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60주기
오늘 7월 2일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죽은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헤밍웨이는 내가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카뮈와 더불어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의 60주기를 맞아 그를 회고해본다.
헤밍웨이는 1899년 7월 21일에 사냥과 낚시를 좋아한 의사 클래런스 에드먼즈 헤밍웨이와 미술에 관심 있던 그레이스 홀 헤밍웨이의 맏아들로 시카고의 교외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립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고등학교 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 활발한 활동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 그의 어린 시절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미시간 북부의 왈룬 호수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여름이었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다지 안정되지 않은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대학에 가는 대신 캔자스시티로 가서 당시 주요한 신문이었던 〈스타 Star〉지의 기자로 채용되어 귀중한 직업훈련을 받았다. 눈에 결함이 있어 계속 군 입대를 거절당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가까스로 미국 적십자사의 구급차 운전사로 참전했다.
1918년 7월 8일 19세도 채 안 된 나이에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전선의 포살타디피아브에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영웅적 행위에 대해 훈장을 받고 밀라노에 입원했는데, 그곳에서 적십자사의 간호사인 아그네스 폰 쿠로프스키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를 거절했다.
고향과 미시간에서 건강을 되찾은 뒤 다시 집필을 시작했는데, 한동안 시카고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헤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했으며, 〈토론토 스타 Toronto Star〉지의 해외통신원으로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파리에서 F.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같은 미국 작가들의 충고와 격려에 힘입어 비 저널리즘적인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 최초의 중요한 책인 단편집 〈우리 시대에 In Our Time〉를 뉴욕에서 출간했다. 이듬해에 장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를 발표했는데, 이 소설로 처음으로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비관적이지만 활기 넘치는 이 소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체류하고 있는 목적 없는 망명자들, 전후의 '잃어버린 세대'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처음으로 이목을 끌게 되었는데, 그는 여생을 주목의 대상이 되기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어했다.
그는 전후의 몇 해 동안 대부분 집필에 전념했다. 그동안 아들 존을 얻고 첫 번째 결혼은 실패했으며, 그뒤 폴린 파이퍼와 결혼하여 패트릭과 그레고리를 낳았다. 그는 파리에 살면서 스키·투우·낚시·사냥을 하며 두루 여행을 다녔는데, 그 무렵에는 이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며 많은 글의 배경을 이루었다. 단편소설의 대가로서 그의 지위는 1927년 〈부인 없는 남자들 Men Without Women〉을 발표하면서 나아가기 시작하여 1933년 〈승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Winner Take Nothing〉로 확고해졌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장편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1929)가 이 두 소설보다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군인으로 보낸 경험을 연애이야기와 전쟁이야기를 융합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섬뜩하면서도 서정적인 소설로 발전시켰다. 많은 비평가들은 헤밍웨이의 훌륭한 소설들이 이 무렵 이미 모두 씌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냥이나 낚시에 시간을 덜 소비했다면 더 많은 글을 썼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러한 취미활동과 함께 전쟁에 관심을 가져 평생 전쟁에 몰두했으며, 개인적으로 커다란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취미활동을 정력적으로 추구했다. 그는 결국 많은 모험을 기초로 책을 썼지만, 문학적으로 또 경험을 위해서도 그러한 모험을 열렬히 추구했다. 스페인에 대한 사랑과 투우에 대한 열정은 〈오후의 죽음 Death in the Afternoon〉(1932)을 낳았는데, 이것은 그가 투우를 스포츠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의식으로 보고 그 구경거리를 깊이 있게 연구해서 쓴 글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사냥 여행은 〈아프리카의 푸른 산들 Green Hills of Africa〉(1935)을 낳았는데, 이것은 큰 짐승을 잡는 사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낚시를 위해 플로리다 주의 키웨스트에 집 한 채를 샀다. 또한 쿠바에서 큰 녹새치를 잡는 것에 이끌려 자기 소유의 낚싯배인 '파일러'도 구입했다. 1937년에 쓴 소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는 경제 불황기의 키웨스트와 그 근처가 배경이다. 헤밍웨이는 이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무렵 스페인은 내전이 한창이었다. 스페인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헤밍웨이는 4차례나 그곳을 여행했으며 한 번은 통신원으로 방문했다. 그는 프랑코 장군의 반란에 맞서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돈을 모았으며, 포위된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한 희곡 〈제5열 The Fifth Column〉(1938)을 썼다. 그의 많은 저작에서처럼 이 희곡의 주인공도 작가 자신을, 그의 애인은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마르타 겔호른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헤밍웨이는 이혼이 확정되자 그녀와 결혼했다.
스페인 내전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뒤 그는 쿠바의 아바나 교외에 농장 핀카비지아('전망 좋은 농장')를 구입했으며, 아내와 함께 또 다른 전쟁, 곧 일본의 중국 침략을 취재하러 갔다.
전쟁과 평화 기간에 스페인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1940)라는 소설이 나왔는데, 이 소설은 판매부수면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었다. 현실적이고 인상적인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애초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자신도 죽게 될 공격에서 세고비아 근처의 전략적인 다리를 폭파하는 것을 지원한 미국인 게릴라를 다루고 있다.
헤밍웨이는 전 생애에 걸쳐 전쟁(〈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전쟁의 무의미함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는 전쟁이 만들어내는 동지애에 초점을 맞추었음)에 몰두했는데,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에도 관여했다. 그는 오랫동안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예견해왔다.
그는 쿠바로 돌아간 뒤 독일 스파이들의 쿠바 유입과 쿠바 해변의 잠수함을 조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비공식 활동을 하면서도 공식 승인된 대적(對敵) 정보활동기구인 '크룩팩토리'를 설립했다. 그는 또다른 계획을 승인받아 자기 배인 '파일러'에 U보트를 유인하는 장비를 갖추어 여기에 유인된 U보트들을 파괴시킬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 두 사업을 모두 효과적으로 운영했지만, 중요한 승리를 하나도 거두지 못한 것에 실망하여 좀 더 실제 전투에 다가가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저널리스트로서 런던에 갔다. 그는 영국 공군과 함께 비행 임무를 몇 번 수행했으며 진격 개시일(1944. 6. 6)에는 미국군과 함께 영국 해협을 건넜다. 그는 보병4사단 22연대에 소속되어 노르망디와 벌지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파리 해방에 참가했으며, 비록 겉으로는 기자였지만 전투에서는 용감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군사문제와 게릴라 활동, 특히 정보수집에서는 실질적인 전문가로서 직업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쿠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으며, 3번째 결혼 역시 파탄에 이르자 4번째로 런던에서 만난 통신원 메리 웰시와 결혼해 여생을 함께 보냈다.
그들은 쿠바의 핑카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곳에서 다시 진지하게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널리 여행을 다녔는데, 아프리카에도 1차례 여행을 갔으며 그곳에서 사냥여행을 하다가 2차례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뒤 곧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1952)라는 장엄한 단편소설(거대한 녹새치를 낚아 운반하다가 결국 상어들에게 빼앗기고 마는 쿠바의 늙은 어부에 대한 이야기)로 소설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1953). 1954년 노벨문학상을 타는 데 이바지한 이 소설은, 베네치아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죽는 직업군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예전의 소설 〈강 건너 숲속으로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1950)가 혹평을 받은 것만큼이나 열광적인 칭찬을 받았다.
1960년경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이 일어나자 헤밍웨이는 핑카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아이다호의 케첨에 집을 구입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예전처럼 작품을 쓰려고 했다. 잠깐 성공을 거두었으나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에 2차례나 입원하여 전기쇼크 치료를 받았다. 케첨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지 2일 뒤인 1961년 7월 2일에 그는 엽총으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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