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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원 부정 임영립과 잠자리서 작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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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봐요 :- 執義公 휘 秀卿공의 둘째 아들의 셋째 아들인 직장直長 敬忠공의 고손자 英立
1914년 장흥출신 갑인년생 모임에서 김인표 회장과 회원 177명은 장흥의 역사와 문화의 명성을 역설하였다.
참석자들은 이날 "장흥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흥 사람들은 의병이 되어 나섰다. 그리고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한 군관과 장수들을 다수 배출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2016년 12월 29일 비슷한 담론이 있었다. 장흥 역사문화를 사랑하는 애향인의 만남이었다. 전라남도문화원연합회 회장 김희웅, 장흥군재향경우회 회장 변성세, 화산 윤수옥, 전문위원 김희태, 장흥문화원 등 웅비 새천년 장흥의 대계를 고민해본 것이다.
즉, 옛 장흥읍성 복원으로 읍치의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는가, 옛 장흥 대흥면 선자리 이순신의 거북선(龜船) 제작과 장흥 의병전은 가능한가, 장흥 군사 활동과 수인산성의 세계유산화는 가능한가 등이었다.
실로 17세기 장흥도호부는 부서, 부동, 남면, 고읍, 대흥, 안양, 회령, 천포, 웅치, 장동, 유치, 용계, 부산면을 거느린 거대 읍치였다. 당시 자료를 보면, 장흥부 곡식 생산량은 26,639석 이었으며, 가옥이 7,750호로 인구는 남자 1만2896명 여자 10,836명이었다. 당시 주변 도시 인구가 5,000명 정도 이었던 것에 비하면 장흥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장흥부 군인의 숫자 역시 대규모였다. 경안부 소속 1,885명과 순영 소속 223명, 병영 소속 496명, 좌영 소속 373명, 우영 소속 341명, 전영 소속 901명이 있었다.
이외에도 회령포를 제외하고도 전선 1척 병선 1척 하후선 2척 포수 60명 노를 젓는 수군이 124명이 더 있었다.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는 거점이었다.
장흥부 읍성의 경우 문종시대에 길이가 6,400척으로, 화포를 쏘는 여장도 916개나 되었다. 문종시대 면포 1척은 46.7cm이었다. 당시 주변 군현의 성곽은 2,000척에서 3,000척 정도였다. 이에 비하면 3배 이상의 크기였다.
오늘날 장흥읍성의 흔적을 따라 가보면 장흥읍 동동리, 남동리, 기양리, 예양리, 남외리 등의 주변 산록을 휘감은 만리장성이다.
당시 독특하게 성축이 맞물리는 기법으로 사이 사이에 석회로 만든 조개껍질 가루를 발라 심석이 빗물에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장흥사람들은 성곽 보수를 하던 시기 고싸움과 정월 보름에는 성 밟기 축제가 이루어졌다.
장흥읍 성안 모습이 복주머니 모양으로 '복 주머니 고을' 이라고도 불렀다. 성안 장흥읍 동동리 수성당 아래 노거수가 자리한 곳에 장흥동헌이 있었다.
이순신은 처음 이곳에서 장흥 선비들과 임영립의 손을 맞잡은 곳이다. 동헌 현판에는 평근당(平近堂)이 걸려있었다.
이는 장흥관리와 백성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즉, '관리는 백성과 가까이 있으면서 백성을 평안하게 다스린다' 는 의미이다.
이처럼 남다른 거대 도시 장흥은 임진왜란 중 많은 의병을 배출하고 이순신과 국난 극복에 앞장선 조선시대 전남 해안지방 행정의 중심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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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장흥에 온 것은 4번 정도로 추측된다. 첫 번째로 온 것은 1592년 정월 초이다. 전라좌수사 부임길에 장흥 군관 임영립을 장흥부 관아에서 만나 군사를 지원받기 위해서이다.
이후 4년후 1596년 윤달 8월 20일에 두번째로 장흥을 방문한다. 민정시찰길에 장흥부 관아에서 김응남과 정경달과 병참물자 지원 협의차 이었다.
세 번째로는 1597년 8월 18일, 거북선을 만들기 위해 수군재건길에 김억추와 경상우수사 배설을 만났다.
네 번째로는 1598년 7월 24일, 절이도대첩 후 해상 순회를 하면서 정남진을 찾았다.
장흥부사를 지낸 인물로 이순신을 도운 걸출한 인물이 많다. 정걸, 황세득, 배흥립, 이영남, 김억추, 전봉, 백한남, 안위, 현덕승 등 눈에 띄는 인물 들이다. 황세득은 이순신의 처종형이다. 정경달은 이순신이 조정에 종사관으로 계청하여 임명된 인물이다. 이외에도 노홍, 변덕일, 양수운 등이 함께하였다. 이순신 전사가 알려졌을 때 장흥군민은 스스로 자원하여 모두가 흰 옷을 입었다. 장흥사람들은 이순신의 죽음에 예의를 지켰다.
조정에서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일찍이 이순신을 장수로 삼았다. 노수신과 권율이 천거한 것이다.
이순신은 변방 군관임무를 끝내고 문관으로 1589년 12월 전라도 정읍현감으로 발령되어 부임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1591년 2월, 이순신을 진도군수로 보냈다가 다시 전라좌수사에 임명하였다. 1591년 2월 13일 이순신은 전라좌도 수사 부임길에 올랐다.
이때 그는 보성 처갓집을 거쳐 장흥 관아로 들어갔다. 이순신은 보성군수 방진의 고명딸 방태평과 결혼하였기에 보성 처갓집을 경유한 것이다.
1592년까지도 보성 이순신 처갓집에는 어린 자녀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가 여수에 도착한 것은 보름이 지난 1591년 2월 28일로 이순신의 나이 47세이었다. 이순신이 부임하기 전 장흥으로 간 것은 해로를 잘 알고 있는 장흥 군관 임영립(林英立)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임영립은 해로에 정통하였다. 장흥의 풍부한 물산과 군사자원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흥은 예로부터 예절에 밝고 낙토로 일컬었다. 장흥 물산으로 생강, 비자, 물개, 굴, 표고, 송이, 맛 조개, 은어 등이 생산되었다. 특히 이순신은 장흥 생강을 좋아하였다. 조선 수군들의 감기약으로 쪄서 말린 장흥산 생강을 사용하였다.
임영립은 1591년 2월, 이순신 부임길에 만났다. 그는 장흥부 관아에 묵으면서 이순신과 바다와 군사 작전 일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이순신은 헤어질 때가 되자 아쉬워하며 임영립에게 말하기를 "남아(男兒)가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은 먼저와 나중이 이르고 늦음이 없네. 앞으로도 서로 잊지 말도록 하세"라고 말하며 지기(知己)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세이상의 나이차이에도 그를 친구로 맞아들인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영립은 급히 행장을 꾸려 장흥 지역 의병을 모집하여 이순신 진영으로 향하였다. 의병 길을 나서기 이틀 전 이순신이 군관을 보내왔다. 창의문을 전해왔다. 임영립은 이순신의 군관을 맞이하여 명령지를 받았다. 이순신의 연락병 군관은 이순신장군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임영립이 좌수영에 도착하자 이순신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순신은 항상 임영립과 같이 잠을 자고 함께 작전 계획을 세웠다. 잠자리에서 해로 작전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이순신은 거의 20년 차이가 있는 임영립을 "나의 지기(知己)이다" 라고 하였다. 임영립은 이순신에게 나라를 위해 스스로 맹세하기를,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이공이 자신을 알아봐 준 것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고 했다.
임영립은 7척의 몸으로 만 번 죽고 백 번 전쟁하는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일찍이 한 번도 머리를 돌려 물러난 적이 없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 죽고 사는 일을 뒤로 여기는 장흥인들의 품성이었다.
임영립은 훈련원 부정으로 옥포 승전부터 노량대첩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11차례나 승리하고 계속 참전하였다. 한 번도 이순신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휴전중에는 이순신과 군진 안에서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바닷길에서 지휘할 때 신출귀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영담에게 힘입은 덕분이다. 진영에 임해 변화무쌍한 계책을 세우고 화살과 포를 무릅쓰며 사졸들의 선두가 되어 온 군사가 죽음을 잊게 한 것은 실로 임영립군에게 힘입은 덕분이다. 또 임군 같은 재능과 용기로 만약 큰 임무를 맡았다면 그가 이룰 공훈과 업적에 나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1604년에 당포 앞바다에서 통제사 이경준과 왜적의 잔당을 추격하였다. 훈련원 부정 임영립은 갑옷을 입고 뱃전에 서서 크게 호통 치며 "내가 지난날 노량의 거북선에서 선봉장을 섰던 임영립이다"며 최전선에서 싸웠다. 이날 전투에서 향촌에서 함께 온 노홍과 함께 즈앙멘데스 남만인 여자 등 273명의 적을 생포하였다. 그날의 전쟁 내용이 노홍 가장 당포승전도가 전한다.
1597년 7월 12일 임영립은 백의종군으로 계급이 없이 물러난 이순신을 좇아 합천 땅에 모여곡을 갔다. 식사를 대접하고 시국을 논하였다. 7월 16일 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이가 조선군 모두 깨진 사실을 보고하였다. 7월 18일 새벽에 변홍달이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공격으로 대패하였다"고 했다.
이순신과 함께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방책을 찾기로 하였다. 임영립, 송대립, 류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이 함께 길을 떠났다. 후일 좌부승지 최염이 암행어사 한준겸의 장계를 보고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임영립은 직무에 근실하여 현저한 공적을 남겼으며 병선과 무기를 정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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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영립(林英立) 관련한 기록은 서기 2008년에 발행된 평택임씨 평성군파 포천문중 세보(『平澤林氏 平城君派 抱川門中 世譜』)에 기록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