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전화로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단순히 책 소개로 생각했는데, 메일을 확인해 보니 ‘나를 변화시킨 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따져보면 조금씩이나마 나를 바꾸지 않은 책도 별로 없겠지만 한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꾼 책을 한 권으로 내세우기란 쉽지 않다.
전공인 역사를 중심으로 생각해 봤다. 젊은 시절에 사명감보다는 그저 치기로 역사를 공부하기는 했지만 한 평생 연구만 하겠다는 결심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격동의 시절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심정이었을까? 역사 전공자로서 방송대에까지 들어왔지만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부끄러운 적이 많다. 많은 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에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역사를 전공했다고 해서 역사를 전유할 수는 없다. ‘역사’는 공기와 같아서 어느 공간, 사물, 인간에도 스며있다. 연구실의 전문가만이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 말기 독립운동을 증언하는 『항전별곡』이라는 뛰어난 작품을 쓴 김학철은 중국항일전선에서 선무공작을 했다. 전단을 작성하면서 유럽 전선의 독일군 사상자의 수를 10%가량 불려놓자, 그가 몹시도 존경하는 전우 김학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김학철이 전단이 뿌려질 날에는 실제 사상자가 이 정도는 충분히 될 것이라고 항변하자, 그는 웃으며 원고 마지막 줄에 적힌 날짜를 가리켰다. 모든 진실이 사라진다는 전장에서도 우리의 항전은 거짓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유쾌한 일침. 뒷날 전쟁이 끝난 뒤 김학철이 그토록 진지하게 역사증언을 많이 남긴 것도 김학무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년 전쯤, 학부에서 역사교육을 몇 년 받은 정도인 30대 중반의 젊은 노동운동가가 팀장이 되어 우리나라 현대 노동사를 10여 권짜리 저작으로 정리한 것을 보고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자료의 보존과 수집에서 집필까지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역사학자도 아닌데, 더구나 저토록 젊은 나이에 그런 대단한 작업을 하다니! 역사 연구자에게 통렬한 일침을 놓았다고 할까? 이렇게 본다면 역사 서술에서는 학위나 직업적 소명보다도 시대를 고민하고 사회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사람의 몫이 더욱 중요한 듯하다.
권정생의 『한티재 하늘』은 그 책장을 펼치자마자 쓰나미같은 감동을 주는 한편 커다란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그의 글은 무엇이든 삶의 온기가 가득하여 마음을 정화시키지만, 특히 역사를 하는 입장에서 『한티재 하늘』은 감탄과 함께 부끄러움도 가득 주었다. 작가의 문장력이나 문학적 상상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듣고 보고 딛고 살아온 토양을 자료로 해서 역사적 상황과 사건의 전개를 저렇듯 진솔하고 짜임새 있게 쓸 수 있다니!
『한티재 하늘』은 민초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중심이어서 당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없다. 열강이 밀려오던 당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적 전망이나 새로운 체제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자세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어느 시대든 인간적인 삶은 지속하게 마련이다. 이 책은 보통 역사소설이 그러하듯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그럴듯하게 스토리를 구성한 것이 아니다. 당시 실상을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것, 또는 나름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라고 본다.
동화작가로서 명망이 높았던 권정생은 왜 역사소설을 썼을까? 그 자신이 평생 듣고 본 이야기를 꼭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계속 가슴에 품었다가 늦게 쓰기 시작하였고, 끝내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머릿글을 읽으면 권정생은 소설을 쓰기 이미 20년 전, 그가 동화를 쓰기 시작하던 때에 청송 칠배골, 사구지미 고갯길 등 뒷날 소설의 등장인물이 살았던 곳을 쭉 돌아보았다. 어머니에게서 듣고 자신이 듣고 보았던 기억을 계속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현장에서 확인해나갔다. 그는 이렇게 뭉클뭉클 피어오른 기억을 결국 글로 담아냈다.
작가는 이야기가 소설의 형식이지만 사실에 기반하였다고 분명히 밝혔다. “어머니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 서럽고 고달팠던 우리네 백성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사투리로 들려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 옮겨 적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일을 하시면서 가만가만히 들려준 이야기여서 가슴에 새겨졌을 것이다. 내용 가운데는 너무 극적인 사건들도 종종 나와서 저자가 꾸민 이야기가 아닐까 의문스러운 일도 있지만, 그것이 가상이 아니라 들은 이야기에 기초하였기에 그대로 서술한 듯하다. 그가 서술한 역사는 가르치는 역사가 아니라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역사였다.
그 속에 조선의 사회상, 한말의 상황, 일제의 폭압이 과학적으로 자세하게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녹아들어가 있다. 심지어 일제 말 해방 초기에 자신이 병든 몸으로 거지생활을 하며 떠돌던 일도 우리의 역사와 관련 있음을 작가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자들이 귀중한 자료를 찾아내 한 시대, 또는 어떤 인물을 과학적으로 서술한 뛰어난 연구도 많다. 그와 달리 이 소설 속에 무상하게 던진 짧은 구절에서 당시 사회상이 잘 정리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나라에서는 동학군을 ‘빤란구이’(반란군)라고 하면서 토벌하였지만, 민초들 사이에 동학군은 ‘빤란구이’가 아닌 나라를 구하는 의병이라는 항변이 터져 나온다. 평생 움츠리며 살던 이들도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시대의 분위기를 몸으로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의병이 되고 활빈당이 되었던 사람들이 결국은 화적패가 되는 현실과, 봉기에 앞장섰던 양반들이 진작 발을 빼고 물러나 살던 현실도 한 마디로 정리한다. 개화세상이 되고 왜놈이 들어오니 근대문물이 들어오지만 삶은 더 열악해졌다. 소작쟁의는 실패했고, 어떤 이는 간도로 이민가기도 하였다. 신작로 공사를 한다고 농사짓는 남정네를 끌고 나와 강제로 일을 시켰다. 양반에게 시달리던 백성들은 남의 나라 총칼 밑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1930년대 개백정이 순사를 뒤세워 마을을 다니면서 개를 잡아갔던 일이다. 만주에서 싸우는 군인에게 먹인다거나 기름을 짜서 기계를 돌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작가가 일제의 침략만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군사적 침략 못지않게 그들이 가져온 물질문명도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 자체가 침략의 일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물질문명 중심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권정생은 현대 사회의 물신주의와 인간의 끝없는 욕망, 생태파괴도 매섭게 비판했다.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김진경 저) 라는 매우 성찰적인 책이 있다. 서구사회가 300년을 거쳐 이룩한 근대화를 한국은 불과 30년만에 압축해서 따라잡느라고 스스로의 성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따져 보면 서구사회 자체가 산업혁명 초기 수십 년 사이에 수백년을 압축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그들도 성찰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타자에 대한 온갖 침략과 수탈을 자행한 것은 아닐까? 숱한 압축과정을 거쳐 형성된 지금 사회에서 우리는 압축한 만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책 속에는 민초의 온갖 지혜도 들어 있다. 이야기의 주요 배경은 학교는 고사하고 서당조차 없어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곳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도 단 한 차례 「용담유사」가 거론되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자연과 생활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 그러면서 이 책은 인간사회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전체적으로 민초들의 삶은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즐거움과 괴로움이 교차되고 있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양반과 싸우고 왜병과 싸우는 것도 바로 민초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촛불의 뿌리는 이렇게 올라갈 수 있다.
책은 인간에 대해서도 그 본연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체로키 부족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착한 늑대, 나쁜 늑대가 한 사람에게 모두 들어있듯, 이들 이야기에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번갈아 나타나기도 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았다. 선을 기르지 못했거나 가렸을 때 악한 행동이 나타났다가 다시 선한 행동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모습을 그렸다.
작가는 왜 이 책의 제목을 『한티재 하늘』이라고 했을까? 한티재는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넘나드는 대표적인 고개이다. 슬플 때는 하늘을 본다고 하듯이 그들 모두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 어디든 비추고 있는 하늘을 올려봄으로써 너와 내가 함께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석이한테 칠석날에만 만나는 할바이 할마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동준이가 무덤에서 분옥이를 그리며 힐끗 쳐다본 것도 바로 하늘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늘이 곧 희망이었다. 아들을 일찍 떠나보낸 어머니가 ‘너 대신 푸른 하늘 바라보며 살겠다’는 시구가 생각난다. 하늘은 누구와도 공감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매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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