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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인류의 양심을 묻는다
김민웅 전 경희대 교수/ 촛불행동 상임대표
‘팔레스타인’은 오늘날 인류의 양심과 직결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침략전쟁과 원주민 학살이 드러난 1970년대 ‘베트남’이 그랬던 것과 같고, 1950년대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독립항쟁이 프랑스인들의 양심 문제와 일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인들의 양심을 판별하는 문제가 된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사안들은 언제나 인류 전체에 대한 질문이 된다. “침략과 정복, 그리고 탄압과 학살을 그대로 보아 넘길 것인가”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참극의 본질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곳 원주민으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점령체제가 근본 원인이다. 거듭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침입자이며 강탈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피해자이며 희생자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무력 사용은 테러응징이고 팔레스타인의 정당방위와 저항은 테러라고 주장되고 있다. 기만이고 속임수다. 미국과 서방이 지배하고 있는 언론들은 은폐와 거짓으로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감추고 이스라엘 편에서 일방 보도를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미국에서 콜럼비아 대학 영문학 교수를 지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이는 “희생자들을 가해자로 몰아 비난하는 행위(Blaming the Victims)”이다. 그는 일찍이 <팔레스타인의 문제(The Question of Palestine)>를 출간,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왜곡과 기만을 폭로한 바가 있다. 이스라엘의 국가안보를 내세워 팔레스타인의 인권과 자기 결정권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 팔레스타인의 핵심 문제라고 짚었다. 옳은 이야기다.
20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의 무슬림 학생들이 코란을 읽으며 팔레스타인을 위한 기도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주민들을 돕기 위한 모금도 함께 진행했다. 2023.10.20. EPA 연합뉴스
시온주의의 식민지 프로젝트와 식민지 조선
식민지의 고통을 겪은 우리에게 ‘팔레스타인’은 당연한 지지와 연대의 대상이며 우리의 양심과 동일한 사안이다.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시오니즘을 앞세운 이스라엘의 영토 정복과 원주민 추방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뿌리 뽑힌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를 맴돌던 유대인들의 ‘조국(Homeland) 회복’을 내세운 시오니즘이 현실에서는 ‘식민주의 프로젝트’로 가동되고 있다. 그 결과 독일 나치스의 대학살 홀로코스트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바로 그 나치스가 되어 가두고 죽이고 쫓아내고 빼앗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지난 75년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의 일부는 주변의 레바논과 요르단 등으로 내쫓기고 일부는 거대한 수용소 또는 감옥이 된 가자지구 그리고 요르단 서안지역에 밀집되어 가난과 공습, 계속 축소되는 영토의 압박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이런 현실 자체가 테러이고 그것도 이스라엘의 국가테러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 자체다. 언론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또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고 표제를 달고 있지만 이건 양측이 대등하게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는 점에서 잘못된 방식의 표현이다.
진상은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팔레스타인 공격과 학살이라는 범죄행위에 대해 반격을 가한 팔레스타인의 무장항쟁과 이를 진압하려는 이스라엘의 대대적 공세에 있다. 명명해보자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토벌 작전’ 이다. 이때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며 그 토벌은 이들을 멸절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반복되고 확장되어온 이스라엘의 전략이었던 것이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벌어진 사태다.
이스라엘, 가자 지구 그리고 진짜 테러
이스라엘에게 특히 가자지구는 무장 항쟁조직에서 제도권 정당이 되어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마스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대상이 누구인지 가릴 것 없는 공격목표다. 그러기에 교회고 병원이고 민간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지난 세월 무수한 피해와 희생이 있어온 것이다. 하마스는 이에 대한 반격을 했고, 이스라엘은 그간의 폭력은 은폐한 채 보복공격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아바스 자치정부보다 더 큰 지지를 받고 있으며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가자지구의 삶의 수준을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중이다. 하마스의 이번 반격행위가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지지를 받기 어려울지는 모르나, 그간 지속되어온 이스라엘의 잔혹한 폭력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희생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기준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하마스에 대한 비난이 정당하려면, 이스라엘의 폭력이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군 장갑차가 20일(현지시간) 가자지구 국경 인근에 모여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유혈 분쟁이 발발한 지난 7일 이후 현재까지 양측 사망자는 5천명을 넘어섰다. 2023.10.20. EPA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문제 앞에서 침묵하는 한국 정치권
이런 현실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가장 강력히 지원하고 있는 현실은 이제 지구촌 인류에게 용납할 수 없는 사태가 되고 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동남아시아 이슬람 국가와 중동의 아랍 국가들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규탄,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와 연대운동이 대대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는 시위가 얼마 전 벌어졌고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세계여론의 차원에서 보자면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이스라엘은 고립되어 있다. 인류적 기준에 따른 판단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나라 그 어떤 정치세력도 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고뇌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땅의 인류적 의식이 얼마나 퇴보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의 인종청소 범죄와 이에 지지를 표명하고 구체적인 지원까지 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대미 굴종의 비굴함이 온몸에 배어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런 미국이 주도하는 이른바 한미일 전쟁동맹이 어떤 비극을 가져올 것인지는 너무도 명백하다. 조선에 대한 침략에 이어 온 나라를 거대한 수용소, 감옥으로 만들었던 일본이 다시 이렇게 등장해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 그 무력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국을 위한 중동의 군사기지 이스라엘과 동아시아 군사기지로서의 일본의 지정학적 위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 이스라엘과 일본에게 미국이 부여할 무력발동의 범위와 강도는 지금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보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지금 이런 위기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교전이 격화하는 가운데 19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칸 유니스에 피해 주민들을 위한 유엔개발계획(UNDP) 난민캠프가 세워져 있다. 이날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전역에 걸친 공습을 퍼부어 민가들이 파괴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023.10.20. AP 연합뉴스
기만과 기만의 연속선 위에 있는 인류의 미래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자기들 마음대로 중동지역의 식민지 경계선을 긋고 오스만 터키 이후의 제국주의 패권을 비밀리에 설정했다.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Sykes-Picot Agreement)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 터키제국의 붕괴과정이 전개되었으며 이 기회를 잡아 독립국가의 미래를 꿈꾸던 아랍 베드윈 민족들과 함께 항쟁에 나섰던 영국군 장교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T. E. Lawrence/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실제 주인공)는 자신의 조국 영국이 철저하게 아랍민족들을 기만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영국이 벌인 반 오스만 터키 투쟁 지원은 아랍지역에 대한 식민지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 맥락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고 여기에 영국을 등에 업은 시온주의자들의 힘이 오늘의 이스라엘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과정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죽이고 결국 원주민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이라는 미국판 가자지구가 등장한 과 궤를 같이한다.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는 이름의 비극은 그 강제 이주과정에서 집단몰살을 당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운명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다. 수없는 협정을 맺어놓고는 뻔뻔하게 어기고 결국 땅을 빼앗고 원주민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낸 미국의 영토확장 역사를 시온주의자들이 본뜨고자 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를 막아내지 못하면, 지금 팔레스타인의 비극이 어떤 종말을 가져올 것인지 뻔하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확대과정은 팔레스타인 거주지의 파멸이었다.
이건 모두 범죄다. 침략과 정복의 편에 서야 하는가, 아니면 이와 투쟁하면서 자신들의 자유와 인권, 생존을 위해 나서는 쪽에 서야 할까. 답은 분명하다. 자기결정권을 빼앗긴 민족의 처지는 어디서나 다르지 않다. 1919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이른바 민족자결권 선언의 기만이 드러난 것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에 속은 것을 안 우리 선열들이 선택한 방법은 항일무장투쟁이었다. 팔레스타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국제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팔레스타인의 자기결정권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는 것, 그것만이 이 참화의 반복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선언하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도덕적, 역사적 의무다. ‘팔레스타인’은 우리에게도 양심의 문제가 된 것이다.
출처 : ‘팔레스타인’ 비극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전쟁범죄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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