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코너에 가끔 가는 편이다. 술을 즐기지는 않지만,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있다. 그럴 때 나는 위스키 종류보다는 와인이나 보드카를 마신다. 맥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은 버드와이저나 하이네켄처럼 흔한 브랜드보다 전여옥의 에세이 제목에도 등장한 삿뽀로나 기린같은 이국적 브랜드를 고르기도 한다. 혹시 위스키 좋아하시는 분, 산토리라는 일본 술을 아시는지?
우리나라에도 가끔 [섹시 마일드] 소동을 일으킨 맥 라이언처럼, 해외 톱스타들이 내한해서 CF를 찍고 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들은 전지현이나 김정은 혹은 이영애처럼 CF 상종가를 치고 있는 국내 톱스타들 몇 명이 받을 수 있는 거액의 몇 배, 몇 십 배를 받는다. 광고 촬영을 하지 않는 시간에 그들은 무엇을 할까? 백화점이나 이태원에서 쇼핑을 하거나 고궁을 방문할까? 아니면 맛사지를 받을까?([맛사지]라는 단어는, 고급 호텔에서는 매춘의 은어다. 정말 피로를 풀기 위해 맛사지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상당수는 성적인 서비스를 위해 [맛사지]를 원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산토리] 위스키 CF를 찍기 위해 일본에 온 할리우드의 스타 밥 해리스(빌 머레이 분)의 1주일동안 동경 체류기이다. 영화는, 동경이라는 이국적 풍경에 취하기보다는, 낯선 곳에서의 설레임과 불안함이라는 이중적 감정을 훌륭하게 배경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행의 가장 뛰어난 미덕은, 그곳에서 이곳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있던 익숙한 공간을 벗어남으로써 나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갖고 있는 최대의 미덕이다.
밥 해리스는 한때 잘 나가는 할리우드 스타였지만 지금은 한물간 배우이다. 동경의 바에 앉아 있어도 출장온 미국인들이 알아 보고 말을 걸어올 정도는 된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이제 남편보다는 아이들 뒤치닥거리에 더 신경을 쓴다. 시차적응에 힘들어하느 남편을 새벽에 깨우는 국제전화로 그녀는 기껏 거실 카펫의 색깔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편이 느끼는 외로움, 절망감, 당혹감은 헤아리지 못한다. 부부의 대화는 서로 겉돈다. 일본에서 밥은 CF만 찍는 것이 아니다. TV 토크쇼에 나가 홍보 활동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이질적인 일본의 문화다.
과연 첫 장면부터 문화의 충돌은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광고 촬영장에서 밥의 통역을 맡은 여자는, 이것 저것 상세하게 연기 주문을 하는 연출자의 말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밥에게 전달한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자 종업원은 고기와 야채를 테이블에 놓고 그냥 가 버린다. 끓는 물에 고기를 익혀 먹는 사브사브는 손님이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다. 밥은 이해할 수 없다. 왜 레스토랑에서 손님에게 요리를 시키는지. 광고회사에는 밥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마사지사를 보낸다. R과 L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는(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영어사교육비를 지출하지만 영어실력은 세계 100위권이다) 너무 오버해서 밥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발버둥친다. 이제 그는 이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하다. 그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밥은 자주 미국의 부인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나 부인은 밥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미 그들은 25년 넘게 결혼생활을 지속한 것이다. 서로에 대해 익숙하다는 것이 관심의 소홀로 이어질 때, 우리는 고독을 느낀다. 밥은 혼자 있는 것이다. 부인이 그녀에게 보내온 것은, 카펫을 어느 색깔로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샘플 뿐이다. 부부관계는 이렇게 실용적인 관계로 변질된다. 부인의 의사를 따라 결정한 주황색 카펫은 또 일방적으로 부인의 의사로 변경된다. 대화는 어긋나고 관심의 촛점은 빗나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위기의 부부관계를 당사자의 어느 한쪽은 인식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서구인의 잘못된 시각으로 폄하된 동양문화의 왜곡이라고, 오리엔탈리즘의 표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본인의 우수꽝스러운 영어 발음으로 뜻이 잘못 전달된다든가, TV 쇼에서 엄청 오버하는 진행자의 모습으로 미국과는 다른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또 엘레베이터의 내부씬은, 다른 일본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밥 해리스를 보여줌으로써, 동양인에 대한 서구인의 무의식적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관객들도 모두 안다.
그러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 부재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치유할 수 없는 고독이다. 밥과 샬롯은 같은 호텔 바에서 여러 번 부딪친다. 샬롯은 밥을 알아보고 그에게 술을 한 잔 보내기도 한다. 그뿐이었다, 처음에는. 주위의 모든 통로가 막혀 버린 출구 없는 삶에서, 그들은 서로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발견한다. 별로 뜻없는 이야기를 함께 해도 즐거운 사람이 있다. 혹은 아무 말없이 술을 마셔도 옆에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편안해지는 경우도 있다. 밥과 샬롯이 그렇다.
샬롯은 사진 작가인 남편의 출장을 따라 동경에 왔지만 남편은 일에만 정신을 집중시킨다. 남편은 호텔 로비에서 잘 알고 지내는 여배우를 만나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지만, 그 옆에서 샬롯은 소외감을 느낀다. 그녀는 이방인이다. [여자는 일생 중 한 번은 누구나 사진작가를 꿈꾼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카메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선택과 배제에 의한 것이다.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것만 렌즈 프레임 안으로 본다. 다른 세상은 배제되어 있다.
동경의 야경은 화려하다. 호텔 방에서나 재즈바 내의 넓은 창을 통해 자주 바라보이는 불빛 화려한 야경씬은 상대적으로 인물들의 고독과 외로움을 극대화한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헬리콥터나 비행기 등을 위해 고층빌딩 네 귀퉁이 외곽에서 반짝거리는 수없이 많은 빨간 불을 롱샷으로 잡아냄으로써, 낯선 곳에 던져진 고독한 존재의, 위기의 삶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빌 머레이는 [사랑의 블랙홀](1993년) [로얄 테넌바움](2001년) 이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25년 넘게 결혼생활 한 부인과의 전화통화도 답답하기만 하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심적 상태를 주목하기는 커녕, 부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가족에게서도 일터에서도 그는 외로움을 느낀다. 의사소통의 통로가 모두 막힌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는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다.
사진작가인 남편과 함께 일본 생활을 하면서 역시 이질적인 문화에 동화되지 못하고, 남편과의 관계도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 샬롯 역의 스칼렛 요한슨은, [판타스틱 소녀백서](2001년)에서 부쩍 성장한 모습으로 외로움 속에서도 신비함과 섹시함을 절제된 연기로 드러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이로운 것은 1971년생 여성 감독 소피아 코폴라다. [대부] 시리즈의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딸인 그녀는, 아버지의 영화인 [대부] 시리즈 1편부터 점점 성장해 가는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그녀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감정의 폭발보다 훨씬 어려운 절제된 응축으로, 삶의 본질적인 쓸쓸함과 허무를 감성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첫댓글 앗~ 하재봉아저씨글이네요^^ 영화보기 전에 안읽을려고 아껴둔 글인데^^ ㅋㅋ
어제 저거 개봉한 줄 알고 갔다가 헛수고 하고 왔습니다..꼭 볼껍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