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불패의 해전
부산포 해전
● 정운 장군의 전사
중위장 권준의 선봉 함대 장수들은 적의 조직적인 대응에 내심 놀라워하면서 지리(地利)의 불리함을 극복할 만한 묘안을 찾고자 고심했다. 하지만 적 선단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형국이었다.
이순신도 교전 상황을 지켜보며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를수록 왜군 측이 반격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선봉 함대를 안전한 지역까지 물려야만 했다. 이순신은 선봉 함대를 퇴각시킨 후에 육지의 적과 맞상대를 벌일 작전을 세웠다.
거북선의 출전을 알리는 깃발이 이순신의 기함 돛대 높이 올랐다.
“적의 공격을 분산케 할 것이다! 즉시 선봉의 공격선을 물리게 하라!”
기함 돛대 위로 이번엔 ‘공격선 일보 후퇴!’ 를 명하는 깃발이 올랐다. 이에 중위장 권준도 즉기 영하기를 올려 퇴각을 독려했다.
그 사이 본대 정면에 위치해 있던 거북선들은 지체 없이 각기 맡은 육지 6곳의 왜군 진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이때, 이순신의 본대는 포구 안 왜선단을 향해 총공격을 알리는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본대의 함포사격에 맞춰 거북선들과 판옥선단도 일제히 협격전에 들어갔다.
부산포 해전 당시 거북선의 수가 몇 척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컨대 판옥선과 거북선의 비율을 10:1로 보면 개조형을 합쳐서 약 8척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억기와 원균 함대도 후방 경계를 위한 일부의 병선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격에 가담해 싸웠다. 포구 앞은 수심이 깊지 않았으므로 근접사격이나 조준사격이 아닌 500여 척의 왜선들을 목표로 한 원거리 사격이었다. 전 함대가 공격에 가담하자 바다는 짙은 포연과 천둥 같은 포성으로 뒤덮였다. 이에 질세라 왜구들도 총반격으로 맞섰다.
그 와중에 선봉에 나섰던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이 왜군 저격병의 총포사격에 전사했다. 이순신은 장계에 ‘큰 철환이 정운의 이마를 뚫었다’ 고 기록했는데, 큰 철환은 조총보다 조금 더 큰 대포이고 사정거리도 조총보다 긴 무기다.
정운의 죽음은 조선 함대와 후방 고을들에 큰 아픔을 남겼다. 유능한 장수의 죽음이었으며, 조선 함대 지휘관으로서는 최초의 전사자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정운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녹도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후로 충의심을 분발하여 적과 함께 같이 죽기로 맹세하며 세 번 싸움에 매양 앞장섰습니다. 부산 접전 때에도 죽음을 무릎쓰고 돌진하다가 적의 큰 철환이 이마를 뚫어 전사하니 지극히 슬프고 가슴이 아픕니다. 여러 장수 중에서 별도이 차사원을 정하여 각별히 호상하도록 하고, 그 대신으로 달리 무략이 있는 사람을 속히 제수하여 내려 보내시기를 재촉하오며, 그 사이에는 신의 군관인 전 만호 윤사공을 가장으로 보냈습니다.
양측의 공방전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
조선함대는 뜨겁게 달궈진 대포의 포신을 식혀 가며 공격을 지속했다. 그러나 왜군들은 안골포에서처럼 잔뜩 웅크린 채 받아치기 작전으로 일관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적선 100여 척을 3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해서 두들겨 부순 후,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들을 토굴(참호) 속으로 끌고 들어간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는데, 배를 깨뜨리기에 바빠서 머리는 베지 못했습니다.
여러 전선에서 용사들을 뽑아 육지로 올려 보내 모조리 섬멸코자 했으나 성 안팎 6, 7군데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들은 말을 타고 용맹을 뽐내는 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쪽은 말도 없고 고단한 군사가 경솔히 상륙하는 것도 만전의 계책이 못될 뿐더러 날도 저물었기로 적의 소굴에 머물러 있다가는 혹시 앞뒤로 공격을 받을까 걱정도 있었습니다. 이에 부득이 함대를 돌려 나와 자정에 가덕도로 돌아와 밤을 지냈습니다.
왜군들은 조선 함대의 공격이 좀처럼 누그러질 기미가 없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배를 잃었고 남은 배들도 온전하지가 않았다. 사상자도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특히 선상의 부대들이 심한 타격을 입었다.
이 날을 위해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발사용 무기들을 준비했건만 포탄과 화약, 석탄과 화살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술적 차원에서도 나름대로 많은 훈련을 쌓아 왔지만 조선 함대의 창끝을 견뎌 내기엔 역시 역부족이었다.
구키는 패배를 교훈삼아 구겨진 명예를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 함대 또한 안골포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층 더 발전된 전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수시로 걸어오는 거북선들의 근접전과 판옥선단의 함포사격, 거북선을 공격하려 하면 배후의 판옥선들이 일시 집중타를 날렸고, 판옥선단을 공격하려 하면 거북선들이 조준사격으로 공격해 왔다. 이 바람에 육지의 왜군들은 표적을 잃고 무작정 포탄과 조총을 난사했다. 힘들게 제작한 투석기도 그런 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석탄의 낭비가 많았다.
육지에 포진한 왜군들이 그렇게 대응하고 있는 사이 포구 정면에 위치한 또 다른 조선 함대에서는 초지일관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야금야금 자신들의 선단을 깨뜨리고 있었다.
구키는 결국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몸을 떨었다.
“이순신, 도대체 너는 사람이냐, 귀신이냐? 네가 귀신이라면 나는 내 신(神)께 빌 것이며, 사람이라면 너에게도 언젠가는 뼈저린 날이 있으리라!”
구키는 그저 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종료되기를 하늘에 빌면서 이순신을 향해 증오에 찬 독백을 내뱉었다.
조선 함대의 함포 사격은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멈췄다. 그리고 해전도 끝이 났다.
기상 여건이 양호한 경우 가덕도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5시간 정도. 조선 함대가 이 날 가덕도에서 출발한 시각이 오전 8시라고 보면 부산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경이다. 이순신은 가덕도에 되돌아온 시각이 자정이라고 했으므로, 해전은 오후 7시쯤에야 종료된 듯하다.
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총 5~6시간인데, 매번 속공전을 구사했던 조선 함대로서도 왜군측의 결사적인 반격 작전에 고전을 했다.
반나절 동안의 공방으로 왜군 측은 많은 사상자와 100여 척의 선박을 잃었다. 이순신의 좌수영 함대도 정운을 포함해서 약 3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억기와 원균 함대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좌수영 함대가 선봉에 섰던 점을 감안하면 좌수영 함대보다는 훨씬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 함대 장병들의 사상 원인을 보면 총포에 의한 사망이 4명, 부상이 23명이었다. 화살에 의한 부상은 3명으로, 이는 적지 않은 수의 병선들이 조총과 일본제 대포의 사정거리 안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양산과 김해에 있는 왜선이 혹은 점차 저희 본토로 돌아간다고들 하는데, 요 몇 달 이래로 저희 세력이 날로 외로워짐을 알고 모두 부산성 안으로 모여서 관사는 전부 헐어버리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어 이미 소굴을 만든 것이 그 수가 100여 호나 되었습니다.
성 바깥 동쪽, 서쪽 산기슭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연달아 있는 것도 거의 300여 호인바, 이것이 다 왜인들이 지은 집인데, 그 중에 큰 집은 층계와 회칠한 벽이 마치 절간과 같으니 그 하는 짓을 생각해 보면 지극히 분합니다.
이순신은 장계를 통해서 당시 부산의 왜군 진영이 내부적으로 도망병이 나오는 등 동요하고 있음을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저희 본토로 돌아간다고들 하는데’ 라고 한 바, 패잔병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의 왜군들은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또 ‘저희 세력이 날로 외로워짐을 알고’ 라고 한 것을 보면 전투와 질병, 굶주림, 탈영병 등 이런저런 이유로 왜군 단위부대들의 소속 인원수가 많이 감소한 것 같다. 또 조선 사람들과의 동화도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접전한 이튿날 또다시 쳐들어가서 소굴을 불 지르고 배들을 전부 깨뜨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가득 차 있는데 그들의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버릴 것이 걱정되어 부득이 수륙에서 함께 쳐야 섬멸할 수 있을 뿐더러, 더구나 풍랑이 심하여 전선이 부딪혀서 깨어지는 데가 많으므로 전선을 수리하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한 뒤에 또 육지에서 크게 몰려나오는 날을 기다려 경상감사 등과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토벌하기로 하고, 9월 2일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격물 · 치지에 바탕한 이순신의 깊은 사려를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은 적선을 더 깨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날이 저물었고 야간에 공격을 지속한다는 것은 효율 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또한 왜군들에게 조선 함대의 부산포 공격은 일찍부터 예견된 일이었으며 수삼일 전부터는 부산 사령부에 조선 함대의 남해안 출현이 알려져 있었다.
부산의 왜군들은 후원하기 위해 대마도와 나고야에서 온 또 다른 함대가 가덕도 부근에서 퇴로를 막고 협공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야간 해전은 매우 위험했다. 그런 이유로 조선 함대는 서둘러 가덕도로 돌아왔다.
다음날 재차 부산포 공격을 계획했지만 풍랑이 거세져 무리하게 이동을 하다가는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풍랑으로 인한 위험이 없었더라도 이순신은 부산포의 왜선 모두를 깨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산의 왜군들은 방파제 안에 숨어서 젖은 가마니 등을 덮고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육지에 진을 친 왜군들까지 상대해야 했으므로 효과적인 공격이 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수군만의 공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반나절 동안의 해전으로 많은 양의 화약을 소비했고 식량도 충분치 않았다. 출동시 조선 함대는 약 10일분의 식량을 싣고 다녔는데 부서진 병선을 수리하기 위해 2, 3일을 보내고 나면 식량은 완전히 바닥나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수륙군 공동으로 협공해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고 있다. 이 말을 되짚어 보면, 조선 육군의 전력이 왜군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부산포해전 시점에서는 협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우후 이몽구가 벤 왜의 머리 하나는 본래 왼쪽 귀가 없는 것이어서 귀뿌리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올려 보냅니다. 정해년에 왜에게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영수군 김개동, 이언세 등의 문초에 의하면, “소인 등을 잡아가던 왜는 본래 왼쪽 귀가 없었는데, 이제 왜의 머리를 보니 얼굴이 그와 똑 같으며, 이 왜인은 나이 늙어서 스스로 두목이 되어 가지고 도절질을 일삼고 평소 사람 죽이기를 즐겨 하였다.” 고 하옵니다.
사량도 권관 이여념이 사로잡은 왜인 오도동을 문초한 내용은, “왜적의 상관들이 처자를 데려온 후부터는 소인이 살고 있는 지대의 왜인들은 모두가 싸움에 나서기를 싫어하고 산골로 피해 들어갔습니다. 6, 7월 사이에 일본의 차사(差使)가 산을 뒤져서 산에 숨은 왜인들을 찾아내어 배에 가득히 싣고 이리로 보내온 것인데, 요새 고려(조선) 사람들이 우리들을 많이 죽이어 오래 머물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본토로 돌아가려던 차에 이처럼 잡혔다.” 고 하는데, 간사스러운 말을 믿을 것은 못되나, 그 나이가 어리고 어리숙한 모양이 얼마쯤 그럴 듯한 점도 있습니다.
그동안 4차례 출전하고 10번 접전하여 모두 다 승첩하였으나 만약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싸움보다 더한 것이 없겠습니다.
전일의 전쟁 때에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쳐 척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은 큰 적의 소굴 속에 벌리어 정박한 470여 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갖추고 승리한 기세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 꺾임이 없이 종일토록 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깨뜨려 적으로 하여금 가슴이 무너지고 머리를 움츠려 겁내어 떨게 하였으니, 비록 목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저 번보다 훨씬 더하기로 전례에 의해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고 별장으로 기록하옵니다.
‘적으로 하여금 가슴이 무너지고’ 라고 했는데, 이는 ‘부산의 우리 백성들은 기뻐서 춤추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로 해석해도 될 듯하다. 이렇게 힘을 얻은 조선 백성들은 7년간의 고난을 견뎌내며 왜군들에게 보이지 않는 힘으로 항거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왜의 물건 중에 쌀, 포목, 의복 등은 군사들에게 상급으로 주고 왜의 병기 등은 아울러 아래에 기록하는 바입니다.
태인에 사는 업무교생 송여종은 낙안군수 신호의 대변군관으로서 4번 적을 토벌할 때 충성심을 분발하여 솔선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기를 한하고 힘껏 싸워 왜의 머리를 베었는 바, 전후의 군공이 모두 1등에 든 자이므로 이 장계를 모셔가게 하나이다.
‘부산포파왜병장’ 은 그간의 전투에서 공이 많았던 군관 송여종이 가지고 올라갔다. 송여종이 행재소를 향해 출발한 날은 9월 17일이었다.
다음은 송여종이 장계를 받들고 올라갈 때의 상황을 기록한 송여종의 비문에서 옮긴 것이다.
※ 송여종의 비문 ※
임금의 수레는 몽진하셨고 세 도성이 다 무너져 연도에는 적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어 문안 차 달려가던 관원들도 문득 길이 막혀 중도에 돌아오는 형편이었다. 이공(이순신)은 공이 본시 나라에 죽을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장계를 주었다. 적의 진영을 돌고 돌아 낮이면 엎드리고 밤에 움직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어 겨우 임금 계신 곳에 당도했다.
위(임금)에서 곧 불러보시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으시며 술을 하사하여 수고를 위로해줌이 참말 장하므로, 서부주부를 제수하고 위로부터 이조에 전교하시되 ‘전라좌수사 군관 송여종은 맨발로 걸어 천리를 멀리 왔으니 지극히 가상할 바다. 전라 방면의 수령 가운데 빈 자리가 있으면 보직케 하고’ 하시므로, 이조에서는 곧 남평현감을 제수했는데, 병조에서 또 청하되 ‘녹도만호가 탄환에 맞아 죽었으므로 마땅히 그 후임을 선택해야 할 것이온데 송여종을 이미 남평현감으로 제수하긴 했으나 일찍이 순신의 관하에서 공을 세웠고 또 해전에 익숙하오매 이 사람으로 대행케 하심을 바랍니다’ 했다.
‘적의 진영을 돌고 돌아’ 라는 표현은 비문을 쓴 후대의 선비가 경상도와 강원도 등 육지 쪽의 장계 전달 여정을 인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왜군의 입장에서 본 부산포 해전
말로만 듣던 조선 수군의 위용을 확인한 부산 주둔군 사령관 하시바 히데카스는 해전이 끝난 지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무시무시했던 그날의 기억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 체험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꿈에서조차 거북선과 조선 함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무사 아닌 평민 출신이었지만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인 덕에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귀영화를 누려온 몸이었다. 이번 전쟁에서도 히데요시의 후광을 힘입어 비록 전장이라고는 해도 안전이 보장된다는 부산 주둔군 사령관 자리를 맡아 유람 나서듯 현해탄을 건너왔다.
그러나 천지를 뒤흔들던 포성과 언덕 위 진지에까지 날아든 살탄과 탄환, 그리고 그것을 맞고 죽은 휘하 장졸들의 주검을 보면서 ‘어쩌면 부산이 가장 위험한 곳’ 이라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두려웠다.
그렇게 큰 살탄도 처음 봤지만, 또 그 큰 것을 대포에 넣어 우박 퍼붓듯 쏘아댄다는 것도 가히 충격이었다. 하지만 더 끔찍했던 것은, 이제 조선 수군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타나 그런 식의 공격을 시도 때도 없이 해 올 것이라는 점이었다.
‘만약 저들이 부산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장시간 농성에 들어간다면…?’
하시바는 때때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죽을 수도 있다’ 는 생각을 하며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해야 했다.
밀항선을 타고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왜군들의 수가 부쩍 늘고 있다는 보고를 익히 듣고 있던 터였다. 또 부산포해전이 있기 전 자신의 참모들 중에는 “조만간 이순신이 바다를 막고 퇴로를 끊은 뒤에 명군과 조선군이 합세하여 쳐내려 올 것” 이라는 풍문을 전하면서 사태가 악화되고 있음을 보고해 오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부산포를 공격해 오자 부산과 경남 일대의 왜군 진영에는 낙담과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어서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풍문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 심약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는 자신의 염려대로 해전이 있은 직후 병을 얻어 죽는데, 부산포해전이 왜군 측에 미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사건이었다. 또한 훗날 도요토미(하시바)가(家)에 밀어닥칠 멸문(滅門)의 서곡이기도 했다.
부산포해전을 끝내고 여수항에 돌아온 좌수영 함대는 각 기지별로 돌아갔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을 추수에 바빴다. 또 그러는 가운데 화살을 만들고 화약을 굽는 등 각자 나름의 군영에도 여념이 없었다.
이 기간 중에 올린 충무공의 장계 가운데 오늘날 전해져 오는 것을 살펴본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9월 10일자) ※
삼가 상고하올 일로 아뢰나이다.
지난 7월 초 8일 경상도 한산도 앞바다에서 접전했을 때 화살을 맞은 왜적 4백여 명이 외딴 섬으로 올라가 마치 장속에 갇힌 새와 같이 되어 있어, 한 열흘만 지나면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 도 수사 원균을 시켜 그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사면을 포위하여 남김없이 잡아 죽이도록 하고서, 신과 우수사 이억기 등은 진을 파하고 돌아왔던 바, 원균이 그 뒤에 적선이 많이 온다고 잘못 듣고서는 포위한 것을 풀고 가버렸으므로 뭍으로 올라갔던 왜인들이 나무를 찍어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건너갔으므로, 솥 안에 든 고기가 그만 빠져나간 것 같아 참으로 통분하옵니다.
한산도해전 때 도망치던 왜군들은 한산도를 육지로 잘못 알고 올라갔다가 작은 섬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해전이 끝나고 전라 수군이 귀향한 후에는 원균 함대만이 지키고 있었는데, 원균은 ‘부산포 쪽의 왜군들이 구원하러 온다’ 는 헛소문만을 듣고 겁이 나서 포위망을 풀어주고 말았다. 원균은 이 무렵까지도 단독으로 작전을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9월 18일자) ※
삼가 아뢰나이다.
행재소에서 소용되시는 종이를 수량을 넉넉히 올려 보내라고 분부가 계시오나, 장계를 받들고 가는 사람이 먼 길에 운반하기 어려워 우선 장지(壯紙) 10권을 봉하여 올려 보내나이다.
후방 고을의 행정과 관아의 관리가 건재했기에 이 같은 물자를 조정에 올려보낼 수 있었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9월 25일자) ※
삼가 아뢰나이다.
지난 9월에 순천 사는 사람으로 아직 상제의 몸으로 임용된 봉사 정사준이 같은 고을의 의로운 선비 교생 정빈 등과 약속하고 각각 의연곡을 모아 한 배에 싣고 행재소로 올라간다 하기 때문에 본영 및 수군 관할의 각 고을 순천, 광양, 낙안, 흥양 등 고을 수령들이 따로 봉하여 진상하는 물건 등을 각각 물목을 기록하여 정사준에게 계산하여 올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서해 물길에 풍세가 순하지 않아 정사준이 중도에 추위에 상하여 병세가 중해져 더 갈 수 없어 되돌아 왔으므로 신의 군관으로 있는 그의 동생 정사횡으로 하여금 가지고 올라가도록 하였사온바, 신이 따로 봉하여 진상하는 장편전 등 물건과 탄일, 동지, 설 진상물도 전사횡과 영진무 김양간에게 함께 주어 의연곡 싣는 배에 같이 실어 올려 보냈습니다.
순천부사 권준이 봉하여 따로 진상하는 것도 또한 물목을 만들어 같은 배에 실었사오며 광양, 흥양, 낙안 등 수령들은 각각 제 고을 배에 싣고 각자 모집한 자들에게 주어 올려 보냈습니다.
정사준 등이 의연곡을 모아서 의주 행재소로 가는 편에 순천 · 광양 · 낙안 · 흥양 등의 고을에서도 곡식을 모아서 의주로 보냈다. 전라좌수영 관내 고을들의 군영이 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균의 관내는 첫째, 안골포, 웅천 등은 왜군의 점령지가 되었고, 둘째, 거제도는 적과의 공방전 지역, 셋째, 소비포와 남해도 지역은 왜군들의 분탕질은 없었으나 개전 초 김수 감사와 조대곤 병마사 등이 펼친 청야 작전과 백성들에 의한 분탕질로 원균의 관내 고을들은 제대로 된 군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 충무공의 장계 ※
삼가 나누어 받자올 일로 아뢰나이다.
본영과 각 포구에 있는 화약이 원래부터 넉넉하지 못한 것을 전선에 갈라 싣고 다섯 번이나 영남 바다로 출정하여 거의 다 쏘아 버렸습니다.
더구나 본도 순찰사, 방어사, 소모사, 소모관, 여러 의병장과 경상도 순찰사, 수사들의 요구가 많아 남은 것이 심히 적은데, 옮겨 받을 데도 없고 또 보충할 길도 없어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달리 방책이 없어서 형편에 따라 구워 썼는데, 신의 군관 훈련주부 이봉수가 그 묘법을 알아서 석 달 동안에 염초 1천근을 구워 내어 본영과 각 포구에 차례로 나누어주었으나, 석유황 만은 달리 나올 곳이 없으므로 감히 백여 근 쯤 내려 보내 주실 것을 청하나이다.
※ 충무공의 장계 ※
삼가 상고할 일로 아뢰나이다.
영남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본 도를 침범코저 하여 수륙으로 엿보고 있으니, 신은 비록 해전을 담당하였사오나, 육전의 방비에도 마음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남과의 접경인 구례, 석주, 도탄, 광양, 두치, 강탄 등 요해처에 복병하여 파수 보는 일들을 돕고 살피도록 함으로써 적들로 하여금 끝내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8, 9월 사이에 근처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여러 절간에 숨어 있는 중들과 병적에 들지 않고 놀고 있는 자를 모두 적발하여 석주, 도탄, 두치 등지에 나누어 파수 보도록 신칙하였더니, 중들이 소문을 듣고 즐거이 모여들어 한 달도 안 되어 4백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도 용맹과 지략을 가진 자들로는 순천 사는 중 삼혜는 시호별도장, 흥양 사는 중 의능은 우격별도장, 광양 사는 중 성휘는 우돌격장, 광주 사는 중 신해는 좌돌격장, 곡성 사는 중 지원은 양병용격장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따로 더 모집할 즈음에, 또 구례 사는 진사 방처인, 광양 사는 한량 강희열, 순천 사는 보인 성응지 등이 강개하고 의기를 분발하여 시골사람들을 모아 가각 의병을 일으켰으므로, 방처인은 도탄으로, 강희열과 중 성휘 등을 두치로, 신해는 석주로, 지원은 운봉팔양치(남원군 동면 인월리)로 가서 요해처를 파수케 하면서 하면서 관군과 합력하여 사변에 대비토록 전령했습니다.
그리고 성응지에게는 순천성 수비하는 책임을 맡기고, 중 삼혜는 순천에, 중 의능은 본영에 각각 머물며 방비하고 있다가 적의 형헤의 경중을 보아서 육전이 중대하거든 육전으로 가고, 해전이 중대하거든 해전으로 가라는 뜻으로 약속하였사오나, 물길을 차단하고 도망하는 적의 큰 부대를 섬멸하려던 병력이 외롭고 약해서는 안 되겠으므로 소속 수군력을 넉넉히 정돈하기 위하여 의병장 성응지, 승장 삼혜, 의능 등에게는 전선을 나누어 주어 갈라서 타고 바다로 나가도록 신칙하였습니다.
※ 충무공의 장계 (1593년 1월 26일자) ※
삼가 상고할 일로 아뢰나이다.
영남의 피난밀들로 본영 경내에 들어와 사는 자들이 2백여 호나 되는데, 모두 임시로 거접시키기는 했으나 겨울을 나기 어렵고, 당장 이들을 구제할 물자라곤 백방으로 생각해도 얻을 계책이 서지를 않습니다. 비록 난리를 평정한 뒤에는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된다고 하나, 당장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습니다.
전일 풍원부원군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로 인하여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 중에 ‘여러 섬 중에서 피난하여 머물며 농사지을 만한 땅이 있거든 피난민을 들여보내 살 수 있도록 하되, 그 가부는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기로, 신이 생각해 본 바 피난민이 거접할 만한 곳으로는 돌산도만한 데가 없사옵니다. 이 섬은 본영과 방답 사이에 있는데, 겹산으로 둘러져 있어서 사방으로 도적들과는 격리되어 있으며, 지세가 넓고 편평하고 땅도 기름지므로 피난민을 타일러 차츰 들어가서 살게 하여 방금 봄갈이를 시켰습니다.
전 어사 홍종록, 감사 윤두수, 수사 박선과 이천, 이영 등이 본영의 둔전 일로 장계할 때, 병조에서 목장이 있는 곳이라 말 기르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장계를 막았던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국사가 어렵고 위태로우며 백성도 살 곳이 없으니, 설사 의지가지없는 백성들을 들여보내 농사짓게 하더라도 말 기르는 데 해를 끼칠 일은 별로 없을 터이오니, 말도 먹이고 백성도 구제하여 둘 다 편의케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 충무공의 장계 ※
삼가 아뢰옵건데, 녹도만호 정운은 직책에 충실하고 담략까지 겸하여 어려운 일을 더불어 의논할 만한 사람이온바, 사변이 일어난 이래 의기를 돋우어 나라를 위해 몸을 잊고 조금도 해이함이 없이 국방에 힘쓰기 전보다 곱절이나 하므로 신이 믿었던 사람이라고는 이 정운 등 두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세 번 대첩에 매양 선봉에 섰고, 부산의 큰 싸움에도 몸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잊어버리며 앞장서서 적의 소굴을 찌르며 종일토록 싸웠는데, 힘껏 쏘아댔기에 적들이 꼼짝도 못하였사온데, 이는 오직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무렵 탄환에 맞아 죽었사온바,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부질없이 사라져 뒷세상에 알려지지 못한다면 참으로 절통할 일입니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 그 포구에 있사오니, 초혼하여 그곳 같은 제단에 함께 제사지낸다면, 한편으론 의로운 혼백을 위함이 되고 또 한편으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함이 되오리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국방 준비에 힘을 다했고, 난리가 일어난 후에는 더욱 부지런히 하여, 네 번 적을 침에 반드시 앞장서서 쳐들어갔으며, 특히 당항포 접전 때에는 왜장을 쏘아 죽이고 목을 쳐서 그 공로가 월등하건만 다만 쏘아 죽이는 데만 전력하고 목을 베는 데는 힘쓰지 아니하였는바, 그런 연유로 따로 포상하도록 장계를 올렸나이다.
그런데 표창과 상을 내리신 글 속에 홀로 순신(방답첨사)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아 군대 안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옵니다. 여러 장수들 중 권준, 이순신, 어영담, 배흥립, 정운 등은 따로 믿는 바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서 어떤 일에나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워왔던바, 권준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되었는데, 오직 이 순신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조정의 표창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바이옵니다.
정운의 혼백을 이대원(선조 20년, 손죽도 앞바다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순국한 녹도만호)의 사당에 함께 모시도록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또 방답첨사 이순신의 공로가 당상관에 오를 만큼 큰데 누락되었다고 지적하며 이를 챙기고 있다.
충무공은 장병들이 공을 세우거나 사상자가 생겼을 때 표창과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세하게 보고하고 챙겼으며 이 같은 군영도 이순신 함대를 1등 수군으로 만든 비결이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
우수영은 수사와 우후가 스스로 군영을 불태우고 우후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 현재 사천 해포에 우거하고 있는데, 격군 수십 명 이외에는 군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신이 보건대, 고성은 비록 함락되었지만 왜적이 이미 돌아갔고 군량도 있으니 만약 수사가 성에 들어가 웅거하여 지킨다면 무너져 흩어진 인민들이 반드시 안집할 것이기에 두 차례나 수사에게 통문을 보냈더니, 수사가 지난 19일 성으로 들어가 지킬 계획으로 고성현 지경에 배를 대자 전 날의 왜적 1백여 명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재차 와서 성을 점거하였으므로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김성일 초유사는 경상도의 관 · 민 합동 사령관 격으로 김수 경상감사와 함께 원균에게는 직속상관이다. 그런데 김성일은 장계에 개전 초 원균의 초라한 행적을 기록하면서, 100명의 왜군들에게도 대적하지 못한다고 했다.
‘수사가 지난 19일’ 에서 19일은 적진포 해전(5.8) 이후인 5월 19일로 보인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
원균은 수군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로 피하고, 우후 우응진을 시켜 관고를 불태우게 하여 2백년 동안 저축한 물건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리게 하였습니다.
‘200년 동안 저축한 물건들’ 이라고 하였는바, 이는 장부장으로만 있었고 실제로는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다. 《선조실록》(1592.6.28)에 김수와 김성일의 장계가 수록되어 있는 것은 그 무렵 의주행재소와 소통이 시작되면서 경상도의 한 관리가 두 사람의 장계를 가지고 올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 《징비록》 ※
이보다 먼저 왜적이 바다를 건너 육지로 올라왔을 때에 원균은 왜적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감히 나가서 치지 못하고, 그 전선 백여 척과 화포(火砲) · 군기(軍器)를 바닷속에 침몰시켜 버린 다음, 홀로 수하의 비장 이영남 · 이운룡 등과 함께 네 척의 배를 타고 달아나 곤양의 바다 어귀에 이르러 육지로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 수군 만 여명이 다 무너져버렸다.
원균이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것은 왜란이 발발하기 2개월 전이다. 관내의 수군력은 장부상으로만 있었고, 소수의 병선은 우후 우응진 등이 불태우고 도망갔다. 그 결과 원균의 함대는 개전 초부터 전투력을 상실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6월 1일 새벽, 경상우수사 원균이 신에게 이르기를 “어제 접전 때 남겨둔 작은 전선 2척이 도망갔는지 여부를 알아볼 겸 화살에 맞아 죽은 왜병의 수급을 베어 오겠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균은 패군(敗軍)한 후 군사 없는 장수로서 지휘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접전하는 곳마다 화살이나 탄환에 죽은 왜인들을 찾아내어 수급 베는 일을 맡아 왔습니다.
그 날 8시경, 그곳을 다녀와서 하는 말이 “왜적들은 육지로 해서 멀리 도망을 갔고, 그래서 남겨둔 배만 불태웠는데, 죽은 왜병을 찾아내어 목을 벤 것이 셋이요, 나머지는 숲이 울창해서 찾지 못했다.” 고 했습니다.
원균의 함대는 병사, 노꾼, 화력, 군량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정상적인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선조실록》 1592년 8월 24일 ※
비번사가 아뢰기를,
“경상수사 원균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이 한산도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 김승룡, 현령 기효근은 특별히 당상에 올리고, 현감 김준계는 3품으로 승서하고, 주부 원전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으로 제수하소서.
만호 한백록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 박치공은 수급 셋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충무공이 올린 《옥포파왜병장》 의 행재소 도착은 5월 23일이고, 김수와 김성일의 첫 장계가 행재소에 도착한 것은 6월 28일이며, 원균의 첫 장계가 행재소에 도착한 것은 8월 24일이다.
지세포 만호 한백록은 옥포에서 부상을 당한 후 곧 죽었는데, 이 시점에 와서야 보고 되고 있다. 또 전공자를 상신하고 전사자에 대한 보상 처리도 요청했는데, 신속해야 할 이 분야의 군령이 느림보형이다. 원균 관내 백성들은 원균의 이 같은 느림보 군영 행정에 불만이 많았고, 불만은 원균에 대한 비협조로 나타났다. 이는 결과적으로 원균 함대가 늘 왜소하고 궁색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문맥으로 보아 옥포해전(5.7)…당포(6.2)…한산도(7.8)…안골포(7.10) 해전에 대한 것을 한 데 묶어서 이 시점에 와서 장계한 것 같은데, 그간 조정에서도 궁금하고 답답했겠고, 현지에서 표창이나 보상 대상자들도 답답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목을 벤 것을 보면 혈전을 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고 하였는바, 해전장별로 누가 어떻게 해서 목을 베었다는 설명은 없고 목 벤 숫자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숫자가 결코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의주의 조정 비변사에서는 몇 사람이 수십 명이 해야 할 업무를 처리했는데, 굶는 날이 많았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따. 그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알아볼 자료도 없었기에 목을 벤 숫자를 기준으로 표창을 했고,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비변사에서는 원균이 상신한 목을 벤 숫자를 기준해서 품계를 올려 주었다.
비변사는 상신을 하면서 이순신 쪽은 병선·병력·화약무기가 많고, 원균 쪽은 이들 분야가 빈약한데(비변사는 김수, 김성일, 이순신의 장계를 통해서 이 같은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목 벤 것은 이순신 쪽과 비슷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저녁 식사가 ‘조밥일까? 조죽일까?’ 를 생각하면서 끼니걱정을 해야 했다.
● 원균행장록의 오류
임진란 당시 원균을 두둔하는 붕당에서 원균을 칭송하는 기록들을 남겼고, 그 후 원균의 후손들이 문인들에게 의뢰해서 《원균행장록》(김간. 16646~1732)을 발간해 두었는데, 충무공 쪽에 비유하면 《이충무공행록》(이분 저. 1609)에 해당한다.
오늘에 와서 원균을 두둔하는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원균행장록》 을 인용하면서 많은 혼란과 혼돈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같은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하여 《원균행장록》 또한 중요한 원전으로 삼아 비교 탐방해 보자.
※ 《원균행장록》 ※
5월 6일에 이르러 비로소 이순신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거제 앞바다로 모이었고, 7일 새벽에 삼도 주사(舟師)가 일제히 옥포 앞바다로 진격하니, 진을 치고 있는 적선이 개미떼와 같이 몰려 있었다. 공이 북을 높이 올리며 곧바로 진격하여 적의 중앙을 공격하고, 이순신 등이 일시에 승세를 타고 공격하여 적을 무너뜨리니, 불살라버린 적선이 100여 척이고, 타죽은 자와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빼앗은 적선 중에서 둥근 금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부채면 한 가운데에 ‘6월 6일’ 이라 쓰여 있고, 바른쪽가에는 ‘우시축전수’ 라고 다섯 자가 쓰여 있으니, 이는 필시 풍신수길이 우시축전수에게 준 물건이 확실하며, 이 날 목 베인 적장은 곧 우시축전수가 틀림이 없었다. 공이 적진으로 돌격을 장하여 적은 병선으로 능히 많은 적을 격파하니, 공이 향하는 곳에는 대적할 적이 없었다.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라고 했으므로 잘못된 기술이다. 또 ‘공이 적의 중앙을 공격하고 이순신 등이 일시에 승세를 타고’ 라고 했는데, 원균이 먼저 돌격에 나서자 바로소 이순신 쪽도 용기를 얻어 사격전에 나섰다는 것인데 ‘원균을 두둔하고 이순신은 깎아 내리기’ 를 하고 있음이다.
이때는 전라좌수영 함대가 학익진 대형을 펼치고 옥포 하늘에 장대비를 퍼붓듯 왜선단을 향해 각종 총포탄과 크고 작은 살탄 세례를 가하고 있었으므로, 원균 함대는 공격은 고사하고 아군 탄에 맞아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적선이 100여 척’ 이라고 한 것도 과장되었따. 그리고 금부채는 당포해전 때 전라좌수영 함대가 노획한 것인데, 옥포해전에서 원균 함대가 노획했다고 했으니 역시 잘못된 설명이다.
‘우시축전수’ 는 히데요시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죽은 왜장이라고 했으므로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원균을 두둔하는 서적이나 드라마에서는 ‘공이 적의 중앙을 공격하고’ 라는 대목을 인용하여 마치 원균이 왜선에 충돌도 하고 또 백병전을 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했다면 왜선의 층루에서 쏘는 조총탄을 맞아 원균 쪽의 갑판은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고, 왜선단은 학익진의 일시집중타를 맞아 화염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원균 함대도 함께 불탔을 것이다.
김간의 경우는 그래도 옛이야기다. 오늘날에 와서도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원균행장록》 을 승계해서 ‘원균을 두둔하고 이순신을 깎아내리기’ 에 나서고 있는데, 해전도를 상상해보면 말이 안 된다.
아래는 《원균행장록》 에 소개된 제2차 출동에 관한 기록이다.
※ 《원균행장록》 ※
5월 21일에 왜선이 당포로부터 공격해 오므로 우리 수군이 맞아 싸우는데 주위의 여러 섬에서 왜적의 무리가 사면으로 일제히 나오는지라, 공은 육지로 올라가서 우선 적의 선봉을 피하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고 군선을 노량으로 옮겨 놓았다. 얼마 아니하여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와서 다시 모여서 적을 곤양 근처에서 격파하고 사천 앞바다까지 적을 쫓아가서 이를 모두 섬멸해 버렸다.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없다. 군사학에 맹(盲)한 김간은 거북선에 대해서 알기도 어려웠고 관심을 가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 《원균행장록》 ※
6월에 당포에 이르니 적선이 바닷가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3층 누각이었고 밖으로 붉은 장막을 드리웠는데, 그 속에서 한 사람이 금관과 비단옷을 입고 적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보이므로 우리의 여러 장수들이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공격하였으며, 순천 부사 권준이 아래로부터 치쏘아 한 대의 화살로 적중시키니, 금관을 쓴 자는 활촉 소리와 함께 거꾸러지고, 남은 왜적들은 놀래어 흩어지고 스스로 서로 던져 물에 빠져 죽었다.
‘거북선+학익진’ 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문신 출신의 김간으로서는 해독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 《원균행장록》 ※
조금 있다가 적선 40여 척이 뒤로부터 공격하여 오므로 우리 군사가 노를 돌려서 이를 맞아 힘껏 싸워서 오전 10시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이르니, 적들은 밤을 타고 도주해 버렸다. 이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다시 와서 합세하니 먼저는 제장들이 매번 적은 병력으로 적진 깊숙이 진격하는 것을 근심하다가 이억기가 도착한 것을 보고는 사기가 배증하여 동도 앞바다까지 적을 추격하여 북을 울리며 용감하게 싸워서 적장 5인이 함께 탄 배를 붙잡았고, 율포와 가덕 전투에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전투에서 공이 붙잡은 적선이 모두 55척이오, 목 벤 적이 모두 103급이었다.
당항포 해전에 대한 내용과 ‘거북선+학익진’ 의 설명이 빠져 있다. ‘적장 5인이 함께 탄 배’ 는 미끼배로 보인다. ‘공이 붙잡은 적선이 모두 55척’ 이라고 했는데, 원균 함대의 10배가 넘는 규모로 과장되었다. 다음은 한산도와 안골포해전에 대한 설명이다.
※ 《원균행장록》 ※
7월 30일에 조서(詔書)가 내렸는데 그에 말하기를, “경이 올린 네 차례의 군공 장계를 보고 그 중에서 특별히 공이 있는 자를 먼저 논상(論賞)하며 내가 기뻐하는 뜻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그때에 본직에 있던 자를 지금에 와서 승진시키려면 자리를 바꾸고 갈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으니, 아직은 본직을 그대로 두고 다만 급수만을 올려 주었다가 후일에 등용하게 하라. 소록(요점만 적은 기록)에 기록한 왜물은 경이 노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뒷사람들을 권장하게 하라” 고 하였다. 9월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진하고 또 교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7월 30일에 조서가 내렸다’ 고 했는데, 《선조실록》에는 8월 24일에 원균의 장계를 처음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날짜가 맞지 않는다. 즉, “네 차례의 군공 장계” 가 아닌 8월 24일자로 받은 ‘한 차례의 장계’ 이다. 《원균행장록》 은 이후 부산포 해전과 이듬해에 있은 해전들을 빼놓은 채, 아래와 같이 이어졌다.
※ 《원균행장록》 ※
을미년(1595) 겨울에 충청병사를 제수하고 병신년(1596) 가을에는 전라병사로 전배(轉拜)되었는데…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우선 충무공의 해전 기록이 ‘거북선+학익진의 순수 사격전’ 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반해, 《원균행장록》 에는 첫째, 원균은 중앙으로 돌격해 들어갔고, 둘째, 원균의 병선들은 층루선들과 충돌했으며, 셋째, 원균의 장졸들은 왜선단에 올라가서 백병전으로 대승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원균 함대가 이렇게 해전을 벌였다면 옥포해전에서 이미 전멸했을 것이므로, 《원균행장록》 에 기록된 원균 함대는 유령 함대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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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선조
개전 초에서부터 옥포해전까지는 불과 20일 간이지만, 이 기간 중에 올라간 중요 장계(1592년 4월 27일, 4월 30일, 5월 3일자 장계)들은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 경기 · 충청의 역졸들이 모두 전사함으로써 중도에 분실되어 조정에 전다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원균과 원균의 지지세력들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것을 분석해 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칠천량 패전을 겪게 된다.
오늘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 에 대해서 많은 혼돈과 곤혹스러움을 겪고 있는데, 이번에는 이순신이 개전 초 20일 동안 올린 장계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이같은 혼돈과 혼란에서 벗어나고, 또 임진왜란사 전반을 재조명하는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 개전 2개월 전에 부임한 원균 수사
원균은 1540년 1월 9일 경기도 평택군 도일리에서 증 영의정 평원부원군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으로 있다가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부임해서 오랑캐를 토벌한 공로로 종3품이 되었고, 그후 종성으로 옮겨 이일 병마사(병마사의 본영은 경성) 휘하에서 공을 세워 정3품에 올라 그 용맹함이 알려졌다.
1592년 2월 경상우수사에 제수된 바, 왜란 발발 2개월 전이다. 경상우수영은 거제도 남단에 위치한 가배량에 있었고, 관내 기지들은 낙동강 하구의 김해 · 안골 · 가덕에서부터 노량 · 남해 · 평산포 · 옥포 · 상주포 · 미조항에 이르기까지 넓은 해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때문에 원균은 부임 후 기지대장들을 한 차례 소집하고 병선과 병력, 병기 등을 서면 보고로만 파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순신은 원균보다 1년 전에 부임해서 병선과 화약무기의 준비, 동원훈련, 그리고 관내의 자세한 호구조사까지 했다. 아래는 《원균행장록》 에서 인용한 것이다.
※ 《원균행장록》 ※
공은 경자(1540) 1월 5일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으며,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어 조산만호로 봉직되었을 때에 번호를 토벌하는데 공이 컸으므로 정규의 등급을 뛰어넘어 부령부사가 되었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서 병사 이일을 따라 시전부락을 격파하였다. 임진년(1592) 공의 나이 53세에 경상우수사로 제수되었는데, 그해 4월에 왜적이 국력을 기울여 우리나라를 침공하니 부산 · 동래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 때에 공의 수하에는 단지 배 네 척이 있을 뿐이어서 군세의 부족으로 혼자서는 능히 적을 섬멸할 수 없음을 예측하고 우후 우응진으로 하여금 머물며 본영을 지키게 하고 옥포만호 이운룡과 영등포만호 우치적과 남해 현감 기효근 등으로 하여금 물러가서 곤양을 지키도록 하고, 비장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어 힘을 합해서 적을 방어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키는 바 각기 한계가 있다 하고 듣지 아니하므로 서로 의견이 5, 6차나 오고 갔다. 이때 광양현감 어영담과 순천부사 권준이 이순신에게로 달려가서 바다로 나아가 싸울 것을 힘써 권고하니 이순신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공은 이순신이 도착하기 전에 수차 적과 교전하여 적선 10여 척을 불사르고 빼앗으니 군성(軍聲)이 점차로 떨치게 되었다. 5월 6일에 이르러 비로소 이순신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한계가 있다’ 는 것은 출동에는 조정의 승낙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출동 과정에서 ‘어영담과 권준 등이 힘써 권고했다’ 는데, 권고도 있었지만 ①조정과 전라감영의 출동명령, ②이순신의 ‘각개 격파의 개념’ 과 ‘Hit and Run 전략’ 등이 주된 원인이다.
개전 직전에 부임한 원균은 설혹 화약무기를 준비하려고 했어도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부산성과 동래성, 그리고 그해 6월에 있은 평양성 전투에서도 화약무기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한적한 어촌에 위치한 휘하 기지들이 화약무기를 준비하고 있었을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김해 · 안골 · 영등포 등 주요 기지들이 최일선 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관 · 군 · 민이 모두 도망가기에 바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수 경상감사와 조대곤 경상병마사는 황폐화 작전(청야작전)을 편답시고 피난을 가라는 공문을 보냈으므로 원균의 관내 기지들은 스스로 황폐화되어 ‘끼니 걱정을 하는 함대’ 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음의 장계는 원균으로부터 왜군의 침공 소식을 받은 이순신 쪽이 왜군의 전라도 쪽으로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내용의 공문이다. 즉, 원균 쪽에서 정식으로 구원을 요청해온 것이 아니라 규정에 의해 왜군의 침공소식을 통보해온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나이다.
오늘 4월 15일 술시(하오 8시경)에 도착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에 “오늘(14일) 사시(상오 10시경)에 도착한 가덕진 첨절제사 전응린과 천성보 만호 황정 등의 보고에, ‘응봉(창원군) 봉수책임자 이등, 연대(김수군) 책임자 서건 등이 보고하기를, 이달 13일 신시(오후 4시경)에 왜선이 몇 십 척인지 알 수 없으나 대충 눈으로 보이기는 90여 척이 좌도의 축이도(부산 사하구)를 지나 부산포로 향하여 연달아 들어갔다고 하기에, 첨사는 규정에 의거 부산 다대포(부산 사하구 다대리) 우요격장으로서 군선을 정비하여 바다로 나가 대비한다’ 고 하였는바, 이것은 필시 해마다 오는 무역선인 듯도 하나, 다만 90여척이나 많이 나오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을 뿐더러, 연달아 나온다는 것이 심상치 않은 것 같으므로, 방비하고 망을 보는 일들에 마음껏 조심하여 밤낮으로 대비하도록 소속 여러 포구에 공문을 빨리 돌려 신칙하고, 신도 군선을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므로, 이로써 오늘 장계를 보냅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같은 날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에, “같은 날 신시(하오 4시경)에 받은 좌수사(박홍)의 공문은 ‘가덕 첨사의 보고에 의거컨대, 이것은 필시 해마다 오는 무역선은 아닐 것이라 극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별 내용 사연을 낱낱이 말하자면 시각이 늦어지겠으므로 대강만 적어 우선 전하고 차차 또 기별하겠으며 사변에 대비합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도 군사와 병선을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을 대비하겠사오며, 관찰사, 병마절도사, 우도수군절도사들에게 빨리 공문을 돌리고 연해안 고을과 포구에도 동시에 공문을 돌려 신칙하였나이다.
원균 수사의 공문이 도착한 것은 1592년 4월 15일 8시 경이고, 내용을 보면 원균이 가덕도 초소로부터는 ‘왜선 90여 척이…’ , 박홍 경상좌수사로부터는 ‘왜선 150쳐 척이 부산포에…’ 라는 공문을 받고, 원균도 규정에 따라 급보를 보낸 것이다.
이순신 수사도 규정에 따라 관내 10개 기지에 비상령을 내렸고, 또 전라감사와 병마사, 우수사 등에게 공문으로 알리면서 이 모든 조치 상황을 조정(비변사)에 장계했다.
대마도를 출발한 왜군 일부가 풍향 때문에 사하구의 가덕도 해안에 도착했다가 부산포 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두 번째로 온 공문은 김수 경상감사가 보낸 것이다. 받은 시각은 4월 16일 오전 8시경이다.
‘사변에 대비하는 장계’ 라는 장계의 성격에서 보듯이, 역시 자체방어의 개념이다. 장계는 여수 좌수영에서 행정관청인 순천부 관아까지 보내면 그 다음엔 파발 조직이 자기 구역을 달리는데, 자기 구역이라면 밤길이나 험로에서도 쏜살같이 달릴 수 있는 역졸들이 있었다.
※ 충무공의 장계 ※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나이다.
오늘 4월 16일 상오 8시경에 도착한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공문에 ‘이달 13일 왜선 400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와서 닿았는데 적의 형세가 여기에까지 이르고 보니 극히 걱정스러운바 또 차차 전달하겠으며 사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적의 형세가 이같이 성하게 벌어져 극도에 이르니 패를 나누어 여기도 쳐들어올 걱정이 있으므로, 신도 군함을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대비하오며, 관찰사, 병마절도사, 우도 수군절도사들에게 빨리 공문을 돌리고 소속 각 고을과 포구에도 무릇 살피고 망보는 일에 관계되는 일을 각별히 신칙하고, 그밖에 모든 무기와 방비 등을 배나 엄하게 하여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였나이다.
김수 감사도 규정에 따라 알려 왔고 그 역시 자체 방비에 임하고 있었다.
다음의 공문은 원균 수사가 보낸 것으로 접수 일시는 4월 16일 해시(오후 11시~12시) 경이다. 이순신이 장계를 올린 것도 해시였다. 전황은 더욱 급박해졌으나 원균 쪽에서의 구원 요청은 아직 없다. 이때 원균은 김해에 있었다.
※ 충무공의 장계 ※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나이다.
오늘 4월 16일 하오 10시경에 도착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에 ‘당일 유시(하오 6시)에 도착한 우병사의 공문과 좌수사의 보고에, “이 달 4월 14일 묘시(상오 6시경)에 황령산(동래군 사면) 봉수군 배가 와서 말하기를, 왜적들이 부산포에 세 패로 갈라 진을 치고 해뜰 무렵에 성을 에워싸고 접전했는데 대포 쏘는 소리가 천지를 흔들더라고 하며, 서평 다대포는 벌써 길이 막혀서 구원병도 달려갈 수 없어 참으로 걱정스럽다.” 고 하였기에, 신은 전략에 의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고 굳게 지키며 적을 막아내는 데 관한 일들을 각별히 조처하는 일로 장계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 도 수사(원균)의 기별이 왔는데, ‘왜적이 당일 부산포를 포위하고 접전하던 연유는 장계하였거니와, 그 진이 적을 막지 못하고 이미 함락되었으며 왜적들은 부산포 북쪽 5리즘 되는 당천에 진을 치고 왜군 선봉은 동래로 향하여 갔다고 하므로 우수영으로서도 각처에 곧 공문을 돌렸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해부에서 변고에 대비해야 할 일로, 당일 그곳에 이르러 연해안 각 고을 위장과 육지 각 관원에게 모두 빨리 공문을 돌려 군사와 말들을 정비하여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였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전쟁이 나면 지휘관은 자신의 부대 안에 머물면서 지휘권을 장악해야 한다(현대전에서도 비상이 걸리면 지휘관은 자기 부대로 달려가서 부대를 장악한다). 그런데 원균은 가배량을 지키면서 관내 기지들을 지휘하지 않고 김해 등지로 쏘다니고 있다.
이 무렵 가배량은 우후 우응진이 지키고 있었고, 우후는 피난민들의 배를 왜선단으로 잘못 알고 병영과 병선들을 불사르고 도망을 갔다. 게다가 경상감사 김수는 청야작전을 편다는 사실을 공문을 통해 백성들에게 통고했으며, 이로써 원균의 관내 기지들은 군 · 관 · 민 모두가 피난을 떠나가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이 되자 원균의 지휘체계와 함대는 어쩔 수 없이 무너졌고 스스로 해체된 격이 되고 말았다.
한편, 이순신은 1년 전부터 왜란에 대비해 왔고, 급보가 올 때마다 5관 5진포에 ‘각자 관내 기지를 굳게 지키면서 병력 · 병선 · 병참 물자의 동원을 차질 없이 수행하도록’ 일사불란하게 지휘해갔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난중일기》 와 장계에 기록해서 조정에 보고해 갔다. 이렇게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원균 쪽은 이순신 쪽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열악했다.
※ 충무공의 장계 ※
적의 형세가 엄청나게 성하여 이처럼 극에 이르러 부산 같은 큰 진이 이미 함락되었다니 놀라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나이다. 신도 바야흐로 배를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오며 관찰사, 병마절도사, 우도수군절도사와 본도 소속 연해안 각 고을과 포구에 파발마를 띄워 공문을 돌렸습니다. 신이 관할하는 좌도는 경상도와 더불어 같은 바다에 서로 이어져 있어 적이 쳐들어오는 길목이자 도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온바, 경내를 침범당한 후에 각종 군인들을 징발하여 방비에 보충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소속 각 고을에서 뽑혀온 한두 패 군사를 우선 재촉하여 성 지키는 군사와 해전하는 군사에 각각 보충시키고, 모든 것을 정비하여 사변에 대비하나이다.
원균 수사가 김해 쪽에 가서 관내 기지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가배량 인근의 백성들과 기지대장들은 원균 수사가 도망간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오해가 확산되는 경우, 긴급뉴스 같은 것이 없었기에 바로 잡기가 어려울 뿐더러 지휘관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관계로 이 같은 불신은 원균 함대의 자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형편에 왜군의 제3진 구로다 나가마사 군에게 김해가 4월 19일 함락되었는바, 원균의 함대는 김해가 공격받아 함락되기 직전 정박지를 또 옮겨야 했을 것이다.
다음은 류성룡의 《징비록》 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선조와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 《징비록》 ※
왜적이 바다를 건너 육지로 올라왔을 때 원균은 왜적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감히 나가서 치지 못하고, 그 전선 백여 척과 화포 · 군기(軍器)를 바닷속에 침몰시켜 버린 다음 홀로 수하의 비장(裨將) 이영남 · 이운룡 등과 함께 4척의 배를 타고 달아나 곤양의 바다 어귀에 이르러 육지로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 수군 만여 명이 다 무너져버렸다.
이영남이 간하기를, “공은 임금의 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지금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내려간다면 뒷날 조정에서 죄를 조사할 때 무슨 이유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그보다는 구원병을 전라도에 청하여 왜적과 한번 싸워보고, 이기지 못하겠으면 그 연후에 도망하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원균은 옳겠다고 여겨 이영남으로 하여금 이순신에게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다.
‘전선 백여 척과 화포 · 군기 등을 바닷속에 침몰시켜…’ 라고 했는데, 이같은 규모는 장부상의 숫자이며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얼마간의 병선과 병기가 있었는데, 원균이 부재중일 때 경상우수영의 우후가 왜군이 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배를 불태우고 병장기들을 바다에 버렸다.
이영남은 소비포 권관이며 이순신과는 먼 인척간으로 함경도 시절에 이순신의 수하 군관을 지낸 바 있었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답답한 마음에 원균에게 이순신 측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건의해본 것이다.
그러나 원균은 조정의 명령 없이는 이순신이 출동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공문에는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을 반영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영남과 이순신은 사석(이영남이 여수에 왔을 때 겸상으로 밥도 함께 먹었을 듯)에서 구원요청을 했을 수는 있다.
※ 《징비록》 ※
이순신은 이에 대하여, “각각 분담한 경계가 있으니 조정의 명령이 아니면 어찌 함부로 경계를 넘어갈 수 있으리오?” 하며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위와 같이 답하면서, 거기에 덧붙여 “경상감사와 조정으로 이어지는 승인 절차를 서둘러 밟으라” 고 했을 것이다.
※ 《징비록》 ※
원균은 또 이영남으로 하여금 가서 청하게 하여 무릇 대여섯 차례나 마지 않고 왔다가 돌아갔는데, 늘 이영남이 돌아갈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통곡하였다’ 고 한 바, 통곡한 이유가 이순신의 출병 거절에 있었다면 원균은 ‘출병 절차도 모르는 바보’ 가 되고 만다. ‘대여섯 번’ 이라고 했는데, 이는 원균이 보낸 ‘통보성 공문’ 의 횟수 같다. 이 공문은 이영남과 그의 군관이 노량까지 와서 진주 감영과 여수 좌수영을 주야를 구분치 않고 오가며 전했던 것이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일본에 통신사절단 부사로 다녀왔고, 후에 경상우도 감사가 된다)이 올린 장계에서 원균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
우수영은 수사와 우후가 스스로 군영을 불태우고서 우후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서 현재 사천 해포에 우거하고 있는데, 격군 수십 명 이외에는 군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신이 보건데, 고성(固城)이 비록 함락되었지만 왜적이 이미 돌아갔고 군량도 있으니, 만약 수사가 성에 들어가 웅거하여 지킨다면 무너져 흩어진 백성들이 반드시 안집(安集)할 것이기에 두 차례나 수사에게 통문(通文)을 보냈더니, 수사가 지난 19일 성으로 들어가 지킬 계획으로 고성현 지경에 배를 대자 전날의 왜적 1백여 명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재차 와서 성을 점거하였으므로 결국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들으니 수사가 선전관 원전이 전한 명에 따라 전라도 수사와 재차 약속하여 근간에 적선을 쳐부수려 한다고 합니다.
개전 초 원균 함대의 초라한 모습이다. ‘지난 19일’ 은 5월 19일인데 옥포해전이 있은 지 10여일 후다. ‘왜적 100여 명’ 을 원균의 수군은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다. 아래는 같은 날의 《선조실록》 에 기록된 경상감사 김수의 장계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
수영이 있는 조라포 · 지세포 · 율포 · 영등포 등이 이미 텅 비었는데 원균은 수군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로 피하고, 우후 우응진을 시켜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여 2백년 동안 저축한 물건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앞서 본 장계는 장계명이 ‘왜란에 대비하는 장계’ 이다. 그 다음부터의 장계는 명칭 자체부터 ‘경상도 쪽으로 구원 나가는 장계’ 로 바뀌어져 있다. 구원을 요청한 이는 경상감사 김수이며, 구원 요청 사유는 원균 함대가 부산 쪽으로 나아가므로 이순신 함대가 와서 원균의 관내를 대신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김수도 원균 함대가 아직 건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인식하게 된 이유는, 그 무렵까지 원균 함대가 싸웠다는 보고를 받지 못한 데 있었다. 싸웠다면 사상자와 공을 쌓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경상감사가 그 같은 상황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다.
※ 《충무공의 장계》 ※
삼가 구원병 나가는 일로 아뢰나이다.
이달 4월 20일 도달한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공문에 의하면 ‘적의 형세가 크게 성하여 부산 · 동래 · 양산이 벌써 함락되고 육지 안으로 향하므로, 본도 우수사에게 수군을 모두 이끌고 적선을 막기 위하여 바다로 나가도록 이미 명령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여러 진에는 전선이 1척도 없어, 만약 우도에 변고가 생기면 즉시 와서 구원해야 한다는 일로 장계를 올리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니, 이 뜻으로 감사 · 병마사들에게 의논을 통하여 시행케 하라’ 고 하였습니다.
김수는 행정절차를 잘 아는 문신이었다. 지금까지의 공문은 단순한 통보용이었지만 이번 것은 경상도 쪽에서 전라도에 정식으로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따라서 경상도의 군사령관이기도 했던 김수 감사가 조정에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전라감사와 출동 당사자가 될 이순신 수사에게도 사전에 통보를 해온 것이다. 즉, 출동준비를 서둘러 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 《충무공의 장계》 ※
적의 형세가 크게 성하여 여기까지 이르고, 연하여 큰 진을 함락시키고 내륙을 침범하니 지극히 통분하여 간담이 갈라질 것 같사온바, 신하된 자로서 심력을 다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고자 아니 할 자 없으리이다.
같이 나아가 싸우라는 조정의 명령을 엎드려 기다리면서, 소속 수군과 각 고을에 전선을 정비하고 대장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급히 공문을 돌리고 본도 감사 · 병마사에게도 의논을 통하였습니다.
경상감사로부터 공문을 받은 후 관내 수군에 출동 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했고, 감사와 병마사와도 의논을 끝냈다는 보고이다.
※ 《충무공의 장계》 ※
지난 번 분부에 ‘사정 형편상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가는 기회를 크게 놓치는 수가 있을 것인바, 그러나 조정은 멀리 있어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의 주장인 대장의 호령에 맡긴다’ 고 하셨으나, 신은 일개 주장으로서 독단으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겸관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 병마절도사 최원 등에게도 분부의 사연을 낱낱이 알리는 한편, 경상도순변사 이일, 겸관찰사 김수, 우도수군절도사 원균 등에게도 그 도의 물길 형편과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약속할 곳과 적선의 수효와 현재 정박해 있는 곳, 그밖에 여러 가지 전략에 관한 모든 일들을 아울러 급히 회답할 것을 파발마를 띄워 통고하였사옵니다.
각 고을과 포구에는 제반 전투 기구를 다시 깨끗이 매만져 놓고 명령을 기다리라는 뜻으로 엄중히 신칙하였나이다. 왜적들이 침입한 지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힘이 피곤해지고 온갖 군수품도 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온즉, 이럴 때 제어해야 하겠습니다.
조정은 김수 감사의 건의를 받고 이순신에게 4월 26일 도착한 출동명령서를 보내왔는데, 그것이 장계에서 말하는 ‘지난 번 분부’ 이다. 그런데 분부내용 중에 ‘대장의 호령에 맡긴다’ 고 한 글귀를 두고 작전명령으로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엇갈리게 해설할 수 있다면서 나름의 고심을 보고하고 있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27일 ※
지금 앞뒤 적선의 수효가 500여 척이나 되오니 우리 편의 위세와 무장을 엄중하게 갖추어 적을 습격할 형상을 보여서 적이 겁내고 떨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속 방답 · 사도 · 여도 · 발포 · 녹도 등 다섯 포구의 전선만으로는 심히 외롭고 약하므로 수군이 편성되어 있는 순천 · 광양 · 낙안 · 홍양 · 보성 등 다섯 고을까지도 함께 거느리고 가야겠는데, 경상도로 구원 나가자면 거쳐야 되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문을 돌렸사옵니다.
수군 여러 장수 중에 보성 · 녹도 같은 곳은 수삼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으므로, 집합할 적에 필시 기일에 대어오지 못할 것이지만, 다른 여러 곳의 장수들은 모두 이 달 29일에 본영 앞바다에 모이도록 거듭 약속한 뒤에 바로 경상도로 나갈 계획이 오며, 경상도순변사, 관찰사, 우도수사들에게도 공문을 옮기어 약속하였나이다.
전라좌 · 우도의 수군이 총동원되며, 상황은 죽을 각오로 나서는 마당이다. 이 같은 마당에 4월 26일에 도착한 조정의 출동명령에 애매한 점이 있었다면 당연히 문제(논란)가 되었을 것이다.
※ 물길을 따라 적선을 습격하라고 명령하는 명령서 (1592년 4월 26일) ※
물길을 따라 적선을 습격하여 육지의 적들이 겁내어 뒤를 연방 돌아다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그래서 경상도 순변사 이일이 내려갈 때, 이미 일러 보낸 바이거니와 다만 군사상 나아가고 물러가고 하는 것이 모두 반드시 기회 따라 해야만 그르침이 없는 법이다.
오직 마땅히 먼저 적선의 많고 적음과 또 지나가는 길목 섬 사이에 적들의 복병이 있나 없나를 살펴본 연후에 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좋은 방책이기는 하되 만일 사정과 형편이 해야만 할 것을 아니했다가는 기회를 크게 놓치는 수가 있을 것인바, 그러나 조정은 멀리 있어서 지휘할 수 없으니, 다만 그 도의 주장인 장수의 호령에 맡길 뿐인데, 본 도에서는 이미 서로 의논을 돌렸다고 한즉, 경상도에 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한 뒤에 기회를 보아 처치하도록 하라.
예로부터 전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임금은 일선의 작전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위의 유서에서도 이 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주장의 호령’ 으로 출동 여부를 놓고 관 · 민들의 엇갈린 의견을 출동 쪽으로 이끌어 내고, 또 출동에 필요한 준비를 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라좌수사는 전라감사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수사에게는 관내 기지대장들에 대한 인사권이 없고 군사 분야에 대한 관리 감독 및 작전권만이 있었을 뿐이다. 또 육군 쪽은 두 개의 병마사 직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전라감사가 겸직을 했다.
따라서 출동 문제는 육군 병마사들과도 협의해야 할 사항이었으며 지방 토호세력(유림과 명문가들)들도 설득해야 할 대상이었다. 예컨대 의병장 고경명, 최경희, 곽재우 등도 유림이자 명문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사대부 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군병, 의병, 군량미 모집이 근본적으로 어려워진다.
김성일이 왜국에 통신사로 다녀와서 왜국의 정세를 잘못 보고했지만 처벌하지 않고 경상도 지역의 도망간 관 · 군 · 민을 달래고, 의병모집 총책임자 격인 초유사에 제수했던 것도 김성일이 경상도의 유림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실정에서 ‘주장되는 장수의 호령에 맡긴다’ 는 것은 막연한 감이 있다. 자칫 여론이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순신으로서는 그 같은 군영은 피해야 했다. 이러한 우려를 밝혀둔 것이 앞에서 본 장계에서 ‘신은 일개 주장으로서 독단으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라고 한 부분이다.
원균에게 ‘물길 형편과 만나기로 한 장소’ 를 물었다는데, 원균 쪽에서 안내 선단을 보내야 함을 뜻한다. 당시에는 바다와 강에 구역을 나누고 전문 수로인을 두었다. 지도나 등대가 없었던 데다가 암초, 섬, 안개, 세찬 바람이 많았고 더구나 전시였으므로 왜군 함대가 복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며, 또 칠흑 같은 야밤에도 항해를 감행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순신은 김수로부터 구원요청을 받은 지 7일째 되는 4월 27일에 장계했는데, 당시로는 유례가 드문 신속한 응답이었다.
다음의 유서는 4월 27일 오후, 선전관이 가지고 달려온 것이다. 조정에서는 경상도 쪽의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돌아가자 이미 보낸 유서가 애매하다고 느꼈는지 이번에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은 출동 명령서를 내렸다. 즉, 이순신은 4월 27일 오전에 ‘좀 더 분명한 출동명령서’ 를 요청했고, 오후에 ‘좀 더 분명한 출동명령서’ 가 도착했다(작전명령과 같은 왕명은 유서(諭書)로, 벼슬을 내리는 왕명은 교서(敎書)로 내린다).
※ 원균과 합세하여 적을 치라고 명령하는 유서 (1592년 4월 27일) ※
왜적이 이미 부산 · 동래를 함몰하고 또 밀양으로 들어왔다는 바, 이제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를 본즉 여러 포구의 수군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 형세를 뽐내어 적을 덮쳐 격멸할 계획을 차린다 하니, 이는 한 큰 기회이니 그 뒤를 따라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원균과 합세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기만 한다면 적은 평정시킨다고 할 것조차 없으리라. 그러므로 선전관을 보내어 달려가 이르도록 하는 것이니, 너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독촉하여 거느리고 급히 나가 기회를 잃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이라 혹시 무슨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이에 구애되지는 말라.
앞의 유서보다 구체적이고 출동을 명하는 강도가 높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출동명령서이다. ‘원균과 합세한다면 승리한 것과 다름이 없다’ 고 한 것을 보면, 조정에서도 원균이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 발병부
발병부란 군사를 동원하는 비밀 표지이다. 지름 7cm 정도의 둥글납작한 나무쪽의 한 면에 ‘발병(發兵)’ 이라 쓰고 다른 한 면에 관찰사, 수사, 통제사 등 현지 군사책임자의 칭호를 기록한 것을 한가운데를 쪼개어 좌편은 임금이, 우편은 군사책임자가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왕이 군사동원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였을 때 좌편과 함께 교서를 선전관 등을 통해 보내는데, 군사책임자는 자기의 우편과 부합 여부를 조사한 후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 제도는 현지 장수들의 역적모의로 인한 출동이나, 적이 조작해낸 가짜 선전관이 어명을 빙자하여 엉뚱한 곳으로 출동시키고는 아군의 기지를 습격하는 사건 등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다음은 이순신이 선조 임금으로부터 비밀리에 받은 발병부 관련 유서이다.
※ 만력19년(선조 24년) 2월 15일 ※
너는 한 지역에 대하여 나의 위임을 받았으니 맡은 바 책임이 무겁다. 일반적으로 군대를 출동하여 사태에 적응하여 백성의 치안을 확보하고 적을 막아내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사무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관례가 있지만, 간혹 나와 너만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할 사건에 대하여는 비밀병부가 아니면 실시할 수가 없으며, 또 뜻밖에 야기되는 사태도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일 비상사태에 의한 명령이 있을 때에는 비밀병부와 맞추어 보아 의심이 없다고 안정된 뒤에야 명령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29호의 비밀병부를 찍어서 내려주는 것이니 너는 이를 수령하라.
만약 원균이 박홍의 경상좌도 해역으로 출동하는 경우라면 같은 도(道) 안에서의 출동이므로 경상감사 김수의 승인을 받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상도 해역으로의 출동은 타도간의 출동이므로 이광 전라감사의 승인과 비변사를 통해서 임금의 승인도 받아야 했다.
한편, 조정에서 보낸 4월 26일과 4월 27일자 유서는 임금 쪽에서 내린 출동명령서였다. 그러므로 어명을 받고 달려온 선전관은 반쪽의 발병부를 비밀리에 휴대하고 내려왔을 것이다. 만약 휴대하지 않았다면 가짜 선전관으로 의심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리길을 달려왔을 선전관은 결코 의심받을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 무렵은 정여립의 모반사건 이후 발병부를 재발해해 두었을 때이다.
※ 선조 26년 7월 14일 ※
그대는 한 지역에 대하여 나의 위임을 받았으니 맡은 바 책임이 무겁다. 일반적으로 군대를 출동하여 사태에 적응하여 백성의 치안을 확보하고 적을 막아내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사무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관례가 있지만 간혹 나와 너만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할 사건에 대하여는 비밀병부가 아니면 실시할 수가 없으며… 그러므로 비밀병부를 찍어서 내리는 것이니 그대는 이를 수령하라.
선전관이 한성을 떠난 것은 신립이 충주를 향해서 출발한 4월 20일 경이다. 신립은 내려오면서 경기 · 충청 지역의 역졸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지만 선전관은 어명을 전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발병부를 비밀리에 가지고 왔을 것이다.
발병부는 어명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므로 역졸들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선전관에게 험한 육로길을 안내해 주었고 선전관은 주야로 달려올 수가 있었다. 그 후 선전관을 안내한 역졸들은 탄금대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신립의 탄금대 패전은 4월 29일. 선조가 피난길에 오른 것은 4월 30일 캄캄한 새벽이었다. 그리고 비, 빈, 상궁, 나인들은 물론 대신들도 울면서 도성을 나섰다.
이순신의 4월 27일자 장계는 “출동하라” 는 어명에 대한 답변서이며, 천리길을 주야로 달려온 선전관과 선전관의 길 안내를 맡았을 역졸들의 노고에 대한 고마움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계는 경기 · 충청의 파발마 조직이 탄금대 패전으로 와해되면서 조정에까지 올라가지 못한 것 같다. 발병부를 가지고 달려온 군관이 그 후 한성에 돌아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 원균의 구원요청
원균의 구원요청 공문이 도착한 것은 4월 29일이고, 이 공문을 받은 이순신은 4월 30일 다음의 장계를 올렸다. 왜군이 한성 외곽에 다다른 것은 5월 1일, 한성에 입성한 것은 5월 3일이다. 그래서 이 장계도 조정에서는 받아보지 못했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30일) ※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나이다.
지난 4월 29일 오시(상오 12시) 경상수사(원균)의 회답 공문 내용에, ‘적선 500여 척이 부산 · 김해 · 양산강 · 명지도(김수군 명지면) 등 여러 곳에 배를 대어 진을 치고 제 맘대로 육지로 쓸어 올라가 연해안 각 고을과 포구의 우리 병영과 수영이 거의 다 함락되어 봉홧불이 아득히 끊어진 것이 지극히 통분합니다.
그래서 본도의 수군을 뽑아 출동시켜 적선 10여 척을 쫓아가 깨뜨리고 불살라버렸으나, 나날이 적병은 늘어 그 형세가 더욱 성해져 적은 많고 우리는 적기 때문에 대적할 수 없었고 본영 또한 이미 함락되었으니 귀도의 군함을 남김없이 거느리고 당포 앞바다로 달려옴이 좋겠습니다’ 고 하였기로…
‘적선 10여 척을 쫓아가 깨뜨렸다’ 는 기록은 원균 수사가 그 무렵의 전공(戰功)을 밝힌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장계 이외에서는 기록된 것이 없어서 원균이 꾸며낸 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내용도 왜군의 어떤 함대와 싸웠다는 것인지, 소형의 왜군 탐색선들을 합한 숫자가 10여 척인지, 조선군 쪽에서 누가 공을 세우고 누가 죽었는지, 또 이로 인해 포상과 위로를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 무렵 왜군의 고니시, 가토, 구로다의 선봉군들은 한성에 먼저 입성하려고 경쟁적으로 북상하고 있었고, 그 후 보급로 개척에 나선 것이 옥포 · 당포 등지에서 패전한 왜군들이다. 일본 쪽에도 그 이상의 자료가 없다.
원균의 함대가 그 이전에 단독으로 해전을 벌였다면 화약무기가 없는 처지에서 과연 어느 누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30일) ※
소속 수군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유군장 발포 가장(임시장수) 영군관 훈련봉사 나대용,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한후장 영군관 급제 최대성, 참퇴장 영군관 급제 배응록, 돌격장 영군관 이언량 등과 약속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선봉장은 우수사와 약속할 때 그 도의 장수로 선정할 계획이옵고 본영은 신의 우후 이몽구를 유진장으로 정하오며 방답 · 사도 · 여도 · 녹도 · 발포 등 다섯 포구에는 신의 군관 중에서 담략이 있는 사람을 가장으로 정하여 엄중히 신칙하여 보냈나이다.
경상도 쪽으로 출동하기 전에 함대의 편성과 출동기간 동안 누구에게 후방을 지키게 했는가에 대한 보고 부분이다.
출동 준비, 후방 관리, 그리고 조정에 보고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빈틈이 없다. 발포는 기지대장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본영 군관 나대용으로 하여금 함대를 이끌게 했다.
방답 · 여도 · 사도 · 녹도 · 발포 등에 본영 군관들을 배치시킨 것은 이들 구역이 여수에 인접한 기지들이기 때문이다. 여수 본영에 또 다른 왜군 함대가 기습해 온다면 잔류 함대를 이끌고 달려오게 하는 작전이며, 정걸이 조방장으로서 전체를 지휘했을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30일) ※
신은 수군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오늘 4월 30일 인시(새벽 4시)에 출발하려고, 경상우도 소속이자 본영의 이웃 진(鎭)인 남해현 미조항 · 상주포 · 곡포 · 평산포 등 네 진은 이미 첩입군(공동관할 지역의 군대. 공동관할 지역이기에 전라수군 쪽에서도 군사적 요구나 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 듯)으로 편입하여 그곳 현령, 첨사, 만호 등이 군선을 정비하여 중로까지 나와 기다리도록 4월 29일 새벽에 비밀 공문을 봉하여 사람을 달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미시(하오 2시)에 신이 보냈던 영진무 순천 수군 이언호가 달려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남해 고을 성 안의 관청 건물과 여염집들이 온통 비었고 굴뚝에 연기라곤 나지 않고 쓸쓸하며, 창고문은 열려 곡식은 모두 흩어졌고, 무기창고의 병기도 또한 모두 없어지고 말았는데, 군기창고 행랑채에 다만 한 사람이 남아 있기에 그 까닭을 물어본즉, 적의 형세가 급박하여 온 성안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서 도망해버리고 현령과 첨사도 모두 따라서 도망갔는데 그 간 곳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쌀섬을 지고 장전(보통 화살)을 가지고 남문에서 달려 나오다가 화살 일부를 주더이다.” 라고 했습니다.
신이 그 장전을 살펴본 즉 곡포라고 새겨진 것이 분명하므로 성을 비우고 도망갔다는 말이 그럴듯하오나, 하인들의 말인지라 꼭 그렇다고 믿기도 어려워서, 신의 군관 송한련에게 분부하여 “사실이 그렇다면 도리어 적에게 군량을 대주어 본도로 침입해 들어와 오래 머물러 퇴각하지 않도록 하는 셈이 되니 곡식창고와 무기창고를 불살라 없애버리라” 는 전령을 주어 달려 보냈습니다.
외적의 침공이 있을 경우 본여에서 소집명령을 내리면 관내 기지들은 본영으로 달려와야 하는 것이 당시의 군법이었다. 원균수사도 법대로 소집령을 내렸을 것이고 이에 남해도의 미조항 · 상주포 · 곡포의 대장들도 몇 척의 병선을 타고 달려갔을 것이다.
기지대장들은 떠날 때 어느 군관에게 기지를 지키고 있도록 명령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점에 경상감사 김수와 병마사 조대곤이 청야작전을 하라는 공문을 보냈으므로 경상도의 백성과 모병 대상인 장정, 그리고 현역 병사들까지 피난을 떠났다. 이 같은 현상은 경상도 각 고을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때문에 그 후 김수 감사는 오랫동안 3사의 탄핵을 받았고, 의병장 곽재우는 ‘김수를 죽여야 한다’ 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순신은 수로안내 겸 공동출동을 요청하기 위해 4월 29일 선발대를 남해로 보냈다. 그러나 모두들 피난을 가고 없었다.
이순신은 김해와 가배량 등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을 원균의 공문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남해도까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이순신은 첩입군 지역인 남해도 여러 고을의 식량과 군기 등이 왜군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군관 송한련(후에 《옥포파왜병장》을 행재소에 가져가는 군관)에게 불태울 것을 지시했는데, ‘송한련 일행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이미 무기 등 온갖 물자도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 고 했다’ (1592년 5월 2일자 난중일기)라고 한 바, 이는 현지 백성들이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동으로 원균의 함대는 판옥선 4척, 협선 4척의 초라한 모습에 안정된 후방 고을이 없는 외로운 함대로 전락했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30일) ※
그러나 대개 흉측한 적들이 형세를 떨쳐 패를 갈라 도적질하며 한 패는 육지로 향하여 마구 쳐올라가고 또 한 패는 연해얀으로 들어가 남김없이 깨뜨리되 육수군 모든 장수가 하나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버리고 수군 진영으로 남은 곳이라고는 오직 이 (경상)우수영과 남해 평산포 등 네 진 뿐이옵니다.
이제 듣자오니 우수영도 또한 함몰을 당했고 남해의 온 섬들도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다 하옵는바, 소위 우수영은 신이 지키는 진과 바다 하나로 서로 연접되었고 남해는 북 소리, 나팔 소리가 서로 들리며 서로 앉은 사람의 모양조차 똑똑히 세어 볼만한 형편이므로, 본 도가 침범당할 걱정이 조석으로 박두했다오니 극히 한심스럽습니다.
경상 우수영 기지들이 이러한 형편이 되자 전라좌수영 기지들은 최전방 기지가 되었다. 그래서 전라좌수영 수뇌진은 ‘앉아서 죽느냐’ 아니면 ‘나아가 싸우다가 죽느냐’ 를 결정해야 했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30일) ※
본도 안의 육지와 연해안 각 고을과 변두리를 방비함에 있어 새로 뽑은 조방군 등 억센 군졸들은 모두 육전으로 나가고 변두리 작은 진지에는 병기를 가진 자가 드물고 다만 맨주먹만 쥔 수군들뿐이어서 그 형세가 심히 약하고 달리 막을 방책도 없는 터입니다.
수군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도 바다로 내려가 사변에 대비하다가 관찰사의 전령으로 전주로 달려갔고, 더구나 오래 임지에 있던 자들은 한 번 소문만 듣고도 가솔을 끌고 짐을 지고 피난가는 행렬이 길에 연달았는데, 혹은 밤을 타서 도망하고 혹은 틈을 엿보아 이사하며, 본영의 파수병과 본고장 백성들도 또한 이 같은 자들이 있으므로, 신은 그 길목으로 도망가는 놈 잡을 장수를 보내어 도망간 두 사람을 잡아와서 우선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하여 군대 안을 진정시켰습니다.
‘천리 밖의 뜻밖의 걱정’ (4월 26일과 4월 27일자 조정에서 내려온 유서 참조)이 생겼던 탓에 출동이 며칠 늦어졌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30일) ※
흉악한 적도들이 벌써 조령을 넘어 곧 서울을 침범하게 되어 본도 겸관찰사가 홀로 분발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향하여 왕실을 구하는 일에 힘쓴다 하옵는바, 신이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탄식하면서 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 먼저 육지 안으로 들어간 왜적부터 없애고도 싶사오나 국경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 함부로 하기 어려워 부질없이 답답한 채 분을 참고 스스로 눅이며 엎드려 조정의 지휘를 기다립니다.
전라감사 이광의 한성 구원작전에 대한 언급이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30일)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제 적의 형세가 왕성해진 것은 모두가 해전을 하지 못하고 적이 제 맘대로 상륙하게 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상도 연해안 고을들은 깊은 해자와 높은 성으로 든든한 곳이 많겠는데, 성을 지키던 비겁한 군졸들이 소문을 듣고 간담이 떨려 모두 도망갈 생각만 품었으므로 적이 에워싸기만 하면 반드시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날 부산 · 동래 연해안 여러 장수들로서 전함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습격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살펴보아 적절히 병법대로 진퇴하여 육로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산 · 동래 등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전함을 잘 정비하고 병법대로 해서… 육지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라는 대목은 임진왜란을 부산포 정도에서 초기에 막을 수 있었다는 전략적 시각이다.
※ 충무공의 장계 (1592년 4월 30일) ※
생각이 이에 미치매 감개가 더욱 간절하와 원컨대 한 번 죽기로 기약하고 곧바로 범의 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기운들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하나라도 씻으려 하옵는바, 성공하고 실패하고 잘 되고 못 되는 것이야 신이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옵니다.
‘성공하고 실패하고… 미리 헤아릴 수’ 라고 한 대목에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다’ 는 결사전의 각오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이 소중한 내용이 담긴 4월 30일자 충무공의 장계는 중도에서 실종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