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1일 ·
박도 스테디셀러 소개 (6)
전쟁과 사랑 - 눈빛출판사
[작가 후기] 평생 쓰고 싶었던 작품
나는 이 한 편의 작품을 쓰고자 76년을 살아왔다.
몇 해 전, 고향의 한 서점(구미, 삼일문고)에서 나의 신작 북 콘서트가 열렸다. 그날 행사장에는 장세용 당시 구미시장까지 참석하여 초라한 한 귀향자를 반겨주었다. 주최 측은 행사 마지막 순서로 ‘작가와 대화 시간’을 마련했다. 고향의 한 후배가 나에게 질문했다.
“작가님의 희망이랄까, 앞으로 목표는 무엇입니까?”
“노벨 문학상을 받는 일입니다.”
그렇게 서슴없이 곧장 답변을 하자, 장내에서 갑자기 박수가 쏟아졌다. 이후 나는 그 말에 족쇄가 됐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노벨상이 별갠가’ 하는 오기까지도 일어났다. 그래서 젊은 날 읽었던 역대 노벨문학상 작품들을 다시 펼쳐봤다. 결론은 ‘나도 그런 작품은 쓸 수 있다’는 자긍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래서 독한 마음으로 쓴 작품이 『전쟁과 사랑』이다.
작가는 모름지기 평생을 두고 꼭 쓰고 싶은 작품이 있다. 나에겐 『전쟁과 사랑』이 그런 작품이다. 우리나라 어느 고을인들 가슴 아픈 이야기가 없으련만 내 고향에는 유독 많았다. 나는 유소년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자랐다. 안방 할머니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46년 10·1 항쟁 때 한 신문지국장(박상희 선생)의 죽음, 옆집 김 목수, 오거리 고물상 공 영감, 장터 참기름집 아들 등이 해방 전후 시기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6·25전쟁 도중 인민군과 함께 실종 된 이야기를 깊은 밤 이불 속에서 몰래 들려주셨다.
그때 나는 그런 얘기들을 나중에 글(소설)로 쓰고 싶었다. 나는 대학 진학 때 상대나 법대로 가라는 집안 어른의 말씀은 아예 듣지 않고 굳이 문과대 국문학과를 선택했다. 어린 시절부터 늘 마음속에 고향을 비롯한 우리나라 산하 여기저기에 배어 있는 애달픈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공도 쌓지 않고,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예순이 접어든 나이에 천만 뜻밖에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가게 됐다. 나는 거기서 6·25전쟁 사진을 수집하던 가운데, 한 어린 인민군 포로 사진을 보고 그가 너무 어리기에 매우 놀랐다.
아무튼 그 사진 한 장이 계기가 돼 이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의 구상에서 퇴고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의 도움을 받았다. 1965년 대학 교양학부 시절 조동탁(조지훈) 선생은 강의 시간이면 당신의 자작 시집 <역사 앞에서>를 펼치고서 굵은 목소리로 자작 시를 낭독해주셨다.
그 가운데 6·25전쟁 당시 종군 시 ‘다부원에서’ ‘너는 지금 38선을 넘고 있다’ 등에서 받은 그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또, 대학 3학년 때 국문학과장 소설가 정한숙 선생의 <창작론> 강의시간에 틈틈이 후배요 제자들에게 대작을 쓰라고 담금질을 했다.
“한국인은 지난 6·25전쟁으로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이 땅의 작가에게는 크나큰 축복이다. 국토 분단에다 골육상쟁의 전쟁, 이보다 더 좋은 작품 제재가 어디 있느냐? 너희 가운데 누군가가 6·25전쟁을 깊이 공부하고 대작을 쓰라.”
나는 1969~1971년 전방에서 소총소대장으로 복무를 했다. 최전선에서 날마다 대남·대북 방송을 들으며, 매주 수요일 수색 작전 때 휴전선 철책으로 넘어오거나 넘어가지 못한 대남·대북 선전 전단을 포대에 수거하면서 왜 동족끼리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하는가에 대해서도 군복을 입은 사람답지 않게 몹시 분개했다.
1997년 9월, 나는 정한숙 선생의 마지막 길에 유해관을 운구하면서 고인에게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 제가 6·25전쟁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겠습니다.”
“그래, 박도! 내 말을 여태 잊어버리지 않았군. 고맙다. 작가는 바둑판(원고지)을 메울 때가 가장 행복한 거다. 자네가 통일로 가는 길에 징검다리가 되는 대작을 쓰라.”
관 속의 스승 님이 벌떡 일어나 내 등을 두드리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 작가대회에 참가했다. 그때 북녘 동포들과 손잡고 그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우리 사이에는 분단의 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한반도를 에워싼 강대국들과 남북의 지도층, 일부 기득권 자만이 분단의 벽을 더욱 공고히 쌓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에 겪은 나의 6·25전쟁 체험이 밑바탕 됐다. 게다가 항일유적지 답사로 고향에 갔을 때, 구미중 허호 선배가 임은동 왕산 생가는 6·25전쟁 중 인민군 전방 야전 병원이었다는 얘기, 구미 형곡동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 강구휘 경북도의원의 당시 증언도 집필에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어린 시절 구미 가축병원 조수 김준기(본명, 김윤기) 아저씨는 아예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그렸다.
많은 분들이 소매를 걷고 도와주었다. 나는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이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의 지리적 배경은 내 발로 일일이 샅샅이 답사했다. 국내는 빠짐없이 어떤 곳은 두세 번 답사 하기도 했다. 의정부 곧은 골의 미 제2사단은 여태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부대 앞 녹슨 철길에는 양공주들의 껌 씹는 소리가 ‘찍찍’ 들려오는 듯했다.
북한은 금강산을 세 차례 탐승한 것과 2005년 남북작가대회에 다녀온 게 많은 도움이 됐다. 미국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배후 진상규명을 위한 방미와 6·25전쟁 사진자료를 수집코자 이후 3차에 걸친 추가 방미로 LA, 뉴욕, 워싱턴, 군사도시 버지니아 주 노퍽 등을 두루 살펴본 바, 거침없이 쓸 수 있었다.
한반도 허리를 무지막지하게 자른 분단의 세월이 어느새 70년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휴전선 철책은 아직도 요지부동, 걷힐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2015년 2월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바, 이를 다시 『전쟁과 사랑』이란 제목으로 대폭 개작하여 새로이 펴냈다. 세계 유수한 명작들도 여러 차례 개작 끝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알고 용기 백 배 젖 먹던 힘은 물론, 내 모든 경험과 지혜, 그리고 열정을 다 쏟아부었다.
이 작품이 조국 통일에 물꼬를 트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전쟁과 사랑』이라는 카펫을 짰다. 삼가 통일 제단에 이 작품을 바친다.
마침내 탈고한 원고의 글자 수 보니 30만 여 자다. 내가 이 작품을 쓰고자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 글자는 아마도 그보다 열 배는 넘을 것이다. 이 작품을 출판사에 넘긴 뒤, 너댓 차례 교정을 보면서 주룩주룩 눈물을 쏟았다. 저자가 울지 않고서 어찌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으랴.
나는 불효자다. 평생 평화 통일론자로 어렵고 힘들게 이 세상을 사시다가 하늘로 간 아버지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 그리고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내가 끝내 이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준 아내와 인문이 매몰돼가는 이 세태에 두 번이나 책으로 엮어준 이규상 눈빛출판사 대표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기까지 쓰자 문득 나는 ‘이제 죽어도 좋아’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실을 다 뽑은 누에처럼. 이 작품 『전쟁과 사랑』은 두고두고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르게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것이다.
또한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끝내 약속을 지킨 지고 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오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으리라 믿으면서 마침내 긴 이야기의 마무리 마침표를 찍는다.
2021년 여름 원주 치악산 밑 ‘박도 글방’에서 박도 올림
*사진 설명 ;
왼쪽 위 : 작품 표지
왼쪽 아래 - 이 작품 창작 계기가 된 인민군 포로 사진 (1950. 8.)
오른쪽 위 - 워싱턴 D.C. 몰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 기념 모형.(2007. 11.)
오른쪽 중간 - 남녘 대표단 방문으로 분주한 북한 묘향산 보현사 경내 (2005. 7. 작품 배경지)
오른쪽 아래 - 백두산 장군봉에서 바라본 조국 강산(2005. 7.)
Jeong Eun Lee
어린시절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불후의 명작으로 승화시킨 마가렛 미첼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십니다.
저는 《전쟁과 사랑 》
이 작품을 노벨 문학상 추천합니다. 그럴만 한 충분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박도
Jeong Eun Lee 열독해 주시고 성원조차 해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