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호의 ‘길 위의 정원’을 읽고
박 춘
며칠 전의 일이다. 평소처럼 오금공원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배드민턴 클럽 앞에 있는 철봉에서 안면이 있는 분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공원과 도서관에서 간혹 스쳐 지나치던 분이다. 말을 건네 왔다. “도서관이 휴관을 해서 심심하겠어요.” 그냥 지나가기 미안해서 “그도 일상이 되니 괜찮습니다.”했다. 그분이 “나도 책을 남만큼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모두 쓸데없어요. 책은 정보인데 잘못 전달된 오류도 있고 알수록 부담되는 것도 있고,...”(사회적 활용기회가 숨구멍만큼 좁아진 초로의 나이 탓으로 이해했다.) “책을 읽는 것이 정보도 소중하지만 이제는 나를 찾아가고 채워가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어도 좋겠지요.”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이런 대화는 왠지 부담스럽다. 부질없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그냥 그렇다.
‘길 위의 정원’을 펼치면서 문득 며칠 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초로의 나이란 한 시절의 끝 이기도하지만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떠오른 것이다. 초로의 세월이 되면 누구든 언 듯 언 듯 무의식일망정 생의 좋은 마무리를 바라고 원한다. 생의 좋은 마무리는 끝에 가까워졌다고 서성대고 있기보다 차라리 새로운 시작점으로 일상을 긍정하고 나를 찾아 나서고 채워 나가는 생활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글을 읽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쓴다는 것은 그러한 마음가짐의 최상의 덕목은 아닐까. 나 아닌 것들과 얽매이고 씨름하던 지난 삶에서 이제 나를 찾고 나를 채우는 것으로 접근하는 전환점 같은 것 말이다. 여기 나를 찾아가고 채워가는 글이 있다. 따라가 보자. 수필작가가 쓰는 글은 그가 찾아 나선 마음의 여로다. 겁劫이면 어떻고 해원解寃이면 어떤가.
양수대교위로 마디 벌레 같은 중앙선 전철이 철거덕거리며 달리고 있다. 강물은 유유하고 물결은 흐르는지 멈추어 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잔잔하다. 하늘에는 남색 바탕에 솜털 같은 하얀 구름이 떠 있고 구름의 자태가 강물 위에 내려앉아 강물과 한 몸이다. 양수兩水가 아니라 운수(雲水)라고 이름 붙이면 더 정겨울 것 같다. ...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말을 되새기며 발걸음을 서서히 움직이니 무수히 많은 생각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중략)
‘물의 정원’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 흐르는 물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물은 고이고 흐르는 곳에 따라 계곡물 강물 샘물 도랑물 등으로 이름이 붙지만, 모든 물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모를 세우지 않고 부딪치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 ... 말없이 흐르는 강물은 출생지가 어디였든 일단 몸을 합치고 나면 따지지 않고 오순도순 서로 가슴을 맞대고 마음을 합쳐 조용히 흐르고 있다.(중략)
‘마음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일찍이 부처님은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근심과 걱정거리에 갈팡질팡한 때도 있었고 마음과 행동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순간순간의 결정에 장애물로 작용했던 적이 많았다. ... 지나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닌, 한 주먹도 안 되는 자존심과 명예, 돈 욕심에.... 뒤돌아보니 수많은 욕심을 품고 살아온 것 같다. (길 위의 정원에서)
길과 물과 생각이 어우러진 글을 따라간다. 화자는 건강이 좋지 못해 갇혀 지내다 어지간해지자 몸을 끌고 북한강을 찾아 나선 길이다. 길과 물을 따라 걷고, 그것들이 주는 생각을 한 점 거슬림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길이라는 언어의 기의가 함축한 사색과 걷는 신체의 율동과 리듬이 주는 안정이, 물이 가져다주는 온유함과 버무려져 흘러간다. 하늘은 남색으로, 구름은 솜털처럼 떠있다.
관찰이나 발견이 새로운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팠고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에 새로운 시선에서 찾아내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아프지 않았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것들에서 전과 다른 시선으로 얻어지는 것들이다. 이렇듯 우리네 삶은 고뇌와 고통에서도 스스로 성장하는 정신능력을 지니고 있다. 어지간한 경우에도 어느 한쪽으로 편향하지 않는, 보이지 않은 균형감을 지니고 있다. 실은 인류가 생래적으로 타고난 사유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물은 물이다’라고 성철스님은 갈했다. 물의 광폭함과 물의 온유함만을 말하고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단 한 줄의 문장은 그가 사유한 우주와 존재, 그것들이 가진 모든 곡절과 의미를 포함할 것이다. 그것들이 가진 고유성과 존재의미를 극에 달한 단순함으로 압축시킨 말이다. 마찬가지로 화자는 ‘물의 정원’에서 물이 흐르고 모이는 자연스러운 태도, 물의 순응성에서 포용과 이해의 시선을 발견하고, ‘마음의 정원’에서는 풍경을 빌려 살아나온 시대와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 그윽한 산문의 여로다.
세상에 문학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모든 글은 관찰이자 발견은 아닐까. 인물과 사물, 사건에 대한 섬세하고 정확한 관찰에서 독자가 글에 끌려들어가는 이유일 것만 같다. 사물과 행위를 얼마만큼 어느 깊이만큼 정확하게 관찰해내었는가, 그것들이 가진 색상과 냄새, 소리와 질감, 온도까지 관찰하고 인식했는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도 글의 외재적인 바탕에 불과하다. 관찰한 형상들의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다. 그러한 세부묘사위에 시간과 역사의 해석, 작가가 이해한 시대모습과 시대의 도덕정신이 스며들어 숨 쉬어야 한다. 그것들을 글의 행간 속에 가능한 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흐르도록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작가만이 지닌 정서의 진수를 덧 씌워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조情操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글의 품위를 형성하고 아취가 서리도록 만들 것이다. 관찰된 장소와 인물과 사물들의 세부사항들이 작가의 생각과 어떻게 버무려 있는가가 글의 맛과 멋, 깊이를 좌우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수필역시 이러한 것들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는 중에 인용문을 사용한다. 어떤 경우는 불가피하기도 하다. 그러나 인용문은 양날의 칼이 되기도 한다. 흐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글의 품격을 돋우는 경우도 있지만 자칫 방해하는 수도 있다. 실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사유공간을 좁혀버리는 경우다. 범주로서, 보편으로서 최적이고 인구에 회자된 경구가 작가만의 생각을 찾아나서는 길을 막아버리고 대신해 버리는 것이다. 자신만의 생각을 끈질기고 정치精緻하게 추궁해야하는 것을 쉬운 결정으로 유혹, 몰아버린다. 어떤 경우는 독자의 몰입과 동행을 가로막기도 한다.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은 인용문보다 작가가 하나의 단어를 찾아 몸부림친 흔적이 고스라니 남은, 그만의 생각이 내포되어있는 글이 좋아 보인다.
“양수대교위로 마디 벌레 같은 중앙선 열차가 덜커덕 거리며 달리고 있다. 양수兩水가 아니라 운수雲水라고 이름 붙이면 좋을 것 같다.” (‘길 위의 정원’ 첫 문장)
마디벌레나 양수나 운수 같은 작가만의 정치한 탐구로 궁리한 은유의 문장이 글의 맛과 멋, 독특한 언어의 질감을 보여준다. 시적 감칠맛을 준다. 이런 문장을 읽을 때 심중에서는 무엇이 ‘쿵’하고 울린다.
가끔 손자가 혼자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간다. 하루하루 쑥쑥 자라는 것이 봄비 맞은 나무의 새순 같다. 나이가 여섯 살이 되었으니 이젠 말귀도 알아듣고 시키는 것을 곧잘 한다. ... 손자는 겉옷과 팬티와 러닝을 차례로 벗어 바닥에 펴고 반듯하게 사각으로 개어서 옷장에 차곡차곡 넣었다. 핏줄은 못 속인다더니 영락없이 제 아비 어릴 적 모습이다. 내 어릴 적도 그랬을까? (중략)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삭을 주워야 끼니를 이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도 아니었는데 할머니는 무슨 연유로 보리 벤 논밭으로 나를 내몰았는지 모를 일이다. ...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아금박스럽게 이삭을 주워 담는데 땀범벅이 된 몸에 까끄라기가 달라붙으면 어리고 여린 살은 무척이나 쓰라렸다. 게다가 목은 왜 그리도 마르든지... 간간이 동네 쪽에서 친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철아야! 에서)
지리산 노고단에서 화엄사 계곡 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은 청내에 이르면 잦아들어 낮은 구릉지대를 이루며 섬진강까지 이어진다. 너비가 시오리쯤 되는 이 구릉지대는 남원과 하동 쪽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 날이면 날마다 산으로 이어지는 나무꾼의 행렬, 내 어린 날의 잊혀지지 않는 고향 풍경이다. ... 이 무렵이면 할아버지도 지게를 지고 으레 그 행렬에 끼곤 하셨다. 할아버지처럼 자작농을 하는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대체로 이 행렬에서 빠지곤 했는데 할아버지는 겨우내 거의 쉼 없이 산에 오르셨다. (중략)
묵묵히 자식의 무덤을 보살피던 할아버지, 궁핍과 고통스러운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온갖 고초를 감수하면서 어엿한 교육자로 키워냈는데 하룻밤 사이에 변고를 당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 하였을까. 도둑맞듯이 잃어버린 자식을 차마 먼 곳에 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선산에 나란히 모셨다. (할아버지 나뭇길에서)
작품 ‘철아야’는 ‘가끔 손자가 혼자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간다.’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손자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유년과 할머니, 성장사의 장면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핏줄의 애착과 소망을 ‘나의 판박이 어린 손자, 나의 과거와 미래가 포개지는’것으로, 살아가는 근원적 심상이라고 규명한다.
‘할아버지 나뭇길’에서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화엄사 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은...’ 장소로부터 시작한다. 고향의 풍경으로부터 나무를 하는 장면묘사로 할아버지의 굴강한 삶을 재현해 내고 있다. 화자가 유년에 직접 보아왔고 경험한 사실들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곡진하고 염결한 생애에 다가간다. 그분들의 삶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투영되고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작품은 인물과 장소가 곧 글의 시작이자 끝마무리를 이룬다. 잘 짜인 장면으로 인물의 성격을 그려내고 장소에 대한 세부적인 상황묘사로 인물이 행하는 행위들에 분명한 특성을 제시하고 글의 분위기와 풍미를 보탠다. 외재적 현실 풍경들에 내부세계를 내포시켜 보여준다. 삶의 모습이 인물과 장소, 장면에 대한 세밀한 관찰에 의해 응축된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결국 글의 진수는 사실관계라기보다 작가가 재구성한 이야기에 독자의 감정이 이입되어 가는 질과 양에 있다.
작가는 책머리에 ‘할아버지는 열두 살의 어린 나에게 지게를 만들어주셨다. 마소도 귀했던 시절이라 일손을 도우라고 그러셨을 것이다. 나를 농사꾼으로 만드시려나, 걱정하면서도 태어나 처음으로 가져보게 된 ’내 것‘이 신기했고 자랑스러웠다. (중략) ... 나마저 이대로 세상을 떠난다면 누가 그분들의 쓰디쓴 이야기를 기억해 줄 것인가.’라고 적었다.
엄혹한 시대 한 가계를 계승 이어가야 하고 가정을 책임져야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고 손자에게 자애와 자존을 동시에 알려주어야 했을 할아버지였다. 손자의 부재한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되어 주어야 했다. 저버릴 수 없는 생의 소망과 목적, 목표를 지니도록 길러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성실한 삶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필집 ‘길 위의 정원’에는 ‘향연’과 ‘기억의 땅’과 같은 시대사와 가족사에 얽힌 비극의 애환이 서릿발처럼 뾰쪽하고, ‘유년의 지층’과 ‘골목에서 태어나는 소리’와 같은 기억의 세계가 웅크리고 있다. ‘백두산 가는 길’ ‘섬진강 포구기행’같은 기행수필도 유장하게 흐르고, ‘그의 소리를 살피다’와 같은 반생의 동거를 소략한 반추의 시선으로 그린 글도 그윽하다. 수필집에 실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이 대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가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부재와 결핍조차 그렇다고 한다.
아무리 억울하고 서러운 죽음도 세월이 지나면 범사일 것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승을 떠난 것도 이제 내겐 슬픔보다 돌아가 편히 쉬시리라는 위안으로 다가온다. 산자락 여기저기 자리 잡은 둥그런 봉분이 다 편안한 쉼터로만 보인다. (‘할아버지 나뭇길’에서 가져옴)
무슨 말을 보탤 것인가 보탠다면 보태는 족족 감정의 덧씌움에 불과할 것이니.
‘할아버지 나뭇길’의 마지막 문장으로 부족한 내식의 감상문을 닫는다. 더불어 수필집의 출간을 축하드리고 글의 세계를 엿보게 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2020년 3월)
첫댓글 박춘선생님의 예리한 시각에 모골이 송연함을 느낍니다. 저의 글에 몇배나 더 명문으로 평을 써 주셨네요.
한 편 한 편에서 쏙 쏙 뽑아 낸 칼날 같은 어휘로 칼질 하듯 이어간 칼칼한 되새김이 소름 끼치듯 합니다.
아하! 글을 함부로 쓰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예리한 눈이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다가 독사가 혀를 빼내서 먹이를 낚아 채는 것 같은 상상이 머리를 치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분만 빼내어 치사해 주시는 능력이 탁월하십니다.
앞으로 허술한 글을 쓰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좋은 평을 해주시어 저의 작품집이 더욱 빛나게 해 주시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안 하십시요. 임 철 호 드림
분명 지금 제 얼굴은 붉을 것입니다. 귓불은 따끈따끈합니다. 제잘난 맛으로 쓴 그냥 제 식의 독후감입니다.
항상 부족합니다. 그래도 책을 선물해주신 정성을 생각하면 떠 오르고 생각드는대로 부족하지만 써 드려야지 합니다. 과분한 칭찬에 정말 부끄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절이 하수상합니다. 건강 유념하십시요.
임철호 작가와 박춘 평론가의 주고 받은 덕담이 코로나19로 어두어진 저의 마음에 백촉짜리 전등을 켜줍니다. 자고로 좋은 글에는 좋은 평이 따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시켜줍니다. 두 분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늘 마음써서 살펴주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