기가 선명히 보였는데 조금 가다 보니 일본인 학교도 보였 다. 경쟁심의 발로인가 보다.양동이를 보트처럼 타고 가는 어린애들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웨스트바레이(Western Baray)호수와 킬링필드.지뢰전시장 중식후 다시 배를 타게 되었다. 인공호수인 웨스트바레이 호수를 두대의 배로 나누어 호수 안에 있는 메본 공원으로 갔다. 메본공원은 메본사원이 있던 유적지인데 사원의 일부 파괴된 흔적만 남아 있었다. 배를 타 기 전부터 어린애들이 팔찌 부채 등 1달러 짜리 쇼핑물건을 들고 달라붙어 좀 당황스러웠다. 애들이 한국 말을 어디서 배웠는지 재미있다. 배를 탈때 "머리 조심하세요!" 정도의 말에 놀라긴 했지만 "아줌마, 예뻐 요! 간혹 "할머니 머리가 이뻐요 !" 하는 말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배가 닿은 곳은 유원지로 꾸며진 섬이었다. 수십명이 오를 수 있는 평상이 있었다. 우리일행은 평상에 올라 모처럼 과일도 먹고 휴식시간을 가졌다. 원래 푸로그램이 있는지 이 섬에 있는 어린이들이 모두 모여 한국 동요 '퐁당퐁당' 노래와 '학교종이 땡땡땡' 노래를 합창을 했다. 그리고 캄보디아 동요도 한곡 부르고-- 어린이들에게 연필을 사 써라고 10달러를 주니 좋아했다. 심심풀이 Y교실이 열려 멀리 이국 땅에서 웃음의 Y강좌를 열었다. 이활용시인의 부인 김용옥여사께서 낭 낭한 목소리로 부군의 '영주 부석사에 가면'이라는 시와 유명 시인들의 가을시를 낭독해주어 한결 엎그레 이드된 여행이 되었다. 중식은 평양냉면집이었다. 북한이 경영하는 식당으로 중국에서 볼 수 있는 북한여인들의 노래와 춤공연을 보여주는 식당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동포라는 생각에 술도 사마시고 노래를 들으며 흥겨워하며 구경 했는데 핵으로 공갈치는 김정일의 작태에 환멸을 느낀 우리들은 점심을 먹자말자 바로 밖으로 나왔다. 이심전심인 모양이다. 나는 가이드에게 항의하였다. 왜 이런 분위기를 모르느냐? 그의 얘기로는 우리 대 사관 측에서도 가급적 가지 말라고 한단다. -- 아마도 단체인솔에 대한 가이드 수입과 관계가 있는게 아닌 가 생각되었다. 웨스트바레이호수를 나와 옵션으로 단체로 선택한 킬링필드기념관에 들렀다. 캄보디아에서는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군이 캄보디아를 공산화한 후 농업적 공산주의사회를 주장하면서 도시에 있던 사람들 을 정글로 끌고 갔다. 그리고 반대세력과 지식인 들을 학살하고 반동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 였다. 전 국민의 1/4인 200~300만 명이 학살을 당했으며 이 사실은 미확인 정보로만 되었다가 영화 『킬 링필드』의 주인공(실존인물)이 캄보디아를 탈출하여 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대학살 킬링필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념관 있는 자리에 큰 사원이 세워져 있었다. 오토마이사원(New temple)이라는 이 절 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이 그려져 있는 탱화가 벽면을 채우고 있었는데 여태껏 힌두교의 부조를 보다가 좀 색다른 감을 느꼈다. 다음 순서는 역시 옵션 스케쥴인 지뢰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아스팔트가 없는 좁은 골목길로 들컹거리며 찾아들어가니 조그만 오두막이 하나 보였다. 이 지뢰박물관은 「아키라」라는 청년이 만든 곳으로 이 청년 은 어린시절 크메르루즈군에 들어가서 지뢰를 설치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이제 평생 동안 캄보디아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뢰를 제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뢰로 인해 불 구가 된 아이들을 거둬 지뢰박물관에서 같이 생활하며 돌봐주고 있다. 실제로 「아키라」는 국내 방송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지금도 캄보디아 곳곳에서는 심심찮게 지뢰가 발견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지뢰 때문에 심한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고 있다. 씨엠립으로 가는 도중 보이는 농촌의 집들마다 집앞 또는 옥상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이채롭게 시선을 끌었다. 길거리에 돼지나 닭을 자전거에 싣고가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한다. 닭도 돼지도 하늘을 쳐다보게 거꾸로 싣고 가는데 그래야 돼지도 꽥꽥거리지 않고 닭도 발버둥을 안친다는 재미있는 지혜를 배웠다. 씨엠립은 캄보디아에서 5번째 큰 도시이지만 인구는 10만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 객으로 선조들의 혜택을 톡톡히 보는 행복한 도시이다. 씨엠립 시내는 교통신호대가 단 3개뿐인데 이 신 호대를 처음 설치했으때는 빨강과 파랑 신호를 잘못알아 교통의 혼란을 가져왔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옛 날 그런일이 있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역사의 시간흐름을 다시 생각케 한다. 반디아이스레이 사원 앙코르톰 남문 입구 신들의 동산 바이욘(The Bayon)사원 바푸욘사원 타프롬사원 코끼리테라스 티미아나까스 앙코르왓 톤레샾 호수 저녁식사 전에 캄보디아 특유의 전통전신맛사지를 받기로 했다. 부인들 몇명은 시간이 짧은 발맛사지만 받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은 2시간짜리 맛사지를 받았다. 방바닥에 매트를 깔고 발끝에서 머리까지 시원하 게 전신맛사지를 받고 나니 그간 여행의 피로가 다 날라가는 것 같았다. 이제 서울을 떠난지 만 5일째다 여행 스케줄은 모두 끝났다. 한국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공통비용 정산내용을 설명하고 남은 돈을 인당 15불씩 나누어 주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흥미롭고 즐거웠던 여행을 모두 마감했다. 이번 여행을 사전 계획하면서 많은 준비와 검토를 했지만 여전히 미흡한 것이 많았으리라 생각되지만 사 삼여동회 멤버들 모두가 협조를 잘 해 주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감사를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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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전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