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개 표준 검토 Review of Jindodog Standards
선행 학습 Prior learning
개요 Summary
현재 전 세계적으로 400여 견종이 존재하나 대부분 견종들은 자연 선택의 적응 방산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의 상상에 의한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품종 개발을 목표로 켄넬 클럽이 1800 년대에 주도한 번식 시스템의 출현은 이미 유전적 장애가 심각한 견종에게, 또 다른 유전적 장애를 계속 추가한다.
개의 형태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이러한 지속적인 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과장된 체격과 잘못된 형질을 정확히 번식 결과로 나타낸다.
그 결과 개에게 원래 부과된 능력이 해부학적 또는 생리적 변형으로 인해 그들이 원래 갖춘 작업 수행 능력은 더 이상 없다.
인류에 의한 강제 근친 번식으로 인하여, 공식적으로 500 개 이상의 유전자 결함이 오늘날 전세계 견종에 존재한다.
이러한 인공 선택 견종과 달리, 자연 선택 형질을 유지한 채 살아 온 이른 바 ‘원시견’ 또는 ‘자연견’으로 불리는 견종이 소수 존재한다.
호주의 야생 들개 딩고, 가나안 독, 캐롤라이나 독, 뉴기니 싱잉 독, 동남아 오지의 개 등이 있으나 가나안 독과 캐롤라이나 독, 뉴기니 싱잉독 등은 매우 적은 개체 수를 바탕으로 근친 번식을 통해 겨우 존속할 뿐이어서, 신체적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진정한 원시견으로는 호주 들개 딩고가 유일하다고 한다.
우리의 진도개는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대체로 잘 보존되고 있으나, 진도개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 또 홍보 부족 등으로 진도개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진도 섬은 우리가 ‘진도개’라 부르는 유전적으로 완벽히 격리된 견 집단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섬 품종의 규칙(필자 주)” 은 좋은 형질은 유지하고, 나쁜 형질은 빨리 버리게 되는 자연 선택 생물 종의 형질 유지에 최적 생태 원리이다.
<진도 옛 사진>
이처럼 생물학적 자원으로 그 가치를 계산할 수도 없이 귀한 천연 기념물 진도개에 대한 정체성은 오로지 명확한 표준이 제시될 때 확립된다.
그러나 오늘 날 진도개 표준서는 진도개의 전체는 물론 부분 형질마저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부정확하며 바르지 못한 진도개 표준서로 인한 폐해는 육지의 서로 다른 클럽들이 잘못 된 진도개 표준을 개념없이 모방하면서, 순혈 진도개와 완전히 다른 개를 진도개로 선발하고, 홍보하며, 그 번식을 장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진도개 소유자와 책임 있는 번식자, 수의사 및 진도개 관련 전문가들은 정부 및 기타 진도개 관련 단체에 문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진도개 표준 규정을 재 지정하도록 제안할 수 있다.
만시지탄이나, 진도개의 정체성을 진정 바르게 이해하고, 현행 진도개 표준, 선발, 번식 방법 등을 조사하면 주요 원인을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진도개 표준의 변천에 대한 검토를 진도개 표준 워딩 중심으로 진행할 것이다.
이러한 검토 작업에 앞서 진도개에 대한 유래와 기원에 관한 기존설에 대한 검토와 진도개 보호에 대한 연혁에서 표준 변천 과정을 선행 학습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진도개 역사와 기원 검토 Review of Jindodog history
1. 1923년 전후 진도개에 대한 최초 발표자: 막스 폰 스테파니츠(Max von Stephanitz 1864~1936)
막스 폰 스테파니츠는 작센 왕국 귀족 집안 출신으로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기병대 장교 출신으로 베를린 수의과 대학에서 근무 중, 생물학 및 해부학, 역학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그는 1890년대 영국 번식자들의 번식 기술을 이용하여 개 번식을 시작했다.
1899년부터 독일 셰퍼드 견종을 본격 개발하면서 그해 4 월 22 일 친구 Arthur Meyer와 함께 저 유명한 Verein für Deutsche Schäferhunde (SV)를 설립했다.
1901년 독일 셰퍼드 견에 대한 첫 전람회를 개최하고, 영국 켄넬 클럽(KC, The Kennel Club)은 1919년에 승인했다.
스테파니츠의 최대 업적은 물론 독일 셰퍼드 견의 창시자라는 사실이지만. 사실 그가 전세계 견종에 끼친 영향력은 명저 ‘독일 셰퍼드 견 도설 The German Shepherd in Word and Picture (Schäferhund in Wort und Bild)’로, 전 세계 개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치고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The German Shepherd in Word and Picture’은 1901년 24 페이지의 광고가 포함 된, 72 페이지 소 책자로 발간 되었고, 1921년에 최종 완성 본이, 영문으로는 1923년에 초판이 발간 되었다.
저술 완성본에서 슈테파니츠는 저서 유래편(由來篇)에 「한국 남단 어떤 섬에 자연견이 있다.」라고 발표했다.
문헌 상 진도개에 대한 최초의 소개가 셰퍼드의 아버지 스테파니츠에 의해 국제적으로 발표된 것인데 모리 다메조가 총독부에 보고한 시점보다 15년 정도 앞선 것이다.
슈테파니츠의 발표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데, 국제적으로는 최초의 진도개 발표와 소개라는 점과, 진도개를 ‘자연견’ 즉 ‘자연 선택 견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점이다.
이 발표는 일본 정부와 학자들이 관심을 크게 갖던 독일 셰퍼드 견에 관한 저술을 통해, 그것도 개에 관한 이론서가 세계적으로도 드물던 시절 셰퍼드 견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테파니츠에 의해 발표 된 것이라면, 일본의 모리 다메조 교수가 이 발표를 보고 크게 기뻐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사실 모리 다메조 교수는 동물보다는 식물학자로써 한반도의 식물 상을 여러 해 동안 관찰하면서한국 식물 교과서를 처음 발간하기도 했다.
이처럼 주 연구 분야인 식물에서 갑자기 ‘진도개’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은 아마도 슈테파니츠의 ‘한국 남단의 자연견’이란 발표가 결정적 계기였을 수 있다.
식민 제국 시대에는 수탈과 착취를 목적으로 식민지의 지리와 생태를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침략국들은 자국의 탐험가와 학자들에게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학계에 새롭게 발견되는 생물 종은 탐험가나 학자의 이름으로 학명이 주어지기에 앞다투어 생물 종에 대한 발견과 탐구를 하였다.
슈테파니츠의 1921 년 이후 저술 유래편에 「한국 남단 어떤 섬에 자연견이 있다.」라는 발표는 자연견 즉, 자연 선택견 개념이 문헌 상 국제적으로 처음 알려진 이후, 인공 선택견과 자연 선택견 개념의 설립이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2. 1937년 모리 다메조(森爲三) 보고서
모리 다메조(森爲三1884~)는 1904년 4월 도쿄제대(東京帝大) 이과대학 박물과(博物科)를 졸업하고, 1904년 4월 입교 중학교(立敎中學校) 강사, 1905년 2월 사가현립(佐賀縣立) 녹도중학교(鹿島中學校) 교유(敎諭)를 거쳐 1909년 4월 한국정부의 초빙으로 한국에 건너와 관립 한성고등학교 교수가 되었다.
모리 다메조의 스승은 한국 식물분류학의 대가인 나까이(中井猛之進) 박사였다.
모리 다메조는 처음에는 식물 연구를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승 나까이의 그늘에서는 도저히 빛을 볼 수 없다 생각하고, 중도에 동물로 전공을 바꾸어 담수어 쉬리를 발견하는 등 담수어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고 한다.
모리 다메조는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1935년 조선총독부직속 고적조사위원회 위원이 되고, 1937년 진도개에 대한 보고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총독부직속 보물 고적 명승 천연 기념물 보존회 위원이 되면서 그해 풍산개를 천연 기념물로 지정하기도 한다.
명저 진도견(김정호. 1979)에 ‘모리 다메조는 1936년 조선총독부 시학위원이자 고적조사위원으로 위촉 받아 전라남도 지방을 출장했다.
모리 다메조는 광주에 도착하여 "진도에 진도개라는 육지에서 보기 드문 명견이 있는데, 그 성품이 영리하여 해마다 많은 수의 개가 육지로 유출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라고 소개되었다.
그러나 모리는 「한국 남단 어떤 섬에 자연견이 있다.」라는 슈테파니츠의 1923년 이후 저술에서 이미 진도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끼다를 필두로 1930년대 초반에 이미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 된 기쥬견, 홋가이도견, 시코쿠견, 가이견, 시바견 등 6 견종이 모두 인공 선택견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모리가 진도개를 ‘옛날 석기 시대 의 사람이 기르던 개의 후예가 전해 내려온 조선 고유견’이라며 총독부에 보고한다는 것은 슈테파니츠의 ‘자연견’ 단어에 영향을 받았다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리 보고서의 ‘진도견과 일본견과의 관계는 내선 민족의 유래 발전 즉 내선 일체를 말하여 주는 유력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학술상 귀중한 개이다.’ 라는 문구를 문제 삼아, 진도개를 일본개와 동일 시 하였다고 호도하는 일부 의견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모리의 상기 문구 즉, ‘진도개는 석기 시대 개의 후예’는 학자의 양심에 거스르지 않는 당연한 논리이다.
순다 랜드(Sunda land 혹은 Sunda shelf)라는 개념이 있다.
홍적세 마지막 빙하기, 지금으로부터 약 12,000 년 전까지 동남아시아의 생물 지리 지역을 말하며,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자바, 수마트라, 오스트레일리아 북단과 대만, 한반도, 일본 열도 전체와 베링 해협까지 육지로 연결 된 시대이며, 지금의 동해는 순다랜드 시절 커다란 호수였다고 한다.
동해가 호수라면 지금의 현해탄과 일본 홋가이도와 러시아 캄차카 반도가 일본 본토와 한반도, 러시아를 연결하는 육교(陸橋)가 분명한 것이고, 지금으로부터 12,000 이후부터 8,000 년 사이 해빙기에 서서히 바닷물이 들어차며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모리의 ‘내선 일체’라는 말은 최소한 지리 생태학 또는 지리 생물학에서는 논리가 정당하게 성립한다.
그러나 ‘내선 일체’를 한일 합방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제 정부가 문제일 뿐, ‘진도개가 일본개보다 주둥이가 길다’라든지, ‘학술상 가치가 높다’라는 문구를 통해 모리의 진도개에 대한 내선 일치관보다 높은 학자로서의 품격을 읽을 수 있다.
<순다랜드: 호주와 한반도, 일본, 러시아, 아메리카 대륙까지 하나의 육지로 연결 됨>
순다 랜드는 고고학과 인류학, 언어학, 유전학의 연구를 통해 그 존재가 명확 해졌는데, 이를 통해 인류의 이동, 생물 종의 이동과 격리에 따른 형질 분리 등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는 인류보다 그 기원이 오랜 개들로 써는 먹이를 따라 해변이나 낮은 구릉을 통해 아무리 먼 거리라 할지라도 편안히 이동할 수 있었다.
오늘날 개에 관한 기원은 유전학의 고속 발달로 학자들은 최소 4만년에서 10만년 이전이라고 밝히고 있어, 순대 랜드 시대 이전부터 원시견 또는 자연견이라 부를 수 있는 조상견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조상견들은 바닷물이 들어차며, 육지와 분리되는 섬이나 고산 지역 등에서 지리적 격리를 겪으며, 이른 바 자연견 또는 원시견으로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원시견 또는 자연견들이 과거 순다랜드 지역에 분포한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원시견의 대표격이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딩고는 인도네시아를 거쳐 동남아 애버리지들이 가지고 들어 간 개라는 이론이 있으나, 호주 역시 섬으로 분리된다는 관점, 뉴기니 싱잉독, 보르네오 개, 수마트라 개, 스리랑카 개, 대만을 비롯 동남아 오지의 고산견 등이 매우 흡사한 외모를 가진 이유가, 순다랜드 시절, 이동이 수월한 하나의 육지에 존재한 유사한 집단이었다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순다 랜드 시절 진도 섬도 호주와 하나의 육지였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딩고와 진도개가 그토록 흡사한 외모를 가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그 외 상기 동남아 원시견들과 유사한 외모를 가지는 이유도 같은 원리로 충분히 설명된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그 존재 시기가 최소 일 만년에서 4만년 사이로 밝혀진 개의 유골들이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 유사한 이유와 진도개를 비롯 현존하는 원시견 그룹 과도 거의 흡사한 골격을 가진 점도 설명될 수 있다.
3. 1961년 이병상 논문
서울특별시 수의사 회 상무로 재직 중이던 수의사 이병상은 1961년 ‘퇴화 멸종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 진도견의 보호대책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대한 수의사 회지에 발표한다.
진도견(김정호. 1979)에 이병상에 대하여 ‘자칭 해방 후 서울에서 진도견 연구소를 경영하면서 50여 마리의 진도개를 길렀고 현지를 5 회나 연구 차 방문한 바 있었다.’라고 소개된다.
이병상은 2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논문에서 주로 경제적 소득 측면을 강조했으나, 처음으로 ‘표준서’라는 단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병상의 ‘진도개 표준’은 체고를, 수캐 55-60, 암캐 50~55 cm 를 기술하고 있고,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거름거리(步容보용)’ 같은 일본식 한자로 일관하는 점으로 미루어, 이병상의 진도개 표준서는 아끼다 표준을 복사(?)한 것이란 강한 의심을 갖게 한다.
뒤에서 상술할 것이지만, 2017년 현재에도 진도군 진도개 표준에는 1961년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이병상이 제시한 표준서의 언어 표현과 서술 방식이 아직도 약 90 % 이상 존재한다.
4. 1963년 최기철 논문
사범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최기철 박사는 1963년 ‘진도견(珍島犬)의 보호 대책(保護對策)’이란 논문을 발표한다.
동 논문을 통해 최는 ‘진도에는 과연 순수한 진도견이 남아 있는가?’ ‘이 순간에도 혼혈이 성행되고 있지는 않은가?’ 라며 처음으로 진도개의 혼혈 문제를 거론 하였고, 진도개 관리 주무관청에 관한 문제와 진도개 개량에 대한 언급을 하였다.
<진도견(珍島犬)의 보호 대책(保護對策) 中 최기철. 1965>
최는 논문에서 ‘신석기 시대의 주둥이가 긴 개……’라고 하고 있고, ‘진도견은 신석기 시대 인이 사육했든 개의 후예’라고 모리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런데 최는 [송남시대(宋南時代)의 무선(貿船)이 진도 근해에서 조난했을 때에 남긴 몽고견이라고 하는가 하면 삼별초 난 시(時)에 몽고군이 남긴 것이라고도 하고 이조 초기 진도군 지산면에 있던 국궁목장(國營牧場)(군마(軍馬))의 번견용으로 몽고로부터 수입한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필자 주: 국궁목장(國營牧場)은 ‘국영 목장’이 맞는 발음이나, 논문 그대로 올리는 점 참고)
우선 서울대 교수로 생물학 분야의 최고 석학의 논문이 학문적 근거가 전혀 없는 논리로 가득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남송(1127-1279)은 송 왕조가 여진족의 금나라 에게 1126년 정강의 변을 겪으며 화북 지방을 뺏긴 후, 종실 강왕(康王) 조구(趙構) (훗날 고종)가 양쯔강 이남 임안(항주)으로 수도를 옮기고, 농경에 집중하고, 해상 무역을 진흥시키는 중상주의를 채택하여 재 번영의 기틀을 잡는다.
남송은 신흥 세력 몽골(원)과 연합하여 1234년 금나라를 멸하지만, 45년 뒤 1279년 몽골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남송은 120년 간 존속한 금나라와의 합의에서 여러 차례 먼저 배신을 하고 금을 침공 하다가 패퇴를 계속하였으며, 몽골과 연합으로 금을 멸망 시킨 후, 일시적으로 몽골이 북으로 물러 간 사이 몽골과의 약조를 깨고, 금의 수도였던 개봉과 낙양을 손에 넣었으나, 이를 안 몽골군이 격노하여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남송은 몽골 평원을 장악한 쿠빌라이(원 세조)의 장수 바얀에 의해 1276년 수도 임안이 함락되고 1279년 마지막 전투지인 애산에서 패해 완전히 멸망한다.
고려 말 상황으로 보면, 삼별초가 제주에서 마지막 저항을 멈춘 1273년 이후 6년 만이다.
남송은 몽골(북원)과는 정치적, 군사적 대립 상황뿐 아니라, 풍습이나 의식주 생활은 물론 키우는 가축의 종류와 형태도 많이 다르다.
‘몽골인은 알곡으로 밥을 해먹지 않고, 산에서 잡은 토끼, 사슴, 멧돼지, 족제비, 염소, 황양, 야생마 등과 하원의 물고기 등을 먹었다.
가축으로는 양이 제일 많고 소가 그 다음, 말은 거의 도축하지 않는다.
요리법은 열에 여덟, 아홉은 굽는다.
마시는 것은 말 젖과 소, 양의 유제품이었고 맛을 내는 것은 소금 한 가지이다.’<송사>
북방 유목민들의 가축 위주의 삶에 비하면 남송은 주식은 벼, 토산물은 술, 소금, 사탕, 비단, 생강, 고량강 등이고 가축은 소, 물소, 산양, 돼지, 오골계 등이고 양은 기르지 않았다.
남송은 수렵과 유목의 북방족과 달리 해상 교역과 농경을 발달시키고, 숭문 정책을 펼쳤다.
여기서 남송 시대 고려와 무역 상황을 알 수 있는 국사 편찬 위원회 자료를 보면 [양국의 민간 무역은 남송에 이르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송이 금에 대한 대책으로 고려와 함께 금에 대항하려는 연여제금책(聯麗制金策)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왔으나 고려는 중립적인 태도로 적극성을 갖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려에 대한 송의 감정은 점차 악화되어 남송 고종 때에는 고려의 태도를 의심하여 고려와 통교를 꺼렸으며 때로는 고려 사신이 간첩행위를 하지 않나 의심할 정도였다.
이러한 영향은 다시 민간무역에도 나타나게 되어, 송 조정에서는 상인들이 동전을 가지고 고려에 가는 것을 금지하며 고려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이러한 국가 차원의 제재조치와 남송의 국제적 위상이 약해짐에 따라 상인들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그 결과 고려 명종 재위 27년 동안에 송과의 무역은 3회에 불과하였으며, 신종 7년간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희종 7년간에는 1회, 고종 46년간에는 2회, 원종과 충렬왕 때에는 각각 1회씩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삼별초를 진도에서 제압한 고려 원종 12년, 1271년에 거제도, 남해도, 진도, 장사도, 흑산도, 압해도 등 삼별초가 득세하던 큰 섬을 중심으로 섬 주민을 육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군현 관청을 폐쇄하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 하였으므로, 공도책은 항간에 회자되는 왜구의 잦은 침입이 원인이 아닌 삼별초의 근거지를 없애고자 실시한 것이다.
고려 말의 공도 정치는 조선 왕조에 들어 더욱 강화되고 전면화 되는데, 법으로 입도금지까지 규정하는 국가 ‘법제화’(이른바 공도정책)로 자리잡아 간다.
‘궁(宮)의 허락없이 몰래 섬에 들어간 자는 杖 1백대의 형을 받는다. 섬에 도피하거나 죄인을 은닉한 죄는 본국을 배반한 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린다’라고 엄하게 규정하였다.
조선이 공도 정책을 실시한 목적은 고려 말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던 삼별초를 탄압하기 위해 취했던 공도책과는 사뭇 다른 것인데, 조선 시대 해양은 이미 피폐화 되어 있었고, 바다를 근거로 삶을 영위하던 해양인들도 크게 쇠락해 있었으므로 그들을 탄압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가 공도를 국가의 정책으로 삼아 강력하게 추진했던 이유는 모든 백성들은 국왕의 지배와 보호를 받는 위치에서 편제 되어야 한다는 조선의 통치의 이념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에게 섬은 실질적으로 국왕의 지배와 보호가 미치는 통치의 대상이 아니었고 행정 편제의 대상에서도 배제되었다.
다만 왕권 내에 있는 조선의 영토라는 관념만 막연하게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만약 백성들이 섬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곧 국왕의 통치권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국가 탈출 죄 혹은 반역죄에 준하는 형벌이 가해졌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것은 조선이 철저하게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을 따른 결과라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명 태조 주원장은 연해 지역의 군벌과 원의 잔당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일체의 해양활동을 금지하는 해금 정책을 폈다.
당시 절강 지방의 염민을 규합하는 큰 세력을 형성한 장사성 세력이나 영파, 은주 등의 무역 항구를 점거하여 해상무역을 주도하면서 세력을 키운 방국진 세력 등이 주된 견제와 제거의 대상이었다.
주원장은 민간 상인의 해외 도항을 모두 금지하고, 원양선을 건조하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미 건조한 원양선도 국내 수송용 배로 개조하도록 명함으로써 해상 세력의 활동 수단과 무대 자체를 원천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명의 해금 정책은 궁극적으로 바다를 폐쇄하고 육로 라는 제한적인 통로를 통해 주변 국가와 조공 관계를 맺음으로써 대내적 안정을 추구하고 대외적 패권주의를 관철 하려는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주원장의 뒤를 이은 영락제는 정화로 하여금 1405년부터 28년동안 7차례에 걸쳐 인도에서 멀리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남해 대 원정을 단행하게 하였으니, 이로써 전대까지 중국 서해와 남해를 통해 성행해온 국제 해상 무역은 더욱 무력화 된다.
한편, 조선은 육로를 통해 명이 설정한 조공 체제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으므로 명의 해금 정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반면, 일본은 명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일본이 명․조선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바다를 통한 불법적 교역활동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고, 일본인들의 불법 행위는 점차 무력적 침탈 행위로 돌변해갔으니 이른바 왜구 라 불리는 해적 집단이 그것이다.
<해상의 활동과 문물의 교류. 김상기, 森克己, <日·宋と高麗との私獻貿易. 1959, 田中健夫, <東アジア通交關係の形成, 1970, <高麗史, 권 25, 世家 25, 원종 원년 2월. 10월>
이상의 시대 상을 통해 공도 정책으로 인해, 즉 행정 관청도 없고, 주민들은 모두 육지로 강제 이주 시켰으며, 섬에 몰래 입도한 자들에겐 반역죄에 준하는 처벌을 하는 상황이라면, 고려 정부는 물론 조선 왕조도 진도 섬에 군마 목장을 설치할 리도, 몽골 개를 수입해 갖다 놓을 이유도 하등 없는 것이다.
여기서, 몽골군의 전략 전술을 살펴보면, 몽골군은 전원이 기병이어서, 기본적으로 기습과 매복이 가장 중요했다.
문헌에 따르면 몽골말은 크기는 작아도 하루 평균 150 km 를 이동할 수 있고, 준마는 550 km 도 가능했다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보병의 하루 이동 속도의 10~30배에 달하는 엄청난 속도이다.
또한 몽골인들은 징기스칸이 젊은 시절, 생사의 기로에서 개 덕분에 살았다는 설도 있지만, 풍부한 단백질 섭취가 가능한 다양한 가축들이 있어, 개를 일체 먹지 않기에 식용 목적으로도 개를 데리고 전장을 누빌 이유가 없었다.
사료에 따르면, 몽골군은 후방 병참 부대의 보급을 전혀 받지 않고 ‘보르츠(소 한 마리를 잡아 건조시켜 가루로 만들어, 소 오줌보에 담은 건조 식량)’로 병사 한 명이 일년 동안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기습전과 속도전, 매복전 등을 중시하는 몽골군의 전술과 전략에서, 시끄럽게 짖을 수 있고, 말의 속도를 따르지도 못하는, 몽골군의 전투 방식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개를 데리고 다닐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 중기에 들어 서면, 농산물의 이동이나 군사용 등 소. 말의 수요가 많아지고, 조공 또는 수출 목적으로 말 목장을 운영하기 시작하는 데, 이를 근거로 몽골개를 수입해 ‘군마 목장용 번견’으로 이용했다는 일부의 관점이 있다.
그러나 명이 원을 대흥 안령 이북으로 몰아내면서, 만주 지역은 여진이 차지하고, 태조 이성계는 개국 10년이 지나도록 명으로부터 군왕의 책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명의 국왕 책봉을 목매어 기다리던 조선이 몽골개를 수입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몽골 비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몽골은 물론 고려나 조선도 몽골개나 여진개를 수입해 말을 지키는 번견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은 일체 없다.
최길성 교수의 초원의 말발굽(1993)은 1990년대 초, 몽골과 수교 후, 몽골 유목민의 삶의 방식에 대한 최초의 저술이다.
최는 ‘몽골 말은 거칠고 사나워 개로 말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말이 개에게 돌진하여 개를 쫓아 낸다’라 기술하고 있다.
최길성 교수는 몽골 초원 유목민들의 삶을 조사하고, 문헌 연구를 통해 몽골개가 말을 지킬 수 없다라고 결론하고 있다.
그렇다면 군마 목장 번견으로 몽골개를 수입, 이용한다는 것도 성립이 불가하다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다.
그리고 진도 섬의 군마 목장은 1392년 관찰사 김종서의 상소로 해남 화원에 있던 국영 목장에서 늘어난 수 천 여두 말 중 일부 600 여 두를 진도로 옮긴 것이다.
즉, 공도 정책 실시 후 121년이 지난 시점에 비로소 군마 목장이 진도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목장을 설치 했어도 여전히 진도에 주민 거주는 허락되지 않았고, 세종 19년 1437년에 비로소 진도에 관청이 설치되고, 해남과 영암에 이주 시킨 진도인 후손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 올 수 있었는데, 1271년 진도인들이 공도 정책으로 고향 진도를 떠난 지 무려 166년이 지난 후가 된다.
약간의 수고로운 문헌 검토와 진지한 고려가 있었다면, 성립할 수 없는 남송 무역선 난파설, 몽골견 유입설 등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생물학계의 태두로써 그 명성이 높아서인지, 최기철의 논문 [진도견(珍島犬)의 보호 대책(保護對策). 1965]은 정당한 검증이나 비판없이 고스란히 진도개의 기원이나 유래편에 확고이 자리잡게 된다.
조선 시대 남송과 교역 품목 기록을 모두 조사해 보아도 개가 교역품 중 하나였다는 기록은 전무한데, 지구 상 어디를 가도 개가 없는 곳은 없기에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다만, 청조에 들어 라싸 압소나 티베탄 테리어 등 청 황실의 개가 하사품으로 궁중이나 고관 대작의 집에 들어 오는 경우는 있었는데, 그 마저 육로를 통한 것이지 배에 실어 나르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망망 대해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에게는 유난히 금기와 미신이 많은데, 동서양 해양 문화 공통으로 고양이는 따로 밥을 주지 않아도 되고, 물품이나 식량을 축내는 쥐를 잡기 위해 승선을 시키기도 하고, 모르는 고양이가 배에서 발견 되면 길조로 여겼다.
반면, 개는 사람과 같은 먹이를 먹기에 개를 배에 승선 시키는 것은 오늘 날까지 철저히 배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금기 사항이다.
그러므로 문헌 검토나 과학적 근거도 일체 없는 남송 무역선 난파설이나 군마 목장용 몽골견 유입설 등은 논문에 수록되어서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그로 인한 후대의 피햬는 상상할 수 없이 크기만 하다.
최의 논문 이후 1979년 발행되는 ‘진도견(깅정호)’에서 최의 송남 시대 난파선 설이나, 삼별초 때 몽고군이 가지고 들어 온 몽골개 유입설은 보다 각색되어 그 폭을 넓히기까지 한다.
김정호의 ‘진도견’은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진도개 보호와 대책에 관한 행정적 편람 기록 방식의 귀중한 저술이지만, 1963년 최기철 논문에 수록 된 ‘진도개의 기원과 유래’에서 남송견이나 몽골개 유입 설에 대한 문헌 분석 없이, 그저 나열 인용에 그친 점은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5. 1969년 김종만 논문
전남대 농대 박종만 교수는 1969년 과학 기술처의 연구비 지원으로 ‘진도견의 대뇌 측정 치 연구’를 했다.
박은 1972년 과학 기술처에 보내진 연구 결과 보고서에서 진도군 내 사육 진도견 1/3 인 919 마리에 대한 체형 측정을 실시 하였다.
이 연구 보고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샘플을 기초로 진도개의 체형이 공식적으로 측정된 것으로써, 체고와 체장, 체고대 체장 비, 체중 측정을 하였는데, 특히 귀 사이 넓이(폭)와 귀의 크기 측정은 최초로 이루어졌다.
체고 대 체장 비는 개의 체형 측정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이므로 연구자들은 대부분 체고대 체장 비를 기술했다.
1937년 모리 다메조의 총독부 보고서는 수컷 100: 110~120(암컷의 체장비는 더 길다)이다.
1961년 전남 진도개 보호 대책 위원회(이병상 주도)은 100: 110으로 제시하였다. 구문과 전두장 비 1: 1
1965년 이상오는 수렵비화에서 진도개 체고와 체장비를 100: 125(저서에서는 4: 5)라고 서술한다.
1971년 박종만은 최대 치 100: 117.27, 최소 치 100: 114.32 로 발표한다.
1979년 문재창. 김상일 연구에서는 최대 치 100: 118.74, 최소 치 100: 114.52 로 발표 하였다.
체고 대 체장비 등 중요 지수는 뒤에서 다시 상술하기로 한다.
6. 1979년 김정호의 진도견(珍島犬)
진도개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저술 ‘진도견’의 저자 학고(鶴皐) 김정호 현 향토 문화 진흥원장은 예향 진도의 대표 지성으로 1937년 전남 진도 임회면 사평리에서 태어났다.
1956년 목포고, 1968년 조선 대학교 행정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선 일보 기자로 입사한 후 전남 일보와 광주 일보를 거치며 1980년대 초까지 저널리스트의 역량을 쌓았고, 1985년 전라남도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 된 후, 1998년 까지 전남 농업 박물관장으로 재임, 2001년 문화 관광부 21세기 문화 정책 위원, 2002년부터 목포 대학 객원 교수 등 진도 출신 대표적 지성인이다.
특히 그의 첫 저술 ‘진도견. 1978’은 오늘날까지 진도개에 관련한 모든 학자, 연구자, 심사자, 애호가들이 필독 도서로 인정하는 명저이다.
그의 저술 ‘진도견’의 진정한 가치는 저자의 개인 생각을 최소화하고, 철저히 저널리즘에 입각하여 편년체 방식으로 진도개 지정과 보호 정책의 연혁과 그 내용을 알려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리 다메조의 진도개에 대한 총독부 보고서 전문을 수록한 것은 저서 ‘진도견’의 백미라 할 것이다.
다만 모리 보고서가 ‘내선 일체’에 입각했다는 측면이 모리의 학자적 견해보다 부각된 것은 정치적 성향을 띄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기에, 옥의 티라 할 것이다.
또 하나, 진도개의 유래와 기원에서 1963년 최기철의 논문에 언급 된 ‘남송 무역선 난파설’과 ‘군마 목장용 몽골견 유입설’에 대해 고증에 철저해야 하는 저널리스트의 진 면목은 보이지 않았다.
‘진도견’에서 조금 더 진지하게 남송과 고려 간 대외 무역 상황에 대한 문헌 고찰이나 당시의 동아시아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남송 무역선 난파설은 저서에 기술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저서들을 보면 1985 ‘전남의 전설’, 1986 전남의 세시풍속, 1992 진도의 섬과 일본의 섬, 1993 향토문화의 이론과 실제, 1991 서울 제국과 지방 식민지, 1995 전남의 옛 지도, 1996 전남의 옛터 산책(상·중·하)이 있고, 그의 논문 중엔 ‘섬. 섬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고향 진도를 비롯한 섬이나 해양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차원에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진도견’에서는 문헌 고찰 등의 고증 노력의 부재는 그의 젊은 시절 첫 저술이어서 인지 깊은 전문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아마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명저 ‘진도견’에 대한 비판과 회의를 갖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진도견(김정호. 1978)’에 수록 된 진도개의 유래와 기원설을 다시금 검토하고 비판을 간단히 적는다.
(1) 중국 송나라 유입설 (960 - 1279)
중국 송나라 시대에는 한반도 남해안 지역과 빈번한 무역이 이루어졌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 상인들이 데리고 온 개들이 가까운 진도로 유입되었거나, 또는 구전에 의하면 진도 근처에서 송나라 교역선이 풍랑을 만나 침몰하였는데, 이 배에 실려있던 개가 진도로 헤엄쳐 건너와 그곳의 토착견과 혼배하여 진도개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비판:
1) 동서양 고금을 통해 뱃사람들은 여자와 개를 승선 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심청전’에서 보듯, 처녀를 산채로 수장시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은 동. 서양에서 일반적이었다.
2) 남송과의 무역은 고려 말엽이 되면 완전히 단절되다시피 한다.
남송은 고려에 원을 같이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고려 정부가 이에 응하지 않자, 남송의 고려에 대한 의심은 극에 달하게 되어 해상 교역도 근절한다.
3) 남송이 조선이 아닌 진도 주변 해로를 이용하여 일본과 교역을 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송사’를 비롯, 일본의 ‘일본 서기’나 ‘고서기’에 교역 형태와 교역 물품이 세세하게 기록될 것인데, 남송과 일본 교역품 가운데 개는 전혀 없다.
따라서 남송 무역선이 난파되어 배에 실려 있던 개들이 헤엄쳐 진도로 들어 왔다는 가설도 성립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혹 배가 바다에 빠진다 해도, 울둘목의 해류 속도는 시속 20 km를 달리는 마라톤 속도와 같을 정도로 거세어 개가 도저히 건널 수 없다.
물론 해류가 바뀌는 잠깐의 틈은 있지만, 그러한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다.
(2) 몽고견 유입설(1270 - 1273, 혹은 1392년경)
몽고견 유입설은 두 가지로 주장되고 있다.
첫째로는, 1270-1273년 고려의 삼별초군 정벌 때에 들어왔다는 설이다.
삼별초군은 몽고군에 의해 후퇴하면서 진도를 근거지로하여 저항하였으나 결국 전멸당하였고, 그때 진도에 몽고군이 주둔하면서 목양견으로 그들의 개를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그 개들이 진도의 토착견들과 혼배하여 오늘날 진도개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둘째로는, 1392년경 몽고로부터 유입되었다는 설이다. 당시 진도에 군마 종축장이 설치되었는데, 그 목장의 번견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당시 몽고에서 직접 수입해온 개가 진도 토착견과 혼배하여 오늘날 진도개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다.
비판:
1) 1271년 진도에서 삼별초를 멸한 즉시, 고려 정부는 관청을 폐쇄하고 진도 주민을 영암 시종면과 해남 삼산면으로 강제 이주 시킨 후, 입도를 철저히 금지 시킨다.
이후 1437년 공도 166년이 지난 후 세종 때 관청을 세우고 과거 진도를 떠난 섬사람들 후손들을 입도 시킨다.
해남은 공도 시절 해남과 진도인들이 모였다 하여 ‘해진군’으로 불렸다.
따라서 관청도 없고, 주민도 모두 이주 시켜, 공도가 된 진도에 몽골이나 고려 정부가 군마 목장을 설치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2)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개국 10년이 지나도록 명으로부터 군왕의 책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명의 국왕 책봉을 목매어 기다리던 조선이 이미 적국이나 다름없는 몽골과 교역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몽골개를 수입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송사’ 또는 ‘몽골 비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몽골은 물론 고려나 조선도 몽골개나 여진개를 수입해 말을 지키는 번견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은 일체 없다.
최길성 교수의 초원의 말발굽(1993)은 1990년대 초, 몽골과 수교 후, 몽골 유목민의 삶의 방식에 대한 최초의 저술이다.
최는 ‘몽골 말은 거칠고 사나워 개로 말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말이 개에게 돌진하여 개를 쫓아 낸다’라 기술하고 있다.
최길성 교수는 2년 여 몽골 초원 유목민들의 삶을 조사하고, 관련 문헌 연구를 통해 몽골개가 말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군마 목장 번견으로 몽골개를 수입, 이용한다는 가설도 성립 불가라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 될 것이다.
3) 저술에 나타남 1392년 몽골견 유입설의 실체는, 관찰사 김종서의 상소로 해남 화원에 있던 국영 목장에서 늘어난 수 천 여두 말 중 일부 600 여 두를 1392년에 진도로 옮긴 것이다.
즉, 공도 정책 실시 후 121년이 지난 시점에 비로소 군마 목장이 진도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군마 목장을 설치 했어도 여전히 진도에 주민 거주는 허락되지 않았고, 세종 19년 1437년에 진도에 관청이 설치되고, 비로소 해남과 영암에 이주 시킨 진도인 후손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 올 수 있었는데, 1271년 진도인들이 공도 정책으로 고향 진도를 떠난 지 무려 166년이 지난 후다.
그러므로, 명에게 철저히 사대하고, 몽골을 배척해야 했던 조선이 몽골개를 1392년에 수입할 수도, 수입할 이유도 없었다고 보아야 합리적이다.
(3) 한국 고유의 토착견이라는 설
구석기 시대나 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서식하던 야생 토착견이 진도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오늘날까지 혈통과 야성이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설이다.
필자 주: 이 논리가 가장 정확한 진도개의 기원설로 인정할 수 있다.
다만, 토착견이라는 개념은 영어 ‘토착종 landrace’인데, 주로 식물 종을 언급할 때 사용되던 용어이다.
물론 개에게 ‘토착견’을 사용할 수도 있으나, 토착 종의 성립은 50 세대가 지나면 보통 완성된다는 집단 유전학의 논리에 따른다면, 그다지 오래지 않은 품종도 토착종이 될 수 있으므로, 선사 시대라는 말과 같이 사용하기엔 많이 부족한 단어이다.
스테파니츠가 이미 ‘한반도 남단 어떤 섬에 자연견이 있다’라고 갈파한 것처럼, 진도개는 ‘자연견’ 또는 ‘원시견’으로 불러야 정당한 대우가 될 것이다.
(4) 구전설
진도의 어느 선비가 과거시험 공부를 위해 여귀산이라는 곳에 입산하였다.
이 선비는 입산하면서 흰 암캐 한 마리를 데리고 입산하였는데, 이 개가 매우 영리하여 주인을 따르며 보호하였다. 그러던 중 이 암캐가 발정이 났다.
산에는 수캐가 없었으나, 늑대가 자주 암캐 옆에서 놀면서 교미를 하였다.
그후 암캐는 새끼를 낳았는데, 황구, 백구, 흑구, 세 마리를 낳았다.
어떤 사람은 이 늑대를 숫여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새끼들이 진도개의 선조가 되었다는 내용이 진도 현지에서 구전으로 전하여 지고 있다.
비판: 말 그대로 구전 설화 이상의 가치가 없다.
진도에는 조선조 말, 일제 중엽까지 약 10 여 두의 호랑이도 있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늑대의 존재도 전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체군 즉, 진도개 집단이 형성이 되려면, 늑대와 교배한 한 마리의 암캐가 진도개의 조상이 될 수도 없고, 혹 그 세 자식들이 늑대와 또 교배하는 식으로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면, 이것은 개가 아닌 늑대라 불려야 한다.
이 소수 늑대개들이 진도개라는 개체군이 되려면, 똑 같은 현상 즉, 늑대와 개의 교배 상황이 진도 도처에서 수십 회가 동시에 발생해야 가능하다.
따라서, 이 구전설은 암캐가 늑대와 교배하여 늑대개 세 마리를 낳은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결론적으로 ‘진도견’의 진도개 유래와 기원설은 지금이라도 업데이트를 통해 수정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저술은 증보와 개정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지, 원문을 수정하지 못한다는 원칙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