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6개국 기행문
(9월22일~10월3일)
9월 22일
여행 시작
처음 유럽여행을 가다.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라면을 끓여서 아침식사를 대충 해결하고 동대구역으로 갔다. 인천공항 행 KTX를 타고 편안하게 인천공항까지 3시간 만에 올 수 있었다. 부산에서 인천공항까지 가는 열차가 얼마 전에 생겼기 때문이다.
공항에 도착하여 휴대폰 로밍을 하고 여행사 가이드를 찾아서 안내에 따라 짐을 부치고 탑승권을 받았다. 아직 탑승할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하고 지나가는 직원에게 식사 할 곳을 물었더니, 지하에 있는 직원식당을 안내해 주었다. 거기서 3500원 식권 2장을 사서 아침 겸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13시 10분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하였다. 창가로 보이는 건물들과 시내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비행기가 구름위로 날아올랐다. 한참을 지나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넓은 대지와 강물, 그리고 작은 도시들이 그림처럼 보였다. 우리 나라의 산골짜기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대한항공은 기내에서의 서비스도 만점이었다. 예쁘고 친절한 승무원들의 안내와 장시간의 여행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실내화, 무릎담요, 영화 감상이나 게임,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기기가 준비되었으며, 각종 음료와 식사가 친절한 안내와 함께 나왔다. 우리나라의 음식이 나와서 더 좋았다.
비행 정보를 보니 다음과 같은 도시들의 하늘 위를 날아서 런던 히드로공항에 가고 있었다. 13시 10분에 이륙하였으니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12시간 가까이 비행하였으나 계속 낮이었다. 8시간 이라는 시차 때문이었다.
인천 ☞ 선양 ☞ 울란바타르 ☞ 우르무치 ☞ 모스크바 ☞상페테르부르크 ☞ 볼호프 ☞나르비 ☞ 탈린 ☞ 암스테르담 ☞ 런던
드디어 비행기가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창가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붉은 기와지붕의 집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어릴 때 크레파스로 많이 그리던 그 집들이었다. 17시 15분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로 향하였다. 고속도로 주변의 환경은 호주와 많이 닮아 있었다. 높은 산이 없는 평지에 초지가 조성되어 있었고, 간간이 풀을 뜯는 양떼를 볼 수 있었다. 산이 없는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이곳 사람들의 터전은 풍요로워 보였다.
Britania Hotel - 런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로 크지는 않았지만 침대 2개와 2층 침대 1개가 있어 가족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오래 된 건물이었으나 깨끗하게 잘 보존 유지되어 쉬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유럽은 로비가 0층이므로 우리가 묵은 3114호는 4층에 있는 객실이었다.
9월 23일
세계의 중심이었던 런던
첫 여행지로서 런던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주차난이 심하기 때문에 버스가 길가에 잠시 주차하여 승객을 내려준 다음 약속 시간이 되면 약속장소에 나타나서 우리를 태우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다.
런던 중심을 템즈강이 흐르고 있으며 최초의 다리 타워브릿지를 구경하고, 우리나라 6.25전쟁 때 참여하였다는 군함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강 건너에는 현대식 고층 빌딩이 보였는데 대부분 금융기관이라고 하였다. 타워브릿지 주변에는 현장학습을 나온 런던의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나와
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다리가 잘 나오도록 셀카봉을 이용하여 인증샷을 찍었다.
웨스트민스트 사원이 있는 런던의 중심거리에서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평일 낮 시간인데도 오늘은 특별한 미사가 있는 날이라서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사원에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국회 의사당 건물도 세계 최초의 의사당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지금은 좁아서 거리 반대편의 건물도 함께 사용한다고 하였다. 세계 최초의 병원, 그리니치 천문대 등 교과서에서 배운 건물들이 눈앞에 있으니 여행하는 느낌이 배가 되었다. 역사의 건물들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셀카봉을 이용하였더니 거리의 시민들이 신기하다는 듯 주시하였다.
영국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3가지 붉은 색깔은 시내버스, 우체통, 공중전화박스라고 한다. 붉은 시내버스가 자주 눈에 띄었다.
거리의 건물들은 모두 같은 색깔 같은 모양으로 지어졌으며 천 년 전에 살던 사람의 문패가 아직 있다고 가이드가 안내해 주었다. 지금도 잘 수리하고 깨끗이 보존하며 좀 불편하더라도 그대로 잘 유지하여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하였다. 런던을 다녀가는 여행객 수가 연간 1억 명에 달한다고 하니 조상들의 빛나는 문화유산이 후손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는 것이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 자존심이 강한 나라라고 한다. 옛날부터 귀족이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대물림한 부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식민지 나라에서 이민 온 대부분의 시민들은 비싼 월세(250~1000만원)와 소득의 40%정도의 높은 세금을 부담하며 힘겹게 살아간다고 한다. 1년 동안 모은 돈으로 여름휴가를 즐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돈을 저금하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모든 복지가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돈을 모을 필요성도 없다고 하였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므로 신흥귀족이 되기는 무척 힘들다고 한다. 헤리포터의 작가나 유명 축구선수가 되기 전에는 신흥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첼시 거리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김밥집이 있는데 김밥 1조각에 3500원이나 한다고 한다. 인기가 많아 김밥집 사장님은 런던 시내에 수십 개의 체인점을 운영하는 재벌이 되었다고 했다.
귀족층은 개인 프라이버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조용한 변두리에 저택을 지어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런던 시내 중심지에는 이주해 온 여러 민족이 힘겹게 살아간다고 하였다. 영국의 집들은 거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빈틈없이 지어져 있으며, 1층이 높게 지었는데 그 이유는 옛날에 마차가 다닐 때 말의 배설물 냄새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층은 손님을 맞이하는 로비, 지하는 부엌이나 창고, 하인들의 숙소, 2층은 식당 및 거실로 3층은 침실 및 부부 공간, 4층은 어린이들 공간이라고 하였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서 버킹검 궁전으로 향하였다. 공원이 모두 왕실 소유의 것으로 시민들을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 하였다. 공원의 산책로가 끝나자 금빛으로 빛나는 조형물이 궁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모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조각 작품들이었으며 금빛으로 빛나는 정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정문 주변에는 많은 관광객이 인증샷을 찍기에 바빴다. 나도 빡빡한 일정 때문에 궁전 앞 광장에서 인증샷만 남긴 채 돌아서야만 했다. 2014년 9월 23일 내가 찾아갔던 그 때는 여왕님이 계시지 않았다. 궁전 앞에 대영제국의 기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오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특별 미사가 있다고 했는데 거기로 행차하신 것 같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하여 버스로 이동하면서 축구로 유명한 첼시 거리와 영국의 최고 럭셔리 백화점인 헤롯 백화점 거리를 지났다. 점심 메뉴로는 야채스프와 로스트비프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고기가 다소 질겼지만 조미료 맛이 나지 않는 식재료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대영 박물관 견학을 위하여 버스로 이동하면서 영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은 나라다. 지하철, 병원. 국회의사당, 박물관 등등… 1번 노선의 지하철은 최초로 만들어져서 냉난방 시설이 되지 않아 여름철에는 덥고 땀 냄새 때문에 이용하기가 무척 고통스럽지만 현지 사람들은 그대로 잘 이용한다고 하였다. 그 곳도 여행자가 찾는 지하철역이라고 하였다.
대영 박물관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부를 관람하였다. 현지 가이드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에 대하여 역사적인 사실이나 유물의 가치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재미있게 관람하였다. 대영제국의 위대한 힘을 박물관에서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전시된 문화재가 모두 식민지 국가에서 가져와서 연구하여 정리한 것들이라고 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알려주는 벽화, 파르테논 신전이 무너지면서 깨어져 내린 천정 아랫단에 있던 부조물들의 조각을 그림이 이어지도록 연구하여 맞춰서 전시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 형상과 피라밋 속에서 잠자든 왕들의 미라들이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고증으로 잘 전시되어 있었다.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에서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 파리로 여행 장소를 옮겼다. 바다 밑으로 기차를 타고 3시간 만에 건너 온 것이다. 떼제베는 한국의 ktx와 같은 회사에서 만든 열차인데 한국의 ktx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승차감이 좋았다. 기차 속에서 가이드가 준비해 준 김밥으로 저녁을 먹고 파리의 종착역에 도착하였다. 국가간의 여행이기 때문에 간단한 검색대를 통과하였다. 버스를 갈아타고 파리 근교에 있는 투스타 호텔 ‘생텍지베리’에 투숙하였다. 신축중이라 깨끗하였지만, 침대만 2개 있는 심플한 숙소였다.
9월 24일
패션의 도시 파리 1
프랑스는 우리나라의 6배 되는 면적에 인구 6600만명으로 인구 밀도가 낮은 나라이다. 그런데 파리는 서울의 6분의 1크기에 인구 400만명 정도가 사는 복잡한 도시라고 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가는 도중 외관이 화려한 건물이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들어선 거리를 지났다. 나폴레옹 3세가 1850~1870년까지 20년 동안 주변 산의 석회암을 이용하여 건설한 오스만식 건축물들이라 하였다.
주상 복합 건물로 1층은 까페나 상점, 2층은 천정이 낮아 1층의 창고나 점원의 숙소로 쓰이며, 3층은 메인층으로 건물주가 살고, 4,5,6층은 월세 임대 아파트이며, 다락방은 하녀의 방으로 쓰였다고 한다. 건물마다 굴뚝의 수를 보면 살고 있는 세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파리의 중세 도시는 미로 같은 길가에 목재 건물로 길거리에는 오물천지여서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향수와 하이힐이라고 하였다. 또 석회질이 많은 물로, 잘 씻지를 못하여 피부병이 많아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각종 피부보호제가 발달하였다고 하였다. 설명을 들으면서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루브르 박물관은 여러 왕들이 증축을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이 ㄷ 자의 거대한 박물관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연결통로 역할을 하는 유리관은 최근에 공모작으로 뽑혀서 지었다고 하였다. 비너스 상과 각종 조각상들 그리고 고전주의 낭만주의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나리자 그림 앞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있어서 그림을 가까이 가서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인증샷만 남기고 그 방을 나왔다. 일생에 한번 교과서 그림으로만 보아 왔던 작품들을 직접 본 감동은 박물관 문을 나서는 순간 까지도 벅차올랐다.
1850년부터 백화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쁘렝땅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다. 176유로 이상을 사면 12%면세를 해준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보고 간 버버리 핸드백을 아내에게 사주기로 했다. 1195유로여서 면세 혜택도 받았다. 내가 아내와 32년이나 살면서 처음으로 사준 명품 핸드백이었다.
점심 식사 후 샹제리제 거리와 개선문을 지나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버스에서 가이드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루이 14세가 5세에 왕이 되어 귀족들의 눈치만 보다가 25세에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넓은 정원을 조성하면서 절대군주(짐이 곧 국가다.)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거울의 방은 화려하고 호화스럽기로 으뜸이란다. 왕과 귀족들이 어울려 만찬을 즐기고 가무를 즐겼을 그 때를 회상하며 관람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1층은 역사를 소개하는 방으로 대충 지나쳤다. 2층은 왕과 왕비들의 방으로 먼저 왕들의 방으로 천청은 모두 그림으로 장식되었으며, 왕의 동상과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당시의 왕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왕들의 방을 지나자 거울의 방이 나타났다. 방 길이가 72m이며 17개의 창으로 정원을 내다볼 수 있게 설계 되었으며 반대편 벽은 거울로 장식되어 있었다. 화려한 샹드리에 불빛 아래서 만찬을 즐기며 무도회를 즐겼을 왕과 귀족들의 생활이 상상되었다. 거울의 방을 지나 왕비들의 방이 나타났다. 마리 앙뚜와네뜨의 방에 들어갔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과 왕비가 쓰던 침대, 벽난로,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 때 시민군이 쳐들어오자 벽난로 옆 좁은 통로로 도망하였다는 설명을 듣고, 다비드라는 화가가 그린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을 감상하였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한식집에서 밥과 김치를 먹었다. 그리고 에펠탑과 세느강 유람선 탑승을 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에펠탑은 150년 전 에펠이 산업박람회에 전시한 작품으로 철로 구조물 부품을 만들어 이어 붙여서 만든 작품으로 철거하려다가 그냥 둔 것인데 지금은 유명한 관광 자원이 되었다고 한다. 탑 2층까지 모노레일로 올라가서 파리 시내를 관망할 수 있었다. 모노레일도 탑을 만들 때 함께 만들어 졌으며, 그 당시에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였으나 동력으로 사용할 수 없어서 물통의 수압을 이용하여 모노레일을 움직였다고 하였다. 지금도 물통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9월 25일 (목)
패션의 도시 파리 2
예술인의 동네로 잘 알려진 몽마르뜨 언덕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가로질러 올라갔다. 언덕위에 웅장한 성당 건물이 보이고, 계단 위 광장에는 회전목마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드니 신부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성당으로 올라갔다. 서로마 군사들에게 목마르뜨 언덕에서 처형을 당한 드니는 자신의 떨어진 머리를 들고 7km 떨어진 성드니 성당까지 걸어가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언덕 위에 지어진 성 당은 외관이 화려하고, 내부도 넓고 다른 성당과 비슷하였다.
몽쥬약국에는 두피부터 발끝까지 피부를 케어하는 제품들을 팔고 있는데 한국 관광객들이 효능을 알고 인터넷에 게시하면서부터 유명해졌다고 한다. 아내는 핸드크림과 샴푸 등 몇 가지 제품을 구입하였다.
파리의 상징인 개선문 광장에서 내렸다. 먼저 온 관광객들이 개선문 아래, 위에서 사진 촬영이 한창이었다. 개선문 위에는 예약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광장에서 개선문을 향하여 사진을 찍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라고 명하여 세워진 문으로, 자신은 살아생전에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섬으로 유배되어 죽은 지 20년 만에 겨우 통과하였다고 한다.
개선문은 12개의 대로가 뻗어 있는데 그 중 콩코드 광장으로 이어지는 인도가 아주 넓은 거리가 있다. 이 거리에서는 파리의 이벤트가 있을 때 중심 무대가 되는 곳으로 파리 인들의 축제의 장이 되는 곳이었다. 7월 14일 혁명 기념일에는 군사퍼레이드, 국제 사이클 경기의 피날레 장소, 크리스마스 축제 등이 있는 장소이며 히틀러가 개선 행군을 한 장소이기도 한 이 거리를 샹제리제 거리라고 하였다. 샹제리제 거리의 가로수는 사각 기둥모양으로 전지되어 있었다.
루이 15세 때 만들어진 콩코드 광장은 루이16세와 앙뚜와네트 왕비가 처형된 장소라고 했다. 광장 입구에 세워진 이국적인 탑이 있는데 그것은 이집트에서 3300년 전에 만들어진 오벨리스크인데 프랑스 학자가 고대 상형문자를 해독해준 답례로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오랜만에 김치찌개로 점심 식사를 하고 역으로 이동하여 유로레일을 타고 4시간 동안 프랑스 남동쪽 벨포드 역으로 여행하였다. 파리 시내의 복잡하고 불편한 생활과는 대조되게 끝없이 넓은 들판의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가축들이 한가로워 보였다. 푸른 하늘과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들판을 보니 선택 받은 프랑스가 부러웠다.
벨포드 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시간을 더 달려 융프라우 기차를 타기 쉬운 스위스의 인트라켄 인근의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 2층에서 맞이하는 주인 할머니의 예쁜 차림새와 상냥한 태도가 긴 여정의 피로를 잊게 했다.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객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침대 3개에 오리털 이불을 예쁘게 장식해서 깔아두었으며 작은 탁자위에는 초콜렛을 하나씩 두어 투숙하는 손님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모두 원목으로 만들어진 가구가 품위 있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9월 26일 (금)
만년설의 융프라우요후
06시 30분 기상하여 아침 도시락(빵, 사과, 쥬스)을 들고 15분 정도 걸어서 베포드역에 도착하였다. 멀리 바라보이는 만년설의 봉우리를 쳐다보며 오늘 여정이 기대에 부풀어 환성을 질렀다. 드디어 첫 번째 열차가 출발하였다. 15분 동안 도시락을 먹었다. 두 번째 열차부터는 산악 열차로 레일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사가 심해도 고산 열차 여행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벌써 100년 전에 스위스 사람들은 이런 열차를 만들어 생활에 이용하였다. 2013년 지난해 10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고 했다.
두 번째 열차를 갈아타자 눈앞에 펼쳐지는 알프스 산속의 그림 같은 마을과 융플라우의 만년설 지붕이 조화를 이루며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열차는 2000m를 넘는 높은 고도를 달리는데 대부분 터널 속을 달리며, 곳곳에 관광객이 내려서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전망대(동굴)를 설치해 두어 우리는 5분 동안 그곳에서 풍경을 감상한 다음 열차에 올라야 했다.
드디어 융프라우요후 정상! 먼저 얼음 동굴을 관람하였다. 얼음이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하였으며 손잡이를 잡고 얼음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전시된 갖가지 얼음 조각들과 잠시나마 사진을 찍으며 즐겼다. 만년설의 얼음 궁전 속에 영원히 갇힌 조각품들과 이별을 고하고 드디어 창밖 세상, 만년설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3454m의 만년설 위에서 맞는 칼바람은 몸을 지탱하기조차 힘들었다. 에레베스트 정상을 오른 산악인들의 고통이 느껴졌다. 맞바람을 하고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뒤돌아서려는 데 내 모자가 설산 아래로 날아가 버렸다. 모자를 잡으려고 따라갔지만 언덕 너머로 날아가 잡을 수 없었다. 10여년을 쓰고 다닌 모자인데 아수l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영원히 설산에 모자를 선물하고 스위스 국기를 배경으로 인증 사진을 찍고 서둘러 휴게소로 내려왔다. 휴게소에서 먹는 컵라면 맛을 꼭 먹어봐야 안다고 해서, 신라면 1컵과 초코렛1개를 10유로(13540원)를 주고 구입했다. 비싼 컵라면이라 맛도 특별했다. 열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만나는 스위스의 마을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춤을 추며 나타날 것 같은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저런 평화로운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푸른 초원 사이로 만년설이 녹아서 흐르는 시내가 있는 작은 도시 인트라켄에서 설렁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한식답게 김치와 오이무침이 나왔다. 반찬을 추가하면 요금을 지불해야 해서 우리는 기본 상차림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알프스산을 넘어서 이태리로 향하는 버스 여행이 시작되었다. 5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알프스 산을 이용하여 살아가는 스위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구경하였다.
저녁 7시가 넘어서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두오모성당 한쪽 벽면에는 삼성전자 광고 모니터가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엠마누엘2세 갤러리아는 시간이 늦어 모두 문을 닫았지만 둥근 천정을 가진 십자 길을 중심으로 상점이 들어서 있었다. 광장에서 정명훈 지휘자가 단장으로 근무했던, 조수미가 공연했던 스칼라 극장을 보고 숙소로 향하였다.
9월 27일 (토)
7대 불가사의 피사의 사탑이 있는 피사
밀라노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정도 여행하였다. 산하가 우리나라와 많이 닮아 있었다. 나무들이 자라고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은 같았지만 많은 마을들이 산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도원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때때로 넓은 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이태리 대리석 광산을 지나기도 했다. 산 전체가 대리석이며. 처음 채석할 때는 무른 성질을 띠어 가공하거나 조각하기 쉽지만 비바람을 맞으면 점점 더 단단해진다고 하였다.
점심은 중국식당에서 중국식 요리를 먹었다. 녹차도 마음껏 마시고 밥과 반찬4~5가지가 나왔다. 후식으로 청포도까지 먹었다. 식당에서 컵라면 1개에 3유로에 팔고 있었다.
피사의 사탑이 있는 성당으로 들어갔다. 두오모성당은 세례당, 본당, 납골당, 종탑의 4개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종탑이 바로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이었다. 1174년에 착공된 이 사탑을 3층까지 완공했을 때 기울어지기 시작해서 기울어진 상태로 다시 설계를 해서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지금도 1년에 몇 1mm씩 가라앉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신비한 종탑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었다.
다시 버스를 4~5시간 타고 로마로 이동했다. 피사에서 로마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우리의 경부선을 만들 때 참고한 곳이라 모양이 닮아 있으며 이탈리아 1번 고속국도라 했다. 고속도로 주변의 자연 환경은 넓은 평야지역이 계속되었는데 풀밭, 옥수수, 추수가 끝나 갈아놓은 넓은 토지였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올리브 나무가 많이 보였다. 사람이 사는 마을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3500여개의 마을이 있다고 하였다.
긴 시간 여행을 하면서 현지 가이드 마르코는 이태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기는 어머니를 따라 19세에 이민 와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태리를 표현하기 쉬운 3가지 중 첫째는 만자이레(먹다)란다. 순수한 재료의 맛을 살려 요리한 것이 이태리 음식이며, 이태리 요리에 소스를 가미하면 프랑스 요리하고 하였다. 파스타, 고기, 과일 등으로 식사를 하며 활동적인 장수국가로 유명하며. 둘째는 조까아레(축구)란다. 축구는 국민 스포츠로 시저이후 최고의 영웅은 축구선수 마라도나라고 했다. 셋째는 아무레(사랑한다.)로 아내에게 하루에 세 번 이상 표현을 한다고 했다.
9월 28일 (일)
유적의 도시 로마
로마안의 작은 나라 바티칸시국을 여행하는 날이다. 7시 30분에 버스에서 내렸으나 꼬불꼬불 이어진 줄은 건물의 모퉁이를 몇 굽이돌아 서 있었다. 우리 일행도 뒤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9시에 바티칸 박물관 문을 연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 뒤에도 줄서는 인파는 계속 이어졌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박물관 문이 열리고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벽화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37세에 천지창조벽화를 완성하였는데 천정에 매달려 물감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한쪽 눈이 멀었고, 천정에서 떨어져서 한쪽 다리도 다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57세에 예배당 앞쪽 벽에 최후의 심판이란 벽화를 완성하였다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롭게 자랐으며, 피에타라는 조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조각가로 불리기를 바랐으며, 그의 작품 속에는 아이와 엄마가 눈빛을 맞추지 않는다고 하였다. 바티칸 박물관에는 고대 미술품이 많이 전시 되어 있었으나 대충 지나쳤다.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에 도착한 순간 작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저런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러웠다.
박물관을 나와 좁은 골목을 벤츠로 이동하며 구경하는 벤츠투어가 시작되었다. 원형 경기장인 콜롯세움, 아테나 여신을 위한 판테온 신전,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로마에서 가장 큰 분수 트레비 분수, 트레비 분수에서는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고 사진을 찍었다. 로마에서 가장 높은 깜비돌리오 언덕, 지금은 로마시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햅번이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스페인 계단, 빅토리아 엠마누엘 2세가 이태리를 통일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통일 기념관을 둘러보고 진실의 입이 있는 곳으로 왔다. 로마 시대에는 감옥에서 실제로 입 속에 손을 넣게 하여 거짓말을 하면 잘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입에 손을 넣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 줄을 섰다. 한 번씩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장소 성베드로 대성당으로 장소를 옮겼다. TV화면에 자주 나오던 그 건물 그 장소였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친근감이 갔다. 카톨릭의 총 본산 답게 크고 웅장했으며,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성당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9월 29일 (월)
사라졌던 고대도시 폼페이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3시간) 이탈리아 남부로 향하였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이탈리아 풍경은 비슷하였으나 거리의 가로수가 우산 소나무로 심어져 있었다. 소나무 둥치에 침엽수 잎이 우산처럼 자라는 소나무였다. 긴 여행 끝에 폼페이에 도착했다. BC7세기경에 건립된 이 도시는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1592년 폼페이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다가 발굴하게 되었다고 한다. 폼페이는 아름다운 나폴리 항구 근처에 휴양도시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중앙 광장에서 마차가 다니던 도로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물통이 있는데 물통마다 조각상이 달랐다. 위치를 표시하기 위함이란다. 길가의 돌에 구멍을 뚫어서 말고삐를 맬 수 있도록 만든 것, 밤에도 다닐 수 있도록 야광석을 이용한 도로, 그림을 새겨서 이정표를 만들어 놓은 돌들이 있었다. 미닫이를 사용했던 상가와 여닫이를 사용한 문틀의 가정집, 빵집, 과일가게, 세탁소 등의 흔적이 있었으며 사창가가 발달하여 당시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집들이 있었다. 그리고 공중 목욕탕은 지금의 목욕탕과 비슷하게 지어져서, 냉탕, 온탕을 즐기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발굴 유물 전시장에는 많은 도자기들과 기도하는 소년과 웅크린 자세로 최후를 맞이한 여자 노비의 석고상이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이태리 해물 파스타로 점심을 먹고 아름다운 지중해의 나폴리 항구를 조망하였다. 나폴리는 파도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갈 항구이며, 모래는 인공적으로 투입한 것이라 했다.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인 나폴리는 물이 잔잔하고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기 좋다고 했다.
우리는 카프리섬 투어 대신에 나폴리 항구 주변을 걸어 다니면서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엿보기로 하였다. 쏘렌토항이 잘 보이는 언덕에서 이태리 장인의 가구 집을 들렀다. 어린 자식에게도 자신의 기술을 가르치며 대를 이어 같은 일을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이태리 가구는 가격도 비쌌다. 다시 버스를 타고 카프리섬의 배가 들어오는 항구로 이동하였다. 거기에는 많은 요트들이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고, 검게 그을린 현지 아저씨들이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노천 수영장과 바다 수영장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열심히 수영을 배우며 훈련하고 있었다. 바닷쪽에 높이 솟아있는 고성이 있어서 들어가 봤다. 꼭대기 층에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설명을 듣지 못하여 잘 모르지만 가이드가 계란성이고 옛날에는 감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했다.
9월 30일 (화)
단테의 고향 피렌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 피렌체는 전쟁 시 군인들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었으며 갑옷을 만들던 기술이 가죽 산업을 일으켜 지금까지 가죽제품이 이 지역 특산물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미켈란제로 언덕에 올랐다. 화가들이 주로 이 언덕에 와서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미켈란젤로도 자주 왔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 시내가 눈 아래 환하게 내려다 보였다.
시내 중심을 흐르는 아노르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베키오 다리인데 단테가 자주 지나다니며 신곡을 구상하였던 다리라고 하였다. 지금은 관광객이 그 다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다리 양쪽난간에는 상점을 지어 보석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두오모 성당은 이곳의 상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성당이며 자연의 색을 가진 대리석을 이용하여 지어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벽에는 성모마리아님을 중앙에 예수님과 12제자를 양 옆으로 그 아래 일반 신도들을 조각해서 성모마리아님을 받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인들 중 부도가 나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모금을 해서 도움을 주던 모금 통도 있었다. 그리고 한 쪽 벽면의 그림은 단테가 첫사랑 베아트리체의 결혼식에 갔다가 슬픔으로 비틀거리며 식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라고 했다. 단테가 피렌체를 떠나자 그를 흠모하던 시민들이 그의 초상을 길바닥의 돌에 새겼는데 그 일이 발각되어 종신 징역형을 받았다고 하며 그 초상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시뇨리아 광장은 전쟁에서 이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헤라클레스와 포세이돈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받아들인 메디치가문의 건물이 조각한 동상을 앞세워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지금은 피렌체의 시청으로 이용된다고 하였다.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많은 죄수들의 처형장소 이기도 하였는데 미켈란젤로는 댓돌에 앉아 처형대로 향하는 죄수들을 보다가 그 참담한 모습을 벽에다 그려 놓았다고 하였다.
10월 1일 (수)
물의 도시 베네치아
1600년전 흉노족이 북쪽에서 쳐내려 와서 잔인하게 원주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다. 흉노족은 잔인무도하였으나 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베네치아 원주민들은 수심이 얕아 썰물 때에는 바닥이 드러나는 지금의 베네치아로 건너가서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인공 섬까지 철도가 놓여 마지막 종착역이 산타루치아역이라고 하였다.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데 도로에서 30m 쯤에는 나무 기둥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곳 까지는 바다를 깊이 파내어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뱃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인공섬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한 공사를 해야하는데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베네치아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화장실 사용료를 1유로씩 받고 있었다. 우리도 1유로를 지불하고 화장실 이용을 했다.
배를 타고 산마르코 광장에 들어갔다. 인공섬에 그렇게 넓은 광장과 건물들이 있다는 것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광장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입구에서 보면 넓어 보이나 안쪽에서 보면 좁아 보였다.
베네치아는 상인들이 많기 때문에 광장에 있는 큰 건물 전체가 법원이라고 했다. 상인들의 송사가 걸린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광장 입구에 높은 기둥 2개가 서 있는데 그 곳은 사형을 집행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비가 와서 곤돌라 타기는 포기하고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 투어를 했다. 아름다운 유리 세공, 가면, 실크 넥타이, 가죽 옷, 가방 등을 구경하며 수로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갔다. 그런데 너무 멀리 가버려서 수상택시를 투어할 시간에 맞춰 돌아오지 못하였다. 원주민들에게 산마르코 광장을 물어서 간신히 찾아 갔으나 1시간 정도 지체되어 수상택시를 타고 바로 버스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투어를 하지 못해서 아쉬웠으나 우리를 기다리느라고 30분 정도 지체한 일행들에게 미안했다.
중국 음식점에서 정통 중국 요리로 점심을 먹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향하였다. 5시간동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태리에 속한 알프스 산자락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였다. 넓게 펼쳐지는 포도밭, 사과밭과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은 아름다웠다. 그 마을을 돌로미떼라고 가이드가 안내해주었다.
오스트리아 국경 부근이 가까워지자 집의 모양이 스위스 풍으로 난간이 있고 난간에 예쁘게 꽃들을 피워서 내놓은 모습이 보였다.저녁 8시 반이 되어서야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 도착하였다. 거리에는 붉은 색 시내버스와 전차가 지나다니고 사람들이 보이긴 했으나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인구 12만의 조그만 도시지만 동계 올림픽을 두 번이나 개최한 도시라고 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금지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커피점에서 아인슈페너(뷔엔나)커피 1잔을 3.9유로에 시켜서 맛을 보았다. 부드러움과 깊은 커피의 맛이 전통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도 그 향긋한 커피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드디어 서유럽 여행 마지막 밤, 인스부르크에서 30분을 더 독일 쪽으로 달려서 숙소에 도착하였다. 주민들의 휴양지인 오베스택에 있는 호텔인데 고목을 잘 다듬어 방을 꾸며 마치 통나무 속에 들어온 것처럼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운 물도 시원하게 잘 나왔으며 공간이 넓어서 편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오리털 이불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지막 저녁은 뷔페로 준비되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음식을 먹을 만큼 담아와서 먹었다. 우리 부부 때문에 30분이 더 지체되었으나 우리를 더 걱정해준 동료들에게 포도주 3병을 사서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대접하였다.
10월 2일 (목)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그
오베스택의 예쁜 호텔도 잠시 잠만 자고 6시 30분에 버스에 올라 5시간의 긴 여행이 시작 되었다. 오늘도 알프스 산을 지나서 독일로 들어가야만 했다. 독일의 고속도로는 아우토반으로 철강제품을 싫어 나르는 교통로로 통행료는 무료라고 했다.
하이델베르그는 종합대학이 있는 도시로 평소에는 14만의 인구가 생활하고 있으나 방학이 되면 학생들이 많이 빠져나가 거리가 한산해진다고 했다. 이 종합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7명이나 배출했다고 한다.
라인강의 지류인 데카강 주변 산기슭엔 별장지대로 아름다운 집들이 참 많았으며 데카 다리입구에 원숭이 모형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조형물에 머리를 넣어서 사진을 찍으면 행운이 온다고 했다. 여행객들이 줄을 서서 사진 찍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델베르그성은 프랑스와 전쟁으로 파손 된 것을 복원하였으나 낙뢰로 다시 파손되어 지금도 복원 중이라고 하였다. 멀리서 아름다운 외관을 쳐다보았다.
독일은 철강 기초 산업이 잘 발달되어 주방용품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과일칼을 기념으로 샀다.
점심 식사 후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긴 여정이 마무리 되는 순간이라 아쉬웠다. 매일 버스를 운전해 주신 이태리의 마음 좋은 아저씨와도 이별을 했다. 우리와 12일을 함께하며 안전을 챙겨주었던 유상철 가이드는 동료 가이드가 유고가 있어서 한국에서 도착하는 여행객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맞이하여 우리가 여행했던 반대 경로로 다시 가야한다고 했다. 무척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함께 여행했던 유상철 가이드와 동료들과도 작별의 인사를 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모든 탑승 수속을 마친 뒤 비행기에 올랐다. 대한항공이 반가웠다. 신문이 반가웠다. 그동안의 한국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19시 45분에 비행기가 이륙하여 10시간 20분을 비행하여 10월 3일 13시 10분 쯤 인천 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